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월은 김 용묵님의 누리터에 kbwbib.chm 문서(HTML 도움말 문서)로 올려저 있었던 <공 병우 박사 자서전>을 다시 가다듬어서 올리는 것 입니다. 김 용묵님께서 많이 다듬으셔서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 부분을 저 또한 다시 살려서 실었고, 몇 가지 띄어쓰기만 고쳤을 뿐입니다. 이 글은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글이 아니며, 직지 저작권을 따릅니다.

저로서는, 세벌식 자판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자판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선생께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고, 선생께서 해오신 한글 자판과 한글 기계화에 대한 공헌을 존중하고 인정하지만, 이 자서전을 통해 공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그전에 비해 좀 엷어졌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글은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겁니다요. – 2010년 5월 22일 CSET 김민수.

Contents

  1.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 공병우 자서전
    1. 소갯글
    2. 머리말 - 자서전을 쓰는 까닭 네 가지
    3. 제 1 장 팔삭둥이 쌍둥이
      1. 가난 딛고 부농이 된 할아버지
      2. 외양간 앞에서 태어났다
      3. 붉은 댕기 머리 장손
      4. 열네 살에 든 장가
      5. 지긋지긋했던 서당 공부
      6. 보통학교 시절
    4. 제 2 장 내 인생의 길을 바꾼 한 편의 작문
      1. 농업 학교 입학
      2. 엄격한 기숙사 생활
      3. 동맹 휴교의 주모자
      4. 상급생에게 칼 품고 달려든 하급생
      5. 교장을 비판한 작문
      6. 의사가 될 길이 열렸다
      7. 의사가 되고 싶은 집념
      8. 한살이 동안 졸업장을 받아 본 적이 없다
    5. 제 3 장 스무 살에 합격한 의사 검정 시험
      1. 첫사랑과 의사 검정 시험
      2. 의사가 되어 신의주로 가다
      3.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4. 경의전 미생물 교실 견학생
      5. 교통 사고로 입원한 여학생
      6. 거들떠보지도 않는 안과 선택
      7. 꿩 먹고 알 먹는 숙직
      8. 경성 제대 교수의 문하생으로
      9. 박사 학위 논문
      10. 해주 도립 병원 안과 과장
      11. 서울의 첫 안과 병원
      12. 창씨 개명과 '공병우 사망' 전보
    6. 제 4 장 되찾은 나라에서 시작한 일들
      1. 아리랑을 목놓아 불렀다
      2. 처음 배운 한글 맞춤법
      3. 이승만 박사의 안경과 나
      4. 제 나라 말로 시작한 강의
      5. 내가 걸린 매독
      6. 백인제 박사와 함께 차린 출판사
    7. 제 5 장 한글타자기를 만들기까지
      1. 공 안과를 찾아온 한글 학자 이극로 선생
      2. 내가 처음 만든 한글 시력 검사표
      3. 타자기와의 첫 만남
      4. 잊혀진 선구자들-이원익 씨와 송기주 씨
      5. 신체를 해부하듯 타자기를 발기발기 뜯어 놓고
      6. 병원 일은 뒷전에 돌려놓고
      7. "맞았어, 바로 이거야, 내가 원했던 것이!"
      8. 춘원 이광수와 나
      9. 발명품에 무관심한 사람들
      10. 명사들의 타자기 보급회
    8. 6·25전쟁과 내 인생
      1. 정치보위부에 끌려가다
      2. 사형을 기다리는 시간
      3. 살기 위해 허위 자백을?
      4. 자살 방법으로 선택한 영어 공부
      5. "동무, 치과 의사요?"
      6. 목숨을 건져 준 한글 타자기
      7. 북쪽으로 끌려가는 신세
      8. 아슬아슬한 도망자의 운명
      9. 솔포기 속에서 꾼 악어꿈
      10. 손수레에 실려서 가족 품으로
      11. 전쟁이 나에게 준 교훈
    9. 제 7 장 “공 박사가 미쳤다!”
      1. 잊을 수 없는 김석일 대령
      2. 손원일 장군과 최현배 박사
      3. 미국은 장님들의 낙원
      4. 하와이에 퍼뜨린 쌍꺼풀 수술
      5. 변소를 목욕탕 속으로 옮겨 놓으니
      6. 한글 타자기의 전성 시대
      7. 최초의 글자판 배열 변경
      8. 휴전 회담에서 공을 세운 타자기
      9. 속도 한글 타자기의 보급
      10. 세벌식 한글 텔레타이프의 보급
      11. 한·일 맹인 친선 타자 경기 대회
        1. (1) 1972년 서울 대회
        2. (2) 1978년 동경 대회
    10. 제 8 장 고독한 투쟁
      1. 공병우식과 김동훈식의 단점만 모은 졸작
      2. 임종철 선생
      3. 이윤온 씨
      4. 김재규와 나
      5. 탄압의 시작
        1. (1) 잡지사 폐간
        2. (2) 토론회 방해 공작
      6. "이 새끼, 여기가 어딘데!"
      7. 백만 대군 송현 씨
      8. 민간 통일판 제정과 행정 소송
    11. 제 9 장 일흔두 살에 배우기 시작한 사진
      1. 카메라 메고 방랑길로
      2. 사진으로 누린 표현의 자유
      3. 어느 새 '사진 작가'라고 불리게 되고
    12. 제 10 장 미국 땅에 옮겨 차린 연구실
      1. 광주 사건과 병든 미국
      2. 이제는 바야흐로 컴퓨터 시대
      3. 침실이자 응접실이자 식당인 연구실
      4. 인쇄 혁명 일으킬 한글 식자기 연구
      5. 엉터리 표준 자판 없앤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6. 한글쓰기 무른모 개발
        1. 너는 나의 비서
      7. 미국에 번진 한글 기계화 운동
        1. 1. 레이저 빔에 의한 식자기로는
        2. 2. 디지털 식자기로는
        3. 3. 사진 식자기로는
      8. 세벌식은 컴퓨터에도 알맞아
      9. 세벌체를 으뜸 자형으로 확정
    13. 제 11 장 사람답게 살고 싶어 – 종교관, 인생관 -
      1. 하느님의 발견
      2. 구도자의 심정
      3. 내가 존경하는 분들
      4. 임어당과 나
      5. 내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6.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고
      7. 돈보다 소중한 것들
      8. 미리 써 둔 내 유서
    14. 제 12 장 내가 좋아하는 것들
      1. 꿩 사냥과 탁구
      2. 한때는 골동품도 모았지만
      3. 단순한 것이 좋아
      4. 내 의식주 생활
        1. (1) 작업복 인생
        2. (2) 내가 좋아하는 음식
        3. (3) 북향집이면 어떤가
      5. 고독은 즐겁다
      6. 시간은 생명이다
      7. 내 건강 관리
    15. 제 13 장 내 가슴은 영원히 뜨겁다
      1. 장님과 맹인
      2. 실명자에게 재활의 꿈을
      3. 신체 장애자를 도울 줄 아는 사회
      4. 그리운 북녘땅
      5. 공 박사가 빨갱이가 되었어?
      6. 일흔일곱에 쓴 참회의 일기
      7. 내 인생을 감싸 준 사람들
    16. 끝말 -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1. 부록(1) 내 발명품과 개발품들
        1. (1) 공병우 누도 검사법
        2. (2) 국내 최초로 콘택트렌즈 국산 개발
        3. (3) 맹인용 점자 타자기 개발
        4. (4) 중국 주음 부호 타자기 개발
        5. (5) 맹인용 한글 글틀 개발
        6. (6) 속도 타자기의 쌍초점 특허
        7. (7) 국산 활자 개발
        8. (8) 한글 텔레타이프 개발
        9. (9) 한·영 겸용 타자기 개발
        10. (10) 3단 한·영 타자기 개발
        11. (11) 국산 타자기 생산
        12. (12) 한·영 겸용 텔렉스 개발
        13. (13) 한글 모노타이프 개발
        14. (14) 한·영 BALL 타자기 개발
        15. (15) 한글 글틀 개발
        16. (16) 아이텍 사진 식자기 개발
      2. 부록(2) 내가 받은 상들
        1. (1) 내가 사양한 상
        2. (2) 연도별로 본 표창과 수상
        3. (3) 기타
      3. 부록(3) 주요 이력과 경력
        1. 학력과 경력
      4. 내 가족들(1989. 8. 15. 현재)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 공병우 자서전

소갯글

한국 최고의 고집쟁이, 안과 의사, 싸움꾼인 공병우 박사가 유서와 함께 공개하는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오래 전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 고집쟁이 열 명을 뽑았을 때 1위가 이승만, 3위가 최현배, 6위가 공병우였다.

그때 뽑힌 고집쟁이 가운데 지금 살아 계신 분은 공 박사뿐이다.

그러니까 현재로는 단연 한국 최고의 고집쟁이인 셈이다.

이 고집과 서양식 합리적 사고 방식이 어우러진 것이 바로 "공병우식"이다.

외양간 앞에서 팔삭둥이로 남보다 두 달 빨리 누리에 태어난 탓인지, 공 박사는 일생 동안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해본 것이 별로 없고 모든 일을 공병우식으로 해치워 온 사람이다.

학교를 다녀도 끝까지 제대로 다니지 않고 월반으로 빨리 끝을 내었고, 의과 대학을 다니지 않고 강습소를 다니며 독학으로 의사가 되었고, 박사 학위도 남들이 하는 절반도 못 되어서 독학으로 땄고, 타자기를 만들어도 예쁜 모양보다는 속도를 중시하여 속도 타자기를 만들었고, 낮에 하는 결혼식은 시간 낭비라고 반대하고, 그 유명한 공 안과의 설립 개원 기념 행사 한번 하지 않았고, 문지방 썰어 없앴고, 간장독 깨어 없앴고, 사과 궤짝 포개어 침대 만들었고, 며느리에게 폐백 인사 절하는 것 집어치우고 악수나 한번 하자고 때웠고, 지금도 5분만에 깎는 이발소 아니면 안 가고…….

머리말 - 자서전을 쓰는 까닭 네 가지

나는 죽은 뒤에 누리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이날까지 살아 왔다. 살아 있는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나아가 우리 나라와 겨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다가 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서구 사람들처럼 나도 유서를 미리 써 놓았다. 그 내용에 재산 나누기에 관한 것은 별로 없다. 내 명의로 된 부동산 따위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유용하게 쓰거나 복지 사업을 위하여 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재산 분배 문제로 자식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 유서는 결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 분배 명세서는 아니다.

내 임종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여유 있는 상황이라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하여 내 눈이나 몸 속의 장기가 다른 사람 생명을 구하는 데 쓰도록 조치해 달라고 당부했다. 내 숨이 끊어질 무렵에 차질이 없도록 의사 손에 맡겨 잘 처리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내 몸이 변질되기 전에 갈기갈기 찢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부분은 화장을 하여 재를 강물에 뿌려 달라고 자식들에게도 당부하였다.

나에 대한 평가는 죽은 다음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정확하게 받게 될 것 이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미주알고주알 다 드러내 놓고 조명해 가며 자기 미화를 꾀하려는 듯한 어떠한 시도도 나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에 나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따위와는 사실 인연이 멀다. 그럼에도 내 나이 80이 넘은 지금 내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기로 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뜻이 숨어 있다.

첫째는, 누리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줄곧 천대만 해 온 우리 민족이 이제부터라도 한글만 쓰면서 한글 기계화의 입력과 출력을 세벌식으로 꾀하여야 겨레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민족 앞에 유언처럼 선포하고 싶은 것이요,

둘째는, 나에 관한 기사가 책 또는 잡지나 신문에 가끔 나온 것을 볼 때마다 사실과 다른 점이 더러 눈에 띄었기에 잘못된 자료가 진실로 둔갑할 우려가 있어, 내 스스로가 진실을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기를 들면 "한글 타자기의 시조 공 박사는……"라고 운운한 글을 보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글이다. 나보다 먼저 한글 타자기를 만든 분들이 있었다. 내가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가장 처음으로 발명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고성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부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과학적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싶은 것이요,

셋째는, 나는 지금까지 싸움을 많이 했는데 왜 싸웠는지 그 까닭을 밝히고 싶어서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비과학적인 표준판을 폐지하라는 한글 기계의 글자판 싸움이다. 이 싸움을 근 20년 가까이 해 오면서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승산도 없는데 왜 싸우느냐?" "그렇게나 오래 싸웠는데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등의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꼭 이기려고 싸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한글 기계화 정책을 잘못해서 나라를 망치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싸운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역사에 한 줄 기록이라도 올바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싸운 것 뿐이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한글을 아직도 천대하고 있는 남한 동포들에게 한글 기계화에 관한 올바른 과학을 어찌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밝혔으면 함이요,

넷째는, 내가 안과 의사로서, 세벌식 한글 타자기 발명가로서, 한글쓰기 무른모를 직결 방식으로 개발한 이로서, 그리고 세벌식 자판 통일을 완성한 연구가로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협조를 받았고, 6·25 난리 때는 죽을 고비에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와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 많은 은인들에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온 과정을 알려 드리는 동시에 고마움의 뜻을 올리려는 것이다.

나는, 누리를 살아가는 데 있어 흔히 말하는 사교술이나 처세술을 몰라서 가족들로부터 가끔 핀잔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는 신조로 살아 왔다. 그리고 민족 문화의 빠른 발전을 위해 한글 전용과 한글 과학화 연구에 내 정열과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썼다. 한편,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자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내 형편 닿는 대로 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민족 문화와 복지 사업에 다소나마 일하게 된 직접적인 뿌리는 내 할아버지께서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라는 어렸을 때부터 들려주신 교육적인 말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평소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전쟁과 같은 살아남기 힘든 때를 만나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을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려 주셨다. 나는 그 덕분으로 6·25 때,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으로 공산 치하의 감옥 속에서도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그 교육적인 의도가 담겼던 말씀이, 누리를 약삭빠르고 나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교술보다 훨씬 값진 것이란 점을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이 책의 발간 취지에 섞여 있다.

내 걸어온 길을 더듬어,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어떤 꾸밈이나 주저함이 없이 기록하여 누리에 밝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지난날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내 고백이, 읽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여러 가지 자료를 제대로 모아 두지 않은 탓과 내 나이 여든이 넘어 기억력이 쇠퇴한 탓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부분이 빠졌을 수도 있고, 잘못 적은 부분이 있을 듯해 염려스럽다. 뒤늦게라도 그런 부분이 발견되면 고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라도 잘못된 부분은 바로 고쳐지기를 바란다.

끝으로, 내가 내 식대로 살아오게끔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고맙게 생각하며, 내가 내 식대로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랑과 도움을 주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은사님들, 내 아내, 그리고 내 가족과 친척, 동무들에게 참 마음으로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또 이 책을 내기까지 직접, 간접으로 도와 주신 여러 사람들과 특히 원고 정리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면서 거들어 주신 '미주 한글 문화 연구원' 원장 신태민 선생과 '한글 기계화 추진회' 회장 송현 선생에게 참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1989. 8. 15.

제 1 장 팔삭둥이 쌍둥이

가난 딛고 부농이 된 할아버지

내가 태어난 곳은 그야말로 한국의 북녘 구석진 산골이다. 나는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상동 388번지에 있는 큰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이곳에 최초로 자리를 잡았던 집은 동향의 조그마한 초가집 농가였다.

북쪽으로 16킬로미터를 더 가면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내 고향 마을은 겹겹이 뫼(산)로 에워싸인 산골이기는 하지만, 자연에 둘러싸인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우리 집 오른쪽 '덜골'이란 깊은 산골짜기가 있고, 그 막바지에는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한 높은 능선이 있다. 그 뫼의 능선은 나무가 무성하여, 하늘은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짐승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소, 말, 사슴, 곰, 토끼, 꿩 같은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능선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멀리 보이는 그 능선을 신기하게 보면서 자라났다. 그래서 요즘도 이따금 강원도에 갈 경우 높은 능선에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고향 이 몹시 그러워지곤 한다.

덜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은 우리 집 앞을 가로질러서, 왼쪽에 세로로 흐르고 있는 큰 가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 집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개울 건너 쪽은 넓은 벌판이다. 벌판에는 여기저기 농가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 집 왼쪽에는 큰 가람이 먼 산골에서 흘러 내려와 덜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과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큰 가람은 16킬로미터 가량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우리 집의 뒷녘은 솔밭 우거진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바람막이 구실을 한다. 맑은 강물과 뒷산의 솔밭, 그리고 덜골 막바지에 있는 높은 능선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전망 좋고 양지바른 이 집을 가리켜 '양짓집'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낚시를 하다 보면, 펄펄 뛰는 메기, 농강이, 쏘가리 등이 곧잘 물리어 시골집 식탁을 푸짐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내가 태어나 자라난 고향을 죽기 전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휴전선에 가로막혀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름다운 산골에서 자라날 무렵, 일본 제국주의의 말발굽이 이 깊은 산골까지 짓밟았다.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벽동읍에 경찰서가 들어서고, 일본 수비대까지 주둔하였다. 우리 집 근처에는 주재소가 들어섰다. 일본 순사가 두 사람, 조선 순사 한 사람 모두 세 사람이 근무하였다. 그 뒤 2학년 밖에 없는 보통학교(초등 학교)도 설립되었다. 나는 서당에 다니면서 중국 글(한문)을 배우다가 그만두고 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내 나이 13살 때, 경비가 삼엄한 벽동군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일로 일본 수비대가 총을 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공영팔이라는 내 친척은 주모자로 몰려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벽동읍으로 압송되었는데, 도중에 강가에서 뒤를 보겠다고 꾀를 부려, 수갑이 풀리는 순간 강가에 있는 돌로 압송하던 일본 순사를 머리를 때려 실신을 시키고 달아났다. 그는 곧바로 붙잡혀 벽동 읍내 경찰서 순사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날 밤에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하여 신의주 지방 법원에 고문 치사 사건으로 경찰서원들을 고발하였다.

그 때 나 같은 어린아이의 귀에도 독립군에게 보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일본 관헌의 끄나풀들의 보복이 두려워, 아버지는 우리 면에 와 있는 주재소를 적당히 도와주면서 한쪽으로는 독립군을 몰래 돕는 것 같았다.

독립군들이 압록강을 건너와서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악질 조선인을 총살하고 중국 땅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벽단에서 만석 부자로 알려진 최봉학은 독립군에게 협력하지 않아 끝내는 살해되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독립군의 백두산 은신처에서 가까운 마을 가운데 하나여서, 겉으로는 고요한 듯 해도 실상은 독립 투사들의 애국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고장 같았다. 자작농으로 성공한 할아버지(공희수)는 삼형제 가운데 둘째여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마지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곳에 와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어엿한 살림을 꾸며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초라한 초가집에서 일가를 일으킨 분이다. 그야말로 농사일밖에 모르는 근면하고 순박한 농사꾼이었다. "일 잘하는 벽동 소"라는 속담이 있다. 소문난 벽동 산골의 소처럼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일 잘하는 벽동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그 일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어엿한 살림을 꾸민 대지주가 되어 기와집에서 살게 된 이름난 부농이 되었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는 두 세대나 우리 집에 들어와 막간살이(더부살이)를 하며 우리 집 부엌일도 돕고 소 여물도 쑤는 잡일을 했다.

그 어느 해였던가, 심한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리 집에서 막간살이하는 식구들도 돌림병에 걸려 폐렴으로 두 식구나 죽었다. 주인집 사람들은 영양 상태가 좋아 전염병도 잘 안 걸리는 것일까.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사람만이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을 보고, '나는 커서 의사가 되어 저런 가엾은 사람의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꾸어 보기도 하였다.

어쨌든 간에 아버지(공정규)는 할아버지 덕분으로 소출 받은 것을 밑천으로 상업을 시작하여 농촌에서 보기 드문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때 미국인이 채광을 하던 대유동 금광 바닥에서 잡화상을 벌여 짭짤하게 돈을 벌기도 했다. 그 뒤 이 마을 저 고을을 다니며 낟알을 모아 신의주에 가서 파는 이른바 곡물 상인으로 발전하였다. 상인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것인지 한때 아버지는 금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신의주 형무소 생활을 1년 동안 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동익상회를 경영할 때, 마라톤 왕 손기정 씨가 그 상점에서 근무하다가, 내 동생 공병도와 함께 서울 양정 고보에 입학을 했다. 나중에 손씨가 세계적으로 빛나는 이름을 떨치게 되니 이같은 소년 시절의 인연도 우리 고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외양간 앞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는 11살 때 내 어머니(김택규)와 결혼하셨다. 시집 온 내 어머니는 집안 살림뿐 아니라 농사일까지 거들어야 했다. 쌍둥이를 밴 어머니는 임신 중이라고 팔자 좋게 요양을 취해 가며 살 형편은 못 되었다. 임신 8개월은 무거운 몸이었지만 음력 섣달 그믐날이라 다음날 맞을 설날 준비로 보통 때보다도 더 바쁘고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외양간에 있는 소한테도 여물 끓여 먹일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진종일 계속되는 일에 피곤했던 산모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를 느끼면서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여물을 가지고 외양간으로 갔다. 그 때 갑자기 산모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외양간 앞에서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어 그만 애를 낳게 된 것 이다. 방안에 계신 시어머니는 귀가 어두워 산고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때마침 집에 들어오시던 할아버지가 발견하여 애와 산모는 간신히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으로 들어간 산모는 쌍둥이 아우를 계속 낳았다. 섣달 그믐날 밖에서 태어나 자칫하면 숨질 뻔 했던 팔삭둥이 아기가 바로 나라고 한다. 외양간 앞에서 태어난 나는 보육기(인큐베이터)도 없는 시대에 달도 차지 못한 미숙아 상태에서 용케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06년 음력 12월 30일(양력으로 1907년 1월 24일)의 일이다. 밖에서 태어난 나는 살고, 방안에서 난 내 쌍둥이 동생은 얼마 안 가서 죽었다고 한다. "그 때 넌 죽는 건데, 그래도 귀하다는 산삼을 달여 먹여 생명을 겨우 건 질 수 있었던 거야. 그 때부터 핏기가 돌기가 되었으니 말이야." 내 할아버지 말씀이었다. 팔삭둥이가 기적적으로 살아 남게 된 까닭을 신령한 산삼 덕분이라고 할아버지는 믿고 계셨지만, 나는 산삼보다 사실은 가족의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댕기 머리 장손

나는 8남매 가운데 장손으로 태어났다. 내 위로 누님 한 분이 있고 내 밑으로 남동생 다섯과 누이동생 하나, 이렇게 8남매가 자랐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열 달을 못 채운 탓인지 몰라도 몸이 매우 약해 골골하면서 자랐다. 아우가 나보다도 힘이 셌다. 나는 여러 형제들 틈에서 제몫도 잘 찾아 먹지 못하는 약골이라 할머니께서 맛있는 것을 곧잘 감추어 두었다가 몰래 나에게 주곤 했다. 나는 당시 풍습대로 여자애들처럼 머리를 길게 땋고 붉은 댕기를 늘어뜨리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자랐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과 귀여움을 남달리 많이 받으며 자랐다. 더욱이 할아버지는 유별나게 나를 사랑한 나머지 내게 특이한 교육을 시키기도 하셨는데,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제삿집이나 생일, 혼인 잔치 등에는 일절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 무렵에 전염병이 많이 돌았다. 그리고 잔칫집 음식을 잘못 먹고 식중독에 잘 걸렸다. 전염병이나 식중독 같은 병을 옮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 예방책으로 일절 사람이 많이 모이는 남의 관혼상제 모임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일까? 할아버지의 깊은 뜻은 알 길이 없지만, 결국 나는 한살이를 남의 관혼상제에 참석 안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집안 문중이 모여 조상묘 앞에서 제사를 올릴 때만은 높은 뫼 위에서 지내는 야외 행사에도 예외로 내 손을 잡아끌고 가셨다. 할아버지의 이같은 교육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사회 생활하는 데 무척 서툰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주로 할아버지와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렇게도 자상하고 인정 많은 분이긴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내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몹시 심기가 불편한 상태로 지내시기도 하였다. 그 까닭은 어머니가 개화 물결과 함께 서북 지방에 상륙한 기독교에 귀의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점에 대한 할아버지의 반발 때문이었다. 양순하기만 했던 어머니도 신앙에 관한 한 당당하게 신앙의 자유를 내세우곤 해, 가끔 소리를 높여 말싸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서양 오랑캐교를 믿어 집안을 망하게 하는 며느리란 말이야" 하고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매도하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앙의 열심도도 만만치 않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맞섰던 것이다. 유교적인 것으로 꽉 차 있는 할아버지와 기독교적인 것으로 꽉 차 있는 어머니는 모든 일에 대결이었고 두 분이 똑같이 극단적이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 논쟁 때문에 어린 우리들은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기대며 남은 인생을 보내셨다. 본시 어머니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으나 시집온 뒤로는 예배당에 나가지 못했었다. 예배당에 다시 나가게 된 동기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정떨어질 사연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첩을 얻어 따로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잊고 살던 교회를 되찾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자 신의주에 요즘 말로 현지처를 두고 이중 생활을 하신 모양이다. 이같은 아버지의 첩살림을 시골에서 알게 된 어머니는 예배당에 다시 나가 마음을 달래고 하느님의 보호 아래 모든 근심 걱정을 삭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황해도 해주 도립 병원에서 근무하던 때, 동경에서 대학에 다니던 내 첫째 아우 공병도는 길을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 일 때문에 나는 한동안 길을 건널 때마다 끔찍한 동생의 일이 생각나 교통 사고의 공포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내 둘째 동생은 북한에서 살다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이산가족 찾기회를 통해 알았다. 그 자손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조카 공영인의 글월(편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셋째 아우 공병선이와 막내아우 공병효는 해방 뒤 월남하여 모두 잘 지내고 있다. 넷째 아우 공병무는 6· 25 전쟁 뒤 한강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깊은 물에 빠져 생명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방 뒤 공산당에게 쫓겨나게 되었다. 막대한 자산을 버리고 서울로 월남하여 사시던 아버님은 위암으로, 어머님은 좌골 신경통으로 오랫동안 병석에서 앓다가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열네 살에 든 장가

보통학교(초등 학교) 2학년을 수료할 무렵, 나는 어른들이 정해 준 바에 따라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고녀 아가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추수철이 되기만 하면 50리 떨어진 벽단이란 마을에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타작을 받아 오곤 했다. 이 때 할아버지는 눈여겨봐 두었던 규숫감을 그 동네에서 구한 것이다. 벽단에서 사는 나보다 세 살 연상의 색시였다. 내 나이 만 열 네 살 때였는데 결혼이 뭔지 여자가 뭔지 전혀 몰랐다. 그저 틈만 있으면 여름에는 물놀이와 고기잡이, 겨울에는 세모꼴 나무토막에 굵은 철사로 날을 세운 썰매를 타며 즐겼고, 아니면 새잡이 덫을 놓아 멧새 잡기에 열중하였고 올가미를 놓아 토끼도 곧잘 잡곤 했다. 그런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린 내가 장가를 든 것이다.

나는 색시보다는 솔직히 말해 멧새 잡는 쪽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더 재미있었다. 색시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것만 알 뿐 정확하게 몇 살 위였는지조차 몰랐다. 장가가던 날, 말 안장판의 알록달록한 무늬는 생각이 나는데, 내가 그 말을 타고 그 먼 곳을 어떻게 갔는지 또 대례를 어떻게 치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 시대는 부모가 자식의 결혼 상대를 결정짓고 이 사람하고 살아라 하면 그냥 순종해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색시는 2년 동안 바로 시집에 오지 않고 내가 처갓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보통학교 2학년 과정의 학교밖에 없었으므로 3학년 전학을 하기 위해 색시네 집이 있는 벽단으로 가서 하숙집 삼아, 신혼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처갓집이 있는 곳도 4학년 제도의 보통학교밖에 없는 곳이라 2년 동안만 색시와 함께 지내며 살았다. 말이 신혼 생활이지 차라리 초등 학교 3학년 어린이를 시중들어 주는 여인과 함께 유숙하는 생활이었다는 게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4학년 수료 후 나는 비로소 벽동골로 또 전학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게 된 뒤에는 공부를 위해 계속해서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줄곧 아내와 떨어져 살게도 되었지만, 차츰 부모의 결정으로 조혼을 하게 된 점을 비관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더욱 공부에만 열중하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지긋지긋했던 서당 공부

열세 살 되던 해까지 나는 머리를 길게 치렁치렁 땋고 서당에 다녔다. 매일 일과는 중국글인 한문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달달 외는 지겨운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외국글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공부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지긋지긋한 생각이 든다. 내가 한살이 동안 한글 전용을 강하게 부르짖게 된 것도 서당에서 어려운 한문 공부를 해본 데 뿌리가 있다.

일본 사람들은 중국글을 일본말로 번역한 책으로 배웠기 때문에 중국글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일본말도 자연히 늘어났다. 우리 나라는 중국글을 그 대로 배워 썼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말은 줄어들고, 중국말인 한자말이 늘어났다. 현재 한문자와 한자 낱말을 쓰는 사람들은 아직 사대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천자문은 할아버지한테서 직접 배웠다. 「동몽선습」 이후의 한문 과정은 서당에 다니며 배웠다. 날마다 외워야만 하는 공부에 싫증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는 서당에 가기 싫어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더니, 나를 극진히 사랑하던 할아버지께서는 병을 앓아 본 일이 없는 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니 놀라, 곧 한의사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의사는 난데없이 괴춤에서 동침을 꺼내, 침을 놔야 낫겠다면서 머리에 쓱쓱 문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꾀병이니 안 맞아도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배에 수없이 침을 맞았다. 이 때 어린 마음에 '이 사람은 내 꾀병도 못 알아 보는 엉터리 돌팔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커서 꾀병도 분간할 줄 아는 진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의사의 꿈을 품게 되었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한의사는 내가 꾀병을 앓는 것을 다 알고서도 일부러 침을 마구 놔 준 진짜 명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는 이 꾀병 덕분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공의가 16킬로미터의 길을 말을 타고 왕진을 와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몹시 부러웠던 터였다. 나는 이렇게 서당 다니는 것이 싫어 꾀병을 부리다가 얼토당토않게 의사가 될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때에 성남면 동네에 주재소가 들어서면서 일본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학교가 들어섰다. 나는 아버지의 개화된 판단력 때문에 서당을 그만 두고, 긴 머리를 깎아 버리고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리를 깎은 모습을 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척 서운해하시면서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총각들이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땋고 다니던 그 시절에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유교적인 생각으로는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다. 단발령이 내렸을 때 자살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눈물도 이해할 만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학교 시절

신식 서당인 학교엘 갔더니 별의별 것을 다 가르치는 것이었다. 조선말, 일본말, 산술 등등 실로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서당에서 한문만 외워 대는 단조롭던 암기식 교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모든 것이 다 새롭기만 했다. 책읽기뿐 아니라 셈하는 방법에다 자연, 과학까지도 가르치는 것이었다.

가끔 넓은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게도 해 주었고 체조도 가르쳐 주었다. 사람이 죽은 뒤 아무 데나 자기네들 좋은 자리에 묏자리를 마구 써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가르치는 것이었다. 반드시 공동 묘지에만 묘를 써야 한다는 것인데 이치에 닿는 이야기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내 신식 공부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이 보통학교는 2년제여서 2년을 마친 뒤에는 처갓집이 있는 벽단으로 가서 4년 수료를 하고, 5학년은 또 벽동 읍내로 전학해 가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다. 이 때 6촌 동생인 병순이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내 5촌뻘이 되는 아저씨로 우리 성남면의 면장을 지내고 있는 유력자였다. 그런 배경으로 일본 사람 경찰관의 아이들이 읽고 난 잡지를 병순이는 곧잘 얻어 보곤 했는데, 나는 그가 보고 난 뒤에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잡지들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외의 각종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철저하게 책을 즐기면서 샅샅이 읽었다. 이 때부터 나는 책읽기의 참맛을 들이게 되었다.

책읽기 덕분에 많은 지식과 일반 상식을 익힐 수 있었다. 이 때가 한살이 동안 책읽기를 즐기며 살 수 있는 사람으로 굳혀진 때라 말할 수 있다.

보통학교 2학년 때, 큰 도시에 가서 상업을 하시는 아버님은 집에 오실 때는 조선말 동화책을 구해다 주시곤 했는데, 그것으로 한글 서적에도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지금은 작가가 누구인지 생각조차 안 나지만 「거북이와 토끼」, 「꿩」이란 제목의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제 2 장 내 인생의 길을 바꾼 한 편의 작문

농업 학교 입학

나는 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한 뒤, 6학년 진학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곧바로 신의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그러나 실력 부족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의주에 있는, 누구나 무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는 3년제 농업 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는 한국 사람 교사는 한 사람뿐이었고, 교장 선생 이하 모두가 일본 사람 교사였다.

나는 농업 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여태까지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의 변화 때문에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난생 처음으로 하게 된 데에다 날마다 부딪치는 식사 문제가 당장 큰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으며 자랐는데 기숙사에서 나오는 것은 한결같이 좁쌀밥에 짜디짠 새우젓 따위가 고작이었다. 가끔 구린 냄새가 나는 된장이 나오기도 하고, 소금이 씹히는 조개젓이 나오기도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좁쌀밥이 목에 잘 넘어가지 않아 숟갈을 던지고 거의 굶다시피 했다. 교도소 죄수들의 식사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면서 밥투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한 주일쯤 지나니 좁쌀밥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그 당시의 농업 학교는 실습한답시고 밭에 나가 농사일을 주로 하였다. 날마다 농장에 나가 땅을 파고 김을 매고, 오줌과 똥을 변소에서 밭으로 퍼 나르는 등의 중노동으로 웬만큼 먹어도 마냥 배고플 뿐이었다. 목이 깔깔해서 못 먹겠다던 좁쌀밥도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 되고 보니, 이밥 조밥 가리면서 밥투정한다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짓이었는지를 곧 깨닫게 되었다. 역시 사람이란 배고픈 경험을 해 봐야, 좁쌀 한 톨이라도 귀한 줄 알게 되는가 보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

기숙사 생활은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또 엄격했다. 그래서 공동 생활 훈련장으로는 좋은 점도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에서 잠자리에 눕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규칙에 따라 생활을 해야 했다. 잠자는 시간 이후에는 전등을 꺼야만 하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음식을 사다가 먹어도 안 된다는 규칙도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듯 했다. 밤이면 기숙생들은 숙직 선생 몰래, 값이 싼 호떡을 사다가 군것질을 하곤 했다. 이런 심부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급생들이 도맡아 했다.

한참 자랄 나이에 심한 노동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모두들 자나깨나 그저 먹는 타령뿐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배고파서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에는 농장에 나가 동무가 망을 보고, 나는 엎드려 일년감(토마토) 밭으로 살살 기어 들어가 몇 개 따 가지고 나와 둘이서 맛있게 나누어 먹은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가축 당번 때 몰래 먹으려고 달걀을 감추어 두었다가 먹어 보지도 못하고 발각되어, 교장 선생한테 불려 가 여러 선생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때 나는 "열흘을 굶으면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을 실감나게 체험했다. 한창 먹어야 할 시절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늘 배고파 허덕였으니, 한살이를 통해 그토록 배고파 보기는 그 무렵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내가 이런 배고픈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뒤 교장 선생을 공격하는 작문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맹 휴교의 주모자

우리들의 중노동은 여전하였고, 먹성 좋은 우리들의 허기증도 더욱 심해졌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들에게 뫼를 깎아 내고 운동장 만드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는 초등학교를 갓 나온 신입생들에게는 대단히 힘겨운 중노동이었다.

"신입생들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우리는 마침내 정중하게 교장 선생에게 항의를 하면서 동맹 휴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주모자들만 희생되고 말았다.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는 나이가 가장 어린 꼬마라 해서 퇴학만은 겨우 면하게 되었다. 나에게만 용서를 해 준 특혜 속에는 연소자란 이유 말고, 혹시 평안북도 평의원이고 면장이었던 5촌 아저씨의 입김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어린 나이로 정의감에 불타 이런 일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속박이 없는 가정 교육을 받은 덕분에 생긴 자유분방한 기질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우에 닿지 않는 일이거나, 정의에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그냥 덮어두거나 눈감아 주지 못하는 내 깐깐한 성질은 중학 시절부터 싹텄던 것 같다.

상급생에게 칼 품고 달려든 하급생

1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나는 2학년 상급생에게 불려 가 그 방의 여러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았다. 내가 매를 맞을 만한 특별한 잘못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하급생인 내가 너무 건방지다면서 덮어놓고 때린 것이다. 그야말로 생트집을 잡아 마구 때렸다. 집에서 귀여움만 받아 가며 귀하게 자라난 나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억울한 봉변이었다. 치가 떨리고 원통하기만 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내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동안 울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를 때린 상급생은 내가 달마다 책방에서 사다가 보고 있는 잡지를 번번이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빌려주곤 했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하도 고압적인 자세로 상급생 티를 내 가며 "야, 책 좀 보자" 하기에 못마땅해 책을 안 빌려 준 적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다가 '하급생이 건방지다'는 까닭을 내걸고 나를 마구 때린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억울하게 맞은 것이다. 나는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퇴학을 각오하고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상급생 방으로 달려갔다. 내가 주머니칼을 든 것은 나이가 많은 상급생을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칼을 들이대며 외쳤다.

"왜 나를 때렸는지 이유를 솔직히 말해 봐."

나는 사생 결단을 내릴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극도로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칼이 번득였다. 그 방의 기숙생들은 겁에 질려, 나를 강제로 밀어내려고 했다. 내가 악쓰는 큰 소리로 조용했던 기숙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그 방 앞으로 기숙생들이 와르르 모여들었다. 나는 상급생에게 칼을 들이댄 채로 상하급생이 다 주시하는 가운데 거침없이 상급생의 횡포를 큰 소리로 규탄하였다.

"왜, 아무 이유도 없이 하급생을 때리는 거야! 상급생이면 상급생으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더 이상 이런 모욕은 참을 수가 없어. 어디 다시 한 번 때려 봐!"

상급생에게 말로 대드는 일도 없었거니와, 상급생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은 그 학교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무렵에는 상급생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말만 해도 몰매 맞기를 자청하는 꼴이 될 정도로 상급생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니 하급생은 누구나 상급생에게 맹종할 뿐이지, 상급생의 월권이나 부정에 감히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는 칼을 들이대기 전에 이미 퇴학을 각오했고, 또 경찰에 끌려갈 각오도 했었다. 만약, 퇴학을 맞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께 크게 꾸중을 듣고 혼이 날 것도 각오한 것이다. 내가 상급생을 찌를 듯이 사납게 대들 때 한덕희라는 내 동무가 말려 결국은 내 방으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분한 감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날 밤 사감 선생도 상급생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좁쌀영감처럼 사소한 일까지 참견하며 야단을 잘 치던 교장 선생도 아무 말이 없었고 경찰도 오지 않았다.

나는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3일을 지냈다. 나흘째 되는 날 한덕희, 방세정 두 동무의 간곡한 권고에 못 이겨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내가 칼을 들고 상급생에게 대든 사건을 일절 불문에 붙이자는 묵계라도 한 듯이 상급생도 선생들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급생이 한 짓이 부당한 횡포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뒤부터는 상급생들이 하급생에게 가하는 횡포가 훨씬 줄었다. 이 체험은 내가 한살이 동안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데, 맨 처음 출발이 된 셈이다.

교장을 비판한 작문

2학년 2학기가 되었다. 늦은 가을을 맞아 작문 담당의 와따나베 선생은 우리들에게 자유 제목으로 작문을 지어내라고 했다. 이 선생은 동경 대학 출신의 웅변가로서 이 학교의 부교장직도 맡고 있었다.

나는 "나의 희망과 농업 학교"라는 제목으로 공책 6쪽쯤 되는 긴 작문을 썼다. 작문 내용은 주로 교장 선생이 학교 운영을 잘못하는 것 같다는 비판이었다. 쉽게 말해 교장을 까고 교육 방침을 비판하는, 당시의 학생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런 글이었다. 기숙생들의 식생활은 감옥 죄수들의 것과 다름이 없고, 상급생은 하급생을 노예 다루듯 하고, 심부름은 말 할 것도 없고 양말 빨래까지 시키는 풍조도 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 감언이설로 학생들을 동원하여, 뫼를 깎아 운동장을 만드는 중노동까지 시켰다고 쏘아붙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교장 선생이 관존 민비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럽다는 것까지 지적했다. 교장 선생은 걸핏하면 학생들에게,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군청 서기나 혹은 면사무소 서기가 되라고 하면서 왜 농업 학교에서 훌륭한 농업 기술을 배워 고향에 가 일등 가는 독농가가 되라는 말은 안 하는가? 하고 비판하였다. 그 고마쓰 교장 선생은 60 늙은이로 카이저 수염을 단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눈도 커서 퍽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글을 써 놓고도 작문 공책을 내놓을까 말까 몹시 망설이다가 '나의 바른 양심의 소린데 뭐' 하는 생각이 불끈 오기처럼 솟아나 그대로 내놓았던 것이다. 지난번 상급생과 했던 싸움에서 이긴 것을 통해서 정의를 위해서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확신을 더욱 얻은 듯 했다. 한 주일이 지난 뒤 작문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와따나베 선생은 작문 공책을 한 아름 안고 교실로 들어와 학생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 작문 공책은 돌려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이구, 내 작문이 드디어 걸렸구나.'

어린 마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그런데 와따나베 선생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조용해요, 내가 작문 하나를 읽어 줄 테니, 잘 들어 봐요."

그는 고마쓰 교장 선생의 비리를 지적하여 쓴 내 작문을 웅변적인 어조로 유창하게 다 읽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로 듣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내 작문을 시원스레 다 읽은 와따나베 선생은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똑똑히 들어요, 여러 학생들의 작문은 대체로 천고마비의 가을 하늘이 맑고 푸르고 어쩌고 하면서 남의 글 흉내를 낸 글들이 많았는데, 그런 글은 죽은 글이야. 그런데 공병우 군의 글은 매우 색달라. 내용이 살아 있는 진짜 작문이란 말이다. 그런 점을 참작해서 오늘 작문 시간에도 자유 제목을 또 줄 테니 한 번 더 써 보도록 해요. 그리고 공 군의 작문은 압록강 일보에 보내어 신문에 실리도록 할 테니 신문에 나거든 다시 잘 읽어보도록 해요."

나는 이 같은 칭찬의 평보다는 만일 교장 선생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와따나베 선생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교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작문 공책도 없이, 만약 교장 선생이 이 일을 알면 어쩌나 하고, 한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수업이 끝난 뒤, 알고 보니 와따나베 선생은 1학년과 3학년 교실까지 가서, 수업 중이던 선생과 귓속말을 나눈 다음, 교단에 올라가 내 작문을 낭독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교무실에서, 그것도 교장이 자리에 앉아 있는 데서 교장을 비난하는 내 글을 낭독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젠 갈 데까지 다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기숙사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퇴학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학을 당한 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이같은 작문 파동이 있은지 사흘째 되는 날, 예측했던 대로 사환이 내게 와서 "저녁 식사 후 교장 사택으로 오란다"는 교장의 지시를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퇴학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관례로는 교장이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여러 선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꾸중을 하면 용서를 받을 학생이고, 퇴학을 시키기로 한 학생은 따로 사택으로 불러 조용히 타일러서 누구도 모르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예사였기 때문이다.

와따나베 선생이 내 작문 내용을 전 학생들과 교장을 포함한 교직원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나는 3일 동안 고민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결국 내가 쓴 글 한 편으로 내 운명을 개척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걱정했었다.

와따나베 선생의 솔직하고도 건설적인 비평으로 내 작문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내 작문을 학교 전체에 공개한 와따나베 선생은 교장 선생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다음 지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듯이 교장 선생은 내 비판을 선의로 받아들였고, 내 앞길을 개척해 주는 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 쓴 글이니 뭐 그리 대단한 글이었을까마는 적어도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소박하게나마 정확하게 표시한 듯 하다. 농업 학교 기숙사에는 150명 가량의 학생이 유숙하고 있었는데, 신문, 잡지를 읽는 학생은 나 이외에 별로 없는 듯 했다. 나는 어린 소년 시절에도 서울에서 발간되는 경성일보와 여러 잡지를 즐겨 읽었다. 그 책읽기 덕분에 다소나마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독서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은 과연 옳은 말이다. 책읽기는 내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슬기를 준 인생의 뿌리 구실을 해 주었다.

의사가 될 길이 열렸다

퇴학 처벌을 받을 것을 나는 이미 각오했지만, 집에 돌아가면 받게 될 아버지의 벌이 더욱 걱정이었다. 엄한 아버지께 무어라고 변명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퇴학당한 뒤의 내 앞날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이불 속에서 3일 동안을 고민하다가 일어나 교장 사택을 찾아갔다.

드디어 나는 교장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었다. '퇴학'을 어떤 방식으로 나한테 말씀하실 것인가 그것만이 남은 문제였다. 이윽고 교장의 말씀이 떨어졌다.

"너는 앞으로도 1년을 더 다녀야 이 학교를 졸업하겠지만, 이미 너는 졸업생과 동등한 실력이 있다고 본다. 이 학교를 더 다닐 필요가 없어. 난 네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너의 보통학교 교장의 추천서를 통해 진작 알고 있었다. 헌데 말이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알겠나? 그래서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치과 의사, 어때 해볼 생각은 없나? 그 길은 조금 수월한 길이 있거든. 경성(서울)에 사립 치과 전문 학교 가 있는데, 그 학교 교장과 나와는 아주 막역한 사이지. 네가 나의 추천장만 가지고 가면, 형식적인 입학 시험만 보고 합격시켜 줄 거야. 치과 의사도 훌륭한 직업이야. 네 생각은 어때?"

교장 선생의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장 선생의 말을 도저히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교장의 꿍꿍이속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역시 예측한 대로구나, 결국 나를 내쫓겠다는 말이구나. 나는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교장은 나에게 손수 차까지 권하면서, 계속해서 부드러운 말씨로 치과 전문 학교를 적극 추천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치과 의사는 돈도 잘 벌 수 있다면서 나를 설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이런 식으로 나를 달래서 학교에서 내쫓으려 하는구나 싶어서, 나는 퇴학을 시키지 말고 용서해 달라고 빌기만 했다. "교장 선생님, 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내가 아무리 빌었으나, 교장 선생은 계속해서 나에게 치과 의사의 길을 권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끌었으면, 교장 선생님도 이젠 본심을 드러낼 때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넌 퇴학 처분이니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하는 말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기숙사의 소등 시간인 10시가 다 되었다.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계속 퇴학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는 나에게, 교장 선생은 치과 의사에 관심을 가져 보라는 권고만 계속했다. 교장 선생의 끈질긴 권고는 2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지루한 권고에 내가 질릴 지경이었다. 나는 교장 선생의 참마음을 떠볼 양으로

"교장 선생님, 만일 제가 서울에 가서 치과 전문 학교에 합격이 안 되면 다시 돌아와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여쭈어 봤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은 지체없이

"아, 그야 물론이지, 되돌아와 공부를 할 수 있다마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내친 김에 용기를 내어 또 한 가지 물음 을 덧붙였다.

"치과 학교가 있는 서울로 가는 길에 평양 의학 강습소에 들러 시험을 한 번 쳐 봐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무렵에 평안남도 도청에서 '평양 의학 강습소'를 설립하여, 내년 4월 부터 도비로 운영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이 강습소만 나오면 서울의 총독부 의사 검정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그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떨어져도 돌아와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염치 좋은 물음까지 했다. 교장 선생은

"그래, 그래, 그렇게 해! 그러나 그 강습소는 장차 의학 전문 학교로 승격시킬 것을 전제로 정부에서 세운 강습소거든, 그래서 정규 고등학교 졸업생들도 입학 시험에 합격하기가 무척 힘들거야. 더군다나 너는 물리학, 수학, 화학 등을 도무지 배운 적이 없는 농업 학교의 2학년 재학생이니, 시험 칠 자격조차 미달인 셈이야. 네가 합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수학, 물리, 화학을 배운 고등학교 정규 졸업생들도 합격하기가 어려운 의학 강습소에 수험 과목들을 전혀 배우지 아니한 네가 어떻게 합격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굳이 하고 싶으면 해 봐."

그리고 교장 선생은 나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은 부리지도 말라는 교훈까지 곁들이면서 내 앞날까지 걱정해 주었다. 어쨌든 나는 입시에 실패를 하더라도 학교에 되돌아와 공부할 수 있다는 언약은 받아 놓은 셈이다. 그래서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다른 학교로 옮겨가겠다는 학생이 있으면, 왕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던 바로 그 교장 선생이 이렇게 인자하게도 나에게는 두 군데씩이나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었으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고마운 온정이 넘치는 특혜까지 주겠다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로 불합격하고 돌아와도 받아 줄 것인가? 나를 퇴학시키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 아닐까?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우선 당장에 퇴학은 안 당하게 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 교장 선생님께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거듭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뒤 처음으로 맞게 된 일요일이 왔다. 나는 새벽에 학교에서 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압록강으로 나가서 한국인의 뱃삯보다 값이 싼 중국인의 풍선을 타고 신의주로 내려갔다. 자동차로 가면 한 시간에 갈 수 있지만, 배로는 여러 시간 걸렸다. 책을 사려고 신의주에 있는 서점에 가보니, 책값이 너무 비싸 살 수가 없었다. 압록강 철교를 걸어서 건너 중국 안동현 도둑거리까지 찾아갔다. 주로 아편쟁이들의 소행이겠지만, 신의주에서 도둑맞은 학생들의 책들이 이곳 도둑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정규 인문계 학교인 신의주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하는 물리학, 수학, 화학 등 세 가지 책을 싼값으로 사 가지고 다시 중국인 풍선을 타고 밤늦게 바람에 부풀어 기숙사로 돌아왔다.

합승 자동차를 이용하면 2시간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새책도 아닌 헌책 세 권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느라고 왕복 12시간 이상 걸리는 쇼핑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는 시간보다도 돈을 더 귀중하게 여긴 바보였다. 그래서 세 권의 책을 사 든 내 입에서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바람에 넘치는 기쁜 마음으로 국경을 넘어 압록강을 거슬러 돌아온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 학기의 시험을 앞두고 나는 밤낮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그야말로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수학, 물리학, 화학을 독학으로 자습하는 힘겨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잠자는 시간이어서 누구나 불을 끄고 자야만 했다. 나는 이불 속에다 전등을 감추고 공부를 계속했다. 사감 선생한테 들키면 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 나중에는 새벽 4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공부 독이 올라 잠이 달아났다기보다는, 새 학문의 공부가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수험생들이 겪기 쉬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해 가며, 나는 석 달 동안 무섭게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시험 준비 공부였지만, 앞날의 바람으로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독학으로 생소한 학문을 교과서만 갖고 씨름해 가며 펼쳐 나가는 공부였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끝없는 지적 호기심에 불이 붙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세 과목을 골고루 공부하자니 초조하긴 했지만 계획표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평양 의학 강습소의 시험 과목은 물리, 수학, 화학, 작문, 모두 네 과목이었다. 그런데 시험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루는 같은 방의 실장인 상급생이 나에게 밑도 끝도 없이

"너 평양 의학 강습소에 시험 보러 간다며?"

하고 말했다.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몰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너, 그것 단념하는 게 좋겠다고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그 까닭을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날더러 너에게 가서 이 말을 자세히 전하고 오랬어."

실장은 교장에게 불려 가서 교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 주는 것 이었다.

"사실은, 교장 선생이 공병우 너에게 잘 설명해서 평양 의학 강습소 입학 시험 보는 것을 단념하도록 권고해 보라는 거야……."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교장 선생님께서 이미 허락을 해 주시고는 이제 와서 이럴 수가… …."

나는 온몸이 떨렸다.

"글쎄, 교장 선생님의 처지가 참 딱하게 됐어. 알다시피 말이다."

실장이 전하는 말을 나는 눈을 감은 채 듣고만 있었다.

"왜 있잖아, 신학기가 되면 으레 다른 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는 학생이 생기게 마련인데, 글쎄 이번엔 학교를 떠나려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 문제가 됐다는 거야. 그래서 교직원 회의가 정식으로 소집되고, 그런 학생에 대한 징계 문제까지 논의하게 됐다는 거야……."

어떤 선생은 교장에게 맞대 놓고 "공병우에게는 공공연하게 다른 학교로 가라고 교장이 직접 말해 준 일까지 있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됩니까? 그러면서도 다른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못 가게 처벌할 수가 있어요?"하고 따지며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장은 처지가 몹시 난처하게 되어, 마침내는 모든 교직원들 앞에서 사과를 하면서 여러 선생에게 양해 사항을 내놓을 터이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양해 사항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내가 자진해서 공병우 군에게 권고한 서울 치과 학교 입학 건은, 교육자인 내 소신도 있고 위신에도 관계되는 신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취소하기가 힘듭니다. 그렇지만 공병우 군이 제안한 평양 의학 강습소의 입시 문제만은 취소시키도록 하겠으니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실장의 말을 듣고 교장 선생이 나 때문에 난처한 지경에 빠진 것을 분명히 알았다. 당시 농업 학교의 신입생은 100명 가까이 되었지만 졸업할 무렵에는 도중에 이리저리 다 빠져나가 30여 명밖에는 남지 않았다. 학교 당국으로서는 다른 학교에 몰래 입학 시험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해마다 신학기가 가까워 오기만 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곤 했던 것이다. 이런 학교 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선뜻 실장에게 잘라 말했다.

"평양에 가는 걸 포기한다는 말을 교장 선생님께 전해 주세요."

이것이 나 때문에 곤경에 빠진 교장 선생을 도와 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나는 치과 학교라도 꼭 입학해야겠다는 단일 목표를 세우고 더욱 시험 공부에 열중했다.

의사가 되고 싶은 집념

마침내 시험날이 다가왔다. 서울 치과 학교를 향해 떠났다.

'만일에 합격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한다? 그까짓 것 교장이 되돌아와 공부 할 수 있다고 허락해 주셨는데 뭐. 되돌아와 또 다시 농업 학교 학생이 되어 얌전히 3학년을 졸업하면 그만 아닌가.'

서울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이런 생각 저런 궁리를 하였다. 그 때 뜻하지 않게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한번 마음먹은 의사가 되고 싶은 꿈, 그 집념이 또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평양 의학 강습소로 가자. 그러나 그것은 교장과 한 약속을 어기는 일이었다. 나는 서울로 가다가 도중에 평양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합격을 못 하면 서울로 가서 치과 학교의 시험을 보기로 하고, 평양 의학 강습소의 시험을 보았다는 사실은 숨기려고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한 일이니 우선 시험부터 슬그머니 치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시험장에서 그만 그 해에 졸업한 선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피차 놀랐다. 그 선배는 졸업을 하고 정식으로 시험을 보러 온 학생이었다. 바로 그 선배의 눈에 띄었으니 불원간 학교에 소문이 쫙 퍼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새로운 걱정을 하나 더 만든 셈이다.

그러나 그 선배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합격이 되었고, 그 선배는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 날 작문 시험 문제는 "왜 너는 의사가 되려고 하는가?"였다. 무엇이라 썼는지 지금 자세히 생각은 안 나지만, 내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가 없는 무의촌에 가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써 넣은 것 같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품고 있었던 의사가 되고 싶은 절실하고도 끈질긴 내 집념도 적었던 것 같다. 이 때 항간에서 "평북 산골의 농업 학교 2학년짜리 아이가 정규 학교인 평양 고보의 우등 졸업생하고 함께 입학이 되었다더라"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돌았다.

그 때 내가 만약 평양에서 하차하지 않고 서울로 직행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내 인생은 치과 의사 공병우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교장 선생에게 약속을 어긴 일을 사과도 할 겸, 합격 소식을 전하러 학교에 갔더니 교장 선생은 꾸중은커녕

"것봐, 내가 뭐랬어. 넌 우리 학교에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졸업생 최 군은 낙방이 되고 너는 합격이 되었으니 내 말이 맞았다."

하시며 자기 친자식의 합격 소식이나 접한 듯이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했다.

이렇게 극진히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교장 선생을 어린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나를 다른 데로 쫓아 보내려 했던 분이지만, 내가 뜻하지 않게 의학 강습소에 합격이 됐다니까 어쩔 수 없이 이제 적당히 좋게 얼버무려 하는 말일 게다'하고 오해를 하였다. 실로 어리석은 오해였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나이 80이 넘어서 고마쓰 교장 선생을 생각하니 그분의 은덕이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하다. 물론 교장 선생 외에도 나를 키워 준 은인은 한두 분이 아니다. 그런 은인들에게 조금도 보답을 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은 오직 내 교만함 때문이다. 그 은인들은 이미 누리를 떠났으니 결국 나는 보답할 시기를 놓치고 만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가 이 은인들에게 보답하지 못한 것을 딴 사람한테라도 갚아야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내 강렬한 집념대로 처음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이 강습소는 이른바 서울 총독부에서 해마다 봄, 가을로 두 차례 실시하는 의사 검정 시험을 보기 위한 시험 준비와 자격을 얻기 위한 곳이었다. 그러니 또 본격적인 의사 시험의 관문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자취를 해 가면서 열심히 의학 공부를 했다. 옷도 빨아 입어야 했고 양말도 기워 신어야 했다. 객지에서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던 나는, 연상의 아내가 우리 집에서 시집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나는 검소한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신문, 잡지나 필요한 책을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옷맵시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관심 밖의 일이다. 강습소에서 2년 반 공부하는 동안에 나는 의학의 기초가 되는 조직학도 열심히 공부했다. 조직학은 의사 검정 시험의 수험 과목은 아니다. 그래서 조직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직학이 의학의 뿌리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과목을 먼저 철저하게 공부했다. 내 판단은 옳았다. 결국 조직학의 기초가 후일 내 의사 생활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의사 검정 시험 공부도 골고루 하였다. 이 강습소에 입학한 학생의 대부분은 일본 사람이었고, 한국 학생은 전체 학생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살이 동안 졸업장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한살이를 통해 졸업장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못 다녀서 졸업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을 받을 학년을 늘 월반으로 생략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회 생활 하는데 졸업장 없는 내 학력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8개월만에 태어나서인지 교육 과정은 초등 학교에서 나중에 의사가 될 때까지의 과정 모두가 한결같이 속성으로 진행되었다. 남들은 몇 해 걸릴 일을 나는 검정 시험이나 자격 시험을 통해 속성으로 통과한 것이다. 나로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의학 박사의 학위도 정규 대학 졸업생이 보통 4년 걸려 따내는 것을 2년 동안에 땄다. 내가 공부하던 그 때는 일제 때였지만 졸업장보다도 실력을 소중하게 알아주던 때였다. 나는 실상 졸업장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도대체 졸업이란 무엇인가? 공부를 끝냈다는 뜻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학업은 계속될 일이지, 어떤 교육 과정을 졸업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별로 뜻이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졸업 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날마다 공부를 한다. 교육계에서는 평생 교육이란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바로 그 평생 교육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평생 교육에 어찌 졸업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졸업장 없이 공부를 계속해 온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한다. 졸업장 따기 위해 대학을 다닌다는 사회 풍조도 있고, 대학 간판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경박한 좋지 않은 분위기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같은 간판주의를 몹시 경멸한다. 졸업장을 코에 내걸고 취직이나, 출세나, 시집갈 때의 간판 미끼로 삼으려는 우리 나라의 사회 분위기는 정말 잘못된 것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회가 참다운 민주 사회라고 생각한다.

제 3 장 스무 살에 합격한 의사 검정 시험

첫사랑과 의사 검정 시험

평양 의학 강습소에서 공부한 지 1년 뒤에 나는 서울에 올라가 조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 검정 시험 제1부에 응시하였다. 응시자는 대부분이 일본 사람이었다. 그 때 평양 의학 강습생 50명 가운데에서 약 40명 가량 제1부에 응시하였으나, 1부 합격자는 단지 세 사람뿐이었다. 그 합격자 세 사람도 모두가 한국 사람이었다. 평양 고보 출신의 우등생 두 사람과 나였다. 낙방한 일본 사람들 가운데에는 평양 도립 병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총독부 의사 검정 시험은 한 해에 봄과 가을 두 번 있었다. 10년 동안에 스무 번이나 시험을 보았지만 1부에도 합격 못한 이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합격자 수는 극히 적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 검정 시험이라 동정을 하거나 사정을 참작하는 일은 조금도 없는 듯 했다. 나는 이 때의 의사 검정 시험이 얼마나 엄격하고 공정한가를 알았다. 일본 총독 치하이긴 했지만 일본 사람이라도 실력이 없는 사람은 정실로 합격시키지 않는 것을 보고,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무슨 일이건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때에 배웠다.

제1부 시험의 관문은 돌파했지만 제3부까지 계속해서 합격하기란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정규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한 사람한테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한 보람이 있어 그 이듬해에 나는 무난히 제2부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반년 뒤에 제3부 시험까지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평양 의학 강습소 2년 반 동안에 의사 검정 시험의 모든 과목을 세 번 응시하여 한 번도 낙방하지 않고 거뜬히 통과한 셈이다. 더욱이 제3부 시험은 일반 학과 시험과 다른 내과와 외과의 임상 시험이어서 강습소의 공부도 도립 병원에 나가, 임상 실습을 하는 일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제3부 시험이 가장 어려운 관문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임상 실습을 할 때의 일이다. 한 간호원이 유난히 나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16살 때 결혼은 했지만, 그 때까지 여성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젊은이였다. 이 간호원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여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보니 나는 사랑에 빠져 열병을 앓게 되었다. 내가 화끈 달게 되니 그렇게도 적극적이던 그녀가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끝내 그녀는 나를 배반하고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마도 내가 결혼한 사람이란 것을 뒤에 알게 된 때문이었을까? 이 때 당한 실연의 상처는 나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비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의 쓴잔을 마셔 본 사람만이 인생의 가치도, 참사랑의 맛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첫사랑에 성공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비관하였다. 그런 비관에 빠지자 인생 전체가 절망의 늪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좌절을 딛고 의사가 되는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였다. 여성에 눈을 뜬 나는 방학이 되자, 처가로 가서 처남댁에게 앞으로 의사가 되면, 내 처와 함께 살림을 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처음으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해봤으나 웬일인지 성사가 되지 않았다. 내 아내가 고녀3라는 것을 그 당시는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 방학이 이렇게 끝나고 겨우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강습소로 돌아와서 나는 또 다시 공부에 열중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루하루를 바쁜 일과 속에서 보내는 동안에 내 마음의 상처도 차츰 아물어 가는 듯 했다. 이제 제3부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는 것이 내게 당면한 목표였다.

이런 때, 어느 날 난데없이 고향에서 아내가 찾아왔다. 아내는 부인과 계통의 결함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평양 도립 병원엘 찾아왔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험을 눈앞에 두고 간신히 마음을 잡고 새로운 각오로 임하려던 나에게는 또 한 번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강습생들에게 환자를 직접 진찰하게 하고 치료 처방을 내리게 하는, 까다로운 실지 임상 시험인 3부 시험을 위해 긴장된 실습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도립 병원을 찾아왔다는 것이지만, 나를 믿고 찾아온 그녀를 남처럼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수술할 모든 수속을 마치고 아무 말 없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술이 끝날 예정 시간이 지났는데도 환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놀라서 들어가 알아보니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내는 수술을 받은 날 밤, 이 누리를 떠나고 말았다. 아내는 참으로 불쌍하고 기구한 여인이었다. 남편과 따뜻한 정 한 번 나누며 살아 보지도 못한 채 죽은 아내가 너무나 불쌍했다.

여러 해 동안 시험 준비에만 골몰하며 공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나에게 간호원과의 첫사랑의 실패, 그리고 병원에서 주검이 되어 나온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은 인생을 비관하여 자살을 꿈꿀 만한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로지 제3부 시험 합격에만 바람을 걸어 왔었는데, 아무래도 합격할 만한 성적이 못 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누리가 온통 또 다시 비관 속에 허물어져 가는 듯했다. 나는 여인숙 방에서 뒹굴다가 그래도 합격자 발표만은 보고 나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난 낙제야, 낙제하면 차라리 죽고 말 거야'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실로 경솔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3부 시험에 떨어지면 다음 번에 또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때 합격 발표가 있기 전인데도 한강에 나가 자살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정말 어떤 사고라도 낼 것 같고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3부 합격자 발표를 보고 온 동무가 내 합격을 알려 주었다. 나는 내가 합격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합격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이 때 낙방이 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섭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만 같아 아찔하다. 하느님은 스무 살 나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에게 의사 자격을 부여하는 조선 총독부 의사 검정 시험 합격을 허락하여 주셨고, 또 신경 쇠약으로 자살할 뻔한 젊은 생명까지 건져 주셨다. 나는 이중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던 내 바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보통 학교(초등 학교)도 5학년에서 건너뛰어 농업 학교로 들어갔고, 그 농업 학교에서도 지금으로 치면 중학 2학년 때 대학 과정 같은 강습소로 시험을 쳐 뛰어올라 갔고, 대학교 의과 대학 과정도 2년 반 동안에 해낼 수 있었다. 내 인생 전부가 온통 검정 시험, 전학 시험 등으로 소정의 졸업 햇수를 채우지 못하고 미리 앞을 달렸으니 그야말로 철저한 팔삭둥이 인생이 된 듯 하다.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교장 선생을 비판한 작문을 낼까말까 하고 몹시 망설이다가, 용기가 없어 내지 않았더라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학교를 졸업하고 시골로 가서 면서기나 군청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행히도 그 때 용기를 내어 작문을 내었기 때문에 나는 의사의 길로 나가게 된 것이다. 늘 부정과 불의에 대해 투쟁할 수 있는 용기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붓 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가 담긴 속담을 잘 부르짖는다.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는 글은 원자탄보다도 강한 힘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다. 보기를 들면 「샘이 깊은 물」1989년 5월호에 실린 송현 씨가 쓴「조선글 타자기를 공개한다」라는 글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 힘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되어 신의주로 가다

나는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햇병아리 같은 심정으로 의사 실무 수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겨우 의사 자격만 따낸 것이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의사 수업을 해야 될 판이다. 그러자 오늘이 있기까지의 내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그야말로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집념 하나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이었다. 너무 조급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반성도 하였다.

첫 부임지인 신의주로 떠났다. 경의선의 지루한 기차간에서 나는 또 다시 새로운 꿈에 잠기고 있었다.

"나도 '노구치 히데요'와 같은 훌륭한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야지."

이것이 내 다음 목표였다.

'노구치 히데요'는 1897년에 페스트균을 발견한 일본의 세계적인 세균학자이다. 그는 이어 1900년에 미국에 있는 록펠러 의학 연구소에 있으면서 황달, 도라홈을 연구하였고, 이어 매독 병원체인 스피로헤타를 순수 배양하는 데 성공한 학자이다. 이밖에도 공수병, 소아마비 등의 연구에도 공헌이 컸다. 그런 분이 1928년 아프리카에서 황열병을 연구하다가 그만 자기가 그 병에 감염이 되어 안타깝게도 누리를 떠났다. 나는 인류 전체를 위해 자기의 인생 모두를 송두리째 바친 그의 한살이를 그대로 본받고 싶었다. 나는 그의 전기를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었다.

신의주 도립 병원에 취직되어 간다는 소식이 가족에게 알려지자 평소에 말수가 적은 어머니까지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고,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 또 5촌 아저씨께서도 집안에 큰 경사가 난 것처럼 기뻐하셨다.

이 때 농업 학교의 고마쓰 교장 선생은 은퇴를 하고 서울에 와 있었다. 나는 의사가 되고 난 뒤에야 고마쓰 교장 선생의 고마운 참뜻을 깨닫게 되어 큰 바구니에 과일을 들고 자택으로 찾아 뵙고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일본 사람이긴 했지만 제자를 아끼고 사랑한 교육자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마쓰 교장 선생도 의사 검정 시험에 내가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내 손을 꼭 잡아 주면서 무척 기뻐하였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내가 신의주에 수월하게 취직된 것은 아마도 평안북도 평의원이면서 면장이었던 5촌 아저씨의 영향력이 작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침내 나는 신의주 도립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였다. 나는 내과 의사인 '다무라' 원장의 조수 겸 병리 실험실 담당이 되었다. 주로 환자의 피나 대 소변, 고름 같은 것들을 검사하고 세균 배양도 하였다. 내 결벽성 때문이었는지, 실험실이 늘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다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면서도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금의환향해 의사로 근무한다는 어떤 긍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활 속에서 또 다시 노구치 히데요 같은 훌륭한 세계적인 세균학자가 되어야지 하는 욕망의 싹은 자꾸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전기를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독일말 공부를 시작했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어학부터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일말 가르치는 독일 부인이 국경 넘어 중국 안동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개인 교습을 받기 위해 압록강 다리를 걸어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러나 워낙 독일말 기초가 약해 그런지 오래 하지 못했다. 내 딴에 용기를 갖고 시작한 어학 공부였지만 힘에 부쳐 얼마 안 가 포기하고 말았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병원에 취직한 지 반 년쯤 지난 어느 날, 나는 도청 경무과에 가서 순사 (순경) 지망생들의 신체 검사를 맡게 되었다. 순사 지망생들은 모두 발가벗고 줄을 섰다. 조수가 몸무게를 달고, 키를 잰 뒤에 순사 지망생이 내 앞으로 와 앉으면 나는 그들의 낯빛과 눈과 콧속, 입안을 검진하고, 가슴을 진찰한 다음, 성기에서 고름이 나오는가를 훑어보는 검사까지 했다. 그 때에는 성병에 걸린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순서대로 검진을 하고 있을 때다. 그 때 나이 갓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애송이 의사인 내 앞에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몸집이 큰 젊은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앉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먼저 얼굴과 눈부터 검진하기 위해서 그의 머리를 잡아 젖혔다. 고개를 젖히고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3년 전에 의주 농업 학교 때, 자기에게 잡지를 안 빌려준다고 나를 때린 바로 그였다. 뜻하지 않은 사람과 뜻하지 않은 자리의 해후에 무슨 말을 꺼내 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였지만, 나는 즉시 의사라는 처지로 돌아와 검진을 하면서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순사로서 알맞은 건전한 몸이었다. 그 뒤 그가 과연 순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하필이면 3년 전에 내 뺨을 후려쳤던 상급생이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채로 진찰을 받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 상급생의 얼굴, 그 기연의 사나이는 해방 뒤 어떻게 달라지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나는 80이 넘는 지금도 동심처럼 그 원수(?)가 그리워진다. 의사 첫해에 겪는 것은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고 흥미 있는 일들뿐이었다.

한 번은 이미 몇 해가 지난 살인 사건의 주검 검진을 하게 되었다. 해부도 해 보지 않은 나였기에 매우 당황하였다. 신의주 지방 법원 관리들과 같이 태천이란 시골에 출장을 가서 파낸 주검은 다행히도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내 전공도 아니었지만, 뼈 상해 검시 보고서를 난생 처음 쓴 일도 무척 인상에 남는다. 지방에서 의사 노릇을 하다 보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도 임기응변으로 다 돌봐 줘야 할 때가 있다.

이 무렵, 나는 처음으로 평양 공장에서 만든 국산 단발치기 사냥총을 35원을 주고 사서 도요새, 물새 사냥을 다니기도 하였다. 그 때 바다의 물때를 몰라 익사할 뻔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닷가에 가서 오리를 잡으려다가 밀물이 들이닥쳐 물에 빠져 죽을 뻔 하기도 하였다. 유치한 단계의 사냥이었지만 의사 생활 시작과 함께 사냥 경력도 시작된 셈이다. 사냥에 미칠 정도로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어도 '물오리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라든지 '사슴 잡으려는 욕심만으로 사슴을 뒤쫓다간 길을 잃고 산에서 죽는다'는 사냥꾼 누리에서만 통하는 경계의 말들을 익히기 시작한 시절이다. 그때 나는 의사 신분이어서 수렵 허가를 내기도 수월했다. 신의주 병원 안에는 한국 의사라고는 조진석 선생과 나밖에는 없어, 친형제처럼 지냈다. 경성(서울)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한 조 선생과 나는 같은 시기에 부임했지만, 나는 그를 형님처럼 모셨고 그도 나를 친아우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신의주에서 첫 의사 생활을 통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자신을 깨닫게 되어 공부를 더욱 충실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실험실 담당도 하게 된 김에 유행성 전염병의 세균학을 한해 내내 철저하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세균성 전염병의 종류도 많았고 또 전염병이 많이 유행했다.

이제 아내의 죽음이나 간호원과의 실연 등의 마음의 상처는 과거지사로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잠시 한국 간호원의 유혹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같은 일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진석 선생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서울 의학 전문 학교(경의전)의 백인제 외과 교수에게로 올라갔다. 그는 경의전 출신으로 나중에는 소원대로 박사 학위까지 땄다. 공부하기 위해 먼저 서울로 올라간 조진석 선생으로부터 "공부를 하려면 역시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는 전갈이 왔다. 서울로 올라가서도 잊지 않고 친아우처럼 여기고 나의 앞날을 걱정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조 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위해 서울 진출의 길을 모색해 주었다. 얼마 뒤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신의주 생활 1년만에 서울로 향했다.

경의전 미생물 교실 견학생

경성 의학 전문 학교(경의전)에 저명한 한국 의사 두 분이 있었다. 그 때 한국인 교수는 그 두 분뿐이고, 모두 일본 사람 교수들이었다. 한 분은 외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백인제 교수님이고, 또 한 분은 독일에서 세균학을 전공한 유일준 교수님이다. 신의주에서 먼저 올라온 조진석 선생은 그 유명한 백인제 교수의 조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조 선생 덕분으로 백인제 교수를 알게 되어 세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더니, 백 교수는 곧 바로 유일준 교수에게 나를 소개했다. 유 교수는 나를 견학생으로 받아 주겠다고 즉석에서 승낙을 해 주었다. 유 교수는 독일, 일본 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세균학 박사였다. 유 박사는 독일과 일본 경응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분인데, 한국 사람에게 잘 걸리는 장티푸스나 이질균, 폐결핵균, 폐렴균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등 실로 민족의 보건을 늘 염두에 둔 연구 생활을 해 온 훌륭한 학자였다. 그는 1926년 귀국 뒤 줄곧 경성 의학 전문 학교에서 미생물학 교실을 맡아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고 있었다. 일본 사람 교수들 틈에서도 두 교수는 같은 한국 민족이란 피의 흐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었다.

나는 유일준 교수의 연구실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때 나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때라 동대문 옆에 있는 마부들 상대의 여인숙에 하숙을 정하고 그곳에서 견지동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지금은 자동차로 물건들을 나르지만, 그 당시는 우마차로 날랐다. 월급도 안 받는 견학생 신분이었으니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말과 소와 함께 유숙할 수 있는 값싼 마방간 생활이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의사가 된 신분인데 시골에 계신 아버님께 돈을 부쳐 달라고 할 염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무원을 모집한다는 신분 광고를 보고 주말만이라도 부업을 가져 볼까 하고 찾아가 고지식하게 내 형편을 말하고 취직하고 싶다고 말을 했더니 "우리는 의사 선생을 사무원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하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거동하기 힘들 정도로 고열이 나 결근을 한 적이 있다. 결근 사흘만에 유일준 교수는 누추한 내 숙소인 동대문 옆 마방간까지 찾아와 주었다. 교수라면 그야말로 지체 높으신 분으로 대접을 받던 시대였는데도 일개 견학생이 아파 누워 있다고 해서, 누추한 숙소까지 찾아 준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뜻밖이었고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은 유 교수가 나를 조선 호텔 식당으로 데리고 가 저녁을 사 준 일이다. 내가 서양 고급 요리를 고급 식당에서 정식으로 먹어 보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유 교수는 푸념처럼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공병우 군이 의학 전문 학교만 나왔어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연구생도 만들 수 있고 박사 학위를 따도록 돕고 싶은데, 학력이 부족해 그렇게 할 수 없어 아쉽다는 뜻이었다. 내가 정규 학교 출신이 아닌 검정 자격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 교수 자격으로는 내 앞길을 열어 줄 수 없어 안타까워서 한 말씀이었다.

나도 '노구치 히데요' 같은 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던 만큼 이같은 훌륭한 교수 밑에서 세균학자가 되었으면 하는 꿈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학문의 기초도 약했지만 너무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때라 세균학 연구를 한살이 업으로 삼을 생각은 단념하기로 했다. 세균학은 모든 의학의 기초 학문이니, 이 기회를 철저하게 잘 활용해서 여기 있는 동안만’’에’’라도 공부나 열심히 해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당시 유 교수의 연구실에서 익힌 나의 세균학적 지식 또한 내 한살이를 통해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미생물학 교실에서 안과 교실로 옮겨간 그 해 여름, 1932년 8월 12일에 연구 조사 출장을 하루 앞두고 유 교수는 가족과 함께 한강 인도교 근처의 모래사장 앞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만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익사하고 말았다.

교통 사고로 입원한 여학생

내가 유 교수 밑에서 견학생 노릇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경 의전 외과에서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조진석 선생이 동대문 바로 옆에 있는 내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당시 수많은 학부모들을 놀라게 한 진명여고 학생들이 탄 전차 전복 사고로 화제가 이어졌다. 진명여고 학생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학교 앞 효자동에서 전차를 타고 떠났는데, 그 전차가 불행하게도 총독부 (현재의 국립박물관) 정문 쪽으로 도는 커브에서 탈선이 되어 많은 학생이 중경상을 입는 난리가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소격동에 있는 경의전 부속 병원은 부상당한 학생들로 붐볐고 많은 학생들이 입원하여 계속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조 선생은 경의전 병원에 입원하게 된 진명 여학생들의 상태를 이야기하다가 아주 상냥한 아가씨가 하나 눈에 띄었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그래, 병우 네 생각은 어때? 내가 중매를 들고 싶은데, 장가들 생각 없어? 아주 상냥하고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야. 거기다가 고향이 평북 삭주라는군. 고향도 비슷하잖아."

하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차 사고로 뼈가 어떻게 됐다느니 하는 상황에서 내 색싯감을 눈여겨봤다니 고맙기도 하고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은 참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기에 중매를 하고 싶어 온 걸세."

교통 사고로 가슴뼈가 부러져 입원한 환자 아가씨를 놓고 조 선생이 나에게 중매를 드는 것이니 슬며시 호기심도 발동되었다.

나는 그 여학생의 고향이 삭주란 말을 듣자, 몇 달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글월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서 조 선생에 털어놓았다.

"사실은 몇 달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혼담 이야기가 편지로 왔어요. 난 누군지도 모르지만, 벽동읍 소학교에 여선생으로 있는 분이 자기 여동생을 소개했나봐요. 이 여학생은 내 고향에서 200리 떨어진 삭주땅 색시이고 서울에 와 공부하고 있다는데, 나하고 짝을 지어 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난 관심이 별로 없어서 이렇다 할 반응도 안 보이고 지내 왔는데, 이제 딴 여자를 보려고 하니 먼저 아버님이 권하는 아가씨에 대해 가부간의 말씀은 올려야 될 것 같은데요."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다시 결혼할 생각은 없었고 큰 학자가 될 꿈만 꾸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에는 만주 사변이 일어났고 중일 전쟁(1937)이 발발되기 직전이어서 사회 분위기도 흉흉하고 시국도 어수선하여 외국 갈 꿈도 시들해져 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친형처럼 믿고 있던 조 선생이 보았다는 진명여고 학생의 이야기에 끌려 결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병우야, 아주 상냥하고 예쁜 학생이라니까,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한번 자연스럽게 입원실로 함께 가 보자구."

나는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결혼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권하는 아가씨에 대해서 아무런 회답도 드리지 못했는데, 이런 시점에서 불쑥 이 여학생부터 만나러 가자고 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어물어물하였다.

"그래서 망설인다 그 말인가?"

조 선생은 걱정하지 말고 우선 이 여학생부터 보고 나중에 부모님과 상의하면 될 게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다. 우선 자기가 소개하는 눈앞의 여학생부터 보자는 것이다. 나는 못 이긴 척하고 가슴뼈가 부러져 조 선생의 치료를 받고 입원 중에 있는 그 여학생을 보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것은 물론 조 선생과의 약속일 뿐이지, 선을 보게 되는 당사자인 입원 환자와의 약속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와 조 선생하고만 그런 뜻을 품고 슬그머니 선을 보는 그런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며칠 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병원으로 갔다. 조 선생의 주선과 안내로 입원실에 가서 침상에 누워 있는 그 여학생에게 나는 초면 인사를 건네었다.

"조 선생님을 통해 한 고향 학생이란 소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삭주 학생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첫눈에 마음이 끌렸다. 과연 조 선생이 말한 대로 명랑하고 똑똑한 여자로 보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고향 아버지가 권하는 여학생이 바로 이 여학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아버님이 권하는 규숫감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나 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전차 탈선 사고로 입원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이용희란 학생과, 고향의 소학교 선생이 추천하여 아버지를 통해 청혼해 온 아가씨와는 같은 아가씨여서 양쪽에서 들어온 청혼을 한꺼번에 동시에 처리하게 되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남녀의 인연 이란 참 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 부담감도 느끼지 않고 우리 시골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 여학생의 언니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글월을 올렸다.

"아버님이 권하는 여학생을 만나 봤는데 마음에 듭니다."

부모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약혼 반지를 사라고 많은 돈을 보내 주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좋다고 일방적으로 결혼 상대로 정해 놓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되는 이용희 여학생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까닭을 물으니 내가 새신랑이 아니고 상처를 한 헌 남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전처에게 자식이 없다 하더라도 처녀가 후처 자리로 시집을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까닭이야 간단하지만 처녀로서는 신경이 쓰일 중대한 문제였음에 틀림없었다. 그 반면, 여학생 집에서는 궁합까지 보고 나서 궁합 내용이 후처로 들어가야만 좋아질 팔자라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늘어놓으면서 나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애를 쓰는 듯했다. 그 여학생의 맏언니는 시집을 가서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그 당시는 사주팔자를 보고 믿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이용희라는 아가씨는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하고 혼인을 할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들도 이 아가씨를 흡족한 며느리로 맞아 들이기로 하였다. 약혼은 내가 진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 응접실에 가서 다이아 반지를 주고 온 것으로 간단히 이루어졌다. 당시 우리 나라 풍습에는 약혼식이란 것이 없었고, 다만 구식 절차로 사주단자와 무슨 선물들이 오고 가는 것이 있었지만, 그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나는 혼약의 표적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 해방 뒤부터 약혼식이란 사치스러운 관습이 유행’’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는 부잣집 사람들의 허영심을 부채질하는 짓거리로 생각된다.

그 무렵은 여고 학생들이 시집가는 일이 허다한 때라, 학교에서 장소 제공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예사였다. 여학생의 동무들은 우리의 약혼 광경을 유리창 밖에서 들여다보느라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반지를 여자에게 끼어 준다는 것도 매우 보기 드문 구경거리였다.

그 뒤, 약혼녀는 내 누추한 동대문 옆에 있는 마방간 하숙소 집에 와 보기도 하였다. 약혼을 한 뒤에는 아버님이 화동에 새로 지은 기와집을 결혼 뒤의 살림집으로 사 주셨다. 안방, 사랑방, 행랑방 등 방 셋에다가 마루방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약혼녀는 그 해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평안도 삭주 고향으로 간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화동집에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안과 선택

경의전 출신도 아닌 나를 경의전 안과 교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해 준 분은 백인제 교수이다. 결혼 생활에 대비하여 안과 교실 조수로 취직했다. 30원이란 월급도 탈 수 있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30원은 지금의 약 80만 원에 해당한 월급이다. 이렇게 해서 안과 주임 교수인 사다께 교수와의 인연도 맺어지게 되었다. 안과 조수로 3년 동안 근무하기로 약속 하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열심히 근무하면서 안과학과 임상 실습 을 연수했다.

실상 나와 안과와의 인연은 훨씬 앞서 평양에서 의학 강습소에 다닐 때 이미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당시 의학 강습소 시대에는 어떤 전문과를 미리 선택하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하루는 안과학 강사인 우에노 선생이 나를 호출했다기에 병원 안 과로 우에노 선생을 찾아갔다.

"우에노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우에노 선생은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 자넨가. 안과학 점수가 최고로 좋기에 누군가 하고 한번 얼굴을 보고 싶어 오라고 한 것 뿐이야."

내 안과 시험 답안이 안과학 선생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가, 그 선생의 말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본시 물리학에 각별한 취미와 소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기와도 같은 눈알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표현하게 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안과에 대한 사랑이 나도 모르게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갈다. 그러니 내가 사다께 교수가 주임으로 있는 안과 교실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듯 했다.

꿩 먹고 알 먹는 숙직

퇴근 시간만 되면 모두 집에 갈 궁리들만 하고 있을 때, 나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조수 노릇에 충실했다. 약혼은 했지만 자취를 계속하던 생활이었으니 집에 가 봤자 누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실험실에 처박혀 공부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밤늦도록 있는 나에게 그 병원 조수들이 자기의 숙직 당번을 대신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하기 싫어하는 숙직을 즐거운 마음으로 맡아 해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침식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숙직비 60전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어차피 공부를 위해 밤늦도록 있을 바에야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기분으로 숙직을 도맡아 해 가며 뼈를 깎는 듯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바로 이런 때 나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이 왔다. 자기가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나는 할아버지의 문병조차 못가는 배은망덕한 손자가 되고 말았다. 교통이 불편하여 한 번 고향에 내려가려면, 가는 데만도 이틀이 걸리는 벽촌이긴 하지만, 애당초 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하는 것을 알고도 병문안 가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그 때의 불효가 후회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뒤 경의전 안과 교실에서 1년 반 동안 조수 생활을 하다가 1930년 11월 10일 이용희를 아내로 맞아, 평북 삭주의 처가에서 구식으로 간소하게 혼례를 치렀다. 혼례를 치르고 난 다음 아내는 가마를 타고 나는 한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우리 고향으로 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고향에 가는 도중에 죽은 아내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는 죽은 딸의 몫까지 복을 곱으로 누리라고 고맙게도 우리를 위해 큰 잔칫상까지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시간 관계로 큰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뜻하지 않은 축하에 감격하였다. 나중에 아내도 그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면서 고마워했고 "내가 그 집의 죽은 따님 구실까지도 해야겠죠"하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내 아내는 오늘날까지도 그 집의 죽은 딸 노릇까지 하느라고 신경을 무척 써 온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1주일 정도 부모님이 계신 집에 머물러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혼인 잔치를 이렇게 끝내고, 나는 또 다시 안과 교실로 들어갔다. 가난하고 바쁜 조수 생활이었지만 그런 대로 우리의 신혼 생활은 희망에 부풀었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결혼 뒤, 얼마 안 되어 난데없이 나는 폐결핵에 걸렸다. 지금처럼 파스니 스트랩토 마이신이니 하는 따위의 치료약이 개발되지도 않은 때라 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대개 죽는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특별한 치료약이 없어 의사들은 그저 절대 안정만 하라고 할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대자연의 맑은 공기 속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도 내과 의사의 권고대로 절대 안정을 취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요양 생활의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온갖 세속적인 미련과 애착을 버려야만 했다. 안과 근무도 다 잊어야 했고, 아내와의 단란한 신혼 생활의 꿈에서도 잠시 벗어나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절제가 필요한 법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한다고 결심하면 철저히 한다. 그래서 요양 생활도 자포자기의 마음이 깔린 심정으로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나섰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요양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왕 하려면 철저히 요양을 하자, 내 건강은 내 자신이 회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희망 속에서 요양 계획을 짰다.

그래서 나는 산수 좋기로 유명한 평북 옥호동 약수터에 홀몸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샘물로 밥을 해 먹으며 자연 속의 맑은 공기와 맑은 냇물에 내 병든 몸을 내맡기고 유유자적하는 요양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히도 나는 이 난치의 병을 약 두 달만에 극복하고 안과 교실로 되돌아와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안과 교실에서 처음 받은 월급은 30원이었지만, 결혼하고 난 뒤인 1년 후에는 50원으로 월급이 올랐다. 그러나 이 때는 내가 결혼을 한 때라, 세간과 재봉틀 등 살림 도구를 구비하느라고 월부 빚도 불어나 있었다. 거기다가 첫 아이로 딸이 생기게 되니 아무리 월급이 올랐다 해도 조수 생활 월급으로는 여전히 빠듯했다. 그러던 중 연말에 보너스가 나왔다. 그것도 놀랍게도 월급의 200%4가 되는 백 원이 나왔다. 이 경의전에는 약 60명의 조수들이 있었는데 모두 경의전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100%4인 50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안과에서 같이 공부하던 그 학교 출신의 두 조수들도 50원씩을 받았다. 그래서 조수들이 다 모여 회의를 한 끝에 대표를 뽑아 교장에게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아니, 우리 경의전 출신도 아닌 공병우에게만 특별 우대하는 까닭이 뭣입니까?"

하고 조수들이 항의를 하자

"보너스 액수에 대해서는 교수 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니, 자네들 주임 교수에게 직접 물어들 보게."

라고 교장이 답변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경의전 출신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남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내 비장한 각오와 생활이 인정을 받았던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 봐도 정말 열심히 일을 한 것 같다. 당시는 세균성 눈병이 많았는데 세균학의 기초 지식을 배웠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어, 진단도 잘 내리고 치료도 잘 하는 조수라고 주임 교수에게 인정을 받아 보너스의 특혜를 받게 된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정맥 주사도 정확하게 단번에 잘 놓는 조수로 알려져 있었다.

도라홈이라고 하는 눈의 전염병이 많이 유행하던 때였다. 한국에선 내가 최초로 이 병균을 염색하여 교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연구한 것 등이 인정되어 논문 발표할 기회를 1년에 한두 번씩 갖게도 되었다. 이런 나를 보고 사다께 교수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나는 남의 관혼상제 등에 일절 발을 끊은 채, 사회 생활을 중지하고 또 불효까지 저지르면서도 안과 공부에만 충실했다. 3년 동안의 안과 교실에서의 연구 생활은 나에게는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첫딸 영일과 맏아들 영길이를 얻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은 여전하였다. 애가 둘이 되고 보니 경제적인 면을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나일론 실이 없었던 때라 양말이 얼마나 잘 해지는지 부인들은 양말 구멍난 것을 깁는 작업이 큰 집안일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던 시절이었다. 양말을 자주 사다가 갈아 신을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이면 숫제 구멍난 양말을 그냥 신고 다니거나, 기운 것을 신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후자에 속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옷맵시나 양말 구멍난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3년째 되던 어느 날, 나는 외래 환자와 입원 환자 진료를 마치고 나서 사다께 교수의 방으로 찾아갔다.

"선생님! 오늘로 약속한 대로 3년 근무를 채웠습니다. 이제 시골에 가서 개업을 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겠습니다"

나는 근무를 그만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향에 가서 안과 병원을 차려 보겠다는 나의 퇴직의 뜻을 들은 사다께 교수는 대뜸 말했다.

"무슨 소리야, 서울에서 공부 더 해 가지고 박사 학위라도 따야지."

박사 학위라니 나로서는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할 소리였다. 소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나다. 대학을 졸업하고, 4년 동안 연구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박사 학위를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오고 더군다나 독일어도 전혀 알지 못하는 날더러, 박사의 꿈을 가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만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학벌도 없고, 독일어도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연구를 할 형편도 못 됩니다."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의 여부는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다께 교수는 "학벌과 독일어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 의학 수준은 독일과 거의 같았고, 미국보다도 앞서 있었다. 그래서 사실 일본글만 잘 알면 의학 연구에는 문제가 없었다. 사다께 교수는 "실력이 제일이지, 학벌이 무슨 문젯거리가 되겠느냐"고 했다. 경성 제대의 유명한 도꾸미쓰 교수나, 일본 나고야 대학의 오구치 교수도 학벌 없이 실력으로 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라면서, 너도 하면 된다고 부추겨 주었다. 그리고 더 긴 말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오늘은 돌아가 잘 생각해 보고 내일 다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약속한 다음 날 저녁에 사다께 교수를 다시 찾아갔다. 사다께 교수는

"오늘 내가 경성 제대의 병리학 교수인 도꾸미쓰 교수를 만나 공병우 군을 사실 그대로 소개했더니, 도꾸미쓰 교수는 자기 개인 연구생으로 지도해 보겠다고 자기한테 보내라는 승낙을 했네."

라고 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는 대학에 가서 병리학 연구를 하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수 있다는 말까지 곁들여 나에게 용기는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네 식구의 생활도 생각해야 될 처지여서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생활비를 벌어야 합니다."

했더니 사다께 교수는

"월급은 종전대로 경의전 안과 교실에서처럼 50원씩 줄 터이니 그곳에 가서 연구만 열심히 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과분한 호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내가 생각이 모자란 탓이었겠지만, 그저 내 개업의 길을 가로막는 듯한 착각에 빠져 못마땅하기만 했다.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내 학력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일이어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하기도 난처해서 다음날로 확답을 미루고서 그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나는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월급까지도 자기 재량으로 내주면서 연구를 시키려는 분께 덮어놓고 거절만 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월급을 종전처럼 주겠다니까 한 석 달 정도라도 대학 연구실에 가서 도대체 대학에서는 연구를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인가를 배우면서, 교수의 호의적인 권고도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생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학에서 연구를 한다는 게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인가를 배운다는 호기심이 섞인 속셈으로 "예, 내일부터 해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쪼들리는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월급을 종전처럼 받는다면, 3개월 정도는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경성 제대 교수의 문하생으로

나는 도꾸미쓰 교수에게 가서 첫인사를 올렸다. 드디어 나는 한국에서 최고 학부인 경성 제대의 유명한 교수 문하생이 된 것이다. 나는 도꾸미쓰 교수가 주는 연구 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연구를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도꾸미쓰 교수가 우리들 연구실에 들어와 돌아보다가 경성 의학 전문 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연구생으로 들어온 조병학이라는 연구생 쪽으로 가더니, 앙칼진 어조로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더니만 불쑥 "저 공 군이 하고 있는 걸 가서 좀 봐요."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로 조씨를 나무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던 연구 방식이 도꾸미쓰 교수의 마음에 꼭 들었던 모양인데, 어떤 방식인지는 그 때도 몰랐거니와 지금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당시 도꾸미쓰 교수가 나에게 준 연구 주제는 살균제로 흔히 쓰던 '트리바후라빈'을 토끼의 귀 정맥에 주사하고 햇빛을 쏘인 뒤, 피 변화를 조사하는 실험이었다. 햇빛을 쪼이면 토끼의 귀가 붓는데, 그 때 귀가 부은 토끼의 피를 검사하여 자료를 내는 것이었다. 약 3개월 동안 나는 부지런히 그 실험을 했다.

어느 날 나는 도꾸미쓰 교수가 나에게 시키지도 않은 실험을 해 보았다. 귀 정맥에 트리바후라빈을 주사한 토끼의 눈에 햇빛을 쪼여 보았다. 뜻밖에 망막 박리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같은 실험은 나고야 대학 안과 교실에서 이미 한 뒤였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도 나와 있었다. 다만 내 실험 결과와 정반대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실험 보고자는 그 논문으로 이미 의학 박사 학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나는 눈에 관련된 것이라 경의전 안과 사다께 교수에게 이 실험 결과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사다께 교수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도꾸미쓰 교수에게 내 나름대로 실험해 본 것을 보고하고 그의 반응을 보겠다고 결심했다. 용기가 필요했던 까닭은 교수의 지시가 아닌 실험을 내 자신이 마음대로 했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가 지시한 바 없는 실험을 연구생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당시의 관습이었다. '바가야로(일본 사람들이 흔히 하는 욕설로서 바보 같은 녀석이란 뜻)'란 욕을 먹으면서 내쫓기게 되는 것이 예사일 때였다. 하지만 나는 만일 교수가 못마땅하게 받아들이면 시골에 가서 개업을 하면 그만이란 배짱으로 이런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만일 그 때 내가 박사 학위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용기는 내지 못하고, 교수가 시키는 연구만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 나는 박사 학위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고, 단지 사다께 교수의 호의를 받아들일 겸, 연구 방식이나 배우기 위해서 잠시 동안 가 있다가 시골로 갈 생각이었으므로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도꾸미쓰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내 보고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보고가 끝나자, 교수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면서

"그래? 그것 정말 재미있는 일인데, 내일부터 내 주제는 그만두고 그것만 계속해 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십중팔구는 '바가야로!'라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보고하였는데, 병리학 대가는 역시 새로운 발견을 즉석에서 분명히 깨닫고, 내가 그 방면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끔 지도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 덕분으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때 만일 쫓겨났다면 시골 안과 의사로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모든 교실 연구원들에게 쫙 번져 나갔다. 모두가 축하한다면서 격려해 주었다. 내가 도꾸미쓰 교수의 개인 연구생으로 획기적인 발견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도 교수가 관심을 가져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조교수가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하기에 갔더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연구실에 영문 타자기 한 대를 기증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당시 영문 타자기의 값은 150원 정도 했을 때이니, 내 월급의 세 배나 되는 고가였다.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제안이었다. 하기야 그 당시 내 처지는 등록금도 안 내고 교수의 개인 문하생이 되었던 것이라 결코 엉뚱한 제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올 법도 한 제안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 형편으로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 내가 박사 학위를 꼭 얻어야 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면, 아마 빚을 얻어서라도 영문 타자기 한 대를 기증하고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박사 학위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만 여기서 물러날 때가 온 것이라 판단하고, 곧바로 짐을 싸 가지고 경의전의 사다께 교수에게 가 자초지종의 상황을 보고 드렸다.

"저는 경제적으로 힘도 들고 해서 시골로 내려가 개업을 하겠어요."

하고 숙원을, 속셈을 털어놓았다.

"그곳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다면 뭘 그렇게 걱정을 해, 지체 말고 나 있는 데로 돌아와 병원 실험실에서 연구를 계속하면 되지 않나."

사다께 교수는 마치 어버이처럼 나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꾸미쓰 선생에게 가서는, 사다께 선생 밑에 가서 실험도 하고 연구를 계속하면서 도꾸미쓰 교수의 지도를 받겠다는 승낙을 얻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도꾸미쓰 선생도 좋다고 쾌히 응낙해 주었다. 오히려 경성 제대 때의 연구실보다 경의전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생활이 더 마음이 편했고, 연구도 나만이 독점할 수 있어 좋았다. 박사 학위를 따겠다는 생각보다는 연구 방식만 익히겠다고 시작한 생활이, 나도 모르게 연구 생활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봐도 그 당시 대학에서 수개월 간 연구한 것은 참으로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이 무렵, 나를 그렇게도 귀여워하며 키워 주신 할아버지께서 내 가족들을 보기 위해서 그 먼 시골에서 서울까지 몇 차례 찾아오시곤 했다. 의젓하게 성장한 내가 대견하기만 하셨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연구에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핑계삼아 잘 대접해 드리지 못하였다. 그 때 아무리 공부에 미친 때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그같이 연구실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내 학위 논문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사 학위 논문

1936년 초 일본 도쿄에서 안과 학회 학술 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 내가 지은,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원인 규명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내 발표 강연을 들은 교수들은 서로 갑론을박의 토론을 벌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동경 대학 측에서는 결핵이 원인이라고 주장했고, 나고야 의과 대학의 오구치 교수나, 지바 대학의 이토 교수는 광선이 원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자 내가 광선 학설을 입증할 수 있는 동물 실험에 성공했으니 광선 학설을 주장하던 교수들은 몹시 기뻐했다. 내 실험 결과는 영국 안과 전서에 실렸다.

강연회에 같이 참석했던 사다께 교수는 나고야 대학의 오구치 교수와 지바 대학의 이토 교수로부터 자기네 대학에 논문을 제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해주 도립 병원에 부임하기 전에 내 연구 논문과 연관이 있는 나고야 의과 대학에 연구 논문을 제출하였다. 1937년 4월 23일의 일이다. 나고야 의과 대학장 다무라 하루요시 앞으로 주제 논문 한 편과 부논문 두 편을 첨부하여 의학 박사 학위 신청서를 심사료 백 원과 함께 우편으로 보낸 것이다. 신청서에 적힌 내 현주소는 조선 황해도 해주읍 중정(나까마찌) 292번지이며, 주제 논문의 제목은 [소위 중심성 맥락망막염(마스다씨)의 본태에 관한 실험적 연구]이다. 4편으로 나누어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본태에 관하여 실험적 연구 결과를 보고한 것인데, 특히 제2편에서는 유색 토끼와 개에 있어서 광력학적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연구를 다루었고, 제3편에서는 광력학적 중심성 맥락망막염과 간장 기능과의 관계를 기술하였다. 제4편에 있어서는 울체성 황달에 관한 광력학적 내인의 성립과 특히 '포르피린'과의 관계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부록으로, '본 논문은 경성 의학 전문학교 안과학 교실 및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병리학 교실에서 1930년 7월부터 1936년 4월까지 동안에 연구한 것'임을 명기하였고, 지도 교수로 경성 제대 도꾸미쓰 교수와 경성 의전의 사다께 교수의 이름도 밝혔다. 이 논문을 제출한 지 4개월 10일 만인 9월 2일에 나는 나고야 의과 대학 으로부터 '박사 학위 논문이 심사에서 통과되었다'는 통지를 해주 도립 병원에서 받았다.

내가 박사 학위를 획득하기까지에 나는 그야말로 신명을 다한 듯 했다. 그 때 나는 남다른 의욕과 정열과 향학열에 불타 있었다. 오직 용맹 전진했을 뿐이었다. 남들처럼 놀러도 다니고, 재미도 봐 가면서 남의 잔칫집, 생일집 다 찾아다니고 생활했다면 학력도 변변치 않은 나에게는 박사 학위란 어림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후진 양성을 위해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공금을 할애해 가며 격려해 주고 길을 터 준 사다께 안과 교수이다. 그리고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으신 경성 대학의 도꾸미쓰 교수가 나에게 베푼 남다른 호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해방 뒤에 이같은 은사들의 뜻이 너무나 훌륭하게 느껴져 나도 후진 양성을 위해 공금이 아니라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공부를 시킬 작정으로 그 계획을 말했더니 어리석은 짓이라도 동료 의사들마저 반대하는 것이었다. 특출한 뜻을 가진 젊은이나, 비상한 머리를 가진 후학들에게는 늘 힘이 되어 주어야겠고, 길을 터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내 인생 철학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해주 도립 병원 안과 과장

도립 병원에 부임하고 나서는 서울에서의 연구 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말이 좋아 연구 생활이지, 퀴리 부인의 말처럼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펼쳐지는 생활이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좌절이나 절망 따위를 물리쳐야만 했다. 내 일편단심의 '학문을 향한 마음'을 채찍질해야 하는 긴장의 나날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한 시절이기도 했다. 두 아이까지 갖게 된 네 식구의 가장이 연구한답시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학문과도 싸워야 했고, 눈앞의 가난과 얄팍한 월급 봉투에 신경이 곤두서는 불안과도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무난히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의학 박사 학위까지 따게 되었다. 그야말로 천만 근의 무거운 짐을 일시에 벗어 놓은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해주 도립 병원에 부임하고 나서 경제 생활도 다소 나아졌다. 이런 뜻에서 해주 도립 병원 안과 과장 생활은 이중 삼중의 기쁨을 안겨 주었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무대를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신의주 도립 병원에 있을 때 원장 겸 내과 과장으로 있던 다무라 박사를 해주 도립 병원에 원장으로 모시게 되어 일하기도 좋았다. 나는 그분과의 지난날의 인연으로 안과 과장이 되었던 것이다.

안과 의사로서의 임상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서울에서의 연구 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 환경이 되었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꿩 사냥의 재미를 맛들이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사냥개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한 코를 가지고 꿩을 잡겠다는 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남북 통일의 되면 황해도 땅은 세계적인 꿩 사냥 관광지로 지목하여 외화 획득도 할 수 있는 명승지로 삼았으면 좋겠다. 나는 꿩 사냥에 미칠 수 있었고, 그만큼 해주 생활은 인상에 남았다.

그 동안 쌓였던 몸과 마음의 피로는 이같은 생활 변화로 풀 수 있었고 몸의 건강도 아주 좋아졌다. 이렇게 느긋한 생활이 펼쳐질 무렵 나고야 의과 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학위 번호 298호)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통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해주에서의 내 여유 있는 생활은 그 동안 내가 어렵게 뿌려 놓은 노력이란 씨에서 거둔 열매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도 눈에 관한 공부를 계속하였다. 특히 누도(눈물길)에 관한 연구를 하였는데 이 연구 논문이 일본 안과 학계에 발표되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서울의 첫 안과 병원

해주 도립 병원에서 2년째 되던 1938년에 나는 개인 병원을 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로는 개인 병원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큰 모험이었다. 내과나 외과는 그래도 인기 종목이어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안과나 이비인후과 따위는 독립된 병원으로 숫제 인정도 안 해 주던 시대여서, 이 방면의 개인 병원은 우리 나라에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이왕 새로 개척할 바에는 차라리 개척의 땅인 만주로 가서 병원을 차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만주로 갈까 서울로 갈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래도 내가 공부한 정든 서울로 올라가 자리를 잡기로 결심하였다. 서울로 올라가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하였다. 백 사람 가운데 아흔 명 가량은 어떻게 안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백인제 선생만은 한 번 시도해 보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공 군 같으면 성공할 수 있으니 해 봐요."

나는 용기를 내 안국동에 있는 벽돌집 2층 일부에 안과 병원을 꾸몄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안과 개인 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운영 실태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야말로 파리를 날릴 정도로 한산하였다. 처음에는 집세를 내기도 힘들었다. 환자를 기다려야 하는 따분한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환자에게 성심 성의껏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치료를 하였다. 지루하고 한심스러운 시간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으나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은 잃지 않았다.

개업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어떤 점잖은 환자 한 분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 나에게 한글에 관한 말을 한참 동안 해 주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한글 사랑이 민족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희한한 말이었다. 한글이란 말조차 생소하게 들린 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분이 바로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극로 박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개업 초기에 있었던 일로 나로서는 정말 처음 듣는 인상적인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지금껏 그분의 말씀이 내 뇌리에 맴돌고 있다. 병원이 한산하여 환자와 환담할 수 있었던 무렵이어서 이같은 대담이 가능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고 온갖 압박을 가해 오던 식민지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족적 의식이 고취된 말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나도 제 나라 글에 대해 처음으로 막연하게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안과 의사인 내 자신이 사실은 한글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이었다. 어렴풋이 나마 조선 민족의 고유 문화가 보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이 박사로 인해 나는 안과 병원 개업 초기에 정신적인 개안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러는 동안 성실하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1년이 지나고 나니 눈 잘 고치는 공 안과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제법 환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병원의 확장을 서둘러야 할 정도로 상황이 변했다. 서린동에 동명관이라고 하는 큰 요릿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백기호 박사와 어울려 사서 병원으로 꾸며 이전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이곳에 '공 안과'와 '백 내과' 두 개의 간 판이 붙은 합동 병원이 서게 되었다.

나는 1939년에 안과를 개업한 지 1년만에 드디어 안국동 구석에서 중심지인 서린동으로 옮겨 왔다. 그 당시 안국동은 지금과 달리 변두리에 속했다. 몇 해를 지내는 동안 환자는 점점 늘어났다.

제2차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 해 여름에 새로운 안질(급성결막염)이 심하게 유행하고 있었다. 골똘히 연구한 결과 아주 독특한 안질임을 알게 되었다. 종전의 유행성 안질 치료 방법으로는 낫지 않고 도리어 더 심하게 악화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알맞은 치료 방법을 개발하였더니 많은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환자들은 대부분 대학 병원, 적십자 병원, 철도 병원, 경의전 병원, 세브란스 병원 등의 큰 병원에서 눈병이 더 악화된 경우가 많았다. 그 때 새로운 유행성 안질은 이상하게도 치료하려고 손을 대면 댈수록 점점 악화하여 눈에 핏줄이 더 서고 부종이 심했다. 딴 병원에서는 종전 치료법대로 눈두덩이를 까뒤집고 약을 넣어 주는 듯했다. 그러면 영락없이 눈병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럴 즈음 공 안과에 가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내게 무슨 뾰족한 치료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가 손을 대는 것이 병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내 임상 실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응용한 것뿐이다. 나는 일절 눈에는 손을 대지 않고 환자가 직접 집에서 생리 식염수만을 점안하도록 했다. 다른 안약은 눈에 넣지 못하게 했다. 안약은 눈을 자극하여 안질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렵더라도 눈을 비비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병원에 더 올 필요도 없다고 했다. 원래는 이 안질은 전염성이 극심한 안질이었다. 이런 병질에 별 것도 아닌 식염수만 주고 치료를 안 하는 것이 치료라는, 언뜻 보기 에는 우스꽝스러운 치료법을 써 나는 명의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같이 치료법을 연구하고 노력하는 나를 신뢰하는 듯 하였다. 환자의 병에 대해 성의껏 연구해 가며 치료를 하였으니, 그같은 정성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광고를 안 해도 환자 입을 통해 알려지기 마련인가보다.

다른 병원에서는 새로 오는 환자에게 진찰권부터 먼저 사게 했으나, 나는 우선 진찰과 치료를 한 뒤 나중에 눈약과 진찰권을 무료로 주었다. 당시 나를 찾아온 환자에게 진찰권부터 사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병원 경영법이라 해도 장삿속 같은 인상이 들어 그 방식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막판에 들어서면서 물가 폭등을 막기 위해서 조선 총독부에서는 물가 안정 시책을 각 분야에 펼치고 있었다. 전찻삯이나 담뱃값 등은 물론 목욕값까지도 값을 올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행정 조치를 취하고 이었다. 백 외과 병원의 백인제 박사와 나는 은밀히 반일 운동하는 셈치고 합리적인 진료비를 받기로 작정하고 진료비를 인상해 버렸다. 그래도 환자들은 몰려왔다. 이 때 "공 박사가 떼돈을 가마니로 벌어들인다"는 떠도는 소문을 귀띔해 주는 이도 있었다.

환자가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공 안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웬일인지 함경도의 환자들이 많이 왔다. 그 중에는 사정이 딱한 환자도 많았다. 어떤 때는 애를 데리고 온 노인들이 돈이 떨어져서 돌아가야겠다고 했을 때, 모처럼 먼길을 왔으니 병을 고쳐서 가라고 무료로 치료해 준 일도 적지 않았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 시술도 많이 하였다. 어떤 환자는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노비가 떨어졌노라고 거짓말을 하는 파렴치한 사람도 간혹 눈에 띄었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체하고 적선 삼아 완치되도록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이런 일로 인해, 후일 6·25 사변 때 인민군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함경도에서 온 인민군 군의감(총책임자)의 좋은 증언을 얻게 되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다. '적선을 많이 하면 난리가 나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들려주신 할아버지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창씨 개명과 '공병우 사망' 전보

이렇게 병원이 번성하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창시 개명이라는 명령이 총독부에서 내렸다. 우리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백인제 박사와 나는 이 점에서도 뜻이 맞아 창씨 개명을 거부하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까닭은, 아마도 이극로 박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고향에서 창씨 개명을 해 버렸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버이에게 불효를 범하는 짓인 줄 알면서도 곧바로 우체국으로 가 '공병우 사망'이란 전보를 고향에 띄웠다. 일본식 이름으로 된 호적에서 내 이름을 합법적으로 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린동 병원에 공 안과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방의 날을 맞을 수 있었다.

제 4 장 되찾은 나라에서 시작한 일들

아리랑을 목놓아 불렀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벽보가 서울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미리 일왕의 중대 방송이 있다고 예고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일본의 항복에 관한 것이라고 어림짐작만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전화로 확인을 하고서야 일본의 항복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예측했던 대로 일본 천황 히로히또는 잡음이 유난히 많이 섞인 녹음 방송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 앞에 항복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시내는 일본 헌병이 칼을 차고 다녔으니 일본의 패망을 공공연히 기뻐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앞으로 우리 나라가 독립국으로 대접을 받을 것이니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질서를 유지해 달라는 맥아더 장군의 전단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뒤부터 우리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기세 등등하던 일본 사람들은 풀이 죽어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불안해하며 갈팡질팡 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감격적인 순간에 국민이 함께 부를 애국가 하나 배운 적이 없어 할 수 없이 아리랑을 목놓아 불렀다.

36년 동안 일본의 압박 밑에서 설움을 당해 오던 우리는 그야말로 너무나 뜻밖인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와중에서도 풀이 죽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놈 밑에 붙어 끄나풀 노릇을 하며 동족을 괴롭힌 형사들이거나, 일제하에서 득세했던 이른바 친일파들이었다. 민중은 정신없이 한동안 만세를 외쳐 댔고, 사회에는 대혼란을 맞는 과도 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조선 총독부 자리에 미군이 들어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전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독립을 안겨 주기 위해 임시로 머무는 정도로 생각하며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해방이 된 지 2개월째 되던 10월 16일에는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일흔 한살의 나이로 40년만에 환국을 하였다. 그 당시, 해방이라는 급격한 변혁을 맞게 된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 걸쳐 들떠 있었고, 정치성을 띤 사회 정치 단체는 비 내린 뒤의 대밭 순 돋듯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정치를 한답시고 너도나도 목청을 높이고,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정치를 잘 모르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좌익, 우익 하는 낱말조차 생소하게 들리던 시절이었으니, 진정 어떤 단체가 앞으로 우리 나라를 바람직하게 이끌어 갈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들어보지도 못하던 사회 단체 정당들의 이름들이 슬며시 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50여 개의 정당이 앞을 다투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제각기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난 조국을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길거리에는 건국 위원회의 포스터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곧 이어서 붉은 글자의 인민 공화국이란 포스터가 나붙기도 했다. 이 좌익 계통의 단체도 나중에는 조선 인민당 (여운형)과 조선 공산당(박헌영)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여러 단체가 핵분열처럼 자꾸 늘어나는 것이었다. 우익 진영만 해도 한국 민주당(김성수, 송진우 중심)과 국민당(안재홍 중심)이 있어 좌익 계열의 정당과 맞서고 있었다. 자고 나면 군소 정당이 날마다 늘어나, 서로 치고 받는 아수라장 같은 혼란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길거리의 벽이란 벽은 온통 벽보와 선전 포스터로 얼룩져 있었으며, 그것은 곧 우리 나라 해방 직후의 정치 사회의 혼돈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나 벽보가 무슨 심미적인 감각에서 만들어진 미술적인 인쇄물이라면 또 모른다. 그야말로 페인트 붓 같은 것으로 휘갈겨 써서 몹시 선동적인 구호와 자극적인 빛깔을 칠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정말이지 해방의 기쁨도 잊은 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였던 나는 그 당시만 해도 몇 안 되는 지식층에 속했지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처음 배운 한글 맞춤법

나는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미리 백인제 선생의 귀띔으로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해방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정말 필설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격이었다. 그 때와 같은 감격은 내 일생 동안 아마도 처음이요,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80이 넘도록 살아오는 동안 기쁜 일이 수없이 있었지만, 해방의 기쁨만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앞으로 남북 동포들이 자유로이 넘나들도록 휴전선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면 그 때와 같은 감격을 또 한 번 느낄 것만 같다.

"만세! 만세!"

만세 소리가 삼천리 강토를 뒤흔들었다.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같은 혼란 속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건국을 위해서 정열과 의욕을 불사르고 있었다. 50여 개나 되는 정당, 거기다가 수백을 헤아리는 사회 단체들이 난립하여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 일었다.

나는 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모르는 분야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성품 탓으로 한글 공부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온통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해방된 국민이라면 먼저 제 나라 글을 옳게 아는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당시 조선어 학회의 권승욱 선생을 집으로 모시고 한글 개인 교습을 받았다. 일제하에서 일본어 교육만 받았으니 우리 나라 글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그 때는 한글 맞춤법을 공식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교도 없었고, 그같은 단체나 강습소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나라가 광복이 된 마당에 먼저 한글 맞춤법부터 배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글을 먼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안과 개업 첫 해에 내 병원의 환자로 만나게 된 한글학자 이극로 박사의 '한글 사랑은 애국 애족의 첫걸음'이라는 말씀이 떠오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곧 새 누리에서 봉사하며 살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여건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전혀 배워 본 일이 없는 한글 맞춤법을 첫걸음부터 철저하게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는 내 나라 글의 맞춤법을 겨우 알게 되어 한글이 과학적인 글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마침내는, 안과 의사인 내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을 해 놓은 것과도 같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안경과 나

1945년 10월 16일 해방을 맞은 지 두 달이 지난 때 이승만 박사가 홀연히 나타났다. 이 때 이 박사의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란 환국 제일성을 듣게 되었다. 좌익 계통에서는 새로운 적수를 만났다는 듯이 이 박사에게 '부인은 조선 사람이 아닌 서양 여자'라는 등의 인신 공격을 하였다. 그런 사람이 어찌 한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단 말이냐는 투의 전단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회 분위기는 자못 흉흉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이 박사는 자기 소신대로 정치의 술수를 동원하였다. 그는 군정장관 하지의 초청을 받고 고문으로 온 서재필 박사마저 미국으로 되돌아가도록 작용을 하고, 뒤늦게 중국에서 온 임시 정부 요인인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박사 같은 애국지사들도 희생의 제물로 사라지게 한 뒤, 1948년 5월 31일 남한만의 국회를 만들어 헌법을 기초하게 했다. 이어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는데 주도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부라고 추앙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독재자로 낙인을 찍어 고집불통의 영감으로 푸대접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갖가지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부정 선거 때문에 국민의 지탄을 받고 내쫓겨 하와이로 망명을 하는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

이 박사의 화려한 권세 아래서 김구, 여운형, 장덕수 등의 정계 요인들은 비명에 죽었고, 언더우드 박사 부인이 암살되는 등 사회는 살벌했고, 경제도 파국 직전의 심한 혼란을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허망된 세상살이를 볼 때, 나는 누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권좌에 있든, 산간 벽지에서 농사를 짓든, 정치를 하든, 의사 노릇을 하든 간에 남을 해쳐서는 안 되고, 남을 도우면서, 사람답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좋은 일을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나름대로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평소의 신조를 더욱 마음속 깊이 다지게 되었다.

나와 이 박사가 직접 연관되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있다. 언젠가 이기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진찰 의료 기구를 갖고 곧 들어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치료를 해야 할 많은 환자가 있는데 이 환자를 제쳐놓고 곧바로 경무대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몇 시간씩 진찰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가운데는 시골에서 논밭도 팔고 올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경무대 비서관에게 나와 시간 예약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 말대로 시간 예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안면 경련증이 있어 눈두덩 살갗이 가끔 떨리고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풍문에 듣고 있었을 뿐, 그에 대한 안과적인 병력에 대한 예비 지식은 전혀 없었다. 서울 대학 병원에도 안과 의사들이 많은데, 일면식도 없는 나를 불러 준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 반갑기도 하였다. 이 박사의 눈을 진찰해 보았더니 특별한 눈병은 없었다. 다만 다시 검안하여 안경을 새로 맞추어야 한다는 안경 처방을 했다.

"안경을 새로 맞추셔야겠습니다."

나는 검안 결과를 이야기하고, 안경을 주문해야겠다는 뜻을 전했다.

"음, 그래? 그런데 우리 국산으로 된 안경 있나?"

"아직은 국산이 없습니다."

이 대통령은

"우리 국산으로 안경을 하루바삐 만들도록 전문가들이 노력을 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당시 이 대통령의 외화를 아껴 쓰는 정신은 대단해서, 우리 나라 외교관들은 외국 공관에 근무 발령이 나도 부인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었다. 외화 절약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달러를 아껴 써야 한다는 이같은 엄명 때문에 한국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홀아비 외교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 때였다. 그러한 이 박사답게 역시 국산 안경 장려의 말을 나한테도 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박사의 한글 사랑 정신만은 서재필 박사에게서 배운 후배답게 철저하였다. 대통령의 성명서나 정부 발표문은 반드시 한글로만 발표하였다. 한글을 사랑했다는 점에서는 이 박사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문 이야기만 나오면, '한자로 새겨 넣으면 후대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더 읽을 수 있는 우리 국문을 비석에다 새기도록 해야'한다고 측근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가끔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를 강조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 나라가 한글 전용으로 한글 타자기, 한글 텔레타이프, 한글 식자기 등을 사용하게 되어야만 문명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헌법을 한글로 적게 하였고, 한글 전용 법률을 제정하고, 또 한글날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였을 때 그의 휴대품은 아주 단출했다. 당시 망명 현장을 목격한 경향 신문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조그마한 손가방 네 개와 두 개의 우산, 그리고 단장 한 개, 거기다가 10여 년 간 애지중지 직접 사용했던 타자기 한 대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망명 대통령의 전재산이었다. 같은 독재자라지만 필리핀의 마르코스나 전두환 같은 이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 갖고 있는 전 재산을 네 개의 보따리로 간추려서 살아야 할' 위급한 지경에 빠졌을 때, 나는 현재 갖고 있는 내 재산 가운데 무엇을 싸 들고 나가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끔 하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화장에는 금붙이와 값진 골동품도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우산과 헌 타자기를 소중한 망명 휴대품으로 선택했다. 그는 타자기가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품이란 점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박사가 발명의 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발명가들이 돈을 벌게 해 주어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상공부장관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시오."

이 박사는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워 민족 분단을 더욱 굳히게 하는 데 앞장을 선 독재자로 내 머리에 남아 있다. 우리 나라 역사와 민족 앞에 크게 잘못을 저지른 독재자이긴 하지만, 한글 사랑과 한글 기계화의 중요성, 그리고 타자기를 생활 필수품으로 삼은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나라 말로 시작한 강의

나는 정치 분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일본인 교수들이 싹 빠져나간 경성 의학 전문 학교를 한국 의사들이 맡아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의 힘으로 경성 의학 전문 학교를 살려야만 했다. 그래서 몇 안 되는 한국인 의사들이 대단한 열의를 갖고 열심히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 식민지화 정책 말년에 일본은 이미 힘에 겨운 전쟁 감행으로 물자난을 겪고 있었다. 그 영향이 커 우리 일반 시민들은 식량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생활 필수품도 모자라 이중 삼중의 난리를 겪고 있는 때였다. 병원 안팎의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수술할 때 써야 할 가제도 부족하여 아껴 써야 할 판이었다. 물자가 하도 귀한 세상이 되고 보니 병원 안 비품의 도난 사건도 잦았다. 이것은 해방이 된 뒤에도 한동안 그같은 풍조가 계속되어, 무엇 하나 시설 비품을 장만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 수술을 하는데도 고무장갑도 없이 하기가 예사였다.

어쨌든 해방 직후에는 사회적인 혼란, 그리고 시설과 의약품의 부족 등으로 경성 의학 전문 학교와 부속 병원은 운영에 몹시 힘든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의학계의 중진들은 백인제 박사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열성적으로 회의를 거듭하는 가운데, 중지를 모아, 자신이 몸담은 학교와 병원을 우리 민족의 학교, 우리 나라의 병원으로 키워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해 봐도 열심히 봉사를 한 시절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뜻 있는 의욕과 행동이 합쳐져 우리 민족의 의학자를 양성하고, 우리 겨레를 위한 병원이 탄생된다는 긍지와 기쁨이 수반되는 재건 작업이었다.

경의전 교장은 심호섭 박사, 부속 병원장은 백인제 박사가 맡았다. 각 과별로 교수가 선임되었다. 내과는 임명재, 소아과는 이선근, 산부인과는 윤치왕, 피부과는 오천석, 이비인후과는 강일영 그리고 안과는 내가 맡았다.

나는 강의도 맡았지만 한국말로 의학 용어가 번역되어 있지 않은 때라 매우 힘들었다. 강의 도중에 일본 용어가 예사로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한국 사람이 제 나라 말로 강의를 하는데 몹시 서툴러 진땀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말을 되찾은 해방이 되었지만, 한국말로 강의하기가 힘들어 난처하기만 했던 한국인 교수였고, 지식인이었고 의사였다. 이것이 당시의 우리 나라 지식인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우선 일본말로 통용되던 안과의 의학 용어부터 한국말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안과학의 강의를 위해서라도 해방 전에 내가 일본말로 썼던 소안과학 책을 끄집어내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깨끗이 원고지에 정리하는 일을 두 사람의 조수가 맡았다. 그런데 정서하는 것이 너무 진도가 늦어 답답하기만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우리도 영어 타자기처럼 한글을 찍는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과학 교재를 한글로 만들어야겠다는 애당초의 꿈은 엉뚱하게도 한글 타자기 발명의 꿈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 되었다. 나는 곧바로 시중에 나가서 한글 타자기를 두 대 사 들고 들어와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조국의 광복을 맞아 사회가 한창 소란할 때 학교에서 가르치랴, 경의전 부속 병원 안과를 재건하랴, 거기다가 한글 타자기의 꿈까지 키우면서 온갖 정열을 쏟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마냥 바쁘기만 한 나날이었다.

내가 걸린 매독

하루는 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끝이 땅콩 알만한 크기로 부어 오른 것을 발견했다.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았다. 몇 주일이 지나니 온몸에 발진이 나타나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증상은 심해지기만 하여 학교에 출근도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경의전 부속 병원장 백인제 박사가 병 문안을 왔는데, 그는 내 수척해진 몰골을 보고 나더니만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가 피부과의 오천석 교수를 데리고 왔다. 무엇인가 그분 나름대로 짚이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 교수는 내 피부의 증상을 보고 나한테 너무나 뜻밖의 진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매독 2기 증상인데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진단 결과였다.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매독 환자의 눈을 수술할 때 장갑도 끼지 않고 수술한 것이 원인이라 했다. 그제야 나 자신도 수긍되는 점이 머리에 떠올랐다.

"역시 그 환자가 문제의 환자였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치료하던 환자가 앓고 있던 매독이 내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으로 전염되어 온몸에 번진 것이다. 그 당시 의사들은 환자들의 각종 전염병에 전염되는 데에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매독은 3기가 되면 고치지도 못하고 평생 고생하다 죽을 흉악한 병인데 요행히도 2기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백 박사 덕분에 일찍 병을 발견하여 1년여 동안을 병상에 누워 606호와 페니실린의 위력으로 박멸할 수 있었으니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 말엽에 606호라는 치료약이 있었지만, 유엔군과 함께 한국 땅에 밀려들어와 만병 통치약으로 널리 마구 쓰이게 되었던 페니실린의 효험을 톡톡히 보고, 그 덕분으로 나는 살아나게 되었다. 이 병균은 어중간하게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병균이 살아날 가능성이 많은 아주 집요한 병균인 것이다. 그래서 뿌리를 없애는 치료를 완벽하고 아주 철저하게 하여 치료를 마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누리에 드러내기 어려운 이같은 병을 얻는 바람에, 한창 일을 해야 할 금쪽 같은 시간을 아깝게 보냈다. 어처구니없는 시련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나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앞만 보고 성급하게 달리기만 하는 나에게 이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제동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같은 북새통에 경의전은 서울 대학교에 병합시키기로 결정이 났다. 나도 학교의 책임 있는 자리에서 홀가분하게 풀리게 되었고 악명 높은 병에서도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백인제 박사와 함께 차린 출판사

그런데 하루는 백인제 박사가 난데없이 불쑥 '무엇인가 보람있는 문화 사업'을 하나 하자면서 출판사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누리 사람들이 온통 민주주의 나라를 수립하는 투사가 되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을 무렵, 민주주의를 계몽시키고 지식을 공급해 주는 출판사를 만들어 보자는 백 박사의 뜻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당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단체나 개인들이 온통 자기만 옳다고 싸움질만 하고 있을 때였다. 내 주장을 반대하면 모두 적으로 취급하고, 모두 죽일 놈으로 닦달하는 것이었다. 남의 의견이나 남의 주장은 존중해 줄 줄 알아야 민주주의가 될 터인데, 너무나 한심스럽기만 한 작태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같은 출판 사업을 일종의 민주화 운동이고 건전한 사회 운동의 하나로 생각이 되었다.

백 박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출판사를 차리기로 하였다. 이 혼란기에 내가 사회를 향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민중들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자주 독립이 무엇이란 것을 계몽하고 깨우쳐 주는 일이라고 말한 백 박사를 믿고 자본금의 절반을 대기로 했다. 지금은 빌딩이 들어선 금싸라기 시가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로도 서울 시민들의 일등 유락지로 지목되던 자하문 밖 자두 과수원을 선뜻 제공한 것이다. 돈 벌겠다고 시작한 출판사가 아니었으니 그냥 기부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시작할 수 없는 출판 사업이었다. 생각 끝에 이같은 좋은 일을 위해서라면 우리 집의 큰 재산에 속하던 과수원 땅문서를 선뜻 내놓기로 하였다. 나로서는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물론 상의를 하지 않은 내 독선 때문에 아내한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애들한테도 하필이면 왜 그 아까운 과수원을 내놓았냐고 한동안 항의도 다소 받았지만 나중에는 아내도 가족들도 내 순수한 마음에 응해 주었다.

내가 재산을 이런 식으로 유용하게 썼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죽을 뻔했던 전쟁 중에서도 생명을 건져 주신 것이 아닌가 하고 확신하고 있다. 나의 이같은 신념에 대해 결국 우리 가족들도 동의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출판사 이름은 '수선사'라고 했다. 서울 명동 2가 45번지에 사무실을 차리고 1947년 10월 1일에 등록번호 제494호로 공보처에 등록을 하였다. 가장 먼저 출판을 하게 된 것은,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 사상을 계몽시키는 데 한살이를 바친 [서재필 박사 자서전]이었다. 사학가인 김도태 선생의 직접 면담기를 곁들여 집필하여 1948년 7월에 출판하였다. 이와 같은 교양 서적을 계속 백 박사의 주관으로 편찬하여 출간하였다. 독자의 반응이 아주 좋아 양서의 출판사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이 사업도 6·25 사변이 터지면서 전화 속에 날아가고 말았다. 백 박사가 이북에 납치된 뒤로는 이 출판사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귀한 사람이 없어진 판인데 출판사 없어진 것이 무슨 그리 대수인가?

제 5 장 한글타자기를 만들기까지

공 안과를 찾아온 한글 학자 이극로 선생

한글 이야기를 하자면 다시 또 일제 때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1938년에 서울 안국동에 개원한 공 안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안과 개인 병원이었다. 앞에서 조금 밝힌 바 있지만, 어느 날 허름한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 한 분이 들어왔다. 안질이 있어서 왔다는 것이다. 치료를 받고 나서 그분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우리글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우리 조선 민족이 갖고 있는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사 검정 시험에 필요한 일본글만 공부했지, 소위 언문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문이란 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놈들이 이 글을 못 쓰도록 탄압을 하고 있죠. 아니, 일본놈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죠.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도 많습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기만 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조선말이었지만, 나는 그 때까지 전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한글에 대해서 은밀히 깨우쳐 주는 사람이나, 교육자나, 동무나, 기관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 환자 덕분에 나는 뒤늦게나마 우리 한글을 알게 되었고 한글이 우수한 글이란 점도 깨닫게 되었다.

한글에 대한 그의 애정은 종교적 신앙처럼 뜨거웠다. 그렇게도 철저한 분이었기에 눈을 치료받으러 와서 한글에 대해서 까막눈이던 안과 의사인 내 눈을 뜨게 하고, 내 민족 문화를 바로 볼 수 있는 시력을 바로 잡아 준 것이다.

그는 처음 보는 의사에게까지 한글을 전도할 수 있었던 신념에 가득 찬 그런 분이었다.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서슬이 시퍼런 일본 제국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지사적 인상이 풍기는 훌륭한 사상가 같았다. 그분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민족 정신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나라의 훌륭한 글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었다.

1934년 1월 25일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었지만, 학자들이 계몽하는 시기였다. 가끔 신문에 문필가들이 이를 사용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었으나 나는 예사로 보았다. 그리고 한글 맞춤법의 규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랐고,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가 그렇게도 유식하고 민족 정신이 투철한 한글 학자를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내가 그 때 그분에게 그같은 자극을 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분이 조선어 학회 중진인 유명한 한글 학자이자,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저명한 이극로 박사란 사실을 알았다.

내가 처음 만든 한글 시력 검사표

그 때 도라홈이라고 하는 돌림 눈병이 한창 번지고 있었다. 나는 "도라홈을 예방하려면?"이라고 하는 계몽용 전달을 한글로 만들어 여기저기에 뿌리기도 하고, 이를 병원 대합실에 두어 누구나 마음대로 집어 가도록 하였다.

그 무렵의 시력 검사표는 모두 일본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일본 '가나'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라도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인 제약회사로 이름난 유한양행에 제안하여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만든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시력 검사표가 탄생하었다. 그러자 일본말을 모르던 한국 사람들은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모두가 다 이 한글 학자가 눈병으로 내 병원엘 찾아와 준 것이 인연이 되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온통 누리가 영어 바람에 휩쓸렸을 때에 웬만한 지식인들은 영어 강습에 열을 내고 있었지만, 나는 이극로 박사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배우는 한글 첫걸음부터 익히기로 했다. 광복한 나라의 국민 자격을 따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삼고 공부를 한 것이다. 훌륭한 한글을 그 때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 날 이극로 박사가 한글만 쓰는 북한에 갔다 오신다면서 나에게 여비를 꾸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 때 돈 40만 원을 드렸다. 그 뒤 영영 그를 다시 만나 뵙지 못하고 말았다.

타자기와의 첫 만남

내가 영문 타자기를 처음 구경한 것은 경성 제대 의학부(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의 전신) 연구실에 있을 때였다. 자세히 보니, 정말 글자 만드는 신기한 기계였다. 따닥따닥 계속적으로 글자를 쳐 나가는 이 기계를 그 때 난생 처음 보았다. 나도 일본말로 된 내 연구 논문을 남들 하듯 영어로 간추려 서두에 실어야만 했다. 영어에 능통한 일본인이 번역해 준 영어 문장을 내가 직접 타자기 앞에 앉아 좌우 두 손가락으로 또닥또닥 쳐 나갔다. 이것이 나와 타자기와의 첫 만남이다. 로마자가 자동으로 찍히는 것을 호기심에 차 관찰하면서, 마치 바느질이 자동으로 되는 재봉틀과 비슷한 기계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가 직접 타자기 발명을 해 보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우리 한글도 이런 타자기로 찍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기계에 대한 내 관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재봉틀이란 것이 우리 나라에 처음 수입되었다. 우리 집에 있던 재봉틀이 동네의 큰 구경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산간 벽지인 우리 집에까지 있을 정도로 재봉틀이 보급되었다. 그 때 내 호기심은 '사람 대신 바느질을 해주는 신기한 기계'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 기계의 머리 부분을 뒤집어 젖혀놓고 바느질이 자동으로 되어 가는 구조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 기계 구조가 묘한 것을 알고 깊이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나이는 불과 열 살 안팎이었다. 그러니 타자기에 대한 관심도 그런 종류의 것이어서 신기한 것에 대해 품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타자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난 뒤였다. 해방이 되자 우리 나라 의학계의 중견이었던 일본 교수들이 물러나게 되면서, 우리 나라 의학도는 우리 나라 의사들에 의해 양성되었다. 나도 후학들을 위해 소용이 될 구실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제 일착으로 시도한 것이 내가 일제하에서 일본말로 만들었던 [소안과학](서울 충무로 2가 소재 마루젠 서점 발행)이란 책자를 한글본으로 번역하여 발행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본말로 된 것을 번역하는 작업은 내가 맡아 했지만, 또 한 사람은 괴상한 버릇이 있어 두세 번 읽어야 뜻을 간신히 알 수 있는 글씨였다. 나는 이 때 타자기를 쓸 수만 있다면 매우 빨리 찍을 수 있겠고, 또한 깨끗한 글자로 정서를 할 수도 있겠다는 데 착안하였다.

나는 결정하기까지 많은 것을 생각하는 편이지만, 일단 뜻이 서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내가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나는 일사불란하게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잊혀진 선구자들-이원익 씨와 송기주 씨

솔직히 말해서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생각뿐이지, 나는 이제껏 타자기의 구조적 원리를 배운 적도 없고 기계 공학적인 설명서를 본 일도 없었다. 누구한테 교습을 받을 곳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실물을 보고 혼자서 연구하는 길 뿐이었다. 그래서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타자기를 구해 놓고 독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문방구를 겸한 사무 기기 상회에 나가 보았다. 여기서 나는 뜻하지 않게 허름한 두 개의 한글 타자기를 발견하였다. 재미 교포 이원익 씨와 송기주 씨가 개발했다는 한글 타자기였다. 나는 두 대의 한글 타자기를 사 들고 왔다.

두 분이 개발한 타자기는 다 그 당시 미국에서 널리 사용하던 영문 타자기에 한글 자모를 대치하고, 한글 구성 원리에 따라 필요한 만큼 부동키(사일렌트 키)를 추가한 구조였는데, 이원익 씨의 것은 1910년까지 쓰여졌던 12글쇠 7열의 84글쇠식 타자기였고, 송기주 씨의 것은 1930년대에 모양이 개량된 42글쇠 2단 쉬프트식, 즉 현재의 수동 영문 타자기와 비슷한 UNDERWOOD 포터블 타자기였다. 타자기의 글쇠 수의 관계로 이원익 씨의 타자기는 타자의 근본 원칙인 촉지법(터치 시스템)이 불가능하였는데 반하여, 송기주씨 의 것은 촉지법이 가능한 기계였다. 두 분 것이 다 한글을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게 된 형식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모든 인쇄물이 세로로 내려썼기 때문이었다.

자모 구성에 있어서 이원익 씨의 것은 다섯벌식인데,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는 부동키로, 받침이 붙지 않는 닿소리와 받침은 찍고 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윗글자쇠를 누르거나 군손질 없이 한글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장을 자형에 따라 구분 타자하면 정체 없이 전진 인자 되도록 한 것이었다. 한편, 송기주 씨의 것은 닿소리 3벌(가, 고, 과 등에 쓰이는 3종)과 홀소리 1벌의 4벌 배치로서, 받침은 가로 홀소리 글자의 닿소리를 겸용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가'의 닿소리를 아랫단에 놓고, '고'의 닿소리를 윗단에 배치하여 '고'자 의 닿소리나 받침을 찍을 때는 반드시 쉬프트를 눌러야 했다. 글쇠의 동작은 닿소리는 부동, 홀소리는 전진식이어서, 받침을 찍고 난 뒤에는 스페이스 바를 눌러야 하며, 필연적으로 글줄에서 받침이 따른 글자와 다음 글자 사이에는 불필요한 반글자(1/2 스페이스) 간격이 생기는 결함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타자 속도를 비교할 때, 송기주 씨의 것이 비록 촉지법으로 타자가 가능하기는 하나, '고'자형의 닿소리와 받침을 찍기 위한 약 50의 쉬프트 키 조작을 해 주어야 하고 받침을 찍은 뒤의 약 25의 스페이스 바 조작을 또 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자모 배열에 있어서도 두 분의 제품 모두가 자모의 사용 빈도를 무시하고, 한글 자모를 적당히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었다. 글씨 모양은 세로쓰기로서 예뻤고, 속도는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빠르지만, 영문 타자기의 속도에 비하면 절반 정도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네모 반듯한 한글이 세로로 예쁘게 찍혀 나오고 있으니, 아무리 찍는 방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한글 타자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나는 어딜 가나 내 어버이는 어버이이듯 우리 한글 타자기의 원조는 어디까지나 이원익 씨로 모셔져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송기주 씨는 고국에 돌아와 한국 지도 등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 하다가 6·25 사변 당시 납치되었다. 북쪽에 간 뒤 한글 타자기 개발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글 타자기 연구가로서 그분이 만약 이북에서 활약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상당히 큰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납치 뒤의 소식이 못내 궁금하기만 하다. 6·25 사변 전에는 그분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한글 기계화를 위해 서로 의논하던 동지였다.

잠깐 여기에서 한 마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가끔 나에 관한 글이나 말을 하는 사람 가운데 나를 가리켜 흔히 '한글 타자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어, 나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회 닿는 대로 잘못된 점을 말해 주기도 했지만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정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못된 기록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해서 내 나름대로 공식적인 기회가 닿으면 꼭 정정해야겠다고 별러 오던 참이었다. 내 공식적인 기록이 될 자서전에서나마 분명히 그분들의 업적을 밝히고 싶다. 한글 타자기의 처음 발명자는 이원익 씨란 점을 재삼 밝혀 둔다.

참고로 라이노타이프로 한글을 찍을 수 있는 한글 식자기의 발명가는 이대위란 분임을 밝혀 둔다. 그의 식자기로 하와이 교포 신문과 로스앤젤레스의 신한민보가 발행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내 나름대로 먼저 개발한 발명품보다 월등하게 속도가 빠르고 글씨꼴도 간편한 가로쓰기의 한글 타자기를 세벌식 입력과 세벌식 출력으로 개발하고 싶어서 연구를 시작했다.

신체를 해부하듯 타자기를 발기발기 뜯어 놓고

타자기 파는 가게에 가서 이번에는 수동식 영어 타자기(당시 전동 타자기는 없었다)를 사 왔다. 신체를 해부하듯 그날로 타자기를 발기발기 다 뜯어 타자기의 기본 구조부터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 때 일본에서는 유명한 동경 대학 공과대학에 시계, 타자기, 재봉틀 등의 세 가지 연구과를 두어, 정식 학문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타자기 연구를 위한 어떤 교육 기관도 없었고, 참고 서적 하나 구해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내가 배울 수 있는 길은 영문 타자기의 기계 구조를 살핌으로써 눈치로 기계 공학적인 원리를 알아내는 것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일본에서 발행한 [타이핑]이라는 책자를 유일한 참고서로 삼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내 타자기 개발의 동기가 내가 지은 [소안과학] 번역 원고 정리에 있었다고 한 바 있는데, 일본말로 저술한 원서가 가로 조판 형식이었고, 우리 나라의 추세가 일부 신문이나 잡지를 제외하고는 교과서나 과학 서적 등이 가로 조판 쪽으로 기울었으므로, 나는 이원익 씨나 송기주 씨의 것과는 달리, 세로 글줄 대신 가로 찍고, 가로 읽히는 가로쓰기 한글 타자기의 개발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나는 어느 정도 기계에 대해 알게 되자, 이번에는 우리 나라 글의 음운 조직을 공부하였다. 한글의 기막힌 규칙적 법칙에 절로 탄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한글의 과학성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한글쓰기의 기계화를 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으레 처음 부딪치게 되는 골칫거리가 있다. 받침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영어처럼 한 자 한 자 글쇠를 누를 때마다 소정의 길이만큼 옆으로 전진만 하면 간편하겠는데, 한글은 받침이 있기 때문에 받침이 있을 때마다 옆으로 전진을 해서는 안 된다. 받침은 홀소리의 오른쪽으로 전진해서 찍으면 안 되고, 홀소리 밑으로 내려가서 찍혀야 한다.

홀소리만 해도 그렇다. ㅏ, ㅑ, ㅓ, ㅕ처럼 모든 홀소리가 닿소리의 오른쪽에 언제나 붙게 되어 있다면 오죽 좋을까? 글쇠를 누를 때마다 영어처럼 오른쪽으로 전진만 하면 좋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ㅗ, ㅛ, ㅜ, ㅠ 등 아래로 붙는 홀소리가 있어 일률적으로 영어 타자기 흉내만 낼 수 없게 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영어보다는 까다로운 연구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한글은 구조가 무척 복잡한 것 같지만 개성이 뚜렷한 일정한 법칙이 있는 글임을 알았다. 이것이 한글 타자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연구 과제란 것도 알게 되었다. 초보적인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 가운데에는 이 받침 때문에 한글을 숫제 풀어쓰기로 하자면서 세종 임금님을 원망하기까지 하고, 또 두벌식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초기에 두벌식이라고 하는 걸림돌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는 한글 타자기 연구의 초기 현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금 현행 맞춤법에 맞게 기계화할 생각은 안 하고, 반대로 한글을 받침 없는 맞춤법으로 바꾸기를 바라고 있으니, 주객이 전도된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한글의 음운 구조가 두벌식으로 풀어쓰게 되어 있었다면, 한글의 기계화는 월등히 쉽겠다는 엉뚱한 환상 속에서 오랜 시간을 방황하였다. 풀어쓰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두벌식으로 현행 맞춤법을 찍을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였다. 쉽사리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시작한 일이 뜻밖에도 제대로 풀리지 아니하여 갖은 고생을 다했다. 차라리 이미 발명되어 있는 한글 타자기를 쓰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암담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념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연구를 계속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진통의 세월이라 생각하고 버티어 나갔다.

병원 일은 뒷전에 돌려놓고

나는 한글 원리와 일치하는 세벌식 타자기 개발을 목표로 삼고 지금까지 연구하던 두벌식 방식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에서는 기현상이 생겼다. 내가 이미 40여 년 전에 만들었다가 기계 공학적인 무리가 많은 것을 깨닫고 내버린 바로 그 두벌식 시스템을 요즘에 와서 정부 표준판이라고 정해 놓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벌식은 받침이 있을 때마다 쉬프트 키를 누르는 비능률적인 방식이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수동식 타자기 자판과 컴퓨터 자판이 다르고 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찍어야만 하는 해괴망측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나는 두벌식 자판으로 만든 타자기를 포기한 다음에 우리 한글의 구성 원리에 맞추어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첫소리인 닿소리와 홀소리를 찍고 나서는 백스페이스 키를 일일이 눌러 받침을 찍는 방식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도 두벌식 방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비능률적인 것이었다. 나는 앞의 분들이 개발한 한글 타자기보다 아주 획기적인 타자기 개발을 목표로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 우리 집 사랑방은 해체된 타자기와 쇠붙이 부스러기로 마치 고물상처럼 지저분하기만 하였다. 병원 경영보다 타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려니, 채용 의사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 박사한테 직접 진찰을 받겠다'는 환자에게 차츰 실망을 주게 되었으니 병원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병원 일은 내버려 둔 채 쇠붙이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가족들도 참다못해 내놓고 못마땅하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한 일이었다. 병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니 이러다간 집안까지 망하지 않겠느냐고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타자기에 미쳐 병원 망하게 되었다는 소리가 번지게 되자, 동무들마저 스스럼없이 한마디씩 충고를 하며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성화였다. 온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연구자의 심정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기만 했다. 그들은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 순간과의 투쟁이 연구 생활이란 것을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병원이나 잘 경영할 일이지, 눈 의사가 무슨 타자기를 발명한다는 거야."

"한문자도 안 나오는 타자기를 누가 쓰겠다고 하기에, 한글만 나오는 타 자기를 만들고 있는가?"

"신문, 잡지, 공문, 편지 등 모든 글을 내려쓰고 있는데, 왜 가로쓰기 타자기를 만들고 있는가?"

물음과 충고가 여러 가지였다. 위로도 격려도 아닌, 조롱에 가까운 말로 연구 중단을 종용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같은 말에는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내 원대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섭섭한 생각을 할 경황도 없었다. 이같은 소리에는 일체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시행 착오가 계속되는 가운데 6개월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타자기 연구한다고 아주 돌아 버렸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남이야 뭐라고 하건 간에 당장 내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한글을 한글의 특성대로 첫소리인 닿소리를 찍고, 다음에 가운뎃소리인 홀소리를 찍고 나중에 끝소리인 받침을 찍는 세벌식 원리의 타자 장치를 발명해야 간편해질 것이란 판단 아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간단하게 세벌 원리로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번번이 벽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몇 번이고 모든 것을 집어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우리 집 사랑방은 타자기를 연구한답시고 벌여 놓은 연장과 부속품으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도대체 응접실인지 대장간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였다. 나는 병원 경영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병원을 문닫게 됐다는 가족들의 불평에도 무감각해졌다. "환자들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어요" 하던 간호원의 목소리는 점점 풀이 죽어 갔다. 이제 환자들의 불평이 노골적으로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연구에 열중하다 말고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공 박사 미쳤다는 소리가 점점 많이, 더욱 크게 내 귀에 들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일을 위해서는 작은 일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억지 같은 소리를 해 가며 가족이나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내 말에 동의해 주는 이는 없었다.

어느 날 불평을 하는 아내에게 무심코,

"지금처럼 소란한 시대에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하는 사람은 위급할 때 살 수 있지만, 돈이나 명예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요."라고 말했다. 아내도 이 말을 어떻게 새겨들었는지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 뒤, 6·25 사변 때 바로 이 타자기 덕분에 내가 생명을 건졌으니 그 때의 내 예언은 한참 뒤에 적중한 셈이다.

"맞았어, 바로 이거야, 내가 원했던 것이!"

이렇게 나는 주위 사람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애간장을 태우는 연구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도 기발한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네벌식으로 된 송기주 씨의 세로찍기 타자기를 세벌식으로 간편하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수많은 활자를 일일이 동강을 내어 땜질을 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야만 세벌식 구조로 개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꾸 잔일만 늘어나게 되어 시간 소모가 많아졌다. 나는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이임풍 씨를 내 전속 연구 기사로 채용하여 한방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마침내 세벌식으로 만들어 놓고 보니 역시 송씨 것보다 속도는 훨씬 빨라졌는데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가로쓰기가 되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또한 여태까지 저질렀던 갖가지 시행착오나 몇 종류의 제작품을 만든 경험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입술이 타 들어가는 안타까운 시간이 계속되었지만, 내 집념은 뜨거웠다.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되었다. 이같은 확신 속에 끈질긴 투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한글 자체가 세벌식으로 되어 있으니 반드시 아주 간단한 타자 방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식 저런 식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해답은 나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과학자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는데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이 일기 시작하면 차분하게 발명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끔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정서적으로 불안해져 가는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나로서는 심기일전하여 연구할 수 있는 마음을 가다듬는 심각한 시간이었다.

비자동식 세벌식 한글 구성을 쉽게 또 몇 가지 방법으로 실험했다. 재봉틀의 자동화처럼, 타자기의 세벌식 자동화가 안 될 리 없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하고 만들어서 실험을 해 보면 생각과는 달리 번번이 실패였다.

이렇게 암담한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기계에 매달리고 있었다. 한글 자모를 세벌식 자동으로 타자할 수 있는 구조의 실마리가 도무지 풀리지를 않아 손을 툭툭 털고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자리에서도 잠을 곧 이루지 못하고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잠을 청하고자 했다. 바로 그 때 불현듯이 내 머리를 스쳐 가는 착상이 떠올랐다. 그런 것을 영감이라고 한다던가? 닿소리와 홀소리를 찍은 다음, 받침을 따라가서 찍히도록 하면 자동화가 가능하겠다는 생각과 도심에 글자가 찍히는 가이드를 한 개 더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 다. 그래서 나는 받침이 찍히는 안내 구멍을 한 개 더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이 적중했다. 기막힌 착안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 타자기에도 가이드가 두 개씩 갖춰져 있지는 않다. 나는 이것을 쌍촛점이라고 나중에 이름 붙였다. "맞았어, 바로 이거야, 내가 원했던 것이!"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곤하게 옆에서 잠들어 있는 이임풍 씨를 깨웠다. 내 착상을 설명하였다. 선잠을 깨 눈을 비비대는 이씨와 나는 또 다시 공작용 책상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쇠를 자르는 줄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계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같은 발명의 착상’’을 해낸 때는,’’ 내가 이원익 씨 타자기와 송기주 씨의 타자기를 사다가 공부하기 시작한 지 약 6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고, 본격적으로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집중적으로 세벌식으로 연구를 한 지 거의 40일쯤 되는 날 밤이었다.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던 받침 처리를 끈질긴 생각과 노력 끝에 쌍초점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 기쁨은 이루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순간에 얻은 발명의 힌트로 마침내 수동식 기계로 아주 간편하게 그리고 자동적으로 빠른 속도로 한글을 구성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뒷날 내가 우리 나라와 미국에 발명 특허를 얻게 된 이른바 쌍촛점 방식인 것이다. 이것도 이상적인 타자기로 곧바로 순조롭게 발전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방식대로 망치로 두들겨 가며 줄칼질을 하고 펜치, 땜질 도구, 동활자 조각 등을 동원해 시제품을 한 대 만들었다. 자판은 손으로 한글을 쓰는 순서대로 닿소리는 왼쪽, 그리고 홀소리와 받침은 오른쪽에 배치한 자판으로 2주일 가량이 걸렸다.

예상한 대로 자동화는 되었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글쇠를 쳐 나가는 데 활자대의 충돌이 심했다. 그러니 빠른 속도로 찍을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자판의 위를 반대로 바꾸기로 하였다. 닿소리를 오른쪽에, 홀소리와 받침을 왼쪽에 놓기로 하고, 또다시 며칠 동안을 줄질, 땜질을 해 가며 겨우 제2의 시제품을 한 대 만들었다. 그제야 타자가 순조롭게 미끄러져 나가듯 아주 간편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기계 공학적으로 무리가 거의 없는 이상적인 자판이란 확신이 생겼다. 이렇게 글자판을 필순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는 실험으로 이상적인 한글 타자기를 발명할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하나의 움직임의 능률까지도 효율적으로 감안해야 된다는 드보락 박사의 인간 공학적인 이론(이 이야기는 기회 있을 때 따로 설명하려함)과도 맞는 합리적인 글자 배열로 마침내 세벌식 자판 시스템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떤 발명이든 발명된 뒤에는 쉬운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발명이란 많은 정력과 시간, 그리고 끈질긴 의지와 많은 돈이 소비되는 것임을 체험하게도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내 신념을 스스로 입증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춘원 이광수와 나

이렇게 내 손으로 두들겨 세벌식 타자기 견본 한 대를 만들어 냈다. 활자는 별도로 전문 조각가에 맡겨 구리 활자로 만들었다. 손으로 조각한 활자로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찍힌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글씨꼴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해 보았고, 손으로 만든 조잡한 이 기계를 미국 언더우드 회사에 설계서와 같이 보내 제작에 참고품으로 쓰여지도록 하였다.

내 연구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그 때까지 별로 눈여겨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대다수가 "누가 한글만으로 글을 쓰기에 한글만을 찍을 수 있는 타자기를 만들고 있는가? 안과 의사가 눈 환자나 돌보아 줘야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몇 사람만은 놀랍게도 관심 표명을 해 주었다.

하루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눈병을 치료받기 위해 내 병원에 왔었는데, 내가 집에서 타자기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말을 듣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우리 집 사랑방으로 찾아 내려왔다. 그 당시 병원은 2층에, 살림집은 아래 층에 있었다. 춘원은 내가 개발해 놓은 타자기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 대뜸,

"공 박사! 타자기 완성되거들랑 제1호를 내가 쓰도록 해 줘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것만 있으면 나는 1년 걸려 쓸 글을 4개월 동안에 다 해치우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겠는걸."

하고 기뻐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춘원은 과연 선각자였다. 이미 1934년 3월 2일자 조선 일보에 송기주 씨가 개발한 한글 타자기에 대해

"송씨의 타자기의 발명은 위대한 것이다. 우리도 서양 사람들처럼 기계로 글을 쓰게 되었다. 이 타자기 시스템을 라이노타이프에 옮긴다면 우리 나라 문화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는 요지의 놀라운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발명가인 나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타자기의 위력을 아는 분이었고, 라이노타이프란 자동 식자기의 성능까지도 아는 분이었다. 이같은 춘원과의 만남은 확실히 나에게 큰 위로였으며 격려가 되었다. 그분은 그 때 이미 내가 개발한 한글 타자기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미군정청 문교부의 편수국장 스미드(Smith) 씨가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며 매주 토요일마다 나를 찾아오곤 했었다.

"장관이 어디에서 들었는지, 공 박사가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고 있는 모양인데 찾아가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우리 문교부에서 교육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미국에서 풍요하게 가져오기 때문에 행정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 유달리 교육에 가장 중요한 한글 타자기가 없는 것이 크나큰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한국의 교육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글 타자기가 소중히 다루어지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 아래 여러 문제가 검토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 레밍톤 타자 회사에서 재미 교포인 김준성 목사가 개발한 한글 풀어쓰기 타자기 200대를 들여다가 각 교육 기관에 나누어주었지만, 그것은 실용 가치가 전혀 없어서 모두 영문 타자기로 개조해 쓰고 있는 실정이라 했다. 그런 사정으로 문교부에서는 내가 연구 중인 한글 타자기의 탄생을 몹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했다. 이런 연유로 스미드 국장은 매주 토요일이면 와서 한글 타자기의 완성을 알아보곤 했다.

그 당시 일반 사회에서나 관공서에서는 한문을 섞어 쓰지 않고서는 공문서가 될 수 없다는 생각들을 완고하게 갖고 있었다. 시간 낭비나 능률에는 도무지 관심 없이, 공문과 원고나 글월(편지)이나 이력서로 펜이나 골필(骨筆)로 예쁘게 잘 써야만 제대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문명의 이기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타자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지금도 글자를 예쁘게만 쓰겠다는 사치한 글자 생활 때문에 한글은 위대한 제 빛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타자기는 문화 발전에 가장 으뜸가는 문명의 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미행정부 문교부 미국 사람들은,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이 쓰다가 그냥 놓고 간 일본식 국한문 타자기가 각 교육 기관에도 있었고, 일본에서 얼마를 구입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문 타자기와 같이 한글만을 찍더라도 속도가 빠른 타자기가 교육 기관에서 능률적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자 생활에 익숙한 그들이라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고 열의를 보여 준 것은, 타자기가 그 나라의 문화 발전에 혁명적인 기여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스미드 편수국장에게 나는 드디어 견본 제작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5주 동안 매주 찾아온 보람이 나타났다면서 곧바로 군정청 문교부 장관실에서 시제품에 대한 실험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발명품에 무관심한 사람들

내가 새로 개발한 한글 타자기의 시제품을 보여 주기로 약속한 날, 나는 스미드 씨의 지프차를 타고 문교부 장관실로 갔다. 문교부 장관실에는 미군정 문 교 고문관 산하의 한미 관계 고관들이 즐비하게 앉아, 내 설명과 타자기를 신기하게 바라보고들 있었다. 이 때 나는 우리말로 설명하였고, 오천석 장관은 통역까지 해 가면서 타자기의 출현을 반겨 주었다.

그들은 타자기 속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능률적인 타자기에 대해 잘 이해하였다. 미고문관은 빨리 서둘러 제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였으며, 생산품이 나오면 다량으로 구입하여 각 교육 기관에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미국에 있는 타자기 회사에 제작을 요청하려면 아닌게 아니라 설계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서둘러 설계도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뒤 부랴부랴 설계도를 만드는 데 열중하면서 미국에서 제작되어 정식으로 상품이 될 날을 기다리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설계도 제작, 특히 활자 도안 특히 활자 도안에 이임풍 씨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1948년 7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어 미군정 관리와의 인연은 일시에 끊어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시인 주요한 선생을 찾아가 설계도를 보이고 미국에 있는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 제작 의뢰를 하는 글월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주 선생께서 글월을 써 주신 덕분에 나는 내가 손으로 만든 시제품을 설계도와 함께 미국 언더우드 회사에 보내어 정식으로 제작하도록 의뢰했다. 1949년의 일이다. 이 때, 지금의 신 안과 원장인 신예용 박사가 안과 연구차, 뉴욕에 가 있었다. 나는 신 박사에게 내 한글 타자기의 미국 특허 출원을 미국인 변호사에게 부탁을 해 달랬다. 그 때는 한국인 변호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신 박사는 몹시 바쁜데도 내 미국 특허 출원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했다. 나는 그 신세를 아직 갚지 못하고 있다. 신 박사가 수고해 준 덕택으로 1950년에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특허를 받았다. 1950년 초에 언더우드 회사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글 타자기 견본 한 대가 날씬한 상품이 되어 도착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의 영자 신문에는, 한글 타자기가 발명되어 언더우드 회사에서 제작되었다는 것과, 세대의 시제품은 주미 한국 대사로 있던 장면 박사, 그리고 연희 대학교(연세대학교 전신)의 언더우드 박사, 그리고 발명가인 나에게 각각 한 대씩 보내졌다고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온 시제품을 우리 나라 문교부를 찾아가서 장관 면회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비서실에서는 뜻밖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타자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우리 나라 정부가 정식으로 섰으니 더욱 관심 표명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주 딴판이었다. 어이없게도 면회 거절을 당했다. 나는 그 이튿날 다시 가서 면회를 신청했다. 또 거절을 당했다. 간신히 세 번째 면회를 신청하여 장관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나는 훈련된 타자수도 데리고 가서 빠른 속도로 한글을 찍어내는 타자기의 성능을 과시하였다. 장관은 먼 곳에 앉아서 타자수가 재빨리 치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잘 치는군!" 하는 말을 한 마디 하였을 뿐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안내 직원은 다 끝났으니 어서 나가라는 독촉이었다. 장관은 가까이 와서 한글이 어떻게 찍히는가를 보지도 아니하였다. 나는 기가 막혔다. 너무나 무관심한 장관의 태도에 실망만 하고 말았다. 매주 찾아와서 빨리 완성해 달라며 관심을 보여 주던 미군정청 관리보다 제 나라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미국 문화공보원에서 전갈이 와 있었다. 서울 시민들을 위하여 한글 타자기의 실험을 하고 싶으니, 기계를 하루만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계도 빌려주고, 잘 훈련된 타자수도 딸려 보냈다.

지금의 미도파 아래층에서 새로 발명한 한글 타자기를 하루 동안 일반 시민에게 선보였다. 오고 가는 많은 시민이 구경을 하였는데 그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영어처럼 우리 나라 글자도 타자기로 찍을 수 있구나!" 하는 반응도 다소 있었지만, 대다수는 "국한문 타자기처럼 한문자가 안 나와 쓸모가 없다!"고 투정을 부리는 사람, "이거 어디 글자 모양이 이래 가지고 쓸 수 있겠나!" 하고 글씨 모양이 좋지 않다고 타박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문 글자에 중독된 증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속도 빠른 한글 타자기에는 무감각하고 그저 인쇄 활자처럼 예쁜 글자가 안 찍혀진다는 불평뿐이었다. 글을 빠른 속도로 칠 수 있는 타자기와 글자를 예쁘게 찍는 인쇄기를 구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전시 행사를 하고 있는 동안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꼭 한 사람만이 "저렇게 빨리 한글을 찍어낼 수 있으니, 장차 우리도 한글만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타자수가 귀띔해 주었다. 모처럼 고성능 타자기를 발명해 놓았지만 일반 대중의 호응은 너무나 무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도 미국 문화공보원은 이같은 타자기 실물 공개에 이어, 계속해서 그들이 발간하는 월간 잡지에 특집 보도를 하는 등 남다른 관심을 보여 주었다. 정말 중요한 역할을 도맡아 해 주고 있었다.

그 뒤 곧 6·25 사변이 터졌다. 진해에 피난 가 있을 무렵에도 미국 문화 공보원은 [한글 타자기]란 15분짜리 기록 문화 영화를 만들어 공개하면서 나에게 필름 한 개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부산에 피난 가 있을 때, 해군에서 당시 손원일 제독의 주선으로 한글 타자기를 미국에서 군수품으로 구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최현배 박사는 한글 타자기 경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일반인은 글자꼴이 빨랫줄 같다고 타박을 하면서 관심이 없었다.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에 있고, 글씨는 손으로 쓴 것보다도 읽기 쉬운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신문이나 잡지에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발명되었다는 기사조차도 보도된 적이 없었다. 문교부장관이 한글 타자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시대라, 속도가 영문 타자기보다도 빠른 타자기가 발명되었지만, 일반 언론인들이 이를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세계적으로 우수한 과학적인 한글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해 온 민족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얼른 알아볼 수가 없는 것도 큰 모순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한글 타자기의 생명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속도가 40나 느린 네벌식, 또는 50나 느린 두벌식 타자기를 사용하면서 생명처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이 적잖다. 세벌식으로 한글의 기계화 또는 전산화를 한다면 우리 나라가 일등 문명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바람을 가져 볼 수 있지만, 두벌식으로 추진한다면 우리 나라는 동메달 정도의 국가로밖에 발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명사들의 타자기 보급회

나는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든 한글 타자기 보급을 위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발명을 크게 환영하고 기뻐했던 선각자 같은 분들에게 계몽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한글 속도 타자기 보급회"라는 것이 발족되었다. 최현배 선생이 회장이 되었고, 백인제 박사, 주요한 선생, 이광수 선생, 정인섭 박사 등 10여 명이 위원이 되어 한글 타자기의 발명은 민족적인 자랑이며 민족 문화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해 주었다는 점을 선양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진주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일반 민중들이 그 귀한 값어치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니, 선배 발명가들의 생애가 파산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 이 사회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선각자들의 계몽의 소리가 신문 잡지 와 말을 통하여 퍼지기 시작했으니 머지 않아 일반 사람들의 호응도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우리 나라 문교부를 통해 일을 해 보려다가 장관의 무관심한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주한 미국 경제 원조처(E. C. A.)를 찾아가 내 타자기를 원조 종목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남의 나라 돈주머니를 빌려 보급시킬 궁리를 한다는 자체부터 몹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문명의 이기를 이해해 주는 기관을 통해 지원을 받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기관에서는 즉석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때마침 송기주 씨 타자기도 그같은 신청을 해 왔으니, 각각 100대씩을 문교부에 원조하겠다는 것이다.

공문을 모두 세로로 쓰던 때라, 한글을 세로쓰기와 가로쓰기 어느 쪽 타자기가 더 바람직한가는 써 본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결정짓도록 함이 좋겠다는 의견까지 첨부되었다. 우선은 이 200대로 문교부에서 3개월 동안 타자 훈련을 공무원들에게 실시해 줄 것과 수강할 공무원을 미리 선정해 놓도록 하여 차질이 안 생기도록 공문이 문교부에 전달되었다. 더욱이 훈련 장소와 타자기 탁자 같은 것은 문교부 책임 아래 준비하도록 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무관심하기만 했던 문교부에서 그제야 그런 공문을 받고, 나한테 달려와 테이블은 어떤 규격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등의 준비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 자리에서 그 관리에게 핀잔을 주었다.

"내가 직접 문교부에 찾아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호소할 때는 냉랭하기만 하더니, 미국 기관에서 보낸 공문을 받고서는 이렇게도 열심들이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이게 다 외국 사람일이 아니고, 우리 나라 일인데 우리가 먼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추진을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결국 문교부장관에게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한 분풀이를 문교부 말단 직원에게 털어놓은 셈이니, 그 관리의 심사만 사납게 해 준 듯싶어 한동안 내 마음만 언짢았다. 경제 원조처에서 주문한 200대를 미국에 주문하였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만 곧 6·25 사변이 터지고 말았다.

6·25전쟁과 내 인생

정치보위부에 끌려가다

1950년 6·25가 터졌다. 다들 부산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기로 하였다. 용맹한 우리 국군이 남침해 온 공산군을 물리치고 있다더니, 난데없이 28일 아침에 공산군이 서울에 들이닥쳤다. 이북에서 내려온 해방군이란 사람들이 우익 인사들을 한강변 모래밭에 끌고 가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총살하여 묻어 버린다는 소문이 돌자, 서울 장안은 살기가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내 평생 죄를 짓거나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우익 사람을 마구 죽인다는 말에 겁을 먹고 2주일 가량 피신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날로 나는 정치보위부원에게 붙들려 갔다. 아내는 타자수에게 내가 어디로 끌려가나 보고 오라고 미행을 시켜 국립도서관 자리로 끌려간 것을 알았다고 했다. 보위부에 나를 끌고 가서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혔다. 군인 세 사람이 대뜸

"네가 정판사 사건 때 허위 진단서를 썼지?"

하며 으름장부터 놓았다.

"아닙니다. 저는 사실대로 썼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늬 새끼들 허위 조작 때문에 우리 애국 동무들이 대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들에게 모두 학살을 당했어. 이 새끼, 허위 진단서를 안 썼어?"

라며 큰 소리를 치면서 주먹으로 내 뺨을 마구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시멘트 바닥에 넘어뜨리고 군화발로 내 무릎과 정강이를 차고 짓밟았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래층 어두운 독방이었다. 그들이 나를 그 방까지 어떻게 옮겨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과 양쪽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고, 피하 출혈로 검은 반점이 두 다리에 번져 있었다. 코에서 피를 흘렸는지 입었던 모시 바지와 저고리에 피가 무수히 엉기어 묻어 있었다.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1946년, 내가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안과 교수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나는 서울 지방법원 판사로부터 이관술이란 사람의 눈을 검사하고 상해 진단서를 제출해 달라는 공문서를 받았다. 어느 날, 순경이 이관술이란 사람을 나에게 데리고 왔다. 이관술이 이른바 '정판사 사건'으로 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려 달라는 담당 검사의 의뢰였다. 내가 진찰을 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병으로 생긴 백내장으로 실명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정판사 사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전문의사로서 사실대로 진단서를 썼을 뿐이다. 내가 눈과 소변을 검사했던 이관술이란 사람이, 나 때문에, 대전 감옥에서 후퇴하는 국군에게 살해당하였다는 말을 어제 인민군한테 들었을 때, 인민군이 나를 총으로 쏘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때는 전시이고, 내 진단서 때문에 그가 죽었다면 어찌 나를 살려 둘 리가 있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오늘 밤 한강 모래밭에 끌려나가 총살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평소에 가족에게 무척이나 무관심했지만 오늘밤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미국 언더우드 회사에서 제작한 한글 타자기의 시제품이 한 대 왔기에 쳐 보니, 자모 한 개가 잘못되어 다시 만들어 달라고 미국 회사에 요청해 놓고 있었다. 나는 받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었다. 이 두 가지 간절한 생각을 하였을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글 타자기는 내가 죽더라도 과학적 진리가 있으면 잘 보급될 것이고, 내가 살아도 진리가 없으면 보급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곧 단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가족은 꼭 한 번 만나 보고 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가족을 만난다 해도 무슨 특별한 부탁이 있어서는 아니다. 가족을 만나 보고 죽으나, 만나 보지 않고 죽으나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왜 그렇게도 가족을 간절히 만나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 때 나는 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 왔던 한글 타자기보다는 가족이 더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다.

밤이면 밖에서 철문을 여닫는 쇳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가 끌려나갈 차례가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었다. 밤이 되면 극도의 공포심과 가족을 한 번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 안타까움과 초조함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시간

낮에도 어둑어둑한 독방에서 '오늘밤에 죽느냐?' '내일 밤에 죽느냐?' 하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한 주일을 보냈다. 퉁퉁 부었던 얼굴과 다리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두 다리에 있던 출혈 반점도 작아졌다. 어느 날 과장 급으로 보이는 군인이 자기 책상 맞은편 의자에 나를 앉히고 출생, 학업, 직업, 정치, 사회 등등에 관하여 자세히 물으면서 조서를 꾸몄다. 그날 나는 독방에서 2층에 있는 넓은 공동방으로 옮겨졌다. 그 방에 수많은 우익 인사들이 날마다 끌려 들어왔다. 저녁이면 새 옷을 입은 인사들로 그 넓은 방이 꽉 찼다. 200명 가량 되었다. 밤이 되면 군인 연사가 연설을 했다. 연설은 날마다 똑같이 정판사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미제국주의 군정은 남조선 괴뢰 정부를 시켜 서울에 있는 공산당 인사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저희 놈들이 위조 지폐를 만들고선 마치 우리 애국 동무들이 한 것처럼 뒤집어씌워 대전 감옥에 가두었었는데, 이번 후퇴하면서 그들을 다 학살해 버렸던 말이야."

격분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그런 악독한 조작을 자행한 정부에 협조한 반동분자였지만, 이제라도 반성하고 우리 공화국에 협조하겠다는 자술서만 써 내면 누구라도 다 용서를 받게 될 거요."

그는 안심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 직접 관련된 나에게는 그 연설은 내가 사형감인 중죄인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가 자술서를 써 바치고는 이튿날 아침에 다 나가곤 했다. 나는 정 판사 사건도 잘 모르고, 허위 진단서를 쓴 일도 없었으니 잘못했다고 자술서를 쓸 수가 없었다. 거지꼴이 된 나만 혼자 남겨 놓고 모두 석방되는 것이었다. 날마다 새 사람들이 끌려 들어왔다가는 자술서를 써 놓고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방에 두 주일 있는 동안, 약 3천 명 가량 끌려왔다가 모두 풀려 나갔다.

날마다 새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을 좋은 증거로 내세워 격분한 어조로 남한 정부를 공격하는 강연을 하고 있으니, 나날이 죽음의 공포’’가 날’’ 조여드는 것 같았다. 나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음을 깨닫고, 결국 살아날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유엔군의 공습이 심했고, 밤에는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 왔다.

첫날에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나는 독방에서 한 주일만에 공동방으로 옮겨졌는데,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머리와 수염은 제멋대로 자랐다. 먹으라고 주는 보리밥 덩어리와 소금을 한 주일 동안 먹지 못해서 거지꼴이 되었고, 얼굴살이 빠져 앙상했다.

날마다 잡혀 들어오는 새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들 냄새가 나는 내 옆에 가까이 앉기를 싫어했다. 이곳에 끌려들어온 내 동무들 가운데에는 처음에는 웬 거지가 잡혀 들어왔을까 하고 쳐다보다가 낯이 좀 익었는지 유심히 보았다. 나를 알아보고, 궁둥이 걸음으로 살살 옆으로 다가와서는

"공 박사 아니오?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졌는데…… 제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가는 게 상책이오. 건강도 생각해야 합니다."

라면서 내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어떤 동무는, 거지가 왜 잡혀 들어왔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였는데, 뒤늦게 나를 알고 자세히 보니 '단식 투쟁을 하던 간디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살기 위해 허위 자백을?

나는 날마다 많은 인사들이 끌려 왔다가는 용서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자술서를 쓰고 석방되게 된 여러 동무들은 내게도 이구동성으로 빨리 자술서를 쓰고 풀려나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한때나마 귀가 솔깃하여 아예 자술서를 써내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 깊은 곳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다, 허위 진단서를 쓴 일도 없으면서 살기 위해 썼다고 거짓 자백을 한단 말인가. 거짓 자백으로 자신을 속이고 석방이 되다니, 그게 어디 말이 나 될 일인가!'

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못하고 망설이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야말로 고통과 고민에 빠져 날이 갈수록 몸은 쇠약해졌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고통은 더 심해져 갔다.

'네가 소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로 서울까지 와서 안과 의사로 성공을 한 것은 네 정직한 마음 하나 때문이 아닌가? 이제 네가 살겠다 는 욕심으로 생명처럼 지켜 오던 지조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쓰지도 않은 허위 진단서를 썼다고 거짓말을 하겠단 말인가?'

나는 단안을 내렸다.

"살기 위해서 내 지조를 꺾을 수는 없다!"

나는 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죽음을 택했다. 나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고민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의 맑게 개인 새 아침 같이 내 마음이 평온했고 후련하였다. 그 뒤부터는 동무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고맙게 받아들였을 뿐,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민을 한 적은 없었다.

정치보위부에 끌려온 지 두 주일이 지나간 어 날, 계급이 상당히 높은 군인이 흉측한 거지꼴이 된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책상 앞 의자에 앉혔다. 그는 한 주일 전에 다른 사무실에서 하던 내용과 비슷한 질문을 하고는 내가 있던 공동방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날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끌려온 인사들은 여전히 끌려왔다가는 강연을 들은 뒤, 자술서를 쓰고 이튿날 아침이면 다 나가곤 했다. 나는 날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또 동무들의 간곡한 부탁과 염려를 받으며, 끌려온지 꼭 3주일이 되던 날 아침에 전날 끌려온 사람들과 같이 바깥뜰에 일렬로 세워졌다. 모두가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 남루하고 누추한 거지꼴을 한 내가 끼여 있었다. 그 때 내 발치에 흙이 잔뜩 묻은 복숭아 크기의 둥그런 것이 눈에 띄었다. 인민군이 한눈 파는 틈을 이용해 얼른 집어 바지에 문질러 흙을 털어 내고 보니 날호박이었다. 그 때까지 날호박은 먹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였지만, 3주일 동안 야채 구경을 전혀 하지 못한 터라 그것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아주 잘 익은 참외보다 맛있었다.

우리 일행은 길게 줄지어 인민군의 호위로 서대문 형무소까지 끌려갔다. 이미 서대문 형무소에는 많은 인사들이 잡혀 와서 줄지어 서 있었고, 각자 차례로 수감 등록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등록 차례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만 같았다. 3주일 동안 방에서 앉아만 있었고, 극도로 쇠약해진 나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뜻밖으로 짧은 시간에 끝났다. 남한 같으면 10시간 걸릴 일을 한 시간 정도로 다 끝냈다. 그 원인은 한글만으로 성명, 주소, 출생지를 속히 받아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남한에서는 한문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공병우? 무슨 공자요? 공자 공? 구멍 공?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앞서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살 방법으로 선택한 영어 공부

나는 여덟 사람과 함께 한 방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 참여관을 지낸 노인, 경찰 서장을 지낸 사람, 동장, 청년회장 등 여덟 사람과 한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은 아홉 사람이 겨우 누워 잘 수 있는 넓이였다. 그 형무소에는 우익 인사들이 약 2만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했다. 정치보위부에서 자술서를 쓴 사람들이 그 다음날 모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대문 형무소에 모두 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속은 것이다.

낮이면 꼭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나이가 많은 분이 맨 앞줄에 앉고, 중간에 젊은이들이 앉고, 남루한 거지꼴이 된 나는 뒤쪽 똥통 옆에 혼자 앉게 되었다. 어제 끌려온 깨끗한 옷을 입은 그들은 앞자리를 점령하고, 오랫동안 목욕을 못한 탓으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거지꼴을 한 내가 뒤에 앉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옥살이를 처음 하게 된 그들은 약 한 주일 동안은 돌이 많이 섞인 보리밥을 먹지 못하였다. 나는 내 몫을 다 먹고도 배가 고파서 허덕이던 참이라, 그 여덟 사람이 남긴 밥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도 밥이 남았다. 나는 아침 뒤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남은 밥을 말리어 비상 식품으로 보관하였다. 감방의 동료들은 어느덧 친숙해져 자기 사정들을 털어놓으며 앞날을 점치기까지 하였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한 결과, 그들은 별로 큰 죄가 없기 때문에 곧 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정치범이므로 풀려 나갈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미 나는 보위부에서 죽을 각오를 하였기 때문인지 그같은 말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았다.

형무소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영화 사전(영어 낱말을 일본말로 풀이한 사전)을 뜯은 종이가 밑씻개 종이로 들어왔다. 나는 영어 공부를 무리하게 하면 몸이 더 빨리 쇠약해져서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유치한 생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 유엔군이 서울에 들어올 때 운 좋게 살아나게 된다면, 영어 공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요행수를 생각하면서, 영어 낱말 공부에 몰두하였다. 자살 방법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니 몸이 빨리 쇠약해지기는커녕, 동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 근심 걱정하는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도리어 정신 통일이 잘 된다는 엉뚱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영어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자살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이 새끼, 아직 미국놈의 사대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벼락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간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철문 구멍을 쳐다보고 있다가 간수가 우리들을 들여다본 뒤 지나가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종이에서 한 낱말의 철자와 뜻풀이를 읽곤 하였다. 연거푸 철문 구멍을 쳐다보면서 머리 속으로 철자와 뜻을 외우다가, 간수가 또 철문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지나가면, 재빨리 눈길을 사전으로 돌려 다른 낱말을 머리 속에 넣고 외우면서 천연덕스럽게 이 짓을 반복하였다. 이런 식으로 자살하기 위한 영어 공부는 날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에 있는 우리들에게 모두 복도로 나오라고 큰 소리로 긴급명령이 내려졌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홉 장의 영어 사전 종이 조각을 똥통에 집어넣었다. 내가 베고 자던 헝겊으로 싼 베개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정치보위부에 있을 때 모아 가지고 온 소금과 휴지, 형무소에 와서 여덟 사람이 먹지 못해 남은 밥을 내가 먹고도 남아, 뒤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말린 밥, 형무소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내 동무가 힘겹게 들여보내 준 비타민과 마른 치즈가 들어 있었다. 베개는 때가 묻어서 검고 반질반질했다. 그 방에서 베개는 나만이 가지고 있었다. 이 베개를 어떻게 처분하는가가 시급한 문제였다. 똥통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지만, 하도 아까운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 죽을 각오를 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유엔군이 반격해 들어와 내가 이 형무소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이 베개 속의 비상용 식품을 가지고, 하수도 구멍 속에라도 들어가 숨어 있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방을 맞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품이 이 베개 속에 들어 있는 셈이었다. 이거야말로 나로서는 아주 귀한 비상용 구급 식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에서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를 아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같은 용도의 베개가 발각되면 또 심한 난리를 겪어야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나에게는 그같은 발각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문제의 베개를 방에 그냥 놓아 둔 채 복도로 나갔다. 간수들은 복도에서 우리들을 한 줄로 세우고, 한 사람씩 몸수색을 하였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뒤지는 것이었다. 칼이나 유리 조각 같은 자살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를 조사하는 듯 하였다. 이윽고 내 베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내 베개를 발로 한 번 툭 차 봤다. 발의 감각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던지 그냥 나왔다. 베개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발각되지 않은 것은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정말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 믿는다.

그 뒤 하루는 유엔군 폭격으로 내 뒤쪽 창문 유리가 박살이 나면서 그 유리 조각이 내 왼쪽 발뒤꿈치 살점을 베었다. 많은 피가 흘렀다. 이렇게 폭격의 피해에도 나는 유엔군 비행기가 오지 아니하는 조용한 날은 몹시 불안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유엔군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유엔군이 들어와야만 내가 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바람이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시이지만 무더운 여름철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돌이 우두둑 씹히는 밥과 소금물만 먹이고, 50여 일이 지나도록 야채 한 입을 먹이지 아니하는 그들의 손에 내 생명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 생명은 내 손으로 끊는 것이 홀가분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살고 싶은 욕심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어, 공습 경보가 울리고 비행기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위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울적해졌다.

"동무, 치과 의사요?"

어느 날 군인이 우리 방 자물쇠를 철커덕 열더니 나를 나오라고 했다. 나를 앞세우고 기나긴 복도를 지나서 맨 앞채 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 기나긴 복도에는 푸른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긴 칼이 꽂힌 총을 위로 곧추세워 들고 5, 6미터 간격으로 복도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약 2만 명이 되는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수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 긴 무시무시한 복도를 통과할 때의 기분은 꼭 염라대왕의 졸개들이 서 있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무실에는 사복을 입은 사람이 혼자 앉아 있었다. 나에게 심문이 시작되었다. 내 이력과 신분, 그리고 과거에 해 온 일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었다. 두 시간 가량 조사를 받고 나니, 어떤 군인이 와서 나를 데리고 다시 그 무시무시한 복도를 지나서 내가 있던 방으로 들여보냈다.

내가 사무실에 가서 조사를 받은 내용을 한방에 있는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한쪽은 공 박사가 의사요, 발명가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기술을 이용 하기 위해 조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빨갱이들은 기술자를 아주 소중히 취급 한다면서, 공 박사를 이용하기 위해서 곧 내보낼지도 모른다는 풀이였다. 또 한쪽에서는, 아니다, 중대 사건에 걸린 공 박사가 자백을 안 하니까 또 다른 증거와 꼬투리를 잡으려고 조사한 것 같다고 했다.

하여튼,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어서, 그들의 상반된 의견에 관 심을 두지 않았다.

만일 내가 이번에 또 다시 끌려나가면 죽든 살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베개 속에 들어 있는 말린 밥과 비타민을 공평하게 나누어 먹으라고 동료들에게 일러두었다.

3일 뒤 인민군이 와서 자물쇠를 열더니 나를 앞세우고 그 무시무시한 염라대왕의 긴 복도를 또 걷게 하였다. 무서운 복도를 거의 다 지나갈 때쯤 뒤에서 나를 압송하던 군인이 갑자기 내 앞쪽으로 나서면서 복도에 있는 손 잡이 노끈을 잡아 올리니까, 지하실로 내려가는 네모꼴 구멍이 보였다.

그 구멍으로 난 계단을 밟고 지하실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제 지하실에 들어가 곧 죽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심한 공포심으로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했다. 목매달려 죽는가? 권총에 맞아 죽는가? 전기 충격으로 죽게 되는가? 그 순간 그들의 죽이는 방법에 대한 공포로 까무러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정치보위부에서 '이제 나는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는 가족을 한 번 꼭 만나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죽게 되는 것인가 하는 공포로 다른 생각은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죽기로 결심한 내가,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하고 굳은 각오를 해 두었더라면, 이처럼 큰 충격은 받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그 일을 겪고 나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지하실에는 공습을 면하기 위하여 흙을 파내고 임시로 만든 사무실들이 있었다. 지하 콘크리트의 벽을 동그랗게 뚫고, 그 구멍으로 사무실이 서로 통해 있었다. 구멍 크기는 허리를 구부려야만 다른 방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책상들만 놓인 세 방을 옮겨 다니다가 사람이 없으니까 다시 들어왔던 구멍을 거쳐 복도로 나왔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서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유니폼을 잘 입은 고관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압송하던 군인이 무어라고 보고를 하니

"동무, 치과 의사요?"

하고 나에게 물었다.

"저는 치과 의사가 아니고 안과 의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압송 군인에게 무엇이라고 명령을 하는 듯했다. 압송 군인은 나를 금방 올라온 계단으로 다시 데리고 내려가더니, 앞쪽 건물에 있는 전에 조사를 받던 사무실로 가 군인에게 인계하고 나갔다.

그 사무실에는 고급 장교 두 사람이 좋은 의자에 서로 마주앉아 있었다. 나는 그 장교들이 마주앉은 두 사람과 삼각 지점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내 오른쪽에 있던 군인이 수첩 같은 소책자를 자기 군복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 한 쪽을 열어 젖히더니 나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주는 것이었다. 붉은 빛깔로 밑줄이 쳐진 글줄에 눈에 띄었다.

"정치범은 총살에 처한다."

나는 시키는 대로 읽었다.

"네가 죽고 살고 하는 일은 오늘 이 자리에 달렸으니 정신차려 잘 대답하라구!"

서슬이 시퍼런 어조로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죽을 각오를 한 나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한 심정으로

"예!"

하고 대답을 했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던 내용과 같이 출생, 학업, 직업, 정치 관계, 정판사 사건, 한글 타자기, 미국 특허 출원 등등에 대해서 묻더니, 그 군인은 바깥으로 나가 10여 분 있다가 다시 들어와서 또 심문을 계속했다.

목숨을 건져 준 한글 타자기

장교는 그 때부터 주로 미국에 출원한 한글 타자기의 특허 내용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내가 인민 공화국을 위해 타자기 설계도를 만들어 바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힘없이 대답을 했다. 내 대답이 미지근하게 들렸던지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풀이해서 물었다.

"제가 우리 민족을 위해 연구한 것인데 왜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당시 이미 죽을 각오를 했고 또 극도로 쇠약해져서 기운도 없었고, 힘차게 대답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꼭 해 놓을 터이니 살려 달라는 애원도 하지 않았다. 내 미온적인 대답이 그를 못마땅하게 한 것 같았다. 그런 태도를 나는 눈치채고

"저는 제가 한다고 말한 일은 꼭 하는 사람입니다. 제 성질이 원래 앞일을 미리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해 놓고 나서야 자랑하는 그런 편입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성품을 말하였다. 그는 이같은 내 성격을 인정하고, 꼭 해 놓을 사람으로 믿었던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 10여 분 있다가 돌아왔다. 앞서 2층에서 "동무가 치과 의사요?" 하고 물었던 고관에게 조사 내용을 보고한 뒤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는 돌아와서는 나에게 질문은 안 하고, 오랫동안 말없이 내 왼쪽에 앉아 있던 고관에게

"동무의 고견을 듣고 싶으니 말씀 좀 해 주십시오."

하고 그의 조언을 요청했다. 그 고관의 의견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정치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의사로서 훌륭한 인술자라는 점은 분명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일제 때에 함경도 ○○ 에서 공의로 일하고 있을 때, 많은 환자들이 공 안과 병원에 갔다 와서는, 돈이 없다고 말하면 무료로 눈병을 치료해 주더라고 모두가 칭찬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의사도 있구나 하고, 실은 그 때 이 사람을 한 번 만나 봤으면 했었습니다. 같은 '정판사 사건'에 걸린 ○○○ 의사는 돈만 아는 의사라고 모두 욕을 합니다만 이 사람은 평판이 다른 것 같습니다."

나에게 아주 유리한 증언을 이렇게 위급할 때 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무슨 연극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에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증언을 해 준 분은 그 당시 남조선 지역 육군 군의감으로 서울에 부임해 온 분이라고 했다. 내가 만일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 생명의 은인을 꼭 한 번 찾아보고 싶다.

다른 두 고관은 어떤 직책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검사와 판사의 직책을 가진 분들이 아니었는가 추정할 뿐이다.

그 뒤 나는 지프차에 실려 보위부로 안내되었다. 보위부 사람들은 나를 구내 이발소로 데리고 가 이발을 시키고, 또 집으로 데리고 가서 거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하루아침에 대우가 달라졌다. 그 뒤 보위부의 한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우리 집에서 압수해 갖다 놓은 한글 타자기(미국 언더우드 회사에서 만든 단 하나인 본보기 기계)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타자기를 한 번 쳐 보시오."

말투부터 달라졌다. 그 타자기 옆에는 국민학교 국어 책이 놓여 있었다. 책상 앞에는 고관 군인들이 열 명 가량 둘러서 있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 1학년 국어 책의 글자가 커서 간신히 보고 찍 을 수 있었다. 나는 타자 연습을 한 적이 없었지만, 자판 배열을 알기 때문에 책만을 들여다보면서 글자판을 보지 않은 채 천천히 쳐 나갔다. 타자기에 깐 종이에 한글이 한 자 한 자 찍혀 한 줄이 다 타자된 것을 보더니,

"야! 우리가 이것을 만들어 쓴다면 로스케(소련 사람)들처럼 사무 처리를 빨리 할 수 있겠는데……."

모두가 신기해하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한 고관은 나에게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에게 찍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한 마디 남겨 놓고 나가 버렸다. 글자 모양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시비는 없었다.

6·25 바로 직전에 미국 공보원에서 이 한글 타자기를 빌려다가 공개할 때는 모두가 타자기를 인쇄기로 잘못 알고 글자 타령이 많았다. 능률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타자기는 펜 대신 글자를 빨리 쓰는 기계라는 점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한글만 쓰는 사회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북 사람이 기계 능률을 맨 먼저 거론하는 것이 반갑기만 했다.

지명된 사람을 의자에 앉혀 놓고, 닿소리, 홀소리, 받침 글쇠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난 뒤 자기 이름을 찍어 보라고 했더니 그는 정확하게 찍는 것이었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끌려 우리 집으로 가 저녁밥을 먹고 또 다시 인민군 육군 병원(성모 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원장 (북조선 의사)에게 나를 요시찰 인물로 인계하고 돌아갔다.

북쪽으로 끌려가는 신세

인민군 육군 병원 원장은 나에게, 안과는 젊은 의사들이 세 사람이 있으니 중요한 수술이나 있을 때 좀 보아주고, 전적으로 한글 타자기 설계에만 몰두해 달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청에 가까운 요청을 했다. 그리고 종이나 문필구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또 무엇이든지 요구하라면서 설계도 완성을 서둘러 달라고 했다.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는 때문인지 나에게 무척 조심스럽게 신경을 쓰는 듯하였다. 만일 방이 좁으면 뒤에 선교사가 살던 집이 비어 있으니 그 집을 쓰게 해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안과 과장실에서 타자기 설계도를 만드는 척 하면서 약병에 있는 영어 낱말을 보고 어물어물거렸다. '공습'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각 과의 의사들은 지하실로 뛰어내려가 한자리에 모이곤 했는데 나는 한구석에 서서, 들고 들어온 약병의 영어 설명서를 들여다보면서 얼빠진 사람처럼 낱말을 중얼중얼 외우곤 하였다. 그러면서 물끄러미 잡담하는 의사들을 쳐다보곤 하였다. 공습이 풀리면 곧바로 안과 과장실로 돌아왔다.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성모 병원장 박병래 내과 선생도 징발되어 와 있었다. 나는 요시찰 인물로 외출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의사들은 외출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어떤 분이 우리 집에 가서 내 아내에게 공 박사가 감옥에 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요즈음 정신이 돌아, 사회에 나와도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것 같지 않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박 선생이 그 당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염려하는 뜻에서 걱정한 말이 잘못 전달된 듯 였다. 공습이 날로 심해졌다. 지하실에 피신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인민군들은, 갑자기 평양으로 떠나야 한다면서 의사들을 트럭에 태우는 것이었다. 나도 지시하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차는 의정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아리에 있는 경신 학교 앞에 이르자 모두 내리라고 했다. 여기서 하루를 자고 떠난다는 것이다. 모두 교실에서 잠을 잤다. 나는 운동장에 있는 방공호 속에서 바닥에 널려 있던 영자 신문을 혼자 늦도록 만지작거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일어나라고 깨우기에 일어나 보니 새벽 네 시였다. 모두가 눈을 비비면서 평양으로 간다는 트럭에 올라탔다. 그런데 트럭은 교문을 나서서 1킬로미터 거리도 못 가서 그만 논바닥에 앞바퀴가 콱 박혀 버렸다. 앞바퀴를 빼느라고 운전사는 여러 차례 시도를 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카톨릭 신자인 운전사가 평양으로 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틀어박았을 것이란 소문을 훗날 들었다. 어쨌든 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다른 자동차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넓은 운동장에 여기저기 몇 사람씩 어울려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점심때쯤에, 나와 같이 한글 타자기 연구를 하던 이임풍 씨가 면회를 왔다. 나는 군인이 지키고 있는 출입문 앞에서 그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유엔군이 김포 비행장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사실을 그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그 뒤 운동장에서 동무 의사들 5, 6명과 어울려 점심을 먹을 때 나는 김포 비행장이 유엔군 손아귀에 들어간 사실을 다른 의사들에게 알려 주고, 우리는 달아나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젊은 의사들은 겁을 먹고 있었고, 같이 점심을 먹던 이선근 소아과 원장만이 찬성했다. 마침 출입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 겸상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치 서로 먹기 시합이라도 하는 듯이 먹는 데만 열중하고 바깥은 내다보지도 않았다. 나와 이 박사는 그 틈을 이용하여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빠져 나왔다. 나는 시내로 들어가는 이선근 박사에게, 시내에서 누구를 만나거든 나와 같이 종로까지 들어와서 서로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하고, 학교 앞에 있는 수수밭에 숨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자,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친척 공용준 아우님 집에 들어갔다. 사연을 말하고 그 집 다락에서 사흘 동안을 숨어 있었다.

3일이 지나도 예상과 달리 유엔군은 서울시로 들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사기가 죽었던 인민군이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더 이상 친척집에 숨어 있다가는 잡힐 것만 같아서 농사꾼 차림을 하고 뫼 속으로 피신할 준비를 했다. 나흘째 되던 날 새벽에 서울에서 살던 내 막내아우가 이곳으로 찾아왔다. 아무래도 짐작에 형님이 숨어 있을 것 같아 찾아왔는데, 정말 추측이 맞아 다행이라면서 대뜸 여기를 떠나라고 했다.

"형님, 여기에 그냥 있다가는 죽습니다. 그 녀석들이 형님을 찾느라고 친척네 집을 두루 뒤지고 야단입니다. 아주 눈이 벌개가지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형님을 잡으면 총살시키겠다고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아우가 더 겁을 먹고 있었다.

내가 도망을 한 날 밤 새벽 3시경, 내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잠자고 있을 때, 총을 든 인민군 5명이 갑자기 와르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주 놀랐다고 한다. 군인들이 "빨리 옷을 입고 나서요"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내 아내는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끌려가 꼭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얼이 빠진 상태로 옷을 입으면서 젖먹이인 막내아들 영재를 업고 가서, 아기와 같이 죽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나 혼자 끌려가서 죽는 것이 옳을 것인지를 생각했다고 한다. 생각하느라 행동이 좀 지체되니 군인들은 "빨리 빨리"하고 다그치면서 아기를 업은 아내를 지프차에 싣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곳에 고급 군인이 말하기를, 남편 공병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부인은 알고 있을 터이니, 곧 가서 데리고 온다면 무사하게 해결이 되지만, 만일 군인들 손에 잡히면 즉결 처분으로 총살을 당한다고 으르렁대더라는 것 이다.

그러나 내가 피신한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아내는 금시초문이 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을 가진 나로서는, 내가 평양으로 가기가 싫어서 피신한 것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에 게 크나큰 곤욕을 당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깊은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군인들은 금시초문이라고 사실대로 말한 아내의 말을 믿고, 또한 젖먹이 아기도 업고 있었던 터라, 그날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도망자의 운명

그러나 어디로 가야 안전한 피신이 된단 말인가? 내 아우는 의정부 산골에 자기 처가족들이 피난 가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의정부 쪽으로 떠났다. 의정부로 가는 큰길이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피난민 틈에 끼여 아우와 같이 나가다가 도중에 아우는 서울로 되돌아갔고, 나는 의정부 쪽으로 걸어갔다. 가다가 검문에 걸리면 거짓 이름을 쓰기로 했지만, 패주하는 인민군의 사기가 사그라지어서인지 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머루, 다래를 따는 깊은 산골에 있는 오막살이 초가집이었다. 나는 전에 이곳으로 사냥을 다닌 경험이 있어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서 수월하게 찾아갈 수가 있었다.

그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3, 4일을 지냈다. 사기가 푹 꺾여 있던 것으로만 알았던 북의 내무서원은 다시 의기가 양양하고 살기까지 있어 보였다. 서울에서 피신해 와 숨어 있는 젊은 사람들을 수색해 붙잡아 가기도 하였다. 내가 그 집에 계속 숨어 있다가는 곧 잡힐 것만 같아서 낫과 담요 한 장을 빌려 가지고 더욱 깊은 산골짝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 중턱에 서 있는 키 작은 소나무들은 아랫도리만 무성하게 솔가지에 뒤덮여 있었다. 나는 그 솔포기 밑을 피난처 잠자리로 정했다. 낫으로 잡풀들을 베어 솔포기 밑에 깔고, 담요를 덮고 잤다. 낮에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김포 비행장과 서울 그리고 의정부 쪽으로 전신이 이동하는 광경을 보다가 저녁이면 산밑으로 내려가 개울가에 숨겨 놓은 밥을 먹고, 다시 중턱으로 올라가 솔포기 밑에 들어가 잠을 잤다. 잘 때에 때때로 무슨 짐승들인지 내 배 위로 지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그 깊은 산에 있는 동물들은 모두가 내 동무로 생각되었고, 조금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때는 내무서원들만이 내 유일한 원수요, 적이었다. 내게 총만 있다면 그들을 기습했을지 모른다.

하루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전투 구경을 하고 잠자리 있는 곳으로 내려오다가 산봉우리에 아직 해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햇볕에 몸을 녹일 생각으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앉았다. 그 때 갑자기 건너 쪽 산등성이에서 두 방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나는 총에 맞은 듯이 모로 누웠다. 누운 채로 몸을 조금씩 움직여 풀밭 속으로 기어들어 가 숨었다. 그들이 내가 죽었나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나를 찾아볼 것이라고 생각되어, 풀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도록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몸을 꼼짝달싹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발견된다면 나는 죽는 판이고, 다행히 그들이 나를 찾지 못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밤늦도록 풀 속에서 숨을 죽이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내 일생에서 세 번째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간이 콩알만해져서 마음을 졸이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그 총소리는 나를 향해 쏜 것이 아니고, 내무서원이 총을 메고 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뫼에 있던 두 젊은이가 겁에 질려 달아나다가 사살된 것이었다. 그냥 풀 속에 숨어 있었더라면 살았을 것을.

시골집에 숨어 있다가 내무서원이 집을 수색할 때에 뫼 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던 바로 서울의 두 젊은이였다. 서울에서 피난 온 젊은이들이 뫼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안 내무서원은 뫼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 며칠이 지나갔다. 하루는 최전선을 지키던 인민군 대부대가 쫓기어, 내가 숨어 있는 뫼 너머 골짜기까지 왔다. 하루종일 그 골짜기에 비행기가 연거푸 폭격을 가했다. 내일은 내가 있는 산골로 인민군 대부대가 넘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전장 한가운데 숨어 있는 꼴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곳에 그냥 숨어 있다가는 아무래도 죽을 것만 같아서 날이 어두워지자 곧바로 오래간만에 오막살이 초가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옷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내일 새벽 일찍 뫼에서 내려와 여자로 변장하고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 일을 하는 것처럼 위장해야겠다고 속셈을 털어놓았다. 이 길만이 사는 길 같았다. 그녀는 선뜻 옷을 빌려주겠다고 승낙을 했다. 나는 다시 뫼로 올라가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내려와 변장을 하고 옥수수 밭에서 피신하기로 했다. 그 집 모두가 뫼에 올라가지 말고 방에서 잠을 자라고 권했다. 오래간만에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보니,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면서 그 포근한 맛에 취해 뫼에 올라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나는 다시 생각했다. 늘 '마지막 5분 동안'을 중요시하라는 말을 즐겨 쓰던 내가 아닌가! 온돌 맛에 유혹이 되어서야 될 말인가? 내 마음에 채찍을 가하면서 밤중에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비가 올 듯한 흐린 밤이었다.

솔포기 속에서 꾼 악어꿈

나는 잠결에 꿈을 꾸었다. 배재 학교 교사로 있는 임모 선생은 내 오랜 사냥 동무인데 그가 넓은 바닷가에서 날아가는 오리 두 마리를 연방으로 쏘아 멋있게 모래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도 오리를 잡을 욕심으로 바닷가로 사냥개를 앞세우고 한참 동안 북쪽으로 기분 좋게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큰 악어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내 사냥개를 삼키고 말았다. 악어의 머리는 기와집과 같이 크고, 몸집은 긴 야산과 같았는데 길게 바닷가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꼬리는 멀리 보이는 뫼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긴 꼬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잡아먹기 위해 악어가 달려드는 순간에 나는 그 악어 목에 파리 새끼처럼 달랑 매달렸다. 나는 이 큰 악어에게 삼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행여나 하고 가지고 있던 사냥칼로 악어 모가지의 동맥을 끊어 보았다. 진한 피가 모래 바닥과 바닷물 위에 흥건하게 뒤덮이면서 악어가 모로 쓰러졌다. 이마에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살펴보니 건너쪽 뫼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재잘 재잘 들려 왔다.

'아차! 내가 너무 늦도록 잠을 잤구나! 저 녀석들이 벌써 산을 넘어오는 구나!'

날이 훤하게 밝아 왔다. 나는 너무 늦게 깨어난 것을 후회했다. 솔포기 속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동정만 살피면서 대낮까지 누워서 대여섯 시간을 지냈다. 그 동안 사람 소리도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솔포기 속에서 밖으로 나와 높은 산 등성이로 기어올라가 아래 촌락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날과 달리 많은 민간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담요와 낫을 가지고 주인집을 향해 내려갔다. 나는 대뜸 문부터 열었다. 방안에는 얼빠진 사람처럼 주인과 사돈네가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벌떡 일어나면서

"아이구 공 박사님! 이제야 오시는군요."

하며 반겼다.

내 생사를 몰라 무척 걱정들을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대뜸

"공 박사님, 어제 저녁 산에 올라가시지 않고 방에서 주무셨더라면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박사님이 산으로 올라가시길 참 잘했습니다."

라고 했다.

어젯밤 내가 뫼로 떠난 뒤, 인민군 대부대의 선발대로 보이는 군인 두 사 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을 나오라고 하더니, 북쪽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날 따라 비가 올 듯 하다면서 뫼에 숨어 있던 두 젊은이가 그 집 외양간에 와 숨어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길을 안내하라는 소리에 그만 자기들을 잡으러 온 것으로 잘못 알고 후닥닥 옥수수 밭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이 바람에 오히려 인민군이 더 놀라 캄캄한 옥수수밭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는 것이다. 두 젊은이는 다행히도 총에 맞지 않고 달아나긴 했지만 숨어 있는 딴 사람이라도 발각되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뒤 인민군 대부대가 그 집 앞을 지나가기 시작하여 새벽이 훤하게 밝을 때에야 그들이 마지막 대열이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 집주인들은 잠을 한잠도 못 자고 새벽까지 쫓겨 달아나는 인민군의 대열을 문구멍으로 끝가지 지켜보았다고 했다. 부상병을 업고 가는가 하면, 부축해 가기도 하고, 어떤 군인은 총을 여러 자루 메고 가는가 하면, 허기가 져 허우적대는 비참한 모습 등 실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패잔병의 후퇴 장면이었다고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도 어떻게 잘못되었을까봐 걱정하느라고 여태까지 이렇게 멍청하게 방에 모여 앉아 있는 중이라고 했다.

"박사님이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이제는 안심이 됩니다."

뫼 속에서 꾼 내 꿈은 그날 밤 일어난 일 때문에 꾸게 된 것이 분명하였다. 밤에 두 젊은이에게 두 방 쏜 총소리가 바로 임 선생이 오리 두 마리를 멋있게 떨어뜨린 꿈으로 변한 모양이고, 내가 개를 데리고 바닷가를 기분 좋게 한참 걸어 올라갈 때는 아직 대부대가 지나가지 않고 산골짜기가 조용 한 때이다. 큰 악어를 만난 것은 그 때부터 대부대가 뫼를 넘어와서 내가 자던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동안이었으리라.

나는 그날 사복으로 변장하고 북쪽으로 도망가는 어린 인민군을 두 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도와주고 싶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을 돕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남의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였으니,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뿐이지, 나에게 남을 도울 어떤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손수레에 실려서 가족 품으로

다음날 피난 갔던 남녀노소 30여 명이 나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서울을 향해 떠났다. 높은 재를 셋을 넘어야만 서울에 갈 수가 있었다. 첫째 고개의 좁은 길을 들어서니, 촘촘히 파묻었던 지뢰를 파낸 자국으로 고갯길은 마치 감자를 캐낸 밭고랑과 같았다. 혹시 실수로 빠뜨린 지뢰가 남아 있을 까 싶어 몹시 무섭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같이 오던 피난민들은 반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반 수 가량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무시무시한 마음으로 고개를 넘어 평지를 걷고 있는데 북쪽으로 쫓겨가는 내무서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총을 거꾸로 메고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우리들은 남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만일 우리들에게 무슨 수작을 걸면 우리들은 몽둥이로 대항하기로 떠날 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 지나쳤다. 두 번째 고개를 넘을 때도 지뢰를 캐낸 자국을 많이 보았다. 온몸이 오싹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전진을 못하고 되돌아 갔다. 세 번째 재를 넘을 때는 일곱 명만 남았다. 주로 내 사돈네 식구들이었다. 고양군 구파발이란 곳을 오니까 의정부 경찰서에서 경찰이 나와 진을 치고, 피난 갔다가 돌아오는 피난민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한국 측 경계망 속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조사를 당하는 일도 반갑기만 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아니, 공 박사 아니세요? 얼마나 고생을 하시다 돌아오십니까? 저는 의정부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 순경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시던가요?"

하고 반문하니,

"박사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제가 눈병으로 박사님의 신세를 진 사람입니다."

나는 하도 반가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이제는 살아났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머리 속에 있던 공포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서대문 형무소 지하실에 들어가서 곧 죽는다고 생각할 때의 충격과 정반대의 기분이었다. 정말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순간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쁜 충격이었다. 그가 나를 믿고 우리 일행을 검문도 하지 않고 곧 통과시켜 주었다. 그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젊은이들 가운데 혹시 간첩이 끼어 들어올까봐 엄격하게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이 오다가 다시 되돌아간 젊은이들이 지뢰나 내무서원이 무서워서 돌아간 것으로 알았지만, 엄한 검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어서 돌아간 젊은이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곳에서 멀지도 않은 서울집까지 도저히 걸어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치질로 항문의 통증을 느끼면서 그곳까지 안간힘을 다해 걸어갔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농촌에 들어가 손수레꾼을 사서 손수레에 실려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당도하긴 했지만, 그 동안 혹시 우리 식구들은 쫓겨나고, 다른 식구들이 들어와 살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 박사 있소?"

하고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마침 뜰에 나와 있던 큰딸이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아버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 품에 안기었다.

일제 때 만든 방공호 덕분에, 치열한 시가전에서도 집안 식구와 친척들이 모두 그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어 죽지 않고, 또 북한으로 끌려가지도 않고 도망쳐 살아 돌아왔으니, 아이들과 아이 어머니가 얼마나 기뻤을까. 아무 피해 없이 무사한 온 식구들을 본 내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었다. 건물도 아무 피해가 없었다. 모두가 다 하느님 은덕이라고 고맙게 생각할 뿐이었다.

전쟁이 나에게 준 교훈

난리가 나면 죽기는 쉬워도 살아 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6 ·25를 회상할 때마다 번번이 하는 말이지만 '적선을 한 사람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6·25 사변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간신히 넘겼니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나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일생의 교훈을 얻게 된 전쟁이기도 하였다.

첫째로, 내가 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한 내 평소의 소신은 잘한 일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디다 내놓고 자랑 한 번 한 일이 없는 일이지만, 공익을 위해 한 적선 때문에 하늘이 나를 보호하시어 생명을 건져 주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은 주변에서 더구나 동무들까지도 "미친 짓이다" "어리석은 짓이다" 하면서 나를 외롭게 만든 일들이며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재산 낭비를 한다고 반발하는 것을 겪으면서 한 일들이었다.

한글 타자기 발명, 인술로써의 봉사, 한글 학회와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한 수선 출판사에 내놓은 거액의 재산 기부, 생명을 걸고 의사로서의 지조를 지킨 공산 치하에서의 버팀, 유엔군의 군사력을 확신한 점, 도망과 피신을 마지막 5분까지도 철두철미 완벽하게 지킨 점(난리 때는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하고, 적진 속에서의 도망질과 나서는 일의 때와 장소를 잘 가릴 슬기가 필요하다) 등은 죽음의 환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둘째로, 내 집념이나 실천의 뿌리가 되어 준 조부모와 어버이의 일상적인 교훈과,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을 통해 본을 보여 준 은덕을 깨닫게 해 준 점이다. 그리고 내 아우들과 가족들의 눈물겨운 사랑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이웃들이 감옥에서나 피난처뿐 아니라 도처에서 정으로 서로 엉켜져 있다는 점을 깨닫게도 해 주었다. 서로 아픔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한 공동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혈연 관계에 집착하는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냉정하고 멋없는 아버지였고 무뚝뚝한 남편이었고 엄격한 의사였던 것이다.

셋째로, 6·25는 분명히 세계 유례없는 같은 민족끼리 가장 비참하게 싸운 전쟁이었다. 다시는 이같은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젠 전쟁이 재발된다면 6·25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가 쓰이는 전쟁이 될 것이니 어느 쪽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과 강토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전쟁의 체험 때문에 오히려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 문제를 더욱 반성하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넷째로, 나는 정치보위부에서 3주일을 남루한 거지꼴로 있을 때, 많은 동무들로부터, 자술서를 쓰고 용서를 받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살고 싶은 생각만으로 그렇게 할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내 양심이 그런 유혹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그 때 그 유혹에 빠져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자술서를 썼더라면, 나는 이미 그 당시 죽은 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죽을 결심을 하고 지조를 내 생명처럼 지켰기 때문에 죽지 아니하고 살아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정직해야 하고 또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 체험으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제 7 장 “공 박사가 미쳤다!”

잊을 수 없는 김석일 대령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수도 서울은 9월 28일에 탈환되었다. 숨어 살던 창백한 얼굴의 텁수룩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에게는 공산 치하에서 그저 풀려났다는 정도의 9·28 수복이 아니었다. 죽음에서의 수복이었고, 지옥에서의 탈출이었다. 서울이 점령된 뒤 내가 공산 치하에서 겪은 악몽과도 같은 일련의 기억들은 수복된 뒤까지도 내 몸과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은 뜻밖으로 컸었다.

전쟁의 양상은 유엔군의 북진으로 사뭇 달라졌다. 압록강 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부대가 있었고, 유엔군이 두만강 가까이 다다랐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 승전고를 들어가며 몸과 마음의 긴장을 서서히 풀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12월 어느 날 갑자기 중공군이 10 만 대군을 이끌고 인민군을 도와 한국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역공세에 몰려 빠른 속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전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맥없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12월초에 평양은 또다시 인민군 손아귀에 되돌아갔다. 정부에서는 서울 시민을 향해 일찌감치 피난을 하라는 권고 방송을 쉴새 없이 하고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생기고 만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앞뒤 가릴 여지가 없었다. 이번에 또 내가 공산당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면 영락없이 제1차 숙청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죽게 되어 있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더니, 도망까지 쳐버린 악질 반동분자라고 처단할 것이 아닌가. 나는 재빨리 피난길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 무렵 뜻밖에 동향인 군인이 나타났다. 그해 12월 4일이었다. 평안북도 벽동읍 사람으로 김석일 대령이다. 그는 어디선가 트럭을 몰고 와, 피난 보따리와 함께 우리 가족을 모두 싣고 낯선 부산의 동래 온천장에 떨어뜨려 주었다. 이리하여 남보다 한 달 앞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였다. 김 대령은 뒷날 내 병원 운영과 사진 촬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동래 온천장에 셋방을 얻어 피난 보따리를 풀었다. 집주인은 이 고장 예배당의 담임 목사로 있는 유 목사였다. 큰집에서 마음대로 뛰어 놀며 살아 왔던 어린애들이 피난살이가 무엇인지 셋방살이가 어떤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눈치도 없이 제 집처럼 뛰어 놀며 장난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내 애들은 마치 친척집에라도 놀러 온 기분으로 환경 변화를 즐기고 있었다. 전쟁 피난살이도 모르고 잘 놀기만 하는 동심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른들처럼 눈치볼 것도 없고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애들이 많은 집의 피난민 생활이란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난리 때는 무자식이 상팔자란 속담의 뜻이 그럴싸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애들이 집주인에게 짜증스러운 일도 많이 저질렀다. 송구스러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장난질하다가 문짝을 넘어뜨려 부수어 놓기도 하였다. 하루하루 산다는 게 조심스럽기만 했고, 전황은 예측 불허의 양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1951년 1월 4일, 또 다시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막연하게 수복할 날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때 내 친지인 백기호(내과 의사) 박사가 찾아왔다.

"이왕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좀 느긋하게 직장을 갖고 사는 것이 어떻겠어요?"

자기는 이미 진해 해군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백 박사를 따라 나섰다. 진해의 해군 병원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진해로 갔다. 결국 나는 진해 해군 병원에서 안과 환자의 진료를 맡았는데, 군의관의 길을 고르지 않고 문관으로 봉사만 하기로 했다. 왜냐면 나는 공산 치하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몸이니, 이제부터 사는 것은 모두 덤으로 사는 그 고마운 뜻으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일선 장병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인술을 바치고 싶었을 뿐 돈벌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봉급도 없는 봉사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진해로 갔다. 배는 흔히 보는 큰 똑딱선 같은 것인데, 가끔 엔진이 꺼지기도 하고 인원 초과가 되어, 센 바람에는 휘청 거리기도 하여, 풍랑이 있을 때마다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이 배에 탈 때마다 커다란 빈 오렌지 깡통 구멍을 납땜으로 막고, 광목 전대에 넣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런 걸 본 주위 사람들은 모두 "뭘 그렇게까지 야단스럽게 굴지?"하고 놀려대곤 하였다. 우스꽝스러운 사람을 본다는 투로 냉소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배에는 비상 상태를 위한 장비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요행수로만 운항하는 것 같았다. 구명대라곤 하나도 없었다. 비상시의 보안이 이렇게 무방비 상태였으니, 내가 보기에도 빈 깡통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해괴망측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이같은 위험한 통근을 계속할 수가 없어 아예 가족들을 데리고 진해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바로 그 진해로 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한 큰 사건이 생겼다. 눈이 휘둥그래져 신문을 자세히 보니, 바로 내가 깡통을 차고 부산과 진해를 날마다 오고가던 그 연락선이었다. 인원 초과에다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한꺼번에 수백 명의 목숨을 다대포 앞바다에서 잃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 동서도 죽었고, 잘 아는 유한양행의 사장도 희생되었다.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보안 문제에는 너무나 백지였던, 바로 그 무관심이 수많은 생명을 죽인 것이다. 내가 유별나게 구명대를 손수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니게 해 준 분은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허술한 보안으로 생명을 다루는 우리의 환경이 안타깝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구명대 하나 없는 것을 보고 내가 커다랗고 빈 양철 깡통을 땜질에 구명대처럼 고안해서 허리에 감고 다녔을까. 죽은 내 친척이나 동무가 비웃지 말고 내 흉내라도 냈더라면 죽음만은 면했을 터인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조차 하였다.

사람의 생명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 예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문명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의 생명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법이다.

손원일 장군과 최현배 박사

내가 동래에 피난 가서 살고 있을 때,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낸, '공병우를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머리를 갸우뚱, 의아해 하면서 손원일 제독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전쟁이 한창일 때에 해군 참모 총장이란 막중한 직책을 가진 분이 해군과는 별 인연도 없는 피난살이 안과 의사를 왜 찾는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예, 제가 공 박사를 뵙자고 한 것은 작년에 저에게 보여 준 한글 타자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곧바로 새로 발명한 한글 타자기에 대해 자초지종을 묻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변 전에 미국의 언더우드 회사에 한글 타자기를 제작 의뢰한 이야기며, 또 견본품이 사변 직전에 도착한 이 야기, 그 뒤 전쟁으로 미국 언더우드 회사와는 소식이 끊어진 채로 있다는 이야기 등을 소상하게 말했다. 그분은 군사 원조 물품으로 내 타자기를 수입하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발명은 해 놨지만 누구 하나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글자 모양이 들쭉날쭉 무슨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것 같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하며 타박만 일삼던 일반 지식층들의 전쟁 직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 치하에서는 내가 발명한 타자기의 설계도를 만들어 내라고 강제로 조른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틀림없는 한글 기계화에 대한 관심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고위 간부로 있던 한글 학자 김두봉 씨가 남한에 한글 타자기가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미국 영자 신문을 통하여 알고, 한글 타자기의 설계를 만들어 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나를 총칼로 감시를 해 가며, 말하자면 발명가인 과학자를 공포 분위기에 몰아넣고 한글 기계화에 관심을 보인 것이니, 한글 타자기의 설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먼저 해병대에 한글 타자기를 군수품으로 받아, 타자 교육을 시작했다. 그 때 한국 해병대는 미해병대에 편입되어 있어서, 모든 장비가 미해병대와 똑같이 지급되던 때였다. 손 제독은 내 말을 듣고 나서 곧 미고문관을 통하여 군사 원조 물품으로 들여오게 한 것이다. 6·25 직전에 손 장군에게 내가 만든 한글 타자기를 보여 주었을 때, 그분은 다른 분들과 달리, 타자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발명이라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손 장군은 타자기의 생명이 속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 타자기가 수입되자마자 해병대 사령부로부터 내게, 한국 해병에게 한글을 타자하는 강습을 시켜 달라는 요청이 왔다. 내 한글 타자기의 개발에 도움을 주던 이임풍 님이 해병대에 가서 두 달 동안 교육을 시켰고, 또 우리 집에서 타자기를 쳐 버릇했던 내 큰딸 영일이가 가르치기도 하였다. 훈련도 집중적으로 하게 되니, 군인들이라 그런지 얼마 안 되어 훌륭한 타자수가 많이 배출되었다. 타자수들은 해병대 사령부를 비롯해 해병대 여하 부대의 각 행정 사무 요원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들이 타자 강습을 시키는 전수 교육의 강사들이 되기도 하였다. 난데없이 전쟁 중에 타자기 바람이 일어 사령부 사무실에서, 일선 전투단 본부 막사 속에서 또 일선 산야 전투 부대의 천막 속에서 타자치는 소리가 여기저기 포화 소리 속에서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미스터 타자기]란 영문책을 보고 전쟁이 났을 때 타자기의 위력이 어떤 화력의 포탄에 못지 않게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전쟁 중에도 손 제독이나 미해병대 측에서 타자기 수입을 감행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포크 씨가 쓴 [미스터 타자기]라는 책에는 2차 대전 때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2차 전쟁 때 타자기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중단될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모든 폭격기들은 반드시 한 대의 타자기가 비치되어야 하고, 실전 함대의 각 전함들은 59대의 타자기가, 각 순양함들은 35대의 타자기가, 항공모함은 55대의 타자기가, 구축함은 7대의 타자기가 각각 설치되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타자기를 발명한 나 자신도 타자기를 단순히 문명의 이기로만 생각을 해 사무 능률화의 도구, 문필가에게 필요한 문명의 이기 정도로만 여겨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도 타자기를 화약 무기에 맞먹는 1급 전략 무기로 6 ·25 때 이미 활용한 셈이다. 군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마침내 한글 타자기는 중요한 사무 기계로 등장하게 되었다. 웬만한 사람이면 우리도 타자기를 가진 문명국의 사람이란 긍지를 갖게 하는 분위기가, 포연 소리가 들리는 화약 냄새 속에서 일게 되었다.

그 당시 임시 정부는 부산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교부도 부산 도심 지대인 국제 시장 부근의 어떤 절간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의 문교부 편수국장은 저 유명한 한글 학자 최현배 박사였다. 그분 역시 한글 타자기의 발명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가를 아는 선각자였다. 말끝마다 "우리 나라도 하루바삐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처럼 타자하는 소리가 들려 와야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글 기계화의 필요성을 외치던 분이었으니, 내 속도 타자기 발명을 환영한 것이었다. 아니, 최 박사는 전쟁 중인데도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라고 하는 생소한 문화 행사를 피난지인 부산 공회장에서 열기도 하였다. 이는 최 박사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행사였다. 물론 이 때에는 해병의 협조를 얻어 해병대의 타자수들이 출전하여 대회를 빛낼 수 있었는데, 이것은 한글 기계화에 대한 관심을 사회에 크게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복 뒤 훨씬 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분의 한글 기계화에 대한 대단한 관심에 마음이 끌려 한글 학회에서 [한글 기계화 연구소]와 [한글 새소식]을 만들도록 권하였고, 후원도 다소 해 준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난 1970년대의 이야기지만 그분이 아깝게도 돌연 심장마비로 누리를 떠나셨다. 한글 학계의 거성일 뿐 아니라 한글 기계화에 대해 남다른 선각자 같은 뜻을 가지신 분이 하루아침에 누리를 떠난 것은 한글 기계화 운동에도 큰 충격이었다. 그것도 한글 기계화에 관련된 일로 누리를 하직하였다는 설까지 있으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 박사가 사단법인 한글 기계화 연구소 소장이란 책임을 맡고 계실 때의 일이다. 어떤 사무 요원이

"사회에서 흔히 하는 방식대로 당국으로부터 연구비를 효율적으로 타내기 위해선 관리들에게 돈을 좀 먹여야만 합니다."

하고 최 박사에게 사회악과의 타협을 건의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풍조로 보아 연구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사무 책임자로서는 남들이 하는 식대로 뇌물을 바쳐 가며 연구비를 타도록 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제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쪽처럼 곧은 최 박사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누리가 아무리 다 썩어 빠지고 관리들이 타락했다 해도, 자신은 그럴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글 기계화 연구소의 이사로 있었던 신태민 선생은 직접 최 박사로부터 이 내용을 들었다고 함).

그런데도 또 집요하게 그 사무 요원은

"세상이 다 그 꼴로 되어 가는데 우리만 고고한 체 이러다가는 한글 기계화 연구소는 연구 지원을 못 받게 되고 끝내는 살아 남지 못합니다."

하고 위협적인 말을 하자, 이 말에 자극된 최 박사는

"뇌물을 바쳐 가면서까지 연구비를 받아 한글 기계화 연구소를 이끌 생각은 없다."

고 몹시 격분한 어조로 단호하게 일축한 뒤, 자리에 누우신 지 3일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진위를 지금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최 박사의 운명에 대해 누리에 떠돌고 있는 이같은 사망설이 틀림없을 것이란 짐작이 들 뿐이다. 평소 나는 최 박사가 나라를 사랑하는 곧은 마음과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같은 사망설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평소 존경하여 마지않는 저명한 한글 학자가 한글 기계화 연구를 깨끗하게 지키고 살리려다가 군사 독재의 썩은 물결에 오히려 안타깝게 휩쓸려 돌아가신 듯싶어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최 박사가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계실 무렵, 피난땅 부산에서 한글 타자기의 경연 대회를 개최하여 한글 기계화에 크게 공헌한 사실은 정말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천지에 불과 몇 사람밖에 없는 타자수들을 대상으로 국가적인 행사를 치른 것이니, 한글 기계화에 대한 신조가 어떠한 분이었던 지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군에서나 민간에서나 한글도 선진국처럼 타자기로 글을 찍을 수 있다는 바람을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경연 대회를 통해 일으킨 사실은 문화 충격을 준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열린 타자 경연 대회의 기록이나 사진을 간수하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만약 그 당시 신문에 기사 발표가 되었다면 지금도 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전쟁 중에도 한글 타자기를 빛낸 손원일 해군 제독과 최현배 박사를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은 장님들의 낙원

미국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는, 전쟁을 겪고 있는 한국 땅에서 한글 타자기를 대량 제작 주문하는 것을 보고 놀란 듯 하다. 언더우드 회사는 내 타자기의 시제품을 만들어 낸 회사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름난 타자기 회사이다. 연세 대학교를 설립한 계열의 회사인 만큼 한국과 인연이 깊은 회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가 나에게 '아직도 몇 군데 기술면에서 수정을 해야 할 제작상의 문제도 있고 하니 급히 미국에 와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 왔다. 나는 곧바로 수속을 하여 피난지인 부산에서 군용기 편으로 미국엘 갔다. 그 당시는 제트기도 없는 때여서 프로펠러 비행기로 36시간이나 걸려 미국엘 갔다. 남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한 달 이상 걸려서 미국에 가던 시절이었는데 비행기 편을 이용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확실히 특혜였고 행운의 나날이었다.

나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인 교회에 유숙하고 있으면서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였다. 언더우드 회사와의 특허권 양도 문제는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 온 김에 미국의 안과 의학계의 상황을 면밀하게 시찰해 보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견학이란 표현이 적절한 지 모른다.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내게는 공부였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가 아주 감명 깊었던 점은 장님들(맹인이란 한자말을 써야만 높임말이 되고 장님이라고 하면 경멸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꽤 많다. 순수한 우리말 장님이 오히려 높임말로 예로부터 써 온 훌륭한 말이기에 나는 되도록 장님이라고 쓴다)을 위한 재활 시설과 봉사 활동이었다. 장애자에 대한 일반 사회인의 자세부터가 달랐다. 장님을 아침에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스스럼없이 침을 퉤퉤 내뱉는 우리 나라의 수준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안과 의사인 나 자신부터 그 동안 실명자에게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였으니, 죄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장님이 된 사람에게 희망을 잃지 않도록 미리 갖가지 재활 종목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었다.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 사회인까지도 협동하여 하나의 사회 운동처럼 봉사 운동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 땅에서 장님들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야만 할 안과 의사인 내가 과연 어떻게 장님을 대해 왔는가를 생각하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실명하게 된 환자가 시골에서 논밭 다 팔아서 서울의 안과 의사를 찾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진찰 결과 희망이 없는 환자로 판정이 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어서 손을 툭툭 털고 별 도리가 없다는 선언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하자면 절망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절망 선언을 들은 환자는 통곡을 하기도 하고, 심한 충격으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소경 보면 재수 없다는 한국의 민도에 장님들을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준 가해자 측에 나도 섞여 있다는 자책의 마음이 앞섰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 정신이 어지간히 출렁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더욱이 장애자를 위한 마음씨는 우리 나라처럼 "병신 육갑하네" 식의 모멸이 아니라, 모두가 불구자를 돕는 자세를 지니고 있어 보였다.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신체 장애자를 위해 바쳐지고 있는 미국 시민들의 마음씨가 여기 저기서 똑똑히 보였다. 사랑의 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셈이다. 의사들이 환자가 실명 뒤에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주고,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것을 배운 것이다.

미국에는 길거리에서까지 장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시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과연 미국은 장님들의 천국인 듯 하였다. 나도 한국에 가면 장님들을 위한 봉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정도로 큰 자극을 받았다.

나는 3개월을 예정한 미국 여행이었지만,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은 욕심에 결국 1년 남짓 머물면서 각계 각층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공부했다.

어느 날 나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산 피난 당시 하도 여러 사람한테 신세를 졌기 때문에 기회만 닿는다면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그 은혜를 갚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피난 때 톡톡히 신세를 진 이약신 목사님이 뉴욕에 오셨다. 내가 미국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피난살이의 은인 이약신 목사님을 낯선 외국 땅에서나마 만나게 된 것이 기쁘기만 했다. 피차 외로운 낯선 땅이지만 감사의 뜻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빚을 조금이라도 갚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약신 목사님도 미국에서 부산 피난민이었던 나를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워했다. 나도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몸이라 마음만 간절했지 무슨 유별난 대접을 할 형편은 못 되었지만, 관광을 시켜 드렸다. 저녁을 대접하고 '시네라마'라는 영화간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그때 미국에는 시네라마 스크린이라고 하는 요란한 영사 방법이 새로 개발되어 구경꾼들의 얼을 빼고 있을 때였다. 그런 것이 처음으로 등장한 때여서 아주 색다른 대접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내 서비스를 사양하였지만 내 간청에 못 이겨 결국 시네라마 스크린의 웅장한 화면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 목사님도 과연 경이로운 영화 감상이었다고 말하였다. 지금 그 영화의 제목이나 줄거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무대를 꽉 메운 그 커다란 반원형 스크린에 영사된 입체적인 시네라마 화면은 눈에 선하다. 더욱이 입체적인 음향 효과의 영화를 시청한 일은 난생 처음이었던 만큼 잊을 수가 없다. 이 시네라마는 1952년 9월에 처음으로 뉴욕에서 선을 보인 것이라고 하니 나와 이 목사님은 개발 초기에 구경한 셈이다. 내가 품고 있던 이 목사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 때 다소라도 표시하게 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나는 3개월이란 예정보다 훨씬 많은 1년 6개월이란 기간을 보람있게 보내고 귀국을 하였다. 물론 그 뒤 1957년도에 또 다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여행이긴 했지만 역시 계속해서 많은 것을 익히고 배울 것이 많았다. 그 때 이야기도 몇 토막 하고 넘어가야겠다.

하와이에 퍼뜨린 쌍꺼풀 수술

하와이 땅에 도착하자 나는 미국 안과 학회 총무인 홈스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홈스 박사는 환자를 받고 있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세계 안과 학회의 살림을 맡는 총무과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도 바쁜 분이 자기 부인으로 하여금 나에게 하와이 구경까지 시켜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홈스 박사는 쌍꺼풀 눈 수술을 희망하는 환자에게 시술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거뜬히 수술을 해 주었다. 내가 하와이에서 미국의 눈 환자를 수술해 준 것은 확실히 즐거운 추억 거리로 남게 되었다. 인술도 국경이 없이 베풀 수 있구나 하는 것이 실감되었다.

홈스 박사의 부인은 자기가 손수 차를 몰고 와서는 나를 여기저기 안내해 주었는데, 그게 너무나 부럽기만 하였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 나도 운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운전 교육도 받고, 운전 면허 시험도 치른 경험도 있기는 했으나 두 번이나 낙방을 했었다. 그런데 부인이 저렇게 손수 차를 운전해 가며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니 꼭 운전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미국 본토에 도착하자 예정된 일을 해 가며 한쪽으로는 운전 학교에 등록을 하였다. 차 운전의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땅에서 의사가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일이 없던 시대의 일이다. 일반 자가용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 물론 있었지만 모두 운전기사를 채용해 차를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인건비가 싼 나라라고는 하지만 직접 운전하며 자가용을 타고 싶었다.

운전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서는 운전 교육을 받을 때, 비록 전쟁 중이기는 했지만, 고철 같은 헌 차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초심자에게 오히려 성능 좋은 새 차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운전이 서툰 사람이 새 차를 망가뜨리면 어쩌나 하는 우리들 생각과는 반대였다. 서툰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차로 안전하게 배울 수 있게 해 준다는 발상 같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운전 학습 때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조심해요, 조심해"를 들려 주었는데, 미국에서는 운전 교사가 "걱정 말고 달려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다가 사람을 죽이든지 가게를 들이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운전 교사는 보험을 들었으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마음놓고 달리라는 것이었다. 그 뒤 안 일인데, 학습 운행 중에는 운전자 옆자리에 특별히 고안된 브레이크 발판이 있어 위험할 때에는 교관이 자기의 브레이크를 밟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놓고 운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운전 면허 시험도 그렇다. 시험관은 한 사람이라도 낙제를 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웬만큼 구비 조건만 갖추면 합격을 도우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사정은 시험관이 너무나 도도하게 굴면서 이 트집 저 트집을 잡는 일이 보통이었다. 마치 낙제를 시키려고 시험을 치르게 하는 인상마저 들었었다. 그런 때였던 만큼, 미국 시험관들의 서비스가 마냥 놀랍기만 하였다. 나는 결국 두 번 낙방을 한 뒤, 세 번째에 미국의 운전 면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6기통의 앰뷸런스 새 차를 주문해 한국에 내보냈다. 그리고 우선 그 차를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맹인 지원 클럽에 빌려주어 쓰도록 하였고, 내가 귀국한 뒤에는 서울 천호동에 맹인 재활 센터를 만들어 이 앰뷸런스를 직접 운전하며 일을 보았다. 결국 나중에는 전국 순회 무료 진료 때도 이 앰뷸런스를 끌고 다녔으니, 참으로 이 운전 면허 취득은 내 바쁜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변소를 목욕탕 속으로 옮겨 놓으니

이와 같이 미국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나는 어디에 매이지 않고 친지도 만나고 물질 문명의 번영의 비밀을 안팎으로 뒤지고 캐 보기도 하면서 열심히 미국의 실상을 견학하였다. 이 때 얻은 지식과 깨달음으로 귀국 뒤 곧바로 생활 개선과 무료 순회 개안 수술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 때, 나는 집 밖에 있던 변소를 수세식으로 고쳐 집 안 목욕탕으로 옮겨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공 박사가 미국 다녀오더니 미쳐서 집을 온통 뜯어 뒷간을 부엌에 붙은 목욕실로 옮기질 않나, 넘어 다니기에 거추장스럽다고 문지방을 잘라 없애질 않나, 장독대를 때려부수질 않나, 참 가관이다……."

내 성급한 생활 개선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남의 눈병을 올바로 고쳐 주려면, 내 집안 생활부터 편리하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식으로 되어 있는 가옥 건축의 내장을 일체 양식으로 개조해 버렸다. 개조하기 전, 한식으로 살던 때와, 양식으로 사는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다. 변소가 수세식으로 방안에 놓였고, 수돗물은 뜰에 나가서 받아 부엌으로 나르던 것이 부엌에서 줄줄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밥상 나르는 과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상을 차리는 곳에서 방안까지 운반하려면 깊은 부엌에서 상을 차려서 일단 마당으로 나갔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온 뒤, 안방 문을 열고 높은 문턱을 넘어, 안방 온돌방에 가져다 놓아야만 하였던 것을, 부엌에서 안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벽에 구멍을 만들었다. 물 한 그릇을 나르더라도 밖으로 일단 나갔다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비능률적인 운반을 했던 것인데 부엌 먹거리를 손쉽게 안방으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우선 가정부가 가장 좋아했다. 내 의사 동무 부부가 소문을 듣고 우리 집을 구경하러 찾아와, 안방 식탁에 앉아서 부엌을 내다보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여보게, 저게 어디 부엌인가, 저건 중국 호떡 굽는 부엌이지"하는 것이었다. 좋은 한옥집 다 망쳤다는 투였다. 그 당시 서양식 부엌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은 싱크대를 만들고, 수도 파이프에서 더운물, 찬물이 콸콸 나오게 한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그 뒤 나는 미국 맹인 협회에 빌려주었던 앰뷸런스 차를 되돌려 받아 직접 운전하면서 안과 의사가 없는 전국 소도시의 농어촌을 누비고 다녔다. 대한 적십자사 후원을 받아 1년 동안 가난한 눈병 환자를 위해 무료 봉사 활동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 견문에서 얻은 자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인천에서 시작하여 서해안 쪽을 먼저 돌았지만 다음에는 강릉, 속초, 포항 등 동해안 어촌을 순회하였고, 마지막으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가서 많은 환자들에게 무료 개안 수술을 해 주었다. 이 무료 개안 순회를 할 때, 속초에서 피곤도 할 터이니 설악산 구경이라도 하고 좀 쉬었다 가면 어떻겠느냐는 권고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사양하였고, 제주도에서는 관광을 하고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오직 순회 진료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서울의 공 박사가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 가는 곳마다 눈 환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서울 본원에서 치료할 때보다 더욱 고된 나날이 계속되는 그야말로 쉴 새도 없는 강행군이었다. 안과 의사를 처음 본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아깝게도 실명 위기에 놓인 환자도 많았다. 현장에서 수술도 하고 치료도 해 주는 순회 진료였다. 이 전국 순회 진료를 하면서 가장 비참하게 느껴진 곳은 제주도였다.

제주도 주민들은 백내장과 도라홈이라는 전염성 눈병으로 난리를 겪고 있었다. 약도 주고, 치료도 해 주고 수술도 해 주느라고 다른 지방에 비해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고도 미흡하여 우리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던 한종원(현재 서울 천호동 에서 개업 중) 님을 그곳 적십자 지사에 1년 동안 상주, 봉사하도록 하여 전국 순회 무료 진료에 대한 내 뜻과 계획을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한 선생이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잘 해 주어 무료 봉사의 성과도 컸고, 따라서 1년 동안의 인건비, 약품도, 수술 기구, 재료 등을 모두 지원한 나도 흐뭇하기만 했다. 이는 내가 생각해 봐도 미국 가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봉사 활동이었고, 내 인생관의 큰 변화였다.

현재 내 대를 이어 공 안과 의원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영태가 연세대학을 나와 제주도에 의사로서 첫 봉사를 위해 6개월 동안 가 있다가 온 적이 있었다. 그는 귀환 보고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내가 만일 의사가 되어 제주도에 가서 개업을 한다면 수월하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과거 아버지의 무료 진료 봉사를 잊지 않고 고맙다고 말하는 도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아마 그들은 무료 진료반이 왔다 하면 공 안과의 무료 진료 봉사가 머리에 떠오른다나요. 그들이 공 안과에 대한 신뢰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그 소릴 듣고 정말 반가웠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보고를 듣고 나도 흐뭇했다. 정말 나 자신도 심혈을 기울였던 봉사 작업이었으니 잊을 수 없지만, 아마도 치료를 받은 수많은 도민들도 기억에서 쉬 지워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내 조그마한 봉사의 마음이 여러 사람의 눈을 뜨게도 해 주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도 기쁨을 안겨 줄 수도 있었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 광나루 다리 건너에 있는 천호동에 맹인 부흥원(나중에 재활 센터로 고침)을 만들어 놓고, 실명한 장님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재활 작업을 펼쳤다. 직접 차를 몰고 이곳을 오고가며 장님들에게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시켜 직업을 얻게끔 도왔다. 이것 역시 미국에서 배워 온 정신이 있기에 사재를 털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국의 맹인 협회로부터 "맹인들의 재활 센터를 개인 사재를 털어 만든 장한 일을 축하드립니다. 여기에 1만 달러를 지원금으로 보내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요지의 지원금 발송의 통지가 날아왔다. 보건 사회부에서 장님들의 재활을 위한 기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듣고 실현된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6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색도 안 보여 나 자신의 모든 부동산을 정리해 가지고 건물과 내부 설비를 갖추어 맹인 부흥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건축과 설비는 일본 맹인 라이트 하우스에서 근무하던 가무라 씨의 지도를 받아서 했다. 그분이 여러 차례 서울에 와 수고를 해준 덕분으로 현대식 맹인 부흥원이 완성되었다.

뉴욕에 있는 미국 해외 맹인 재단 직원이 누리를 돌다가 한국에도 들러, 우리 재활 센터를 보고 미국에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겠다고 말하더니, 뉴욕에 돌아가서, 상부로 "정부도 하지 못하는 맹인 재활 기관을 한 개인이 만들어 놓았으니, 하루아침에 하늘의 별이 떨어졌다"는 보고를 한 뒤, 개인 기관을 도울 수 없는 규칙이 있는데도 예외로 취급하고 그 해에 1만 달러를 우리 시설로 보내 준 것이었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였는데 앞으로는 재단 법인체로 만들어야만 후원금을 보내 줄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군사 독재자들이 부당한 재단 규정을 만들어 놓고 재단을 만들 수 없게 제재를 가하는 바람에 그 뒤 후원금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쪽에선 해마다 특수 기술자를 보내 주어 수개월씩 맹인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켜 주었다. 그들은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그같이 훌륭한 맹인 재활 센터를 만들어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이 재활 기관에서는 장님들에게 점자와 한글 타자기를 칠 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지팡이로 혼자 시가지를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 훈련 방법과, 여행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한글 타자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가르쳐 내가 직접 공장에서 일하도록 채용하였다. 실명자의 손놀림은 보통 건강한 사람보다 더 민첩하고 정확하여 우수한 타자수가 될 수 있었다. 내 자신부터 이들을 공 안과 접수의 타자수로 일하게도 하고 취직 알선도 하였다. 공 안과에서 당당히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종건이란 장님은 비록 앞도 못 보고 오른팔도 없는 분이지만 한 손으로 타자기를 잘 쳐 전화 내용뿐 아니라 원장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정확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된 장님 철학 박사 강영우 씨는 내가 맨 처음에 시작한 맹인 부흥원 시대에 들어와서 점자와 타자기, 그리고 혼자 걸어 다니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다. 강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맹인 부흥원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곳 생활이 그가 새 희망을 얻는 길이 트인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내 타자기로 공부하여 연세대학교도 수석으로 졸업했고, 미국에 가서도 타자기와 함께 지내면서 박사 학위까지 획득할 수 있었으니 본인의 초인적인 노력이 무서운 힘을 발휘한 것이겠지만, 내 타자기의 힘도 크게 작용한 것이 틀림없는 듯 하다.

어쨌든 나는 돈만 무진장 들어가는 맹인 재활 사업이긴 했지만, 이것을 보람있는 봉사의 기관으로 생각하고 밀고 나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얻어 온 선물치고는 가장 고귀한 선물인 '봉사 정신'을 실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 고맙기만 했다.

요즘 보면 봉사나 서비스란 간판을 크게 내걸고 교묘하게 돈을 챙기는 이들을 간혹 보게 되는데, 봉사는 본디 돈 욕심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심장병 환자를 돕는답시고 재벌로부터 엄청난 돈을 기부 받아 챙긴 권력층 부인의 작태로는 봉사 활동이 안 되는 법이다. 내가 미친 사람처럼 봉사 활동을 할 때 봉사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던 간호원이나 의사들이, 몇 십년 지난 뒤에 찾아와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같은 활동을 하고 싶다고 털어 놓기도 한다.

이밖에도 나는 내 처지에서 활기 있게 사회에 봉사하고 나라에 봉사할 길을 물색하면서 실천에 옮겼다. 전쟁 중에 눈을 잃은 사람이 많이 의안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안과 병원에서는 의안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 형편이었다. 그것을 나는 직접 국산으로 만들어 쓰게 했다.

우리 나라에선 내가 처음으로 콘택트렌즈를 미국에서 도입하여 계몽에서 시술까지 했는데, 그것도 나중엔 우리 나라에서 개발하여 국산 콘택트렌즈를 쓸 수 있도록 보급시켰다. 내가 처음 콘택트렌즈를 도입할 때에는 "공 안과에서 성한 눈을 망가지게 하는 렌즈를 눈에 넣어 준다"고, 대다수의 안과 의사와 안경점을 경영하는 이들로부터 반발과 중상 모략을 받았다.

마치 백인제 박사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수혈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신문사로부터도 사람의 생명과 같은 귀중한 피를 뽑아, 다른 사람에게 넣어 준다는 것은 인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공박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글 타자기의 전성 시대

나는 한글 타자기의 국산화를 꾀하면서 한글 활자를 개발하는 일도 펼쳤다. 정밀을 요하는 한글 타자기의 활자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서독이나 스위스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었다. 나는 타자기의 한글 자모를 만들기 위해, 먼저 한글 활자부터 국산으로 개발하여 타자기 활자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 개발 때문에 국산 한글 타자기의 제작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 혼자 서울로 돌아와 나는 공 안과 병원 재건에 힘을 썼고, 자리가 안정된 뒤에 가족도 상경했다. 그리고 미국도 다녀와 활기찬 의사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다.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타자 훈련을 받을 학교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가르칠 타자 교관을 먼저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승낙을 하였다. 바쁜 생활 속에 또 한 가지 일이 늘어난 셈이다. 각 군에서 뽑혀 온 15명의 군인에게 내가 직접 타자 교육을 시켰다. 효율적인 교육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모두들 군 생활의 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할 수 있었고, 밥만 먹으면 타자하는 강행군의 교육 과정이 군에서 짜 온 시간표에 의해 진행되었다. 교육을 마치고 난 15명은 곧바로 경상북도 영천에 설치된 3군 합동 타자 훈련 학교의 교관으로 배속되어 전군의 타자수 양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 있을 때 그 당시 타자 교육을 나한테 직접 받은 15명의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서 찾아온 중년 부인이 있었는데 무척 반가워 한동안 옛일을 즐겁게 회고한 일이 있었다.

그는 여군 출신의 타자수 교관으로 활약하다가 제대 뒤 국제 결혼을 하여 필라델피아에 왔다는데, 회계사 직업을 갖고 산다고 했다.

몇 달이 안 가 전군의 행정은 타자기 일색으로 변혁이 되었다. 국방부나 각 군의 본부는 물론 일선의 텐트 속까지 타자기 소리가 요란하였다.

새로 창설된 여군에서는 주 업무가 타자수 양성이라고 할 만큼 타자에 중점을 두었는데, 각 군의 행정 분야에서 여군 타자수들을 크게 환영하였다. 군행정의 생명은 신속과 정확에 있다. 타자기가 군에서 크게 붐을 일으키게 된 까닭은 펜으로 일일이 쓰는 것보다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펜으로 쓸 때는 사람마다 글씨가 제멋대로여서 잘못 읽기가 쉬운 법인데, 타자로 치면 후려 갈겨쓴 흘림 글씨를 읽느라고 애를 먹는 일이 없어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타자기 열기가 뜨겁게 번져 나가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어 제동을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1957년에 육군 참모총장이 된 백선엽 장군이다. 백 장군은 한글로만 작성된 공문은 한자가 없으니 읽기가 불편하다면서 문서를 한자 혼용에다 펜으로 써서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상관의 눈치에 예민한 육군 안에서는 갑자기 타자기 열기에 비상이 걸린 듯 멈칫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념에 찬 이승만 박사의, 한글만 써야 한다는 한글날 담화가 발표되자, 다시 한글만으로 공문을 쓰게 되어 타자기도 다시 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각 군에서 활발하게 타자기를 잘 이용해서 행정 처리를 능률적으로 할 수 있게 되자, 정부의 다른 부서에서도 타자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눈치만 보고 있던 여러 부 중에서도 외무부가 국방부의 뒤를 쫓아 타자기로 사무 처리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체신부는 물론, 내무부, 법무부 등 타자기를 쓰지 않는 부서가 없을 정도로 타자기의 활용을 활발하게 하였다.

자유당 말엽에 미국의 대외 원조 기관인 O. E. C.의 교육 부장 우두 박사는 일류 상업 학교에 그 원조금으로 한글 타자기 30대와 영어 타자기 30대를 각각 교재로 기증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타자기를 나누어주고 활용하도록 권고해도, 대부분 학교에서 영어 타자기만 교육을 하고, 한글 타자기는 창고에 처박아 두고 쓰지 않았다. 한글 타자기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당시, 봄과 가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영어 타자기 경연 대회는 열렸지만,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는 없었다. 그러니 영어 타자기에 대한 타자 기록은 있어도 한글 타자의 기록은 없었다. 이처럼 한글 타자기는 거저 줘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관심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5·16 쿠데타 뒤, 갑자기 각 관공서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타자기를 활용하게 되는 누리로 대세가 바뀌게 되었다. 서기가 펜으로 며칠을 걸려 쓰던 재판 기록을 타자기로 하루에 해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2천 자를 손으로 쓰려면 1시간 걸리던 것이 30분 이내로 줄어들었으니, 6개월 걸릴 일을 3개월 동안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자기란 것이 누리에 알려지게 되니, 그제야 상업 학교도 한글 타자기를 창고에서 꺼내어 가르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무부도 온통 타자기로 공문 교신을 하게 되어 군, 면은 물론, 시골 경찰 지서까지 한글 타자기가 보급되는 현대 바람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단군이래 처음으로 한글 타자기의 전성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5·16 이후에 집권을 한 군인들은 군대에서 타자기로 익힌 능률적인 행정 방식을 독재 행정을 수행하는 데 활용하는 듯 했다. 그 바람에 한글 기계화는 황금기를 맞게 된 것이다. 취직난이 극심한 때였지만, 한글 타자기를 칠 줄 아는 타자수 출신들은 날개 돋친 듯 취직이 되었고, 타자기 학원에서 훈련받은 초보자의 공급도 딸릴 지경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타자 학원들은 주로 영문 타자기의 교습소 노릇만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미 타자기로 행정 능률을 극대화시키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부터 한글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타자 학원은 재빠르게 '취직 보장'이란 선전 문구를 내걸고 한글 타자 강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누리에 보급되고 있던 타자기는 두 종류가 있었다. 속도 타자기인 공병우 타자기(세벌식 자판)와 글씨 모양 위주로 만들어 속도가 30가 느린 김동훈의 체제 타자기(다섯벌식 자판)가 있었다. 김동훈 씨는 개인적으로도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사이여서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김동훈 타자기의 설계에 대해 일부 시정의 의견도 말해 주기도 하고, 그를 위해 활자 주문까지 거들어 준 적도 있다. 어쨌든 이 두 타자기는 생산되기가 무섭게 날개 돋친 듯 잘 팔렸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타자기 붐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세벌식 타자기와 다섯벌식 타자기가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타자기의 생명이 속도에 있다고 생각하는 층은 세벌식 공병우 타자기(속도 타자기)를 썼고, 속도는 느려도 글씨가 예쁘면 좋다는 층에서 는 다섯벌식 김동훈 타자기(체제 타자기라고 함)를 사용했다. 외무부와 내무부, 국방부, 체신부 등 주요 관공서는 주로 속도 타자기만을 썼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공관은 물론 국내 경찰 지서나 시골의 군, 면에 이르기까지 속도 타자기가 번져 나갔다. 속도 타자기는 누구나 배우기 쉽고 빠르기 때문이었다. 전문 타자수가 필요 없는 타자기라는 점을 일반이 알게 되었다.

어쨌든 타자기 없이는 사무 처리의 능률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타자기도 동이 나고 타자수도 동이 날 지경이었다. 그 때 나는 김동훈 씨에게 우리 서로 경쟁하는 처지가 되지 말고 공존할 수 있도록 회사를 통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예쁜 글씨를 찾는 사람이 많아져 간다고 착각을 하였는지 나의 뜻있는 제안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제안대로만 되었어도 김동훈식 타자기 회사나 공 타자기 회사가 훗날 군사 정권으로 탄압을 받았을 때 하루아침에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동훈 씨가 내 제안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나는 마지못해 제재 타자기를 속도 타자기의 글자판으로 유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네벌식 반식 체재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했다.

최초의 글자판 배열 변경

나는 글자판의 배열을 자주 바꾼다고 여러 사람한테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면 언제나 바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바꾼 글자판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한글 타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1960년 초반부터 전국 경기 대회를 개최하여 왔다. 아마도 1963년에 한글 학회와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가 공동 주최로 개최한 한글 타자 경기 대회인 듯 하다. 대회가 끝난 뒤에 선수들에게 타자기에 대한 소감을 발표하게 되는 기회를 주었더니 마산상고 선수가 공병우 속도 타자기로 '수'를 빨리 찍으니 활자대가 엉킨다고 했다. 그래서 ㅅ과 ㄹ 자리를 바꿔 놓았다.

이 자리바꿈으로 말미암아 글자판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사람'을 찍으면 '라삼'으로 찍힌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한 사람에 국한된다는 생각이며, 앞으로 많은 사람이 찍을 때에 다만 한 동작이라도 빠르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능률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오늘날의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을지언정 바꿔 버린 것이다.

나는 자리를 하나 바꾸는 데에도 이처럼 실험을 통하여 바꿨는데, 정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쓰던 네벌식 글자판을 깡그리 못쓰게 하고, 더욱 비과학적인 두벌식 글자판을 강제로 통용시키는데, 사람들이 아무 반항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현실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자판을 바꾼 것을 내가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것은 한·영 타자기의 글자판이다. 내가 한·영 타자기를 만들 때에는 국내의 기술이 매우 유치한 때였다. 그래서 활자가 쭉쭉 뻗을 수 있도록 영문 글자판을 두 자리씩 오른쪽으로 평행 이동시켰지만, 미국에 건너가서 보니 유치한 기술로 만든 최초의 한·영 타자기를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을 보고서 내가 너무 성급하게 바꿔 버렸다고 후회하였다.

휴전 회담에서 공을 세운 타자기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한국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 쪽과 북한 쪽은 판문점에서 2년에 걸친 파란 많은 장기 회담을 마치고 조인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6·25 사변은 3년 1개월만에 끝났는데, 휴전이란 낱말 자체가 풍기듯 전쟁을 쉬는 것이었지 끝막음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남북은 전쟁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땅에서 치르게 된 전쟁이었는데도 한국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한국이 휴전 회담의 대표가 될 수도 없었다. 휴전 회담에는 유엔군 쪽과 북쪽의 조선 인문 공화국, 그리고 중국 인민 공화국 대표만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휴전 협정 서명도 북조선의 김일성과 중공의 대표와 유엔군의 대표 등 삼자만이 했을 뿐이지, 대한민국 대표의 서명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변자이면서도 "이제 와서 전쟁을 하다 말면 어떻게 하느냐, 내친 김에 북진을 계속해야 한다"는 소리만 신경질적으로 떠들며 여론 조작만을 일삼았을 뿐, 휴전 회담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의 위신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휴전 협정 문서 정본을 공병우 속도 타자기로 만들어 중국 대표는 붓으로 서명을 하고, 북쪽 대표와 유엔군 대표는 펜으로 서명을 한 것이다. 물론 이 문서는 영어로도 중국어로도 번역되었지만 정본은 한글이었다. 그러니 한국 쪽의 대표는 참석 못했지만 한국 쪽의 한글 타자기만은 국제회의에서 첫선을 보였을 뿐 아니라, 휴전 협정 자리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마무리짓는 작업을 한 셈이다. 한국이 이같이 문명의 이기를 쓰는 나라임을 은연중에 국제적으로 과시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국위 선양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휴전회담의 유엔군 쪽 통역으로 있던 언더우드 씨가 나를 찾아와 한글 타자기(이 때는 공 타자기밖에 없었다)를 칠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훈련된 세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6·25가 나기 직전에 한글 타자 배우기를 원하는 세 지원자가 있어 가르친 일이 있었다. 온통 누리는 영어 타자에만 열중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세 젊은이들은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처럼 정말 신통할 정도로 열심히 배웠다. 나는 언더우드 씨에게 한 사람은 여자 이고, 두 사람은 서울 대학교 상과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서 두 학생의 이름을 모두 가르쳐 주었다. 언더우드 씨는 이 가운데 두 사람을 채용하여 휴전 회담에서 한글 타자를 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두 젊은이가 나에게 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자기들은 그 때 일선에서 군인으로 힘든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긴급 차출 명령이 내려지면서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실려 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휴전 협정 회담장에서 한글 타자기를 치는 타자수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판문점 휴전 회담 장소에서 그야말로 맛있는 음식과 양담배로 잘 먹는 특별 대우를 받으며 호강스럽게 지냈다고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남들은 무관심할 때 열심히 배워 둔 한글 타자 기 덕분에, 남들은 일선에서 고생할 무렵, 그들은 군인의 신분이면서도 호강을 했다니 공 속도 타자기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 두 사람이 역사에 남을 문서를 찍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휴전이 이루어진 얼마 뒤, 서울 라이온스 클럽에서 판문점 구경을 단체로 가게 되었다. 단체가 아니면 구경 허가를 얻기 힘든 때였다. 그래서 나도 단체에 끼여 다른 사람과 어울려 같이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복무하는 한 군인이 나를 알아보고는 나를 따로 불러내 단독 안내를 해 주고, 점심도 특별 대접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 박사의 덕분으로 북한 측에서 연락 전화가 걸려 오면 한 사람은 전화를 받고, 한편에서 타자수는 전화의 대화를 그대로 받아 찍습니다. 그리고 북한 측과 회담이 끝나면 한글, 중국말, 영문 등 세 가지 말로 대화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서로 교환하게 되는데 한글로 만든 회담 기록이 영문이나 중국말로 만든 기록보다도 늘 먼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한글로 만든 기록을 보면 북한 측에 먼저 건네주면서 그쪽에서 만든 한글 기록을 달라고 합니다. 그쪽에서는 일본 공판 타자기로 만들기 때문에 아주 느려서 늘 우리의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회담 내용 기록을 교환할 때 늘 우리가 신속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북한 측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공병우 식 한글 타자기 덕분입니다. 영문 타자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문서 작성이 되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한글 타자기가 과연 북한 측과의 경쟁에서도 효율적으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내 한글 타자기의 덕분으로 그날 내가 특별 대접을 받은 것 또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 회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정식 조인된 한일 기본 조약을 위해 일본에 가 있던 한일 회담 대표단에는 1급 한글 타자수 몇 명이 끼여 있었다. 연일 진행되는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들 타자수들은 속기된 글을 쏜살같은 속도로 타자를 해서, 다음날 아침에는 대표들 앞에 회의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일본 쪽은 몹시 놀랐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그 당시 회담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좌담회에서 밝혀졌다.

한일 회담의 조약이 끝난 다음 한일 양쪽 사무 요원들이 한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일본 쪽 사무 요원이 그 사실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1급 타자수쯤 되면 웬만한 속도의 라디오 방송은 그대로 찍어낼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대체로 1분 동안에 500타 안팎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공 속도 타자기는 영어 타자기보다도 속도가 30나 빠른 특징을 갖고 있으니, 공판 타자기로 며칠 걸려 회의록을 만들 수 있는 일본 쪽이 경탄한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한일 회담을 끝내고 온 이 타자수들은 한글 타자기 때문에 의기양양해져 어깨가 으쓱했지만, 공병우 한글 타자기가 이렇게 우리 나라의 커다란 자랑거리로 각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보고하였다.

이같이 국위를 선양했던 우리 나라의 훌륭한 속도 타자기와 1급 타자수들은 그 뒤에 군사 독재가 만든 비과학적인 표준만 타자기 때문에 모두 하루 아침에 병신이 되고 말았다.

속도 한글 타자기의 보급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은 무너졌다. 5·16 직후 군사 정권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가 발족되어 정부의 행정기관을 장악하였고, 각 행정기관은 물론, 군기관까지 모든 행정의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무부는 행정 장비 근대화 계획으로 전국 도 산하 시·군에 한글 타자기를 30대씩 구입, 사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1962년 3월 어느 날 강원도에 교재를 납품해 오던 이민구 씨가 나에게 찾아와서 한글 타자기에 관한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발명한 세벌식 속도 타자기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세벌식 속도 타자기는 5분간 설명 듣고 10분간 연습하면 누구나 한글을 타자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전문 타자수가 필요 없고, 전 공무원 누구나 타자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민구 씨는 내 설명을 감명 깊게 듣고 타자기에 대한 선전 유인물을 가지고 갔다. 그 뒤 이민구 씨는 강원도청 고위층과 세벌식 속도 타자기에 대한 장점을 설명한 결과, 30명의 타자수에게 지불하기로 세웠던 예산으로 타자기를 더 구입하여, 강원도 시·군·읍·면까지 보급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72대라는 막대한 수량의 주문서를 받아 가지고 왔다. 그 뒤 이민구 씨는 경상북도에서도 강원도와 같은 방법으로 30대만 구입하게 된 것을 80대로 결정하여 판매하였고, 이런 방식으로 다른 도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날개 돋친 듯 판매하였다.

세벌식 한글 텔레타이프의 보급

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타자기를 보급한 관계로 알게 된 이민구 씨에게, 한글 텔레타이프에 대한 정부의 현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시 직원들의 거센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이민구 씨를 판매 담당 부사장으로 채용하였다. 그리고 내가 발명 특허 9호로 받은 한글 타자기와 텔레타이프에 대한 특허권 가운데에서 판매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민구 씨에게 법적으로 양도하였다.

당시 내무부는 행정 장비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우선 내무부와 전국 시· 도청 간에 통신용 한글 텔레타이프를 설치키로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신품으로 텔레타이프를 수입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미화가 고갈되어 외제품을 수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민구 씨에게 내무부와 절충하여 당시 미군부대에서 쓰다 폐기 처분한 영문 텔레타이프를 재생하여 17대를 내무부와 전국 시· 도청에 무상으로 설치하여 13개월 동안 쓰도록 했다.

1963년, 내무부는 텔레타이프를 운영한 결과 행정의 신속 정확성은 물론 내무행정의 기밀 보장, 예산 절감 등이 막대하다는 분석 결과를 얻고, 전국 시·도·군청까지 텔레타이프를 설치키로 했으며, 내무부는 모두 예산을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시키로 하였다. 미군부대에서 출하한 중고 텔레타이프를 한글로 개조하여 67대를 이민구 씨가 계약한 지 42일 만에 설치 개통했다. 그 통신 시설 덕택에 선거 당시, 내무부는 전국의 선거 사항을 각 시·도청 텔레타이프실을 이용하여 글자로, 방송국보다도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고 받았다고 한다.

내무부 납품 과정에서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아무개 씨의 투서 때문에, 이민구 씨는 검찰의 조사를 받고, 내무부 직원에게 3600원의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는 죄로 42일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일이 있었다. 이민구 씨는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공무원들의 비리를 폭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의 동정으로 교도소에서 출감하였다. 그 뒤 그는 문교부와 전국 시·도 교육청에 13대, 국세청과 전국 지방 국세청에 8대, 문화공보부에 1대, 농수산부에 1대, 그 외에도 청와대, 서울시 경찰국과 각 경찰서, 치안국과 각 시·도 경찰국 그리고 민간 업체인 호남 비료, 쌍용 시멘트, 한일 은행 등에 한글 텔레타이프를 공병우식으로 설치하여 고성능 통신망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뒤 군사 정부는 공병우식보다 속도가 30이상 느린 두벌식 일본 오끼 전기 텔레타이프로 기기를 교체해 국가의 통신망을 망치고 말았다.

한·일 맹인 친선 타자 경기 대회

나는 일찍부터 '맹인 재활 센터'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과 의사인 나로서 장님을 참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971년 여름에 나는, 일본을 돌아보는 중에 일본 맹인 직능 개발 센터에 들러 장님인 '마쯔이' 소장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람은 한글을 치며, 일 본 사람은 일본말을 치는 한일 [맹인 타자 경기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마쯔이 씨는 말글이 서로 다른데, 타자 경기가 될 수 있을까요? 하고 반문했다. 나는 스트록 수(글쇠를 누른 수)로 계산하면 가능하다고 하였더니, 그는 그제서야 알아듣고, 개최하자는 데에 동의하였다. 마쯔이 씨는 내 초청으로 서울에 와서, 1971년 11월에 서울 라이온즈 클럽에서 주최하는 [한글 맹인 타자 경기 대회]를 참관하고 돌아갔다. 1972년 4월 29일에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개최국이 비용 전액을 부담한다는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자유 중국에도 전하였더니, 내가 개발하여 준 중국 주음 부호 타자기를 가지고 옵서버 자격으로 선수 한 분이 참가했다.

(1) 1972년 서울 대회

[맹인 타자 경기 대회]에서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서로가 정보를 교환하며 장님 재활에 관한 연구와 직능을 개발하는 일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경기를 직접 담당한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듯 하다.

나는 1971년 11월 대회에서 입상한 5명의 입상자를 선수로 정하고, 임종철 선생을 지도자로 하여 1972년 1월에 내가 경영하고 있는 공 안과 병원의 병실 하나를 비워서 훈련장으로 하여 1개월 동안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1972년 4월 29일,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회관을 경기장으로 하여 대회를 열었다. 경기 종목은 외워 찍기와 또 받아 찍기의 두 종목이었다. 외워 찍기는 한 줄 길이의 문장을 외워서 반복하여 5분 동안 찍기였으며, 받아 찍기는 부르는 것을 5분간 받아 찍는 방식이었다. 한국 장님 선수들은 공병우 식 한글 속도 타자기를 지참하고 출전했으며, 일본 선수들은 독일 제품인 올림피아를 개조한 일본 가나 타자기를 지참하고 출전했다. 한편, 자유 중국 선수는 로얄 주음 부호 타자기를 가지고 출전했다. 그 무렵 일본은 일본 가나 타자기를 쓰는 장님이 3만 명 정도이고, 우리 나라는 한글 타자기를 가진 장님들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엄청난 숫자의 격차였기에, 3만명에서 뽑힌 다섯 명의 일본 선수들이 대승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장님 선수들에게 경기에 져도 좋으니 오자가 나지 않도록 찍으라는 부탁만 하고 출전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천만 뜻밖이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단체상과 개인 1, 2, 3, 4, 5, 6등을 모두 휩쓸었다. 나는 여기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 타자기의 우수성을 더욱 실감하고 무척이나 기뻤다.

(2) 1978년 동경 대회

일본은 서울 대회가 있은 지 6년만에 한국 선수들을 초청했다. 일본 쪽은 스트록 수로 계산한다는 원칙을 변경하여 낱말 단위로 계산을 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일본 쪽은 타수로 맞대는 경기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낱말수 계산 방식으로 하여 덤으로 3타를 달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검토를 해 본 결과, 일본말은 5스트록으로써 한 낱말을 만드는 데에 비하여, 한글 3자, 즉 8스트록을 쳐야 한 단어를 구성하므로, 5대 8로 한국 쪽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친선경기이며 또 이와 같은 대회를 통하여 장님 직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불리한 심사 교정을 무릅쓰고 덤으로 3타를 주기로 하고 경기에 참가했다. 1개월 반 동안의 훈련을 하고 선수단이 동경으로 떠났다.

1978년 11월 9일, 한국 시각 장애자 복지회 백이전 회장을 고문으로, 서울 맹학교 한현진 선생님을 단장으로, 그리고 임종철 선생을 선수 감독으로, 김석암, 이병돈, 나응문, 이재환 등 4명으로 구성된 일진이 동경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 당시에 선수 감독 겸 심사원으로 임했다가 돌아온 임종철 선생의 보고 내용을 짤막하게 추려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맹인 선수들이 찍는 소리는 마치 자갈길에 짐수레가 지나가듯 덜커덕 덜커덕 하는 소리를 냈으나, 한국 선수 4명이 찍는 소리는 마치 천장이 날아갈 듯한 소리를 냈으므로, 200명 정도의 일본 참관인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당시 우리 선수 4명이 5분 동안 찍은 1분 동안의 평균 타수는 무려 583타였으며, 특히 이병돈 선수는 분당 평균 614타를 찍어, 고독한 적지에서 한국인의 솜씨와 한글 속도 타자기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대상을 비롯하여 상품을 거의 휩쓸었다. 그것도 덤을 주고도 승리를 했으니, 나에게 이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제 8 장 고독한 투쟁

공병우식과 김동훈식의 단점만 모은 졸작

한글 기계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준 글자판이다. 표준 글자판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한글이 고성능 기계화로 발전할 수도 있고, 저성능 기계화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내가 만든 '공병우식 글자판'과 김동훈 씨가 만든 '김동훈식 글자판'으로 된 두 가지 타자기가 시장 경쟁을 통해서 보급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두 타자기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보급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글자판의 혼란이 점점 가중되는 꼴이 되었다. 이 두 타자기의 글자판이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공 타자기를 치는 사람은 김 타자기를 칠 수 없었고, 김 타자기를 치는 사람은 공 타자기를 칠 수 없었다.

그래서 글자판을 통일해야 한다는 소리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러자 문교부에서 글자판 통일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상공부 표준국은 1968년 10월초에 비과학적인 네벌식 표준 자판 시안을 발표하고는 이 자판을 바로 표준 자판으로 결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상공부의 부당한 처사를 묵과할 수 없어서 법적으로 공청회를 신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랬더니 1969년 1월 17일 신문 회관에서 한글 타자기 표준 자판 시안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많은 분들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정부안을 지지하는 네 사람과 반대하는 네 사람이 연사로 나와서 의견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에서 나와 임종철 선생의 것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이 공청회에서 상공부 시안이 너무나 비과학적이라 '네벌식이 표준 자판 시안으로서 능률적인 기계 개발이 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했더니 청중이 폭소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임종철 선생이 발표한 것을 소개하는 까닭은 가장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 선생은 첫째로, 표준 자판은, 한 가지 글자판으로 모든 기종에 적용되는 글자판이어야 한다는 글자판의 일원화, 둘째로, 글자를 찍어낼 수 있는 능률 극대화, 셋째로, 글자를 빨리 읽을 수 있는 꼴로 찍히는 가독성을 제시했다.

이 원리는 지금도 한글 기계화를 논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이다. 공청회 뒤 표준 자판 시안은 폐기되었다.

그런데 공청회를 마칠 때에 표준국 간부가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한다 해도 공 박사님의 글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이 때부터 내 글자판은 표준 자판으로 삼지 않겠다는 저의가 도사리고 있었다고 본다. 이 생각이 줄곧 과학기술처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상공부에서 글자판 통일 작업을 실패하자, 1969년 2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글자판 통일 작업이 과학기술처로 넘어갔다. 이 때 과학기술처 장관은 김기형 씨였고, 실무 책임자는 연구 조정관, 황해룡 씨였다. 특히 이 사람들은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인물들인데, 악역을 맡은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는 과학기술처가 글자판 통일 작업을 한다기에 이번에야말로 과학적인 글자판으로 통일이 되겠지 하면서 기대하였다.

드디어 1969년 7월 28일에 표준 자판이 발표되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졸속…… 한글 타자기 일원화"란 제목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과학기술처에서 추진 중인 한글 타자기 일원화 작업이, 공개된 토의나 발표 또는 공청회를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네벌식으로 확정 단계에 있어 지나친 비밀주의와 졸속주의가 크게 문제되고 있다."

이 기사에 '공청회 한 번 안 열어' '쉬쉬 속에 네벌식 확정'이란 중간 제목을 뽑은 뒤 각계의 의견을 실었다. 최현규, 주요한, 송계범, 장봉선, 최현배 씨, 그리고 내 의견을 실었는데, 내린 결론은, 표준 자판은 '비능률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날을 기해서 각 언론에서는 과학기술처가 내놓은 표준판을 한결같이 비판하였다.

과학기술처가 비과학적인 글자판을 만들게 된 근본은, 첫째로 글자판 비전문가들을 동원했고, 둘째는 3개월만에 졸속으로 했고, 셋째는 공청회를 한 번도 하지 않고 비밀리에 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처가 만든 표준 글자판이란 홀소리 한벌과 닿소리 두벌 그리고 받침 한벌로 모두 네벌로 된 비과학적인 네벌식 글자판인데, 조선일보는 '공병우 식과 김동훈 식의 단점만 모은 졸작'이라는 평을 한 바 있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글자판을 표준판으로 정해서 총리 훈령 81호로 공포하였다. 그러자 상업 학교, 타자 학원, 정부 기관 등 각종 기업체와 단체에서 이 엉터리 표준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나라의 표준판은 공병우 식과 김동훈 식의 장점만 모은 우수작으로 정해야 할 터인데, 반대로 두 타자기의 단점만 모은 졸작으로 정했으니, 이 나라 한글 기계화의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져 나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세계 최악의 한글 기계화와 전산화를 이룩하게 된 원인은 3벌 방식을 외면한 채 시행한 결과이다.

임종철 선생

당시 타자계에서 으뜸가는 기계 기술자로는 이윤온, 김용준 씨, 판매에 천재적 소질을 지닌 한치관 사장, 공병우 타자기로 십분당 6445타의 기록을 수립한 타자왕 김창대 씨, 교육계의 지도자 한국 타자 학회의 우영일 회장, 김낙순 부회장, 표준 자판 추진 위원회 강태빈 회장과 이밖에 많은 분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학술적 연구자로 임종철 선생을 아니 들 수 없다. 나는 그 동안 정부와 싸우기 위하여 여러 분들의 도움도 필요했지만, 나에게 이론적 도움이 아주 필요했던 때였기 때문에 학문적 역량을 갖춘 임 선생을 특히 잊을 수 없다.

임 선생은 대구 상업 고등학교의 타자 담당 교사였다. 임 선생이 1961년에 전국 타자 연구 발표회를 했다. 이 때에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초 중 고등 학교 국어 교과서의 글자 빈도 조사를 했다. 연구 발표회에서 자신이 고안한 글자판을 제시하고, 이 글자판으로 타자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나에게 해 왔다. 나는 그 연구열에 감동하여 내 기술자를 동원하여 즉시 그의 요구대로 만들어서 보냈다. 그 타자기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지는 궁금하다.

임 선생은 아주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학문적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임 선생이 우리 나라의 타자 교육 이론의 최고 권위자라고 생각한다. 아주 놀란 것은, 내가 얼마 전에 귀국하여 그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에 지금까지 한글 타자에 관한 그 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해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이 지나면 이 자료들은 귀중한 문화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리란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아직 회신이 없다.

나와 임 선생이 함께 연구하는 동안 그가 남긴 몇 마디 말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상공부 표준국이 글자판 시안을 발표했을 때에 "만일 정부안이 공병우 타자기보다 1%만 더 능률적이었더라면 나는 정부안을 지지했을 것이다"라는 말이라거나, "나는 공병우 박사님의 모든 것을 배우지만, 자료를 버리는 습성은 배우지 않겠다", "공병우 타자기는 거북선에 버금가는 발명품이다", "글자판의 제정은 한글의 제 2창제와 같다" 등등의 말이다.

나는 1966년부터 한글 타자 연구회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상공부 표준 자판 시안이 발표되었을 때 대구에서 글자판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임 선생을 서울로 불러 부회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정부가 과학적 글자판을 만들도록 많은 연구물을 발간했다. 이 첫 번째 연구로서 드보락이 지은 500쪽에 달하는 [타자 동작 연구(The Typewriting Behavior)]를 두 사람이 나눠 하룻밤에 읽고 중요 사항을 뽑아서 발표했다. 이 책은 1973년 임 선생이 번역하여 돌리고자 한다기에 지원을 했더니 220부를 발간하여 무료 기증했다는데,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는 줄로 안다.

이 밖에 임 선생은 300쪽에 달하는 [한글 기계화의 기본 이론]을 집필했고, [타자기 100년사(The Typewriter of a Century)]를 번역했고, 또 [타자기란 사나이(Mr. Typewriter)]를 번역했다. 타자기로 찍어서 출판한 책은 이 책들이 처음이며, 이 책은 우리 타자계에서 불후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윤온 씨

이윤온 씨는 1961년에 입사하여, 국산 타자기 1호를 조립한 것을 비롯하여 한·영 타자기, 볼 타자기, 한·영 텔레프린터, 점자 타자기, 모노 타이프 개발 등에 모두 참여하고 세벌식만이 한글 기계화를 올바로 발전시킨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지금까지도 세벌식만을 생산, 보급하고 있는 분으로 때로는 생산에, 때로는 선전에, 때로는 연구에, 때로는 글자판 투쟁에 참여해 옴으로써 내 오른팔 역할을 한 분이다.

김재규와 나

정부의 통일 표준판이란 것이 공포되기 전, 그러니까 공병우 타자기가 날개 돋치게 막 보급될 무렵에, 나는 한글 타자기 공장에 매달려 생산 능률을 독촉하는 처지가 되느니 차라리 내 본업인 안과 병원의 의사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타자기 일 때문에 병원 문을 닫게 될 정도로 병원에 피해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실하게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줄 재력도, 운영할 능력도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런 때 중경 재단이란 유력한 문화 재단과 접촉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정부 집권층의 막강한 힘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법인체로서 군인 가족 교육 기관으로 중경 중학교를 용산에 설립한 실적도 갖고 있는 문화 단체라고 소개를 받았다. 알고 보니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 씨가 회장이고,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씨가 이사장이었다. 김재규 씨와 몇 차례 만났는데, 그는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사람 같았다. 더욱이 그 때는 한글 타자기 공장이 잘 돌아갈 무렵이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병원을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가고, 타자기 공장을 경영할 유력한 전문인을 만나 운영을 맡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중경 재단에 헐값으로 팔았다. 그런데 중경 재단 측에서 은행에서 융자를 해야겠는데 담보가 필요하다면서 내 부동산 서류를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중경이란 든든한 재단에서 내 타자기를 만든다는데, 내 명의로 된 재산을 빌려주어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다가 생산도 순조롭고, 중경 재단의 앞날로 창창한 듯이 느껴지던 새 경영 진용이 들어선 때라 그들의 운영을 격려하는 뜻에서라도 내 중요한 재산 문서를 아낌없이 빌려 줄 수 있었다.

그 뒤 중경은 순조롭게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제작하고 보급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일종의 정부 유도의 재단으로 집권층의 비호를 받아 가며 은행 융자로 계속 잘 얻으면서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러할 무렵에 정부의 엉터리 네벌식 표준판이 발표됐다.

그런데 중경 재단은 내가 생명처럼 내걸고 정부와 대항하고 있는 세벌식 자판의 타자기를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고, 정부와 한통속이 되어 정부에서 정한 엉터리 표준판 네벌식 타자기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 은행 빚을 중경 재단 쪽에서 갚지 못하고 있으니, 저당권 설정을 한 내 부동산 전부를 차압하겠다는 통고가 날아왔다. 하루아침에 전재산이 날아가게 되었다. 이미 모든 운영권이 중경에 넘어갔는데도,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내 재산이 저당잡혀 있었으니 나는 꼼짝 못하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개업 중에 있던 서린동의 공 안과 병원 건물까지 차압을 당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설상가상으로 이중 삼중의 압력을 받게 된 셈이다. 회사의 경영진이 무슨 경영 이념이나 기업의 어떤 의욕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아닌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떤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아니었고, 회전 의자나 돌리면서 적당히 고급 취직 자리로 시간을 보내는 부류의 군인 출신들이었다. 결국 병원과 집채만 공매처분장에서 겨우 되돌려 샀을 뿐 온 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타자기 보급을 효과적으로 해 보겠다고 군인 출신 권력층과 손을 잡은 내 과욕이 이런 결과를 만들게 한 것이라고 크게 반성하게 되었다.

세벌식 한글 기계화의 신념을 내걸고 싸우다가 결국 흔히 말하는 패가망신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입체적인 압력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그 뒤에도 소신대로 진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탄압의 시작

나는 정부에서 정한 표준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비교 연구를 하였다.

나는 임 선생과 함께 엉터리 네벌식의 단점 등을 분석하고 또 비판하는 글을 써서 이를 유인물로 만들어서 전국에 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경기 대회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또한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탄압이 심해졌다. 그 때 우리는 여러 가지 탄압을 받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잡지사 폐간

1970년 봄에 [현대 한국]이라는 잡지에서 표준 자판 찬반 이론을 실은 기사를 내보냈다. 이 특집호는 한쪽에 황해룡 씨와 표준판 제정에 참여한 심의 위원 몇 사람이 쓴 표준판 찬성 글과 사진, 다른 쪽에는 공병우를 비롯한 반대하는 내용의 글과 사진을 공정하게 실었다. 그런데 정부는 나중에 [현대 한국]의 편집장을 과학기술처로 호출하여 "왜 공병우 사진을 실었느냐? 그리고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제정한 표준판인 만큼 국민이 자판 통일에 협조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네들이 이번 잡지에서 한 짓은 반정부 행위를 선동한 것이 아닌가!"라는 등으로 협박한 뒤 마침내 이 잡지를 폐간시키고 말았다.

(2) 토론회 방해 공작

1970년 8월 2일 KAL 호텔 26층 회의장에서 '한글 타자기 글자판 통일 협의회' 발기회(위원장 허웅) 주최로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한글 전용 국민실천회장 주요한, 한글 타자 연구회 부회장 임종철, 과학기술처 연구 조정관 황해룡, 김 타자기 주식회사 대표 김동훈 씨 등이 연사로 내정되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처는 허웅 박사와 실무자인 문제안 씨를 호출하여 위협하였다. 먼저 허웅 박사에게 위협하였다.

"당신은 국립 대학인 서울 대학교 교수로서 정부에서 제정한 표준판을 비판, 반대할 수 있소?"

"국가 발전과 한글 기계화 발전을 위해서 표준판의 비과학적인 면을 학문적 차원에서 비판하는 학술회이지, 정부 시책을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허웅 박사는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기형 장관이 문제안 씨에게 위협하였다.

"정부가 제정한 것을 그대로 실시할 것이지, 왜 반대하는 거요!"

그러자 문제안 씨가 대답했다.

"저는 장관님과 생각이 다릅니다. 민족 문화의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 이번의 토론회는 마땅히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자 김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신분을 변경시켜 주겠소!"

이렇게 해서 주최측에다 협박하는 하는 한편 나에게도 위협이 가해졌다. 토론회를 하기 이틀 전에 모 기관의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세종 호텔 찻집으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국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 박사님의 주장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공 박사님의 주장이 다 옳더군요. 그래서 앞으로 공 박사의 주장대로 글자판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거가 눈앞에 와 있는데, 이런 행사를 하면 선거에 지장이 많습니다. 그러니 선거가 끝나면 우리가 자진해서 고칠 것입니다. 제발 선거를 위해서 이번 행사를 중지하도록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튿날 저녁, 과학기술처의 황해룡 씨가 서린동의 아무개 일식집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표준판이 잘못된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꼭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올해는 대통령 선거의 해니까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토론회를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거가 끝나면 표준판을 고치겠습니다."

결국 토론회를 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해룡 씨의 말도 거짓말이었다.

이밖에 정부는 1970년 10월 11일 한글 전용 국민 실천 추진회(회장 주요한)가 주최한 한글 타자 경기 대회도 장소 사용을 방해하여 결국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 뒤 1972년에는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회장 이관구)와 한글 학회(회장 허웅)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세종 타자기 타기 타자 경기 대회"가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회관에서 열렸는데, 이 대회에 공병우식 타자기를 치는 선수들은 참가를 못 하게 하였다.

1973년 봄에는 한글 기계화 추진 위원회 실행 위원장으로 있던 김성 씨가 한글 새소식에 [한글 기계화의 바른 길]이란 제목으로 표준 자판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김성 씨는 모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어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딘데!"

정부의 표준 자판은 한·영 겸용이 불가능하다는 내 말을 그 현명한 조사관은 믿어 주었다. 한영 겸용 타자기는 결국 20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만들지 못한 채, 정부는 국고금을 낭비하고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꼴이 되었다.

1972년 초에 한글 기계화 연구회 주최로, 한글 사무기 전시회가 태평로 서울 신문사 앞에 있는 서울 시민 회관(전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한글 기계화 연구회는 주로 컴퓨터 전문 학자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 단체의 총무는 최준동 교수가 맡아서 많은 수고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기술처의 후원을 받아 어용 학자들이 한글 기계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각종 사무 기계들을 전시한 것이다.

나는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의 연구원 이윤온 씨와 함께 그곳에 나갔다. 이윤온 씨는 내 오른팔 역할을 하며 세벌식 자판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고 나와 함께 글자판 투쟁에 나선 동지다. 그 때 용감하게 투쟁 제일선에 나섰던 분이다. 세벌식 타자기를 전시하는 한편 이 자판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능률적인가를 표준 자판과 비교하여 만든 차트를 벽에 붙여 놓고 구경온 손님에게 열심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정부 표준판은 고성능 한글 기계화가 불가능한 반면에, 세벌식은 가능하다는 과학적인 자료를 제시한 전단을 인쇄해 뿌리기도 하였다. 이 전시회는 정부 편에 선 어용 학자들이 타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들러리로 삼고, 표준판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려는 속셈이 깔린 전시회였다. 그랬으니 우리가 하는 짓이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하루 동안만 전시하고, 이튿날 철수하라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아니, 과학은 진실을 알리는 일이고, 우리는 과학적인 내용을 사실 그대로 일반에게 알리고 있는데, 철회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대들었다. 우리가 정부의 표준판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는 정부 시책에 위배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에서 잘못하는 일을 일반에게 알려야 이 나라가 올바르게 발전할 것이 아닌가?"

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부가 국가 백년대계를 그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정부 편에 붙어서 우리를 결국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쫓겨날 까닭이 없다면서 버티어 봤지만, 결국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이튿날 낮에 전시장에서 내쫓기는 수모를 당했다. 군사 독재 치하에서는 과학의 자유도 없었다.

그 뒤로 한글 기계화 연구회에서는 매달 한글 기계화 발전을 위하여 토론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네벌식은 비과학적인 자판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고 나만 공연히 정부를 반대하며 공박만 일삼는 사람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 것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줄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어느 날 갑자기 과학기술처의 총무과장이 내 집에 찾아왔다.

"대한민국에서 10월 문화의 달에 공 박사에게 문화상을 드리기로 하였으니, 받아 주시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이 사람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아닌 성싶어, 장관을 만나서 대답하고 싶다고 했다. "상 받는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내일 장관을 제 집으로 점심 초대를 하여 함께 점심이나 하면서 문화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다음날 장관이 삼청동 우리 집에 왔다. 평소대로 조촐한 오찬을 함께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장관에게 '정부 표준판을 그냥 몰고 나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와 궁지에 빠져 망신당하게 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세벌식에 관심을 가져 보라'고 권고를 했다. 그리고 이미 세벌식으로는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칠 수 있는 한영 타자기도 개발되었지만, 표준 자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덮어놓고 자기네가 만든 엉터리 네벌식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다만 그는 자기네가 만든 표준 자판을 더 이상 비판하지 말고 정부가 한글 기계화 연구가인 공 박사에게 드리는 문화상이나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우둔해도 그런 판에 그 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다. 문화상을 줄 테니 제발 정부가 하는 일에 훼방놓지 말라는 사탕발림의 재갈을 물리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장관에게 문화상을 사양하였다.

그 뒤, 과학기술처는 나를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병우가 정부 시책에 반대만 한다고 중앙정보부에 고발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속칭 남산으로 통하는 중앙정보부에서 내게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장관을 만난 지 며칠 뒤 남산에서 왔다는 두 사나이가 나를 찾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 왔는데 잠깐 갑시다!"

이제 내 차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떨리기는커녕 담담하고 떳떳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간다 하더라도, 내가 남을 해친 적도 없고 죄를 지은 것도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진리를 위한 내 신념을 군사 독재의 총칼로 위협한다고 해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곧장 사진 찍는 방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대뜸 내 가슴에 번호판을 안게 하고 사진부터 찍었다. 신문에서 가끔 본 번호를 들고 있는 간첩들의 몰골이 연상되었다. 나를 그런 등속으로 취급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으나, 일단 잡혀 온 이상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나를 정식으로 죄인 취급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무실로 끌려갔다. 양쪽 벽을 중심으로 5, 6명의 젊은이들이 각자 사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책상 앞에 나를 마주 앉히더니, 왜 정부의 시책을 방해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과학기술처에서 잘못한 점을 몇 마디 꺼내자, 나를 심문하던 사람과 그 방에 앉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큰 소리로 다짜고짜로 "이 새끼, 여기가 어딘데, 정부가 잘못한 것을 따따부따하는 거야?"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젊은이들이었다. 나는 하던 말을 그만두고 어이가 없어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는 질문에 대답만 하였다. 모두 기록을 하더니 오늘은 일단 집에 갔다가 내일 오후 3시에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 이튿날 다시 그곳에 갔다. 어쩐 일인지 그들의 태도가 어제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공 박사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과학기술처가 분명히 잘못하고 공 박사를 고발한 것 같아요. 타자 학원에서 모두가 표준판은 석 달 교육을 받아야만 타자수가 되는데, 세벌식은 한 달이면 타자수가 된다고 말합디다. 그리고 우리 정보부 통신과 사람들도 세벌식은 라디오 방송으로 들어오는 말을 받아 찍어 기록할 수 있지만, 표준판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더군요."

어제 내가 한 말이 사실인가를 조사해 본 모양이었다. 내가 주장하는 진리가 분명히 이들의 양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박사님, 네벌식으로써는 한영 타자기의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다. 과학기술처에서는 가능하다고 발표하였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 당시 일반 지식인들은 한영 타자기에 대한 가치와 필요성을 잘 모르고 있을 때이다. 타자 전문 교육가들도 내가 발명한 한영 타자기를 써 보고 나서야 이것이 얼마나 편리하고 능률적인 기계인지 겨우 안 정도였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의 직원으로서, 한영 타자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묻는 점으로 보아 그 사람의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공 박사님, 과학을 위해서 앞으로 더욱 투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기록을 정리해 가지고 내일 과장님에게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과장님 앞에서는 정부 시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만 말씀해 주셔야만 이 사건을 무사히 간단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 한 번 더 수고를 해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 이튿날 다시 가서 과장에게 정부 시책에 협조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과학의 진리는 과연 강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애국 애족하는 사람들이 그곳 남산에 끌려가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데, 정부 시책을 반대하였다는 일로 고발을 당한 내가 무사히 나오게 된 것은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의 속담처럼, 과학적이고 고성능인 세벌식 한글 기계의 진리가 칼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백만 대군 송현 씨

1969년 엉터리 표준판이 나온 이후로 그 동안 나는 많은 동지들과 함께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싸워 왔다. 그런데 한해 한해 해가 가는 사이에 그 많던 동 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떨어져 나갔다. 어떤 사람은 생계에 지장이 생길까봐, 어떤 사람은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 더 이상 저 독재 정권과 싸워야 소용이 없겠다고 슬슬 떨어져 나갔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싸울 때는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자판 싸움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때 한민교라는 젊은이가 '유판사'라는 타자기 가게를 차려서 공병우 타자기를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뒤에 알게 된 일인데, 한산섬에서 초등 학교 선생을 하고 있던 주중식 씨가 유판사에서 타자기를 구입하였고, 주중식 씨가 타자기 치는 것을 보고 서라벌 고등학교 국어 선생을 하던 시인 송현 씨가 보고, 그 자리에서 유판사에 전화를 걸어서 공병우 타자기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송현 씨는 부산 사람인데, 시인이며, 당시에 함석헌 선생의 제자로서 피가 뜨거운 젊은이였다. 나는 한민교 씨를 통해서 그가 한글 기계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당시 잘못 만든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한민교 씨가 나에게 말하였다.

"송현 씨가 글자판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더군요. 공 박사님께서 한글 기계화 글자판 싸움을 혼자서 외롭게 하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매우 걱정을 하더군요. 밥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도 글자판 통일을 위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민교 씨에게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날 뒤에 송현 씨를 만났다. 나는 이미 그가 쓴 글도 읽어보고, 또 한민교 씨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대충 설명을 들었는데, 소문 듣던 대로 그는 젊고 패기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연구소에 와서 같이 일해 보자고 제의했다.

여러 날을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송현 씨가 공병우 한글 기계화 연구소 부소장으로 부임하였다.

십여 년 천직으로 알던 교직을 그만두고 우리 연구소에 온 그는 그 나름의 각오가 대단하였다.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 싸울 투지가 확고했다. 그는 내가 지도해 주는 대로 열심히 연구했다.

나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하면서 기진맥진해 갈 무렵에 송현 씨의 출현은 그야말로 백만 대군의 원군이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글을 쓰는 것이나 말을 하는 것이나 용기 있게 싸우는 것이나, 또 타자기를 치는 것이나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잘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늘 마음놓을 수 있는 동지였다.

그가 천직으로 일하던 교단을 떠나 우리 타자계로 투신하여 일하면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은 1977년 과학기술처와의 공식 대담이다. 이 대담이 타자기 글자판 8년 전쟁에 있어서 중대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뿌리 깊은 나무] 1977년 9월호에 "어느 관리와의 다툼" 이란 제목’’의 글’’로 소개되었음).

그가 1978년 1월 30일자 [주간 시민]에 "장관이 거짓말하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쓴 단평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글이었다. 98회 정기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글자판 통일 문제를 질의하였을 때, 과학기술처 장관이 거짓으로 답변을 한 적이 있다. 장관의 답변을 비판한 글이었는데, 이 글을 발표한 두 주일 뒤에 이 신문은 폐간되고 말았다.

송현 씨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를 입증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토록 서슬이 시퍼렇던 과학기술처가 꼼짝 못하게 됐다. 옛날 같으면 그는 벌써 고발이 되어서 매도 맞고, 감옥에 잡혀갔을 것이다.

내가 "표준판을 지지하는 자는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자"라고 글을 썼다 가 중앙정보부에 고발을 당하여 곤욕을 치른 일이 있는데, 송현 씨가 과감하게 싸운 것은 그 때 내가 하던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송현 씨와 같은 젊은이들이 과학의 진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걸고 싸울 각오를 하고 용감하게 일하고 있는 것은 정말 국가적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민간 통일판 제정과 행정 소송

송현 씨의 출현 이후 나는 더욱 용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한글 학회,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한글 기계화 촉진회 등 여러 문화 단체와 손을 잡고, 민간에서 이상적인 글자판을 통일 자판으로 제정하자고 합의하고 마침내 민간 통일판을 제정하였다.

민간 통일 자판은 내가 만든 글자판을 골격으로 해서 세벌식으로 정한 과학적인 글자판이다. 물론 이 글자판은 내가 만든 글자판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이 글자판을 여러 한글 문화 단체가 연합해서 제정했건만, 또한 이것이 과학적인 글자판인 줄 알건마는, 정부에서 정한 표준 자판이 아니라는 까닭으로 보급이 될 수 없었다.

이번에는 13개 한글 문화 단체들과 관계 인사들과 협의하여 행정 소송을 제기하기로 하였다. 행정 소송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절차를 의논한 끝에 일단 한영 타자기를 상공부에 표준 규격 신청을 하기로 했다. 표준 규격 신청을 받아 주지 아니하면 그 때 행정 소송을 걸기로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수동식 한·영 타자기는 세벌식이 있을 뿐이다.

안호상, 이은상, 주요한 박사 등이 주축이 되어서 내가 국내 최초로 만든 한영 타자기 글판을 KS 신청을 했다. 그러자 예측했던 대로 공업진흥청에서 거절을 하였다. 그래서 조영황 변호사를 소송 대리인으로 정하여 상공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재판에서 나는 조금도 이기리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 동안 과학적 진리를 위해서 수없이 싸워 왔건만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 독재 정권에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다만 무시무시한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진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싸웠다는 기록이라도 똑바로 남겼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재판 과정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송현 씨가 법정의 증언대에서 선서까지 하고, 과학기술처 장관을 규탄하고 과학기술처의 잘못을 증언하였다는 점이다. 그 때 재판을 방청했던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송현 씨의 용기 있는 태도는 글자판 투쟁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의 진리를 위해서 싸운 것만이 아니라, 내가 발명한 세벌식 한글 타자기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란 점은 글을 통하여, 강연을 통하여 입증하고, 또 내가 최초로 발명한 세벌식 글자체에 대해서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등 그야말로 한글 기계화에 커다란 공을 세운 분이다.

이 재판에서 우리는 졌다.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다. 더 이상 싸울 방법이 없었다. 과학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잘못된 엉터리 표준판을 폐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서 싸웠다. 장관을 상대로 행정 소송까지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제 정말 싸우고 싶어도 더 이상 싸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타자기 보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병우 타자기 판매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송현 씨가 대표가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송현 씨에게 위임하였다. 한글과 영문을 같이 칠 수 있는 공병우 한영 타자기를 경방 타자기 회사에도 주문하여서 국내는 물론 해외 교포들에게 수출하는 일을 하였다. 그 때 국내에서는 주로 문인, 목사, 의사, 경찰관, 대학생들에게 대대적인 보급을 하였다.

송현 씨는 열성과 용기는 대단하였지만, 사업적인 수완은 서툰 것 같았다. 결국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도 내가 미국으로 간 뒤에 얼마 가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송현 씨가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공병우 타자기 보급을 위해서 글로, 말로, 몸으로 싸운 것들은 내가 도저히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자세한 것은 언젠가 그가 글로 쓸 것이라 기대되어 나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사실 내가 사진 쪽으로 잠시 외도를 한 것도 다 송현 씨 같은 젊은이들이 용기 있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학의 진리와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오히려 나보다 더 과감하게 싸우고 연구하기 때문에 나는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머리도 좀 식힐 겸 사진으로 발을 디딘 것이다.

제 9 장 일흔두 살에 배우기 시작한 사진

카메라 메고 방랑길로

표준 자판 투쟁을 하는 동안 나는 엄청난 돈과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학적인 내 발명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기’’는커녕 남산까지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나 생각하니 한스럽기만 하였다. 나는 세벌식이 아니면 한글 기계화가 망한다는 신념으로 그 동안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연구, 투쟁해 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공격을 해도 당국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니 투쟁을 할 대상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 동안 나는 과학기술처가 잘못했다는 것만은 깨닫게 해 준 것이다. 한때 잘못을 수정하겠다고 과학기술처 담당자가 나에게 언약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잘못된 길로 너무 깊이 들어간 뒤에 깨달은 것이니, 시정하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군사 정권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100%잘 하는 짓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과오를 수정하려 들지 아니한 것이다.

나는 군사 독재 정권은 자기네의 잘못한 일을 알고도 고칠 생각을 않고, 군대식으로 강행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군사 독재의 이런 속성을 알고서, 군사 독재 정권과의 투쟁은 마치 달걀로 바윗돌을 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투쟁은 이제 그만하고, 팔도강산 구경이나 하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껏 팔도강산도 구경할 겨를이 없이 바쁘게만 살았다. 나는 그 때 72살의 늙은이였다.

그 무렵 유판사라는 타자기 판매 회사를 하던 한민교 씨의 안내로 설악산 구경을 갔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우리 나라 산천이 이렇게 신선할 수가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 아름다운 뫼 경치는 나에게 딴 누리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한씨가 갖고 온 카메라의 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조그마한 네모 공간 속에 잡힌 자연 풍경은 내 가슴속에 잡혀진 영상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자동 노출기가 달려 있어 바늘이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카메라가 편리하게 발전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장난 삼아 한 컷을 찍어 보았다. 그 뒤 한민교 씨로부터 내가 찍은 사진을 몇 장 받았다. 내가 찍은 것도 천연색으로 아주 잘 나왔다. 피사체인 자연 풍경이 좋았고, 카메라가 좋았으니 초심자라고 해서 좋게 안 나올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천연색 사진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뒤 나는 값싼 독일제 35밀리 카메라를 하나 사서 들고 다니면서 그야 말로 애들처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점점 재미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는 성능이 좀 좋은 일제 니콘 카메라를 사 들고 본격적인 사진 촬영에 나서기로 했다. 어디선가 촬영 대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면 나도 참가하여 젊은이들 속에 끼여들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젊은 아가씨 앞에서, 젊은 사진가들이 앉아서 찍으면 나도 앉아서 찍고, 그들이 누워서 찍으면 나도 누워서 찍었다. 마치 원숭이처럼 그들의 흉내를 냈다. 이렇게 하여 사진의 구도 잡는 법과 작품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책없는 늙은이란 소리를 듣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훨씬 뒤에 해 보았을 뿐, 그 당시는 남의 눈길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늦바람이 무섭다던가?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렌즈의 초점으로 집중된 때문일까, 내 온갖 정열이 사진 촬영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니까 나는 일흔두 살 때 사진 부문에 입문을 한 셈이다. 사진 콘테스트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당당히 1등상을 타게 되어, 카메라 한 대를 부상으로 타기도 했다. 물론 나보다 더 우수한 상이 있기는 했지만, 아마추어 영감에게 준 격려의 뜻이 섞인 상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받았다.

카메라의 렌즈 조작이란 것은 사실 눈의 이치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 예술의 감각은 안과적 생리 현상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처음 카메라를 들어 본 초심자인 내 작품이 일주일 동안 미도파 백화점에서 다른 입상자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기회가 닿기만 하면 카메라를 메고 뫼로 들로 바다로 강가로 다니며 촬영에 열중하였다.

나는 그 뒤 국전에도 두 번 입상한 적이 있었다. 1년 6개월만에 [나의 사진]이란 제목의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사진집은 뜻밖에도 사진 작가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사진 잡지 [마이니치 카메라]에 내 사진집이 소개되고, 또 평론이 실려 국내에서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70이 넘은 아마추어 늙은이가 어떻게 1년 반 동안에 이런 작품집을 내놓을 수가 있을까? 나는 많은 사진 작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 나에게 사진 기술을 지도해 주던 사진 작가들은 대부분, 내가 사진을 연거푸 찍어 대는 것은 나쁜 버릇이라고 비난하면서 "공 박사는 돈이 많아서 필름을 낭비하고 있어요."하고 못마땅해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대부분 작가들이 한 피사체에 대해 한 컷 아니면 두서너 컷 찍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네거티브 필름'을 쓰는 분이 대다수였다. 나는 '포지티브 필름'을 가지고 한 피사체에 대해 많은 필름을 소비하는 데서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만에 사진 작가들에게 자극을 줄 만한 사진집을 공개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사진집을 만들어 낸 작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오규환 선생과 같이 칼라 슬라이드 클럽(CSC)을 창설했다. 오 선생을 회장으로 모시고 나는 뒤에서 후원만 했다. 당시 사진작가들은 35mm보다 큰 사진기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35mm보다 큰 사진기를 써 본 일이 없었다.

그 무렵 홍도, 백도, 울릉도와 같은 기암절벽을 찍는 작가는 보기 힘들었다. 유람선을 타고 움직이는 배 위에서 찍지 못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큰 사진기를 삼각대로 버티고 찍은 사진들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움직이는 배 위에서 속사로 기암절벽을 어디서나 모든 부분을 찍어 백도, 홍도, 울릉도 등, 세 가지의 사진집을 최초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또한 나는 외국의 많은 사진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만 우리 나라 사진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 생각을 사진 교육가들 에게 권했다.

나는 미국 나성에서 크게 성공한 황진태 씨가 정성껏 만들어 준 칼라 프린터로 사진전을 열기도 하였다. 서울과 광주에서도 내 사진전은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진 전문가들도 찍지 못한 서귀포 앞바다, 홍도, 백도, 울릉도 등의 기막힌 절경을 배 위에서 자유자재로 찍어 새로운 사진을 많이 누리에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사진으로 누린 표현의 자유

나는 카메라 여행에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때 이미 공 안과 병원을 내 둘째 아들에게 떠맡긴 때였으니 나는 더욱 홀가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팔도강산을 방랑하면서 산수의 경치를 카메라에 담기도 하였고, 제주도나 홍도 같은 절경의 바다나 섬에 가서 촬영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어촌 풍경과 어민들의 고된 생활 표정을 찍기도 하였고,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 속의 한민족의 냄새를 캐내기도 하였다. 나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재조명할 수 있었고,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첩을 만들려고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이것이 바로 나를 키워 주고 살게 해 준 아늑한 조국의 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권위 있는 동아 사진 콘테스트에 출품하기 위해 나는 용산 과일 시장 거리의 더러운 장면들을 흑백으로 찍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발성을 띤 사진이었다. 더러운 환경의 시장 안에서 과일과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거기서 여러 컷을 찍었다. 비위생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고발 사진들을 동아 사진 콘테스트에 출품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지도를 잘 해 주던 류재정 선생과 오규환 선생은 고발성을 띤 사진 촬영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면서 출품을 극구 반대하는 것이었다.

시민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더러운 환경을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 고발성을 띠게 되어 오히려 군사 독재의 집권자에게도 시정의 자료가 되겠건만, 도리어 촬영자의 사상을 의심받게 된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고발 사진을 공개할 자유도 없다는 말에 나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산에 가서 고생을 할 결심을 하고 내 고집대로 준비하여 출품하였다.

동아일보에 이번 작품들의 심사평이 나왔다. 읽어보니, 공개를 할 수 없는 좋은 고발성 사진들이 있었는데, 부득이 입선에서 제외된 것은 유감이라는 뜻으로 쓴 구절이 있었다. 이 글 때문에 주최측에서 그런 사진을 입상을 시켜 공개한다면, 내 사진 선생들이 경고했듯이 촬영자는 물론, 공개하는 주최측도 남산에 불리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공개할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일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무지한 군사 독재 정권이라고 한탄한 나머지, 다시 풍경 사진 촬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때는 정말로 언론 자유가 털끝만큼도 없었던 시절이다.

하루는 서린동 내 집에서 무교동 네거리로 나가, 해돋이 사진을 찍으려고 삼발이를 세워 놓고 해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쑥 낯선 젊은이가 오더니 대뜸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오, 여기서 뭣하는 거요?" 하고 불심검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보면 모릅니까? 사진을 찍으려는 게 아니오. 나는 저기 보이는 공 안과 병원의 원장인데, 해뜨는 광경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말하니, 그 기관원이란 친구는

"아이구 죄송합니다. 사실은 어떤 시민이 수상한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는 고발 전화를 받고 나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아마 간첩으로 오인한 어떤 시민의 고발이 저지른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 얼빠진 간첩이 사진 삼각대를 거리에 뻗쳐 놓고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는단 말인가? 그래 나는

"여보 나니까 관계없지만, 만일 이 옆에 와서 유숙하고 있는 일본 관광객이 나와서 사진을 찍을 때 이런 경솔한 검문을 하였다면, 우리 나라 망신이 아니오. 앞으로는 좀더 조심스럽게 두고 살펴본 후에 정말 의심이 가는 증거를 잡으면 그 때 검문을 하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반공 교육이 잘 되어 있는 것도 좋지만, 우리 나라는 경솔하고 몰상식한 공무원들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경찰 국가가 되어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수없이 있었다. 가끔 이런 일 때문에 모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표현의 자유에 위협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설악산 한계령 고개로 가다가 망월대 휴게소에서 점심을 주문해 놓고, 그 집 옆에 만발해 있는 배꽃이 하도 아름다워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순경이 달려오더니

"당신 누구요? 이름이 뭐요? 관광지에서 늙은 영감이 배꽃을 찍고 있는데, 아니 당신이 누군데 어디서 왔나?"

하고 불심검문을 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불심검문에 기가 막혔다.

"그것은 왜 묻소?"

하고 노엽게 큰 소리로 반문을 하니까 대답도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 일도 있었다.

또 한 번은 중앙 대학 사진과의 한정식 교수와 함께 양평을 거쳐 설악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새벽길을 떠나, 양평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주문한 뒤, 그 동안에 양평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나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형사 둘이 나타났다.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는 사람이며 등등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무슨 혐의가 있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오?"

하고 나는 까닭 없이 심문하는 그들에게 대들었다. 우리가 타고 간 자동차가 서울 차라는 것을 보고도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묻는 것이 괘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와 순경과 말싸움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한 교수는 두 순경을 끌고 좀 먼 거리에 가서 무엇이라도 타이르니까 아무 말 없이 가고 말았다. 나중에 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수상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고발 전화를 경찰서에서 받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이야기했다.

"아무리 고발 전화를 받고 나왔더라도 신중히 살펴본 뒤에, 검문을 할 만한 혐의가 있을 때 검문하는 것이 옳지, 대뜸 나는 경찰서원입니다 하면서 심문을 하는 것은 경찰의 월권 행위라고, 이를 경찰이 깨닫도록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내가 대드는데, 한 교수가 경찰을 저쪽으로 데리고 가는 바람에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다음부터는 검문하는 순경에게 먼저 우리에게 어떤 혐의가 있다는 증거가 있어서 검문하는 것인가? 하고 따져야만, 우리의 소중한 인권을 보호받게 된다."

아름다운 단풍을 촬영하기 위해 내장사에 갔을 때도 정읍 입구에 검문소가 있어 일일이 어디서 왔느냐고 검문하는 것이었다. 하도 화가 나서

"아니 단풍 구경온 사람에게 무슨 혐의가 있어서 조사하는 것이오? 아무 혐의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 조사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경찰국장이오? 경찰서장이오?"

하고 따졌다. 그러자 순경이 내 물음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자, 뒷자리에 타고 있던 내 아우가 우리는 서울에서 단풍 구경을 왔다고 말하니까 가라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고 갔을 때 일이다. 감이 아주 잘 익은 가을철이었다. 헐벗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감이 아름다워 몇 컷을 찍고서 자동차로 돌아오니, 한 순경이 내 차 운전사의 면허증을 빼앗아 들고 심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이나 이 자동차에 무슨 혐의가 있어 조사를 하는 거요?" 하고 따졌더니, 어물거리면서 면허증을 주고 가 버렸다. 아무 잘못도 혐의도 없는데 마구 조사를 하는 월권 행위를 하는 걸 보면, 이들은 약한 사람에게는 곧잘 으름장을 놓으며 텃세를 부리는 듯 했다.

나는 2차 대전쟁을 치르던 일제 치하에서 사냥총을 가지고 시골로 마구 돌아다녀도 일본 순경에게 검문을 당해 본 일이 전혀 없었고, 내 사냥총을 경찰서에 보관시킨 일도 없었다. 평화 시대인 지금에 아무 혐의도 없이 툭 하면 경찰의 월권 행위를 당할 때마다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그들이 혐의도 없이 마구 검문하고 으르렁거리는 분위기가 경찰 국가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군사 독재자들은 제 나라 사람에게 사냥총 허가를 해 주고도, 믿지를 못해 낮에는 사냥을 하게 하고, 밤에는 경찰서에 보관을 하게 하고 있다. 나는 일반 국민이 부당하게 경찰의 행패를 당해도 언제나 굽실대며 쩔쩔매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경찰의 무례한 월권 행위에 대해서는 따져서 부당한 것임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인권을 찾을 줄 알게 되어야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새 '사진 작가'라고 불리게 되고

나는 자연을 좋아해서 많은 자연 풍경을 찍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달을 좋아했다. 그래서 달을 아주 많이 찍었다. 자연의 조화에 매혹되어 하늘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시시각각으로 찍었다. 하늘에 깔려 있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갖가지 변화를 사진으로 담는 것도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해가 뜰 때의 장엄한 모습을 보며 찍을 때의 내 심성은 나에게 겸허한 마음이 일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기 하나 제대로 조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어떤 신비한 장면까지도 포착하는 마음과 눈을 갖게 된 경지에 이른 듯한 생각이 들어 기뻤다.

나는 이렇게 해서 얻은 수많은 사진을 모아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삼화 인쇄소에 사진 인쇄를 맡겼다. 그러다가 나중에 광명 인쇄 공사로 바꾸었는데 삼화보다도 못한 사진 인쇄가 되고 말았다. 왜 이 꼴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사진 인쇄기에 중요한 색깔 분해기가 나빠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광명 인쇄 공사는 중역 회의를 열어 최신 컴퓨터 색분해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두 사원을 유럽으로 출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 뒤 나는 광명 인쇄 공사에 내 사진집 주문을 했다. 그러나 거절을 당했다. 새로 주문한 색분해기가 들어와야만 주문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 거의 1년이 지나갔다. 영국에서 최신식 색분해기가 들어왔다면서, 사진집 주문을 원하기에 내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을 주문했다. 만들어진 사진집은 삼화 인쇄에서 만든 사진집보다도 훌륭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두 인쇄소에 경쟁을 시킴으로써 우리 나라 칼라 인쇄에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내 작품집과 사진 전시회는 곧 한국 천연색 사진 인쇄를 혁신시키는 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사진 잡지의 인쇄 개선에도 다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월간 [사진] 사의 황성옥 사장님은, 1979년 월간 [사진] 5월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 을 발표한 뒤, 동 잡지의 인쇄 개선에 노력한 결과 최근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지난 3월 하순에 공 박사의 [물]이라는 사진집 한 권을 기증 받았다. 이 사진집은 공 박사가 벌써 다섯 번째 내놓은 책자로서, 내용은 물을 주제로 엮은 칼라 사진 48점을 사륙판 크기로 꾸민 것인데, 인쇄가 기막히게 선명 하고 내용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사진이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중략) 이 [물]의 인쇄는 우리 나라 인쇄계에 여러 가지 자극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월간 [사진]도 인쇄 수준을 [물]의 인쇄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자책과 결의를 굳게 했으며, 동시에 지금까지는 인쇄 과정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것을 소홀히 다루어 왔던 것을 깊이 뉘우치고 후회한 바 있다. … …"(1981. 1. 2. 월간 [사진])

이러한 솔직한 고백을 독자들에게 공개한 황 사장님은 그 뒤 사진 인쇄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나라의 사진 잡지도 외국에서 나오는 사진 잡지에 비하여 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될 것이 기대된다.

나는 슬라이드 필름을 인쇄해 가지고 전시회를 열어 보려고 국내와 일본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제 빛깔이 나오질 않았다. 미국에 가서 수많은 사진 회사에서 인쇄를 시도해 보았지만, 코닥 회사만이 제 빛깔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때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막내아우 병효한테서 연락이 왔다. 황태규 씨라는, 사진 현상과 인쇄를 연구하는 유명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이 많은 내가 사진을 시작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극진한 찬사와 아울러 점심 대접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힘껏 노력해 보겠다면서 내 슬라이드를 60매 가량 손수 골라 놓았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곧 인쇄를 해 한국에 보내 왔다. 코닥 회사에서 뽑은 것보다 더 훌륭한 인쇄였다. 나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씨와 공동 작품으로 공개하겠다고 전화로 승낙을 요청했다. 내가 혼자 만든 작품이라고 공개하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황 선생과의 공동 작품으로 공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씨는 사진 작품은 어디까지가 촬영자 자신의 것이라면서 굳이 사양했다.

내 사진 전시회 초대장에는 훌륭한 사진가 황씨를 소개하였다. 사진 현상 기술이 크게 작용한 사진 작품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 사진 전시회는 연일 큰 성황을 이루었다. 광주에서 개최되었을 때는 서울보다도 더욱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 때 나는 광주의 사진 문화 수준도 아주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나는 슬라이드 클럽을 오규환 선생과 같이 창설했다. 지금도 그 클럽은 매달 모여 사진 발전을 의논하고 가끔 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나는 고급 카메라를 쓰는 것도 아니다. 남들이 쓰고 있는 평범한 카메라를 갖고 있을 뿐이다. 굳이 색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한순간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필름을 아낌없이 쓴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내가 1980년에 미국에 가 살고 있을 때 내 사진 슬라이드를 사겠다는 캘린더 제작 회사의 요청이 있었다는 연락을 사무장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뿌리깊은 나무'사가 내 필름을 사서 [한국의 발견]이라는 훌륭한 책에 적절히 활용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는 어느덧 사진 작가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였고, 사진을 사겠다는 출판사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진에 미치다 보니 내가 어느새 이렇게 변신한 것도 모르고, 나는 미국에서 한글 전용 운동과 한글 전산화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제 10 장 미국 땅에 옮겨 차린 연구실

광주 사건과 병든 미국

한글 기계화를 위한 내 노력은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사 독재자의 군화에 완전히 짓눌려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한글 기계화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한글 기계화를 위해서 싸우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 발표하지 않은 사진이 있어서 새로운 사진첩 발간을 해야겠다고 한창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난데없이 광주 사건이 터졌다. 너무나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두환 일파들이 끝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구나 하고 집안에서 나는 울분을 참고 있었다. 신문에는 광주 사건에 관해 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입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소문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 사태가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마구 총칼로 찌르고, 심지어는 어린 소년을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이고, 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내기까지 했다는 믿어지지 않은 소문들이 유언비어인지 진짜인지 분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시각각으로 내 귀에 들려 왔다.

내가 평소 광주를 문화와 예술을 숭상할 줄 아는 예항으로 여겨 왔던 탓인지는 몰라도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니까 광주 사람들의 수난이 더없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국민이 겪을 시련을 광주 시민이 도맡아 겪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아는 광주 사람들은 문화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곳의 교양 있는 집에서는 처녀가 시집갈 때 고급 양복장이나 냉장고를 가지고 가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유품이나, 서화, 골동품 같은 것을 갖고 가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터였다. 한 번은 내가 만든 한영 타자기를 사간 전라도 여인이 있었는데, 한참 뒤에 또 광주에서 왔다는 한 여인이 한영 타자기를 구입하러 왔다. 외국에 가 있는 남편에게 글월을 써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이 두 여인의 행적으로 보아, 시집갈 때 가지고 갈 예장에 한영 타자기쯤은 포함시킬 사람 같기만 했다.

광주 시민들이 단결하여 군사 독재를 몰아내자고 광주 사건을 일으킨 것은 민주적인 시민 의식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일제 때 광주 학생 사건이 바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듯 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내 개인 사진 전시회를 광주에서 가진 바 있다. 사진에 대한 관심도도 서울보다 광주가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시장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같이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도시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연거푸 일어나고 있으니 나는 후들후들 떨리기만 했다.

전두환 일당들의 잔인 무도한 만행이 더욱 국민들의 화를 일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전두환은 며칠 사이에 별을 자꾸 달아 대장이 되더니,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자작 등극을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어 취임하였다. 그런데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앉기가 무섭게 광주의 피비린내가 아직 몸에 배어 있는 전두환을 첫 손님으로 맞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야만 할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내막이 궁금하기만 했다. 이것이 어찌 인도주의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할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과거 40년 동안 가슴속에 한이 맺힌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의문점도 속시원하게 알고 싶었다. 즉 남북이 갈라져, 부모 형제들의 혈육도 서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 이 비극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를 꼭 알고 싶었다.

내가 1980년에 미국에 사는 딸들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가게 된 동기는 이 두 가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광주 시민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 가슴에 한을 품고 죽을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하니 딸들과 사위들이 마중 나왔다. 내 마음도 모르고 딸들은 모처럼 미국까지 왔으니 유럽 관광이라도 한 번 하라고 성화였다. 너무나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나는 떠밀리다시피 해서 미국에 며칠 머문 뒤, 곧바로 유럽 관광을 떠났다. 그 무렵 중단할 뻔한 카메라 여행을 다시 하게 된 셈이다. 아내는 전에 유럽에 다녀온 적이 있어 딸 집에서 쉬어야겠다며 사양하는 바람에 결국 나 혼자서 난생 처음의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막내 사위 장 폴의 안내를 받아 가며, 수려한 자연 속에서 삶을 즐기고 있는 스위스와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이같은 여행 속에서 우리 나라의 각박한 삶의 현장이 자꾸 대조되면서 '언제 우리 나라도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인가?' 하고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낯선 풍물들과 아름다운 이국 풍경을 많이 찍었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광주 항쟁의 피울음 섞인 아우성이 내 머리 속에 들리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열흘만에 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나는 미국의 안팎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30년 전의 미국이 아니었다. 30년 전에 내 눈에 비친 미국은 지상 낙원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 보니 미국은 크게 병들어 있었다. 낙원은커녕 지옥을 연상하는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그렇게도 깨끗하던 길거리는 온통 쓰레기로 뒤범벅이 되다시피 했다. 권총을 차고 장사를 하는 모습도 가관이었지만, 그 낭만적이던 유명한 뉴욕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것이 아니라 숫제 눈뜬 채로 코 잘라 가는 무시무시한 우범지대로 바뀌어 있었다. 전에 미국에 머물렀을 때는 밤 11시 이후라도 혼자 지하철을 타고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대낮에도 카메라를 품안에 숨겨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택시를 타 보았다. 손님을 일단은 강도 혐의자로 보게 되었음인지 운전사 자리와 손님 자리를 방탄 유리로 칸막이해 놓고 있었다. 30년 전에는 은행 잔고가 수백 달러 부족한 채로 수표를 끊어도 은행에서 일단 지불을 해 주고 나서 입금을 요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 1달러가 부족해도 부도를 내고 벌금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전에는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미술관에 들어가 혼자 방방을 돌아다녀도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지금은 감시인이 방마다 있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큰 도시에서는 대낮에도 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에서 이민 온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상당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미국이 그 동안 도덕적으로 타락한 나라가 되었구나 싶었다. 젊은이들은 폭력과 섹스의 숲에서 마약을 즐기며 쾌락주의로 달려가는 일련의 분위기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미국의 부도덕한 면이 여기저기서 노출되어 있음을 보고, 나는 제 나라 걱정도 산더미 같은데 남의 나라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는 바야흐로 컴퓨터 시대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미국을 보니 미국은 확실히 과학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나라가 분명했다. 여러 분야에서 발전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야말로 컴퓨터 시대를 구가하고 있음이 확연했다. 미국에서 서울로 국제 전화를 하는데도, 다이얼만 돌리면 통화할 수 있는 편리한 누리가 되어 있었다. 은행에 가면 밤이고 낮이고, 은행원이 없어도 전자 기계 앞에서 입금도 시키고 현금도 찾을 수 있었다. 나처럼 영어가 짧은 사람에게는 교환수나 은행원 앞에서 서툰 영어를 쓰지 않고도 쉽게 일을 볼 수 있게 누리가 바뀌었으니, 최첨단 전자 시대라는 게 실감났다.

사무실의 계산기도, 식료품 가게의 금전 등록기도, 온통 컴퓨터화되어 있었다. 전자 제품들이 일반 대중용으로 산더미처럼 시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타자기들도 전동에서 전자 타자기로 바뀌어 있었다. 전자 타자기의 뚜껑을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니 복잡한 기계 부품은 하나도 안 보이고, 텅 빈 공간에 캐러멜만한 칩이 겨우 한두 개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간편하게 된 전자 타자기를 미국에서 보게 되니 그 동안 아주 체념해 버린 줄 알았던 한글 기계화에 대한 내 열정이 또다시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을 떠나올 때 내가 알고자 했던 의문을 풀기 전에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만행을 저지른 군사 독재자 전두환을 미국이 환영했을까? 우리 나라가 40년 동안이나 남북으로 갈라져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 비극은 도대체 누구의 탓일까?'

가슴에 먹구름처럼 깔린 의문을 풀어헤쳐 보기 위해 내 나름대로 전문가를 만나기도 하고, 관계 자료를 읽기도 하였다. 이러는 동안 어렴풋이나마 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 민중에게 민주주의를 심어 주고 키워 주는 유모 노릇을 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자기네들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군사 독재자들에게 먼저 젖을 물려주며 키워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바람에 반체제 인사들은 감옥에 갇히고, 민주화 운동 인사들은 시달림을 받게 되고,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학살당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마무리 단계에서 미국의 제안으로 우리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통일 문제는 우방국이라는 허울좋은 강대국의 입김에 좌우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 나라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3개월만에 귀국하려던 예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한 고국의 정국을 주시하면서 나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잡았다. 나는 한국의 군사 독재자들을 옹호해 주고 있는 미국 당국에 회의를 느끼면서 미국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군사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고, 또 하나는 컴퓨터 시대에 걸맞은 한글 기계화 운동이었다. 나는 민주화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언론인, 지식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내가 할 수 있는 지원을 틈틈이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컴퓨터 시대로 바뀌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피부로 느끼면서 한글 기계의 전자화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전자 제품들이 호기심에 찬 내 눈에 흥미롭게 비치기 시작하였다. 철제품의 비싼 계산기들도 아주 간편한 소형 전자 계산기로 상품화되어 있었고, 저울도 숫자가 표시되는 디지털 모습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애들 장난감마저도 전자화되어, 움직이고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나는 고국의 군사 독재를 돕고 있는 미국 정책을 개탄하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국에 되돌아오는 것을 단념하기로 하였다. 당분간 미국에 있으면서 고국의 민주화 운동에 힘을 보태면서 전자 시대의 한글 기계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돌이켜보면, 사실 군사 독재자들의 악랄한 탄압에 밀려 내 한글 기계화 연구는 본의 아니게 중단되었던 것이다. 정부의 엉터리 표준판 때문에 내 세벌식 기계는 발붙일 곳을 잃게 되었고, 마침내 타자기 제조 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이다. 타자 학원에서조차 세벌식 타자수 양성은 일절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세벌식 타자수의 검정 시험 제도마저 없애 버렸다. 그 때까지 육해공군을 비롯 정부 각 관공서와, 사법부, 그리고 법원이나, 국회 의원 사무실, 은행, 일반 회사, 공공 단체, 문화 기관 등에서 속도를 자랑하며 맹활약했던 1급, 2급의 명타자수들은 물론, 수만 명의 속도 타자수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말았다.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컴퓨터 시대를 만드느라고 여념이 없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엉터리 타자기를 표준으로 정하여 과학적인 세벌식 타자기를 말살하는 만행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글 기계화 연구를 계속하여, 정부 표준판으로는 개발할 수 없는 한영 겸용 타자기를 만들어 냈었다. "한 개의 타자기로 두 나라 글을 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획기적 발명"이라고 과분한 칭찬을 한 서울 대학의 김우기 교수의 글이 [여성동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 독재자들은 내가 만든 한영 타자기가 정부의 표준판과 다르다는 까닭으로 판매의 길을 가로막았다. 이런 수모를 받으면서도 나는 "정부의 표준판으로는 결코 한영 타자기를 개발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결국 나는 이같은 과학적인 신념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중앙정보부까지 끌려 다녔던 것이다.

침실이자 응접실이자 식당인 연구실

내가 이제 컴퓨터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미국에 와서 그 동안 밀린 한글 기계화 연구의 의욕을 되살리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딸들이 살고 있는 곳도 아닌 뉴욕을 내 연구 활동의 주 무대로 삼았다. 나는 맨해튼 중심가에 조그마한 콘도미니엄 하나를 구해 연구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이름이 콘도지 조그마한 부엌과 목욕실이 붙은 단칸방의 내실만 있는 집이었다. 응접실도 식당도 따로 없으니 손님이 와도 침실에서 맞아야 했고, 식사도 침실에서 해야 할 판이었다. 이름이 좋아 '공병우 한글 기계화 연구소'이지, 실상은 침실에 각종 기재들을 빡빡하게 들여다 놓은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 비좁고 어수선한 곳에서 각종 일들을 많이 해낼 수 있었다. 뉴욕은 컴퓨터 시대를 전망하기에 알맞은 중심지였고, 각종 사무 기계의 정보를 수합하는데도 센터가 될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저 내가 쓸 봉투부터 인쇄하였다. 한글 기계 연구를 하려면 간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정보를 수합할 수 있도록 분명한 연구 기관의 이름과 주소를 관계 인사들에게 우편을 통해 알리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처음 착수한 것은 사진 식자기 연구였다. 박모 씨를 시켜 내 설계대로 사진 식자기를 만들어 보려고 했으나, 첫 번에 실패를 하고 말았다. 서울을 떠나올 때 월간 [사진]사 황성옥 사장과 월간 [디자인]의 이영혜 사장이 사진 식자기를 서둘러 개발하여 달라는 청탁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한국 일보사에서 내 설계로 개발한 사진 식자기(186쪽 참조)를 다른 경쟁 신문사에는 보급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나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다른 여러 신문사들을 위하여 사진 식자기 연구에 열을 올렸다. 이번에는 미국의 전문 회사에 내 설계로 주고 만들게 하였다.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쓰도록 한글 자모를 여섯벌식으로 해서 글자 모양도 맵시 있게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인쇄 출판의 전문가란 사람들은 인쇄체 글씨에만 길들여져 있는 탓으로 내가 만든 식자기의 글씨꼴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했다. 간단한 조작으로 글자를 조합시켜 한 글자를 만드는 것이니 일본에서 완성형 글자로 만든 모리자와나 샤켄 회사의 글씨체처럼 정밀하고 예쁜 글씨가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숱한 고생 끝에 사진 식자기를 개발해 내놓아도, 관계자들은 글씨꼴 타령만 하니, 할 수 없이 시험품으로 나온 필름만 대여섯 벌 만들어 이 방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몇몇 인사에게 보내고 손을 떼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에서는 발명을 해 놓고도 정부 표준판이 아니라는 까닭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이른바 2단 공병우 한영 타자기(영어의 대문자와 한글을 찍을 수 있는 타자기)를 서울에 있는 경방 타자기 회사에 제조를 의뢰하여 미국에서 수입하여 교포 사회에 보급을 시도하였다. 이 일은 한국에서 송현 씨가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의 대표로 일하면서 담당했다. 한영 타자기는 속도도 빠르고 신기하게 영문도 함께 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교포 사회에서는 씨가 잘 먹혔다.

그러나 한글만 주로 쓰는 교회당 같은 데서는 한글의 글씨 모양을 조금 더 예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청탁이 들어왔다. 나는 타자기는 인쇄 활자하고 달라서 읽어볼 수 있을 정도로만 글자가 나오면 되고, 속도가 빠른 것이 타자기의 생명이라고 말해 왔었지만, 이번만은 하도 글씨 모양 타령들을 하고 있으니 예쁜 글씨체의 타자기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연구한 끝에 이른바 '공병우 체제 한글 타자기'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미국의 스미스 코로나 회사에서 만든 타자기에서 예쁜 한글이 찍혀 나오도록 제작을 하였더니 이것도 인기 품목이 되어 미국내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북한 유엔 대표부에서도 8대를 주문하여 4대는 북한으로 보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수개월 전에 기증했던 2단 한영 타자기는 글씨 모양이 좋지 않아 받기를 사양하겠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역시 그들도 글씨 모양에 얽매여 글자살이를 하는 듯 했다.

그 동안 내 뉴욕 생활을 줄곧 뒷바라지해 왔던 아내는, 내가 또 다시 한글 기계화에 전념하기 시작하자, 체미 6개월로 접어들던 달에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이 귀국 이유이긴 하지만, 아마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면도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내가 비좁은 방에서 연구를 한답시고 밥상 치우기가 무섭게 기계를 벌여 놓는가 하면, 대장간처럼 별의별 기구와 서류들이 흩어져 있는 어수선한 방에 손님들을 마구 불러 들이니, 이 뒷치닥거리하기가 70이 넘은 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을 것이며 답답한 하루하루였을 것이다. 손님 가운데에는 "이런 누추한 방은 처음 본다"고 솔직히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내가 귀국한 뒤부터 혼자서 자취 생활을 하니 좁은 방은 더욱 지저분해지고 난장판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손님에게 부끄러움을 탈 정신적 여유도 없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을 맞아들여 새로운 과학 정보를 듣고 배우고 익히면서 뉴욕의 연구 생활은 무난히 버티어 나가게 되었다. 뉴욕에는 고국에서 오는 신문을 복사해서 보급하는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있을 뿐이었고, 뉴욕에서 발간하는 교포 신문은 소규모의 한미신보와 하 사장이 발행하는 대한일보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2년 뒤 내가 필라델피아에 내려간 뒤에는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이 뉴욕 판을 발행하였고, 미주 매일신문, 세계신보, 일간뉴욕 등의 교포 신문이 이후 죽순처럼 생겨 풍성한 교포 언론계가 형성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컴퓨터 식자기로 지반을 굳힌 한국일보사를 빼놓고는 한결같이 적자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 대부분의 신문사들은 값싸고 간편한 한글 식자기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내의 큰 신문사들은 다투어 제작 과정의 컴퓨터화를 꾀한답시고, 30여 만 달러나 되는 큰 돈을 주어야 살 수 있는 일본 회사의 식자기를 덮어놓고 주문 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유행 바람을 타고 그 비싼 기계를 사기만 해 놓고 썩히고 있기도 했다. 어떤 방식의 것이 바람직한지 몰라 일본 장사꾼들에 놀아나 외화만 낭비하는 듯이 보였다.

더욱이 컴퓨터 숲속에 있는 우리 교포 신문들은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일본 모리자와 회사에서 개발한 백여 개의 글쇠를 눌러야 하는 복잡하고 비싼 사진 식자기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2천여 자의 한글의 원도를 필름에 담아 놓고 그 글자를 찾아가 키를 누르면 글자가 사진 찍혀 식자가 되는 비합리적인 방식의 기계이다. 2천여 자의 글을 일일이 찾으면서 타자해야 하는 방식이니 얼마나 속도가 느린가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 손으로 일일이 원시적으로 채자하던 방식보다는 한결 쉽다는 생각에서 이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듯 하였다. 어쨌든간에 한국일보의(서울 본사는 그 당시 한문자가 없어 쓰지 않고 있었음) 미국 지사만은 모두 세벌식 글자판으로 한글만을 찍을 수 있는 과학적인 ITEK 사진 식자기로 각 도시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인쇄 혁명 일으킬 한글 식자기 연구

나는 사실 컴퓨터 시스템의 식자기 개발은 곧 우리 나라의 문화 혁명을 뜻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에서 약 30만 달러 정도 주고 사는 비싼 식자기보다 약 2, 3만 달러 정도면 살 수 있는 값싸고 실용적인 식자기를 개발해야겠다고 별렀다.

나는 오래 전에 서울에 있을 때, 전자식 한글 모노타이프를 개발한 적이 있었다. 컴퓨터식으로 간편하게 글쇠를 누르면 글자의 완성된 자모가 튀어 나와 납물로 조판을 하게 되는 기계를 제작했던 것이다. 모리자와 기계처럼 2천여 개의 글자를 찾아다니면서 타자하는 이른바 일본식 공판 타자기식이 아니고, 영문 타자기처럼 빠른 속도로 찍되 활자는 신문에서 쓰고 있는 글씨체의 자모를 컴퓨터가 찾아내어 식자를 하는, 그야말로 속도 빠른 최신식 인쇄용 식자 문선을 겸한 연판(납으로 겔라를 만들어 주는) 기계였다.

일본의 고이께 회사는 내가 만든 설계로 시제품까지 제작하여 실험까지 한 일이 있었다. 세벌식 타자기를 치듯 빠른 속도로 타이핑만 하면 컴퓨터가 완성형 글자를 찾아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글씨는 신문사에서 쓰고 있는 어떠한 자형으로도 만들 수 있었으니 소원대로 예쁜 글자는 얻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 기계에는 한문 글자가 안 들어 있는데다가 제작비용이 5만 달러라 너무 비싸다는 트집을 부려 이 최신식 개발품도 언론계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실용 단계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무산되고 만 셈이다. 아닌게아니라, 이 기계를 구입해 쓰려고 한다면 2, 30만 달러는 너끈히 들 것이었으니 비싸다는 투정도 부릴 만 한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활자로 조판하는 방식에서 사진 식자기 방식의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도 모노타이프 개발의 경험을 사진 식자기에 활용하여 누구나 싼 값으로 손쉽게 사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1978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정부의 표준 자판에 대해 투쟁을 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내가 지쳐 있을 무렵이었다. 뜻밖에 젊은 손님이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공 박사가 개발한 모노타이프가 있다는 소리를 일본의 고이께 제작 회사에 찾아갔을 때 듣고 왔습니다."

면서 그 원리를 자기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까닭을 물으니, 그 원리를 컴퓨터에 활용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처음에는 미국의 컴퓨터 회사를 찾아 다녀 보기도 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 계통의 회사를 찾아 전전하면서 영어 식자기처럼 빠른 속도로 한글을 식자할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고 타진해 보았다는 것이다. 모리자와나 샤켄 회사에서 개발한 수천 개의 글자 필름판을 일일이 찾아서 셔터를 누르는 이른바 공판 타자식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것이어서, 속도가 빠른 영어 식자기 같은 한글 식자기의 제작 가능성을 찾아 그 동안 국제적으로 헤매 다녔다는 것이었다.

이 젊은이의 행적은 반갑다 못해 놀랍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한국 일보의 사주였던 장기영 씨의 둘째 아들 장재구 씨였다. 나중에 그는 한국 일보 본사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장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일보 지사장을 하고 있었다. 장 사장은 자전거 속도 같은 모리자와 식자기보다는 비행기 속도 같은 구미식 식자기의 개발을 모색하느라고, 처음에는 미국에서 개발해 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가능성을 찾던 중, 고이께 회사에서 내가 만든 전자식 모노타이프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에게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노타이프는 내가 정말 힘들여 만들어만 놓았을 뿐 이 엄청난 개발에 대해 당시 국내 신문사들은 한자가 안 나온다는 그 한 가지 까닭으로 신문 기사감도 별로 안 될 정도의 것으로 취급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기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젊은 신문 경영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과연 미국에서 공부한 젊은 경영자의 머리가 다르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그이의 머리 쓰는 방향이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다. 내 개발품에 대해 언론계에서 누구 하나 관심 갖는 사람조차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관심을 갖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가 있으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이 기계를 개발할 때 참여했던 이윤온 씨와 김성익 씨를 불러, 다른 연구를 위하여 해체하였던 부품들을 5일 동안의 시간을 두고 재조립하여, 장 사장에게 실험을 하면서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장 사장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이때 기계 부분 연구는 이윤온 씨가 맡고, 컴퓨터 부분은 김성익 씨가 했는데, 장 사장님은 김성익 씨, 김창만 씨, 오동호 씨 등 세 사람을 특별 채용하여 연구를 추진하였다. 나중에 보니, 내가 설계한 원리에 의해 드디어 세벌식 사진 식자기를 한국일보사에서 세벌식 자판으로 개발해 낸 것이다.

말하자면 내 것은, 세벌식 원리로 해서 구멍 뚫린(펀치) 테이프를 만든 다음 이에 의해 납물을 부어 납판을 만드는 핫(hot) 시스템이었지만, 그의 것은 테이프에 펀치가 찍힌 다음 사진 필름을 만들어 내는 이른바 쿨(cool) 시스템이었다. 정말 장하게 여겨졌다. 한국일보사가 이렇게 해서 만든 사진 식자 방식으로 혁명적인 신문 제작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울에 있는 한국일보 본사에서는 이 경이적인 컴퓨터의 출현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자체 광고가 연일 나왔다.

"한국에서는 본사가 최초로 채자, 식자, 문선 과정을 컴퓨터로 해낼 수 있도록 혁명적인 기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는 내용이었다. 내 소원대로 신문사에서 한글 기계화가 내 세벌식 원리대로 이루어졌으니 나도 박수갈채를 보내며 기뻐했다. 그런데 신문사에서 내건 사고나 선전 기사에는 단 한 마디도 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자의로 제작 원리를 조건 없이 모두 가르쳐 준 마당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공병우 식의 원리를 그대로 채용해서 개발한 것이란 정도의 도의적인 설명은 있었어야 옳았다. 그것은 내 개인의 권리를 밝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적인 노력을 서로 아껴 주고 보호해 줄 줄 아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간에 이같은 식자기는 다른 여러 신문사에서도 서로 다투어 사용하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나 싶었다. 아닌게아니라, 여러 신문사에서 그 기계를 사도록 알선해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누구나 주문하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알고 보니 경쟁지인 다른 신문사에서는 그 기계를 사기가 힘들다는 소리도 들려 왔다. 나는 이 소문의 사실 여부는 모른다.

그 뒤 나는 여러 신문사의 소원대로 펀치 테이프의 조작 과정도 없이 곧 바로 인화지에 사식되며, 값도 그것보다 10분의 1이하로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컴퓨터 식자기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항공 정밀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필라델피아의 셋째 사위인 강필승 사장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할 때마다 구차스럽게 필라델피아에 사는 강 씨를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내 연구를 위해, 바쁜 그를 수시로 뉴욕으로 오게 하자니 나도 미안스럽고 그도 고달픈 일이었다. 그럴 때 차라리 자기가 경영하는 필라델피아 자이나텍 회사 근방으로 내가 이사를 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내 사진 식자기 개발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뉴욕에서 필라델피아 교외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83년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와서, 곧 1015 THORTON COURT, NORTH WALE, PA에 공병우 글자판 연구소를 개설하였다고 친지들에게 알리고, 한글 기계의 자판 연구와, 사진 식자기 연구 작업을 계속하였다. 사위는 미국인 컴퓨터 전문가 피터 씨를 특별 채용까지 해 내 연구를 도왔다. 나는 피터 씨에게 한글의 원리부터 가르쳤다. 그리고는 내 설계의 원리를 내주었다. 내 사진 식자기 개발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나는 1985 년에 한글 사진 식자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뜻한 바대로 일본 것에 비해 10분의 1의 싼 값으로 신문사에 공급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제품이 드디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신문 경영인들이 찾아왔다. 이 사진 식자기는 미국의 영문 신문사들이 쓰고 있는 각종 편집 기능까지 갖춘 최신 사진 식자기이다. 신문인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전히 글자 모양만 따지는 사람도 있었고, 한자가 없다고 타박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신문 활자로 그만하면 쓸 만 하다면서 고성능의 식자 문서 편집 등의 기능을 앞세우고 곧 계약을 하는 이도 있었다. 제1착으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코리언 저널]사에서 먼저 구입했고, 이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월간지 [뉴 라이프]에서도 구입했다. 그 뒤 뉴욕의 [미주 동아일보]에서 1년 동안 쓴 적이 있었고, 현재 필라델피아의 [자유 신문]사가 쓰고 있다. 물론 일반 신문사에서 원하는 대로 한자도 넣을 수도 있고, 글씨 모양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엄청난 낭비에 속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 그런 비경제적인 식자기는 만들지 않은 것뿐이다. 한글 컴퓨터의 기능 극대화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 한자를 몰아내야만 우리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이텍 조직을 이용하여 내 한글 전용 사진 식자기를 만든 것이다.

엉터리 표준 자판 없앤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한국의 우수한 두뇌들이 개발한 컴퓨터의 자판들은 제멋대로였다. 자기 나름대로 연구를 하다 보면 백인 백색의 자판이 나오기 마련이다. 정부에서 지정해 준 표준 자판이 너무나 비과학적이어서 비롯된 현상이었을까. 그것보다도 자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근거로 자판을 고안했느냐고 물으면 대개의 경우 표준판을 무조건 따랐다거나, 그저 나 좋은 대로 정했노라고 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체 공학적인 근거 위에서 자판을 만들었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자판 문제가, 컴퓨터 시대를 여는 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한결같이 말하면서도, 인간 공학적으로 검토해 보거나 연구해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새로 등장하는 컴퓨터계의 과학도들은 제각기 자기 식의 자판을 만들어 내는 경향마저 생겼다. 이런 혼란 사태가 반드시 벌어질 것 같아,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정부 표준판을 공격하면서 글자판 배열을 하루바삐 시정해야 한 다고 투쟁했던 것이다. 정부 표준판으로는 수동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만들 수도 없고, 수동식 타자기와 컴퓨터의 자판 통일도 불가능하다고 이미 오래 전에 예언을 하였었다. 정부의 비과학적인 표준판으로는 도저히 컴퓨터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답답하기만 했다.

1983년 8월 어느 날 송현 씨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다. "1969년 7월 28일에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공포되었던 정부 표준 자판은 1983년 8월 26일자 국무총리 훈령 제21호로 폐지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우리 나라 정부가 이제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도 기다리던 일이었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믿어 온 터였지만, 이국 땅에서 이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앞으로 과학적인 검토를 하여 바람직한 표준 자판이 나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뒤 고국에서 들려 오는 소식은 비관적이었다. 너무나 엉뚱한 잘못을 또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15년 동안 전쟁에 맞먹는 국가적 큰 손실을 내고도 국민에게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이번에는 폐지한 네벌식보다 더 엉터리인 두벌식 글자판을 정부 표준판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진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이 두벌식이란 것은 바로 15년 전에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엉터리 정부 표준판을 공포할 때 텔레타이프용으로 지정된 두벌식 자판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 텔레타이프를 다루는 정부 부서에서 두벌식은 비과학적이라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하급 기관에서 네벌식보다도 더 못한 두벌식은 폐지해야 옳다고 아우성을 친 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일종의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던 문제의 두벌식이다.

1970년에는 통신 업무를 다루는 체신부에서, 1972년에는 효율적인 공문서 체제를 연구하는 행정 개혁 위원회에서, 각각 정부의 표준판 제정에 반기를 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마침내 통신용 두벌식 자판만은 1972년 국무총리실의 지시로 쓰지 못하도록 조치까지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15년만에 표준 자판이란 것을 폐지한다고 해 놓고서는, 옛날에 정부 기관에서도 못 쓰겠다고 내던졌던 바로 그 두벌식을 수동식 기계와 컴퓨터의 표준 자판으로 삼는다니 이게 어디 문명한 사회에 있을 법이나 한 이야기인가? 컴퓨터에서는 두벌식으로 입력을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때만 해도 컴퓨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아마 그런가보다 하고 묵묵부답으로 안타까워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뒷날 컴퓨터 전문가들의 증언으로 컴퓨터에서도 두벌식이 세벌식에 비해 기계 공학적인 무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는 비과학적인 두 가지 자판을 표준판으로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 세상 천지에 수동식 타자기의 표준 자판과 컴퓨터의 표준 자판이 전혀 다르고, 또 치는 방식도 서로 다른 해괴망측한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부는 통일 자판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자판 연구를 어쩌자고 두 번씩이나 번번이 한글 자판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손에 넘겨 얼토당토않은 일을 저지르는 지 알 길이 없다. 타자하는 데 배우기 쉽고, 치기 쉽고, 속도가 빠른 방식이 있다면 어느 개인의 업적이건 어느 연구 단체의 연구이건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 세계의 정석이 아닌가. 어떤 관리는, 나라의 표준판을 제정하는 데 어떻게 개인이 만든 시스템을 그대로 채용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관리가 과학 행정을 좌지우지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잡고 한글 식자기나 한영 전동 타자기 연구에만 열중하려던 나는 또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람직한 정부의 표준판이 나올 수 있을 절호의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만 했다. 전두환 정권이 과거보다 더 무지막지한 일을 저질러 놓은 이같은 실책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세벌식 입력과 세벌식 출력에 관한 연구와 발전을 위해 더욱 열심히 하기로 했다. 내가 계속해서 연구를 하는 동안 사필귀정으로 많은 지성인과 전문 학자와 컴퓨터계의 고급 두뇌들이 내 이론을 깨닫고, 글과 행사를 통해 컴퓨터계의 진로를 세벌식으로 전개해야 된다고 외치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게 되니 반갑기만 했다. 나는 진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신념으로 투쟁을 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연구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쓰기 무른모 개발

미국의 컴퓨터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영어의 글틀(워드프로세서)은 직장, 학원, 언론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활용되었다. 나는 컴퓨터에서 영어처럼 한글도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엉뚱한 꿈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컴퓨터에 대해서 일자 무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치로 봐서 영어가 된다면 과학적인 한글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83년 봄부터 한글 글틀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타자기를 처음 연구할 때처럼 두벌식으로 고안해 보았다. 처음에 시도한 것은 일반 수동식 타자기의 자판에서 받침을 떼어버린 두벌식 자판으로 만들어 검토해 보기로 했다. 이 설계를 곧 당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한 컴퓨터 연구소'에 보내 무른모(소프트웨어) 개발을 의뢰했다. 얼마 뒤 시제품이 나왔다. 나는 직접 검토와 실험을 해 보았다. 만족할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컴퓨터에는 두벌식이 간단히 되고 편리하다는 남들 말만 듣고, 그대로 했더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두 번째 실험으로 나는 자모 배열을 새로 합리적으로 한 두벌식 자판의 무른모를 만들었다. 이를 실험 검토해 보았다. 먼젓번 것보다는 좀 편리하고, 운지법에도 모순이 거의 없었으나, 찍은 글이 화면에서 엉뚱하게 나타나고, 한글의 받침을 단독으로 찍을 수조차 없었다. 일반 한글 타자기를 치던 이들은 치는 방식을 새로 연습해야만 한글을 쓸 수 있는 등 커다란 결점들이 나타났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두벌식 한글 글틀의 개발은 포기하고 세벌식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먼저 애플 컴퓨터 모델Ⅱ에서 한글을 쓸 수 있는 무른모를 '한 컴퓨터 연구소'에 의뢰하여 만들어 써 보았다. 이렇게 새로 개발된 세벌식 한영 글틀은 두벌식에 비해 네 가지의 특성이 있었다.

첫째로, 한글 자판이 일반 수동식 한영 타자기와 같고, 치는 방법도 같다.

둘째는, 쉬프트 키 사용이 두벌식에 비해 4분의 1이나 적고, 왼·오른손 을 균등하게 놀림으로써 입력 속도가 10가량 빠르다.

셋째는, 한글의 받침을 단독으로 찍어 넣을 수 있고, 또 인쇄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글에 관한 교본이나 연구 논문, 한글 풀그림(프로그램), 한글 교육 등을 손쉽게 할 수 있다.

넷째는, 자판에서 키를 치면, 화면에 그대로 정확히 나타나므로 안정된 기분으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틀은 유치한 수준의 것이었다. 어쨌든 세벌식 글틀로 한글을 처음으로 써 본 나는 그 신기하고 편리함에 반해 버렸다. 컴퓨터의 위대한 과학성에 나는 크나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내 소감을 글로 쓰기도 했다.

"미국 사람들이 개발한 영문 워드프로세서에 비하면 아직도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 과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이 작품을 더욱 완전한 세벌식 한영 워드프로세서로 발전시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합리적인 세벌식 한글 글틀을 써 본 뒤부터는 타자기는 답답해서 칠 수가 없었다. 글틀은 속도도 빠르고, 힘도 안 들었고, 일의 능률을 몇 배로 올려 주었다.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을 손수레나 달구지로 비유한다면 수동식 타자기는 자전거라 할 수 있고, 전통 타자기는 자동차이고, 컴퓨터는 비행기라 할 수 있다. 나로서는 한살이 잊지 못할 감격이었다. 글틀 덕분에 내 문자 생활에 혁명이 일어났다. 힘 안 들이고 손쉽게 글자를 대량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원고를 타자기로 쳐 오던 동무들도 이 한글 글틀을 접하고는 혁명적인 원고 생활을 하게 되었다면서 뛸듯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의 감격을 억누를 길 없어 생전 써 본 일도 없는 시를 한 수 지었다.

너는 나의 비서

너는 내가 처음 만난 나의 비서
너는 세상에 처음 태어난 나의 비서
너는 햇살같이 빠르고 정확한 천재 비서
나는 네 도움으로 열흘 할 일, 하루에 해치우니,
10년 걸려 할 일 1년에 하게 되었네.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잠시도 일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게 되었네.
지금은 진정 너 없이는
즐거운 나의 생활 할 수 없네.

너는 내가 지시만 하면 때없이 일하는 상시 비서
나는 너를 밤낮으로 혹사해도,
너는 항상 미소짓는 즐거운 얼굴.
네 손가락 수는 많지만 모두가 젊은 아가씨 손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예리한 손가락.
내 손가락은 곧 부러질 마른 나뭇가지 같아
약하고 거칠고 둔한 늙은이의 손가락.
타자기에서 힘들게 치던 나의 손가락이
네 손바닥 위에서는
날아다닐 듯이 가볍게 살짝살짝 온종일 눌러 대도
고달픔을 못 느끼네.

80 고개에 다다른 나는
네가 곁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나의 글자 생활.

나는 여태껏 많은 비서들과 일해 보았지만
너와 같이 일해 나갈수록 깊은 정이 들기는 처음. 그래서 너는 진정 나의 첫사랑 애인과 같은 나의 비서.

나는 문화 높은 위대한 미국에 왔기에
너 같은 천재 비서를 만나게 되었네
그래서 나는 미국에 온 보람을 느끼고 또 느끼네.

애플Ⅱ 컴퓨터로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에 관한 원고를 쓰면서 나는, 컴퓨터를 쓰는 게 과거에 수동식 타자기의 타자 비서 세 사람을 두고 원고를 쓸 때보다도 더 능률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므로 컴퓨터와 프린터 구입에 소비한 금액은 두세 달이면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명의 이기의 값어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그러자 황규빈 씨가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한 컴퓨터에서 텔레비디오 컴퓨터 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두벌식으로 개발했다. 나는 이것을 세벌식으로 개조했다. 애플이 소학생이라면 이것은 대학생과 같은 거의 영문 워드 프로세서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애플에서 받은 감격과 충격보다 더욱 실용적인 편리함을 느끼면서, 이것으로 타자 비서 다섯 사람이 할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기분으로, 날마다 많은 글을 타자하며 원고 작성을 즐겼다.

그러할 무렵 신태민 선생 소개로 당시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 와서 박사 학위 과정의 논문을 준비중에 있던 김영수 씨를 만나서 매킨토시 컴퓨터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김 박사는 내 홀소리 간소화 방식(예를 들어 ㅏ를 두 번 치면 ㅑ를 찍을 수 있는 방식)을 가미한 세벌식 글자판 '맥 한글'을 개발하여 무료로 보급하기도 했다. 김 박사가 나에게 가르쳐 준 '폰트(활자)'를 만드는 방법으로 나는 글씨 모양을 새로 몇 가지 더 개발했다. 한글 글씨꼴을 마음대로 만들어 쓸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글씨 크기와 모양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매킨토시의 성능에 반하고 말았다.

1986년 10월경, 뉴저지에 거주하는 컴퓨터 전문가 김일수 씨로부터 "한 시간에 끝낼 수 있는 영문 프로그램을 한글로는 1주일이나 걸려야 해낼 수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나는 몹시 놀랐다. 영어로 1시간 걸릴 일이라면 한글은 그 보다도 더 짧게 걸려야 이치에 맞을 텐데, 하루종일도 아닌 1주일이나 걸린다니, 이건 실로 어처구니없는 놀라운 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원인을 알고 싶어 10여 일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두벌식으로 입력을 하고 또 글씨꼴이 복잡한 인쇄체로 출력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이같은 내 의문을 풀어 보기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시작했다.

나는 글자를 만드는 '폰태스틱 소프트웨어'로 수동식 타자기의 글자판 배열로 세벌체 자모 63자를 영문 글자판과 직결되도록 만들었다. 보기를 들면, 영문 J자 글쇠에는 한글 닿소리 ㅇ을, 영문 F글쇠에는 한글 홀소리 ㅏ를, 영문 A글쇠에는 한글 받침 ㅇ을 배치하였다. 이런 내 '직결 방식'으로 만든 글꼴(폰트)을 영문 글틀에 집어넣어 한글을 써 보니 세벌체 한글이 화면에 나타났다. 더욱이 영문 워드 프로세서가 지니고 있는 갖가지 편집 기능을 한글에서도 완벽하게 재현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도 영문 글틀처럼 편집 기능이 완벽한 한글 글틀을 발명한 셈이다. 컴퓨터의 지식이 없는 80 늙은이가 완벽한 한글쓰기 무른모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첫째, 내가 한글 글꼴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며, 둘째는, 글자판을 세벌식으로 한 점이고, 셋째는, 매킨토시 컴퓨터가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벌식 글자판을 기반으로 했다거나, 또는 IBM 컴퓨터를 썼다면 전문가의 풀그림 없이는 작동이 불가능하므로 나 같은 컴퓨터의 비전문가는 전혀 한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가 없다.

이렇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직결 방식으로 만든 한글쓰기는 전문가가 만든 한글 글틀에 비하여 몇 가지 우수한 장점을 가지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전문가가 만든 한글쓰기는 D/A 프로그램이란 군동작(헛일에 속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글을 찍게 되어 있지만, 내 한글쓰기는 한글 글꼴만 선정하면 곧바로 한글을 찍을 수 있어서 조작 과정부터가 간편하다. 그리고 전문가가 만든 한글쓰기는 매킨토시의 새로운 모델이 나오거나, 무른모의 버전의 숫자가 올라가거나 하면 작용이 안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내가 만든 것은 어떤 새로운 모델이든 또는 무른모의 버전이 올라가든 모두 작동이 잘 되었다. 이것은 영문 코드와 한글을 직결 방식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문 철자법 검색 무른모는 아무리 비전문가라 하더라도 한글로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현재 매킨토시 SE 모델을 가지고 한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내 직결 방식의 한글쓰기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과정을 밟은 나는 "한글은 입력도 출력도 세벌식으로 하여야만 영어처럼 전산화가 고속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 일반 전문가들의 한글 전산화는 한글 구성 원리에 알맞은 쉬운 길을 모르고, 어려운 길로 가면서 한글의 전산화 발전을 늦추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치 한복이 미적으로 아름답긴 해도 일생 생활에서는 실용적, 경제적 가치가 적기 때문에, 활동할 때는 모두가 경제적이고 활동적인 양복을 입듯이, 미적으로만 좋다고 써 오던 한글의 완성 형식인 인쇄체를 버리고, 보다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세벌체가 일반화되어야만, 한글의 전산화도 로마자처럼 고도로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PC 한글'이라고 하는 획기적인 한글 글틀을 세벌식 글자판으로 개발한 김일수 선생은 "병든 한글 컴퓨터화"라는 글에서 과학자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한글의 진정한 발전은 모아쓰기의 장점을 제대로 살려야만 된다. 이것이 입력, 처리, 출력 전반에 걸쳐 제대로 구사될 적에 한글의 진정한 기계화, 전산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필라델피아에 계신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쓰기를 레이저 프린터에 시도해 보았다. 이를 공 세벌식이라고 하는데, 한글을 자음, 모음, 받침 별로 각기 하나씩만 두고 모아쓰기 출력 방식으로 만든 [뿌리깊은 나무]의 제호와 같은 꼴의 한글 자형이다. 내가 무엇보다 달갑게 생각한 것은 영상이나 인쇄용 글꼴 제작에 있어서 현재 방식에 비하여 거의 시간이 들지 않는 점, 프로그램이 훨씬 간단하다는 점, 그리고 처리 속도의 향상으로 꼽을 수 있으며, 세벌 입력 방식에 세벌 코드, 세벌 출력으로 영문 처리보다 더 간단해져 개발, 보급, 사용에서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내가 개발, 보급하고 있는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사용 교본 머리말의 일부이다. 한글은 생동하는 문자이다. 살아 숨쉬는 약동의 글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정감과 직선의 박력이 어우러져 새로운 형태의 공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1989년 한글 컴퓨터 전문지 월간 컴퓨터의 8월호에 실린 컴퓨터 전문가 강태진 씨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풀그림 만드는 데 세벌식은 두벌식에 비해 37나 빠르다고 증언했다.

내 세벌식에 대한 집념이 학계의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 결과로 뒤늦게나마 이렇듯 공인을 받게 되니, 감개무량하고 반갑기만 하다. 과학 정책을 다루는 관리들과 과학을 다루는 학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언제쯤에야 이 이치를 깨우치게 될지 그것이 내 관심거리이다.

미국에 번진 한글 기계화 운동

내가 사진 식자기를 개발하고,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한글 글틀이 보급되자 교포 사회에서도 한글 기계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언론 기관에서도 남다른 관심 표명을 하면서 내가 개발한 기계들을 크게 보도해 주었다.

이러던 중 필라델피아에 한글 문화연구원(원장 신태민)이 발족(1985. 7. 15.)하였는데, 여기서는 매달 한글 문화의 밤을 열고, 주로 한글 기계화에 관한 실험을 하면서 각종 강연을 주최하였다. 이 문화의 밤에 내가 개발한 신문용 사진 식자 편집기와 한글 글틀을 공개적으로 교포 사회에 선보였고, 또 교포 신문에 상세히 보도하기도 하였다. 몇 차례 문화의 밤이 진행되는 동안에 소문이 나, 한글 글틀을 개발한 분들이 문화연구원에 연락을 취하게 되고, 차츰 모여들게 되었다.

그 뒤 애플 매킨토시로 한글 글틀을 개발한 김영수 씨(당시 뉴욕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분)의 실험도 볼 수 있게 되었고, 뉴저지에서 온 김일수 씨(KKC컴퓨터서비스회사)가 텔레비디오를 이용하여 레이저 프린터로 갖가지 예쁜 한글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구경하게도 되었다(일간 뉴욕 신문과 독립신문이 이 기계로 컴퓨터 식자를 채용하였다).

결국 여기서 만난 김영수 박사와의 인연이 깊어져 그가 만든 두벌식 외에 세벌식 자판을 공동 재개발하여 누리에 내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일수 씨와 컴퓨터 식자기에 대한 밀접한 상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텔레비디오 회사(황규빈 사장)는 독자적인 컴퓨터를 누리에 첫 선보일 때, 막대한 돈을 들여 개발한 두벌식 한글 글틀도 함께 공개를 하면서 위세 당당하게 첫날을 장식하였다. 나는 이들의 컴퓨터가 누리에 나온 뒤 곧이어 텔레비디오용 세벌식을 개발하여 과거 세벌식으로 길들여진 사람과 새로 능률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에게 제공하였다.

이밖에도 일리노이 주립 대학의 김현영 박사는 IBM에서 레이저 프린터를 쓸 수 있는 이른바 콜롬비아 시스템을 개발하였으며(현재 뉴욕의 중앙일보, 시카고의 두 신문사 등에서 사용 중) 텍사스 주의 오스턴 시에서도 IBM PC 용으로 세종 한영 편집기(트릴링크 시스템)란 한글 글틀을 개발하여 시판을 하였다. 뉴욕의 김민수 씨는 애플의 매킨토시로 레이저 프린터를 쓰는 길을 터놓기도 하였다. 텔레비디오로 레이저 프린터를 이용하는 길을 개척한 김일수 씨는 그 뒤 IBM에서 쓸 수 있는 'PC 한글'이란 무른모를 개발하였고, 캐나다의 한 컴퓨터에서는 '한글 2000'이라는 획기적인 한글 글틀을 개발하여 요즈음 국내외에서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재미 컴퓨터 학자들이, 시장도 좁은 한글 기계화를 위해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개발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내 시장 개척까지 해야 하는 생소한 분야를 컴퓨터 전문가들이 해내고 있었다. 연구실에만 있어야 할 고급 두뇌에 국가적인 지원이 있어야 마땅한데, 이들은 너무나 어렵고 엄청난 부담을 안고 미국 안에서 한글 기계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고맙기만 했다. 이 분야에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민족 문화의 혁신을 꾀해 보려는 꿈이 서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심 외롭게 나 홀로만이 한글 기계화의 길을 걸어 온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사람 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음을 알고 보니 결코 고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과학 동지들의 당당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고,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불타는 정열과, 우수한 과학적 두뇌와, 학술적 이론을 겸비한 학자들이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앞날이, 이런 사람들의 눈이 빛나고 있는 한 찬란하고 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같은 분들이 개발해 낸 생산품들에 대해 일반의 반응이 미온적이라 그 점이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다. 훌륭한 컴퓨터의 제품을 내놓기만 하면 무엇 하나, 우리 동포들이 써 줘야 그 제품은 살아나고 더욱 좋게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써 주기는커녕 잘 했다고 격려의 손뼉 하나 치는 데도 인색하였다. 영어처럼 간편하지 못하다는 등의 투정과 타박을 일삼는 수가 많았다. 남의 업적을 존중할 줄 모르고 트집만 잡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어디 있을까?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세계 언어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민족적인 훌륭한 한글을 만들어 놓았는 데도 이것을 500년 동안 천대해 온 우리 나라 지식층의 좋지 못한 습성이 한스럽게 생각되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글 전산화에 있어서는 더 더구나 그렇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이런 분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정보 교환도 하고, 어려운 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서로 격려를 하였다. 나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대담하게 어떤 방법으로라도 도와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이들이 대부분 나이는 나보다 훨씬 아래지만, 무엇인가 나보다 훌륭한 일을 해낼 사람으로 보였다. 아닌게아니라 이들 대부분은 결국 한국에서 각종 한글 글틀을 만들어 내는 두뇌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한글 기계화의 바람이 일 무렵 나는 뉴욕에 있는 각 언론계를 자주 드나들면서 한글 컴퓨터 식자기로 신문 제작할 문제를 논의도 하고, 실태를 견학하기도 하였다. 어떤 신문사에는 컴퓨터 시대에 대비시킬 방법으로 수동 타자기를 수십 대씩 기증도 해 주었고, 나중에는 수만 달러씩 하는 ITEK 고성능 사진 식자기를 사서 조건 없이 무료로 빌려주어 신문 편집과 인쇄에 쓰도록 도와주었다. 어떤 신문사에는 컴퓨터를 사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신문사에는 텔레비디오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를 기증하기도 하였다. 내가 연구하는 데에도 연구비 조달이 쉽지 않아 쩔쩔매는 형편이었지만, 언론계의 한글 기계화 문제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추진되도록 밀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뒤 컴퓨터로 식자를 하는 교포 신문사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정말 반가운 현상이었다. 1986년 5월 현재, 미국에서 개발된 컴퓨터는 다섯 가지 정도였다. 내 연구소로 문의하는 서신, 전화 등이 하도 많이 오게 되자, 나는 신문사, 출판사, 인쇄소 등에서 컴퓨터 식자기 선정하는 데 도움이 될 비교표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였다. 그 당시 개발된 식자기는 다음과 같다.

1. 레이저 빔에 의한 식자기로는

1. KCC 식자기 (입력-세벌식, 텔레비디오) : 김일수 개발 2. 콜롬비아 시스템 (입력-세벌식, IBM) : 김현영 개발 3. 한 컴퓨터 시스템 (입력-두벌식과 세벌식, 매킨토시) 4. 캐나다 한 컴퓨터 팀 (개발 도중 중단하였음)

2. 디지털 식자기로는

1. LA 시스템 (입력-두벌식과 세벌식, IBM)

3. 사진 식자기로는

1. 이미 한국일보사에서 개발한 (세벌식 구형 ITEK, 세벌식) 2. 내가 개발한 사진 식자기 (ITEK, 세벌식)

나 자신도 많은 시간과 재력과 노력이 들어간 사진 식자기를 개발하였다. 내 연구 개발을 돕느라고 돈벌이도 안 되는 연구 실험 작업에 막대한 회사 손실을 무릅쓴 내 사위 강 사장에게 고맙고도 미안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1985년 9월 '공병우 한영 사진 식자기'를 개발한 뒤, 시카고로, 로스앤젤레스로 뛰어다니며 전시회 등을 가지면서 제품을 선보였다. 이 기계는 ITEK 컴퓨터 최신 모델 2110을 바탕으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영문 식자 기능은 물론 한글에 있어서도 컴퓨터의 자동 기능을 발휘하여 식자와 편집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글의 식자 속도는 1분간 8포인트로 660장모, 영문 식자 속도는 1분간 8 포인트로 750자모인데, 이는 일본식 전동 사진 식자기보다 5배 가량 빠른 것이다. 또한 글자 크기도 최소 5.5포인트에서 최대 74포인트까지 뽑을 수 있는 고성능의 기계였다.

한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던 컴퓨터 기술자 피터 씨도 이 한글 식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글의 기기묘묘한 과학성에 찬탄을 하였다. 한글은 스물네 자만 갖고도 수천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글이라면서, 각종 글자를 제나름대로 조합을 시킨 표를 만들 정도로 열렬한 '한글 신자'가 되어 버렸다. 피터 씨는 이치를 깨닫고 우리 나라 말은 못해도 한글의 과학성은 인정하였다. 뜻하지 않게 열렬한 한글 팬을 한 사람 얻은 셈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태에서도 내 설계를 갖고 각종 실험과 연구를 해낸 피터 씨에게도 이 기회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한글을 모르면서도 과학적인 원리만 갖고도 식자기 개발을 도울 수 있었으니, 첫째는 한글이 우수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피터 씨의 머리도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벌식은 컴퓨터에도 알맞아

처음에 나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컴퓨터에서는 정부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두벌식을 써야만 더 간편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컴퓨터를 배워서 직접 실험도 해 보고, 또 컴퓨터 전문가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컴퓨터에서도 한글은 세벌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은 어떻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지를 비교 검토할 수 있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골라야 옳다. 그런데 세벌식 자판은 기계식 타자기에서 속도가 네벌식보다도 무려 40가 빠르고, 2벌식보다 50나 빠르다는 자료도 나와 있다.

보기를 들면, 동아대학교의 김창동 씨는 그의 석사 학위 논문에서 윗글자쇠(SHIFT KEY)를 쓰게 되는 백분율을 공개하였는데, 우리 나라 애국가를 대상으로 조사, 실험한 비교표에는 총 타자수 568타 가운데에서 두벌식은 88번이나 누르게 되어 16의 사용 빈도율을 보였다. 이에 비해 세벌식은 0.528밖에 안된다. 그러나 전에 과학기술처에서 채택하여 우리 나라의 표준 자판으로 삼았던 네벌식은 세벌식에 비해 5배 이상이나 더 많은 3로 나타났다. 이 네벌식은 1984년에 이미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폐기 처분을 했으니, 더 훌륭한 정부 표준판이 나와야 옳다.

그런데 놀랍게도 네벌식보다도 몇 곱절 더 윗글자쇠 부담률이 높은 비과학적인 두벌식을 채택했으니, 이게 어디 과학을 다루는 나라에서 할 짓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폐기한 것보다 더 비능률적이고 비합리적인 두벌식으로 후퇴시켜 놓아야 할 무슨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주장을 하면, 내가 만든 세벌식이 채택이 안 되어 불평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못내 딱하기만 하다. 정말 이 점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아무리 어떤 특정 개인이 연구해서 만든 것이라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며, 진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인 것이다. 세벌식이 여러 면에서 좋은 점이 입증되었는데도 외면하는 까닭은 무슨 연유일까?

미국에서는 드보락 박사가 개발한 '드보락 자판'이 종전의 표준 자판보다 30의 능률적인 이익이 있다고 해서, 120년 이상 길들여 온 현행 자판에 구애되지 않고, 1984년에 드보락 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채택한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는 덮어놓고 세벌식을 우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보다 더 우수한 방안이 제시되거나 이보다 더 능률적이란 것을 증명하는 어떤 방식이 있다면, 더 우수하다는 방식에 따를 것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세벌식보다 이상적인 것을 찾을 수가 없다. 한글은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받침) 이렇게 세벌식 구조로 되어 있듯, 타자기나 컴퓨터의 자판도 세벌식으로 해야 무리가 없다. 이것은 여러 컴퓨터 전문가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한글 기계화 추진회의 송현 씨가 이미 오래 전에 관계 기관에 정부에서 표준판으로 내세운 두벌식의 단점에 대해 질의한 바도 있었지만, 관계 당국에서는 세벌식보다 두벌식이 낫다고 하는 아무런 증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 두벌식 한글 자판은 자판 통일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러 단점을 갖고 있다.

나는 자판 문제를 연구한 지 40년만인 1986년 10월에 한글 자판 기종간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세벌식을 갖고 수동식 타자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컴퓨터도 칠 수 있고, 그 밖의 사진 식자기나 텔레타이프, 또한 어떤 한글 기종의 자판도 손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세벌식 한글 자판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같은 기종 간 통일 자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한글 자체의 과학성의 덕을 톡톡히 본 덕택이기도 하지만, 4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연구한 경험을 살린 마무리 작업’’이야말로 이것을 가능케 하였다.’’ 이쪽으로 자판 배치를 했다가 문제점이 생기면 저쪽으로 변경도 해 보았으며, 별의별 시행착오에 시달려 보기도 하였다.

연구 검토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차례 우리말 찾기(빈도수)의 통계를 내 보기도 하고,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를 민활한 손가락 위치에 놓게 하는 인간 공학적인 효율성도 계산하여 자판 배정의 바탕으로 삼았다. 가령 어떤 받침은 좀 치기 쉬운 곳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면, 인간 공학적인 면과 기계 공학적인 면을 감안하여 이동 여부를 검토하게 되는데, 어떤 경우는 하나를 바꾸기는 쉬워도 그 자리에 있던 글자를 딴 곳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뜻밖에도 자판 대이동이 일어나 혼란을 빚게 되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판 개량이란 게 일반이 생각하듯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능률적인 운지(손가락 놀림)를 위해 ㅅ자와 ㄹ자의 글쇠의 위치를 바꾸는 데도 1년여의 실험 기간을 거쳐야만 했다. 자판에서 아주 사소할 것 같은 점 하나 찍는 쉼표 자리를 옮긴다 해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 자신은 이상적이라 생각하더라도 관심을 쏟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 아주 조심스럽게 자판 이동을 해 왔다. 일단 타자수들이 정해져 있는 자판에 길들여지면 그 습관을 고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4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자판 연구를 해 오면서도 중요한 자모의 으뜸 위치는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 자판이 만족할 만한 완전한 자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는 동안 40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제는 기종간의 통일 자판은 만들어 놔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만을 위해서는 더욱 간단한 자판을 만들 수도 있지만, 기종간의 통일이 더욱 중요한 과제로 생각되어 모든 기종의 자판을 통일시켜 놓았다. 그래도 컴퓨터만을 간단한 방법으로 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특수 전용 자판을 첨가하여 두었다. 글자 하나하나의 배치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검토를 하였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벌식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골격이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세벌식 시스템으로 기종 간(여러 한글 기계 종류들 사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는) 통일 자판을 만들어 놓았다. 오랫동안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이제 눈을 감아도 한이 없다. 앞으로는 자판 문제를 관장하는 정부 기관에서 컴퓨터 시대의 바탕이 되는 자판 문제를 강압적으로 위협해 가며 다룰 생각을 말고, 실험과 통계를 중시하는 과학적인 자세로 자판 통일 문제를 검토해 나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표준판을 검토할 경우에는 담당 관리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엉뚱한 자판을 새로 더 만들어 내는 그런 전철은 제발 밟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날은 그같은 관리들 때문에 자판 통일을 할 때마다 자판이 빈번히 더 늘어나고 혼란만 더욱 가중되었던 것이다.

세벌식 자판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벌써 학계에서는 이미 세벌식이 옳다는 학술 논문들이 여럿 나왔다. 컴퓨터 전문가들도 기계 공학적인 실증을 들어 세벌식의 타당성을 제창하고들 있다. 무른모의 개발에도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20가량이나 더 간단하고 버전 올리는 속도도 빠르다고 말한, 서울 대학교의 이상억 교수의 논평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최근 캐나다의 컴퓨터 전문가 강태진 씨는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37나 절약이 된다고 그의 글에서 입증하고 있다. 이런 큰 차이는 앞으로 한글 무른모 개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통계와 이론이 쏟아 져 나오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극심한 국제 경쟁 속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방 세계는 보다 능률적인 자판을 지체없이 선택하고 있다."

이는 일본 도표 대학의 히사오 야마다 교수가, 미국이 30의 능률을 위해 드보락 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채택한 점을 가리켜 한 말이다. 우리는 미국보다 더한 50의 이익을 눈앞에 놓고도 지금 망설여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벌체를 으뜸 자형으로 확정

한글은 누리에서 으뜸가는 과학적인 글이라고 하면서도 황소걸음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마자의 컴퓨터화는 비행기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왜 한글의 컴퓨터화는 이렇게 더딘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원인은 입력을 한글 구성 원리대로 첫소리, 가운뎃소리, 받침으로, 말하자면 세벌식으로 하지 않고 두벌식으로 하는 데 있고, 다음은 글자꼴을 일정한 네모틀 속에 가두어 만드는 데에 있다고 본다. 입력을 세벌식으로 해야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 항목에서 밝혔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글자꼴에 대해서만 말해 볼까 한다. 한글은 획수가 많건 적건 간에 일정한 네모틀 속에 넣어 글자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가로로 일곱 획을 그어야 하는 '를'자와 두 획을 긋게 되는 '그'자를 비교해 보면 '를'자는 네모틀 속에 빡빡하게 글자가 들어서 글자가 작아질수록 글자는 뭉개지게 되고, '그'자는 여유가 있게 보이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을 때 초기의 글씨 모양은 너무나 보기 흉했었다. 그렇게도 형편없는 글씨 모양이었지만, 속도와 그 밖의 다양한 기능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수요자들이 늘어나 지금과 같은 놀라운 수준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현재의 영어 글틀에는 별의별 글씨체가 다 개발되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결같이 글씨 타령만 늘어놓고 성능 좋은 기계가 개발되어도 호응도가 너무 낮아, 한글 기계가 더 발전하도록 밀어 주지 못했다. 우리 나라는 손으로 쓰는 것보다도 더 느린 타자기라 해도 글씨만 예쁘면 된다는 식으로 컴퓨터 시대를 맞았다. 다소 글씨 모양은 덜 예쁘더라도 속도와 여러 가지 기능이 발휘되는 쪽을 선호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글씨 모양도 상당히 개량되고 발전했을 것이다.

나도 그 동안 하도 우리 국민들이 글씨 모양이 좋아야 한다고 따지는 분위기를 의식한 나머지 한때나마 컴퓨터에서 예쁜 글씨체를 개발한답시고 돈과 시간을 많이 소비한 적이 있지만, 이는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나는 캐나다의 한 컴퓨터 연구소에 의뢰하여 처음에는 애플Ⅱ용으로 세벌식의 예쁜 글씨를 개발하였다. 나중에는 고딕체도 만들었다. 그리고 텔레비디오 용으로 명조체도 만들었다. 그리고 애플Ⅱ용 '한글'을 만들었을 때, 너무나 반갑고 신기해 한국에 있는 친지에게 써 보라고 보냈더니, 일주일도 못 가서 서울 청계천 전자 부속 가게에서 복사판이 만들어져 돌고 있더라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지적인 저작권을 보호할 줄 모르는 한국의 분위기가 안타깝기보다는 내심 내 세벌식 한글 글틀이 해적판으로라도 나돌게 된 것이 은근히 반갑기까지 했다.

어쨌든 나는 당시 한글 글틀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컴퓨터는 글씨 모양을 예쁘게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신묘한 요술 단지 정도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글씨 모양의 한글체를 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입력할 때는 세벌식으로 타자해도, 컴퓨터 내부에서는 대체로 열 벌 이상, 스무 벌 정도의 벌수를 소요해서 글자 하나의 모양새를 예쁘게 만들어 낸다는 것을, 한 마디로 컴퓨터에 몹시 힘에 부치는 부담을 주어 출력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덮어놓고 컴퓨터는 글씨 모양을 마음대로 간단히 척척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란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한글의 구성 원리대로 타자도 세벌식으로 입력하고, 한글의 조합도 세벌식 출력을 통해 하도록 이른바 세벌체란 글씨체를 채용하기로 한 것이다. 받침이 있는 글자는 받침이 없는 글자보다 더 길어야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오독률도 줄어들고, 읽는 속도도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자의 윗부분의 선을 맞추었을 뿐 아랫도리는 글자마다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흔히 이 글씨체를 '빨랫줄 글씨체'라고도 한다.

영어 글씨에서는 많은 실험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우리 한글의 빨랫줄 글씨체의 이점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되고 있다. 영어의 대문자는 공간 배분이 일정하여 높낮이가 일정하지만, 소문자는 글자마다 높낮이가 들쭉날쭉 다르다. 가령 소문자를 살펴보면 c와 o의 위아래 길이가 갚고 높이는 같지만, l이나 h는 머리 끝부분이 위쪽으로 올라가 있고, j나 p는 다리 부분이 아래쪽으로 쳐져 있다. 그래서 이같은 들쭉날쭉 변화가 있을 때, 눈의 피로는 덜해지고 독서 능률을 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문자로만 되어 있는 영어 문장은 읽기가 무척 힘들고 오독률도 높다는 것이 각종 실험 분석 결과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나는 영어의 소문자처럼 들쭉날쭉한 이 글씨체를 세벌체라고 이름짓고, 이 글씨꼴을 앞으로 우리 한글을 발전시킬 표준 자형으로 확정시킨 것이다. 이 세벌체는 한글을 컴퓨터화하는 데 무리도 없고 어떠한 컴퓨터에서도 아주 쉽게, 한글에다가 갖가지 기능을 영어에서처럼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글 자형학]이란 저서를 통해서 한글 자형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송현 씨는

"일정한 공간에 '를'자와 '그'자를 똑같이 배분하는 것은 마치 택시와 버스의 정원을 같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공간 배분을 비합리적으로 하기 때문에 한글의 가독성이 낮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라고 그의 [현대 한글의 예속과 해방]이란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당당하게 세벌체를 앞으로 우리 나라 글씨체의 으뜸 자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글씨 모양은 얼마든지 글자 도안가들이 수백 종이라도 개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같은 글씨꼴은 내가 이번에 처음 개발한 것이 아니다. 40년 전 그러니까 내가 한글 타자기를 처음 개발했을 무렵 초기의 글씨가 이랬다. 그 때는 보기 싫다고 외면하던 분들까지도 요새는 아주 좋게 보인다고 손뼉을 치게 되었다. 여러 신문사에서는 다투어 제목으로 또는 잡지 제호로 이 세벌체 방식 도안 글자가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한글 도안을 하려면 적어도 2천 3백여 자를 그려야만 한 벌의 글씨체를 장만할 수 있었지만, 이 세벌체를 채용하게 된다면 스물네 자만으로 한벌의 글씨체를 만들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가?

이 글씨체를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들쭉날쭉한 글씨라 눈에 설다고 말한다. 미녀를 뽑는 기준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내가 어렸을 때, 중국 여성들은 발을 주먹만하게 작게 만들어야 미녀라 하여 발의 발육을 막기 위해 피륙으로 발을 칭칭 동여매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제는 그런 발을 보면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병신 발이라고 할 것이다. 한글의 글씨체도 중국의 전족의 풍습처럼 네모꼴 속에 피륙으로 꽁꽁 동여매는 인습에서 해방되어, 과학적인 것을 채택해야 할 때가 왔다.

요즈음 도안 전문가나 한글 글씨체 전문가 또는 실험 심리학 분야 학자들에 의해 이 한글 세벌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이론과 실제에 있어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를 주장하는 책도 발간되었고, 여러 논문도 나왔으니 마냥 기쁘기만 하다. 나는 현재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로 줄곧 세벌체의 문자 생활을 즐기고 있다. 세벌체를 활용하게 되면 신기하게도 매킨토시의 어떤 기종에도 다 쓸 수 있지만, 글틀 가운데에서도 일반인이 아름답다고 해서 만든 이른바 전문가가, 예쁜 글씨체로 매킨토시 플러스 용으로 만든 것들은 매킨토시 SE에서 쓸 수조차 없다. 그런데 내 세벌체 방식은 어떤 기종에서도 다 받아들여 한글을 생산해 주고 있다. 이는 한글 원리에 맞는 과학성을 십분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어용으로 개발된 수천 가지 무른모 프로그램도 웬만한 것들은 그대로 한글로 활용해 쓸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매력적인 세벌체인가! 앞으로 한글 기계화는 세벌식 입력 자판과 세벌체 출력으로 모든 기계화 체제가 바뀌어야만, 컴퓨터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고 비약적인 발전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다. 이같은 신념 때문에 나는 80이 넘는 노구지만 내게 남아 있는 온갖 정열을 쏟아 컴퓨터 시대를 여는 데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 자형을 개량, 발전,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제 11 장 사람답게 살고 싶어 – 종교관, 인생관 -

하느님의 발견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1953년 미국에 처음 가서 이것저것 견문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섭리는 과연 오묘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뉴욕 맨해튼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을 보면서, 하느님의 역사함이 없이 어떻게 저런 백층이 넘는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하느님은 세계 인류에게 골고루 자기들만이 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신 것이라고 느꼈다. 미국 사람에게는 저런 건축을 할 수 있는 지식과 슬기를 주시고 또 우리에게는 이엉을 엮어 만든 집이나 기와집을 지을 수 있는 색다른 슬기를 주신 것이다. 심지어 제비나 까치 같은 날짐승에게도 진흙이 나 벼이삭으로 또는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재간을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의 고층 건물을 바라보면서 '과연 하느님은 계신다'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각 개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천차만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교통 사고로 병상에 눕게 된 뒤 하느님을 깨닫기도 하고, 가족의 죽음이나, 풍비박산된 경제적 파탄 뒤에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는 분도 있다. 그야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역경 속에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는데, 나는 팔자 좋게 맨해튼의 마천루 숲을 유람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으니 정말 희한한 일이다

그 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누리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어 나를 색다르게 키워 주셨고, 나에게 푸짐한 삶을 누리게 하신 분이란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 아들과 딸들이 다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내 집과 재산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오늘까지 지내 온 모든 일은 물론, 앞으로의 모든 일도 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구도자의 심정

하루는 사무 기기 장사를 하는 동무가 찾아왔을 때, 교회가 너무 보수적이더라고 불평처럼 말했더니, 카톨릭 신자인 그는 그렇다면 자기와 함께 명동 성당엘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난생 처음 그를 따라 명동 성당엘 따라 나섰다. 카톨릭에서 미사라는 것을 처음 참례해 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톨릭의 제사라는 것인데, 경건한 인상은 받았지만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하는 여러가지 전례가 나에게 무척 부담스러웠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형식주의가 카톨릭을 휘감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카톨릭 형식주의에 질렸다. 이 때가 아마 1959년쯤 되는 해인 것 같다. 나는 그 뒤 어떤 동무를 따라 영락 교회도 가 보았다. 때마침 백낙준 박사 부부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모든 신자들이 남녀 따로 앉아 있었지만 이 두 분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깨달았다. 교회가 왜 이렇게 보수적이냐고 따지며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할 수 있다면 백 박사처럼 부부 동반해서 의젓하게 앉아 있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따라 한 목사님은 설교 중에 뜻밖에도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은 여인에 대해서 망신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인상적이었던 설교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공부까지 하고 왔다는 한 목사님이 미니 스커트나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여신도들에게 창피를 주는 설교는 듣기에 민망했다. 미국은 핫 팬츠를 입고,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는 것이 예사인 시대였다. 누리는 온통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한 목사의 설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여자들이 시원하게 옷을 벗고 다니고, 남자들이 여름에도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훈도시만 차고 서울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을 보던 나는 어느 쪽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생각했다. 약한 편에 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을 찾으러 다닌답시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순례했지만 이같은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이곤 했다. 이처럼 종교 외적인, 인간적인 면이 내 비위에 맞지 않아 나는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나는 그 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봉사를 열심히 하며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종교를 선택하지 않고 살았다.

그 뒤부터 나는 전국적으로 무료 개안 수술을 하러 다녔고, 장님을 도와 주는 재활 센터도 세웠다. 교회는 가지 않아도 실제로 남을 도와주는 것을 잘 하면 그것이 참 기독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그 정신으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온갖 문물도 발전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국에서 나도 그같은 기독교 정신만을 갖고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부지런하게 기독 정신을 발휘하여 봉삿거리를 찾으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래서 앰뷸런스를 타고 개안 수술 무료 순회 진료도 한 것이다. 그 순회에 따라다니던 한종원 씨는 지금도 그 때의 정열적인 봉사의 시절이 자기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교훈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천호동에서 안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한종원 씨는 1989년 대한적십자사의 박애상을 받았다. 이는 나에게 아주 기쁜 사실이었다.

형무소에서 나온 전과자, 강도 같은 사람에게 직장을 주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하느님께 대한 은총의 소박한 갚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침에 깨면 하루의 삶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보답은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 시간을 아껴 쓰며 열심히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하느님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 생활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 편리한 대로 생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진지하게 종교에 대해 심사숙고하기로 하였다. 어떤 종교 단체에 들어가 배울 것도 배우고 성경의 지식이라도 얻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말하자면 구도자의 자세로 종교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퀘이커 모임에 나갈 결심을 하였다. 이 모임은 함석헌 선생이 지도하는 모임이었다. 내 소유인 청진동 타자기 공장을 빌려주어 퀘이커 모임을 시작하였다.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주의적인 설교에 나는 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다. 그 뒤 나는 1980년에 미국에 다시 들어간 뒤 교회에도 다녀 보았고, 통일교 목사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또 통일 원리 이론을 배우기 위해 통일교의 세미나에도 참석해 봤다. 그러나 통일교의 공용 말글과 공동 글자를 우리말과 한글로 통일한다는 말은 없었다. 통일교 후원으로 나오는 신문 잡지에는 한문자 혼용이 많았다. 그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문 목사 자신이 구세주인 양 말하는 것이 미심쩍었다. 그것보다도 나는 통일교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교단이라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다. 나는 곧 모 일간지에 그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 뒤 나는 성경에 취미를 붙이기 위해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소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재미있게 읽기도 하였고, 카톨릭의 통신 교리 강습도 조금 받아 보기도 하였다. 성경을 읽어 봐도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지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내가 여러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그만둔 것은 대개 어떤 신학적인 회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눈에 거슬리는 못마땅한 것들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도의 마음이 차츰 나이와 함께 자꾸 부풀어 올 때, 김수환 추기경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부르짖는 글이 나왔는데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 조국이 어둠에 잠겨 소용돌이칠 무렵이었다. 최루탄 연막 속에서 온 국민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때였으니 김 추기경의 목소리는 확실히 광야에서 들려 오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였다. 나는 김 추기경의 용기와 진리의 발언에 크게 감동하였다. 아무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그는 대담하게 군사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바른말을 토해 내곤 하였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민중의 피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내 귀에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1989년 여름에 김수환 추기경은 감옥에 있는 임수경 양을 면회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그가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

나를 고집불통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1965년 4월 한국일보를 보면 "한국의 유아독존 10화"라는 연재물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름이 좋아 유아독존이지,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름난 고집쟁이 열 명을 차례로 소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승만, 최현배, 김원규 등이 등장했는데 나도 그 속에 끼어 4월 11일자로 소개되었다.

나는 덮어놓고 내 것이 옳다고 내세우는 이기적인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 뿐인데, 사람들은 아마 나를 고집쟁이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것도 어쩌면 남 보기에는 괴팍한 유아독존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보기를 든다면,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라든지, 에누리는 살 때나 팔 때나 절대 해서는 안 된다든지, 관혼상제에 시간이나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든지, 이같은 생활 신조는 내 한살이를 두고 지켜 온 것인데, 이런 것들을 보고 고집 운운하는 모양이다. 그런 종류의 고집은 끝내 부릴 생각이고 보니 고집쟁이란 별명이 그리 밉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이같이 고집을 부릴 정도의 신념을 얻은 것은, 많은 존경하는 분들로부터 훌륭한 점들을 두루 배우고 익혀, 수용해 온 결실이란 점을 밝힌다. 나는 덮어놓고 잘난 척하고 내 식으로 산다는 이기적인 뜻의 고집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까지도 즐기고 있는 책읽기를 통해 존경할 분들을 많이 만났으며, 좋은 인생 교훈과 생활 철학을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었다. 사교를 즐길 줄 모르는 나는 주로 책을 통해 사람을 발견했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받으며, 친교를 맺기도 했다. 그러한 분 가운데 외국 사람으로는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임어당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사람으로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한살이를 바치고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구실을 한 함석헌 선생, 한글 발전을 위해 삶 전체를 바친 최현배 선생, 어려운 한문을 번역할 수 있는 한문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한글 전용을 외쳐 온 시인 이은상 선생, 한글 기계화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발전시켜 보려고 애쓰셨던 주요한 선생, 일제 때부터, 한글 타자기로 원고를 쓰는 시대와 신문사에서 라이노타이프로 문선 식자를 할 시대가 와야, 우리 민족 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한다고 말한 이광수 선생, 독재자의 총칼에도 비겁하지 않은 김수환 추기경 등이 있다. 일간 신문들이 모두 비과학적인 세로쓰기와 한문 혼용으로 나오는 지금에 한글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으로 일간지를 발간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획기적 업적을 이룩한 한겨례 신문과 민주일보를 창간한 분들에게 높은 찬사와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밖에도 나는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 한몸의 영달과 개인 생활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용기 있는 지식인, 대학생, 근로자, 농민들을 존경한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왔다. 내가 신조로 삼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나와는 다소 생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자기 신념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자기 신조를 굽히지 않은 정치인, 시인, 소설가들에게도 머리를 숙인다. 심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은 박종철 군이나, 봉재 공장의 직공들도 사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분신 자살한 전태일 군 등도 내가 하지 못할 일을 대신 해낸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 대신 희생을 해 준 사람이기에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덕목과 내 삶의 신념을 굳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분들을 나는, 주로 책읽기를 통해서 많이 만났다. 이분들은 대체로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훌륭한 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존경하게 된 데에는 역시 한글 기계화 문제와 한글 전용에 대해 투철한 신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외국 분들은 한글 기계화는 관계가 없이 주로 인류나 민족을 위해 큰 공헌을 한 분들이다. 그 가운데 내가 존경하는 간디는 누구나 다 잘 알다시피 인도에서 '위대한 성신'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런던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한 그는 영국 측에 붙어 자신의 영달을 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더기 무명옷을 걸쳐 입고, 인도 민중들과 함께 반영 독립 운동에 나선 분이다. 시간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나는 이분에 관한 책을 열독하면서 보람있는 삶에 대한 평가를 더욱 굳게 할 수 있었다. 이분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낭비해서 는 안 된다는 말을 유별나게 많이 하였다. 이분이 쓴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나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나는 이것을 한데 모아 복사를 해 친지나 이웃에게 뿌리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분에게는 타자기에 얽힌 일화도 있어 내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영문 사설을 영국인 여성 타자수를 시켜 전속으로 타자를 쳐 오게 했다. 그는 정성스럽게 일을 잘하는 타자수가 너무 고마워 봉급을 인상해 주겠다고 하였더니, 그 백인 여성은 이를 사양하였다는 것이다. 간디만 감동할 일이 아니었다. 나도 감동을 하였다. 훌륭하고 성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얻게 된 사람을 흔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일하는 사람의 성실성도 필요하지만, 주인 쪽의 훌륭한 마음 쓰임새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자기 하기에 따라서 인복을 자기 스스로가 만든다는 것을 간디의 일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 셈이다. 간디는, 문명이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같은 생각에도 나는 크게 공감했다. 또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정신을 잃고 사는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라고 지적한 점도 무척 감명깊었다. 나는 간디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인 위대한 사상가라고 표현하는 쪽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확실히 인도 사람뿐 아니라 온누리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이끈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임어당과 나

내가 존경하는 또 한 분은 중국의 임어당 선생이다. 우리 나라에도 [생활의 발견]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분이지만, 서구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미국에 정주하면서 서구 사람들에게 동양 문화와 동양 철학을 많이 소개했다. 그는 1976년에 여든한 살로 돌아가셨지만, 1953년에 나는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의 자택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롱아일랜드 자택 지하실에서 한문자 타자기를 개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일부러 김준성 목사와 함께 찾아갔다. 그는 [생활의 발견]이란 책으로 50만 달러란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는, 중국말 타자기를 개발하느라고, 자기 집 지하실을 연구실로 꾸며 놓고, 전기 기술자와 타자기 기술자를 특별 채용하여 그 돈을 다 날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개발해 낸 타자기는 막대한 돈을 들여 특허까지 냈었지만, 결국 매켄텔러라고 하는 라이노 타이프라이터 회사에 단돈 1만 달러에 넘겨 주었다고 했다. 그는 자기 나랏말을 극진히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한국에서 내가 거실에 연구실을 꾸며 놓고 타자기를 개발한다고 막대한 시간과, 막대한 재산을 투입시킨 일 등이 어쩌면 그렇게 나와 비슷한지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감회가 깊었다. 50만 달러를 들여 만든 것을 1만 달러에 넘겨주는 산술밖에 못 하는, 이재에 어두운 발명가다운 그의 슬기가 돋보이기도 하였다. 그 타자기의 시제품은 매켄 텔레타이프 회사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보통 타자기보다도 약 1.5배나 컸고, 글쇠 단추는 백여 개나 되었다.

그가 지닌, 자기 나라의 글을 기계화하겠다는 그 열정과 애국심은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할 점이라고 본다. 더욱이 그가 사재를 털어 타자기 개발을 했다는 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에서 재력을 들여야 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 필요한 엄청난 일을 한 그의 열정은 본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한자의 수가 너무 많고, 구조가 너무 복잡하여 한자 타자기를 만드는 일은 큰 재벌 회사에서도 선뜻 엄두를 못 내는 법인데, 임어당 개인의 재력으로는 생산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다. 매켄 텔레타이프 회사는 임어당에게 중국 타자기의 특허권만 사고 생산을 안 하고 말았으니 임어당의 높은 공로와 기록만 남게 된 셈이다. 숱한 고생을 하고도 한자 기계화의 꿈이 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글자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내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나는 사회 생활에 몹시 서툰 편이다.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을 몰라 마음이 안 놓일 때가 많다는 말을 아내가 털어놓은 일이 있다.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시집간 딸들로부터도 가끔 "아버지는 너무 사교에 어두운 것 같아요"하고 푸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사실 그렇다. 나는 사교술 따위는 모른다. 그래서 친교도 서툴다. 술동무도 없고, 놀이동무도 잡담동무도 없다. 오직 나에게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있을 뿐이다. 생각이나 취미가 같다고 해서 동지가 아니라 민족과 나라 사랑의 마음 자세나, 한글 전용 또는 한글 기계화 문제에 대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밤을 지새워 가면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는 남들과 어울릴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기피하지는 않는다. 내가 사교술에 약한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교육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말을 빌린다면, 나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인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는 사교 훈련은 받지 못한 셈이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사람들과 되도록 사귀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다. 딴 사람으로부터 나쁜 사회물이 내게 들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도 있고, 또 나쁜 돌림병 같은 것에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철저하여, 이 때문에 내가 남의 혼인 잔치나 생일 잔치 등에 일절 나가지 않는 괴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교술은 비록 서툴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참마음으로 대한다. 마음에 없는 것을 꾸며서 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척 정이 안 통하는 냉랭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1953년 미국에 처음 건너갔을 때 일이다. 미국 병원에서 미국 의사가 집도하는 눈 수술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본 일이지만 수술 뒤 의사가 간호원에게 수고했다고 감사의 인사를 깍듯이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한국에 있을 때의 내 잘못을 반성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간호원들에게 무척 권위주의적인 의사였다. 나는 앞으로 귀국하면 생활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간호원 앞에서 좀처럼 웃는 일도 없었고, 수술 뒤 간호원에게 수고했다는 말은 더더구나 한 마디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제 때부터 줄곧 나는 간호원에게뿐 아니라, 일반 외래 환자에게도 권위주의적인 의사였었다. 틈만 생기면 간호원에 늘 환경을 "깨끗하게 훔치고 닦아야 한다"는 잔소리에 속하는 말만 되뇌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간호원으로부터 '영하 20도'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까지 했었다. 너무 차갑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같은 내 초인적인 면을 고쳐 보려고 하지 않고, 으레 의사는 그래야만 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에 가서 미국 의사들이 따뜻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그릇된 대인 관계로 살아왔는가를 알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나도 미국 의사들처럼 해 보리라 하고 결심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9남매를 가진 아주 다복스러운 집안이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9남매를 키우느라고 젊음을 활짝 누려 보지도 못하고,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쳐 온 내 아내에게 따뜻한 정이 흐르는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해 보지를 못했다.

미국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말끝마다 "댕큐"하고 고마움을 표시하는데, 나는 아내에게 그런 뜻을 건네 본 적도 없다. 애들과 함께 어울려 우스개를 섞어 아기자기한 대화를 나눠 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자라는 과정에서 나는 엄격한 아버지일 뿐, 손을 붙잡고 창경원을 가 보거나 무릎에 눕히고 무슨 옛날 이야기를 해 주거나, 노래를 함께 불러 보거나 한 기억이 별로 없으니, 애들에게 그같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다. 이제 80의 나이를 넘어, 간신히 아내와 아들딸들에게 좀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남편, 아버지 노릇을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서리기도 한다. 내 본심 속에는 늘 즐겁고 유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표시 안 되었던 까닭은 역시 오랜 유교적인 관습이 몸에 진하게 밴 탓이었을까? 무슨 핑계를 대도 내 책임은 면할 것 같지 않다.

나는 사회 생활에서도, 의사 생활에서도, 가정 생활에서도 친교 면에서는 확실히 낙제생이었던 것 같다.

미국 교육을 받은 뒤 나는, 자동차 운전 기사하고도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달라졌다. 박애 정신으로 실명자나 신체 장애자를 대하고 구체적인 친절과 봉사를 맡아 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만은 따뜻한 가장 노릇을 못 한 허물을 남기게 된 듯 하다. 내 이같은 허물을 감싸며 살아온 아내와, 나에게 오히려 정감을 보여 주려고 애쓰는 장성한 자식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내가 시간에 쫓기면서 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이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따분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연구 개발하려는 일들이 적어도 내 딴에는 민족 문화의 혁명을 꾀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한 일들이었다. 남들이 내가 타자기에 미쳤다고 간단히 말해 버리는 그 순간도 나는 뼈를 깎는 것 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였고, 입술이 타 들어가는 초조한 시간과 싸움이 벌어지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민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차원은 일신상의 영달이나 가정의 단란한 생활은 희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의거가 이루어지면 그 즉시로 자기 가정은 박살이 나고, 아내와 자식들은 알거지처럼 될 것을 알면서도 큰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이처럼 큰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체면치레나, 가정을 생각할 여지는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을 들먹이면서 내가 다하지 못한 가장의 허물을 면해 보려는 생각은 없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고

나는 자나깨나 한글을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훌륭한 것을 갖고도 소중하게 간수할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른 채, 500년간을 천대하며 보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민족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한글을 갖고 있으면서도 활용할 줄 모르는, 한자에 병든 지식층들이 국민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

깊은 뜻있는 분들이 한데 모여,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크게 문제 삼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세상 천지에 "훌륭한 제 나라 글자를 갖고도 제발 제 나라 글자를 좀 씁시다"하고 애원에 가까운 운동을 벌이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어디에 있을까? 제 나라 글을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한글 전용합시다"의 운동을 펼쳐야 하는 세월이 한스럽기만 하다. 요즘 온통 한글만 쓰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일반 신문 잡지, 단행본들이 다투어 한글 전용의 방향으로 흐르는 까닭은 그만큼 과학적인 실효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평소부터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이 즐겨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한글 기계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절로 한글 전용이 된다고 믿고, 합리적인 세벌식으로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 프로세서 등을 개발해 왔다. 요즈음은 세벌식 한글 전자 타자기도 개발했다. 편리한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우리 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은 곧잘 하면서도 실제는 천대를 일삼아 왔다. 나는 그같은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앞장을 서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 중에서는 한글 기계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그저 평범하게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있고 가장 큰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싶다.

우리의 숙원인 남북 통일도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고 있는 한 핏줄의 한글 민족의 통일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같은 동질적인 요소가 있기에 우리는 동족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같은 말과 글을 가진 것을 공통 분모로 삼고 통일을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과 북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사용하므로 이질적인 말과 글로 변해 가고 있다. 한글 맞춤법도 서로 달라졌고, 외래어 표기법도 서로 다르다. 표준어 제장을 서로 다르게 하여 대화도 안 될 상태로 변해 가고 있다. 북한에서는 표준어라 하지 않고 문화어라 해야 알아듣는다. 반면에 남한 사람들은 문화어가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 나라가 참민주주의 나라로 통일을 하려면 먼저 민주주의적 글자인 한글만 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시간을 가장 많이 절약할 수 있는 길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길밖에 없다. 그 동안 한글은 종교와 문화와 과학의 어머니 구실을 해 가며 뿌리를 내렸다. 고도의 기계 발달로 모든 문물이 발전한 미국을 볼 때, 우리 나라는 영문자보다 더욱 과학적인 기계화를 할 수 있는 한글 때문에, 고도 성장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피드 시대를 이겨내려면 한글 전용을 꼭 해야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컴퓨터 시대에서도 선두로 달릴 수 있는 기가 막히게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중국 글자의 종살이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 세종대왕께는 면목이 없다. 한글 전용을 해야만 최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글의 전산화도 가능한 것이다.

할 일은 많은데, 나의 여생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조금 후 하느님이 나를 불러간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는 한글을 위하여 시간을 보낼 것이며, 한글 기계화를 위한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몰두할 것이다.

식구들과 친구들까지도 이젠 연구는 그만하고, 좀 쉬면서 여생을 보내라고 권하고 있다. 나 자신도 너무 앞만 달리는 생활을 정지하고 좀 쉬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지 않다. 쉰다 쉰다 하면서도 쉬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갈 길은 바쁘고 할 일은 아직 산더미같이 앞에 가로놓여 있다 해도 차분하게 중요한 대목을 찾아 하나하나 헤쳐 나갈 생각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내 능력을 남김없이 다 발휘하여 무엇 하나라도 이 사회에 소용될 일을 하려고 한다. 쓸모 있는 구실을 하기 위해 지금도 새로 개발되어 나온 최신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설명서를 놓고 영어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것을 한글로 활용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긴 위한 내 나름대로의 소박한 일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평생 사업으로 결심하고 추진해 왔던 장님들을 위한 재활 문제를 더욱 구체화할 생각이다. 이들을 위해 나는 미국에서도 최첨단의 컴퓨터인 매킨토시로 한글 음성 컴퓨터를 개발 중에 있다. 맹인 복지 운동을 하고 있는 강영우 박사와 제휴한 프로젝트인데, 이같은 일을 성취하기 위해선 막대한 경비가 소용된다. 나는 서울 광나루 밖에 있는 약 20억 원 상당의 땅과 건물로 법인체를 만들어 맹인 재활의 꿈을 이룩해 보려고 한다.

어쨌든 살아오는 동안 사회의 여러 사람과 여러 분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이같은 방법으로라도 갚고 싶은 것이다. 요즈음 현대 경영에서는 자기가 얻은 이윤을 적당히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기업인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사회에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는 일을 할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는데, 나는 "내일 지구가 핵 폭발로 박살이 난다 해도 내 꿈을 심겠다"는 심정이다. 얼마만큼 나의 이같은 꿈을 이루다가 갈지는 몰라도,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할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것들

돈을 크게 벌어야겠다고 뜻을 세우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부류의 사람 가운데는 소원대로 크게 돈을 번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돈을 크게 벌어 보자고 욕심을 부려 본 적은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뾰족한 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이재에 속하는 신조가 있다. 돈보다 먼저 신용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기독교인은 아니더라도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는 10리를 함께 가 주는 마음가짐'으로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어떤 사업을 하든 간에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성의를 갖고 서비스를 하면 돈은 생기기 마련이다. 돈, 돈 한다고 돈이 몰려드는 것은 아니다. 밑도끝도 없는 돈 욕심에 노예가 될 뿐이다.

일단 돈을 벌었으면 영악하게 굴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유용하게 잘 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가족들에게 돈에 대해 무척 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용돈 주는 데도 엄한 규제를 많이 가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기도 했다. 돈에 여유가 있을 때라 하더라도 함부로 자식들에게 돈을 마구잡이로 주지는 않았다. 아마 자식들은 학창 시절을 돈이 모자라 궁색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애들에 대해서는 개성을 존중해 주는 자유 교육을 시킨 편이었다. 그들의 언동에 대해서도 별로 간섭하지 않았고, 스스로가 자유롭게 판단하며 자립해서 살아나가도록 유도했다. 한때 나는 내 형편으로는 엄청난 재산의 일부를 YMCA에 내주기도 했고, 한글학회에 4만 평의 금덩어리 같은 안성 논밭을 후회 없이 기부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자식들에게는 용돈 주는 데도 인색한 아버지 노릇을 하였으니 정말 이상하기만 하였을 것이다.

나는 사치를 싫어한다. 분수에 맞지 않게 허세만 부리며 사는 사람의 꼴은 정말 눈 뜨고 보아 넘길 수 없다. 돈을 무턱대고 물쓰듯 하는 사람을 몹시 경멸하고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옷 차림이나 구두 같은 겉치레에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신경을 안 쓴다. 내 일상 생활에서 넥타이를 매는 일은 거의 없다. 구멍난 양말을 여사로 신기도 한다. 일할 때는 작업하기 좋게 간편하고 헐렁한 옷을 입으면 그만이다. 한글 기계화를 위해 열을 띠고 있는 가난한 연구가를 만나게 되면 수천 달러씩 하는 컴퓨터를 선뜻 내주기도 하는 습벽만을 본다면 그야말로 손이 무척 큰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입 한 번 닦고 내버려야 하는 냅킨 종이 하나를 갖고도 휴지통에 곧바로 내버리지 않는 지독한 검약주의자다. 아무리 물질이 풍부한 미국에 산다 하더라도 낭비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맞먹는 일로 생각하고, 먹는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도 용인할 수 없었다. 어떤 물건이든 간에 소중히 간수하고 쓸 줄 알아야 한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덮어놓고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유행을 따라가며 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연구에 소용되거나 내 생활의 능률을 극대화시키는 데 이바지할 만한 새 아이디어의 상품이나 전자 계통의 새 상품에 대해서는 절제력을 잃을 정도로 대담하게 구입하기도 한다. 우리집에는 손바닥만한 사전 컴퓨터라든지, 여러 가지 편집 기능을 가진 소형 전자 타자기 등이 산재해 있다.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구입한다. 이는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연구 검토해 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역시 쓸 때 쓰고 아껴야 할 때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을 가치있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 개인이 돈을 쓰는 성향도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처음 미국을 다녀왔을 때, 아녀의 화장품이나 애들 선물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고, 맹인들을 위한 시계와 지팡이만 잔뜩 갖고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애들의 핀잔을 받은 적도 있지만 아내나 아들 딸들을 돌보지 않는 그런 무관심하고는 성질이 다른 것으로 대접받고 싶기도 하다.

아내에게 서양 화장품 크림이나 한두 개 들려 주고, 딸들에게 멋진 미제 블라우스를 선물해야만 가족에 대한 관심을 잘 표명한 것이 되는 것일까? 그것보다는 나는 우리 식구가 함께 갈 가옥을 수리하여, 서울에서 최초로 온수 보일러 장치를 하여 온 방을 덥게 하고, 부엌에서도 더운물이 콸콸 나오도록 개수한 일 따위가 진짜 가족을 위한 최상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는 귀국 후에 일어난 주거 생활의 일대 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생활해 오면서 돈을 벌고 또 돈을 썼다. 나는 돈을 내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있어야 살맛이 나는 사람은 아니다.

본시 돈은 돌고 도는 속성이 있기에, '돈'을 "돈"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하느님이 내려 주신 귀한 돈의 선물은 잘 쓰면 유용한 것이지만, 잘못 쓰면 악을 만드는 독물 구실을 하는 것이 돈이라고 생각한다.

미리 써 둔 내 유서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이같은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국 사람들은 유서에 대해서는 무감각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들이 없는 편이다. 미국 사람들은 평소에 젊은이들도 관습적으로 유서를 써 놓는다. 미국의 교포 사회에서는 유서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아, 유서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재산 처리가 힘들게 되는 경우를 가끔 보아 왔다.

나도 1953년도에 미국엘 갔다 와서는 '유서는 젊고 건강한 때라 하더라도 미리 써 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적미적 미루어 오다가, 80에 들어선 해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뉴욕에서 유서를 썼다. 좋고 옳은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서두르는 내 성향인데도, 유서에 한해서만은 오랜 한국의 습관과 영향 탓인지 예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내 한글 유서가 미국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영문 서식에 맞추어 정리를 해 달라고 뉴욕에 있는 정진우 변호사에게 착수금 150달러를 지불하고 맡겼다. 그는 무척 색다른 유서를 보게 되었다면서 보증인 두 사람을 정해 달라고 말했는데, 아직 보증인을 정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유서라고 하면 대개는 죽음 다음의 재산 처리에 관한 분배 문제를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내 유서는 재산에 관한 분배 문제는 별로 없고, 내가 죽음을 맞을 시간에서 장례 절차에 이르기까지의 문제들을 거론하였다. 내 유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동거 가족 또는 보호인은 다른 가족과 친척, 동무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둘째,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일절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일절 하지 말고, 아래 적은 순서로 가능한 방법을 골라, 주검을 처리할 것,

1) 주검 가운데 조직 또는 장기를, 다른 환자의 치료에 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척출한 뒤, 나머지 주검은 병리학 또는 해부학 교실에서 쓸 수 있도록 의과 대학에 제공할 것. 2)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죽은 뒤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화장 또는 수장이 불가능할 때에는 가장 가까운 공동 묘지에 매장한다. 단, 매장할 때에는 새옷으로 갈아 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관)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주검은 현장에서 100킬로미터 밖으로 운반을 못 한다. 현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밖에 서 사망하였을 때는 가급적 현지에서 위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하였을 때는 수장으로 삼고, 주검을 찾아내지 말 것. 3) 죽은 지 1개월 뒤에 가족, 친척, 동무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릴 것. 만일 매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화장한 것과 같은 경우로 알고, 아무에게도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 것. 화장을 하였을 때,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

셋째, 죽은 뒤, 내 유형 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 장애자들, 특히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내가 법적으로 지명한 집 행인과 협의해서 그것을 처분할 것.

나는 위와 같은 유서의 내용을 미리 자식들에게 알리고 가까운 친지에게도 공개를 했다. 그랬더니 자식들 가운데에는 반론을 펴는 애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고 불우한 남을 위해 유용하게 쓰고 간다는 평소의 내 지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재산 문제가 일체 생략된 유서란 점에 대해서는 별반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애들은 대체로 이런 점에 불만이라고 털어놓았다. 눈이나, 심장이나 신장 따위의 장기를 다른 생명을 위해 기증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위급한 상태에 빠졌을 때나, 죽었을 때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에게도 일체 알리지 말라고 적어 놓은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며, 묏자리를 잡는 경우라 하더라도 일체 남에게 묘지의 위치 등은 가르쳐 주지 말라는 것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죽은 뒤 내 주검 처리 같은 문제로 가족들이 먼 고국에서 와서 주검을 한국으로 옮겨가는 번거로운 짓을 못 하게 하기 위하여, 이같은 허례에 속하는 장례로 낭비를 일절 하지 말라는 뜻에서 유서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는데, 내 진의는 모르고 오히려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이 유서는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어 가지고 살 때에 써 놓은 것인데, 1989년 한국에서 영주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이 좀 달라질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나는 혼자서 이승을 하직할 것이고, 빈손으로 갈 사람인 것이다. 살아 있는 순간까지는 열심히 내 정신과 몸을 다하여 남에게 소용될 사람으로 살 것이며, 일단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누리를 하직할 때는 먼지만한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나고 싶다는 것 뿐이다. 죽은 뒤에는 이 누리에 아무것도 남겨 놓고 싶지 않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훌쩍 아주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친지는 후손들이나 후세인들에게 교육적인 뜻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묘지는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후진들에게 교육적인 업적을 남길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업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데 소비할 시간과 돈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과 돈을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 책을 만들어 보급하여 읽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가 몇 대조 공병우 할아버지의 무덤이다."

"우리 나라에서 속도 빠른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한 공병우 박사의 묘지다."

이같은 공시용이 되기 위해 무덤을 꾸미고 묘비를 세운다는 것은 아무리 교육적이란 말이 붙어도 나는 그리 달갑지 않다. 이런 것을 허례허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나에 관한 책을 만들어 내 뜻을 널리 펴 주기 바란다. 그것이 후손들에게 보다 더욱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서를 만들 때 나는 이렇다할 종교적인 생각은 곁들이지 않고 만들었다. 이제 나는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때여서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뜻을 새겨 보게도 되었다.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다. 나는 완전 무로 돌아가고 싶어 화장, 수장 등을 바란 사람이다.

나는 천주교 입교를 할 만큼 교리를 열심히 배우지는 못 했다. 그러나 기본이 되는 신조, 곧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늘 계신다는 점, 사람이 죽은 뒤에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점만은 믿고 있다.

내가 죽은 뒤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판정을 받게 될 것인가를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는 동안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사는 것이 되는 건지가 두려울 뿐이다.

나는 조상들이 허례허식에 소중한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꼭 할 일은 못 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자신이 먼저 이런 낭비의 관습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유서를 작성한 것이다.

호화로운 관을 쓰거나,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장례를 치르거나, 막대한 돈을 들여 커다란 비석을 세우거나, 공동 묘지를 기피하거나 하는 따위의 허례허식과 낭비를 나는 무척 싫어한다. 이 점을 자식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

사람의 목숨이란 오직 하느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분이 이렇게 나에게 오늘까지 삶을 허락해 주시는 까닭은 나에게 맡겨진 일을 조금 더 하고 떠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나는 아직도 미진한 한글 기계화의 일과 장님들의 재활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푹 좀 쉬다가 여생을 마치는 게 어때요?" 하고 권하는 동무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푹 쉬는 날은 지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있을 뿐이다. 그 때 가서야 비로소 실컷 푹 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제 12 장 내가 좋아하는 것들

꿩 사냥과 탁구

나를 너무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한 나머지, 나는 무슨 개인적인 취미나 기호 따위는 숫제 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나를 공부벌레 정도로만 생각한 때문일까? 누리하고 담을 쌓고 연구실에 처박혀 은둔 생활을 즐기는 꽁생원 정도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내가 먼저 놀라게 된다.

"아니, 공 선생님이 총 사냥을 다 하세요?"

"왜요? 뜻밖인가요? 난 새파랗게 젊었던 20대 시절부터 사냥을 시작했는걸요."

나는 꿩 사냥을 어린 10대 소년 시절부터 즐겼다. 산야를 누비고 다니면서 꿩 사냥을 한다는 것은 사나이다운 운동으로서, 사냥의 맛을 아는 이만이 아는 스릴과 쾌감이 따로 있다. 그래서 나는 사냥을 세계적인 운동으로 생각하고, 지금 이 80의 나이가 되어서도 꿩 사냥철이 되면 총을 둘러메고 산야로 간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거르지 않고 꿩 사냥을 즐겼다. 미국에서 멋진 곡예를 부려 가며 협조해 주던 사냥개를 대동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운동 삼아 인공 수렵장으로 나간다. 인공적인 꿩 사냥도 재미있지만, 인공적인 물오리 사냥이 더 재미가 있었다.

비록 늙은 몸이지만 일단 총을 메고 야산에 나서기만 하면 어디서 생기는 힘인지 생기가 돌아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사냥개를 기르는 방법, 사냥 훈련 방법, 명견을 만드는 방법, 사냥의 위험성 등과 아울러, 앉아 있는 꿩은 쏘지 않고 반드시 날려서 쏴야 한다는 운동 정신까지 말해 준다.

내가 아무리 60여 년의 수렵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젊을 때의 체력일 수는 없다. 마음만 훨훨 나는 것이지 해가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황해도 해주 도립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엔’’, 틈만 나면 꿩 사냥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그 뒤도 나는 줄곧 사냥을 즐겼다.

오늘날 사냥꾼들은, 사냥은 낮에 하고, 밤에는 반드시 총을 경찰서나 파출소에 보관해야 한다. 이는 낮에는 사냥꾼을 믿지만, 밤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된다. 전시도 아닌 평화 시대에 정부가 운동인들의 인권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제 나라 동포끼리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든 군사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실현되어야만 운동인 사냥도 제대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 수렵 단체에서 주관하는 전국 수렵 대회가 경부선 수원 남쪽 산야에서 개최된 적이 있었다. 백인제 선생, 이갑수 선생 등 사냥꾼 여러 사람이 어울러 안성땅의 부자 동무였던 박용복 씨가 지원한 트럭을 평택 기차 정거장 앞에서 타고 떠나서 안성군 산골에 가서 내렸다. 사냥개들은 너무나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모두 야단법석이었다. 우리는 꿩을 쏘기 위해서 각자 가고 싶은 방향으로 떠났다. 꿩 사냥에 좋은 날씨였다. 저녁때가 되어 약속 시간에 트럭이 있는 곳으로 모두 돌아왔다. 아침에 날뛰던 사냥개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자기 주인의 뒤꽁무니만 간신히 따라왔다.

사냥꾼들의 얼굴은 아침에는 피는 꽃처럼 환하던 것이 저녁때는 피곤하여 떨어지는 꽃처럼 변했다. 우리 일행 가운데에는 내가 12마리를 잡아 가장 성적이 좋았다. 같이 갔던 동무들은 두세 마리씩 잡았다. 모두가 트럭에 올라타고 평택 정거장을 향하여 떠났다. 꿩을 몇 마리 잡은 사람은 1등에 입상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5마리면 일등에 입상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잡은 꿩을 한 마리씩 나에게 던지면서 세 마리를 합해 15마리 잡았다고 보고하면 1등은 차지할 것이라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꿩을 잡으려고 종일 뛰어다니던 사냥개들은 자기 주인 옆에서 모두 고달픈 잠을 자고 있었다. 1등 입상에 욕심을 낸 동무들은 모두가 나에게 3마리만 더 합치라고 강요하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평택에서 우리 일행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꾼 전용칸에 올라탔다. 나는 동무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내 고집대로 12 마리만 보고했다. 수원 정거장을 종점으로 그곳에서 탄 사냥꾼들의 성적을 합쳐서 전체 성적이 발표되었다. 그날 나는 당당히 일본인 200여 명을 제치고 3등에 입상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찻간에 타고 있던 일본인 사냥꾼들이 술에 취해 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면서 분노하고 말았다.

"한국치들은 저희들이 잡은 것을 합쳐 가지고 3등에 입상하였을 거야."

"그럴 거야. 그것들이 혼자서 12마리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우리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 일본 사람들은 직업 포수들로서 인격이 가장 낮은 계급인데, 평소에도 한국 사람들을 깔보는 사람들이었다.

백인제 박사는,

"원 저럼 아니꼬운 놈들이……."

하면서 화를 참지 못하고 불끈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나는 얼른 백 선생님을 붙잡아 앉히면서

"우리가 정직하게 잘 한 이상 저것들이 술 취해 떠들어대는 무식한 소리에 흥분할 것 없어요. 전쟁도 얼마 안 남은 듯 하니 참읍시다."

라고 하며 말렸다. 싸움은 벌어지지 않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의 민족을 거짓말 잘 하고 속이기 잘하는 족속으로 멸시하려 드는 그들의 심보가 괘씸했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사냥에 대한 도덕적 양심이 적어서, 그런 의심이나 멸시를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당시 동무들이 권하는 것을 완고히 거절을 하였기 때문에 그나마 창피를 당하지 않고 양심에 아무 가책도 없이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만일 내가 그때 동무들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였더라면 1등에 입상하여 그야말로 크나큰 문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동무들의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처신하게 된 까닭은 경성 대학 안과 교실 하야 노 교수의 평소 이야기를 듣고 사냥의 운동 정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울에 사냥 클럽에 7개가 있었다. 하야노 선생이 회장으로 있던 경성 사냥 클럽은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교수들로 구성되어 7개 클럽 가운데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클럽으로 대우를 받았다. 하야노 회장은 "사냥은 아주 위험한 운동이기 때문에 서로 안전을 위하여 주의를 하여야 하고, 그리고 서로 믿을 수 있는 행동을 하여야만 신사적인 운동인으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 클럽은 꿩 잡기 내기를 할 때에도 각자가 그날 잡은 꿩 수를 보고하면 그것으로 시상을 하였다. 이렇게 신사도에 입각하여, 잡은 꿩 숫자를 각자가 심사하게 되어 있지, 누가 감시를 하거나 또 속이거나 하는 따위는 없는 그야말로 서로 신임하는 심사 제도였다. 각자가 잡은 숫자를 신고하면 그 숫자를 믿고 시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꿩 증식을 위하여 수꿩 잡기 내기를 하면서도 암꿩을 보호했다.

그 뒤 중앙선에서 사냥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원덕에 가서 22마리를 잡아 1등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 때도 나는 역시 소갈머리가 좁쌀만한 일부 일본인 사냥꾼들에게서, 이틀 동안 잡은 것이라고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주최측 간부들은 내 수렵 실력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냥은 2월말로 끝났다. 그해 3월 '사냥개 경기 대회'가 강원도 철원 벌판에서 메추리를 상대로 열렸다. 일본에서 심사 위원 세 사람을 초청하여 열린 메추리 사냥 경기로서 아주 큰 행사였다. 여기에서도 내 사냥개 '닥기'가 모든 참가 개를 물리치고 마지막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포인트 자세로 우승을 하였다. 금실로 만든 화려한 큰 우승기와 큰 우승컵을 받았다. 일본에서 권위 있는 사냥 전문 잡지의 표지에 닥기가 메추리에 멋지게 포인트한 사진까지 실려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내 과거 입상을 의심하던 일본 사람들도 "저런 명견을 가졌으니 입상이 당연하다면서 '명포수만이 명견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공 박사는 명포수임이 틀림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사냥개가 내 사냥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게끔 해 주었다.

나는 그때, 모략이란 것도 진실 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지기 마련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경험했었다.

경성 사냥 클럽은 안과 교실 '하야노' 교수가 회장이어서, 나는 그 인연으로 입회하였다. 의사, 변호사, 고급 관리들로 구성된 일급 명사들이 모인 수렵 클럽이어서 나 자신도 거기 가입한 것을 과분한 영예로 생각할 정도였다. 거기서는 영예뿐만 아니라 불문율에 속하는 예절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희한한 것이, 앞서도 말한, 잡은 꿩 숫자를 자신이 심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클럽은 대회 때 장끼(수꿩)만 잡게 되어 있어서 꿩의 번식을 늘리는 정신도 또한 배웠다. 이런 규칙을 다 잘 지키는 클럽은 우리 클럽뿐이었다. 나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꿩 사냥할 때 장끼만 잡는다. 해방 뒤 나는 이같은 운동을 벌려 보기도 했다. 사냥꾼들은 서로를 믿어 주는 그런 신사들이어서 수렵가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도 대단히 높았다.

그 무렵 꿩 사냥은 11월초부터 시작하였는데 사냥꾼들은 꿩 사냥 시기가 오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듯 했다.

우리 클럽 회원들이 일찍 10월중에 꿩 사냥을 먼저 하였다는 것은 사냥 도덕을 어느 클럽보다도 잘 지켰기 때문이었다.

해방 뒤에 나는 한국땅에 진주한 미군의 사령관이었던 하지 장군과 같이 사냥을 간 적이 있다. 하루는 하지 장군의 전속 부관이 찾아와 장군과 같이 사냥 가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냥개를 잘 다루면서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란 소리를 어디서 얻어들은 모양이었다. 꼭 사냥개를 데리고 나오라 는 것이었다. 의정부 근교 뫼에 올라 개를 앞세우고 꿩을 찾아 나가는데, 어디선가 비둘기 한 마리가 공중을 날아 내 머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겨 단발에 떨어뜨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하지 장군은 내 정확한 사격술에 감탄했다. 그런데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 장면이었다. 내 영리한 사냥개가 꿩을 찾기 위해서 활발히 뛰어 다니다가 꿩의 냄새를 맡고 갑자기 서서, 돌과 같이 굳어진 표정으로 포인트한 멋진 자세로, 꿩이 바로 자기 코앞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광경이었다. 사냥개는 자기가 서 있는 곳으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머리를 뒤로 돌려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하지가 가까이 가서 개에게 꿩을 날리라고 명령을 하니까, 뛰어들어가 꿩을 날렸다. 공중에 날아가던 꿩은 하지의 총알에 맞아 땅에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개는 떨어진 꿩을 물고 나에게 왔다. 나는 개의 머리를 쓸어 주면서 잘 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꿩을 받았다.

사냥개가 꿩을 찾아내는 활동 모습과, 찾아낸 순간과, 신중하게 주인과 연락하는 묘기, 그리고 떨어진 꿩을 물고 주인에게 오는 광경은 정말 멋진 기교에 속한다. 사냥이란 총으로 쏴 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개가 꿩을 찾는 활동 모습과 찾아낸 꿩을 쏘아 떨어뜨리도록 주인에게 연락해 주는 묘기, 그리고 떨어진 꿩을 찾아 가지고 입에 물고 오는 광경을 보는 맛도 즐길 줄 알아야 진짜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가축 병원이라고는 서울 본정동(지금의 충무로)에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곳으로 꼭 한 군데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엉터리인지 개의 뱃속에 있는 벌레 검사도 할 줄 모르고, 필라리아라고 하는 피 속에서 번식하고 있는 벌레도 검사하지 못했다. 나는 의학적인 기초 지식을 활용, 연구하여 사냥개의 각종 기생충을 떼 주었고, 고치지 못하는 개의 눈병도 내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랬더니 이 사실이 소문이 나 일본인 수렵가들이 개를 끌고 내 안과 병원을 찾아오는 웃지 못할 기현상도 일어났다. 어쨌든 나는 우리 나라 가축 병원 발전에도 본의 아니게 이바지한 셈이 되었다.

나는 일제 말엽에는 수렵 총연합회란 것을 만들어 종로구 회장이 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도 무시 못하는 한국 사냥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당당한 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나는 이밖에도 탁구를 무척 즐겼었고, 해우 도립 병원 시절에 직원 탁구 경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탁구는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멀리하게 되었지만 사냥만은 지금도 즐기고 있다.

한때는 골동품도 모았지만

내가 카메라에 취미를 붙이기 위해 촬영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일흔 살이 넘어서였다. 너무 열중하다 보니 취미 생활의 영역을 벗어나 사진 작가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장황하게 말한 대목이 있어서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해방 직후 박병래 선생의 영향을 받아 골동품 수집에 나선 일이 있다.

박병래 선생은 일제 때부터 성모 병원 원장을 지내신 분으로 해방 뒤에는 성 누가 병원을 독립 경영한 내과 전문의였다. 그런데 그는 골동품에 대한 식견이 대단하였고 골동품을 감정하는 식안도 높이 평가받는, 소문난 골동품 애호가였다. 나는 그분의 고귀한 취미에 반해 골동품에 대한 교양을 익히면서 골동품 수집의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나는 주로 고려 청자기의 신비한 빛깔과 모양에 도취하여 그것을 집중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며 모은 고려 청자를 6·25 전쟁통에 다 잃게 되었다.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부산 피난 시절에 갖고 내려갔는데, 수복 뒤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사업 실패를 하여, 남아 있던 것조차 그 때 송두리째 날리고 말았다.

누리에 아무리 보물이 있다 해도 전쟁에 휘말리고 나면 그것보다도 몇 갑절 더 귀중한 생명도 순식간에 없어지는 판국이니, 전쟁은 물질 문명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문화까지도 무참하게 말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물건들이 내 소유에서 벗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은 하면서도 그 서운한 마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진해질 때가 있다. 고려 청자들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우리 나라 선조들의 슬기와 예술적인 숨결이 깃든 고려 청자들이 임자를 잘 만나 살아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만일에라도 포연 속에 소멸되었으면 어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다.

나는 한때 연필깎이 기계를 수집한 적도 있었다. 각 나라마다 별의별 착상으로 고안된 것들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교육적인 교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아지고 비슷비슷한 것도 자꾸 생기게 되어 생활의 짐이 되어 중지했다. 이밖에도 자질구레한 것을 모아 보기도 하였다.

누리 각 나라의 이쑤시개를 모은 적도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유럽의 것들, 소다 마실 때 쓰이는 플라스틱 빨대처럼 생긴 것도 있고, 손잡이 부분을 조각한 것들도 있었다. 실용적인 것은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납작한 이쑤시개이다. 아주 좋은 것은 미국산으로 약국에서 주로 파는 하워드 존슨의 향나무 이쑤시개가 단연 일품일 것 같다. 나는 젊었을 때 이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약 8년 전 미국에 가 있을 때, 이가 건강을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철저히 관리하게 되었다. 잠자기 전에 이쑤시개나 실로 이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을 아주 중요한 일로 삼아 왔다. 그러다 보니 무슨 특별한 수집의 뜻을 세운 것도 아니었지만 자연히 이쑤시개가 모아지게 되었고, 외국 여행길에 올랐던 분들이 내가 이쑤시개를 모은다는 소리를 듣고 구해다 주기도 하여, 슬며시 이쑤시개 수집가가 되고 말았다. 요즈음은 치과용 물총 이쑤시개가 생겨 그것을 애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굳이 수집이랄 것까지는 못 되어도 내 연구에 쓰일 글자와 관계가 있는 전자 제품은 골고루 모으는 편이다. 볼 타자기가 새로 나왔다 하면 곧바로 샀고, 데지휠 타자기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선을 보였을 때도 바로 사서 그 원리를 간파한 다음, 한글 볼 타자기도 만들었고, 한글 데지휠 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아주 간편한 컴퓨터가 나왔을 때도 지체없이 사서 한글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레이저 프린터가 나왔다고 할 때도 그것으로 한글을 만들 수 있나 실험해 보기 위해 곧바로 사서 실험을 해 보기도 하였다.

내가 개발한 '세벌식 한글쓰기'는 컴퓨터의 버전이 바뀌고 기계의 모델이 바뀌어도 척척 작동이 잘 되기 때문에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같은 수집을 한 것이다.

단순한 것이 좋아

나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복잡한 것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복잡한 것을 대했을 때, 나는 피하지 않고 이것을 단순한 것으로 풀어 나간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가위로 싹독싹독 잘라 버리는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하게 엉킨 실의 방향을 하나 하나 관찰하고, 추적하면서 풀어 가는 단순함이다.

컴퓨터를 조작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돌발적으로 생기는 수가 많다. 더구나 컴퓨터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일일이 설명서를 보며 익히거나, 전문가의 가르침을 받거나 하면서 조작을 하다 보면 아닌 밤중에 컴퓨터가 난리를 칠 때가 있다. 정말 기막히는 노릇이다.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고 엉뚱한 글쇠를 함부로 누를 수도 없다. 잘못 눌렀다가는 몇 시간 동안 타자한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답답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새로 시작하는 그야말로 아주 단순한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단순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단순 처리 요령을 익히기 위해서 '어떤 조작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나?' 그 원칙을 찾느라고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사에서 단순하게 산다고 싹독싹독 자르거나, 내버리거나, 그만두거나 하다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사는 수가 많다. 복잡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캐 가지고 제거해야 잘못을 되밟지 않고 단순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말 한 마디 하는데도 뱅뱅 돌려서 암시적인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잘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복선을 깔고 말하는 사람의 말은 내 머리가 단순해 그런지 이해를 잘 못 해 되묻는 수가 많다. 나는 못 알아듣고도 알아들은 체 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 는 것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반드시 묻는다. 따라서 나는 남으로부터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는지 모른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않는 사람은 미덥지가 않다. 어물어물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분명치 않는 상태에서 얼렁뚱땅 넘겨 버리려 하는 꼴의 사람에게는 도무지 호감이 안 간다. 그러나 나도 한때 이럭저럭 사회 풍조에 따라 적당히 거짓말도 해 가며 산 적이 있었다.

해방 직후, 나는 그리던 내 나라를 찾게 되었으니, 세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아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하자고 정직하게 납세를 했다. 그 때 모두들 납세 신고를 속여서 하는 바람에, 내가 엉뚱하게도 재벌급을 제쳐놓고 서울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낸 사람 가운데 포함된 적이 있었다. 뒤에는 정직하게 신고한 나에게, 남들이 속이듯 나도 속였을 터이니 더 세금을 내라는 투의 고지서가 날아들기도 하였다. 그 때 나는 우리 사회가 정직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거짓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나도 거짓으로 엄살을 부려 사실보다 적게 신고를 해야만 세무서에서 제멋대로 매긴 이른바 인정과세가 내 진짜 수입하고 비슷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직한 사람을 못 살게 만드는 병든 사회, 이런 사회를 정화해야겠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물들어야만 살 수 있었던 사회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1953년에 미국에 가 석 달만 있다가 오겠다고 계획한 것이 1년 반이나 지내다 돌아오니, 공 안과 병원은 거의 망했고, 가정은 경제적으로 거덜나 있었다. 그같은 희생 위에서 미국 여행은,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탈바꿈시킨 계기가 되었다. 내 개인적인 성품, 내 처세의 방향이 모두 새로워진 것이었다. 또 다시 나는 정직하게 살아 보자는 것을 내 삶의 바탕으로 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며 살기로 했던 것이다. 양심이 명하는 대로 살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 생활 지침으로 삼아 온 것들은 앞서 말한 것들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다. 나는 상행위를 하는 데 있어 에누리하는 악습은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시간을 낭비해 가며 실랑이를 하게 되니, 거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길거리의 약장수들처럼 가격을 곱으로 불렀다가 반값으로 뚝 잘라 싸게 판다는 식의 거래는 제발 하지 않았으면 싶다. 꼭 받을 값을 정가로 매겨 놓고 팔 줄 알아야 우리 나라도 신용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엉터리없는 에누리 상거래는 제발 추방되었으면 한다. 심한 에누리를 당해 본 사람이면 물건을 살 때 으레 값을 턱없이 깎아야 된다는 식의 불신이 작용하기 마련이어서 서로 속임수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불신 사회를 부채질하는 에누리 거래는 하루빨리 추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엉거주춤하고 있는 상태를 싫어한다. 무엇이든 분명하게 결정하고 미리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고나 예약을 무척 중시한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예약을 해서 상대방의 일정에 이변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기가 한가롭다고 남도 한가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남의 집 방문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하는 서구식 예 법은 철저히 배워야 한다. 1년이나 2년 앞날의 극장 예약이나, 식당의 집회 예약을 하는 서구 사회의 계획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내일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일을 치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리 꾸미고 장만하고 예약하고 하는 일 때문에 당장에는 퍽 복잡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일을 단순하게 잘 풀어 주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추석날 극장 구경을 가면 몇 시간을 길거리에서 기다려야 표를 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약표를 살 줄을 모른다. 예약표를 미리 안 산 사람이 추석 당일 겪게 되는 복잡한 상황을 생각만 해 봐도 비능률적이고 비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현재 쓰고 있는 타자기 자판보다 30능률적이라고 표준 자판으로 인정을 받게 된 드보락 자판을 '간소화 자판'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서구 사람들은 생활 의식 속에서 생활 주변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오랜 관습 때문에, 또는 귀찮고 게을러서 좋은 길을 피해 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모든 점에서 손해보는 생활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의 전산화도 그렇다. 67자의 자소만 있으면 되는데 오히려 복잡하면서도 한글 갈자 총수의 25에 불과한 2350자의 완성형 글자만을 한글 표준 코드라 해 놓고 있으니, 시대를 역행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단순을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단순을 깔아뭉개고 복잡을 신주 모시듯 하는 것이다.

내 의식주 생활

(1) 작업복 인생

나는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청바지를 작업복으로서는 최상의 옷이라 생각한다. 구겨지지 않아 좋고, 앞쪽을 칼날처럼 줄을 세우지 않아도 좋다. 질겨서 아무렇게나 입어도 여간해서 잘 해지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는 어떤 분한테 물어 보았다.

"80 늙은이가 청바지를 입어도 흉이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리 경제적이고 활동적이라 해도 사회에서 관습상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가 있으면 어쩌나 해서 물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노인네가 입었다고 우스갯감이 되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옷이죠."

나는 대체로 옷에 관한 한 자유주의자이다. 보통 때는 작업복을 입고 일상을 지내고 있다.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출근 때의 복장을 보면 한결같이 신사복을 입고 있는데, 그것이 꼴불견으로 보인다. 해수욕장 모래밭 위에서는 신사복을 입은 사람이 꼴불견이듯, 그리고 등산길에서는 하이힐을 신은 여인이 꼴불견이듯이 말이다. 여성들이 시장 나들이를 하는데도 잔치에 갈 때처럼 꼬리 치마를 친친 감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어딘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집에서 연구에 골몰하고 있을 때 신사복에다 넥타이를 매는 일은 결단코 없다. 헐렁한 옷을 입고 있기가 일쑤이고, 허름한 것들을 걸치고 일에 임한다. 나는 우리 나라의 옷에 대한 사치가 세계 일급에 속한다고 본다. 미국 같은 부자 나라에서도 일반 서민들의 복장은 아주 검소하다. 출근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복장은 작업복 차림이다. 맞춤벌로 정장의 넥타이를 하고 출근하는 층은 외판원이나 장의사 직원 정도라고나 할까. 일반 가정 주부의 나들이옷도 간편 위주다. 빛깔과 모양새로 갈아입을 뿐이지 덮어놓고 고급만 찾지 않는다. 더욱이 여학생들의 복장은 검소한 옷이라기보다는 주로 간편한 옷을 입고 다닌다.

한국 여학생 복장이 너무 요란스럽고 화려한 까닭은 어찌된 연유일까? 미국의 여대생들의 옷차림은 한국 여대생에 비해 너무나 차이가 날 정도로 수수하기만 하다. '옷이 날개'란 속담이 있다. 이는 우리 나라 속담이 아니라 영국의 속담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옷을 잘 입으면 돋보인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떻게 입는 것이 '잘 입는 것'이냐에 달렸다. '잘 입는다'는 것은 각 사람의 심미적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돈 많이 주고 산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만이 '잘 입는 옷'이 되는 것일까? 나는 독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세 벌 신사'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세 벌의 옷만 입으면 된다는 것이다. 일할 때의 작업복과, 극장이나 식당 갈 때의 나들이옷과, 연회 때의 파티옷으로 이렇게 세 벌이다. 우리 나라 형편으로는 작업복과 나들이옷 정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쩌다 보니 한살이를 작업복 차림으로만 살아온 셈이다. 농업 학교 때는 학생복 자체가 작업복이었고, 의사가 된 뒤에도 실험실에나 진찰실에서 내내 하얀 가운을 입었다. 타자기 연구에 매여 살 때도 줄곧 일하기 편한 작업복 바람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어지간히 옷을 제대로 차려 입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일하는 데는 아주 편한 옷차림으로 한살이를 살아온 셈이다. 그야말로 작업복 인생으로 일관해 온 것이다.

(2)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나는 식성이 무척 좋은 편이다. 별로 가려먹는 것이 없다. 특히 좋아하는 요리는 장어 구이이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고추장이다. 중국 음식이나 일본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 우리 나라 약식도 좋아한다. 편식 안하고 골고루 이것 저것을 번갈아 가며 먹기를 좋아한다. 나이가 든 뒤에는 자연 건강식을 즐겨 먹고 있다. 신선한 채소류나 호도, 잣, 해바라기 씨, 땅콩 같은 부럼 종류를 좋아한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몇 년 동안을 자취 생활을 하였는데, 자취하기에 아주 편리한 시설인데다가 먹고 싶은 것을 골고루 손쉽게 해먹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간식으로는 가끔 옥수수를 쪄 먹기도 했다.

사람은 식생활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젊었을 때 1년에 한두 번 감기를 앓았고, 설사병도 얻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식생활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병의 대부분은 과식에서 오는 경우라 생각한다. 적게 먹어서 병나는 일은 별로 없다. 많이 먹는 것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나는 1955년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짜고 매운 김치와 간장을 먹는 식생활을 버리고 소금으로만 간을 맞춰 먹는 식생활로 바꿔 지금까지 지내고 있 다. 그당시 장독대를 없애는 것을 보고 공 박사가 미국 갔다 오더니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내 딴에는 가족까지 반대하는 식생활 개선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같은 식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혼자 자취하는 데 아무런 무리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 먹어 보던 미국 음식을 여유 있게 찾아 골고루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날마다 먹는 밥만 먹을 것이 아니라 번갈아가며 잡곡밥도 해 먹었고, 보리빵이나 보리죽도 즐겨 먹었다. 과일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영양 가치와 비타민의 함유를 계산해 가며 평형을 유지하는 식생활을 즐긴다.

(3) 북향집이면 어떤가

나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식생활뿐 아니라 주거 생활도 일대 변혁을 꾀해 가족 들과 친지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한옥집이었던 안채에 문지방을 없애고, 화장실을 마당에서 집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몇 해가 지나고 나니, 우리집이 주택 개선의 견본처럼 신문 잡지에 소개되곤 하였다.

삼청동 집을 살 때의 일이다. 주인이 팔겠다고 복덕방에 내놓은 지가 꽤 되었는데도 흥정이 잘 붙지 않는 집이라 했다. 값도 시가보다 싸게 내놓은 집이라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집을 보러 나갔다. 흥정이 잘 안 되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 집의 방향이 북향이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남향집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집 안팎을 샅샅이 살피면서 집의 환경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북향집이어서 오히려 가치가 있는 집이었다. 북쪽 창으로 내다보이는 북악산이며 삼각산이 아주 절경이었다. 마치 국립공원을 내 뒷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시세보다 싸게 팔려는 이 집을 지체하지 않고 계약을 했다. 이사를 하고 난 뒤, 그 집에서 지내다 보니 사시사철 변해 가는 자연 환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손님이 올 때마다 그점을 자랑하며, 북쪽 유리창을 통해 그림처럼 눈에 들어오는 북악산을 구경시키곤 하였다. 봄의 화사한 모습이며 신록으로 변해 가는 여름철의 싱그러운 풍경이며, 붉게 물들은 잎의 가을 모습, 그리고 흰눈을 그림처럼 얹고 있는 설경 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진짜 아름다운 북쪽의 자연 환경을 남향 선호로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결국 그같은 남향받이를 좋아하는 인습 덕분에 좋은 집을 시세보다도 싸게 사서 북향집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고독은 즐겁다

80 고령의 늙은이가 몇 해째 미국에서 자취 생활을 한다니까 "고생이 많으시겠어요"하고 동정적인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아마도 늙은이가 자취를 하고 있다니까 측은한 생각이 앞서는 모양이다. 한술 더 떠 "아니 사모님은 안 계세요?" 혹은 "딸들이 많다는데……" 하면서 우리 식구까지 들먹이는 이도 있다.

내가 하는 짓이 보기가 딱해 하는 말인 듯 하다. 물론 내 아내나 딸들은 나 혼자 자취를 해 가며 연구 생활을 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거들기 위해 내 곁에 있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내가 사양하는 편이다. 연구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날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따분하고, 무료한 심정을 미리 짐작하게 되니 내가 오히려 답답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자진해서 아내에게 서울의 아들집에 가서 요양하라고 권한 것이다. 그래도 나 혼자 미국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오지 말라고 해도 해마다 찾아오곤 하였다. 딸들도 아버지가 외롭게 계신다면서 쉬는 날에는 외손자나 외손녀들을 데리고 온다. 생활의 변화가 생겨 좋기는 하지만 자식들이 염려하듯 나는 고독한 마음에 사로잡혀 본 일은 없다. 혼자 살다 보면 방안팎이 서류나 책으로 온통 어질러져 있기 마련이다. 딸애들이 왔다 간 뒤에는 방이 한결 깨끗하고, 부엌도 말끔히 청소되어 있어 기분은 좋다. 그런데 무엇인가 찾으려면 내가 둔 곳에 없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이 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딸애들에게 집안이 너저분하더라도, 내가 해 둔 대로 치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너저분하게 나뒹굴고 있는 서류 하나 하나가 마구 내버려 둔 듯 해도 사실은 그 모두가 내 나름으로 분류하여 놓은 것이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처량하지도 않고, 짜증스럽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내 고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편리한 취사 시설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정말 내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다. 나는 참마음으로 고독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요 속에 잠길 수 있어 좋고, 연구를 하는 데도 고독한 분위기가 안성맞춤이다. 80이 지난 뒤부터는 내 나름대로 쉬고 싶을 때 쉬고, 눕고 싶을 때 누워야 편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실은 고독을 즐기는 때가 아닌가 싶다. 내 몸을 내 자신이 이끌 수 있는 건강이 있으니 자취를 하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자취를 하다가 마침내 병이 나기도 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퇴원 뒤에도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는데, 이 때는 자취를 할 수가 없었다. 미국땅에 있는 시집간 딸들이 일주일씩 번갈아 가며 나를 간호했다. 아무리 고독을 즐긴다 해도 건강할 때의 이야기지 일단 병이 나 침상에 누워 있게 되니 홀로 있는 병자는 비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딸들이 뜨거운 정성으로 교대로 간호를 해 준 덕분에 고독한 환자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며 키우지 못했는데도 환자가 된 이 아비를 위해 바치는 그들의 정성을 보고 있으려니 감개무량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미국 생활에 익숙해 있는 딸들이 나에게 보여 주는 효심이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 대견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울 때 혈육들이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도 떠들썩한 곳보다는 한적한 곳을 즐겨 찾는다. 고요를 찾아 내 생각을 다듬고 키우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남과 어울린다 해도 논쟁은 별로 안 하는 편이다. 정식으로 내 신념을 말하고, 내 주의 주장을 보호해야 할 때와 장소가 주어지면 내 소신을 밝힌다. 과학적인 내 신념 때문에 싸울 일이 있으면, 대체로 글을 통해 의견을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말 싸움질은 삼가는 편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우겨대기만 하는 사람을 상대로 논쟁을 하게 된다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내 건강 관리를 위해서도 피해야 할 일이다. 내 성미가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말할 재간도 없을 뿐 아니라, 성급해져서 혈압부터 올라가기가 십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일단 나하고 의기가 투합하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게 되면 그때는 백만 대군을 이끈 우군을 만난 듯 고독의 성문을 열고, 입에 거품이 일 정도로 반갑게 대화의 장을 펼치게 된다. 이런 분을 얻게 되는 순간 내 고독의 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혼자 왔다가 홀로 떠날 몸이다. 그야말로 고독하게 떠나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 나를 걱정해 주는 아내가 있고, 아들딸들이 있고, 내 연구를 격려해 주는 수많은 친지들과 동지들이 있는 한 나는 고독한 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혼자서 말벗 없이 자취를 해 가며 연구에 몰두해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 나는 진짜 고독의 맛을 누리면서 홀로 담담하게 떠날 연습을 서서히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에서 말했듯이 "보다 더 유유하게, 보다 더 마음대로" 지낼 줄 아는 진짜 고독의 슬기를 익혀야 할까보다.

시간은 생명이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발상 아래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발전해 왔다. 시간을 금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아껴 쓰고, 벌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사회다. 서구 사람들은 대체로 시간을 잘 쓸 줄 아는 슬기를 익히는 데 익숙해 있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미국 전체가 눈이 돌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바 선진 사회라는 나라를 가보면 모두가 바쁜 사람뿐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은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바쁜 기계 문명의 조직 속에서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 역할을 하느라고 한눈 팔 새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곧 재산이니 돈을 낭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은 곧 생명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도 1953년에 미국에 처음 가서 문명 생활이란 것을 체험한 뒤 떠오른 생각이다. 시간을 소중히 아껴 쓸 수 있도록 연구 개발하는 길이 곧 과학 문명의 길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우리 사람의 생명은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은 시시각각으로 단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고, "시간은 곧 생명이다"라는 글(1965. 4. 1. 한국일보)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죽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언제인지 모를 그 시간을 향해 살고 있으니 내 삶의 시간은 자꾸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 제한된 시간이 바로 생명이 허락된 시간인 것이다. 1시간 뒤가 생명이 끝나는 시각이라고 가정한다면, 내 생명은 1시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소중한 1시간을 찻집에서 약속 시간을 어긴 동무를 기다리는 데다 소비한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 되겠는가.

우리는 '코리안 타임'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시간 잘 지키지 않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폐풍을 무슨 애교스런 짓거리나 되는 것처럼 그런 이름까지 만들어 국제 사회에까지 진출시키려는 작태를 나는 몹시 부끄럽게 생각한다. 불명예스러운 코리안 타임이란 말은 어쩌다 우스갯소리로 한다 해도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시간 잘 지킬 줄 모르는 민족은 미개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본시 높은 수준의 문명 국가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강하지만,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시간 관념이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문명인은 돈보다도 시간을 더 소중하게 알지만, 미개한 사람은 시간보다도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에 있을 때 한인 교포들이 모이는 모든 행사는 예외가 없다고 할 정도로 시간 에누리들을 하는 것이었다. 교포 위문을 한다는 연예인들이 행사를 비롯해 사사로운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제 시간에 시작하지 않는다. 남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정도가 아니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자각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여러 단체에서는 가장 하찮은 일처럼 생각하기 쉬운 시간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운동을 벌였으면 좋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생활이란 곧 자기 생명을 그만큼 확대시켜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런 뜻에서 달구지를 타고 광화문에서 영등포까지밖에 못 갔는데 그 시간에 자동차를 타고 대구까지 가서 일을 보고 돌아왔다면 같은 시간에 삶을 더 많이 누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을 아낄 줄 아는 선진국 사람들은 미개한 나라 사람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갖고 더 많이 사는 꼴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생명처럼 쓸 줄 아는 슬기를 갖고 산다면 60년을 산다 해도 600년에 해당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이다. 시간을 금쪽처럼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다루듯 잘 다룰 줄 알아야 선진국의 국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약속 하나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 문명국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의식주 생활부터 모든 사회 활동에 이르기까지 가장 능률적으로 시간을 절약하는 습성을 익히고 키워야 한다. 시간 관념을 능률적으로 개선하는 문제도 연구 개발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글자 생활은 아직도 펜이나 연필로 글자를 쓰는 생활이다, 타자기나 컴퓨터로 글자를 만드는 선진국에 비해 적어도 50년은 뒤진 느낌이 든다. 글월 한 통을 쓰고, 상품 주문을 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엄청난 시간의 손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글자 생산 속도가 빠른 나라는 모두 일류 문명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소중함을 말해 왔다. 금언집에 나온 것만 해도 아주 많다. 근래에 나는 시간에 관한 어떤 철학 교수의 글도 읽었고 목사님의 설교도 들었다. 훌륭한 말씀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절약하는 유일한 방법이 기계화와 컴퓨터화에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 문제는 역시 내가 해야 할 몫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 연장을 다룰 줄 알고, 글자를 쓰는 특색이 있다. 연장을 통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글자 생활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엄청난 시간을 버는 것이 된다. 자동차, 비행기, 타자기, 컴퓨터 등은 모두 우리들의 작업 시간을 많이 단축시켜 주었다. 같은 시간에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니 그만큼 우리의 생명은 연장되는 셈이다. 하나 할 시간에 열을 할 수 있었고, 십리 갈 것을 백리를 갈 수 있는 인생을 보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은 돈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과 같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시간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한글의 과학화를 꾀하는 중요한 까닭의 하나가 생명처럼 여기는 시간을 온 국민이 모두 함께 효율적으로 절약하며 살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모든 문명의 이기는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도구이다. 우리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길뿐이다. 그것도 고성능으로 높은 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기계를 이용한다면, 그만큼 생명을 더욱 길게 연장시키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반평생 동안 고성능 한글 기계의 개발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은 바로 고성능 기계로 생명처럼 소중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내 건강 관리

내가 한국의 평균 수명 연령보다 초과해서 좀 오래 살게 되다 보니 "선생님의 장수 비결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당한 답변을 찾지 못해 어물어물거리기가 일쑤이다. 왜냐하면 나는 장수만을 위해 특별히 비결을 탐구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을 소중히 건사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내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해 왔을 뿐이다.

젊었을 때는 탁구 같은 운동을 즐기기도 했지만, 장년기 이후에는 이렇다할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날마다 하기에 간편하다고 하는 정규적인 맨손 체조조차 별로 안 하는 편이다. 다만 제멋대로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허리를 굽히거나 돌리는 운동을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할 뿐이다.

미국에서 자취를 할 때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사 가지고 식품점과 우체국엘 운동 삼아 타고 다녔다. 집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운동 삼아 부엌이나 응접실에도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라도 걸어다닌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본시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육체를 만든다"는 고전이 잘못 와전된 것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밝고, 바람에 차 있어야 오래 산다. 지지리 궁상으로 걱정만 일삼고, 화를 잘 내고, 욕심을 다 채우려 드는 사람은 건강을 해치기 일쑤다. 양심이 명하는 소리에 순종하고 자기가 맡은 소임을 성실히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실망하지 않고 극복해 나갈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면 신체적인 건강도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수영장에 안 다니고 골프장에 안 나가도 신체 관리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건강 관리는 정신 건강부터'라는 구호를 앞세운다. 모든 면에서 절제를 할 줄 아는 정신력이 작동해야 신체 건강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할 일 제쳐놓고 대낮부터 술을 퍼 마시는 사람은 폐인을 자초한다.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건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책을 통해 정신 건강을 위한 영양소를 담뿍 얻을 수 있기 때문이 다. 책읽기는 내 인생을 살찌게 해 주었고, 내 정신적 건강을 지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나를 긍정적인 인생관으로 이끌어 신체적인 건강까지 유지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에 내 건강과 관련된 약에 대해 말하고 싶다. 흔히 감기약으로 또는 해열제로 많이 복용하는 아스피린에 관한 이야기이다. 1983년경이었던 가? 전두환이 하는 짓거리가 못마땅해 있을 무렵이다.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꿈에 뱀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더니 몸이 마비가 되어 있었다. 반신불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 소식에 놀란 딸이 달려와 의사 루를 찾아갔다. 진찰 결과 머리 속의 모세혈관이 막힌 증상이라 했다. 그 때 그 의사는 날마다 아스피린 세 알씩을 먹으라는 처방을 내려 주었다.

"아니 핏줄이 막힌 중대한 병에 감기 걸렸을 때 손쉽게 먹는 아스피린이라니?"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약이 대단히 세계적인 명약이란 것을 나중에 알고 크게 놀랐다.

필라델피아에 온 뒤, 내 주치의로 정해진 최도식 박사도 아스피린을 날마다 복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었다. 뉴욕 생활 이후 나는 지금까지 줄곧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있다. 피가 응고하기 쉬운 50대 이후의 친지를 만나게 되면 으레 아스피린을 먹느냐고 묻고, 안 먹고 있다면 날마다 한 알씩이라도 먹으라고 권고를 하곤 했다.

아스피린은 누리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의약품이다. 미국에서 1년 동안에 판매되는 아스피린은 무려 2백억 개에 달한다고 하니 한 사람이 한해에 100알 꼴로 먹는 흔한 약이다. 물론 이 약은 머리 아플 때나 오열이 날 때, 생리통, 이가 아플 때, 류마티스성 관절염 등의 통증을 없애는 작용을 한다. 그렇지만 이 약을 빈 속에 먹으면 위에 이상을 일으켜 위가 쓰리고 아픈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단다. 또 귀울림병 부작용도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아스피린이 뇌일혈이나, 심장마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혈소판의 작용을 저하시켜 피 응고를 방지함으로써 피 응고가 초래하는 뇌일혈이나 심장마비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나는 아스피린을 대단한 약으로 여기고 반드시 소중한 가정 상비약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야말로 아스피린은 만병통치에 가까운 혁명적인 약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10대 청소년들에게 잘 걸리는 레이 증후군은 치킨팍스나 유행성 감기를 앓고 난 뒤에 일어나는데, 이런 환자에게는 아스피린이 도리어 독약 구실을 한다 해서 절대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니 조심해야 할 약이기도 하다. 하찮은 감기약 정도로 생각하고 애들이 손을 댈 수 있게 함부로 이 약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린이가 너무 많이 먹게 되면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아스피린 덕분에 뇌혈맥의 경색증도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있으니 이것을 양약 중의 양약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가 좋은 것도 오복의 하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나는 비교적 이가 건강한 편이다. 어금니 하나만 뺐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튼튼하다. 이가 상하게 되는 까닭은 밤 사이에 이에 낀 찌꺼기들이 썩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안을 늘 청소를 해야 한다. 세균이 많은 입 속이어서 청소하지 않으면 독소가 생긴다. 나는 이 청소에 대해서 아주 신경을 써 온 편이고, 청소 기구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각종 이쑤시개, 이치개 실, 수력 이치개 등등…… 덕분에 나는 80 넘어서도 내 이로 갈비까지 뜯을 수 있는 복을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음식물을 많이 먹지 않고 조금씩 여러 차례 먹는 색다른 식사법을 갖고 있다. 과식은 만병의 근원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건강 유지를 위해서 철저하게 과식을 삼가며 살아왔다.

나는 이밖에도 1년에 한두 번 한방약인 보약을 달여 먹기도 한다. 양의사라고 해서 한방을 덮어놓고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과학이 파헤치지 못한 부분이 많을 뿐이지 결코 비과학적인 분야는 아닌 것이다. 나는 한방으로 처방한 보약을 먹고 많은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 13 장 내 가슴은 영원히 뜨겁다

장님과 맹인

'장님'이란 말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장님들을 위한 재활 종목을 꾸미고 있을 무렵, 장님 한 분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귀띔해 주는 것이었다.

"박사님! 앞으로는 장님이라고 하지 마시고 맹인이라고 하세요. 장님이라 하면 좀 야하게 들리는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장님'이란 말이 야하게 들린다니, 내가 마치 실명자를 함부로 대하는 듯한 말투가 되었단 말인가? 그 뒤 나는 국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에게 장님이란 말을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분은 오히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는 것이었다. '장님'이 순수한 우리말인데, 우리말을 쓰면 덮어놓고 낮잡아 보는 말글 습관이 한탄스럽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해서 다 품위 있는 말일 수는 없지만, 장님이란 말만은 우리말 가운데에서도 존댓말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봉사나 소경이라고 하지만, 높임말로는 장님이라고 한다면서, 직접 사전까지 찾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과연 사전에도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써 온, 눈먼 분에 대한 높임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왜 우리는 같은 말도 한문에서 온 말은 고급말로 삼고, 순수한 우리말은 하찮은 속된 말로 취급하려 드는 것일까. 같은 값이면 우리말을 알맞게 찾아 쓰는 것이 유식한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맹인이란 말보다 장님이란 낱말이 더 정이 깃든 존댓말이란 점을 서로 알아야 장님 자신도 즐거울 것이다. 장님이란 말을 야한 말투라고 생각하는 장님은 그동안 이 좋은 말을 불쾌하게만 받아들였을 터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멀쩡한 낱말의 뜻이 잘못 이해되면, 큰 오해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계기였다.

나는 한글 성경에서 채택하고 있는 소경이란 말도 좋지만, 그보다도 더 높임말인 '장님'이란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두는 콩으로, 소두는 팥으로 백미는 입쌀로, 대중이 쓰는 말을 애용할 줄 아는 말글 생활로 하루바삐 바뀌어야 진정한 의미의 민중의 나라, 민주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한자말 중심의 귀족주의는, 우리의 일상 말글 생활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문둥병 환자라면 언짢고, 나환자라면 대접받는 말로 들린다는 것도 한자말에 대한 사대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장님들을 위한 일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인데, '장님'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실명자들을 깔보는 듯한 인상을 일부 장님에게 주었다는 것은 무척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나는 그 동안 우리의 글을 애지중지하면서 기계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과학적인 우리글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글자 만드는 기계를 연구하며 한살이를 살아왔다. 그런데 장님 문제에 부딪치면서 나는 우리글에 못지 않게 우리말도 아끼고 다듬고 사랑할 줄 아는 운동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말은 외국말에 밀리고, 거기다가 한자말에 눌리고 시달리다 못해 죽어 버린 말까지 있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말이 앉을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공기만 오염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오염 상태도 큰 문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우리말 순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내 나름대로의 할 몫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글을 사랑하듯, 우리말도 사랑해야겠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겨레의 얼을 살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명자에게 재활의 꿈을

1953년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여러 가지를 깨닫게도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이 눈먼 이에게 희망을 주는 장님 재활 의학 분야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때까지는 눈 치료만 할 줄 아는 안과 의사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손을 툭툭 털고 실명 선언만 하면 그만이었다. 미국에서 나는 실명자에게 베푸는 각종 재활 종목에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눈먼 환자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돌이켜보니 마치 무슨 큰 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게 온 환자 가운데에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실명 선고를 받고 온 사람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서울에 가서 공 박사의 진찰이라도 한 번 받아 보고 싶다'면서 논밭을 팔거나, 소를 팔아 가지고 병원에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으로 울부짖는 이 실명자를 앞에 두고 의사로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냉정하게 진찰 결과만 말해 주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나는 재활 의학에 백지 상태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재활 의학에 눈을 뜨게 된 나는 그제야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 재산을 다 처분해서라도 장님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곧 귀국했다.

나는 곧바로 서울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에 2천여 평 땅을 마련하고 '맹인 부흥원'을 설립했다. 여기서는 점자 타자기와 한글 타자기 등을 가르치면서, 장님들이 일반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장을 계획하였다. 눈먼 사람은 으레 밤에 피리를 불며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안마사 노릇밖에는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회 통념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이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당당한 일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보건사회부는 미국의 해외 맹인 재단의 간부진들로부터 '맹인 재활 센터'를 만들어 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부 관리들이 곧 착수할 것이라고 답변하면서 차일피일 미루어 온 것이 어느덧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럴 무렵 나는 이 맹인 부흥원을 본격적인 '맹인 재활 센터'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 대만, 홍콩 등지에 견학 여행을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대체 맹인 재활 센터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살펴 보기 위해서였다. 그 가운데 아직껏 인상에 남는 곳은 홍콩의 맹인 재활원 이었다. 독일의 종교 단체의 원조로 운영되고 있는 이 맹인 재활원은 아주 경치 좋은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설이나 운영하는 방식이 너무나 조직적이고 현대적이었다. 고급으로 깨끗하게 운영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탄하였다. 돈만 있다고 이렇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참마음으로 장님들을 돕겠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 기관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깊이 느꼈다. 이 기관을 보고 나서, 돈보다도 더 귀한 사랑이 있어야만 그런 기관을 만들 수 있겠다는 점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갖고 있던 내 부동산을 모두 팔았다. 그리고 일본인 전문가 기무라 씨를 초빙해서 건축과 특수 시설을 만들었다. 물론 기숙사 설비까지 갖춘 맹인 재활원을 만들었다. 그 때 지은 건물이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그 당시는 장님들을 위해서 너무 사치스러운 시설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해외 맹인 재단은 정부 차원에서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맹인 재활 센터를 공 박사 개인이 만들었다고 반가워하면서, 1만 달러의 지원금을 보내 왔다. 본래 법인체 같은 기관에만 후원을 하게 되어 있는 규칙을 깨고 개인 사업체에 목돈을 보내 온 것이었다. 일은 점점 늘어나고 개인 사업체로는 감당할 길이 없을 정도로 커 갔다. 그래서 법인체 재단으로 발전시켜 내 개인 사업이 아니라 법인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법적인 수속을 하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독재 정권의 관리들이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것이었다.

"모 재벌은 문화 재단이란 것을 만들어 탈세를 일삼고 있다……"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하면서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탈세를 하고 있는 증거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이지 실명자들을 위한 재활원을 법인체로 들겠다는데,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떤 딴 뜻이 숨어 있어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부패한 관리들과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법인체 수속을 아예 단념하고 말았다. 여러 안과 의사들에게 자진 봉사를 하면서 실명자에게 재활의 길을 열어 보자고 자치적인 사회 운동을 호소도 해 봤으나 재활 센터를 돕겠다는 사람은 나서지 않았다. 이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장님들을 위한 재활 교육은 착착 진행되었다.

현재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저명 인사로 알려진 교육학 박사 강영우 씨나, 철학 박사 전재경 씨 등은 모두 이 때의 장님 학생들이었다. 강 박사는 이 때의 사정을 그의 자서전([빛은 내 가슴에] 42쪽)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천호동 소재 공병우 박사께서 운영하시는 맹인 부흥원에 가서 점자와 타자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월 2만 5천 환을 내야 하는데 낼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중략) 1962년 1월, 4년간에 걸친 시력 회복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 갔더니 맹인 교사가 한 분 계셨는데 건국대학 역사학과에 재학 중이라 하였다. 학생은 나를 포함하여 8명이었다. 그날부터 열심히 한글 타자와 한글 점자 쓰기와 읽기를 연습하였다. 한 달이 지나자 한글 타자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점자도 속도는 느리지만 쓸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실명하면 영영 글을 못 쓰게 될 줄 알았는데 한 달도 못 되어 한글 타자로 편지를 써서 이러한 회신을 받고 보니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였다. (중략) 맹인 부흥원에서 얻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맹인이 되어 자아에 큰 손상을 입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창립자이신 공병우 박사께서는 가끔 방문하시어 원생이 지은 식사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오락도 즐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맹인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으며, 내 자신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사인 전재경 씨는 맹인 대학생으로 맹인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나에게 제시해 주었으며 일요일에는 그분이 속해 있는 퀘이커 모임에 데리고 갔다. 기초 재활에 필수적인 한글 타자기 사용법과 점자 쓰기를 배워, 그 해 3월 서울 맹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강영우 박사는 이 밖에도 내 기억에 전혀 없는 일까지 회상하고 있어 그런 일도 있었던가 싶어 맹인 재활원 초창기 시절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그는 이어 또 이같은 일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나와 함께 다른 맹인 세 명이 그곳을 떠나 서울 맹학교로 가는데 공 박사님이 자가용을 내 주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날 사모님이 아들 학교 일로 그 차를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맹인들을 위해 빌려주었다고 한다."

이 글은 그 당시 자동차가 얼마나 귀했던가를 말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 의사로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맹인 재활 센터 출신으로 장님 목사 한 분이 계신다. 김선태 목사는 10살 때 실명이 되어 맹인 재활 센터에 와 타자기를 배웠다. 약 3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공 박사는 우리들의 식생활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셨다. 날오이가 몸에 좋다고 한 말씀을 듣고 즐겨 먹던 생각이 난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현재 예장계 실로암 안과 병원에서 자기 자신처럼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또한 훌륭한 사업으로 아주 밝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쨌든 나는 그 당시 심혈을 기울여 맹인 재활 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한글 타자기로 말미암아,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병원 운영이 잘 되어야만 재활 센터의 유지도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집중적으로 병원 재건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재활 센터의 젖줄인 모체를 살리기 위해 나는 숫제 병원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안간힘을 다해 병원 운영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 뒤 나는 안과 의사가 된 둘째 아들 영태에게 병원을 떠맡기고 말았다(77년). 이 때는 카메라를 짊어지고 카메라 유람을 하던 때였다. 이러다가 80년에 이 재활 센터마저 병원을 맡은 내 아들에게 인계하고 그 이듬해에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맹인 재활 센터를 공 안과 병원의 부설 기관으로 편성하고 재활 센터의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불하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가 있던 1983년 운영난으로 결국 천호동에 있는 맹인 재활 센터는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요즘 전에 하다가 중단된 장님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다시 재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여생을 이들의 재활을 위해 바칠 생각이다. 전에는 주로 타자기를 갖고 그들의 재활 종목을 짰었지만, 이번에는 주로 컴퓨터 교육으로 이들의 재활을 도울 생각이다. 나는 장님 강영우 박사와 손을 맞잡고 한글 음성 컴퓨터까지 개발하면서 이 일의 일부를 진행시키고 있다.

신체 장애자를 도울 줄 아는 사회

서울 올림픽은 과연 세계적인 박수감이었다. 그러나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장애자 올림픽 때는 그 열기가 대수롭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몸이 성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장애자들을 더 도와주고 더 격려해 주고 더 위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문화 사회라 할 수 있다. 나보다 덜 건강하거나, 온전치 못한 불구의 몸인 장애자들을 참마음으로 도울 줄 알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돈을 듬뿍 들여 화려하게 신체 장애자 올림픽이나 치렀다고 문화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침 출근길에 장님을 보고는 침을 뱉으며 "에이,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불구인 애가 무관심한 가족을 향해 악을 썼다 해서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병신 육갑하네"로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세상 천지 어디에 병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그 모습을 흉내내며 얼씨구 좋다 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보다 온전치 못한 장애자를 조롱하며 추는 이른바 병신춤이란, 정말 불구자를 가슴아프게 하는 비인도적인 짓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수많은 발명품들은 대부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타자기의 발명도 그렇고,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나는 되도록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을 개발하기로 하였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IBM 회사에서 만든 전동 점자 타자기는 2천 달러가 넘는 고가였다. 그래서 나는 장님들이 150달러 정도의 싼 값으로 사서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수동식 타자기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명하였다. 프랑스에 있는 전세계 맹인 기관 본부에서 이 소식을 듣고 견본을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나는 즉시 견본을 보냈다. 본부에서는, 이렇게 싼값으로 만들 수 있는 점자 타자기를, 세계적으로 나가는 기관지 신문에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뒤 누리 각 나라에서 글월이 많이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타자기의 표준 자판 문제로 정신을 딴 데 쓸 경황이 없던 때여서, 결국 이것을 세계적으로 보급시키지는 못하고 말았다.

나는 중국의 장님들을 위해 중국의 주음 부호 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해서 중화민국 장경국 총통 비서실장으로부터 감사장과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일본의 장님들과 한국의 장님들의 친선 타자기 경기 대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단연 한글 타자수들에게 우승의 영광이 돌아왔다. 그러나 타자 속도의 우열을 따지기 위한 경연 대회라기보다는 장님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자는 사회적인 큰 뜻이 숨어 있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1988년 미국에 있을 때 나는 한 손만 가진 사람을 위한 '한손 한글 쓰기'를 매킨토시용 무른모로 개발하였다. 사회에는 한 손만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두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쪽 손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손만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손쉽고 편리하게 능률적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한 미국의 드보락 박사의 업적을 본받아, 나는 매킨토시 컴퓨터에 쓸 수 있는 '한글쓰기'를 새로 연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손으로 글자 판을 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한글쓰기 무른모를 개발한 것이다. 오른손만 쓸 수 있는 사람과 왼손만 쓸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여 두 가지를 만들어 누리에 공표를 하면서, 컴퓨터를 갖고 있는 희망자에게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한국에서 한겨레 신문을 보고 미국의 내 연구소로 문의 글월이 다섯 사람으로부터 왔다. 이 가운데에는 대학 시절에 스카이다이빙을 하다가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채 떨어져 손과 팔에 큰 손상을 입은 젊은이도 끼어 있었다. 나는 곧 그의 마비된 손가락의 증상을 소상하게 알아보고 그에게 알맞은 타자기를 기증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좀 오래 된 이야기지만 벙어리 어린이를 교육시키는 사설 학교가 명일동(?)에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정신 박약아까지 겸한 애들도 있었고, 반벙어리에 속하는 애들도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고 목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벙어리 애들을 특수한 구화 방법으로 교육을 열심히 시키는 최병문 씨란 분이 있었는데, 나는 그의 노력에 감탄하여 땅을 천 평 기증했다.

그 때 마침 YMCA에서도 젊은이들을 위한 지역 사회 복지 사업의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기관을 위해, 내가 가진 부동산 천 평을 기증했다. 내가 직접 하지 못하는 좋은 일을 어느 단체이건 또는 개인이건 한다는 것은 나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니, 이같은 방법으로 나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 사설 기관인 구화 학교는 기숙사를 짓고 잘 발전시켰다. 그러나 YMCA는 그 땅을 팔아 환전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시설 확충에 유용하게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요즈음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장님들을 위한 음성 컴퓨터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것은 첨단 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도저히 내가 근접하기 힘든 분야이긴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장님 누리에서는 타자하는 대로 소리가 나오는 마술 단지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장님 사회에 선을 보이고 싶었다. 한글 음성 컴퓨터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문명의 이기로 장님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컴퓨터의 첨단 기술에 대해 캄캄하 다 하더라도, 영어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글은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적인 신념만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 한글 설계를 미국의 루즈벨 대학 포크 박사에게 의뢰하여 시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결국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을 돕고, 나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밀어 주고, 불구인 사람을 격려해 주고, 신체 장애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그런 사회가 곧 우리가 바라고 있는 민주 시민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나나 내 가족이 그와 같은 지경에 빠졌을 때에 나를 돕고 나를 밀어 주고 나를 격려해 주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남을 도울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 나라도 참된 민주주의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운 북녘땅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사는 동안, 7촌 조카 사위인 김원일 목사를 만났다. 혈맥의 촌수를 따져 7촌 조카 사위이지 나와 엇비슷하게 늙어 가는 처지이다. 그는 월남하여 서울 을지로 4가에서 화원 소아과를 개업한 의사였다. 그러면서도 뜻한 바 있어 의사의 신분으로 밤에는 한국 신학 대학엘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하여 목사가 된 분이다. 의사로 있으면서 서울 성북구 미아리 빈민촌에 미아리 교회를 창설하고, 주말이면 무료 진료를 해 주고 교회를 시무했던 그야말로 뜻을 갖고 살아온 굳건한 의지의 소유자이다. 필라델피아의 드렉슬 대학 교수로 있는 아들(Dr. Roy Kim) 집 근방에 살다가 지금은 뉴욕에 가 살면서 조국 통일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우리 두 늙은이는 이산 가족들이 40년 동안 부모 형제를 만나지도 못하고 또 이북 고향땅도 오고가지 못하게 된 우리의 운명에 대해 한숨지으며 말을 나누었다. 말하는 가운데 우리 둘은 의기투합이 되었고 조국의 민주화나 통일에 대해 우리도 무엇인가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한 몫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닌게아니라 우리 늙은이들의 세대가 지나가면 북녘의 혈육을 찾거나, 자기가 살던 고향을 찾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는 남과 북의 벽은 더욱 굳어질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수많은 혈육과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이며, 김 목사도 자식을 이북에 남겨 둔 채로 40여 년이란 세월을 흘려 보낸 한맺힌 이산가족이다.

때마침 캐나다에서 발행하는 뉴 코리아 타임스에 이산가족을 찾아 준다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뜻하지 않은 광고에 놀랐고, 어떤 바람의 실마리를 잡은 듯이 기뻤다. 나는 이 신문사가 펼친 일이 가치 있는 일처럼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남한의 정부 당국자나 이북의 당국자들은 이같은 사업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가 궁금해서, 전두환과 뉴욕에 나와 있는 북한 대표부 앞으로 몇 가지 의견을 묻는 설문지를 보냈다. 1982년 6월 6일의 일이다. 내 딴에는 무척 신중을 기한 것이었지만, 양쪽 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 회답이 없었다. 다만 훨씬 뒤에 북한 대표부 측에서 직원이 직접 와서 말을 해 주었다. 그 뒤 FBI 사람이 찾아와서 북쪽의 회답을 가져 온 사람과 내가 서로 대화한 내용을 물어 보고 갔다. 유엔 대표부에 와 있는 북쪽 사람들은 뉴욕에서 25마일 밖으로 일체 여행을 못하도록 행동이 제한되어 있었다. 북쪽의 응답은 물론 대찬성이라 했다. 나도 수사 기관 사람에게 숨길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를 다 설명해 주었다. 내가 양쪽에 낸 질 문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본인은 70이 넘은 남한 시민으로서, 최근 동봉 사본과 같은 광고를 뉴 코리아 타임스에서 보고, 이북에 있는 가족을 찾을 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고,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실로 민족의 비극을 해소해 주는 멋진 복지 사회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귀하에게 문의하는 바입니다. 바쁘시지만 답을 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1) 우리 정부는 반대하는 사업이다. ( ) 2) 우리 정부에서 반대하지만 묵인하고 있다. ( ) 3)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무관심하다. ( ) 4) 찬성은 하지만 후원은 하지 아니한다. ( ) 5) 적극 찬성과 적극 후원을 하고 있다. ( ) 6) 혹시 반대하신다면 그 사유는?

나는 1983년도에는 이산 가족 찾기가 하나의 운동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자작 호소문을 만들어 뿌려 보기도 하였다. 그 때 나는 77세였다. 호소문에는 이같은 말을 써넣었다.

"본인은 8·15 해방 전부터 고향인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을 떠나, 서울에 와서 공 안과 병원을 개업하다가, 지금은 뉴욕에 와 있습니다. 고향에 있는 형제, 친척들의 소식을 알아보고, 편지라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는 우리 나라 우리 고향땅에 우리가 서로 드나들지 못하고, 편지 한 장 교환할 수 없어 소식조차 모르고,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니 실로 기가 막합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이런 민족적인 비극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습니까? 총칼과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군사 독재 정부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공산 독재 일당인가요? 아니면 미국과 일본인가요? 소련과 중공인가요? 아니면 우리 국민 자신들의 잘못에 있는 건가요?"

나는 대체로 무슨 이야기를 할 때는 직설적인 편이어서 군사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의 목소리도 대체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한 번은 전두환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말해 주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다.

1.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반역적 행동과 광주 살인 만행을 양심에 호소하여, 진심으로 반성하고, 즉각 모든 양심범과 정치범을 석방하라. 2. 진심으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하여 언론, 출판, 집회를 자유화하여, 진정 민주 정권이 수립되도록 신속히 처리하라. 3. 군사 정권은 공산화를 촉진시킬 것이며, 민정만이 공산화를 막는 길이다. 민주 정치만이 남북 대화로 서로 떨어져 있는 부모, 형제, 친척들이 만나게 되어 30여 년에 걸친 비극이 해소되는 동시에 평화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4. 박정희 대통령의 말로를 되풀이하기 전에, 몇 배 더 악독한 현 정권을 하루 속히 민정으로 이양하는 길만이, 앞으로 닥치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처사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참회하는 마음으로 내 조언대로 한다면 살길이 열린다고 권고한 것이다. 아마 그 때 전두환이 내 권고대로 했더라면, 뒷날 백담사 신세를 안 지고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군사 독재자들은 자기네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지 이산 가족 찾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단독 판단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수속했다. 마침내 내 아우와 누나는 오래 전에 누리를 떠났고, 조카가 북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이산가족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이북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시민권도 없고 또 건강상의 이유로 북한 고향땅을 아직 못 가 보았다.

공 박사가 빨갱이가 되었어?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은 뒤, 군사 독재자들은 때를 만난 것처럼 이것이 빨갱이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여론을 자기네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였다. 이런 때 누구 하나 바른말 하는 언론도 없었고, 개인도 없었다. 서슬이 시퍼런 분위기 속에서도 용감하게 천주교 정의 평화 사제단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정의의 외침이었다. 나는 이를 수백 장 복사하여 해외 교포 유지들에게 뿌렸다.

또 한 번은 김대중 씨가 대법원 판결이 나게 되면 인혁당 사건 때처럼 즉시로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때였다. 각국의 외교적 압력과, 자유 국가들의 빗발치듯한 여론과, 누리의 굵직굵직한 인권 단체 등에서 벌인 구명 운동 등이 효과를 나타냈는지 김대중 씨는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그 김대중 씨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은 살인 미수로 처단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나는 신문에 발표했다. 그랬더니 친정부 계열의 사람들은 날더러 "공 박사가 빨갱이가 되었다" 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군사 독재가 하는 일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 뜻밖에 많아, 덮어놓고 정부 발표만 믿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권력층에 붙어살던 사람들이 노태우의 6·29 선언이 떨어지니 잽싸게 자기 혼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나 한 것처럼 전두환 타도를 외치고 나서는 걸 보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전두환 군사 독재를 타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정작 탄압이 심할 때는 말 한 마디 못하다가 6·29 이후에 투사로 돌변한 사람들은 어떤 정권이 되었던 간에 권력층에 빌붙어 사는 해바라기 성향의 사람들이어서 언짢기만 하였다.

나중에는 박종철 군의 고문 사건으로 누리가 떠들썩하게 되었을 때 나는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고문 때문에 숨이 막혀 죽는 장면을 상상만 하여도 가슴이 아팠다. 나는 고문에 관한 신문 기사 내용을 복사해서 사건 진상을 누리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직접 조국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는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지에서는 이같은 방법 이외에는 동참할 길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어떤 친지 한 사람이 나한테 와 하는 말이 "여보, 공 박사, 서울에서 둘째 아들이 하고 있는 공 안과 병원이 문 닫게 될 짓을 왜 하는 거지?"하고 충고해 주는 것이었다.

수난 가족 돕기회란 단체가 있었다. 한국에서 수난을 받고 양심범들의 가족들을 돕기 위한 단체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템플 대학의 김순경 박사와 서울에 있을 때 퀘이커 동지였던 이행우 씨가 중추 인물인 듯 했다. 이행우 씨가 내 누추한 뉴욕 집으로 찾아왔을 때 무척 반가웠다. 아닌게아니라 백만 대군의 원병을 얻은 듯이 기뻤다. 나는 한동안 매달 100달러씩을 보내면서 지원을 하였다. 이행우 회장은 그 뒤 수난 가족 돕기 회장직을 그만두고, 워싱턴에 한미 홍보원을 설립하고 그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나와 임창영 박사를 고문으로 모신다고 했다.

내가 뉴욕에서 살고 있을 때, 이행우 씨가 이북엘 간다고 하기에 한글 타자기 3대를 드리면서, 그 가운데 1대는 한글 기계 연구하는 곳에, 또 1대는 맹인 학교에, 나머지 1대는 동포 후원회에 기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들 이 내가 원하는 쓰임새대로 잘 쓰이고 있는지 여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북한은 한글 타자기가 보편화되지 못했다는 점과, 장님들을 위한 특수 교육을 위한 편제가 되어 있지 않는 듯한 분위기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북한에서 어떻게 타자기를 활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 뉴저지의 벨 회사에 다니는 윤여민 경제학 박사와 김 박사를 이행우 씨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윤 박사의 단체를 성원하는 뜻으로 100대의 한글 타자기를 기증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들이었다.

그 뒤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와 살고 있을 때, 재미 한인들의 민주화의 뜻을 만천하에 내세우는 날로 삼자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한 신문 광고를 보고 나는 김안식, 김원일 씨 등을 모시고 백악관 앞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1천여 명이 모였다. 나는 비디오로 그 행사를 찍었다. 1987년 5월 30일의 일이다. 돌아와서 곧 글을 써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뒤 1987년 6월 20일, 뉴욕 유엔 본부 앞에서 2천여 명이 모여 전개한 시위 행렬에도 참가하여, 젊은이들이 내뿜는 조국의 군사 독재 타도를 외치는 열기에 나도 합류하였다. 나는 소니 회사에서 맨 처음으로 개발한 8mm 비디오 카메라를 짊어지고 워싱턴과 뉴욕의 시위 광경을 촬영하였다. 이 감격스러운 광경을 접하지 못한 이를 위하여, 사진을 여러 개 복사해 돌려보도록 하였다.

1987년도에 군사 독재자들은 최후의 발악처럼 탄압의 수법이 더욱 악랄해졌고, 전두환의 4월 호헌 선언으로 정국은 더욱 긴장되어 있었다. 그럴 무렵 뉴욕에서 이산 가족 찾기회가 발족되었다. 북한과 교류를 꾀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에게 고문이 되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쾌히 승낙을 하였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나에게 빨갱이로 오해받을 일을 왜 자청하느냐며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권하는 분들이 있었다. 내 신념에는 한치의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나라로 바뀌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주 의식이 발달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민주주의 하자는 데 얼토당토않게 빨갱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누군가가 통일의 숨통을 뚫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니 민주주의이든 통일이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자동적으로 누가 갖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뒤 노태우의 6·29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해외 교포들은 이산 가족 찾기 운동에 참가뿐 아니라, 원하면 가족을 찾아보기 위해 북한을 다녀와도 좋다는 정부 발표가 나오기도 하였다. 몇 년 사이에 별의별 변화가 다 생겼다. 그 때 나를 빨갱이라고 놀려대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보고 또 무엇이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껏 어떤 정치 단체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라 사랑의 마음은 늘 누구 못지 않게 불붙고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일흔일곱에 쓴 참회의 일기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애국적인 삶을 영위해 온 사람은 아니었다. 미국에 와서 사는 동안 나는 과거의 큰 잘못을 깨닫고 참회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일흔일곱이었던 1983년 4월 20일에 참회의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글을 쓴 일이 있었다. 그 첫머리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지금까지 애국, 애족하는 정신을 갖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일제 때에도 민족 정신을 가지지 못했고, 자유당 때나 박정희 때에도 그 정권들이 뿜어내는 사회악과 거의 무관하게 살아왔다. 우리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문제에 이렇게 무관심하게 지내 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나는 지금 겨우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여생이 몇 해 남지 않은 팔순의 노구가 될 때까지 내가 민족 문제에 관심 없이 지내 왔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며 애국 선열에게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라도 반성하고 참회한 끝에 짧은 여생이나마 앞으로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 나라 내 민족 문제에 대해 뒤늦게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조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듣고, 읽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첨부하였다.

"한반도에서 남북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남한에 쌓여 있는 핵무기가 필경 사용될 것이다. 이 핵무기들의 위력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의 수백 배나 되어, 이 핵무기들이 일부만 한반도에서 사용되어도 6천만 한민족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남북이 불행했던 과거를 교훈으로 삼고 서로 화해하여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길만이 6천만 한민족이 살 수 있는 이다……."

등의 7개 항을 열거하였으며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만을 굳게 믿어 온 나는 지금까지 북한을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져 왔다. 그것이 나의 큰 잘못이었다는 것은 이곳에 와서 최근 깊이 깨달았다. 정부와 미국을 믿다가 30여 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가고, 북한에 있는 형제 친척들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실로 기가 막힌다. 지금 내 마음에는 남도, 북도 똑같은 내 조국이다. 북쪽은 내가 태어나 자라난 고향이고, 남쪽은 내가 늙은 고향이다. 남에도 북에도 나의 형제 자매 친척들이 현재도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관심을 갖게 된, 내 나라의 잘못된 점은 다음과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첫째, 전두환 정권은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불법 폭력 집단이란 점, 군인들을 시켜 잔인하게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점, 이 점에 관해서는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권 분립의 사법부가 제 구실을 못하고 애국 인사들이 처형되도록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야만적인 고문 행위와 고문 치사 행위, 전두환 일가족들의 부정 부패상 등이다. 이것은 내가 조국을 생각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조국이 더 잘 되어야 되겠다는 염원에서 썼다고 그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서도 한 마디 내 속에 일고 있는 회의를 솔직하게 지적했다.

"……강력한 전체주의 사상과 폐쇄적 유일 사상 정책은 각 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안목에서 민주적 창의와 자기 성취의 슬기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라고 비판한 다음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민중은 말하는 생산 기계가 되고 국가는 그 기계를 통제하는 방대한 감시 관료 기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군주 체제의 세습 제도처럼 아들이 아버지의 정권을 계승한다는 소문'에 대해 그것은 설득력 없는 소리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기도 하였었다(지금은 이미 김정일이 세습 권좌에 앉고 말았지만 그 당시는 그런 소문만 있었다). 그리고 나서 국가 주석 이름 앞에 길게 늘어놓은 찬양의 수식어에 대해서도, 위아래의 인간 관계밖에 없던 유교 사회에서도 지나친 예는 예가 못 되니 삼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람의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에서 너무 지나친 예가 아닌가 하고 못마땅한 점을 말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위인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도, 그 이름 앞에 영명하시고 민족의 태양 구실을 하신 세종대왕이니, 나라를 건져 한겨레를 살리신 성웅 이순신 장군이니 하고 판에 박은 듯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오히려 본인에게 실례가 될 것 같다고 지적을 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어느 한쪽에 빌붙어 우리 조국의 통일이 가로막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민족 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다. 서로 헐뜯는 일도 중지하고, 하루바삐 화해의 악수를 나누어야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루 속히, 갈라진 혈육이 서로 만나 보고 죽기만 해도 나는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민주 통일은 물론 북한과 미국의 평화 협정, 남북 불가침 조약, 남북 군축 협약, 핵무기 철거, 미군 철수, 중립적 평화 통일 국가 건립 등을 촉구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현재 덤으로 살고 있다. 6·25 때 공산군에게 총살형을 받을 운명의 사람이었다. 이제 내 짧은 여생을 조국의 민주 통일을 앞당기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 될까? 인생은 해 놓은 일보다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비하면 내 여생은 너무나 짧을 지 모른다. 하늘이 나에게 보람된 일을 남기고 보람되게 죽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면 조국의 통일과 장님들을 위한 재활 교육, 그리고 눈을 감을 때까지 해야 할 한글 전용 운동과 세벌식 입출력의 전산화 실천 계몽에 전념할 것이다.

내 인생을 감싸 준 사람들

인생살이 80이 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자는, 나이 예순이면 생각하는 즉시 순조로워져서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해서 이순이라 했는데, 나는 검정 시험 같은 관문 통과에는 재빨랐지만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덤덤했고 무딘 사람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내 인생을 풍성하게 해 준 내 주변 사람에 대해 내가 죽기 전에 감사의 정을 표시해야겠다는 점이다. 6·25 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명을 건지게 한 내 집요한 끈기와 정의감이, 사실은 내가 똑똑해서나 잘나서가 아니고, 나에게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산 교훈 덕분임을 깨달았다. 생사의 어려운 고비를 겪고서야 비로소 조부모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고 내 강직한 성품의 뿌리를 확인했듯이, 이제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 시점에 와서 내 주변 인물에 대한 고마운 정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내 나이 여든 셋이 되도록 평탄하게 연구 생활을 무난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가정을 돌보고, 9남매란 많은 자식을 뒷바라지하면서 올바르게 키워서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 재산 관리까지 도맡아 가면서, 남편을 애 돌보듯 다칠세라 깨질세라 신경을 곤두세우며 연구 생활 안팎을 지켜 준 아내의 노고를 잊을 수가 없다. 모든 문물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서구화되어 있어서, 서양식으로 무척 깬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내에 대해서만은 예외인 것은 어쩐 일일까? 때때로 마음속으로는 '수고가 많군' '혼자서 애를 많이 썼군' 했을 뿐 유교적인 전통대로 아내에게 "수고했어요"라든지 "여보, 고마워" 따위의 표현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것이 한국에서는 몹시 쑥스러운 일이어서,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는 보수적인 한국의 전통파가 된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가 어느덧 몸에 배어 굳어지면서 결국 가부장 제도의 가장으로서 위엄만 지니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 나이 또래의 늙은이들이 사랑이나 고마움의 표현이 쑥스러워 꺼려하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내 아내는 이북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무던한 부인이다. 나와 결혼한 지 59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남들이 생각하듯 아기자기한 시간을 부부간에 별로 가져 보지를 못했다.

나는 연구실의 고통에 못지 않은 즐거움도 실감하면서 지냈지만, 내 아내의 삶은 온통 9남매의 자녀를 키우는 데 소모한 인고의 세월이었던 것이다. 내가 마음놓고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봉사할 수 있도록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내 주변을 감싸 준 인생의 반려자에게 이제서야 이 기회를 통해 고마움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난생 처음 표시한다.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는 살림이고 애들이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거기다가 남다른 내 고집과 독선적인 성격까지 있었으니, 나 때문에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어 한두 가지였을까 싶으니,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고 싶다. 아내는, 하느님도 모르고 살아온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바치며 인고의 한살이를 보냈을까. 모든 것이 다 고맙게 여겨진다. 이제 나도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열렸다. 이같은 감사의 말은 내 자식 모두에게도 하고 싶다.

이밖에도 나는 내 연구 생활과 세벌식 자판에 대해 큰 힘이 되어 주신 선배와 동지 그리고 후배 여러분에게도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더욱이 내가 타자기를 발명하고, 생산하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신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 춘원 이광수 선생, 한글 기계화에 전문 지식을 갖고 한글 기계화 운동에 앞장섰던 주요한 선생, 또 나를 극진히 사랑해 주신 백인제 선생, 미국 특허 신청 때 수고해 주신 신예용 박사, 내 세벌식 자판을 위해 오른팔 역할을 한 이윤온 선생, 세벌식 자판의 효율성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준 타자 전문 교육자 임종철 선생,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용기 있게 싸우면서, 한편으로 세벌식 자판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학문적 체계를 세운 송현 선생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컴퓨터에 한글 글틀을 세벌식으로 만듦에 있어 그 이치를 속히 깨치고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신 토론토의 한 컴퓨터 회사의 정재열, 강태진 씨 그리고 서울대 사범대 김영수 박사, 뉴저지의 김일수 선생, 늘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김경석 교수, 그리고 나를 도와준 컴퓨터 전문가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밖에도 수많은 친지들이 정신적인 격려자가 되어 주었다. 뉴욕에 사시는 임창영 박사와 김원일 목사, 한글 단체 모두 모임의 문제안 선생, 맹인 재활 센터의 남시철 소장, 서울 맹학교의 이상진 선생, 소설가 김태영 선생, 정을병 선생, 공 안과의 사무장으로 오랜 세월 일해 준 조충희 씨, 활자 국산화를 위해 애쓴 김영삼 씨, 공 안과 병원에서 나를 도와서 같이 일 한 수많은 의사 선생과 간호원들, 그리고 공병우 타자기 공장에서 수고한 수많은 기술자들, 내 연구소에서 종이 폭탄이라고 할 정도의 많은 유인물들을 내보낼 때 일한 타자수들께도 감사드린다.

나를 감싸주며 격려해 준 여러 언론인과 수많은 교육계, 문화계, 과학계의 인사들 덕분에 나는 내 나이가 80 고령의 늙은이가 된 것도 잊고 힘을 얻어 여러 가지 일을 지금껏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내 주변에서 나를 감싸준 분들의 중요함에 새삼 눈을 뜨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모든 은인들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끝말 -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것은 모두가 조부모, 형제, 은사, 가족, 친척, 동무, 동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은덕과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가 80이 넘도록 행복하게 살아온 뿌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있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누리에 나오게 하셨고, 자라나게 하셨고, 내가 많은 일을 하도록 해 주셨고, 나를 늙게 하였으며, 언젠가는 나를 데려간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일 무엇을 하게 허락하시고, 또 무엇을 먹게 해 주실 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나는 단지 하느님의 허락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서 특히 나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섭리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1. 의주 농업 학교 재학시, 교장 선생의 비리를 꼬집어 쓴 작문을 담당 선생에게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섭리. 2. 조직학은 의사 검정 시험의 과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학문이 의학의 뿌리 구실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섭리. 3. 의학 박사라는 학위의 명예에 유혹되지 않고, 실력 위주로 안과학을 공부하게 해 주신 섭리. 4. 한글 타자기의 연구에 있어, 글씨 모양보다도 속도를 위주로 개발케 함으로써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게 해 주신 섭리. 5. 6·25 때 정치보위부에 사형수로 수감되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목숨을 걸고 신조를 지키게 해 주신 섭리. 6. 70 나이를 넘어, 사진 촬영을 시작한 때, 한 피사체에 대해 수많은 셔터를 눌러야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신 섭리.

이상은 내가 잊을 수 없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들이다. 이제 내 남은 삶은 매우 짧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많고, 비록 내 남은 삶은 짧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고성능 한글 글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다가 가면 그만이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복종하다가 죽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 하느님께 바라는 것은 내 영혼도 남아 있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살아서 많은 죄를 범한 내가 죽은 뒤 내 영혼이 또 죄를 범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89. 8. 15.

공병우

== 부록 =

부록(1) 내 발명품과 개발품들

(1) 공병우 누도 검사법

나는 일제 때인 1941년에 안과 의사로서 "눈물길 검사법(누도 검사)"이란 것을 개발하여, 일본의 안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는 "공병우 누도 검사법"이란 학명이 붙어져, 일본 안과계에 널려 알려지게 되었다. 눈물은 누선에서 나와, 눈알을 적시고 콧속으로 흘러 내려간다. 눈물이 콧속으로 흘러 내려가는 눈물길이 있는데, 그것이 막히면 마치 하수도 막히듯 눈물이 눈 밖으로 흘러나온다. 나는 눈물이 그 눈물길을 통해 잘 흘러 내려가는지 혹은 잘 흘러 내려가지 못하는지를 검사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내 검사 방법을 일본 교토 대학 유게 교수는 "공병우 씨 후루오레스진 검사법"이란 이름으로 [일본 안과 전서]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1955년에는 비닐관을 이용한 "공병우 누도 개통법"이란 것을 개발하여 많은 환자에게 치료의 길을 열어 주어, 안과계의 화젯거리가 된 적도 있다. 이 방법의 이치는 간단하다. 막힌 눈물길을 뚫어 주어도 다시 막히는 환자의 눈물길에 아예 비닐관을 꽂아 둔다. 이렇게 인공 눈물길을 만들어 주면, 눈물이 콧속으로 잘 내려간다.

(2) 국내 최초로 콘택트렌즈 국산 개발

1959년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내가 콘택트렌즈를 국산으로 개발하여 보급했다. 처음에는 콘택트렌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다가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보급에 무척 애를 먹었다. 그래도 점차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 나는 국산으로 개발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수모도 감수해야만 했 다. 요즘은 콘택트렌즈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이용하는 사람도 많아져 자진해서 콘택트렌즈를 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내가 국산품으로 이것을 처음 개발하였을 당시엔, 콘택트렌즈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해 가며 힘들게 권고를 해야 했다.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콘택트렌즈를 도입해 와 한국 안과계에 소개했던 것인데, 당시 대다수의 안과 의사들과 안경점을 경영하는 분들은 '콘택트렌즈는 위험한 물건'이라고 환자들과 일반인에게 말로 또는 유인물을 통하여 악평을 퍼뜨리고, 나를 중상 모략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과학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서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지난날 백 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박사가 겪었다는 이야기가 머리에 떠오 른다. 백 박사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수혈을 시작한 분인데, "아니 남의 피를 환자 피 속에 넣는단 말이오……" 하고 생명이 위험한 때인데도 가족들이 막무가내로 수혈을 반대하는 일을 많이 겪었다고 했다. 이것보다 놀라운 사실은 일부 몽매한 사람들이 "개화의 횃불을 들고 귀중한 피를 뽑아,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수혈 행위에 항의하는 글을 실었다는 것이다.

한국 최초로 콘택트렌즈를 개척하는 내 선구적인 행위에 대한 이들의 중상 모략은 우리 나라 개화 초기의 현상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라 생각했을 뿐, 나는 과학적인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몽매한 사람들이란 어느 시대이건 간에 우리 주변에는 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떤가? 그렇게도 나쁜 물건이라고 중상 모략하던 콘택트렌즈 덕분에 안과 의사와 안경점 주인들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을 정도로 누리는 많이 바뀐 듯 하다. 콘택트렌즈를 씀으로써 부작용보다는 치료의 효과를 더 많이 거두고 있는 것이 안과계의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요즈음에야 겨우 깨닫게 된 모양이다.

콘택트렌즈의 도입 초기에 나와 함께 일했던 이수양 씨는 현재 서울 시내에서 콘택트렌즈로 성업 중에 있다. 그는 그 당시의 내 인상을 내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다섯째 딸 영원이가 쓴 "딸이 본 아버지"란 수기에 적은 것을 잠시 인용한다.

"한 가지 일에 착수하시면 끝까지 파고들어 가려 하시고, 꼭 성취하려는 집념, 늘 새로운 일을 찾으려는 진보적 사고력, 환자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시는 의사 본연의 자세와 가난한 환자에게 베푸는 정다운 인술, 사회적 지위 고하를 무시하고 늘 약자의 편의를 도모하는 성품 등이 인상적이었다."

(3) 맹인용 점자 타자기 개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장님들을 위한 점자 타자기를 1971년도에 개발하였다. 한글 점자 타자기뿐 아니라 영문 점자 타자기도 간편한 실용적인 것으로 발명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세계 맹인 복지 기구에서 실용할 수 있는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신문에 소개 기사가 실리자, 누리 각 나라에서 글월들이 날아왔다. 미국에서도 값싸고 실용적인 점 자 타자기의 발명이라고 크게 환영을 한 것이다.

(4) 중국 주음 부호 타자기 개발

나는 같은 해에 중국 장님들을 위해 주음 부호 타자기도 개발했다. 그 때문에 대만 장경국 총통 비서실장으로부터 감사장과 기념품을 받기도 했다.

(5) 맹인용 한글 글틀 개발

1989년에는 장님들이 컴퓨터로 글을 손쉽게 쓸 수 있도록, 강영우 박사와 함께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류벨 대학 교수 포크 박사의 도움으로 맹인용 한글 글틀을 개발했다. 이 글틀은 글자판에서 입력하는 한글이 소리로 나오기 때문에, 앞을 못 보는 분들이 자유자재로 수정을 가할 수도 있고 편집도 할 수 있다. 정말 컴퓨터는 장님들에게 빛을 안겨 주는 문명의 이기라고 믿는다.

(6) 속도 타자기의 쌍초점 특허

나는 1948년에 한글 쌍초점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이것은 영어 타자기처럼 '바 가이드'에 찍히는 구멍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의 구멍으로 세벌 한글을 자동으로 찍히게 한 발명이다. 이것은 곧바로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발명 특허를 얻었다. 15년 동안의 특허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당시는 국산으로 타자기를 만들 수준이 못 된 때여서 미국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와 스미스 코로나 회사에 제작을 의뢰하였다. 나중에는 일본, 영국, 스위스 등지의 저명한 타자기 회사에도 설계도를 보내어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와 보급한 바 있다.

1960년도 초에는 외국제 영문 타자기를 한글 타자기로 개조하는 기술밖에 없었다. 한글 타자기를 외국에서 만들어 수입해 팔면서, 외국에서 수입한 영문 타자기를 한글 타자기로 개조해 팔았다. 1968년경에 이르러 국산 한글 타자기를 직접 생산하는 공장에서 만들어 팔게 되었다. 이 때 장님들을 타자기 제작 생산 공장에 조립공으로 훈련시켜 채용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7) 국산 활자 개발

이렇게 쌍초점 한글 타자기는 초기에는 외국에서 만들어 수입하였고, 다음은 외제 타자기를 한글 타자기로 국내에서 개조하였으며, 세 번째 단계에 와서 완전 국산 타자기로 생산하는 세 단계를 거쳐 발전되었다. 당시 국산 타자기 생산 공장을 만들게 되니, 외국에서 수입해 오던 부속품은 한글 금속 활자뿐이었다. 나는 활자도 국산화하기 위하여 금속을 다루는 여러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보았지만 모두 성공을 못 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공장 지하실에서 김영삼 씨와 같이 연구한 결과, 드디어 쓸 수 있는 활자를 만들어 냈다.

(8) 한글 텔레타이프 개발

한편 1958년도에 미국 스미스 코로나 회사에 가서 나는 세벌식 한글 텔레타이프를 개발하였다. 그 뒤 그것도 국내에서 개조하여 보급했다. 이것은 언론계의 통신 업무나 정부 기관이나 큰 회사의 통신망으로 쓰이게 되었다.

(9) 한·영 겸용 타자기 개발

정부 표준판으로는 아무리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써도 안 된 한영 겸용 타자기를 내 쌍촛점에 의한 세벌식 원리로는 1972년에 수동식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고, 발명 특허까지 따낼 수 있었다. 정부 표준판은 수동식 한영 타자기를 개발도 못 한 채, 15년만에 폐기 처분되고 말았다. 나는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연구를 계속하여 한영 타자기의 보급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972년 여름철에는 정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서울 신문사에서 모든 사원에게 타자기 치기 운동을 정부 표준판이 아닌 세벌식 타자기로 실시한 일이 있었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기술 지원을 해 주었다. 신문사에는 그 당시 세벌식 속도 타자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신태민 선생께서 기획 심사 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편집국의 신문 기자는 3급 타자수 수준에 합격되어야만 진급도 할 수 있도록 인사 고과 제도까지 도입해 제도적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신문사 측은 물론 타자 를 칠 줄 아는 신문기자 양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한국 신문 역사상 기록에 남길 일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나로서는 정부 표준판 공세에 몰리고 있는 때라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 신문사에서 정부 표준판이 아닌 내 세벌식 쌍초점 자판을 대담하게 선택한 신태민 선생의 문화적 의지에 대해 감명이 깊었다. 정말 당시로서 용감한 글자판 투쟁 동지였고, 마치 적진 속에서 만난 우군 같았다.

(10) 3단 한·영 타자기 개발

이어 나는 1972년, 한글과 영문의 대소문자를 완벽하게 찍을 수 있는 3단 한영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한 대의 기계로 두 나랏말을 완벽하게 찍을 수 있는 이 수동식 타자기는 세계적인 발명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이같은 수동식 타자기는 누리 어느 나라에도 없기 때문이다.

(11) 국산 타자기 생산

1964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스위스 제품인 헬머스를 본따서 프린스라고 이름지어 국산 1호를 생산했는데, 실은 이보다 먼저 일제 BABY 타자기를 본따서 만들었다. 이때만 해도 기술과 설비가 빈약하여 부품이 잘 맞지 않 아 조립하기를 꺼려했지만, 이윤온 씨가 자청하여 세 대를 조립하였으며, 이 때 이것을 끝맺으면서 이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프린스 타자기를 생산 보급하게 되었다.

(12) 한·영 겸용 텔렉스 개발

1975년에 세벌식 한·영 겸용 텔렉스를 개발했다. 세벌식이 가장 과학적인데도, 두벌식은 국제 연동이 되지만 공병우 식은 국제 연동이 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있어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연구를 했다. 그 때 국내에서 많이 쓰던 M15로 만들었었는데, 이것이 완성되어 갈 무렵 서독 시멘스 회사에서 내 연구소를 방문하여, 완성되면 견본을 서독 시멘스 회사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견본을 서독으로 보냈고, 서독 시멘스 회사에서 보낸 기계로 정수철, 이윤온, 염정의 씨와 같이 제품을 완성하여 여러 곳을 다니면서 실험을 하였다. M15로 만든 것은 체신부 전기통신시험소에서 합격하여 개발에 이상이 없었음을 증명하였다. 이 때 이윤온 씨에게 특별 상금으로 10만원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13) 한글 모노타이프 개발

1976년에는 신문사의 식자, 문선을 위한 한영 모노타이프까지 개발하여 일본의 고이께 회사에서 시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한국 일보사의 식자 문선의 전자화에 큰 도움을 주는 구실을 하였다.

그 뒤 나는 어쨌든 내 딴에는 쌍초점에 의한 세벌식 한글 속도 타자기의 발명은 여러가지 개발품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문화 혁명을 일으키는 기폭제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4) 한·영 BALL 타자기 개발

나는 1974년에 세벌식 한글 BALL을 미국 하와이에서 처음 만들었다. 이 한글 BALL을 가지고 1975년 9월에 드디어 세벌식 BALL 타자기를 선진후타식(먼저 간 뒤 찍힌다)으로 개발하였다.

이 타자기는 닿소리 키를 치면, 먼저 BALL이 한 간격 이동한 뒤 글자가 찍히는 방식으로, 홀소리와 받침은 부동키(DEAD KEY)로 찍히도록 되어 있다. 이 BALL 시제품은 제1회 한글 기계화 전시회에 출품했었다.

(15) 한글 글틀 개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겁도 없이 컴퓨터 굴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한글의 기계화에 대하여 한살이를 보낸 나였고, 미국에 와서 컴퓨터의 눈부신 발전에 홀려 컴퓨터에 관심을 남달리 가졌던 나였지만, 컴퓨터는 전문가들 손에서 노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컴자도 모르는 일자 무식의 늙은이였으니, 겁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우선 영어 컴퓨터 애플 Ⅱ에 쓸 한글 글틀을 두벌식으로 두 가지의 글자판으로 만들어 검토해 보았다. 아주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 타자기로 글을 써 오던 나는 컴퓨터에서 너무나 쉽게 한글을 쓰게 되었고, 더욱이 수정과 편집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나는 컴퓨터로 글을 써 보고 그 놀라운 기능과 능률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때 느낀 소감을 글로 나타내기 어려워 생전 써 본 적이 없는 시를 "너는 나의 비서"라는 제목으로 썼던 것이다.

1983년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텔레비디오(사장 황규빈 씨) 회사에서 한글 글틀을 두벌식 자판으로 개발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한 컴 퓨터 연구소의 정재열, 강태진, 한석주 님이 만든 것이다. 나는 우선 시판된 텔레비디오를 새로 샀다. 함께 딸려 온 한글 글틀은 예상한 대로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모순이 많은 정부의 비과학적인 두벌식이었다. 두벌식의 단점은, 첫째로, 수동식 타자기와 자판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타자기 치던 사람은 컴퓨터 칠 때 새로 자판 위치와 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둘째로, 글쇠를 치는 대로 화면에 한글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엉뚱한 글자로 나타났다가 나중에 입력한 글자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타자수의 불안 심리를 유발하기 쉽고, 셋째로는, 한글의 받침을 단독으로 화면에 나타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쇄도 할 수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나는 이같은 결점이 말끔히 시정될 수 있는 세벌식을 개발하기 위해, 캐나다의 한 컴퓨터 기술 개발 팀에 내 세벌식 설계를 보내어 개발해 줄 것을 의뢰했다.

세벌식이란 한글을 한글의 과학적인 음운 구조 원리대로 입력시키도록 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텔레비디오 회사와의 계약 때문에, 이와 흡사한 한글 글틀은 향후 3년 동안(1986년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없게 계약이 되어 있다고 난처해하는 것이었다. 황규빈 사장은 인내심이 강한 자수성가의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와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어 보였다. 몇 년 사이에 그는 컴퓨터 부품 생산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한편으로 수지도 안 맞을 한글 글틀 개발에 막대한 재력을 투입시킨 것은 단순한 장사꾼의 산술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가 할 큰일을 황 사장이 자진해서 해낸 것은 큰 뜻을 가진 경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판매용이 아닌 연구용으로만 쓰기로 한 컴퓨터 연구소와 약속을 하고, 텔레비디오용 세벌식 한글 글틀을 6천 달러를 들여 개발하였다.

개발 뒤, 나는 한글로 원고를 쓰는 분들에게 IBM과 호환성 컴퓨터이나 텔레비디오를 구입하여 한글을 편리하게 쓰도록 권고하고, 그것을 구입한 분에게 내 연구용 세벌식 글틀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니 두벌식과 세벌식을 동시에 비교하며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1984년 초기의 일이 다.

때마침 서재필 미국 상륙 100주년 기념으로 신태민 선생께서 창설한 필라델피아 한글 문화 연구원(1985년 7월 10일)에서 개최한 한글 문화의 밤에서 한글 글틀을 전시하였다. 이렇게 제품이 공개적으로 선보인 뒤부터 이것은 교포 사회에 문화적인 화젯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신태민 선생의 소개로 뉴욕에 와 공부하던 김영수 박사를 알게 되었다. 김 박사는 세벌식 홀소리 간소화 자판으로 매킨토시용 한글 글틀을 개발하였다. 나는 그 권리를 내가 5천 달러에 양도받아 무료로 보급했다. 그러나 매킨토시의 새 모델이 나오면 한글 작동이 아니되어, 내가 직결식으로 개발한 '한글쓰기'로 바꾸어 주었다. 나는 김영수 박사로부터 Fontastic 무른모로 한글 글꼴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김 박사가 개발한 한글쓰기에 사용한 한글 글꼴을 여러 종류로 만들었다.

그 무렵 뉴저지에 사는 컴퓨터 전문가 김일수 씨로부터, 풀그림을 짜는데, 영어 같으면 한 시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을 한글로는 1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한글이 로마자보다도 우수한 글자이니까 로마자보다도 시간이 덜 걸려야만 이치에 맞을 터인데, 도리어 수백 배의 시간을 소비해야만 된다니,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날마다 곰곰이 생각하였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필경 글자꼴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Fontastic 무른모를 가지고, 세벌체 한글 글꼴을 만들어, 영문 글틀에 넣어 가지고 실험을 해 보았다. 풀그림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손도 댈 수 없고, 단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내 글자판 배열을 영문 자판에 직접 연결이 되도록, 즉 J에는 첫소리 ㅇ, F에는 ㅏ, A에는 받침 ㅇ을 배치하여, 입력과 출력이 꼭 같은 한글 자모’’에 대응하게’’ 만들어 사용해 보았다. 그 결과는 나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이 방식을 프로그램인 AD 방식과 구별하기 위해서, 나는 '직결 방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개발할 수 없는 AD방식은 매킨토시의 모델이 바뀌거나, 무른모의 버전이 바뀌면 한글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직결 방식 한글쓰기는 그런 결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특징은 현재까지 AD방식은 글꼴을 한 벌 만드는 데 직결 방식보다도 5배 내 지 10배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이었다. AD방식도 글꼴을 세벌체로 만들어야만 시간 절약이 되고 메모리 절약도 되고, 속도도 빠를 것이다.

과학적인 한글을 비과학적으로 전문가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한글의 전산화도, 한글의 기계화와 같이, 입력도 출력도 모두 세벌식으로 추진해야만 경제적이고, 고성능 기계로 우리 나라가 높은 수준의 문명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유언으로 입력도 출력도 세벌식으로 하자고 동포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러나 그 위대한 한글을 아직도 천대하고 있는 우리 동포가 내 새로운 과학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16) 아이텍 사진 식자기 개발

내가 1980년 미국 도착 뒤부터 줄곧 연구 개발해 온 ITEK 회사의 고성능 사진 식자기를 1987년도에 한글 전용 기계로 개발하였다. 몇 신문사(캐나다의 코리언 저널, 뉴욕 미주 동아,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유 신문, 나성에 있는 안 신부님이 운영하고 있는 뉴 라이프 잡지사 등)에서 현재 이 컴퓨터 식자 기계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글씨 모양이 예쁘지 않다는 신문사가 많았다. 글씨체는 얼마든지 글씨 도안가가 새로 만들어 넣으면 될 터인데도 그런 트집을 잡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신문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앞의 신문사는 고성능 원리를 실험해 보고 곧 구입하여 파격적인 염가로 한글 인쇄의 부업까지 펼치고 있다.

나중에 컴퓨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자 세계에 있어서도 전자 회로를 복잡하게 활용하면 정직하게 복잡한 과정을 많이 밟아야 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 표준판의 한글 글틀은 기종이 조금만 다르거나, 새 모델로 컴퓨터가 바뀌어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 했다. 내가 개발한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만 채택한다면 영어용으로 만들어진 수천 가지의 매킨토시 무른모에 내 직결식 한글 활자를 넣어 자유자재로 한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글이 이렇게 훌륭한 과학적인 글인데 굳이 두벌식으로 비과학적인 글로 전락시키는 정부의 뜻을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무지한 정부의 과학 정책을 무조건 따라가는 어용 학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부록(2) 내가 받은 상들

(1) 내가 사양한 상

바깥 누리하고는 별로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온 나였지만, 밀폐된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개발품은 누리에 흘러 나가게 된다. 끈덕지게 인내와 집념으로 버티어 나가야만 하는 연구 생활이라고 하지만, 민족을 위한 것이어서, 반드시 내 분신과 같은 발명품이나 개발 특허품들은 누리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상도 여러 개를 받았다. 사실, 상에 대해서도 공로를 인정해 준 것은 고맙지만, 나는 상을 받으러 나갈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다. 상보다는 연구 개발한 것을 많은 민중에게 보급하여 그들에게 문명의 이기를 혜택을 진정으로 받도록 해 주는 데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언제나 앞섰다.

과학기술처에서 과학의 문화상을 받으라고 하는 것을 굳이 사양하였고, 또 5·16 민족상을 받으라고 교섭을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상을 타는 자리에 대체로 참석을 못하고 대리인이 수상하곤 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을 추모하는 외솔상과 적십자 박애상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내가 식장에 나가 직접 상을 받았다. 그러나 진짜 상은 내가 죽은 뒤 하느님의 판정을 받은 뒤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조금이라도 내 개발품들의 이치를 깨닫고 활용하여 많은 도움을 얻으면, 이 이상의 영광된 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2) 연도별로 본 표창과 수상

1) 1949. 10. 국회의장상 수상 (전국 과학 전람회에 한글 타자기 출품) 2) 1958. 10. 대통령 표창 수상 (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 3) 1962. 8. 대통령 표창 수상 (건국 공로 식산 표창장) 4) 1968. 10.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 (한글 전용 공로자상) 5) 1970. 7. 평택 군수 감사장 수상 (평택군 관내 안과 환자 1개월 동안 무료 진료) 6) 1974. 3. 외솔 문화상 수상 (한글 문화 개발 공로) 7) 1975. 10. 은장 박애장 수상 (대학 적십자사 70주년 기념) 8) 1978. 9. 여군단장 감사패 수상 (여군 창설 제28주년까지 여군 한글 타자 기술 향상에 기여) 9) 1979. 3.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 수상 (모범 납세자) 10) 1979. 10.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 수상 (특별 회원으로 적십자 사업 발전에 기여) 11) 1980. 2. 종로구청장 표창 수상 (새마을 저축 증대 기여) 12) 1980. 5. 평안북도 첫 문화상 수상 (첫 평안북도 도민의 날 5. 5.) 13) 1981. 4.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장애자의 날 4. 29.) 14) 1983. 7. 사회 복지 법인 우성원과 구화 학교 공동 명의로 감사패 수상 (우성원과 구화 학교 준공일 7. 20.) 15) 1984. 10.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맹인 선교회에서 공로패 수상(맹인 개안과 맹인 재활 사업에 기여한 공로) 16) 1987. 1. 제1회 서재필상 수상 (서재필 기념 재단에서 한글 타자기 발명과 한글 컴퓨터 개발 등 한글 기계화 공로로 수상)

(3) 기타

1) 1947. 10. 조선 의사회 서울시 의사회 재무부장 2) 1959. 2.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 (1971년 2월까지) 3) 1960. 11. 재건 의사회 이사 4) 1961. 5. 재경의사회 종로분회 초대회장 5) 1964. 5. 대한 안과 학회 잡지 편집고문

부록(3) 주요 이력과 경력

출생지 :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성동 본적 :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111번지 주소 : 서울이 종로구 서린동 129번지 1호 성명 : 공병우 생년월일 : 1906년 12월 30일생

학력과 경력

1926년 10월 조선 의사 검정시험 합격 1936년 7월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 받음 1938년 9월 공 안과 의원 개설(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 한국인으로서 처음 안과 전문 의원 개설. 1980년 8월 폐업 1943년 1월 [소안과학] 저서 발간 1947년 5월 한글 타자기 연구 개발(1979년 11월까지) 1949년 11월 한글 타자기 첫 발명 1950년 3월 한글 타자기 첫 시제품 3대 제작 제작처 : 미국 UNDERWOOD 타자기 회사 세 대 소장(공병우 1대, 당시 주미 대사 장면 1대, UNDERWOOD 회사 1대) 그 뒤 군원 물자로 육해공군에 보급되었음(한국군 행정 기계 화) 1954년 6월 쌍초점 타자기 발명 1956년 10월 안과 전문의 자격 취득 1958년 3월 미국에서 '콘택트렌즈' 도입하여 국산품으로 개발 1959년 9월 '스크레타' 콘택트렌즈 첫 개발품 쉬팅 개시 1960년 3월 서울 맹인 부흥원 설립. 맹인 재활사업 착수(1982년 9월까지) 1961년 4월 의안과 콘택트렌즈 제작부 신설(서울 종로 2가) 1962년 3월 한글 학회 부설 한글 기계화 연구소 발족(한글 기계화지 첫 발 간) 1965년 5월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 설립 1965년 8월 천호동 공 안과 의원(분원) 설립 * 1974년 6월 양도 1965년 10월 한국 최초로 약시 검안을 위한 약시부 설립 1967년 9월 한글 텔레타이프 개발 그 뒤 한국 치안국에 설치 활용 1968년 3월 한영 겸용 타자기 발명 1968년 4월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 설립 1971년 8월 점자 한글 타자기 개발 1971년 12월 중국 주음 부호 타자기 발명(중화일보) 1972년 3월 한국 맹인 재활 센터 설립. 중도 실명자 재활 교육 1974년 8월 미국 보시옴회사 제품인 '소프트렌즈' 도입 쉬팅 개시 1975년 12월 공 안과 의원에 렌즈부 신설 1977년 3월 사진 연구 개시(1981년 5월까지) 1978년 5월-1977년 6월 공병우 사진집 발간 * 꽃, 6월의 모습, 나의 사진집, 물, 단풍, 하늘, 습작 1980년 1월-5월 공병우 사진 전시회 개최 * 서울, 제주, 광주, 부산, 대구, 서울(2차) 1980년 3월-1981년 4월 공병우 사진집 발간 배부 * 공병우 사진집 1호, 2호, 홍도와 백도(칼라, 흑백 사진집) 너와집, 절, 울릉도, 공병우 작품집 발간 1981년 5월 제30회 국전에서 사진 부문 입선 * 입선 작품 : 모래채취장 1978년 5월 최신 의료 장비 "알곤레저, 자동검안기(컴퓨터식), 레이나 카메라 도입 설치 1979년 4월 돈화문 공 안과 의원 설립 * 1982년 12월말 폐쇄 1979년 11월 일본 'がな'와 '로마' 자의 겸용 3단 타자기 발명 특허 등록 (일본국) 1982년 9월 한국 맹인 재활 센터 폐쇄

내 가족들(1989. 8. 15. 현재)

환기 9197년, 신시개천 5896년, 단기 4331년, 한글 552돌
음력 6월 1일, 양력 7월 23일, 나무날(목요일), 서기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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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_갈래, 공병우


  1. '풀빛' 님은 이 글을 입력하면서 용어를 여러 개 고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 '일생'을 '누리', '한살이'로 각각 고치고, 공 박사님이 글에서 자주 사용하신 '나의'란 표현도 '내'로 고쳤습니다. (1)

  2. 저 김 용묵은 '풀빛' 님이 입력하신 글에 있던 오타를 바로잡고, 문단을 구분하는 등 나름대로 편집을 했습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낱말을 추가하거나 고쳤으며(특히 공 박사님이 글을 쓰실 적에 빠뜨린 주어), 추가한 낱말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2)

  3. 직지 주: 鼓女, 사전을 찾아보니 생식기가 완전하지 않는 여자를 말합니다. 다음 문단에 나오는 부인과 계통의 결함을 제거하는 수술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3)

  4. 직지 주: 문맥상 %를 넣었습니다. (4 5)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last edited 2011-11-16 19:39:06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