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통권 제 86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6년 2월 5일, 직지지기 김민수

땅의 울음

- 서정홍1

"12월 29일 12시에 진행된 범대위 비상 대표자회의 결과에 따라 돌아 가신 전용철, 홍덕표 농민 열사 공동 장례를 31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31일 오전 9시에는 전용철 농민의 발인이 서울대병원에서 있으며, 홍덕표 농민은 오전 7시 김제에서 발인할 예정입니다. 두분의 영결식은 오전 11시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되며 노제는 지난 11월 15일 전국농민대회장인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1시 30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두분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장례와 장례 일정을 알리는 검은색 현수막을 붙여주시고 많은 분들이 영결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가톨럭농민회에서 급하게 보내온 공문을 읽으면서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이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12월 27일)를 하고 허준영 경찰청장이 마음에도 없는 사퇴(12월 29일)를 억지로 했기에 늦게나마 장례를 치를 수 있구나 싶어 안타깝지만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과 어질고 착한 백성들의 정성과 땀방울이 이루어낸 '진실과 정의의 힘'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한쪽에서는 알 수 없는 깊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원 아들이 죽거나, 아니지, 대학생 한명만 죽어도 온 나라가 떠들썩할 텐데. 힘없고 가난한 농민이 죽었다고, 죽은 지 한달이 넘도록 잘못했다는 놈 하나 없으니… 그것도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나라에서, 멀건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아들과 손자 같은 젊은 경찰한테 맞아 두명 씩이나 죽었는데…"

생각할수록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누가 볼까 부끄러워 살며시 뒷간으로 가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흐르는 눈물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내가 부끄러운 까닭은 조금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살지 못하고 내 편안함을 위해 많은 날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두분은 11월 15일 전국농민대회장인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저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온몸이 바르르 떨립니다. 한달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까닭도 없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무서운 꿈을 꾸기도 합니다. 얼마나 끔찍한지 두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썼던 지난 11월 15일의 기록을 여기 옮깁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11월 15일, 새벽 다섯시에 잠에서 깼습니다. '고() 정용품 동지 추모와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서울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오후 한시부터 행사를 한다고 하니 첫 기차를 타야 합니다. 촌놈이 서울에서 하룻밤 자려면 칫솔, 수건, 양말뿐만 아니라 옷도 한두가지 더 챙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 끼니로 내 손으로 일군 땅에서 캔 고구마 두개를 씻어 가방에 넣었습니다. 고구마를 챙긴 까닭은 농사짓는 농사꾼이 돈을 주고 무얼 사 먹는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회의나 집회가 있을 때는 주먹밥을 싸거나 고구마, 감자, 옥수수 따위를 삶아서 도시락 대신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 다 챙기고도 자투리 시간이 남아 걸레를 빨아 마루를 닦았습니다.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깨끗해진 마루를 보고 기뻐하리라 생각하니 저절로 신바람이 났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나 때문에 누군가 잠시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른 아침, 오랜만에 집을 나섰더니 거리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오늘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게 어찌나 고마운지 괜스레 마음이 설렜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바쁜 일거리 제쳐두고 '아스팔트 농사'지으러 서울로 갑니다. 우리 농사꾼이 흙을 밟고 정직하게 농사지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오는 것일까?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면, 그 길에 뜻있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만나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나누게 되리라는 믿음 하나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서울로 갑니다.

낮 열두시 조금 지나서 닿은 여의도 문화마당은 벌써부터 우리나라 곳곳에서 올라온 농민 형제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습니다. 행사장 앞에 담양군 남면 인암리 정용품 이장이 쓴 유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위에 계신 분들이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젊고 팔팔한 나이에, 그것도 나라에서 정한 '농업인의 날'(11월 11일)에, 나라와 농업, 농촌을 걱정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현실이 슬프도록 안타까워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어찌 나만 이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유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저 눈으로 읽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낮 한시가 지나자 여의도 문화마당은 농민 형제들로 가득 찼습니다. 거의 일만명 남짓 모인 것 같았습니다. 농민 형제들이 늘어날수록 전투 경찰(전경) 수도 늘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노래와 구호가 늦가을 하늘을 울리고 노란 은행잎이 농민 형제들의 서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뚝뚝 떨어져 바람에 날렸습니다. 1부 '고 정용품 농민 형제 추모식'이 이어졌습니다. "한송이 꽃이 되어 갔네. 그대 흘린 피 위에 우리의 맹세는… 조국의 논과 밭 지켜내리니 동지여 먼저 가시게 해방의 나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추모곡이 끝나고 여러 단체 대표가 한분씩 차례차례 나와서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길이 도시를 살리는 길이고, 우리나라와 겨레를 살리는 길이라고. 농촌을 지키는 것은 우리 부모형제와 이웃을 지키는 거라고. 식량을 외국에 맡긴다는 것은 아이들 목숨을 외국에 맡기는 거라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가난해지는지 꼭 밝혀 달라고. 고 정용품 동지는 한해 내내 자랑삼아 집 앞에 태극기를 걸어 두었는데 국가는 그이한테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죽음만을 안겨 주었다고.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면 우리 논과 밭이 사라질텐데 '농업인의 날'을 정해서 무얼 하겠느냐고, 차라리 '농업인의 날'을 없애버리자고.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싸워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지켜내자고…

2부 행사가 끝나고 우리는 전경들이 막고 있는 국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서러움과 울분에 가득 찬 노래와 구호가 이어지고 몇몇 젊은 농민 형제들이 길을 트기 위해 전경들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위에 선 전경들이 물대포를 마구 쏘아댔습니다. 지은 죄라고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죄밖에 없는 어진 농민들은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물러설 줄 몰랐습니다. "쌀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는 각오로 전국 농민들이 하나로 뭉쳤기 때문입니다.

늦가을, 벌써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는 때입니다. 가슴 속에 얼마나 깊은 절망과 분노가 쌓였기에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서울까지 왔단 말입니까. 논밭을 일구어 온 겨레의 목숨을 이어준 농민들이 서울에 왔으면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담당 공무원들이 나와서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애써 지어 주신 곡식으로 우리 식구들 건강한 몸으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 이렇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따뜻한 국밥이 라도 끓여 내놓아야 '사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돌아오는 것은 폭력뿐이었습니다. 물대포와 방패와 군홧발로 짓밟아 두번 다시는 국회 앞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쫓아 냈습니다. 가난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논밭을 지켜온 나이든 농민 형제들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짓밟아버리는 저들은, 맨손뿐인 늙은 농민들조차 뒤에서 날카로운 방패와 몽둥이로 내리쳐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죽여 버리는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누구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누가 제 식구들 밥상을 차려주는 고마운 농민들을 짓밟아 죽여라 했습니까.

여태껏 밥이 무언지, 땀이 무언지, 사람의 길이 무언지 제대로 가르쳐준 학교나 스승도 없고 배우지도 않고 자라온 가엾은 저 아들들(전경)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우리 아들들인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게 우리 모두의 잘못이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사람과 자연을 괴롭히고 죽이는 '경제논리'에 빠져 때론 '돈'이라는 괴물에 미쳐 우리 스스로 사람노릇을 제대로 못한 탓이구나 싶었습니다. 더 큰 탓은 가난한 백성들을 몰아세워 제 배를 채우려는 '어두운 세력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경제논리에 빠져 우리도 모르게 잘못 살아왔다 해도 도대체 누가 불쌍한 우리 아들들한테 방패와 몽둥이를 쥐게 했단 말입니까. 힘없고 가난한 나라를 돕는 척하면서,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온갖 더럽고 나쁜 짓을 일삼는 부시란 말입니까. 부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 모리배들이란 말입니까. 권력과 자본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한데 뭉쳐서 한 핏줄이고 한 겨레인 농민들과 전경들을 적으로 맞서게 했단 말입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곁을 어떤 농민이 피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며 지나갔습니다. 얼른 다가가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전경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좁은 길에 많은 농민이 한꺼번에 쫓기는 바람에 어느 한 사람이 넘어지면 수십명이 깔려 죽을 것 같아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80년대부터 나는 시위대 '안전담당'을 맡은 적이 많았습니다. ) "자, 밀지 말고 앞을 잘 보고 갑시다. 밀면 큰일 납니다. " 말을 하면서 옆을 보니 늘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농민회 유영일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잘 보호해 드려야…"

내 말이 채 끝차기도 전에 뒤에서 '퍽'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머리가 어질어질했습니다. 그리고 오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 팔짱을 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켜 주세요. 부상잡니다. 급합니다. 조금씩 비켜 주세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머리에서 얼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내 머리가 방패에 찍혔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살리기 위해 팔짱을 끼고 달린 사람이 서울에 사는 맹주형 아우란 것도 알았습니다.

십분쯤 달렸을까? 마침 큰길 신호등에 걸린 경찰차를 잡아타고 닿은 곳이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닿아서 일이십분쯤 지나자마자 응급실은 부상당한 농민 형제들이 밀어닥쳐 말 그래로 '피바다'였습니다. 나는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속옷까지 피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얼마나 깊이 찢어졌는지 아무리 수건으로 눌러도 퍼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정신이 살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젊고 건강한 내가 다쳤으니 또 얼마나 큰 다행인가" 싶었습니다.

아들 같고 손자 같은 전경들한테 맞고 짓밟혀 눈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지고 머리가 깨진 농민 형제들의 피에 젖은 옷을 벗겨 주기도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위로도 하면서 수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겨우 수술을 했습니다. "소독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기웠으니, 내일 다른 병원에 가서 소독하십시오"라는 의사 선생 말을 듣고 병원을 빠져 나오면서 '사람일은 내일을 모른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니지, '사람일은 순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늘 몸과 마음을 비워 두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야 쉽게,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낯선 서울 거리에 어둠이 깔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시위 장소로 가고 싶었지만 나를 살려준 주형이 아우한테 쉽게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영등포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텔레비전 뉴스를 들었습니다. 농민들이 수백명이나 전경들한테 짓밟히고 맞아서 다치고 정신을 잃었다는데, 뉴스는 고작 보여주는 게 농민들의 '과격 시위'를 홍보하는 것처림 보였습니다. 왜 늙은 농민들이 서울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말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옆에서 구경하듯이 찍은 화면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80년대 시위 현장에서도 그랬듯이 나는 폭력을 싫어합니다. 폭력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겠지요. 그래서 돌을 손에 집었다가 다시 놓고, 다시 집었다가 놓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내가 던진 이 돌 때문에 누구의 머리에 구멍이 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인 것을 생각하면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고구마 한개로 끼니를 때우고도 배고픈 줄 모르고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숨 가쁘게 지낸 11월 15일, 그날 밤 나는 동지들과 서울에서 자고 다음날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가서 깨진 머리 부분을 소독하고 정신을 차리고 글을 씁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참 많이 아픕니다. 찢어진 머리보다야 마음이 수백배 수천배 더 아픕니다. 우리 산골마을에서 가장 젊은 나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습니다. 젊은 만큼 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쯤 부시니 정치니 뭐니 이 따위에 마음 쓰지 않고 농사일에 온 정성을 쏟으며 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것일까? 수만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사람은 살 수 있지만 농부가 없으면 어찌 살겠는가. 컴퓨터나 자동차를 씹어 먹고 살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 부처님, 모든 신들이 이 땅에 내려오신다면 누굴 가장 먼저 만나겠는가. 인간들이 만든 아스팔트와 시멘트뿐인 도시로 가겠는가. 아니면 농촌 들녘으로 오셔서 땅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부들과 밤새 막걸리 한잔 나누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도 한뼘 남짓 찢어진 머리에 아무렇게나 쇠로 박아 놓은 부분이 욱신욱신합니다. 이 아픔은 내 아픔이 아닙니다. 이 나라, 이 겨레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픈 것입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충청도에서 여기저기서 농민대회 왔다가 나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과 아우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얼른 나아 밥이라도 제때 드셔야 할 텐데…

아, 하늘도 을고 땅도 울어라

11월 11일, 전남 담양 정용품 농민, 쌀협상 국회비준 규탄하며 농약 먹고 자살.
11월 13일, 경북 성주 오추옥 여성 농민, 쌀개방 반대하며 농약 먹고 자살.
11월 15일, 전북 김제 하신호 농민, 농민대회 귀가 후 사망.
11월 17일, 경기 농민, 농가부채 상환 압박에 농약 먹고 자살.
11월 23일, 경남 의령 진성규 농민, 국회비준 강행처리 규탄하며 분신.
11월 24일, 충남 보령 전용철 농민, 11월 15일 전국농민대회 때 경찰들 한테 맞아 쓰러진 뒤 사망.
12월 18일, 전북 김제 홍덕표 농민, 11월 15일 전국농민대회 때 경찰들 한테 맞아 중태에 빠져 있다 끝내 사망.

경찰들이 농민들을 죽이지 않아도 농민들은 이미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지, 오래 전에 수십번 수백번 죽었습니다. 늙으신 농부들의 '필수품'이 청산가리라는 말이 장날 시장바닥에 떠돌고 있을 정도니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이 땅에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얼른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농촌 들녘에서 일을 하다 다치거나 늙어 병이 들면 어느 자식이 돌볼 것이며, 돌볼 자식이 있다 해도 자식 고생시킬까 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나라였습니까.

350만 농민들은 무어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집을 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달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애써 농사지은 곡식을 제값 받고 팔아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농축산물의 수입개방으로 수백만명의 농민들을 거리에 내몰며 얻은 경제적 이익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만일 수입개방이 진정 거스를 수 없는 것 이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마음을 열고 농민들을 자주 만나 바늘구멍 같은 작은 길이라도 열어두어야 하는 게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돈벌이가 안되면 농촌이고 농민이고 다 죽어도 좋단 말인지 정말 가슴이 답답합니다.

11월 23일, 쌀협상 비준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니,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쌀 관세화를 2014년까지 유예받는 대신, 이 기간에 현재 연간 20만5천톤인 의무수입물량을 4O만8천톤으로 늘려야 합니다. 2006년 3월 께 수입쌀이 드디어 우리 밥상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누가 무너져가는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나 장관들입니까. 아니면 국회의원들입니까. 아니면 또 누구란 말입니까. 정권이 바뀌고 장관과 국회의원이 몇번씩 바뀌었는데 무엇이 나아졌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희망을 만들어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농업과 농촌이 사라지면 우리 겨레의 얼이 사라지고, 어머니인 고향(논밭)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미래가 사라지고, 어느 누구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해 온 정성과 슬기를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2005년 12월 30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한겨레신문 1쪽 아래에 "농민 사망 사건이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는 허준영 경찰청장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4쪽 아래에는 "경찰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러 갔다가 또 경찰 폭력 때문에 다치다니 어이가 없다"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글 옆에 김우현 민주노동당 기획조정실 부장이 집회에 참석하려다 경찰에 떠밀리며 지나던 차에 부딪혀 부상을 입은 채 도로에 쓰러져 있습니다. 이 사고로 광대뼈가 함몰되고 오른쪽 다리 복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뺨을 여덟 바늘이나 꿰맸답니다.

틈틈이 능사지으면서 농사 일꾼(농민회 총무)으로 일한 지 벌써 십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시에 휩쓸려 그저 세상 흘러가는 대로 큰 고민이나 생각도 없이 살아오던 어리석고 못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분은 대통령도 아니고 장관이나 국회의원도 아닙니다. 의사도 아니고 약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과학라도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아닙니다.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닙니다. 바로 요즘 학생들이 말하는 '불쌍한 사람'인 농부들입니다.

농부들은 더러운 '돈냄새'만 나던 제게 '사람냄새'가 무엇인지 깨닫게 했습니다. 흙이 무엇인지 땀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 천번 만번을 다시 태어나도 제 참스승은 농부들입니다. 흙을 버리지 못하고 가난과 불편함을 무릅쓰고 한평생 농촌 들녘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오신 농부들과 함께 어울려 땀흘려 일을 하다보면 하느님, 부처님을 만난 듯이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슴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농촌 들녘은 그대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데 어느 도시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까? 젊은이들만이 무너져가는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젊다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고 건강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조금더 젊어지기를 바랍니다. 젊다는 것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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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 글


평론_갈래, 녹색평론


  1. 농민. 시인. 1992년 제4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동시집 <윗몸 일으키기>, <우리집 밥상>,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등이 있다. 현재 경남 합천 황매산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해마다 '경남생태귀농학교'를 열고 있다. (1)

땅의 울음 (last edited 2011-11-16 23:40:24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