이 글월은 직지지기 김민수가 여기 저기에 올리는 글월을 모아둔 글광입니다. - 2009.10.4 [김 민수]]
직지지기 김민수의 글월 모음
겨울 북해 보러 간 Oostende, Belgium /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늘 집사람의 "가자!", 하는 소리에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준비를 하고 나갑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하지만 밖은 주적 주적 비가 내립니다. 그래도 어제 일기 예보 상으로는 분명히 오늘 낮에 해가 뜬다고 했으니, 이불 속에서 나와Leuven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집사람이 알아봐서 요즈음에 제일 싸다는 기차표를 사서 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Shoppingbiljet’를 영어로 번역하면, ‘shopping ticket’, 즉 연말 연시에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면서 장보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파는 싼 열차표입니다. 저희야 뭐 달리 살 것은 없지만, 그냥 기차 값 싼 맛에 돌아 다닙니다. 대략 두 시간 반 정도의 거리를 왕복하는데 9€면, 정말로 싼 가격입니다. 게다가 Belgium 안에서는 아이들 교통 요금은 다 공짜니까, 결국 온 가족이 18€ (한화로 29,385원)로 주말 여행을 하는 꼴이니, 정말 싼 겁니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기차 승강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들어오는 기차.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일요일이라 그런지, 그도 아니면 비가 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열차 안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열차 한 량을 장악(?)하고 평행봉을 하면서 놀았겠습니까? 거희 우리집 전용 칸.
기차안에서 찍는 아이들 사진입니다. 처음 사진은 용은이, 사진 찍을 때 "웃어봐", 하면 이런 표정이 됩니다.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찍는 게 더 낫겠다 싶습니다. 다음 사진은 용훈이, 물병을 사이에 두고 제법 진지해 보입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 일기예보에서 말한 대로 비는 그치고, 어느 새 해가 떠서 나무 위에 걸리었습니다. 달리는 기차안에서 찍어서 그런지 동그랗게 안 찍히고 빛이 퍼져보입니다.
드디어 Oostende에 도착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많으면, 그 장점 중 하나가, 한 두 사람 빠져도 그럭 저럭 가족 사진이 된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용욱이가 빠졌고, 용훈이는 무엇 때문이지 등이 90도로 휘었습니다. 찍사인 저를 빼고 나니, 결국 여인들만의 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사진은 Oostende 기차역 앞에서 바라본 도시 모습입니다. Europe의 도시에서는 늘 교회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역 앞에는 어느 나라건 바닷가 어촌에는 늘 있는 것 같은, "어부의 아내" 동상. 총 5인의 여인상입니다.
아마도 Europe도시의 특징이겠지만, 동네에 사람 많은 곳이면 꼭 있는 교회의 모습을 지나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찍어 봤습니다.
용원이가 갈매기를 쫓아보지만 달아나지 않자, 조금은 허탈해 하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런지 갈매기도 사람을 별로 안 무서워 하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갈매기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 하는가 봅니다.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 하는 푯말이 있는 것을 보면, 거꾸로 생각하면 먹을 것을 던져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 집사람은 여기에서 "우리 나라 같으면 새우깡이 그려져 있을 텐데, 여기는 French Fries가 그려져 있네?", 라고 합니다.
원래 이곳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잡을 때에는, 이곳에 있는 박물관을 먼저 구경하고 바닷가로 가는 것이었으나, 비수기에는 박물관이 토요일만 문을 여는 고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관광정보관을 찾아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가는 길에 걸린 식당 하나. 듣기로는 홍합과 French Fries가 이곳의 별미라고 하는데, 이 집 장식은 망치 상어로서 좀 독특한 편입니다.
이 건물은 이 동네의 지도를 구하고, 이런 저런 여행 정보를 받은 관광정보관입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바다로 향했습니다. 해가 떴다고는 하지만, 그늘은 제법 추웠고, 또한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바닷가 모래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동상인데, 남녀가 즐거워 하며 함께 춤추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자연과 아이는 늘 그러하겠지만, 자연의 일부인 바다에 풀어놓으면 알아서 노는 아이들. 그런데, 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모습이 잡혔습니다. 이름하여 <북편제>.
소리를 얻기 위하여 먼 길을 방랑하는 남매가 있었으니, 오늘도 오빠는 앞서거니, 오누이는 뒷서거니 하면서 북쪽 바닷가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빠가 말하기를, "나만 따라 오너라!"
동생이 말하길, "오라버니, 그래도 물길이 참 험하네요."
오빠 답하길, "걱정말고 나 하는 대로 따라 오너라".
"이렇게 말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두 오누이는 또 다른 곳에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던 동생을 만나게 되어 즐거이 놀게 되었는데...
그러나, 소리 공부는 어려운 길이라, 사사로이 동생의 출현으로 멈출 수는 없는 일. 누이는 동생을 떨구어 놓고 길을 계속 가버리고, 동생은 물이 막혀 함께 가지를 못하는구나... 아 애닯도다.
오빠든, 동생이든, 다 필요 없고, 소리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니, 나는 간다 ‘비닐’ 가방에 바람 담고, 조개 담으러; 소리는 울림통이 좋아야 하느니라...
"누나, 나도 같이 가!, 내가 북 쳐줄 께!"
이러는 사이 세 자식을 소리 공부로 떠나 보낸 어미는 남아 있는 막내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와서 "애들이 그새 다 어디로 가고, 남편은 언제나 오나? ", 하면서... 하염 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구나...
이상 <북편제> 영화 끝.
그런데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바다 쪽으로 그림자가 비추는 것은 조금 색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바다 바람이 너무 매섭고, 춥기도 하고, 아이들 신발이 바닷물에 젖어서 일찍 돌아가기로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무수히 보이는 술병들. 기와집님, 한 번 오시면 일년 치 벽 장식할 각양 각생의 병 구해 가실 수 있겠습니다! 얼렁 오세요~
돌아오는 길에 하도 허전해서 수족관 하나를 봤는데, 별 볼 것이 없어서 그곳에서 찍은 사진은 생략합니다. 아래 사진은 허기진 배를 French Fries로 채우고 있는 가족들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차역으로 돌아오는데, 다시 보니 부개교도 있어 보이고, 수문도 있고, 여름에 배들 많이 오가고 할 때에는 이 다리도 번잡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기차역에서 그럭 지럭 시간을 보낸 후, 급작스레 탄 열차를 타고 도착한 Leuven역에서 근무 자세가 너무나도 확실한 승무원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장 찰칵.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온 가족들이 급작스레 열차를 탄 이유는 가장의 생리적인 현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바닷가에 가기 전에 네 가족이 화장실 가는데, 0.5x4 = 2€, 그리고 기차역에서 또 다시 네 가족이 화장실 가는데 0.4x4=1.6€, 다해서 3.6€(한화 5,877원)를 썼는데, 이 집안 가장이 더 이상 화장실 가는 데 돈을 쓸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고, 동시에 꼭 통시에 가야만 하는 운명(?)적인 상황에 처했는데, 마침 기차 출발 시각까지 3분 여 남짓 남아 있어서, 아무 생각 않고 바로 열차로 돌진, 그 안에서 해우를 했다는 소문입니다. 뭐 믿거나 말거나지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공중 화장실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차역에서 바라본 Leuven의 또 다른 길. 보는 각도가 다르니 길의 느낌이 다릅니다.
사람이 어디에서든 먹고 자는 곳이 고향이고 집인지, 이제는 임시 거처 가까이에 있는 이 동상만 보여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집에 다 왔다!".
바닷가에서 소리 봉지에 주워온 조개 껍질을 씻어서 보여주는 용원이.
어, 꼬막 껍데기 색 정말 예쁩니다.
색깔도 정말 다양합니다요.
이 조개들은 다들 색이 다르네요?
그리고, 이 조개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단상이 하나 있는데, 그 글은 곧 따로 올리겠습니다.
우공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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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은 물, 늘 궁금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어릴 적부터 팥죽을 끓이든, 라면 물을 끓이든, 그 액체가 끓은 모습을 한참을 넋을 잃고 들여다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뭐랄까요, 전 자연이 참 단순한 원리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무척 다양한, 정말 똑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에 늘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무수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면에 있는 하나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물리를 전공으로 선택 했겠지요. 주위 사람들은 저보고 다 과 바꿔서 좋은 대학 가라고 할 때, 저는 학교를 바꿔서 물리과를 고집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물리과 학생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서생이지만, 그래도 자연에 대한, 그리고 물리에 대한 애정은 아직도 남다릅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애정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어가는 재미, 또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때 마다 "참 기분 좋다!", 하면서 머리가 상쾌해 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잠깐의 상쾌함 다음에는 늘 머리에 쥐가 더 오래 나지만요.
오늘 2010년 1월 15일, 드디어 끓는 물이 보여주는 현상을 설명하는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물론 실마리를 찾았다고 해서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그 느낌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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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은 정보는 Bénard cell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If we progressively increase the temperature of the bottom plane, there will be a temperature at which something dramatic happens in the liquid: convection cells will appear. The microscopic random movement spontaneously becomes ordered on a macroscopic level, with a characteristic correlation length. The rotation of the cells is stable and will alternate from clock-wise to counter-clockwise as we move along horizontally:
......
Moreover, the deterministic law at the microscopic level produces a non-deterministic arrangement of the cells: if you reproduce the experiment many times, a particular position in the experiment will be in a clockwise cell in some cases, and a counter-clockwise cell in others. Microscopic perturbations of the initial conditions are enough to produce a (non-deterministic) macroscopic effect. This inability to predict long-range conditions and sensitivity to initial-conditions are characteristics of chaotic or complex systems (i.e., the butterfly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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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명만으로도 참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의 끈끈한 연결이 보이는데, 이 글월에 소개된 다른 누리터에서 보여주는 그림에서 전 완전히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물론 그 다음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지만요. 거기 주소는 <Rayleigh-Benard Convection Cells>; 그리고 오른쪽에 보시는 것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 This type of convection pattern occurs in a relatively shallow layer - this could mean a layer of fluid 1 millimeter thick in a petri dish, or the first 2 kilometers of the Earth's atmosphere
즉, 이 이론으로 끓는 물부터 지구의 대기 운동까지, 설명하려는 대상에 맞게 다양한 적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이런 육각형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납니다. 왼쪽에 보시는 것처럼 눈도 보면 그 결정 구조가 육각형이지요. 얼음도 어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육각형 모습이 나옵니다. 벌집까지도 육각형인데, 왜 하필 육각형일까? 암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어느 유체에서든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고, 유체랑은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곤충이 짓는 벌집에서도 보이기 때문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공간 채우기(fill the space)”. 하지만, 이차원 평면이 아닌 공간을 채우는 도형은 없습니다. 평면을 채우는 것도 왜 삼각형, 또는 사각형 꼴이 아니라 육각형 꼴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육각형>에 있는 정보에 따르면 아마도 우리가 축구공에서 자주 보는 모양인 truncated icosahedron
1가 공간을 채우기에 가장 적합만 도형 같습니다만, 이 또한 육각형과 오각형의 조합이라서, 순수히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제가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실토하든지, 불가지론으로 가는 길 밖에 없어 보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 "우리는 무지라는 넓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지식이라는 좁은 땅위에서 살고 있는데, 지식을 넓힐수록 무지와 접하는 경계가 넒어지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이야 말로 진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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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pe 때문에 삽질(?)한 이야기
이 글은 아마도 그 뿌리가 2009년 10월 22일 날, "컴퓨터,아이팟,과학기술" 게시판에 방장님이 올리신 <skype(스카이프) 사용을 권하며...>라는 제목의 글에 있다고 할 것 입니다. 그때에 제게 처음으로 Skype를 쓰겠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Skype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는 1995년에 나온 <VoIP>뿐 아니라, <P2P>가 결합된 형태의 기술을 쓴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집중적인 client-server 체제보다는, 분산적인 체계를 좋아하는데, 마침 skype가 그런 체계였습니다. 어째 맘에 들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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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간에, 그 동안 도통 이런 유목문화적 기술에는 무관심 하던 제가, 이번에 Belgium으로 이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히 기존에 쓰던, 거주지 중심으로 돌아가는 붙박이식 전화 연락망 번호가 한차례 바뀔 운명이 되면서, skype가 제공하는 '시공초월' 기능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행복하게 잘 쓰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는 상업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저에게 정말 끔찍한 경험을 안겨주고야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제 기술에 대한 무지와, 무계획적으로 저지르는 일들이 고생을 불러온 것이지요.
이 글 읽으시는 분은 그런 경험, 고생하지 마시고, 그냥 제 최종 결론으로 돌진 하시어 귀한 시간과 돈을 절약하시기를 바랍니다.
Skype로 전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headset을 장만하기로 한 것은 정말 우연하게, 이번에 Belgium 면접과 가족 여행, 그리고 한국 여행 이후에 적립된 항공사 누적 거리가 사진에 보시는 Sennheiser 제품을 공짜로 받을 만큼 되면서, 앞 뒤 재보지 않고 무작정 그 제품을 신청을 하면서 였습니다. 그런데 제품이 도착한 날, 무슨 신기한 장난감인가 보다 하고 개봉하자 마자 이런 저런 물건을 가지고 사방으로 흩어진 아이들을 불러 다가 족쳤을 만큼,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부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그런 의심을 할 것이, headset에서 나오는 줄 끝이 끝나는 느낌이 없이 그냥 오른쪽 그림에 있는 것처럼 생겨 먹었으니,
거기에 맞는 다른 쪽 줄 + mic/speaker에 꽂는 둥그런 단자를 찾았던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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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범인이 아닌 것 같아 누리터를 뒤져보았더니 제품이 원래 그렇게 나오는 거였고(이런 나쁜 스키들…), 다른 쪽 단자는 본인의 필요에 맞게 구입을 하라는 겁니다(궁시렁 궁시렁... 에이 상업 자본주의 더럽다!). 그래서 또 다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Amazon>에서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것 같은 다른 쪽 단말기를 구입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 까지도 Amazon VisSa 적립해서 받은 선물권으로 돈 안들이고 샀습니다.
사람들이 예로부터 공짜라면 농업에 그렇게 중요했던 소도 잡아 먹었듯이, 지금도 공짜라고 하면, 가격이 좀 싸다고 하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마치 도통한 사람처럼 물건을 쉽게 사 버립니다. 제가 딱 그 짝이 났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단말기가 드디어 집으로 배달이 되던 날, 저는 제 머리를 벽에 찧으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한 쪽 끝의 둥그런 숫놈 단말기 지름이 2.5mm로 PC mic/speaker 암놈 크기인 3.5mm와는 속 궁합이 안 맞는 놈이었던 것이었습니다(으이 C, 이거 나 바보 아냐?).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제가 싼 맛에 산 Nokia 손전화에 꼽아서 hands-free로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근데 이제 그 전화기 쓰지도 않을건데, 무슨 이런 comedy가 있냐 이거?).
그래서 이번에는 정신을 좀 가다듬고, 있는 것과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을 나름 정확하게 따져서 부품 두 개를, 이번에는 정말 피 같은 돈을 주고 주문을 했습니다. 다들 아시지요, 궁합을 잘 맞추려면 중매쟁이들이 잘 들어서야 하는 거. 이름하여, "Stereo 2.5mm Female To 3.5mm Male Adapter"
, 그리고 "3.5mm Stereo Jack Y-Splitter Female-Male-Male C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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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을 보시면 감이 오시겠지만, 제 머리 속 계획은 “headset -> terminal -> 2.5mm stereo jack male -> 2.5mm female to 3.5mm male -> 3.5m female -> two 3.5m males”처럼 연결을 해서, 한쪽 선은 PC나 Notebook에 있는 microphone 단자에 연결하고, 다른 한쪽 선은 speaker 단자에 연결을 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한 가정은, stereo 선이 mono선으로 갈려서 headset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암튼간에, 처음에 공짜로 시작한 것이 결국 이렇게 돈을 쓰게 만들고, 머리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꼭 될 것임을 확신하고, 다시 한 번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모든 중매쟁이들이 도착한 날, 드디어 궁합을 맞추는데, 아뿔사! Skype에서 시험으로 보내주는 소리는 들리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상대편에게 전달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학도의 기본인 실험에 들어가게 됩니다.
집에 있는 모든 microphone, 특히나 집에 있는 소형 녹음기에서 아주 감도 좋은, 잘 작동하는 microphone까지 다 꺼내놓고 이런 저런 실험을 해 본 결과, PC/Notebook에 있는 mic 단자로는 소리가 원래 안 들어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거참 이상타...)?
그래서 결국 다 포기하고, USB headset을 다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USB로 하니까, 소리가 마침내 오고 가고 하더군요(역시 Universal Serial Bus야!). 그리고 이쯤에서는 Belgium갈 날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에 누리터에서 주문을 못하고, 동네 가게에서 더 비싼 가격으로 사게 되었습니다. 그 USB headset을 이번 비행기 타고 올 때 싸갔고 와서 방장님과 첫 통화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보니 방장님은 headset도 안 끼고, 아주 편안하게 통화하시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저에게 보여주시더군요. 그거 아시죠, 왜 고속도료 통행료 낼 때, 수동식 자동차 유리 문에서 밖을 보고는 우아하게 웃으면서 안 보이는 아래에서 손은 무진장 고생하는 거. 제가 headset끼고 통화하고 있는데, 딱 그런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Webcam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머리에 headset 낀 거 안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나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한국에 계신 장모님과 Skype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앗 글쎄 장모님 쪽에서는 동영상... 그래서 저도 “아, 어머님께 아이들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까지 생각이 미치자 돈 생각 안하고 결국에는 그냥 USB Webcam을 사게 되더군요.
그래서 방문한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싼 거, Logitech USB Webcam C200를 집어들고, 19Euro 정도 주고 사와서 설치하다 보니 여기에 microphone이 내장이 되어 있더군요(뜨, 진작에 그냥 webcam으로 할 걸... 차라리 webcam달린 Notebook을 하나 더 살 걸 그랬나?).
그래서 결국 앞에서 한 모든 노력과 시간과 돈 들인 것은 허사가 되고, webcam 하나로 깨끗하게! Skype 화상 통화 해결했습니다. 장모님이 손주들 보시고 좋아하시는 소리를 들으니 보람이 느껴지더라구요.
보람은 보람이고, 그동안 정말 뭔 삽질을 이렇게 했는지 몰라요. 사람이 모르면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보지 않고 혼자 해 볼끼라고 끙끙 거리다 보니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해 보게 됩니다.
이 글 여기 까지 읽으시는 모든 분들, 제발 Skype 쓰시려고 비싼 Notebook을 새로 사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그냥 웬만한 Webcam 하나 사십시오.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만든 겁니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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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로 읽는 문화, 그리고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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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얼치기 과학도가 좌충우돌 진실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의 기록입니다.
이 글의 시작을 Kepler의 제 2법칙부터 하면 어떨까요? 이 옆에 보인 것은, 저로 하여금 참 오랜 동안 여름과 겨울은 지구가 태양에서 얼마나 멀고 가까우냐에 따라 결정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바로 그 Kepler의 제 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나중에 지구가 태양에 제일 가까울 때와 제일 멀 때의 거리가 각각 147 million km, 152 million km로 이 그림에서 보여준 것 보다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운 궤도임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이는 지구 계절에 별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게 되었지요.
이 그림이나 이를 통해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타원형 궤도를 실제보다 좀 과장(?)해서 그린 것이 저로 하여금 그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지요.
사실, 지구의 일체(一體)운동은 단순하지요. 그저 자전, 그것도 삐딱하게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달의 지구 주위 공전을 더하는 이체(二體)운동이 되면 좀 복잡해 집니다. 달 또한 자전하면서 지구 주위를 공전하니까, 그 모습을 머리 속에서 제대로 그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위에 태양까지 더해서 삼체(三體)운동, 즉 지구가 자전하는 주위를 달이 자전하면서 돌고, 그 중력장으로 얽힌 두 덩어리들이 태양 주위를 함께 도는 운동이 되면 각각의 궤도를 머리 속에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립니다. 거기에다가 팽창하는 우주까지 더하면,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결국 관찰자가 어디에 있는지가 무진장 중요한 요소가 되겠지요. 이렇게 돌고 돌다 보면 천동설이 딱 맞다니까요.. 암튼간에, 어찌 보면 이 삼체운동 또한 제 평생 잡고 있는 화두랄까요.
최근에 아이들과 함께 Virginia 과학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보여주는 Model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물론 모르는 내용은 아니지만, 새삼 그 시각적 강렬함에 놀라는 것이겠지요.
첫번 째 사진은 동지 무렵에 지구가 태양빛을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번 째 사진은 하지 무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계절의 변화가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니, 참 그 단순함으로 해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에 그저 새삼 놀랄 뿐입니다.
동지의 영어 이름인 <Winter Solstice>에 대한 위키 영어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보입니다.
- Since 45 BCE, when the 25th of December was established in the Julian calendar as the winter solstice of Europe, (Latin: Bruma), the difference between the calendar year (365.2500 days) and the tropical year (365.2422 days) moved the day associated with the actual astronomical solstice forward approximately three days every four centuries until 1582 when Pope Gregory XIII changed the calendar bringing the northern winter solstice to around December 21. Yearly, in the Gregorian calendar, the solstice still fluctuates slightly but, in the long term, only about one day every 3000 years.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화적 배경은 그 함의하는 바가 참 깊고 넓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보릿고개와 비슷하지요... 육식의 시작도 결국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지금은 선택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서도...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와 포도주, 맥주 같은 것도 결국은 다 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 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 The winter solstice may have been immensely important because communities were not certain of living through the winter, and had to be prepared during the previous nine months. Starvation was common in winter between January and April, also known as the famine months. In temperate climates, the midwinter festival was the last feast celebration, before deep winter began. Most cattle were slaughtered so they would not have to be fed during the winter, so it was almost the only time of year when a supply of fresh meat was available. The majority of wine and beer made during the year was finally fermented and ready for drinking at t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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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ow Far is Earth from the Sun?>을 보면 다음과 같은 정보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이거, 제가 과학 전공했던 사람 맞나요? 아 정말 부끄럽네요.
- The Earth, and the Moon orbiting around it, are inclined 5 degrees to the Sun's axis of rotation. Imagine a disk that slightly rises above the Sun's plane on one side, and dips down on the other side. It's for this reason that we don't get eclipses every two weeks. If the Sun, Earth and Moon were all lined up perfectly on the same plane, there would be many more eclipses. You'd see a solar eclipse one day, and then a lunar eclipse two weeks later.
암튼 이제 이러한 정보로 인해 제가 그리고자 했던 삼체 운동의 궤적이 좀 더 뚜렷하게 그려집니다.
동지로 인해서 배우는 거 정말 많네요.
'얼린 두부'로부터 시작된 실험; 양자역학까지 접근하려나, 뭐 과학이 별건가요?
이 글은 참새님이 올리신 얼린 두부에 대한 성질, 즉 쫄깃쫄깃해지는 성질이 물이 얼면서 (또는 얼었다 다시 녹으면서) 생기는 성질일까, 아니면 두부에 있는 단백질에 의해서, 또는 단백질과 물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성질일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기록입니다.
따지고 보면, 단백질은 어느 음식이나 다 있을 터인데, 사실 채소도 얼렸다 녹이고 나면 조금씩 질겨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 사항으로 말씀 드리면, 겨울에 언 배추를 녹이지 않고 힘을 가하면 부러지게 됩니다. 결국, 성질의 변화는 얼리는 것 뿐 아니라 녹이는 과정에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상당히 재미 있는 질문이라서 어떻게 되나 알아보려고 먼저 두부를 얼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린 두부를 꺼내서 한 번 찍어봤습니다.
왼쪽 사진에서 보시는 것은 얼린 두부인데, 위에 사진은 전체가 보이도록 찍은 것이고, 아래 사진은 조금 더 자세하게 찍어보려고 애쓴 것 입니다. 사진에서 두부 아래 부분에 층이 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두부를 담았던 통에 있는 무늬입니다. 이를 통해서 두부를 얼리는 과정은 물을 더하는 과정이 아닌, 물이 두부로부터 빠지는 탈수 과정임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얼었던 두부가 완전히 녹은 다음에 이 얼음 충이 있었던 자리에 두부 층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두부 속의 물이 어는 온도와 두부 밖으로 나온 물의 어는 온도가 다르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두부 속 물이 먼저 얼어 두부의 언 모양을 먼저 갖춘 후에, 그 과정에서 빠져 나온 물이 바닥에 고여 더 낮은 온도에서 얼었다는 가정입니다. 저의 이런 가정이 틀릴 수도 있지만,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있는 자세한 사진을 보시면, 언 모습, 그러니까 물의 문양이 참 예술 작품입니다. 요즘 들어 저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은 다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거시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다 예술이고, 우리 인생도 예술이고, 들판에 꽃 한 송이도 예술이고, 결국 이는 범생중심주의의 한 일면인데요,......., 미시적으로 보면 공장에서 찍혀져 나온 공산품도 그 분자나 전자의 숫자를 세자고 하면 유일무이한데, 아직 저는 공산품을 예술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미시적 시각으로 갈 경우, 범물중심주의로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공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당.
암튼, 계속해서 사진을 몇 개 더 찍었습니다. 이번에는 얼리지 않은 일반 두부와 함께 찍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에서 왼쪽은 얼렸다 녹인 두부, 그리고 오른쪽은 얼리지 않은 일반 두부입니다. 가급적 비슷한 배율로 찍었습니다만, 두 두부가 같은 회사 제품은 아닙니다 (같은 것으로 하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냥 단면 비교 사진인데요, 왼쪽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서 좀 더 탄력이 있어 보이고, 오른쪽은 그런 탄력은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왼쪽 두부는 위에서 누르면 마치 스폰지처럼 상당히 탄력 있게 들어갑니다. 오른쪽에 있는 두부는 조금만 눌러도 부서질 것 같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안 얼린 두부를 자세히 보면, 얼렸을 때 고착화되어 탄력을 갖게 하는 물리적 구조로 될 싹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두부를 손으로 그냥 갈라서 찍은 사진입니다. 가를 때 느낌은 비슷했으며, 조직의 차이 또한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칼로 두부를 잘라서 찍어봤습니다. 자를 때 칼 끝 느낌이 좀 달랐는데, 뭐라 설명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손으로 갈랐을 때와 좀 다른 점은 얼린 두부의 중간쯤에 무슨 띠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게 정확히 무엇인지, 왜 생겼는지는 추정하기도 힘이 듭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이랑 관련이 있으려나요?
이상의 사진들과 두부를 만지면서 든 제 느낌으로 보건대, 얼린 두부에서 생기는 쫄깃쫄깃한 성질은 단백질이 들어 있는 모든 물질에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생각되며, 이는 물과 단백질 분자간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물이 빠져나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탈수 과정 중에 물이 단백질의 구조를 바꾸는 특정 분자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반응으로서, 직관적으로는 일반 두부와 얼린 두부 사이에 영향적인 면에서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서도 이를 증명하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참, 왼쪽에 있는 두부 사진은 그냥 맛보기 사진인데요, 처음에 얼린 두부를 꺼내놓고 그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을까 하고 LED 후레쉬(flash light)를 들이 대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실 보이는 게 별만 없지요. 다만 LED 광에 비추인 두부 속은 좀 노랗구나, 정도의 관찰을 한 것밖에는. 하지만 이 호기심에 의한 행위는 상당히 중요한(?) 물리적 개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즉, 알고 싶어 하는 의지의 발동,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오감 기관으로 외부의 정보를 들여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오감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눈을 통한 정보의 입수입니다. 즉, 빛(=에너지)이 우리 눈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두운 곳에서는 보지 못하니까 전등불에서 봐야 하고, 또 물체의 속을 볼 수 없으니까 더 강한 빛을 쏘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강한 빛(에너지)으로 관찰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관찰하고자 하는 물체를 얇게 하여 빛이 더 잘 투과해서 보여지도록 만들구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상의 전환이 생겨 버립니다. 그게 사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다름 아니라 내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현상이 내가 알고 싶어하고, 이를 보고자 하는 의지력(=빛이나 다른 에너지 투입을 통한 오감감지 가능한 정보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의해서 결국에는 원래 알고 싶어하는 그대로의 현상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즉, 외부 현상이 제 의지력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미 다른 현상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얼치기 물리 전공자가 말을 하니 잘 이해가 안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미시적인 세계 (출처: <[20C사상을 찾아서]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그만큼 더 짧은 파장의 빛으로 관찰해야 하다. 하지만 빛의 파장이 짧아질수록 컴프턴의 효과로 전자의 유동성이 커져 그 전자의 운동량에 대해서 그만큼 부정확한 값을 얻게 된다. 결국 위치와 운동량은 아주 작은 범위에서는 서로 불확실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곧이어 등장하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합쳐져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인 소위 코펜하겐 해석으로 구체화됐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야기했던 가장 커다란 논란은 사람의 관찰, 혹은 측정 행위가 측정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 거시적인 세계. - Max Planck의 말.
"Science cannot solve the ultimate mystery of nature. And that is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we ourselves are a part of the mystery that we are trying to solve. (Max Planck)"
- 거시적인 세계와 철학, 인간의 미래. Einstein의 말.
"Human being is part of the whole, called by us the "Universe", a part limited in time and space. We experience ourselves, our thoughts and feelings as something separate from the rest - a kind of optical delusion of consciousness. This delusion is a kind of prison for us, restricting us to our personal desires and to affection for a few persons nearest to us. Our task must be to free ourselves from the prison by widening our circle of compassion to embrace all living creatures and the whole of nature in its beauty… The true value of a human being is determined primarily by the measure and the sense in which they have obtained liberation from the self. … We shall require a substantially new manner of thinking if humanity is to survive. (Albert Einstein, 1954),"
마지막으로, 사전 조사 차원에서 이 얼린 두부의 성질 변화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과 주변 지식을 알아보기 위해서 누리터를 뒤져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자료는 참고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시간 나실 때...).
이 중에서 단백질의 구조 그림은 참 신기했습니다.
이 아래 글들을 보시면 "protein folding"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얼린 두부의 성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접기(folding)"의 개념은, 쉽게 종이학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은데, 종이학의 날개를 위로 접어 올리고 좌우로 밀면 책 사이에 낄 만큼 깔끔하게 접히지만, 날개를 접지 않고(접었다고 해도) 위아래도 밀면 책 사이에 쉽게 끼우지 못하는 구조가 되어 버립니다. 아리 글들에 의하면, 단백질도 그러한 성질이 있어서 물에 의해서 "folding"이 되면서 쫄깃쫄깃한 성질(아래 설명에서 "rapid gluing")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수많은 종이학(두부의 단백질)들이 물에 의해서 가지런히 놓이게 되고, 서로 서로 연결이 되어 탄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질겨지는 거 같습니다.
뭐 아니면 말고요. 즐거운 탐구생활이었습니다... 백수 생활 좋네요~~
<Inactivity Of Proteins Behind Longer Shelf Life When Freezing>
- The study, which is being published in the journal PNAS, indicates that the dynamics in the surrounding water have a direct effect on the protein's dynamics, which, in turn, should affect the activity.
- "When the global movements in the surrounding water freeze, then significant movements within the protein also come to a stop. This results in the protein being preserved in a state of minimum energy and biological activity comes to a stop,"
<Water and proteins: A love–hate relationship>
- The hydration forces are responsible for packing and stabilization of the protein structure. Particularly, water participates in many hydrogen bond networks and screening electrostatic interactions.
The fully solvated unfolded chain undergoes an initial structural collapse to an overall native topological conformation that is followed by a second transition where water molecules are cooperatively squeezed out from the hydrophobic core region, resulting in a dry and packed protein.
Atomistic simulation studies of SH3 and proteins A and G support the role of water as a lubricant for the packing of the hydrophobic core after the formation of the transition state (6–8). Moreover, these fully atomic simulations, which are not biased toward direct contacts between the residues, point out that the folded state is not completely dry, but a few core water molecules form hydrogen bonds with the protein backbone.
Water is fundamental in protein folding mainly because of its role in defining hydrophobic attractions (17, 18) that are responsible for the rapid gluing of hydrophobic residues.
Furthermore, water not only interacts with the protein surface, but it can directly interact with the protein backbone and side chains in the protein interior or even form clusters of two or more water molecules in hydrophobic cavities.
<How Water 'Lubricates' Proteins>
- "“Our ultimate goal is to understand why water is so unique and important to life,”"
The Future of Food
백성은 어떤 음식을 하늘로 삼을 것인가(民以何食爲天)
안녕하세요?
녹색평론(http://www.greenreview.co.kr/)는 제가 좋아하는 격월 발행 잡지 중의 하나입니다. 몇 년 전, 한국 은행 계좌 관리길이 막히면서 구독할 길이 막혀서 그 이후로 구독을 못했습니다만, 가끔씩 온라인에 들어가서 평론 몇 개를 읽곤 하는 것이 비 정규적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은 《녹색평론》제103호 2008년 11-12월호에 실린 "중국의 식품오염"이란 글월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로서는 한국의 "물먹인 개" 사건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글월입니다. 사람이 이윤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할 때, 음식에 대한 부조리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까지도 매매(한국의 유명한 인신매매 사건들 아시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체계가 현 상업주의, 금전만능, 이윤추구의 체제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어릴 적에만 해도 먹을 거리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생산되는 것이었고, 냉장고도 흔한 것이 아니어서 저희 부모님 세대는 장도 거의 매일 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나라의 타 지역뿐 아니라 다는 나라의 음식도 쉽게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얼굴을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 하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만으로는 안 되고 전 세계적인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국은 공산품뿐 아니라 식료품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막대한 수의 인적 자원을 통해서 얻은 것 같이 보이는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전 세계인을 먹여 살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이 쓴 책에서 발췌한 이 글은 이러한 가격 경쟁력 또한 인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다는 Story of the Stuff에서 보여준 “비용을 외부화하는 것” 외에 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멜라민(Melamine) 가루 우유 파동에서 보듯이, 이윤추구를 위한 인간의 지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 아닌 그 어느 생명체가 벤젠고리처럼 생긴 이런 물질을
단백질 검사하는데 측정하는 원소인 질소(N) 수치를 높이는 데 쓸 생각을 하겠습니까?
관심이 있으시면 다음 글월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좀 기네요.
출처: http://www.greenreview.co.kr/archive/103JeuXing_pt.htm
발췌:
- 과거에 우리는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 사람들은 먹을거리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식품위생 공포’가 있다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쌀은 광물질로 광택을 내고, 국수 면은 첨가제로 가득하고, 과일은 빨리 숙성시키고 크게 만들기 위한 화학약품으로 뒤덮여 있고, 채소는 살충제 범벅이고…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그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 …
- 근년에 발생한 이 모든 식품 스캔들을 돌이켜볼 때, 우리는 옛날 영화 속에서 일본인 ‘악마들’이 되뇌이곤 했던 만트라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이 전부 파괴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끔찍한 사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식품들을 우리 인민들은 어렵게 번 돈으로 샀고, 그런데 그들이 치러야 할 비용은 하나뿐인 그들의 목숨이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묵과하고 있을 수 없다. 1987년, 상하이에서 A형 간염이 빈발했던 당시, 반란근 약재(간염 증상 치료에 사용된) 한 병은, 사람들이 선망하던 텔레비전 한 세트 가격에 거래되었다. 또 그 10년 후 광저우에서 사스(SARS)가 발발했을 때, 식초(사스 바이러스 무력화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졌다) 한 병을 높게는 200위안에 팔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공상이 아니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진상이다. 율리우스 푸치크가 한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여,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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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 아몬드, 땅콩?
유전자 조작 먹을거리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GMOs))에 대한 자료는 아직까지 잘 찾아 지지가 않는데, 우연찮게 하나를 접하게 되어서 퍼와 봅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GMOs) and mass production hybridization are terms and concepts that health conscious consumers are generally becoming more aware of. And with that awareness comes the realization that what these terms and concepts represent are the moral, ethical and physical decay of humanity at a core foundational level. GMOs are created when gene blueprints that naturally exist within one species of plant or animal are inserted into another with the intent to achieve a result that is based on a distorted human made decision. In other words, people are manipulating nature for their own selfish or corporate desires.
원래 글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crazysexylife.com/2009/genetically-modified-organisms-gmos/
제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점은, 알레르기(알러지, 과민반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미국에서 아이들 학교 보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땅콩 알레르기와 그 섭취로 인해 때로 생명의 위협까지 발생하기 때문에 Peanut Butter Sandwich는 점심 도시락으로 싸올 수 없는 메뉴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땅콩이 유독 그렇게 심한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이유를 아무도 잘 모르지요. 저는 이 글에서 그 이유에 대한 힌트를 보았습니다.
Morocco is the birthplace of almonds. The almonds we import! are from Spain which borders north of Morocco. Our growers have assured us that the varieties which we now sell are heirloom almonds. The closest thing to the original old world almond trees! American or Californian almonds are down bred hybridized versions of these original European genetics. Since we made this switch we have also made some discoveries! People began to call and tell us that our Living Nutz brand of almonds is the only kind of almonds that have not triggered their allergies and that they felt a more nutritive effect as well! Hmmm, pretty interesting. Do you see how this relates to my above manifesto!?
아시겠지만, 미국처럼 먹을거리에 대한 인간의 간섭, 즉 engineering에 관대한 나라도 없을 겁니다. GMO 표기조차도 법으로 하지 못하도록 한 나라는 거의 유일할 겁니다. 그러니, 먹는 것이 유전자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고 먹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혹시나 땅콩 알레르기가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먹을거리에 의해서 더 심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제 생각을 확인하게 됩니다.
약육강식은 허구다
'과연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과연 과거로부터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인류가 전쟁하나 못 끝내고 있는 것을 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과연 우리 인간 사이에서도 해당하는 논리일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적에 '동물의 왕국'을 참 많이 봤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제가 세뇌당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보여주는 대로 - 사실 성과 폭력이 판을 치지 않습니까? - 양육강식의 논리를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인간 또한 동물이므로 인간에게도 동일한 양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런 시각과 세계관을 거부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가 친 거미줄의 진동을 느끼고 잽싸게 달려들어 꽁무니로부터 거미줄을 뽑아서 파리를 둘둘 말아, 마치 미이라처럼 감싸는 거미의 모습은,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느꼈던 것 같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험하디 험한(?) 약육강식의 세상을, 먹는 거미와 먹히는 파리를 통해서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사실 거미가 파리를 잡아먹는 모습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자연의 한 모습입니까?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서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생명체의 유기적으로 연결된 한 모습인 게지요. 이 모습에는 ‘내가 너보다 강하다’, 하는 우월 의식이나, ‘목 좋은 데 거미줄 쳐서 파리 더 잡아 먹어야지’, 하는 탐욕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이러하기에, 양육강식의 논리는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인간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며 허구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에 있는 거미 한 마리에서도 배우는 바가 참 큽니다.
자발적 단순함, 외적으로는 단순하면서 내적으로 풍요로운 생활 방식을 향해서
이 책의 원 제목은 "Voluntary Simplicity: Toward a Way of Life that is Outwardly Simple, Inwardly Rich"이며, 글쓴이는 Duane Elgin입니다.
알라딘 사장님은 아실지 모르겠는데, 우리말 번역판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책의 목차입니다.
Introduction by Ram Dass
LIVING ON THE NEW FRONTIER
Chapter One: Voluntary Simplicity and the New Global Challenge
Chapter Two: People Living the Simple Life
THE PHILOSOPHY OF VOLUNTARY SIMPLICITY
Chapter Three: Appreciating Life
Chapter Four: Living More Voluntary
Chapter Five: Living More Simply
SIMPLICITY AND SOCIAL RENEWAL
Chapter Six: Civilizations in Transition
Chapter Seven: Civilizational Revitalization
Appendix: The Simplicity Survey
Notes
Suggested Readings
이 책을 정확히 언제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 원전으로 완독한 책입니다. 전공 책 빼고, 아마 전공 책 포함하고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다 본 원서 책은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래서 참 많이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처럼 한국에서,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자라서 서구,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거주하면서, 특히나 제가 보는 것처럼 서구 산업주의와 상업자본주의에 의해 거의 망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은 미친 세상을 보고 있는다고 하면, 첫째는 자기 모순이 극심하게 느껴지고, 둘째로는 동양적인 자연 친화적이고 오랜 시간 동안 유지 가능했던 삶의 방식으로의 회귀가 대안처럼 여겨지고, 서양 문화 너네는 아직 한참 멀었어, 이런 식의 동양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는 이 책을 그런 우월주의에 빠저서 슬렁슬렁 읽다고 제 뒤통수를 때리는 구절이 있어서 끝까지 읽게 되었는데, 결론은 "자발적"이라는 말이 핵심이라는 것 입니다.
일단, 제가 뒤통수를 맞는 글월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히말라야 산맥 어느 마을에서 그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쓴 글입니다 (처음 소개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 Gradually I see that the simplicity of the village has not been consciously chosen as much as it has been unconsciously derived as the product of centuries of unchanging custom and tradition. The East has yet to fully encounter the impact of the technological change and material growth. When the East has encountered the latent desires within its people, and the cravings for material goods and social positions begin to wear away at the fabric of traditional culture, then it can begin to choose its simplicity consciously. Then the simplicity of the East will be consciously won - voluntarily chosen.
"뜨아." 이렇게 철저하게 서구인의 관점일 수가 없습니다. 이 글로 인해,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라, 세상은 결국 다르게 이해될 수 밖에 없다는 “상대성 이론”을 물리학 밖에서 더 확철하게 깨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인도인 들 중에서도, 미국에 와서는 인도에서는 문화적인 "강제"였던 채식을 버리고 육식을 하는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자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나 하나인 것도 몰랐고, 서양인도 없었고, 기술혁명도 안 일어났고, 자본주의도 애시 당초 없었고,......, 그런 인류사적 조건이었다면 현재의 문제는, 무슨 문제가 있든지 간에,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심각성이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불교 아니면 무위자연에, 군자정치 뭐 이러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라는 유일한 행성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들 수만큼 다양한 세계관이 있을 테니까, 그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차원에서 사는 세상들을 모두 다 하나스럽게 만들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고자 한다면…? 그래 결론은 “자발적 단순함”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뒤통수를 맞은 이유는, 이 사람의 이 글을 통해서 그 모든 다단계 세상 속에서도, 동양인, 서양인, 백인, 흑인, 황인, 이런 거 다 떠나서 모두 다 지구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하면서 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글월 이후로, 누가 절대적으로 옳다, 또는 틀리다, 이런 생각 안 하게 되었습니다. 다 그 순간 순간 옳은 것이죠. 그 사람이 선 자리에서 말입니다(저 저자의 동양의 유구한 우수한 과학의 역사를 모르는 무지함까지도, 좀 슬프긴 하지만,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다음 순간 더 옳은 것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 것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저 한 문단 때문에, 정신이 번쩍 나서 책을 찬찬히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단순함이 좋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100% 이상 동감합니다.
- Greater simplicity frees time, energy, and attention for personal growth, family relationships, participating in compassionate causes, and other meaningful and satisfying activities.
마지막으로 저자가 직접 발췌한 내용 연결고리로 달면서 마치겠습니다.
Meat The Truth (육식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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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놓고 한 쪽에서는 좋다 하고, 한 쪽에서는 아니라 하고, 결국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계속 관찰하면서 자료를 쌓아가고, 그러면서 서로의 세계관이 발전을 해 나가는 거겠지요?
아래 자료는 우연히 검색하다가 걸린 다큐맨터리입니다. 네델란드에서 만들었다는데, 제작자는 알 고어의 "불편한 진실"의 후속편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랍니다.
이 처음 것을 보신 다음에 계속 연결된 동영상을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몇 가지 사실들.
- 소 한 마리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한 대가 7만 킬로미터를 주행할 때 배출되는 양과 같다.
- 허머(Hummer) SUV 자동차를 타는 채식인이 자전거를 타는 육식인보다 친환경적이다.
- 네덜란드 국민이 일주일에 하루 고기를 먹지 않았을 때 감소되는 이산화탄소량은 네덜란드 정부가 모든 가정을 대상으로 목표한 연간 배출 감소량과 같다.
- 남미에서는 소 먹이용 콩 재배를 위해 약 4억 헥타르의 땅이 사용되지만, 이를 인간 식량으로 사용한다면 2,500만 헥타르만으로 전세계 인구를 먹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 ‘브리예 대학교(Vrije University)’ 과학자들은 이런 정보를 위해 영화 제작자에게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했다. 영화 끝부분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출시될 이 다큐멘터리‘육식의 진실’이 큰 성공을 거두길 빌며 이 작품이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에 사는 생명들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의 하나로서 채식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공헌을 하길 바란다.
사정이 이리 절박하기에, 모든 종교들이 무시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 버린 것이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The World Peace Diet, Eating for Spiritual Health and Social Harmony
이 책은, http://worldpeacediet.org/에서, 누구든지 전자 우편 주소를 제공하고,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No Derivative Works 3.0 Unported License"에 동의하면 그 전문을 내려 받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아름다운 정보 공유 방식입니다.
제가 이 책과 이 책을 쓴 저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리치몬드 채식인 모임"에서 주최한 강연회를 통해서 였습니다. 제가 이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하면, 첫째로 이 책에 있는 내용 중에서 저자가 거의 평생을 써 오던 안경을 안경사와 안경점으로부터의 종속이라고 이해하고, 그 이후로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기 위해 안경을 안 쓰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본인의 눈이 좋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국민학교 2학년부터 안경을 써왔는데, 그 구절을 접한 다음부터 나도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을 먹었고, 이제 안경을 안 쓰고 생활한지가 거의 1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저 또한 속박이 아닌 자유를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제 눈의 심한 난시로 인해서 초점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에 비해서 세상이 참 많이 또렸해 졌습니다. 그래서 제 눈이 안경으로부터 완전 해방되는 날, 저는 이 책을 진정으로 소개하고 다닐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안 되었다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꼭 번역을 해서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아토피 피부병으로 해서 시작된 채식과 vegan의 길을 걸으면서, 음식과 환경에 대한 책을 몇 권 접했습니다만, 이 책 이후에는 더 이상 읽을 필요를 못 느낄 만큼 그 내용에 있어서 최정점에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책을 쓴 사람은 송광사에서 참선생활을 통해 한국의 뿌리 깊은 vegan 문화와, 그 역사를 통해서 한 깨침을 받은 사람이라,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일정을 봐서 이곳에서 저희들과 함께 강연회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초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아리수님과 이 책을 혹시 우리말로 어떻게 출판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국은 사실 아직 너무 갈 길이 먼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일 잘 팔린다는 책 제목을 들어보니, 너무나도 몸 중심의 건강 관련 내용(~먹으면 암도 고친다?)이라서, 아직 먹을 거리 뒤에 담긴 정신적인 요소를 챙길 여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을 精神이라고 씁니다만, 저는 이게 사실 精身=精神, 즉 몸이 바로 서야 신이 들어온다(또는 신과 만난다, 신과 하나 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精자가 쌀 미(米)자와 푸를 청(靑)자로 이루어져 있음은 그 뜻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게 합니다. 푸를 청자를 등 푸른 생선으로 해석할 분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합니다. 초록이 무성한 푸른 채소와 나물들이라면 몰라도요. 그래서 저는 이 글자가 가장 한국적인 식단, 즉 밥과 나물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따라서, 음식이 바로 서지 않으면, 몸이 바로 서지 않고, 몸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정신이 바로 서지 않으며, 정신이 바로서지 않으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채식이나 vegan하면 부자유스러운 것이 많다고 들 생각하시는데, 사실 더욱 더 자유로워 지는 것이 veganism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veganism에서 모든 종교의 통합가능성을 보는 이유도 이러한 생각에 기인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상태를 불교적인 해탈이라고 부르든, 기독교적인 진리(=神)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 것이든, 도가의 무위자연이든, 그 상태는 결국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세 번 맞는 밥상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veganism이니까요.
이 책은, 제가 생각하는 이러한 주장들을 너무나도 논리 정연하게 전개해 놓은 책 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이 이 책에 있었는지, 이 책 때문에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인류적 보편성이 있는 책입니다.
어느 종교에 치우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책의 저자가 한국에 있는 동안 송광사에서 지낸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면서 저의 짧은 책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SonggwangSa Temple
In 1984 I had my second opportunity to live in a vegan community. This time it was an ancient Zen monastery in South Korea. I traveled there and participated as a monk in the summer’s three-month intensive retreat. We rose at 2:40 A.M. to begin the day of meditation, practicing silence and simplicity, and eating vegan meals of rice, soup, vegetables, and occasional tofu, and retiring after the evening meditation at 9:00 P.M. The meals were eaten in silence with each of us using a set of four bowls: three for the rice, soup, and vegetables and the fourth for tea, which we used to clean our bowls and then drink, so that not even a single grain of rice would go to waste.
The community consisted of about seventy monks, with some lay people who helped with certain tasks, and the vegan roots there were old and deep. For many centuries in that temple, people had lived the same way, meditating and living a life of nonviolence. There was no silk or leather in any clothing, and though I was there in the summer mosquito season, it was absolutely not an option to kill a mosquito or any creature. We simply used a mosquito net in the meditation hall.
Through the months of silence and meditation, sitting still for seemingly endless hours, a deep and joyful feeling emerged within, a sense of solidarity with all life and of becoming more sensitive to the energy of situations.
When after four months I returned to the bustle of American life, I felt a profound shift had occurred, and the vegetarianism I’d been practicing for about nine years transformed spontaneously and naturally into veganism with roots that felt as if they extended to the center of my heart. Until then, I had mistakenly thought that my daily vegan purchases of food, clothing, and so forth were my personal choices, simply options. Now I could clearly see that not treating animals as commodities was not an option or a choice, for animals simply are not commodities. It would be as unthinkable to eat or wear or justify abusing an animal as it would be to eat or wear or justify abusing a human. The profound relief and empowerment of completely realizing and understanding this in my heart has been enriching beyond words.
When I returned from Korea I was able to begin teaching humanities and philosophy courses at a college in the San Francisco Bay Area, through connections I’d made when getting a masters degree at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just prior to going to Korea. After about six months of teaching I decided to apply for entrance into a Ph.D. program in the U.C. Berkeley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For this I was required to take an aptitude test, the Graduate Record Examination, and it was interesting that when the results came back they were very high. Mensa told me that the scores corresponded to an I.Q. that was in the top one-quarter of one percent of the population. In my younger years as an omnivore and non-meditator I had never scored particularly high on such tests, but it’s quite understandable. A vegan way of eating not only allows our system to run much cleaner, but more essentially, it frees us mentally to make connections. This ability is the foundation of intelligence. Regular meditative silence allows our mind to relax and connect with wellsprings of intuitive potential that also seem to increase our ability to make connections. Following a vegan diet and practicing inner silence is a powerful combination! I found, for example, that I was able to teach a full load of courses at the college and simultaneously take a full course load at Berkeley, so that I was typically juggling eight to ten courses at once. Not only did the teaching go wonderfully well, but I had only As and a couple of A-plusses in over sixty units of doctoral coursework, and my dissertation, The Role of Intuition in Education, was nominated for the Best Dissertation Award. There is nothing for me personally to be proud of or take credit for in this, because it’s just one of countless human illustrations of the underlying principle that all of us have an enormous potential that can be fulfilled as we understand and live in accordance with our intrinsic nature. The main hindrance to this is the inherited food-enforced mentality of competition and exclusion that keeps us distracted, paralyzed, and unable to make meaningful connections.
After teaching college for about six years and enjoying it immensely, I felt guided to take up an itinerant lifestyle giving concerts of original piano music and seminars on developing intuition. Though the college offered me a salary increase to stay on, I felt a strong calling to return to the open road. I had found that in the years since embarking on my pilgrimage from New England, uplifting and swirling new music had begun pouring through me on the piano, and as I focused more on the music and played publicly, it got stronger and was received with enthusiasm. Through the music, I felt my heart and inner vision opening to an inspiring spiritual energy that connected me with the earth and with the plight of both animals and our human family. The music, emerging from the mystery of inner stillness, has always seemed to be a vehicle for carrying elevating and healing energy and intuitive understanding.
Although I hadn’t been consciously aware of it at the time, while I was switching to a plant-based diet at The Farm in 1975, thousands of miles away in Switzerland, a young painter named Madeleine was simultaneously making a similar change. In 1990, while playing concerts in Europe, I met Madeleine fortuitously in a small Swiss village, and since then I have been wonderfully blessed with her presence as my life partner and loving companion.
커피는 역시 화학약물임이 분명합니다.
3Ls라고 해서 사랑하기(Loving), 살기(Living), 그리고 배우기(Learning)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3Ss'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3Ss는 작게(Small), 느리게(Slow), 그리고 단순하게(Simple)입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이 세 가지를 물으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사는데 진정한 필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허영심과 같은 욕구에 의한 것인지 쉽게 판가름이 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 세 가지를 물어면 내가 과연 미래에 미칠 영향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구별을 할 수 있습니다.
커피는 기호품입니다. 따라서, 그 정의상 필요가 아니라 욕구에 의한 것이며, 때로는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서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3Ss의 잣대를 들이대면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마시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술 잘 안 마시지요, 담배는 이제 일절 안 피지요, 거기에다가 커피까지 안 마시면 도대체 인생을 무슨 낙으로 살란 말인가, 하는 자문을 할 때가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커피 마시기 하나는 제 삶에 꼭 필요한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커피 마시는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다시 한 번 3Ss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전기가 없이도 돌아가는 "수동 커피 내리기 기계"를 사들인 겁니다. 이름하여 Chemex Coffee Maker. 아직껏 원두 분쇄기는 전기로 돌아가는 것을 쓰고 있는데, 이도 언젠가는 손으로 돌리는 "수동 원두 분쇄 기계"를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단순한 기계를 사고 나니, 정말 조금씩 커피 원두를 덜어 내어, 천천히 갈아서, 그러는 동안 물 한 주전자 끓이고, 원두 가루 양만 맞추는 아주 단순한 처방전으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의 사진에서 보시는 것이 그 "수동 커피 내리기 기계"로 내린 커피물과, 이를 따라 마실 준비가 된 커피잔 모습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보기와는 달리 제 입맛에는 무진장 잘 맞는, 정말 맛있는 커피가 나옵니다. 장점은 한번 자기 입맛에 맞는 원두양이 정해지면 그것으로 모든 걱정 끝이라는 겁니다. 정말이지 물만 끓이면 됩니다.
하지만, 이 멋진 기계에서 내려오는 커피물을 보면서 저는 커피가 화학약물(?)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비이커나 삼각 플라스크같은 것으로 무슨 화학 실험을 했던 것을 늘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커피 내리는 과정이 화학실험, 그리고 물리실험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그 실험 과정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커피 원두 가루 불리기
- 이 과정은 거름종이를 촉촉하게 하고, 갈아놓은 커피 원두에서 쓴 맛을 없애주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때 물의 온도가 무진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 첫 물 내린 후.
- 앞의 커피 원두 가루 불리기 과정에서 거름종이가 위에까지 축축해지면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다리면, 원래 커피 원두 가루가 있던 자리에 물이 중력의 힘으로 내려 가면서 원두 가루는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 벽면에 붙어 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의 작용 반작용이 작용한 것이지요. 이래서 전공 개 못 준다는 거 같습니다.
- 두 번 째 물 내리기.
- 저는 보통 물을 세 번 내리는데, 두 번 내린 후에 한 잔을 따로 따라 놓고 세 번 째 물을 붓습니다. 보통 꼭대기에서 1cm정도 까지 남기고 가득 차오르게 물을 부어 줍니다.
- 두 번 째 물 내린 후.
- 제가 이 사진을 찍은 이유는, 커피 원두 가루들이 이번에는 아래로 모여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두 번 째 물 내릴 때에는, 원두 가루가 벽 면에 붙어 있기 때문에 빈 공간을 물이 먼저 차지 하게 되고, 물보다 비중이 큰 원두 가루들이 중력에 의해 다시 밑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세 번 째 물 내리기부터는, 원두 가루가 바닥에 가라앉는 채로 그냥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는 아마도 두 번 째 물 내리기 할 때, 커피 원두 가루들에 물이 다 침투해서 이로 인한 인력(아마도 표면장력의 작용?) 때문에 가루들이 서로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커피 원두 가루보다 분자 크기가 훨씬 작은 물이 가루사이로 막 빠져 버린 거지요. 이 현상은 사실 중력과 무관한 현상이 되어 버립니다.
흐하,… 글을 쓰고 보니, “무슨 커피 하나 마시면서 이렇게 엄청난(?) 실험까지 하면서 복잡하게 사냐”, 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머리 속에서 스쳐가는 생각일 뿐, 사실 이 수동 커피 내리기 기계는 단순 그 자체입니다. 그 단순함 위에 커피는 소량이니 언제나 신선하고,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과정이 느릿 느릿 진행되니 더 없이 좋지 않습니까?
이 기계는 전기가 없이 쓸 수 있으므로, 한국과 미국처럼 사용 전압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쓸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든, 제가 보기에는 Chemex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커피물 내리는 기계입니다.
이런 커피 한 번 안 마셔 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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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물성 단백질이 문제인지? 동물성 단백질을 먹지 안고도 문제가 없는지?"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
저는 단백질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다 또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양인들은, 그리고 동양 문화는, 그 옛문화가 엄청 고등문화였음에도, 근대 이후 서구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에 의해 당한 역사 때문에 서양문화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옛날의 초근목피하던 가난함, - 물론 가난함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당시 가난의 본질을 보면 가진자인 지배자가 생산자인 농민을 수탈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고, 그것이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국민이 수탈을 당했다는 데에서 더 큰 문제가 생겨났다고 봅니다만 - 그리고 그 가난함 속에서 안빈낙도 하면서 밥, 산나물 해먹으면서 명절 때 백정이 정말 정갈하게 죽인 짐승들로 만들어진 고기를 먹는 문화, 그러면서 농자천하지대본이요, 선비는 주경야독하는 문화가 얼마나 좋은 문화였는지 지금에 와서 암만 이야기 해도 안먹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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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서는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 고등 문화를 현대적으로 더욱 발전시킨 것이 주업(전기세, 전화세 내야죠)석경(자기 먹을 거 일부, 또는 전부를 자기가 생산해야죠)야독(공부안하면 죽은 삶이죠)이라고 보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데, 그 문제가 자기 텃밭에서 어느 정도 해결되면, 삶에, 세상에 상당히 당당해 질 수 있습니다. 암만 못 되도 굶어죽을 일 없잖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런 문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밤 늦게까지 일을 강요하는 기업 문화, 밤 늦게 까지 마시는 술 문화, 이런 거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 쓴다고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든지, 사람들 만나서 친목 도모하는 모임까지도 안 가는 입장이라도 보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다 잘 살자고 하는 것이데, 결과적으로 잘 못살게 된다면, 저희가 부지불식간에 하는 문화적 행동에 돌아봐야할 뭔가가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1시간 30분짜리 이 강연을 보시지요 (죄송합니다, 영어로만 되어 있어서).
위 내용이 사실 현대 동물성 단백질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두 사람 중에, 교수는 제가 알기로 비건(Vegan)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갈한' 고기는 먹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도 그 해결을 위한 선택은 같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한 사람은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잘 알면서도 그래도 뭔가 좀 다르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선택을 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비건(Vegan)이라는 이 시대적, 개인적 선택 또한 최선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판단해 줄 일입니다. 처음에 자동차가 만들어졌을 때, 말과 소가 길에서 마구 싸 버리는 배설물로 인하여 야기되는 환경 오염, 특히 수질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신기술로 받아들여졌던 과거를 생각하면, 딱히 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현재의 veganism이 미래에 또 다른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사실, 동물 배설물에 의한 수질 오염보다는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공기 오염이 인류 생존 측면에서는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잠깐 해 보지만, 이건 뭐 사실 오십 보 백 보라서 따지기도 좀 그렇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자동차의 출현으로 유예되었던 동물들에 의한 환경오염, 특히 수질오염이 인간의 육식문화로 인해 현재에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인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그저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고 하면서 살아갈 밖에요.
결국, 내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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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 곡물에 대한 단상
한가위 모임 잘 지내셨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는 것은 그저 제 개인적인 느낌이나 직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믿으시거나 말으시거나는 읽으시는 분들의 세계관에 따를 것 같습니다.
사실 유전자 공학이라고 하면, 이에 대한 뿌리가 깊고, 앞으로도 그 발전, 전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최 첨단 생명 과학 기술 분야이기 때문에 사실 이에 대한 '반박'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단상이니까 그저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물 먹인 개를 기억하실 겁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쓰신 "‘동물권’의 전개와 한국인의 동물 인식"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 자료를 보고 박원순 변호사가 PETA(http://www.peta.org)와 비슷한 논리의 글을 쓰신 것을 보고 이 분을 다시 보게 되었네요. 물론 저는 PETA가 하는 모든 일을 지원하지도 않고, 그들의 운동 방식이나 대중 접근 방식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서구에서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의 권리에 이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진보적인 측면에서는 심정적 지원을 보냅니다.
- ‘물먹인 개 도축현장’은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형사대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건물 안에는 개털이 타는 연기가 자욱했고 피냄새가 잔동했습니다. 이곳이 한국판 ‘킬링필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28일 오전 현장을 덮쳤던 한 경찰관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숨이 끊어진 개의 털을 불로 태운 뒤 합성세제를 솔이 묻혀 털찌꺼기를 등을 닦아내는 비위생적인 세척작업이 이어졌다. …조서를 작성하던 한 경찰관은 “잔인한 밀도살 현장을 본 뒤에는 평소 즐기는 보신탕 생각이 싹 사라졌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 한 사건은 사실 그 함의하는 바가 무진장 큽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있는 사악한 인간의 마음이 사실 유전자 조작 곡물이 생겨나게 한 마음과도 통합니다.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요공급의 법칙이라고 하지요. 시장경제의 원칙이라고도 하지요. 자본주의라고도 하지요. 다들 조금씩 뜻이 다른데, 너무나도 얽히고 설켜서 따로 떼고 볼 수가 없는 것들이지요. 그 위에 더해서 "이윤추구의 극대화"라는 것도 있습니다. 또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올린다"고 합니다. 모두 다 경제 논리죠. 전 개인적으로 경제 논리 무진장 싫어합니다 (경제 전공 하시는 분들께서는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경제적으로 얽히고 설켜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을요. 그저 혼자서라도 소비자로서 개인이 옳다고 믿는 경제적 선택을 해 나감을 통해, 조금이라도 미래를 위해 좋은 결정을 하는 것이다, 라고 위로할밖에요.
이제 이 곡물 이야기 이전에, 소와 닭, 돼지 같은 동물의 주식이 풀이나 벌레, 음식 찌거기가 아니라 곡물, 그 중에서도 콩과 옥수수인 것은 이미 다 아시는 사실 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동물들에게 먹이는 사료 가격을 싸게 하려고 동물성 사료, 즉 동료들의 시체(육골분등 동물성 사료)까지도 갈아서 먹인 소에서 발생한 것이 광우병인 것도 다 아시는 사실 일 겁니다.
유전자 조작 곡물은, 한 마디로 말씀 드려서 급격히 증가한 고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공급을 창출하여 이를 극대화 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경제논리로 만들어진 과학입니다. 이 유전자 조작의 핵심은 살충제와 제초제에도 죽지 않는 종자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조그만 논에서 김매기 하면서 잡초 뽑고, 손가락으로 일일이 해충 죽여가면서 하는 가족형 소규모 농장은 더 이상 경제적 경쟁력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규모 농장에서 콩과 옥수수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 단가를 낮추기 위한 방법을 늘 찾게 됩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유전자 조작 곡물이 됩니다.
이 곡물 씨를 뿌려 놓고, 잡초가 나올 만 하면 하늘에서 비행기로 제초제를 뿌려버립니다. 다른 식물 종자들은 다 죽어 나자빠지는데, 이 놈의 곡물은 튼튼(?)하게 자랍니다. 그리고 나서 수확할 때가 되거나 해서 벌레들이 꼬이면 하늘에서 비행기로 살충제를 뿌려버립니다. 다른 동물(특히 몸 크기 작은 곤충) 종자들은 다 죽어 나자빠지는데 이 놈의 곡물은 튼튼하게 잘도 자랍니다. 그렇게 키워서 수확한 곡물이 거의 전량 소, 닭, 돼지의 사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식용유, 두부, 과자(팝콘이나 콘칩), 이런 것들의 원재료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런 곡물을 먹고 자란 고기를 먹으며, 그런 곡물로 만들어진 기름이나 과자 같은 것을 먹게 됩니다.
현재까지 나온 자료는, 이런 유전자 조작 곡물이 비유전자 조작 곡물과 같으며 그 효과도 같다는 것 입니다. 이는 실험실에서 살충제, 제초제 안 뿌리고 기른 놈을 시편으로 제출했을 때 그럴 겁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유전자 조작 작물 자체의 장기적인 임상 효과를 모릅니다. 그러니, 저는 그저 알려진 효과를 말씀 드릴 수 있을 뿐 입니다. 그 알려진 효과는, 심화되는 토양 오염, 악화되는 수질 오염, 그리고 해 마다 제초제와 살충제의 독성이 강해져야 그 이전 해 수준의 작물수확량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생명은 점점 더 내성이 강해지고, 이에 따라 제초제와 살충제는 더 독성이 강해져야 한다는 소리겠지요. 이는 생명의 순환이 아니라 죽음의 악순환입니다.
저는, 풀뿌리 한 포기, 곤충 한 마리에 해로운 것은 같은 생명인 인간에게도 해롭다고 믿습니다. 비록 유전자 조작에 의해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하나, 다른 생명들은 죽는 화학물질을 먹으며 자란 콩과 옥수수가 인간에게 무해하다고 한다면 저는 그 사실을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그저 아직까지 그 효과를 모른다고 하면 혹 믿고 자료가 나올 때 까지 참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요.
현재 육식문화 뒤에 있는 폭력의 모습은 사실 굉장합니다. 그리고 그 폭력의 시작은 동물들이 먹는 사료의 생산과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논리로 무장된 인간의 마음, 그 탐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폭력성을 직접 본다면, 아마 물먹인 개 도살 장면을 본 경찰관이 보신탕에 대해서 한 말을 되풀이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동물들에게 행하는 폭력이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는 논리의 확장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언제나 산을 옮길 수 있으려나요.
미국 국영 방송에 있는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In regions of the southeast, 70 to 90 percent of the fish were found to be intersex. Only in Alaska's Yukon River in were fish completely free of the condition.
- 해석: 남동부 지역에서 70~80%정도 물고기가 양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스카 주의 유콘강에 있는 물고기만 이런 양성을 띠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자료를 한 번 찾아 보았습니다. 공장형 농장<Factory Farm>, 또는 집약적 동물 사육소<CAFO(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의 미국내 분포를 보여주는 누리터입니다. 주소는 http://www.factoryfarmmap.org/입니다.
- 소를 기르는(또는 생산하는?) 공장형 농장의 분포. 알라스카 주와 몇 개 남동부 주, 북동부 주 몇 개를 제외한 다른 주들에는 다 있습니다.
- 돼지를 기르는(또는 생산하는?) 공장형 농장의 분포. 알라스카 주와 뉴멕시코 주, 그리고 북동부 주 몇 개를 제외한 다른 주들에는 다 있습니다.
- 우유를 생산해 내는 공장형 농장의 분포. 알라스카 주와 와이오밍 주, 로드 아일랜드 주, 이렇게 세 개를 제외한 다른 주들에는 다 있습니다.
저는 이 자료로부터, 아마도 소로부터 젓을 만들어 내는데 상당량의 여성 호르몬이 투여 되었으리라는 추론을 해 봅니다. 그 잔여물들이 토양, 하천을 통해서 강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들의 성기능/역할을 변환시켰다는 가정입니다. 와이오밍 주가 알라스카 주와 달리 물고기가 양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는 아마도 다른 형태의 농장에서도 여성 호르몬을 어떤 목적으로든지 - 예를 들면 어린 나이에 새끼를 배게 한다든지 -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세 가지 형태의 공장형 농장이 일절 없는 알라스카 주의 강에서만 물고기의 양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 자료에 의하면 로드 아일랜드 주도 알라스카 주와 같이 세 가지 형태의 공장형 농장이 일절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주에서 미치는 환경 영향, 각 강들의 지류와 합류 지점 등을 자세히 조사하기 전까지는 결론을 내리기 힘드리라 생각합니다.
암튼간에, 상당히 놀라운 자료입니다.
직지 주: 어디선가, 팽창하는 우주의 전체 모습이 이런 모양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본 거 같습니다.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