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1 장일순선생의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는 책을 읽으며 입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직지 자유 문서가 아닙니다만, 좋은 내용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책머리에

글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번처럼 가슴 설레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잖아도 선생님이 그립고 그리운 요즘인데 <녹색평론>이 선생님 문집(文集)을 낸다니 반갑고 고마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 선생님은 글을 쓰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언젠가 왜 글을 쓰시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대답은 한마디 간단했지요.

"나는 글 못써."

세상에 글 못쓰는 사람이 이 문명천지 어디에 있느냐고 다시 여쭙자 조금 더 길게 말씀하시더군요.

"한참 세월이 수상할 적에 필적을 남기면 괜히 여러 사람 다치겠더구먼. 그래서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일기도 쓰지 않게 됐지, 그 버릇이 여직 남아서…"

그러나 선생님이 글을 쓰시지 않은 까닭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나는 혼자서 생각합니다. 가끔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시내에 나갔다가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가? 술 한잔 걸치고 거나해지면 말이지 그러면 얘기가 시작되는데 이게 뭐냐하면 천지현황서부터 논어 맹자에 노자 장자에 석가모니 부처님에 예수님까지 총동원하셔서 수작이 난만인 거라. 그렇게 정신없이 아는 척을 하다가 말이지 밤이 이슥해서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취한 걸음으로 뚝방길을 걸어오는데 달빛은 환하게 밝고 말이지 그 달빛에 제 그림자 밟으면서 집으로 돌아올작시면 그러면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참담한지 자네가 그걸 알겠능가?"

말이 많았던 날, 모두들 흩어지고 혼자 남았을 때 문득 엄습해오는 허탈은 직업이 목사인 나도 웬만큼 맛보는 것입니다만, "자네가 그걸 알겠능가?" 하고 물으실 때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번은 또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

"그래도 선생님이 저보다는 덜 참담하실 겝니다."

"어째서?"

"저는 말을 하는 것이 직업인 데다가 한술 더 떠서 글까지 쓰잖습니까? 선생님은 '글'을 쓰시지 않고 '글의 씨'를 쓰시니 저보다 덜하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

"그런가? 허, 그게 그런가?"

나는 선생님이 글을 세상에 남기시지 않은 까닭을 여기서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침묵은 존재의 자궁입니다. 선생님은 흰 종이에 먹으로 '붓장난'을 하실 적마다 아마도 그 깊은 당신만의 침묵을 마음껏 애무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세계 4대 성인(聖人)이라고 배운 네분(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모두 생전에 글 한줄 남기신 바 없다는 사실이 선생님의 글 쓰지 않으신 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봅니다. 그런데요, 신통한 것은 그 네분 모두 살아 생전에 참 왜 말이 많으셨다는 점입니다. 우리 선생님도 그러셨지요. 한번 말씀을 내어놓으시면 흐르는 강물처럼 막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쏟아놓으시고는 맨 뒤에 혼자 남아 당신의 그 참담한 허탈을 남몰래 삼키셨던 거지요.

나는 선생님이 글을 많이 써서 세상에 남기신 바 없음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깁니다. 성경에, "문자(文字)는 사람을 죽이고 영(靈)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씀이 있지요

침묵이 백(百)이면 그것이 말로 표현될 때 벌써 오십(五十)은 떨어져 나가고 그것이 다시 글로 나타나면 십(十)이나 겨우 남을까요? 그러니까 글이란 살아있는 영(靈)이 즐겨 써먹을 물건이 아니라는 말씀인데, 틀림 없이 우리 선생님은 이 비밀을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책은 장일순(張壹淳) 선생 문집(文集)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당신이 몸소 쓰신 글은 담배씨 만큼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분의 말씀을 녹취했다가 베긴 것들 아니면 대담을 옮겨놓은 것들인 까닭을 해명한답시고 이렇게 또 말이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세상에 선생님 문집이 나온다니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장일순의 老子 이야기> 첫째권이 나왔을 때 어느 신문기자한테, "저 이현주라는 물건이 있어서 내가 책을 다 내게 되었소" 하시던 선생님이니 이번에도 필경 손으로 달구벌쪽을 가리키시며 "저 김종철이란 물건이 있어서 세상에 장일순 문집이 다 나오게 됐구먼!" 하시겠지요. 아마도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사방을 둘러보며 또 이렇게 토를 다실 것입니다.

"속지 마시오들. 세상에 글한테 속는 것만큼 맹랑한 일도 없으니까."

선생님 가신 뒤로, "그래. 됐어. 그렇게 하시라구. 그러면사 뭐냐하면 서두르지 않되 게으름 피우지 말고 착실히 발을 내딛는 거라. 그리고 말이야, 개문류하(開門流下)라, 문을 활짝 열고 밑바닥 놈들과 하나가 돼야해. 그래야 개인이고 집단이고 오류가 없거든." 이런 음성 들을 데가 없어 목마르고 답답하던 우리에게 어쨌거나 이 책은 시원한 샘물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참말이지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인지.

이 작은 책을 읽는 이들 모두가 글에서 말로 말에서 침묵으로 침묵에서 옹근 삶으로 선생님과 함께 행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녹색평론>이 정성껏 만든 책이니 반드시 그런 복을 누리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삶의 도량에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萬象)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나는 귀천(貴賤)이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과 일상생활을 즐기고 생활을 나누며 삽니다. 저녁으로는 대체로 박주일배(薄酒一杯)를 나누는 형편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걷는 방축(防築)길은 나의 도량(道場)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녁밥과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좋은 이야기와 못마땅했던 이야기를 반추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걸어가는 발 밑의 풀들을 접하게 되는 순간 나는 큰 희열을 맛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아서 풀잎에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은 의연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상처와 먼지에 찌들린 풀잎이 하늘의 달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형편없는 나의 그날의 생활이 떠오릅니다.

그 밥자리에서 술 한잔에 거나해 가지고 제대로 생활화하지 못하고 다만 머리에 기억만 남아있는 좋은 글귀를 동학(同學) 또는 후배들에게 어른처럼 말했던 몇시간 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창피하기 이를 데 없음을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정말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가의 짓밟힌 풀들이 말없는 나의 위대한 스승님들이라는 사실을 취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맛본 후로는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이 미약한 사람의 도인(道人)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길 걷는 동안 참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고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침에 일찌감치 손님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는 때가 있습니다. 오신 손님을 전송하고 나서는 가끔 근처에 있는 젊은 친구를 만납니다. 젊은 친구들은 오래간만이라고 차 한잔이나 대포 한잔을 권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개는 아침이라 사양하지만 같은 이에게 번번이 사양하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여러번의 권고가 되는 경우에는 부득이 사양을 하지 못하고 응합니다.

아침부터 대폿집에 들어가서 두홉들이 소주를 각기 한병씩 나누면 오전중에 이미 거나해서 노상(路上)에 나옵니다. 나는 술을 마시면 주로 걷습니다. 술도 깨고 운동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70대가 넘는 노선배님들을 노상에서 만나뵈옵게 됩니다.

"청강(靑江 - 제 아호임)께서 백주에 이렇게 대취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라고 노선배는 걱정 반 애정 반으로 물으십니다. 나는 그렇게 걱정하시는 선배님께,

"치악산 밑에서 이 청강이 백주에 취하지 않으면 누가 취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건 그래! 그러나 청강이 건강해야 되지 않아?"

노선배께서는 웃으시며 애정어린 말씀을 주십니다.

역 앞에서 대포를 한잔 하자고 권하는 젊은 친구의 대접도 애정이고 노선배님의 말씀도 애정입니다.

언젠가 원주에 있는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상가를 거쳐 필방(筆房) 앞을 지나자니까 필방 주인 박형이 "선생님 잠깐만 저좀 보고 가세요" 하기에 필방에 들렀습니다. 그는 옛날 편지 하나를 내놓고 초서(草書)로 써서 도무지 알 수 없는데 편지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들여다보니 친구가 병환중에 있는 벗에게 약재와 그 처방을 자세히 일러주고 복용법까지 어떻게 하라는 사연의 편지였습니다. 원체 나도 단문(短文)하고 무식한 사람이라 그 편지에서 다섯 글자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다섯 글자를 초서에서 해서(楷書)로 고쳐 써주면서 옥편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필방 주인은 고맙다고 하였는데 느닷없이 고등학생이 그 편지를 필방 주인인 박형한테서 받아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옆에 있는 소파에 나를 앉으라 하더니 그 편지를 다시 풀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박형에게 일러준 대로 다시 풀어서 일러주고는 다섯 글자를 모르니 옥편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학생은 "그것도 모르면서 서예가예요. 에잇" 하고는 횡하니 필방을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빌방 주인은 무안해서 미안하다고 두번 세번 인사를 하는데 나는 멍한 순간이 지나자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저런 젊은 학생이 아니면 누가 이 바닥에서 시원하게 나를 혼낼 것인가 하고 생각 하였습니다.

지하상가를 나와 대로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것이 노소(老少)가 없을진대 아까 그 학생이 선생님이고, 이 못난 사람이 학생 중에서도 덜 떨어진 학생이로구나 하는 것을 선연히 느끼게 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나는 어려서 '상하소반(上下所反)'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로, 우리집에서 어른들이 말씀하신 것으로 압니다. 특히 그것은 나에게 잘 들려주신 말씀이기에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일인데 아버님께서 싸리나무를 여러 단 장에서 지게꾼을 시켜서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와 동생에게 뒤뜰 안 채마밭에 병아리들이 들어가 어린 배추와 무를 뜯어먹으면 김장은 낭패니 너희 형제들이 싸리바자를 엮어서 울타리를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두살이었고 동생은 아홉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엮은 바자는 꼿꼿하게 서있고 내가 엮어 세운 것은 서있지를 못하고 학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신 아버님께서 보시고,

"이놈아 네가 해놓은 것은 그게 무엇이냐, 병자리들이 다 드나들게 만들었으니 동생만도 못하고 참 답답하구나. 무엇에나 상하소반이니 이 다음에 무엇을 제대로 하겠느냐."

아버님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말씀이었다는 것을 잊을 길이 없습니다.

어려서 나는 학교에 다닐 때 1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껏 해야 3등 그렇지 않으면 5-8등 정도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돌아가신 형님과 누님은 매번 1등만 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에서의 별명은, 특히 아버님으로부터 얻은 내 별명은 먹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부님께 성적표를 보이면 "잘했다. 앞으로 더 잘해라" 하시면서 격려해주셨습니다. 형님이 15세에 이 세상을 떠난 후 조부님깨서는 둘째 손자인 나에게 한문과 붓글씨 쓰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마도 내가 5세 때인 것 같습니다. 조부님 앞에서 천자문의 한 구절을 외우는데 수십번을 가르쳐주셔도 단 석자를 외우지 못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아주 머리가 둔한 아이가 있었는데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삼년동안 꾸준히 익혔었단다. 그래서 나중에 문장을 지었는데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삼년독(三年讀)하니 언재호야(焉哉乎也)는 하시독(何時讀)일고'라고 했단다. 너도 그러면 된다. 책 덮고 나가 놀아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자고 부르는 소리를 조부님도 알고 계셨기에 사정을 보아서 해방을 시켜주신 것이라고 지금에서야 생각합니다.

이렇게 미련한 나에게도 낮에는 하늘의 태양이 밝게 비추어주시고 밤에는 달이 자정(慈情)의 빛을 주시며 땅은 필요한 만물을 제공해주십니다. 이 못난 남편을 아내는 주야로 걱정하면서 건강하게 좋은 일 하기를 바랍니다. 내 자식 삼형제는 훌륭한 아비되기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내 아우들은 이 무능한 형을 공경하며, 세상의 많은 선배 ·후배 ·친지들은 건강하고 도통하여 세상만민에게 많은 복을 베풀기를 바라니 나의 인생이 이 이상 더 행복하고 기쁠 수 있겠습니까? (1988년)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태복음 2장과 누가복음 2장에는 엄청난 일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인 동방박사들이 별의 안내로 찾아오고 목동들이 경배하고 소와 양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오심을 말해주는 사실들입니다. 하필이면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오셨단 말인가! 인간들의 집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바로 이 점이 인간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를 하나같이 자기 몸으로 섬기시는 징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를 섬기시고자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유에 오신 것은 짐승의 먹이로 오신 것입니다. 인간 세상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몽땅 해결을 하러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것들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시고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시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고 무소불위(無所不爲)하시고 무소부지(無所不至)하시고 무소기탄(無所忌憚)하신 자체이시라 영원하신 자리이며 만선만덕(萬善萬德)의 근원이시므로' 이것이 가능합니다. 마음이 착해서 거짓이 없고 욕심이 없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았는데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물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오시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가 기뻐서 목동들에게 알리고 하늘의 별이 기뻐하며 주님이 탄생하신 자리를 먼 곳에서 오는 학자들에게 안내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뵈옵고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고, 소와 양도 기뻐서 흐뭇한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을 지켜보고…. 이 사실은 어느 한 시대,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해결을 위한 경이적인 사실이 아니라 절대의 자리에서 시간과 공간에 매여있는 상대적인 모든 존재에게 하느님과 하나로 되어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34절에 보면,

"나는 분명히 말해둡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목숨을 이어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공중의 저 새들을 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두거나 하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먹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습니까? 또 여러분은 왜 옷 때문에 걱정합니까?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시오. 그것들은 수고하지 않고 길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들 중의 하나만큼 화려하게 입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믿음이 약합니까?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여러분이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덧붙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걱정은 하지 마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넉넉합니다. "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하늘을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에도 먹이고 입힌다는 말씀인데 하느님께서 날짐승 하나, 풀 한포기에게도 빠뜨림이 없이 섬기신다는 뜻이요, 먹이와 입는 것이 되어주신다는 뜻이요, 풀 한포기 새 하나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오늘의 수고는 오늘로서 그치고 내일 걱정을 말라는 것은 상대적인 시간에 매여서 살지 말고 절대적인 시간인 영원하신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삶을 살라는 엄숙한 명령이십니다. 개체로서의 존재들의 목숨은 개체 각자들의 임의로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물욕과 허례허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생명은 하나이고 절대이고 그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고,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이요 그분 자체이심을 알려주십니다. 만상(萬象)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만상 안에 함께 하심을 말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고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장 43-48절에서 잘 일러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들 가운데 있다. ‘”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있는 곳을 분명히 일러주십니다.

지난날 성 프란치스코는 들에 나가면 풀 한포기와 대화를 하고, 벌레, 들새들과 대화를 하고 그 만나는 자리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았고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를 직감하였습니다. 그러하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그 크나큰 평화의 기도를 일러주셨습니다. 옛날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나라 고승이신 휴정대사(休靜大師)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주셨습니다.

만국도성은 여의질이요(萬國都城如蟻垤),
천가호걸은 약해계라(千家豪傑若醯鷄),
일창명월에 청허침하니(一窓明月淸虛枕),
무한송풍이 운부제 일세(無限松風韻不齊).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 같고 천가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같구나, 밝은 달을 베개하고 고요히 누웠으니 끝없이 부는 바람 갖든 곡조 아뢰네.)

여기에서 휴정대사의 '청허침(淸虛枕)’이라는 이 자리, 즉 마음에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텅빈 자리, 욕심 없는 자리, 그것이 바로 애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하느님 계신 자리입니다.

선시(禪詩) 하나 더 적어봅니다.

인아산붕처에 무위도자성이라(人我山崩處 無爲道自成).
(너와 나라는 큰 산이 허물어진 곳에 자비(慈悲)의 도는 절로 이루어지네)

예수께서는 앞서 복음의 말씀에서 선악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자나 악한 자나 공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과 같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간절히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요구이십니다. 그리고 언제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명확히 눈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셨고 "사실 당신들 가운데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니까 어디서 오시고 어디로 가시는 분이십니까. 또한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시니까 태어나고 죽는 분이 아니시고, 언제나 계신 분입니다. 그러하신 하느님을 내 안에서 보았을 때, 그 하느님을 이웃에서 볼 수 있고, 하늘에서 볼 수 있고, 땅에서 볼 수 있고, 일체 만상(萬象)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법안선종(法眼禪宗)에 이러한 선시가 있습니다.

천지여아동근이요(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니라(萬物與我一體).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니라.)

그러므로 주객(主客)으로 상대적 조건하에서 하느님의 실체를 보려고 하거나 어떠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그것은 맞아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랑속에서 회개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삶속에서만이 오늘날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 인간과 자연과의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용서와 회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세상의 저속한 이해관계에 머무르는 일시적 행위에 그치고 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용서와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상황에서 회개와 용서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요, 주와 객이 해소되고 하나가 되는 일치의 삶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서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이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홀리는 계약의 피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의 참 양식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빵과 포도주가 그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양식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밥으로 오신 것을 말해주십니다. 하느님으로서의 밥, 생명으로서의 밥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나라 동학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밥 한그릇을 알면 만사를 알게 되나니라" 했고, "한울이 안울을 먹는다(以天食天)"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20장에는 '아독이어인(我獨異於人) 귀사모(貴食母)'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食자는 기른다는 뜻으로 '사'라고 읽으며 母자는 모든 것이 태어나고 죽어서 돌아가는 근원인 도(道)를 말합니다. 나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례허식과 부귀를 따르지 않고 도심(道心)을 기르는 것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몸으로서의 밥, 피로서의 포도주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9-25절에서 바오로 사도에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는 것으로 말미암음이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인간외의 창조물들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자연의 모든 것들이 무참하게 이용당하고 짓밟히는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롯한 자연만물이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파괴되어 신음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장 27-28절에 "하느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말씀은 자연이 단순한 피조물로서 하느님이 내재한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연은 소위 탈신성화(脫神聖化)되었고 인간의 자의대로 이용되고, 자연과학의 추구대상이 되어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올 때 위기상황의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신앙의 관점, 탈신성화된 자연에 대한 이해가 자연은 지배와 점유의 대상물로서만 이해되고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공업에 있어서의 노동이 신성시되는 것과 비례해서 자연은 그만큼 인간의 소유대상, 독점할 수 있는 목적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극히 근대 서양철학과 사상들은 철두철미하게 인간과 자연의 분리(分離)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중심론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자연세계란 오직 주체를 통한 객체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주체와 객체(자연) 사이에 이원적 뿌리가 깊게 내려진 것입니다. 자연은 상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끝을 모르는 자연지배의 관심은 근대 기술과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근대 서양사상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생태학적 위기와 기계와 기술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상실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집착에 빠져 자연이 인간과 한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멸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선진제국과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보다 많은 생산, 보다 많은 소비, 보다 많은 소유, 소위 성장을 기저로 하는 현행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지구의 자원을 거의 고갈시키고 있으며, 환경과 생태계가 생존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멸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에 즈음해서 예수님의 모범을 돌아보며 더욱 동양사상의 맥락에서 특히 우리 한국의 슬기로운 사상들이 이 험악한 죽음의 우주적 상황에서 좋은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새벽> 제143호)

화합의 논리, 협동하는 삶

- 한살림공동체 치악산 연수회 특강 (1987년 11월)

좋은 일들을 하시는 분들이 서로 만났으면 하는 그런 뜻으로 이 먼 강원도 치악산 밑까지 오셨는데, 저는 원래 전에는 남이 쓴 책 보는 것이 취미였고 누가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그냥 사양하고 했는데, 세월이 자꾸 가니까, 어차피 세상에서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요, 옛날에 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또 알뜰하게 간 분들이 더듬어 보면 다 말씀한 이야기인데, 저 나름대로 여러분들이 지금 모여서 하시는 일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오늘 이 시간에 약 한시간 동안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옛날에 어려서 어른들 말씀이나 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스님들이 이가 득실거리면 이를 일일이 잡지 않고 나가서 이렇게 훌훌 털었다고 해요. 산 것을 딱딱 죽일 수가 없었던 거예요. 원효대사의 전기를 보면, 사복이 원효하고 같이 절을 짓는데 비탈에서 터를 닦고 나무를 실어나르고 이러는데, 사복이 있다가 "스님, 우리가 이렇게 걷는 동안에 많은 개미를 짓밟고 이렇게 나무를 해치고 하는데, 이것도 산 것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까? 큰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하니까 원효대사가 "그래, 네 말이 맞다. 확실히 죄를 짓는 거다. 그러나 오늘 이 절을 짓는 것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일체의 것을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절을 짓는 거니까 부처님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런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어요.

옛날에는 그저 감상적으로 맞는 말이구나 했지요. 그런데 제가 한때 호텔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사형수들은 일심에서 사형이 확정되면 감방 안에서도 수갑을 채우니까 굉장히 초조해 합니다. 게다가 사형이 떨어지면 자꾸 딴 방으로 옮겨가고 어떤 때는 독방에 들어가기도 하니까, 그것까지는 초조한데, 대개 사형수들이 재판이 끝나고 독방에 가게 되면 상황이 달라져요. 어떻게 상황이 달라지냐. '나'라고 하는 그 자체, '자기'라고 하는 그 자체는 세상에서 이젠 끝난 거다 이 말이야. 자기 처하고 떨어지는 것이고 자식하고 떨어지는 것이고, 이 다음에 세상에 나가면 뭐 해보겠다는 거하고도 떨어지는 것이고. 자기가 단념하려고 해서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진 상황이 단념하게 하니까.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촌보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이미 '나'라고 하는 것은 절멸상태로서 뒤에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었을 때부터는 사형수들은 방안에 드나드는 쥐, 뭐 이런 것 있잖아요. 철창 밖에 이렇게 나무가 있으면, 그 쥐에다 먹다 남은 밥을 내놓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새들이 와서 이걸 먹어요. 또 감방에서 구멍이 뚫려서 쥐가 좀 왔다갔다 하는 기색이 있으면 쥐를 위해서 밥을 남겨 놓는다구. 그러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새와 그 쥐가 친구가 돼버려. 갈 생각을 않는단 말이야. 항상 밥을 놔두니까. 그리고 항시 쥐를 거부하는 마음이 없이 받아들이니까, 그러니까 입으로 "쮜쮜쮜쮜" 하면 쥐가 가까이 오고 또 이렇게 바투 오라고 하면 손에도 타고 몸에도 와서 놀기도 하고 이런다고. 쥐가 말이지.

저 쥐는 인간을 해치는 거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을 전부 쏠아놓는 거다, 인간이 먹으려고 하는 것을 전부 도둑질해 가는 거다, 이렇게 되었을 적에는 그 쥐는 그렇게 안돼요. 그런데 쥐가 그렇게까지 가까이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형수가 쥐에 대해서 무심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따뜻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바로 내가 너다" 하는 거나 다름 없거든. 거기에서는 '자기'라고 하는 장막을 벗어났기 때문에 쥐가 바로 사형수라고. 그런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쥐가 편안하게 온 거라. 그렇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 베라먹을 짐승" 이렇게 되면 쥐가 가까이 안 온다 이거야. 그러니까 생명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추운 티가 없어야 돼. 추운 티가 없어야 돼. 장벽이 없어야 돼.

여기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마는,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나 신앙 가졌다"고 하시거든. 그런데 나는, 지금 50여년이 넘어요. 천주학쟁이 이름 붙인지가. 그런데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올시다지. 아직도 아상(我相)이 있다 이 말이야. '나'라고 하는 것, 뭘 이렇게 딱 당하면 두려움이 있고, 뭘 딱 당하면 저 놈이 날 해치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 이 따위 정신 가지고는 믿음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는 거다 이 말이지. 더더군다나 바로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시오, 나 출세하게 해주시오, 이 따위 정도 가지고는 믿음의 차원이 아니다 이 말이야.

여기 몇분은 요 며칠 나하고 얘기를 해서 알겠지마는, 달마가 벽을 향 해서 9년을 수도를 했다 이 말이야. 9년을 수도를 했는데, 그 9년 수도는 뭐냐? '자기'의 벽을 없애는 거야,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는 거라구. '나'라고 하는 것을 9년 동안 닦아서 완전히 없애는 거라.

성경에 보면, 예수가 배후에 딱 계신데 제자인 베드로가 선생님하고 가다가 물에 빠지는 거라. 이 믿음이 작은 자야, 내가 오라고 했으면 겁내지 말고 그냥 와. 그런데 거기 물에 자꾸 빠지는 거라. 사람이 물에 가면 빠진다고 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지. '나'라고 하는 장벽이 없어지게 되면 그 물을 걷고 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선화(禪畵)에서 달마가 갈대를 타고 물을 건너가는 것을 보시게 될 거예요. 그건 왜? 천상천하가 바로 '자기'야. 천상천하가 바로 '자기'라고. 일체가 '자기'라고. 그런데 자기 몸이 '자기'는 아니야. 자기 몸이 '자기'가 아닌 동시에 전체가 '나'란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느냐 하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이 말이야. 생명은 볼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볼 수가 없는데 하나다 이 말이야. 생명은 분명히 있는데 하나다 이 말이야. 생명이 둘이다 할 적에는 ‘너’와 '내'가 갈라지는 거예요. 또 현상세계에서 얘기할 적에 삼사오 이렇게 자꾸 갈라지게 되면,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되었든간에, '너'와 '나'와의 대상관계라고.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 현실세계의 현상세계만 보게 되는 거지. 이 생명은 절대세계에 속하는 거지, '너'와 '나'라든가, 삼이라든가, 사라든가 이거는 상대적인 세계에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날 모두가 하나같이 눈으로 뵈지 않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눈으로 들어오고 손으로 꽉 쥐어야만 이게 뵌다고 하는 세상이라. 그것이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요, 그거만 따라가다 보니까 해결이 안되는 거라. 어떠한 거든지 현상세계는 ‘너'다 '나'다 이렇게 생긴 이것은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너·나' 해서 자꾸 담을 쌓고 가게 되면 말이지 수없이 담을 쌓게 돼.

수없이 담을 쌓게 되는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여기에 금메달이 있다, 여기서 일등 이등 삼등을 뽑는다, 그러면 여기 기찬 여러분들은 전부가 일등만 하려 들거란 말이야. 그러면 박회장, 여기 계신 여러 분들은 전국에서 모인 기찬 인물들이란 말이야. 자기가 꼭 일등을 해야 되겠든데 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자네는 여기 앉은 사람들이 전부 라이벌이 되지. 그래 안 그래? (네.) 크게 얘기해, 모기소리만하게 이야기하지 말고. 그래 안 그래? (웃음) (그렇습니다.) 그렇게 돼 있다고. 그러니까 벌써 금메달을 따자든가 일등을 하자고 하다 보면 전부가 적이 된다고.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이 돈을 지키기 위해서 조금 이상하게 생기고 가난하게 생긴 놈만 보면 말이지 도둑놈처럼 뵐 것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지? 이거 가지고 가려고 애쓰더라 이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말이야 하루아침에 무산될 수 있는 거라. 하루아침에 무산될 수도 있다고 예를 들어서 여직끔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거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이런 것은 영원 고정 불변한가? (아니요.) 그러지 말고 힘차게 대답해 봐. (아닙니다.) 응?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맞아.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뭐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말이지 영원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어.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오는데 말이지, 불과 여기 도착해서 저기 방에 들어갔다 여기 모는데도 수십가지 생각이 왔다갔어. 생멸하는 거라. 왔다간 꺼지고, 덧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뭐냐. 그걸 선가(禪家) 사상에선 '도(道)'만 믿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또 기독교에선 '하느님'만 믿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이야기는 다양해. 그러나 이런 것, 이런 것은 전부가 다 절대를 이야기하는 거라. 절대를 이야기하는 거야. 그러니까 절대를 이야기하는 만남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일컬어서 '무식(無識)의 세계' 또는 '무아(無我)의 세계'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면 예수가 기차게 이야기 한, 부처님이 기차게 이야기한 사랑이라든가 자비라든가 이런 것은 행할 수가 없는 거라. 그게 아니면서 행하는 것은, 감상적으로 행하는 것은, 내가 저 입장이 되면 딱하니까, 야 가엾다, 그래서 하는 거지 딱 틔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 말이지. 그랬다가도 누가 옆에서 욕이라도 하면 "에이, 기분 나뻐. 나 안해." 이런 식이 되는 거지.

누가 뭐라고 하든 이 길은 갈 수 있겠다, 누가 뭐라든 이렇게 하는 것만이 대경대도(大經大道)다, 가야만 하는 길이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이렇게 되었을 적에는 위와 같은 자세는 아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소비자협동조합, 또한 한살림, '한살림'이란 이야기 그 자체가 뭐냐. 생명이란 얘기거든. 하나란 말이야. 나눌 수 없는 거다 이 말이야. 예를 들어서, 서선생. (예.) 땅이 없인 살 수 없잖아요? (예.) 하늘이 없인 살 수 없지요. 전체가 없이는. 그런 관계로서 봤을 적에 저 지상에 있는 돌이라든가 풀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모든 관계는, 이게 분리할 수가 있습니까? 분리할 수가 없어요. 하나지.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우주에서 어떻게 분리할 수가 있겠어요 우주는 분리할 수가 없잖아. 하늘과 땅과 떠나서 살 수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떠나서 존재할 수가 있다고 하는 곳이 있다면 말씀해봐요. 일체의 존재는 하늘과 땅, 우주와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그럼 그런 자격으로 봤을 때 일체의 중생, 풀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돌이라든가 그거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동격(同格)이지요. 동가(同價)다 말이야. 그런데 이건 더 아름다운 거, 이건 고귀한 거, 이건 좋은 거, 이건 나쁜 거, 이건 누가 정하는 거냐? 사람의 오만, 사람의 횡포가 정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이 오늘 이 시점에 와서 자기횡포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우주는, 인간의 미래는 끝나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떤 시기에 당도해 있느냐 하면, 야 이거 이런 식으로 살면 땅이 다 죽지 않는가, 자원이 다 고갈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고. 안경쓰신 양반. 땅이 죽으면 말이야, 자연이 살 수 있어요? (없습니다.)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 그래, 택도 없지. 택도 없다고. 그러니까 여기 오늘 이렇게 모인 여러분들이 소비자협동운동을 하면서 일체의 삶이 다시 회복이 되자면 땅부터 회복이 되어야겠는데, 이 땅이 회복되게끔 하자면 비록 고달프지만 이러이러한 농사를 지어서 원상회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향심 때문에, 그렇게 하면서 같이 먹고살고, 살림을 나눠보고, 그런 걸 하자고 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와 계신 걸로 알아요.

예수가 옛날에 한 말 중에 "버린 돌이 모퉁이의 주춧돌이 된다"는 얘기 있잖아요. 그건 뭐냐.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된다는 얘기는 뭐냐. 내가 여기 보니까 우리나라의 장관감이 없어. 여기 대통령감 있는가 봤더니 마음들이 아무리 대통령할래도 대통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안계셔. 그러니까 대통령이나 벼슬아치들이 보거나 요새 재벌들이 보면 우린 다 무지렁이들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이 사회의 문화와 이 문명속에서 우리는 다 팽개쳐버려진 돌들이라. (네. 그렇습니다.) 그거 기분 나쁘면 나한테 항의하라고. 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바로 그것이 중요한 거야. 너희는 그렇게 가라 이 말이야. 우리는 버려진 사람이다 이 말이야. 그렇게 자처하자 이 말이야. 그런데 이 속에서 이렇게 해가지고 커지면 출세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면 힘이 많아져 가지고 좀 뭐 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따위의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하려면 애초에 빨리 저 쪽으로 뛰어들어가는 게 나아. 이 동네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그렇지 않아요? 바로 그게 중요한 거라.

옛날에 우리 어려서, 저 애들 동요에 보면 말이지, "짱아 짱아 고초짱아 저리 가면 똥물 먹고 이리 오면 이밥 먹는다." 이렇게 했지. 그런데 애들이 하도 짱아를 주물럭거려서 그만 죽어버리긴 하지만 말이지. 다시 이야기해서 우리가 사는 방식을 우리 나름대로 처리하는 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지금 얘기하는 저 자신도 지난날의 문명과 지난날의 역사가 머리 끝서부터 발끝까지, 내 속 천엽까지 속깊이 박혀 있어서 새롭게 제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처신하기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매일 저는 수십번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요. 그래선 요즈음 어떻게 생각하느냐. 옛날에 우리 어르신네들이 저것들이 언제 철이 나서 사람이 될까 하셨는데, 요새 제가 환갑이 지났는데도 철이 안났단 말이야. 철 날 수가 없잖아요. 지금 꼬라 지가.

이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학부모들이나 군인들은 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잘난 부인을 얻고 또 내 아들이 석박사를 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뭐 그렇게 되면 다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1945년에 이차대전이 끝나고 6·25동란이 딱 나고 우리나라에 미국애들이 와서 참전을 했단 말이야. 어떤 놈은 전쟁을 하면 돈을 벌고, 어떤 놈은 세금을 내야 되고, 세금을 내면서도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서 죽여야 되고. 이거 경 우에 맞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면 대학에서 출세하라고 가르치고, 잘났다고 그거 좋다고 하는 색시 얻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야.

여러분들 히피 얘기 들었어요? 히피, 들었지? (네.) 아니 좀더 크게 얘기해봐, 내가 이농증이 있어서 잘 안 들려. (네, 들었습니다.) 그래, 좋았어. 바로 그 히피가 웃기지 말아라 이 말이야. 누가 잘났다고 하고 뭐 그렇게 그렇게 하지만 말이지, 전쟁 나가는 의의가 없지 않느냐 이 말이야. 우리는 세금 내고 사람 죽고, 돈 버는 것은 엉뚱한 놈이 벌고. 우리 속담에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고 그랬는데, 돈은 군수재벌이나 힘있는 놈들이 벌고 뭇백성들은 나가 죽어야 되고 세금 내야 되고 …. 그 반성에서 오는 것이 미국사회의 히피예요. 그러니까 옷 단추 안 끼고 공중변소에서 오줌 안 누는 거라. 길가에서 사람 보든 말든 그냥 갈기고, 휴지는 쓰레기통에 왜 버려. 그 짓거리를 지켜주는 것은 그거 하자고 하는 놈들을 지켜주는 건데 "나 기분 나빠 안 해" 왕창 갈지자로 가는 거지. 그런데 이걸 모르는 거야. 왜 모르느냐.

그때 유명한 제임스 딘이라고 있었죠. 그때 그 무렵에 제임스 딘이 유명했어요. 왜 유명했느냐. 저희 아버지는 대학 가라고 공부시키고 저희 집에서 먹을 것 다 주고 입을 것 다 주는데도 이 새끼가 말을 안 듣고 딴 청만 하거든. 왜 (이유없는 반항)이라고 해서 영화도 나오고, 옛날에 그랬었다고. 그러니까 아이가 학교공부만 똑똑하게 잘하고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고 뭐 또 어디 회사에 시험 잘 쳐서 일등으로 합격하고, 그것이 해결해주는 게 아니다 이 말이야. 참 어려운 얘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물처럼 돼야 돼. 물처럼 돼야 된다고. 경쟁에는 협동이 없어요. 경쟁에는 협동이 없다 이 말이야. 게임에는, 하나의 게임이 형성이 되자면, 혼자 게임이 되는가?(안됩니다.) 그래 혼자서는 게임이 안되는 거야. 여럿이 같이 해야지. 그런데 오늘날의 문화는 게임에서 이긴 자만 사람대접을 받고 진 자는 사람대접을 못 받잖아. 그런데 그 영광을 갖게 해준 자는 누구야? 게임에서 이긴 사람을 뒷바라지해준 사람은 누구야? 진 자들 아니야? 게임에서 이긴 자들을 있게끔 해준 자들은 패자들이다 이 말이야. 그럼 그 패자가 없는 승리의 영광은 있는가 말이야. 있을 수 없지? 승자가 있게끔 해준 자들은 바로 패자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 ‘화(禍)와 복(福)' ‘화(禍)’안에 '복(福)'이 있고 '복(福)'안에 ' 화(禍)'가 있다고. 그건 분리될 수가 없어. 그걸 알아야 돼. 저건 분리될 수가 없어.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말이야 ' 복(福)’은 '복(福)’대로 따로 있고 ' 화(禍)'는 ’화(禍)'대로 따로 있는 줄 알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일을 하는데, 협동운동을 하는 데, 생명운동을 하는 데 일을 처리하는 시각이 가자미 눈깔 있지? 가자미는 한쪽 눈만 보잖아. 오늘날의 문명이 어떤·문명이냐? 아편문화야. 이긴 놈만 다고 진 놈은 계산 없으니까. 이쁜 여자만 다고, 저희들이 결정하는 거지, 이쁜 것도 뭐 저희들이 결정한 뒤는 계산없는 거라. 그러면 그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망하게 돼 있는 거라. 아, 양반도 종놈이 있어야 양반 노릇하는 건데 저를 그렇게 만들어준 자를 무시하면 저는 어디로 가. 그렇지 않아? 그러면 요샌 어떻게 되느냐. 우리 속말에 이런 말 있지. "병신육갑하네." 그런데 사실은 저희가 보는 병신은 병신이 아니고 병신 아니라는 놈들이 육갑을 하는 거라. 지금 그렇게 돼 있어.

서윤복이가 보스톤 마라톤에서 일등을 했을 때야. 그때 백범이 아직 살아계실 때거든. 그때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초청을 해가지고 이 영감쟁이 말씀을 하는데, "야, 뛰는 걸로 얘기를 하면 사람보다 말이 잘 뛰어." 그렇잖아? 사람이 뛰는 한계 이상 좀 뛰면 이게 제일이다 하는데, 그건 사람동네의 얘기지. 그래서 백범 선생께서 뭐라고 그러셨느냐. 거기에 도취가 되지 말아라 이 말이야. 우리가 진짜 해야 될 것은 이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성실하게 생활을 나누고 서로 아끼고 또 전세계 사람들이 봤을 때도 이 땅의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느냐 하는 그런 일이 우리가 지금 현재 앞으로 해야 할 일이지, 그 뭐 뜀뛰기 가서 일등했다는 거 가지고 길거리마당에서 애들마다 전부 뛰고 말이지 이럴 수 있느냐. 아, 그 옛날에 백범 선생이 그런 말씀했어요. 우리의 생명운동이라든가 협동운동 이라든가 이런 문제가 바로 그런 거다 이 말이야.

비근한 예로, 이젠 분명히 합시다, 내가 이 동네에서 저 동네 가자면 말이지 군인민위원회에 가서 "내가 저기 좀 가야 되는데 갔다 오겠습니다." "음, 갔다와도 좋아. 대신 여기에 서명하고." 여기 마산서 올라오시고 전라도에서 올라오시는 데 여러분들 "원주 치악산 갔다오겠소" 하고 도장받고 오신 분 있습니까? 없겠지 여긴. 40년 동안을 쥐고 있는 거라. 쥐고 온다 이 말이야. 꽉 쥐고. 그 김일성이하고도 통일해야 돼. 안할 수는 없어. 또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적대관계를 가지고 가선 말이야, 어떻게 이 땅이 살 수가 있어. 이미 이 땅은 전부가 화약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그러한 김일성이하고도 살아야 되는데, 그 독재의 성격은 이승만이 플러스, 장면이 플러스, 박정희 플러스, 전두환이 플러스 해도 아마 15라운드 복싱을 하면 말이지, 이쪽은 3라운드 올라가기도 전에 케이오 될 거야. 그렇지 않겠어요? 내 얘기는 남한 내부의 각계각층이 민족전체의 상황속에서 이 문제를 보고 비적대적인 관계에서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해가야 된다 이 말이야. 이해하겠어요? 여지껏 해온 것처럼 저 새끼가 있으면 내가 죽어, 그러니까 저 새끼를 죽여야 돼, 이런 관계를 가지고 이 땅의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이 말이야. 그건 적대관계지? 저기 뻘건 체크무의 입은 사람. 적대관계지 그건? (네. 그렇습니다.) 니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죽으면 니가 사는 게 적대관계 아니야? (예. 맞습니다.) 그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을 도출해야 돼. 그것은 반쪽으로 나눠져 가지고는 안돼. 일등만 얘기하는 거 가지고는 안돼.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요? 여기도 전부 갈가리 쪼개지면서 민주주의하고 통일하겠다고 그랬어. 그런데 그거 가지고는, 그 방법 가지고는 안돼. 남한 내부도 일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가야 돼. 남북관계도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가야 하는 것이 전제야. 그런데 이것이 서양애들이 써먹던 '경쟁의 논리', '시비의 논리' 가지고 되겠느냐 이 말이야. 안된다 이 말이야. 너와 나를 전부 함께 싸고 넘어가는 방법이 뭐냐. 니가 있으니까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니가 있다고 하는, 같은 인정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으로 해야 될거 아니야. 그런데 그것은 인간끼리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속에 있어서도 니가 있으니까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니가 있다고 하는 안목이 있을 때 되는 거라.

그럼 우리가 앞으로 일상생활에서 뭘 제거하고 가야 되는 거냐.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출세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자 이 말이야. 또 손해를 본다, 잇속을 본다 그런 것 계산하지 말자 이 말이야. 이거 참 말은 쉬워요. 나도 못하는 얘기를,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거예요. 나도 현재 그렇게는 못해. 예수님이 오면, 와도 교회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거예요. 교회에 고개를 돌릴 것 같아요? 담이 그렇게 높아가지고. 부처님 오시면 말이지, "이게 뭐여, 뭐 이런 것도 있는가!" 그럴 거라구. 그래서 옛말에 말이지, 노자도 그런 얘기했고 장자도 그런 얘기했는데, 멋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거짓된 인사를 하지 마라. 잘났다고 하는 사람, 공부 많이 하고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을 갖다가 드높이면, 들어올리면 말이지, 세상사람들이 서로 치고박고 그런단 말이지. 알력이 생기게 된다 이 말이야. 그렇지 않아? 요새 클라스에서 일등한 놈만 서울대학 간다고 해가지고 너나 없이 전부 서울대학 가려고 치고받잖아. 그렇잖아? 그러면 그거 끗수 가지고는 세상이 복잡만 해지지 수재 가지고는 세상을 평화롭게 하지는 못해. 우리는 바보 집단 가지고 버려진 놈들끼리 다시 끼고 가자고. 난 바보도 못되니까 바보들이 하시는 밑이라도 씻는 휴지라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갈게.

그 다음에 '임지치민상도(任知治民上盜)'라. 아는 놈에게 일을 맡기면 말이지 세상을 속이는 도둑놈이 된다 이거여 그거 아니야? 뭘 안다고 껍적거리는 놈이 일을 꾸미고 잇속을 따지고 전부 이렇게 하다 보니까 바보 같은 놈은 전부 잃게 되잖아. 그렇지? 그래 안 그래? (네, 그래요!) 어, 시원하구만. 고마워. 그렇다구. 그래서 노자는 세상이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을 숭상하지 않는다 이 말이야. '불상현(不尙賢)'이라.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말이야. 그 새끼들은 결국은 야바위친다 이 말이야. 백성들 착취하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거를 갖다가 전부 똥창에 갖다 넣고 그러고도 멧돼지는 아주 잘 산다 이 말이야. 그거 어디서 났느냐 말이야.

그런데 요새 문제가 뭐냐, 민중운동이니 뭐니 하는데 이 민중운동의 목표가 뭐냐 이 말이야. 저 새끼들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어, 저 놈들 도둑놈인데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 그것이 소련이나 동구라파에서 해보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뭐 해결이 돼요? 네가 뻑적지근하게 잘 사니까 우리도 좀 그렇게 돼야 되겠다는 거 아니야? 그거 가지고는 안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의 민중운동은 자칫하면 저 아프리카나 이런 데 있는 빈민지대의 기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이렇게들 잘 사는데 왜 이렇게들 미쳤어, 지랄이야, 이럴 거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가치의 설정만은 물질의 가공과 생산자가 조작한 그것 속에서 설정하지 말자 이 말이야. 그리하여 이 물질과 이 자연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는 방법을 도출할 적에 전체가 건전해지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그건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 이 말이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를 우리나라의 증산교의 강일순 선생은 '원시발본(原始返本)'이라고 해서 맨 시작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뭐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한마디로 주판을 다시 놓자는, 우리의 생활을 회개하고 잃어버린 '영(靈)’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거지. 그런데 그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업가들이 생산한 것을 자꾸 소비해주어야만 그 자본주의면 자본주의, 사회주의면 사회주의가 돌아가니까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젠 그것도 막혔다 이 말이야. 왜? 물질을 너무 낭비하면 우리 후손들이 미래에 살 수 없으니까. 그래 가지고는 안되지요. 그러니까 알뜰한 것, 물자에 대해서 알뜰하게 생각하자 이 말이야. 절약하며 생활하자 이 말이야. 그것은 누가 비웃더라도 좋다 이 말이야.

뭐 저도 오늘 별수없이 차를 타고 왔지마는 나지도 않는 석유를 자꾸 낭비를 하는 그런 생활도 생활속에서 반성하고 가야 할 거다 이 말이야. 또 매일 간지로 종이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웬만한 종이는 아껴보자 이 말이야. 그걸 버리지 말고 무엇이든 재생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이 말이야. 그렇게 해서 우리의 문제, 문화의 문제, 문명의 문제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다시 반성하자 이 말이야. 그런 물자 하나하나는, 거기에는 모든 자연의 움직임이 역사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노력이, 피와 땀이 함께 한 거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함부로 낭비하냐 이 말이야. 함부로 버리느냐 이 말이야.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소멸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제자리를 제대로 찾자면 자연과 인간과 또 인간과 인간 일체가 하나되는 속에서 “너는 뭐냐”, 그렇게 되었을 적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고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조건이 나를 있게끔 해준 것이지 내가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다 이 말이야. 따지고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거지. 그것을 알았을 적에 생명의 전체적인 함께하심이 어디에 있는 줄 알 것이고 우리가 연대관계속에 유기적인 관계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속에 있으면서, 그러면서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합의 논리요 서로 협동하는 논리라는 그런 시각으로 봤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새 시각속에서 우리 한살림공동체 이야기도 될 수 있겠지.

약속한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 제 이야기는 이만 그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거룩한 밥상

제가 오늘 여기에 붙잡혀온 기분이에요. 여러분들을 뵙고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찻간에 오면서도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고 그러고 있던 중인데 이제 세상이 하도 병이 철골(徹骨)이 돼서 -- 병이 뼈까지 스몄다 말씀이에요 -- 그래 세상도 죽게 되고 사람도 죽게 되니까 어떻게 좀 살 수 없을까 해서 이제 이런 운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죽어가는 거리를 자꾸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살아야 되겠다, 자연보호해야겠다 이런 얘기한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그러저러한 것을 먼저 살아가는 데서 헤아려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사는 꼬라지는 병 그대로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 뭐냐면 장생하려 들고 제대로 살려 들고 자꾸 이렇게 얘길 하는데, 매일의 생활의 모습은 병을 주면서 오래 살고 좋은 건 저만 뭐 어떻게 하겠다 그런 요새 세상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병이 나지 않게끔 되는 원 바탕이 뭐냐, 그런 얘기가 좀 돼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잠간 했어요.

옛날에 여러분들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중국에 잘 알려져 있는 분인데, 장자 말씀이 "귀로 듣지 말아라 맘으로 들어라, 맘으로 듣지 말아라 호흡으로 들어라" 그런 말씀이 있어요. 옛날에는 그 글을 보고서 이 무슨 얘기를 이 따위로 했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근자에 와서 이렇게 가만 보니까 그 얘기가 굉장히 근리(近理)하구나. 저도 아직 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길 안해요. 근리하다고 하지요.

요 몇해 전에 일본 갔다온 분인데 후지산에 올라갔다가 보니까 그 후지산 위에서 공기를 갖다가 봉투에 넣어서 팔더래요. 후지산 공기라고, 이건 공해가 없는 공기라고. 그러니까 도시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공기를 파는 거라. 우리가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한강 물 사먹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일본에서 이제 얘기한 대로 여러해 전부터 후지산에 올라가서 공기를 그 무슨 봉툰지 모르지만 봉투에 넣어서 팔더라 이 말이에요. 이렇게 살다 보면 말이죠, 우리가 공기도 사먹게 되겠지요. 먹게 되는 건가 뭐 마시게 되는 건가요. 꼬라지가 거기까지 갔다 말씀이야.

그런데 뭐 제백사(除百事)하고 코 입 다 막고서 5분간 이상 넘어가면 말이지, 우리 죽습니까 삽니까? 그러니까 명이 호흡 경각에 달려있다 이 말이야. 호흡 그 경각에 달려있어요. 그럼 그 단번에 얘기가 뭐냐. "호흡으로 들어라. 저 빈곳을 좌라. 저 빈곳을 봐라. 저 빈곳에서 빛이 나지 않느냐. 길하고 길한 것이다." 그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은 일상생활속에서 전부 눈에 보이는 거 듣는 거 또 만질 수 있는 거 감각으로써 느끼는 거 속에서만 산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그런 그 속에 근본적으로 우기가 터득해야 할 것이 있느니라 그런 얘길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얘기는 뭐냐. 욕심을 버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 문명이 욕심에 의해서 서로 승강이를 한단 말이에요. 서로 그렇게 승강이를 하게 되니까 한이 없어. 한이 없고 끝도 없고 내가 듣는 바에 의하면 앞으로 20년 안이면 저기 적도지대에 있는 나무가 거의 깎아먹혀 없어진다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 지금 쓰고 있는 펄프를 자체 내에서 해결을 하면, 일본이 지금 그렇게 산이 푸르르고 울창하다고 하는데 일년이면 산이 다 빨개진다는 얘기예요. 저 일본만 쓰는 것도 그렇다고 하는데 미국 구라파 소련 동구라파 뭐 전세계 우리나라 등등해서 종이 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적도지대에 생태계가 파괴돼가고 있는 거죠. 대기권에 산소가 줄어들고 있는 거라. 나무가 있어야 산소동화작용을 해서 대기권의 산소도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거를 넉넉히 지닐 수가 있는데 없어져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이 보는 신문에 매일 간지 들어오지 않아요? 그거 일일이 보십니까? 큰 자만 쓱 보고 이거로구나 하고 폐기해버리지 그렇게 해서 한없이 낭비해요. 그런데 그 간지를 넣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겠으니까 또 집어넣는 거라 이 말이에요. 서로 엇물려 돌아가는, 그러니까 결국은 경쟁속에 처지게 되면 이 문명속에서는 탈락이 되고 패배가 되니까 자꾸 그렇게 엇물려 돌아가는 거라.

그런데 지금 이제 주부님들께서 이런 마당에 모이셨는데 엄청난 용기를 내고 나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다시 얘기해서 현실세계의 싸움에 있어서는, 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산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거예요. 저집이 이태리 가구를 들여놓았으니까 우리도 들여놓아야 하겠다, 저집이 미국에서 타이루를 갖다가 아주 좋은 돌로 해서 깔았으니까 우리도 깔아야 되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운동은 초장서부터 갈지자로 가는 거지요.

아주 우스운 얘기지만 어려서 서울을 하도 올라와보고 싶어해서 국민 학교 4학년 때 어른네들이 서울을 데리고 왔어요. 우리 삼촌댁에 갔더니 수도물이 쫘악 하고 나오더라고요. "여긴 대장균이 없다, 너. 시골물은 대장균이 많아." 야, 서울 사람들은 대장균 없는 물을 마시는구나, 좋은 물 먹는구나 그랬는데 50년이 지난 뒤에 보니까 서울 양반들이 전부 샘물 사먹더라구. 바뀌지 않아요, 예?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진짜 모습이 뭐냐, 전부 오늘의 세계는 뭐냐.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간에, 공산주의 세계든간에 전부 상혼이 깃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팔아먹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팔아먹어야 되니까 어떻게 되느냐. 좋다고 얘기를 해야 된다 말이에요. 좋다고 얘기를 하는데 또 이것은 뭐냐하면 상하지 말아야 돼. 비근한 예로, 아까 여러분들이 다 안 오셔서 어디 가서 잠간 지체를 하려고 하니까 찻집이 없어서 빵집엘 갔어요. 거기 아마 방부제가 들어갔을 거예요. 옛날에는 떡을 해놓으면 사흘 가기가 바쁘지 않아요? 여름에는 큰일을 치르면 떡이나 모든 음식이 하루만이면 쉬지 않아요? 상해야지요. 상해야 한단 말이야. 우리가 오늘날 먹고사는 건 벌레도 안 먹는 걸 먹는단 말이야.

제일 잘난 척하지만, 사람이 제일 머리가 좋다고 하지마는 벌레도 안 먹는 걸 우린 참 잘 먹고산다구.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 아마 우리가 죽으면 미이라 꼴이 되지 않을까요? 방부젤 맨날 먹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이 달라서, 그렇게 변화해간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얘긴 뭐냐. 원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 거기에 많은 손이 가삐 않는 거 그런 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거란 말야.

지금 우리가 자녀를 키우는데 고등학교도 가야 되고 대학도 가야 되고 뭐 대학원도 가야 되고 뭐도 되야 되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데 얼마나 노력을 들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세상 경쟁속에서 이기라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렇죠? 이기지 못하면 축에서 빠지니까. 이 톱니바퀴에서 우리가 지금 이제 못 견뎌나고 있는 거지. 근데 이것을 옛날에 이천 약 오백년, 뭐 이천년 전이라고 합시다, 노자 선생은 아주 잘 얘기했어요. "말은 달려서 사냥을 하게 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미치게 한다" 이거야. 그렇죠? 그래요 안 그래요? 말이 편안하게 있는데 저기 노루새끼 한마리 나타나게 되면 말을 벼랑인지 어딘지 모르고 몰고 뛸 거 아니예요. 미치는 거지. 천하에 얻기 어려운 보화를 얻고자 하면 사람의 행동이 제대로 갈 수가 없다 이 말이야. 그것에 사로잡혀서 방해가 된다 이 말이지. 뭡니까, 아이들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명문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뭐 이런 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자게 하고 정상적으로 움직거리게 하고 정상적으로 인간관계를 갖게 할 수가 없잖아요. 완전히 그리 몰아가기 때문에, 부귀 명예 권세 그런 거에 가치의 중심을 두기 때문에 전부 그리 달려 뛰는 거라. 그러니까 결국은 이 사람이 일등을 하게 되면은 내가 메달을 못 따니까 이 사람이 못 따기를 바란다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악착같이 따라오면 그 다음번에는 어떻게 돼요? 밉지요? 이제 미운 것이 지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죽여야지요? 이치가 그렇잖아요? 예수께서 "미워하지 말아라. 마음에서 이미 미워하면 살인한 거와 같으니라" 그런 말씀 했죠? 그러니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권총이 있으면 다 쏴 죽이지. 이게 눈에 보이니까 난사를 못하는 거죠. 근데 더 견딜 수 없는 건 말이지, 복받치니까 그냥 쏴버리는 거지. 이게 전부 우리 스스로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금 오는 거죠.

한가지 재미난 얘기 또 하나 하십시다. 장자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어요. 한 영감태긴데 아주 풍신도 좋고, 좋은 분인데, 젊은 친구가 보니까 움푹하게 들어간 샘 있는 데에 가 가지고 동이에다가 물을 떠다가 일일이 한참 가서 밭에다 뿌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젊은 친구가 있다가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그러지 말고 물이 떨어져서 모이게 되면 엎으러지게끔 해서 나무에다가 홈을 파서 밭까지 끌어다가 웅덩이를 해놓으면 말이지, 물을 그냥 거기서 퍼서 쓰실 수 있지 않느냐고. 그 먼 거리를 왜 일일이 왔다갔다 하시느냐고, 수채를 만들어서 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이 영감 말씀이 있어요. "자네 얘기 내 모르는 바 아니요, 모르는 바 아닌데 왜 내가 일일이 동이에다 하는가 하면은 자네처럼 하게 되면 말이야 내 마음에 기심(機心)이 생겨." 기심은 거, 기계란 기자 말이야. "그렇게 되면은 하늘과 땅과 모든 도리를 다 망각하게 돼. 그러니까 하늘이 두렵고 땅이 두려워서 모든 것이 두려워서 내가 그 수채를 만들어서 그렇게 안 하는 거야. 일일이 떠다 하지."

이 얘기는 어찌 보면 초라한 얘기요 우스꽝스런 얘기요 옛날 얘기처럼 여러분들은 들으실는지 모르지만, 가령 저 아주머니가 세계에서 유명한 회사를 가지고 계셔. 근데 이 아주머니도 거의 같은 상품을 연구해 또 내놓고 있어요. 이것들이 같은 시장에서 싸우다가 이 양반의 회사에서 나온 것이 조금 더 편리한 것이 거기 붙어서 나와. 그러면 저 양반네 회사가 수천억불을 들여서 만든 공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물건은 안 산다 이 말이야. 이거 사지. 그러니까 이제 그 회사는 어떻게 됩니까, 예? 망하죠? 거 망한다고. 바로 그 얘깁니다. 그럼 수천억불에 달하는 그 회사를 이룩하기까지 거저 된 겁니까?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쓰고 일하고 노력한 축적이 그렇게 된 건데, 한군데서 뭐냐면 경쟁속에서 부속품 하나 조금 달라지니까 수천억불이 하루 아침에 물이 되어버리는 거라. 그 경쟁 아니예요? 서로서로 잡아먹고 가는 거라. 그러면 그 시초는 어디에 있느냐. 고대 얘기한 대로 그런 거야.

지금 이런 얘기를 해서 저도 죄받을 얘깁니다마는 사람이 많아도 탈이니까 요새는 전부 산아제한 하잖아요? 그러나 일단은 옛날에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사셨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이거예요. 아이를 가졌다가 그게 자연낙태가 돼도 옛날의 어머니들은 벼락이 떨어지거나, 이러면 자지러진다고. 왜 자지러지느냐. 거룩한 생명을 내가 제대로 보존 못하고 보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중에서 천지를 거역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뭐냐면 벼락이, 하늘이 나를 치는 게 아닌가 이래서 자지러지는 거라고. 그걸 우리 잘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요건 잇속이 있다 요건 편안하다, 요렇게 하면 잇속이 더 있고 요렇게 하면 편안하고, 요렇게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데 그런 차원에서만 맴돌다 보니까 스스로 자살행위를 지금 해가고 있는 거지요. 다른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돼야 할 거냐. 천지의 도리, 하늘과 땅이 살 수가 있겠느냐. 근데 이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뭣이 중요하냐. 적어도 그 쌀, 뭐냐하면 농약 많이 안 들은 것 먹어야 되겠어. 배추, 농약 안 친 거 먹어야지 좋다 이 말이야. 그게 얄밉더라도 좋다 이 말이야. 왜 얄밉더라도 좋으냐. 그렇게 해서 땅이 살아야 한다 이 말이야. 땅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말이야. 땅이 뒈지면 사람 살 수 있어요? 흙이 죽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고요. 가령 예를 들어서, 이건 뭐 유치원 애들하고 얘기해도 맞는 얘긴데 우리가 잊고 사니까, 태양이 없으면 말이요, 이 땅위에 살 존재들이 있습니까? 없지요 아주머니, 없다고. 그러니까 이 땅이 없으면 이 만물이 존재할 수가 있어요? 없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하늘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만물이 없어도 살 수가 있냐. 살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 어떤 것하고도 떠나서 살 수가 없어. 그런데 떠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지금 꼬라지가 전부 그런 거지요. 너 아니면 내가 못살 줄 아니, 맨 이 식이거든. 천만에 말씀이다 이거야.

심지어 이 한반도에 지금 사는 꼬라지도 뭐 군사독재 정권이니 뭐 이승만이니 어쨌느니 해도, 이북이 있으니까 이승만 독재도 한 거고 군사독재도 한 거야. 안 그래요? 이북에서 빨갱이가 쳐들어오니까 이래야 돼 하고 국민 누르면서 그 덕택에 해처먹은 거지. 김일성이 또 뭐냐. 미국놈 등대고 정치한 놈들 이거 쳐들어올 테니까 우리 이래야 돼 하구 김일성이 정치해먹은 거지. 그런 거 다 뭐냐하면 거저는 안되는 거라. 핑계가 있어야지. 또 관계가 있어야지.

기본적으로 산다는 그 자체도 하늘과 땅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 말 이에요. 벌레 하나도 하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살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화랑정신에선 '살생유택'이라, 함부로 죽이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꼭 필요할 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지, 아무때나 죽이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옛말에 도승들은 몸에 이가 꼬이면 이걸 잡아서 딱딱 죽이질 않고 옷을 털잖아. 요 밖에 나가서 턴다 이 말이야. 모기 하나도 맘대로 못해. 그 모기 하나라는 존재도 우주가 뒷받침해주고, 우주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라 이 말이에요. 생명이 그렇게 거룩하고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 가정주부들은 아 우리 애아빠가 이제 몇해 됐는데 부장이 돼야 될 텐데, 아 이제 이사진에 올라가야 할 텐데, 또 여러분 중에 누가 남편 되시는 분이 관청에 계시면 아 청와대 들어가면 좋을 텐데 뭐 그런 생각들 하시죠. 그것을 뭐냐면 인작(人爵)이라 그래. 사람이 만든 벼슬이란 말이지.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말이지 저 큰 천작(天爵)이 있어요. 하늘이 벌레고 천옥(天獄)이고 사람이고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다 빛을 비춰주셔요. 비가 오면 다 축여줘요. 그러니까 풀 하나도 태양이 없으면 안 되고, 맑은 공기가 없으면 안되고, 맑은 물이 없으면 안되고, 흙이 없으면 안되고 다 지닐 걸 지져야 돼. 풀 하나도 우주가 됫받침해주시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선생께서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이랬어. 그 풀 하나에, 낟알 하나에 우주가 다 있는 거라. 먹는 게 별볼일 없다 이게 아니야. 그런 걸 우리가 먹고 지내는 거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그라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비교해서 저 집에는 뭐 갈비도 먹고 돼지도 먹고 하는데 우리는 일년내내 갈비도 못 먹고 돼지도 못 먹고 이게 뭐야, 그런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이거야. 벌써 밥 한사발 안에 우리가 우주를 영(迎)하는 거다, 하늘을 영하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런 것에 대한 기본적인 것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뭐냐하면 메이커에서 나오는 조미품이나 뭐나 제대로 쳐야 맛있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병이 피까지 살까지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배속까지 들어가고 있어요. 이치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게 뭐냐. 이 물 한컵 밥 한사발 김치 한보시기 이것은 제왕이나 다름이 없는 거룩한 밥상이란 말이에요. 그 자세가 그 깨달음이 없으면 언제나 남의 호화로운 거에 자기나름대로 도취해 가지고, 자기나름대로 최면 걸려서, 자기나름대로 오늘날의 문명속에서 오는, 매스컴을 통해서 오는 그 환각 때문에 맨날 겉돌다가 말게 된다구. 그러니까 다시 얘기해서 이게 뭐를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우리가 컴퓨터에 입력을 한 것도 잘못 되면은 답이 잘못 나온다 이 말이야. 주판을 잘못 놓은 거도 아무리 많이 놨어도 잘못 됐으면 영 틀려버린다 이 말이야. 오늘날 문명이 우리 인간에게 이 자연에게 제대로 갈 수 없게끔 한다고 했을 적에는 여러분이 문명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벗어나는 정성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야.

또 한가지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 다니시는 분들 계세요? 예? 네? 그럼 기도하시죠? 기도하시는 분들 있을 거야. 뭐 다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화장장에 가보면 사람죽고 나서 다 뼈까지 빻고 나면 재가 한 움큼밖에 안 남는다, 그럼 어디 갔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실한 '자기'라는 '나'라는 것이 뭐냐. 그걸 이제 따져들어갔을 때 진실한 '나'라는 것은 보이질 않아. '나'라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아(大我)의 '나'밖에 존재칠 않아. 너·나가 없는 거라. 그러면,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느님, 불교 다니는 사람은 부처님, 뭐 여러가지 종교마다 다 있어요. 그것은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이야. 만져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뭐냐하면 고맙다고 하는 것. 또 가까이 그러한 하느님, 그러한 부처님은 풀 하나, 돌 하나 어디나 안계신 데가 없어. 함께 하셔. 우리도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과 땅과 만물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예배를 해야 한단 얘기죠.

오늘날 세상이 경쟁사회가 되니까 그 예(禮)를 몰라요. 애새끼들 키워 보지만 일등하면 제 대가리가 좋아서 큰 줄 안단 말이야. 그렇잖아요? 또 우리가 자식새끼 키워서 이제 깨닫지마는 자기가 또 어렸을 때 자라온 거 생각해보면 어머니 아버지께 제대로 한 거 없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근간이 망가졌을 때에 세상이 잘못 된다구. 그러니까 요즘 시집들을 보내려면 말이지, 그 집이 맏아들이야? 맏아들이면 안돼, 둘째 이하라야지. 또는 그 집이 잘산대? 뭐 이런 것이 기준이 되는 거라. 그러니까 돈 수입이 많으냐 그런 얘기겠지. 응? 기준을 그렇게 해놓고, 자기 배짱속이 벌써 그런데. 이게 전부 뒤틀려 있다고. 그러면서 뭐냐면 제 집안식구만 무공해식품을 먹겠다. 그건 꼭 말이지 요강에다 똥 싸가지고 문밖에다 내놓는 거나 같다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공해의 원인이 어디 있느냐, 전체의 사람 사는 세상 꼬라지가 왜 이렇게 되느냐 살피는 게 아니고 아, 똥싸고 오줌싸서 문밖에만 내놓으면 되느냐 이 말이야.

물을 갖다가 말이지, 흙을 넣거나 여러가지 자꾸 휘저어 가만히 재워 놔두면 어떻게 되느냐. 맑아지고 못 되먹은 건 가라앉잖아요?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해야 한단 말야. 떠들썩하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 떠들썩하다고 뭐 돼? 뭐 조직을 갖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야. 우리가 각자 있는 자리에서, 생활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이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예수님 말씀이 뭐냐면 이렇게 누룩을 담궈놓으면 술이 되는 식으로 해라 이 말이야. 자연스럽게 해라 이 말이야. 극성스럽게 들어가 이거 해야 돼, 이러지 말구. 소도 물가에 가서 물을 먹이려면 제가 먹고 싶어야 입을 여는 거예요. 쇠뿔을 끌어다 뒤에서 엉덩이를 패도 입을 벌리고 이거 안 먹어요. 가령 먹는 체한다고 해도 계속 제대로 하자면 자기 마음이 결심을 해야 되는 거 아녜요? 안되면 이거 안되는 거지. 그러니까 사람을 죽인다든가 도둑질을 한다든가 음란한 행위를 한다든가 남을 속인다든가 이것은 어디서 오는 거냐. 전부 마음에서 오는 거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예수 좀 잡아치려고 해서, 걸기 위해서 "저 여인이 남편이 있는 여인인데 샛서방질 했습니다. 돌로 때릴까요?" 샛서방질 하면 그때 돌로 때렸거든. 그런데 돌로 때려라 하면 예수 또 뒤집어 씌워 가지고 잡을 테니까, 예수가 현명하지요, "느이 마음에서 간음한 적이 없으면, 자신 있으면 돌로 때려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 얘기가 아주 기찬 말씀이에요. 그렇게 슬기롭다구요. 그런데 이제 그 얘긴 뭐냐. 매사가, 마음에서 작정을 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요새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이 공해세상에 대해 하는 얘긴데, 뭐 일본놈들이 '민나 도로보데스' 그랬다고, 도둑놈 아닌 놈이 없어. 남자는 놈이고 여자는 년이지. 년놈이 다 도둑놈이야. 그 왜 그러냐. 그 반에서 내 자식이 꼭 일등해야 되겠다고, 그럼 남의 자식은 다 뒤로 처지란 얘기 아니오. 그러니까 자식을 가르치되 "너 일등해라" 하고 가르치거든. 사회적으로 이게 얼마나 공햅니까? 금메달 못 딴 놈은 다 사람으로 안 봐요. 운동 선수로 안 봐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공해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만 무공해 먹으려 들거든. 옷만 피부에 염증이 안 생기게끔 무공해로 꼭 입으려 든단 말이지. 그런데 생각이 공해가 왔을 때에는 세상이 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게 다 공해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을 무시하면 자기도 무시를 당해. 공자 얘기가 사람이 스스로 업신여김을 당하게끔 하면 남이 업신여긴다 했어요. 이치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옛날 어머니들은 말이에요, 요새 어머니들하고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 내가 어려서 클 때 경험이에요. "엄마" 우리반에 쉰명 있어요, 쉰명. "내가 쉰찌했어" 하고 통신부 갖다준다고. 그러면 "어휴 이눔이 쉰찌했어, 어구 장해라 이 귀염등아" 하고, 우리 아들이 쉰찌했다구 하며 동네 가서 자랑한다고.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어요? 그러나 오늘 날의 주부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냐. "아유 답답해라. 지 자식이 공부 못 해서 병신인 것 모르구 남한테 그 얘기 자랑한다"고 이렇게 얘기할 거란 말야.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되죠. 아시겠어요?

오늘 제가 두어시간 차를 타고 오는데 고속버스에 제일 앞에 탄 사람이 몸을 제대로 못 쓰고 말은 겨우 반벙어리도 안돼. 그런데 옆에는 아마 교회 다니는 집사 정도 되는가봐요 열심히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끙끙거리며 뭐라고 답변도 하고 그러는데 난 뭔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 젊은 집사의 열정과 또 그걸 열심히 듣는 그 사람을 딱 보면서 말이지, 그 장애자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말 한마디라도 틔어서 얘길 하는 게 태양이 밝은 빛 비춰주는 것 같을 게 아니냐 이 말이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거를 느끼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하면 말이지, 그런 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비인데, 이 사랑 자(慈)자는 뭐냐? 즐거움을 남에게 주는 거예요. 또 슬플 비(悲)자는 남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의 고통을 함께 해주는 거지. 그럼 그게 뭘 얘기하느냐, 엄청난 얘기죠. 한살림을 얘기하는 거예요.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하고, 남의 고통을 함께 해서 없애주려고 하고, 그럼 한몸이라는 얘기 아녜요? 제 아픈 것처럼 생각하고 남의 즐거움을 같이 즐거워하고 그런 거죠.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짚고 가야 할 것은,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그런 얘기가 있거든. 그걸 내가 소싯적에는 도대체 이해가 잘 가지 않더라구요. 노자 선생의 말씀인데 이게 뭔가 했더니, 교회 다니다가도 자기 아들이 공부 꽤 잘했는데 대학에 가서 합격이 안되니까 "에이 빌어먹을, 천준지 뭔지 하느님인지 난 안 믿어" 하고 나가버리더라고. 그러니까 사사로운 자기 욕심을 갖다 챙기려고 해서 해결해주는 하늘과 땅은 아니다 이 말이야. 하늘과 땅은 한없이 우리에게 주지만, 한없이 줘, 한없이 주는 걸 고맙게 받을 줄을 모르고 제가 계산하는 것만 달라고 한 단 말이야. 그러면 줄 턱이 없죠. 줄 턱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농산품을 갖다가 무공해식품을 먹어야 하는데 "벌레도 안먹고 싱싱하구 멋지게 된 것만 가져와." 이거 미치는 거지. 농사짓는 사람 별수 있어요? 도리가 없는 거다 이 말이야. 저 아주머니, 이거 벌레가 먹고 꾀죄죄해 뵈도 벌레먹은 게 좋은 겁니다. "벌레가 먹은 걸 누가 먹어." 이러면 안되는 거지. 벌레가 먹어야 무공해지. 벌레도 안 먹은 건 공해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이거 세상을 이치에 맞게 살아야지. 제눈 가리고 먹고 제 자리만 보려 든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 안된다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제대로 해도 돌아가게끔 되는 그 속에서 자기도 적응해야죠. 자기도 그 속에 맞춰 살아야죠.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지금 세계가, 땅이 죽어가고 있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이 일에 함께 한다는 것은 자기를 살림과 동시에, 자기 사는 게 뭐냐, 땅을 살려야지. 땅을 살리게 되면 유익한 모든 미물이, 여러분들 들으셨겠지요, 개구리들 메뚜기들 거미들 모든 유충들이 거기서 우글거리고 살게 돼, 그러면서 벼를 더 건실하게 자라게 하고 땅을 비옥하게 해줘. 그래서 서로 환원이 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 노자 말씀이 그런 게 있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생선지지듯이 하라" 이 말이야. 생선을 자꾸 뒤적거리면 다 풀어져서 먹을 게 없잖아요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 작은 고기를 다루듯이 요렇게 살살 해라 이 말이에요. 이 얘기는 뭐를 얘기하느냐. 우리가 모두 해나가는 일을 제 모습대로 있게끔 해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이 모임속에서도, 여기 우리 대신 역할을 해주는 회장 이름이 뭐더라, 김여사던가 박여사던가 그 정도면 좋다 이 말이에요. 아, 그 이름은 뭐고 어느 대학 나오고 학벌은 어떻고 그이 남편은 뭐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국민이 대통령 이름이 뭔지도 몰라야 돼. 대통령 이름 알면 어쩔 거야. 저도 밥 세끼 먹고 나도 밥 세끼 먹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대통령이 부리는 권한이 세상에 불쌍하고 딱한 사람들 해결해주고 세상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일만 하면 된다 이 말이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밥 한사발을 먹는 것도 우주가 함께 하시니까, 그 수많은 농부의 피땀과, 땅과 하늘이 함께 해주시니까, 식사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적엔 말이지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빽이 뭐냐하면 천상천하가 다 자기 빽인데.

그래서 옛말에 우리 한 인간을 소우주라고 얘기하는데 소우주는 사람이 만든 소우주가 아니야. 풀 하나도 소우주라 이 말이야. 저 땅, 지구가 없으면 태양이 없으면 별이 없으면 안되는 거라. 그래서 이제 못난 건 우리지요. 풀에 대해서 화초에 대해서 나온 글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보니까 화초를 이렇게 분을 만들어 뜰에 놔두는데 주인이 가서 물도 주고 사랑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러면 화초의 감도가 벌써 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친구한테는 "너, 들어가거든 저 분을 갖다가 막 주물럭거리고 거칠게 좀 대해라"라고 시켜요. 그러고 나서 전류를 넣어서 장치를 해서 조사를 해보면 내가 들어갈 제 기뻐하던 그 화초들이, 그이가 들어 갈 제는 몹시 떠는 거지. 겁이 나서. 이게 이미 검증이 돼 있어요. 그러고 그 주인이 예를 들어 부산 밖에 갔을 때, 일본쯤 갔을 때 그 화초를 생각해라, 그걸 몇시쯤 해라, 그럼 내가 전류를 넣어서 계산해볼게, 그러면 천리 밖에서 주인이 원하는 그 화초를 생각했을 적에 여기서 깊은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벽 밖에서 권총을 가지고 나 잡으러, 쏘러오는 놈이 있어도 몰라. 그런 멍텅구리가 여러분을 데리고 얘기를 하고 있어 지금. 그런데 저 풀은 말이지, 그렇더라 이 말이야. 그럼 못난 건 우리가 못났지. 그럼 왜 이렇게 병이 들었느냐. 하도 좋다는 거, 뭐 이래라 하는 것 때문에 길들여지고 망가져 가지고 병이 철골을 해서 그래, 뼈까지 스며서. 자연 그대로 하면 천리 밖에 앉아서도 알겠지. 만리 밖의 것도 안 보고 알고. 원체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한살림운동이란 게 뭐냐. 다 살리겠다는 얘기 아녜요. 그렇게 해야 모두 재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말씀이고 말이지.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얘기 중언부언 자꾸 해봐도 한도 끝도 없는데, 자연으로 복귀하는 거다 이 말이지. 부지런히 뛰어봤자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라고 그러잖아요. 뛰어봐야 그거거든. 대통령 해봤자지. 어때요? 잘못하면 연희궁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못하잖아요.(웃음)

그러고 보니까 천상천하가 매일 자기를 보호해서 먹게 해주고 살게 해 주는데 그렇다면 당당하게 살 것이지, 뭘 이렇게 이것저것 잡된 것을 집어넣느냐 말이지. 제 속이 제대로 되어있고 편안한 걸 가리고 가야지. 욕심을 내면 말이지, 이게 들끓어. 욕심을 내지 말라 이 말이야. 기도해요? 욕심내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요? 그건 넌센스에요. 이걸 편히 가지면, 이걸 비우면 철따라 채소가 나면 반가워. 햇살이 나면 은혜를 알아야 돼요. 은혜를 알면 생활이 기뻐. 은혜를 모르면 맨날 일등만 하려고 맨날 미쳐 돌아가는 거지. 무공해식품만 먹으려고 해서 될 게 아니라 보는 시각이 전체에 가 돌아갔을 때, 전부 편안해지고 맑아지고 머리가 아프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고, 첫째 공해병에 걸리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갑시다, 그거지. 그만 얘기합시다.

http://images.jikji.org/wikiimages/JikjiEnd.png


직지살림_갈래


  1. 无爲堂 (1)

나락 한알 속의 우주 (last edited 2011-11-25 20:59:04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