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30, 달에 가 보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바람과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물과바람 김 민수입니다.
지난 글에서 '달'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달까지 한 번 가봤습니다.
달에 와서 손가락을 드니 지구을 가리킵니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아름답게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생명체 같은 행성, 지구호. 저 안에 대한민국이 있고, 봉하도 있고, Washington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 밖 우주에서 우리가 사는 행성 지구를 보면, 인류에 대해서, 그리고 하루 하루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더 관대해 지고, 크나 큰 관용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눈부신 우주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제 우리 인간 지성의 한단계 더 높은 발전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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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정보, 지식의 대중적 보급에 걸맞는, 더 많은 사람의 '상승'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적 사실입니다만, 그게 다는 아닌 듯도 합니다. 사실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과거로부터 비전해오는 인간 지성의 발전에 비해 아직 턱도 없이 못 미칩니다. "그래 과학기술, 이제 네가 인간 지성을 이끌어라"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과학기술은 아직까지 너무나도 협소하고 제한적이면서도 비인간적이며, 인간 지성은 그 깊이와 폭, 그리고 가능성 측면에서 너무나도 광대하고, 열려있으면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근 반세기 동안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만, 아직 저희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여행은 못합니다. 요즘 정말이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술이 가능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것은, 누리터라고 하는, 현대 과학 기술의 총아가 우리들에게 과거의 자료를 단 몇 분 만에 집 안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록 몸은 시간 여행을 못하지만, 눈과 귀는, 마음과 머리는 그 오래전 자료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요즘 어쩐 일인지 이런 과거여행에 눈물이 자주 따라 다닙니다. 아마도 저만 그렇지는 않겠지요?
오늘의 제 과거 시간 여행은 노 무현 전 대통령님의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장 연설 장면3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달'이 다르겠지만, 인간 '노 무현'이라는 달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 여행입니다.
이 본회의장 연설에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상적인 사회 연설에서 노 무현 전 대통령께서 꿈꾸셨던 '사람 사는 세상'의 들머리를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 하루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 지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하게 하는 연설입니다. '이상적'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사는것'은 무엇인가, '사회, 세상'은 무언가, '사람'이 뭐고, '사람 대접'이란게 뭔가, '노동자와 농민'은 누구인가, '먹는 것', '입는 것', '잘살게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물론 우리가 늘 쓰는 단어이고, 개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낱말들 입니다만, 노 무현 전 대통령님이 말씀하신 이 연설에서 이 낱말에 딸린 깊은 생각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간에 서로 오해하기 쉽고, 이런 오해로부터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 사는 세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에 딸린 사상과 철학을 읽어내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혼자 해서도 안 되는 일 입니다.
자,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요? 무작정 사람사는 세상, 봉하마을4로 향했습니다. 다행으로 그곳에 노 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구상하셨던 "진보주의의 글" 초안이 다섯 개 올라와 있었습니다. 아래에 초안의 연결고리주소를 달았습니다. 직접 가셔서 읽어 보시면 저 위 본회의장 연설의 말뜻 정의에 도움을 줄만한 구절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전 이 초안들을 읽으며, <처음처럼 - 신 윤복 서화 에세이>에 나오는 시 "목수의 집 그림"5을 직접 보는 것 같았습니다. 노 무현 전 대통령님은 이미 사람사는 세상에 들어갈 집의 추춧돌을 먼저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까지, 다 그리고난 후, 우리 모두 함께 다 같이 마지막 기와를 그려보자고 작업을 시작하셨던 것 입니다. 일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쓴 글임이 한 눈에 보입니다.
노 무현 전 대통령님의 이 유업을 이어받아 진보의 미래 2.06 누리터가 만들어 지고, 서거 1주년에 바칠 책이 발간된다고 하니 기다려 집니다. 아마도 그러고 나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정의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여기에서 저는 '진보'라는 말을 보고, '역사에서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가 생각해 온 것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한가지 치명적(?)인 고백을 하겠습니다. 제가 좀 어려서 불립문자(不立文字)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바람에 사실 일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하며, 이로 인해 제 생각을 말과 글로 담아내는 데 많은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이 부족함을 만회하고자 독서를 통해 립문자(立文字) 쪽으로 사상적 전향을 하는 중입니다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에 온 다음에는 이 땅 소속도 아니고, 저 땅 소속도 아닌것 같아, 한글과 영어 독서량이 모두 다 현저히 줄어 마치 바보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관대하게 봐 주십시오.
암튼, 저는 위 연설문에서 먼저 '사람'이라는 말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물론 이는 넓은 뜻에서 일반적인 사람<=삶>을 나타내신 말씀이겠지만, 정치인이 쓴 말이므로 좁은 뜻으로는 "참정권"을 가지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좁은 의미로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사람의 정의'를 확대하는 여정이 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여성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또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가장 최근의 일입니다. 저는 법적 지위와 참정권 부여 여부를 떠나, 일상의 하루 하루 생활속에서 이처럼 사람의 개념, 즉 어디까지가 '우리'인가를 확대하는 과정 그 자체가 진보의 역사라고 봅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고도 감히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직접 National Museum of American Indian에서 찍은 사진 (저작권없는 공적자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과연 진보적인지, 덜 진보적인지를 판단하려면,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이, 과연 어디까지 '우리'일 수 있는가를 묻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현재를 다시 비추어 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전 현재 우주 과학 문명의 발달이 저희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이 '지구'를 '우리'에 포함시키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지구 온난화 현상과 관련해서 환경 단체 중심으로 이미 그런 방향으로 운동이 있지만, 아직 동양권에서 해오던 수준, 특히나 제가 새마을 운동의 파급이 늦었던 벽지 시골 한국 농촌에서 70년대 중, 후반에 경험한 수준까지 전 세계가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과거가 사실은 오래된 미래로서 지금 현재보다 더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게 진보였음을 몰랐던 것 뿐이지요.
Do All You Can7이라는 동영상을 보다보면 중간쯤 지나서 나무가 잘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738일동안 나무에서 산 Julia Butterfly Hill8이라는 젊은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율 스님께서 천성산 원효터널 착공금지가처분 신청을 도룡룡 이름으로 소송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아직 충분한 진보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분들이 하시는 일을 깍아 내리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개념적으로 어디까지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진보의 끝인가를 따지는 중일 뿐입니다.
나무와 도룡룡은 저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생명이 있는 존재입니다. 쉽게 우리에 포함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산에 있는 돌이나 물, 공기 등은 그런 생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떤 존재가 '우리'로부터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가진자로부터 이용을 당하게 되고, 따돌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기 쉽상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의 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개발이나 발전까지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먹지 말고 굶어 죽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상적으로 따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진보의 끝은, 나무와 도룡룡같은 생물뿐 아니라 돌과 물과 같은 무생물을 포함한 지구까지도 '우리'에 넣어주고,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인간 지성의 최고 발전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지선(至善)입니다. 대자대비입니다. 도(道)입니다. 자연입니다. 천지인일성동체(天地人一性同體)입니다. 사랑입니다.
아울러, 지선이 있다고 지악(至惡)이 있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진보는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비시키는 순간 편을 가르는 것이 되어 더 이상 진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선은 진보의 끝이어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지만, 선(善)은 진행 중인 진보여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변합니다. 진보에 있어서 지선과 선의 관계가 이러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현재 시점에서 한국에서 진보적인 것이 유럽에서 진보적일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 30년 전에 진보적이었다고 해서 현재에도 진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현재의 진보가 미래에도 진보라고 불릴 수 있을지는 우리가 어디까지 진보의 끝이라고 정의할 것인가에 달린 것 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선의 상태를 진보의 끝으로 받아들이면, 현재 시점에서 '더 진보'와 '덜 진보'9를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 일등과 꼴등을 바라보는 시각,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 가진자와 없는자를 바라보는 시각, 힘있는 자와 없는자를 바라보는 시각, 정상인과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 대기업과 신생기업을 바라보는 시각, 강대국과 약소국을 바라보는 시각, 인간과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책 결정과정에서 뭐가 더 진보적인지, 덜 진보적인지 구별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틈만나면 빨갱이로 편가르는 것은 너무 자명하니 따지지 않더라도, 4대강 정비 사업, 바로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건 뭐 '덜덜덜덜 진보'라는 진보가 들어가는 말을 붙이기도 뭐시기 한, 도도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하는 정말 엽기적인 사항입니다. 지금 한국의 역사시점이 무슨 산업사회 초기입니까, 이런걸 하게?
여기에서 Ralph W. Sockman10이 말했다는 "the test of courage comes when we are in the minority; the test of tolerance comes when we are in the majority"이 지닌 역사적인 뜻을 다시 새겨 봅니다. 저는 이 말속에 진보의 역사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모든 실체가 숨어있다고 봅니다.
달에 와서 사람사는 세상 이야기 하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습니다만, 사람은 삶이고, 삶이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검<죽음; 삶없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사람 사는 세상'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진정으로 더불어 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현생 인류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유명한 과학자의 말로 오늘의 글을 끝마치겠습니다.
A human being is part of the whole, called by us the "Universe", a part limited in time and space. We experience ourselves, our thoughts and feelings as something separate from the rest - a kind of optical delusion of consciousness. This delusion is a kind of prison for us, restricting us to our personal desires and to affection for a few persons nearest to us. Our task must be to free ourselves from the prison by widening our circle of compassion to embrace all living creatures and the whole of nature in its beauty… The true value of a human being is determined primarily by the measure and the sense in which they have obtained liberation from the self. … We shall require a substantially new manner of thinking if humanity is to survive. (Albert Einstein, 1954)
그런데 이렇게 참 이상적으로 글을 쓰고나서 현실을 보니, 평정을 잃어버립니다. 이거 뭐 구도(求道)가 아니라 구도(求刀)하여 철차탁마(切磋琢磨)해야할 때가 아닌가요? 그럼에도 칼을 거두고, 함께 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 참 진보이겠지요?
바람과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직지지기 김 민수, 2009.7.30 EDT.
자료 출처: http://nssdc.gsfc.nasa.gov/imgcat/html/object_page/lo1_h102_123.html (1)
자료 출처: http://www.nasa.gov/audience/formedia/features/MP_Photo_Guidelines.html (2)
누리터 주소: http://www.knowhow.or.kr/ (4)
누리터 주소: http://blog.aladdin.co.kr/706330195/1751488 (5)
누리터 주소: http://progressive20.net/ (6)
누리터 주소: http://www.youtube.com/watch?v=FTYrP651BEE (7)
누리터 주소: http://en.wikipedia.org/wiki/Julia_Butterfly_Hill (8)
직지 주: 흔히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데, 이는 보통 큰 정부, 작은 정부같은 토론에 주로 쓰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보수라는 말을 피하겠습니다. 아울러, 큰 정부, 작은 정부, 기회의 균등, 소득의 재분배, 이런 것들은 사실 여기에서 정의하는 '진보의 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접근이라고 인식합니다. (9)
누리터 주소: http://en.wikipedia.org/wiki/Ralph_Washington_Sockman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