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마야, 그리고 한국의 농촌

이 글은 녹색평론 통권 제 82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5년 12월 18일, 직지지기 김민수

'좋은 삶'의 터전

어젯밤 텔레비전에서 충격적인 보도를 보았다. 우리나라 성인이 평균 수명까지 살 경우 남자는 세사람 중 한명이, 여자는 다섯사람 중 한명이 암에 걸릴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준이 나날이 나빠져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의 건강 식품이나 보약에 대한 열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건강을 좋게 해준다는 사우나는 번성하다 못해 요즘엔 집에 설치할 수 있는 개인용 사우나도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건강'을 위해 시도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시골로 주거를 옮겨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인 듯하다.

스코트 니어링은 복잡한 미국의 동부를 떠나 메인 주의 한적한 시골로 가서 참된 삶을 누릴 터전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가면서 그 경험을 <좋은 삶(The Good Life)>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렸다(우리나라에서는 <조화로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됨). 아마도 요즘 우리나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시골에 가면 '좋은 삶'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여러 형태의 귀농, 혹은 폭넓게 말하자면 시골에서의 거주생활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시골은 서울 등 대도시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왜 요즘 적지않은 사람들이 시골생활을 동경할까? 시골에 가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아직 시골생활의 꿈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의문들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의문에 대해 이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마음속에 내리고 있다.

20세기까지의 문명이 지탱될 수 있었던 것도 건강한 시골이라는 배후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도시에 몰릴수록 시골의 중요성은 커져간다. 생명력을 파괴하는 공간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생명의 터전인 시골을 찾는다. 이문구 선생의 소설 속 인물의 말대로 "아주 몹시 되면 고향을 찾는다." 시골이 도시문명을 지탱해줄 수 있는 동안 도시의 대형 문명체는 지속된다. 시골의 부양력이 약해지면 도심부의 대규모 문명은 쇠락하지만 그래도 농촌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이 지속될 수는 있다. 그러나 생명의 터전으로서 농촌이 몰락하면 문명 전체가 몰락해버린다.

이런 결론은 나의 독자적인 추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다른 많은 사회들이 살아온 모습을 담은 글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인간사회의 변천에는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그려내는 '환경사'에 대한 '연구가 많이 축적되고 있다. 그런 환경사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문명에서든 그 문명을 가능하게 한 농업 배후지의 중요성이 점점더 강조되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문명들은 농업 배후지가 건강하고 풍요로웠기 때문에 거기서 탄생했고, 건강하게 뒷받침해줄 동안에는 버티다가, 농업 배후지가 파괴되기 시작하면 몰락하거나 아니면 정복전쟁을 통해 건강한 농업 배후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아무리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본국에 건강한 농촌이 없는 나라는 조만간 쇠락하며, 이용할 수 있는 배후지가 없는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은 도심부에서 먼저 일어나며, 이때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길을 찾아 농촌으로 흩어져간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이런 원칙에는 한번의 예외가 없었다.

그러니까 최근 우리사회에서 일고 있는 '농촌 향하기'는 크게 보면 이 고도의 도시화 사회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리는 징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럼 시골에 가면 '좋은 삶'의 터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농촌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고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생기는 농촌의 변화 중에는 지금까지 농촌문제라고 인식되는 범주를 넘어서는, 그러나 내 생각엔 '좋은 삶'을 꾸려가는데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현상들이 몇가지 있다. 동시에 최근 환경관련 연구들이 진전됨에 따라, 이제까지 별로 의식하지는 못했던 부분이 '생명의 터전'으로서 우리 농촌의 강점들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런 얘기들을 하려고 한다. 먼저 왜, 얼마나 농업 배후지가 중요한지 확인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 속에 '몰락'의 모습으로 유명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려 한다. 하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유명한 에피소드를 낳으면서 요란하게 몰락한 로마의 예이다. 또 하나는 번영의 절정에서 갑자기 몰락해서 밀림 속에 묻혀버린 듯한, 그래서 여러가지로 신비스러운 추측들을 낳아온 마야 문명의 예이다. 그 다음엔 '좋은 삶'의 터전으로서 우리 농촌의 여러 특징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나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환경과 건강에 관련하여 최근에 밝혀진 여러가지 사실들이 검토될 것이다. 한편의 글에 이 모든 것을 담기는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문제에 대한 얘기는 이 글과는 별도로 다음에 기회가 되는 대로 이어서 하게 될 것이다.

'숲에 사는 사람들'의 번영

로마는 다른 어떤 문명들보다도 '멸망'와 관련되어 무수히 많은 담론들을 낳아왔다. 여기에는 아마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의 영향력 덕도 클 것이다. 그 유명한 방대한 저술에서 기번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의 행적의 중요성이다. 로마 제정 초기에는 뛰어난 황제들이 현명하게 통치해서 그렇게 막강한 제국으로 키워놨는데, 후기로 가면서 어리석고 광기에 찬 황제들 때문에 그 제국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몇몇 폭군의 만행이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심심치않게 사용되어 이 방면의 문외한일지라도 대개 네로나 칼리귤라 같은 이상한 황제들의 실정으로 로마가 무너진 것으로 어렴풋이 관계짓는다. 이후의 사가들도 대체로 로마와 야만족과의 관계, 황제들의 실정, 말기에 귀족들의 내란 등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아왔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가 역사에 남을, 나라 망친 폭군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네로는 로마 시민들이 자기를 현명한 군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측근에게 열심히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황제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I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건전한 판단과 행동력이 있으면 말썽꾸러기 황제를 현명한 사람으로 바꾸는 일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로마가 야만족에게 이기고 싶어서 이기고, 지고 싶어서 졌을까? 그 막강했던 나라가 일개 야만족 출신 용병 장군에 의해 타도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전체가 이민족을 제압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도자들도 일반인들도 모두 이전 영토확장 시대에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체력과 정신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 사회가 혼란 속에 빠지면서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사회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든 요인으로서 환경의 영향이 점점더 부각되고 있다.

환경사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로마의 홍망성쇠를 훑어보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건국할 당시였던 서기전 6세기경의 로마는 당시 강국이었던 그리스가 탐을 내서 정복하려다가 실패했을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나라였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어머니 이름인 '실비아'는 '숲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울창한 삼림은 로마인들에게 건축 및 가구의 자재, 난방연료, 선박 건조용 자재를 공급했고, 하류 평야지방의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는 영양분을 공급해주었으며, 더불어 로마인의 심신을 건강하게 해주었다. 힘에 넘치는 로마인들의 인구는 곧 늘어났고 숲은 경작지 마련을 위해서 점점 파괴되어 갔다. 그러나 알프스 산계 남부의 엄청난 삼림 덕분에 서기전 3세기까지는 그래도 로마는 별 무리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의 첫번째 대규모 정복전쟁은 카르타고와 싸운 포에니 전쟁이었다. 카르타고 역시 북아프리카 곡창지대의 최강자였던 만큼 승부가림이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 서기전 3세기 말쯤 로마가 확실히 이겼다. 그 이후 로마는 북아프리카에서 뻬앗아오는 물자들의 도움으로 일층 부유해진다.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커져 전통적인 소규모 자급영농이 대규모 목축과 집약적 경작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 숲이 더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토지가 황폐해져간다. 그러자 로마는 풍부한 삼림을 찾아 북아프리카뿐 아니라 서유럽에도 원정을 나선다. 그러다가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거의 무진장인 것처럼 보이는 은광을 독점하게 되고, 그 은으로 인해 로마의 재력은 또 한차원 껑충 뛴다.

그런데 이 은을 제련하기 위해 로마 숲의 나무들은 엄청난 속도로 잘려나갔다. 은뿐 아니라 판유리, 철기, 청동기 등, 점점 풍요해지고 세련되어가는 물질문화를 지탱해주는 광석들이 식민지 각지로부터 들어왔고, 이들도 나무를 때서 정련해야 했다. 돈이 많아 자꾸 건물, 도로 등 대규모 공사를 하니까, 벽돌과 석회를 구울 땔감이 더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서기 1세기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삼림은 거의 사라지고 큰 나무는 아주 높은 곳에서만 자랄 정도가 되었다. 숲이 사라지자 물이 귀해지고 오염되며, 토지가 척박해지고 토양이 유실되어 작물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그래서 아주 먼 데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도교를 짓고 식량은 북아프리카 곡창지대에서 수입했다. 그리고 제련업 등 산업은 점점 로마 근교로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 산업을 지탱해줄 연료, 즉 나무가 있는 곳을 따라 이동해가는 것이다.

로마가 끝났을 때 세계가 끝났다?

이 과정에서 로마사람들의 건강은 크게 나빠졌을 것이다. 우선 숲이 주는 치유력 덕을 볼 수 없었고, 먼 데서 날라온 식량은 아무래도 부근에서 갓 수확한 것보다는 영양이 많이 파괴되어 있을테니까. 거기다가 식품 보존과 향미 개선을 위해 납을 첨가물로 쓰기도 했다. 납은 나무가 귀해짐에 따라 재련에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에 점점더 선호되었다. 식기와 수저류는 물론 수도교의 파이프에 쓰이기도 했다. 당연히 납 중독이 확산되었다. 최근 로마 근교에서 발굴된 서기 3세기경 로마인의 유골에 함유되어 있는 납의 농도는 뉴욕시민의 평균적 체내 납 함유 농도보다 88배나 높은 것이었다고 밝혀졌다. 납뿐 아니라 로마 교외에서 시작되어 점차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 각종 중금속 산업의 영향으로 대기, 토양, 물이 오염되었다.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늘날까지 자료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목욕탕의 애용이다. 로마인은 목욕탕을 좋아해서 무수한 공중목욕탕을 지어, 거기서 한담도 사업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점점더 목욕물 온도가 뜨거운 것을 원했다고 한다. 자칫하면 폭발할 태세인 군중의 불만을 다스리는 데 로마의 황제들이 택한 방법으로 '빵과 서커스'가 유명하다. 4세기경엔 로마 주변에서는 땅이 모두 황폐화되고 오염되어 식량을 생산할 수 없어서 시민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실어오는 밀로 만든 빵의 배급에 식량을 의존했다. 바다 날씨가 험해서 배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원형경기장에서 잔인한 난투극을 베풀었다는 얘기다. 이에 못지않게 군주들이 이용한 방법은 목욕탕 물을 뜨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3세기 이후 로마 황제는 로마 시내 공중목욕탕 물을 데우는 데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경주했다. 땀을 흘려 몸 안의 독성을 뽑아내고 나면 심신이 좀 편안해지니까 폭동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의 건강이 얼마나 나빠졌는지는 인구감소에 관련된 자료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다. 제정기 이후 로마에서는 아이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일부일처제(물론 대단히 발달된 매춘 관련 사회적 장치와 공존하는 것이었지만)였던 로마에서 제정기 이후 아버지, 혹은 부부가 한 아이를 소중히 안고 있는 그림이나 조각이 많으며, 아이들의 소중함을 말하는 기록이 많다. 노예나 이민족의 자식조차 귀하게 여겨, 자기 집에서 태어난 노예의 자식이나 뛰어난 이민족인을 양자로 삼는 일도 빈번했다. 그만큼 로마인 중에는 제대로 된 자손이 귀했다는 걸 뜻한다. 생산력이 떨어진 땅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은 생산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보다 더 빠른 인구감소는 전염병에서 왔다. 요즘 역사가들 중에서 전염병의 유행이 단순히 병균 때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영양수준이 저하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면 저항력이 떨어져 전염병이 휩쓴다고 본다. 수입식량에 의존했고, 따라서 제대로된 영양분 섭취가 힘들었으며, 각종 산업으로 인한 오염에 시달렸던 로마에서도 몇차례 전염병이 인구를 줄였다. 3세기 중반 로마에 페스트가 돌아 하루 5천명 이상이 죽어갔고 5세기 중반 동로마에서는 림프절 페스트로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

이렇게 번영의 기반이었던 고향 땅 이탈리아 반도를 결딴내면서도 로마는 그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세계를 약탈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복지를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 한 세기만 로마의 지배를 겪고 나면 원시림이 황폐화되었다. 어느 가울족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로마는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워낙 정복지가 넓었으니까 로마 하나를 지탱해주는 정도는 몇 세기 동안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복지들도 황폐해져가고, 또 아무리 정복지에서 조달한다 하더라도 그런 자원과 식량으로는 건강한 생명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땅은 누적된 오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생명력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어갔다. 먼 게르마니아 땅의 건강한 삼림 속에서 튼튼한 체력을 키워서 로마에 병사로 고용된 야만족들이 어느 정도 상황에 익숙해진 후 약체화된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찬란했던 로마 문명이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 것을 통탄해서, "로마가 끝났을 때 세계가 끝났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로마가 망할 무렵에는 로마의 연료 공급지였던 키프로스 섬에는 서 있는 나무가 거의 없었으며, '로마의 빵 바구니'였던 북아프리카 곡창지대는 토양 침식으로 황폐해졌다. 지중해 세계 전체가 로마와 함께 결딴난 것이다. 그러나 기번의 시대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지금 지중해 환경사 전문가 도널드 휴즈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끝나자 로마도 끝나버렸다." 지중해 주변의 배후지들로부터 착취한 자원에 의존해서 연명해오던 로마는 배후지들까지도 망쳐지자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자원을 언제까지나 마음대로 할 것 같았던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던 로마조차 배후지인 농촌이 황폐해져가기 시작하자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는 것이다.

마야의 선택 - 농촌으로 흩어지기

마야 문명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8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남미 문명을 집중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할 때였다. 멕시코 꼬빤과 빨렝께 지역에서 원주민들의 전설을 따라 밀림을 탐색하던 두 사람의 미국인이 울창한 수풀 속에서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와 건물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 모든 미스터리의 실체를 알아보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세계 역사에 사건들이 많지만, 한때는 위대했고 매혹적이었던 도시가 사라졌다가 깊은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름조차도 없는 이 광경처럼 인상적인 것도 드물 것이다." 발굴자들의 표현대로 마야 문명의 운명에 대한 진실은 꽤 오랫동안 매혹적인 미스테리로 남아있었다. 석조 건조물 들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해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야는 숲속에 자리잡아 사제들이 다스리는 신성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다는 추측이 제일 인기를 끌었고, 왜 마야에서 갑작스럽게 시간이 정지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점은 매력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그 매력적인 신화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꽃가루 분석, 탄소 연대 측정법, 지층 분석법 등 첨단 고고학 분석법과 함께 마야 문자가 해독되면서 연구자들이 재구성해낸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마야 사회는 열대 저지대의 울창한 밀림 지대에서 생겨났다. 이 지역은 너무 습하기 때문에 많은 인구를 부양할 식량 생산과 저장이 힘들어서 별로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다가 서기전 500년경 부터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식량생산이 늘고, 따라서 인구도 늘고 사회 분화도 뚜렷해졌다. 특히 천문학과 종교의례가 발달했다. 마야의 농사 달력은 정교한 것으로 유명하며, 종교 사제가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 유적들이 마야가 세속 군주나 군사 엘리트가 아니라 종교 지도자가 다스리던 평화롭고 경건한 나라였다는 추측을 낳았지만, 사실은 생태계가 취약해서 식량생산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발달한 것이었다. (쇠망기에 마야의 군주들은 자연을 정확히 예측해서 식량생산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최근 과거의 기후변화를 재구성하는 기술의 발달로 밝혀진 사실은 마야 문명의 흥망이 기후변동 패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서기전 500년에서 서기 800년의 기간 동안 기후는 대체로 건조화 경향을 보였지만, 때로 습윤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너무 습윤해서 인간이 살기 적합하지 않았던 마야 지대는 약간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꽃피기 시작하지만 계속 건조해지면서 다시 망했다가 약간 습윤해지면 다시 다른 지역이 흥성했다가, 서기 750년부터 800년까지 계속된 극심한 가뭄 기간 동안 철저히 몰락한다. 특히 남부 저지대 지방은 열대림 지역이라 나무를 베어내고 경작지를 만들어도 금방 영양가가 씻겨나가 황폐해지기 때문에 기후변화로 인한 타격이 컸다. 이 지역에서는 전성기에 500만을 이루었던 인구가 50년의 가뭄 동안 99%까지 감소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사라졌을까? 생태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소멸과정을 밝힌다. 마야인 중 다수가 농촌으로 흩어져갔을 것으로, 특히 보다 식량생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유카탄 지방으로 도주했을 것이다. 일부는 순전히 기근과 기갈로 죽어갔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으며, 점점 줄어가는 자원을 둘러싸고 투쟁이 심해져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보다 더 속도가 느리기는 해도 근본적인 인구감소는 출산율 저하와 유아 생존률 감소를 통해서 일어났다.

인류역사를 통해 식량위기가 오면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유아살해, 독신들의 자살, 고려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구를 줄이고 자원을 최대한 아껴 쓰면서 버티는 것이다. 또하나는 외부 집단을 정복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집단내부에서 서로 싸워서 남의 식량을 뺏는 것이다. 인류역사에 알려진 대부분의 인간집단들처럼 로마도 마야도 후자의 방법에 의존했다. 이런 경우에는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위세를 위해 더 큰 공사를 벌이고 더 많은 기념비를 세워 자원을 낭비하며 더욱 하층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스스로 몰락을 앞당긴다. 로마보다도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여러 모로 불리했던 마야는 어리석게도 더욱 극단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자원을 뺏는 소모전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최근 해독해낸 마야의 문자는 왕실의 기록이기 때문에 이런 경쟁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마야의 군주들은 평화로운 종교적 지도자이기는커녕 피에 굶주린 전사들이었다. 그런 사회에 당연히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유적과 기록들은 마야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패배자들을 다루었는지, 얼마나 흑독한 고문기술을 발달시켰는지를 보여준다. 그 경쟁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삶의 공간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야의 도시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길을 찾아 시골로 흩어져갔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텅 빈 도시는 숲으로 덮여갔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남았다. 시골로 몸을 숨기고 생명을 이어줄 식량을 근근이 확보해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태양의 도시 마야는 전설로서 전해져 내려왔다.

역사에서 배운다

로마와 마야의 이야기에는 우리의 현실에 대비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흔히들 로마와 미국을 비교하는데, 적절한 비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국의 자연파괴적이며 착취적인 자원 이용법을 배운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점도 많다. 별로 돈이 되지 않는 농촌이야 파괴되든 말든 공업입국, 혹은 IT산업입국 해서 그 돈으로 필요한 식량을 외국에서 싸게 사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무엇보다 정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많이 있다. 그러나 로마 정도의 재력과 군사력을 가졌어도 성취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뒤늦게 공업 경쟁에 뛰어들어 성취해서 번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든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마야는 생태계가 취약한 나라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생태적 조건은 마야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식량생산에 유리하다는 등 인간의 종족번성이라는 시각에서 보았을 때의 평가다. ) 그러나 우리나라가 마야보다 훨씬 불리한 점은 국토가 결딴나도 이주해갈 배후지가 없다는 것이다. 휴전선 이남으로 동·서·남해에 둘러싸인 땅이 전부다. 인접 국가로는 세계 굴지의 강국 중국과 일본이 있을 뿐이다. 물론 요즘에는 여러가지 정당화된 절차를 거쳐서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서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지만, 이것은 어떤 형태이든 엘리트들에게 허용된 방식이며 다수의 풀뿌리 민중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 난무하는 도시를 떠나서라도 생명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생명을 제공할 터전이 없다면 그 사회 전체가 몰락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과연 우리의 농촌은 우리를 살려줄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어떤 점이 우리 농촌의 강점이며 어떤 점이 극복되어야 할 점일까? 어떻게 하면 보다 생명을 건강하게 뒷받침해줄 수 있는 터전으로 가꾸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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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_갈래, 녹색평론, 이진아


  1. 환경과 건강문제 관련 저술가. 저서 <딱 1년만 자연주의로 살아보기>, <아토피를 잡아라>(공저), 역서 <녹색세계사> 등이 있다. (1)

로마, 마야, 그리고 한국의 농촌 (last edited 2011-11-16 19:57:09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