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통권 제 86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6년 2월 2일, 직지지기 김민수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

-- 공선옥 1

이곳 전주는 지난 12월 중순께부터 몇날 며칠을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다가 어느날부턴가 뚝 그치고 새해 첫날부터는 또 영락없는 봄날이다. 오기를 너무 많이 왔기 때문에, 일단 눈 때문이었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눈, 바로 그 눈 때문에라도 나는 지난 12월 한달을 글 한줄 쓰지 못하고 정신없이 살았다.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글 한줄 쓰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히 정신없이 산 것이다. 세상에 다른 일도 아닌 먹고 사는 일에 소흘할 수가 있다니,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모든 생명 달린 것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살아 있으므로 먹어야 하고 먹어야 또 살 수 있다. 먹고 사는 일에 충실하기, 그것은 생명에의 정직함이다.

그런데,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나는 과연 얼마나 내 생명에 정직한 삶을 살았던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나는 생명과 관계없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혹은 반생명적인 일에 몰두하기도 했던가, 싶어지는 것이다.

의식주에 꼭 필요한 물건 이외의 물건 사들이기는 확실히 반생명적인행위임에 틀림없다. 나는 2005년도에도 여전히 뭔가를 사쟁이는 삶을 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저렇게 많은 물건들이 내 집 사방에 처쌓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옷, 책, 음악시디, 그릇, 냄비, 후라이팬, 후라이팬은 후라이팬인데, 양면 후라이팬. 나는 사실 양면 후라이팬을 굳이 살 마음이 없었다. 양면후라이팬이 없으면(그런데 그 후라이팬 본명이 진짜 양면후라이팬인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편의상 내 식으로 양면후라이팬으로 한 것뿐) 그냥, 보통 후라이팬을 요령껏 쓰면 되니까.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 때였다. 인간세에서 크리스마스는 먹고 마시고 노는 크리스마스가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이젠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이 되고 말았다. 나도 뭐라고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들한테 강제로 끌려가 백화점을 갔다. 가서 또 억지로 아이들이 시킨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만 먹고 백화점을 나오려고 하니까 아이들이 어쩐지 내게 미안해 하면서 마치 선심쓰듯이, 엄마 필요한 것 있으면 사라고 한다. 저희들이 돈 낼 것도 아니면서. 그때, 마침 우리집에는 없는 양면후라이팬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양면후라이팬을 사서 집에 오는 길에 스파게티가 소화가 안되어 길바닥에서 컥컥거리다가 그만 양면후라이팬 상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집에 와서 보니 후라이팬 손잡이 부분이 깨어져 나갔다.

그것을 바꾸려고 나는 또 백화점에 갔다. 백화점에 갔는데, 어떤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로 무슨 천인지 하여간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따뜻하기도 그에 못지 않은 무릎덮개였다. 새벽에 글 쓰고 있으면 무릎이 시려웠다. 나는 생각했다. 무릎덮개 없이 글을 쓰던 숱한 겨울 새벽들을. 여름이불은 백날 덮고 있어도 시려운 기운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릎 하나 덮자고 무겁고 두꺼운 겨울이불을 뒤집어 쓸 수는 없다. 나는 그만 그 부드럽고 따뜻한 무릎덮개를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사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집에 오게 된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지금도 그 양면후라이팬으로 요리 한번 해보지 않았다. 내 평생에 그것으로 몇번의 요리를 하게 될지, 나는 모른다. 무릎덮개 또한 내가 그동안 글은 쓰지 않고 정신없이 사느라고 책상 밑에 처박혀 있었다. 포장지를 뜯으려니 어느새 먼지가 수북하다. 먼지를 털고 무릎 위에 펼치려니, 뭔가 오싹하니 전기가 통한다. 아차, 정전기다. 정전기 이는 옷은 아무리 멋져도 절대 사양인 내가 이 정전기 나는 무릎덮개를 애용할리는 만무하리라. 그리하여, 나는 나대로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를 볼 때마다 저것들을 내가 왜 샀던고, 속상해 할 것이고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는 또 그것들대로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 것을 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럴란가 어쩔란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다놓고 별 사용도 안하고 혹은 사용할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물건들이 어찌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뿐이겠는가. 우리 삶에서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는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옷장 속에 가득한 옷. 내 보기에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을 옷들을 옷장 속에 쟁여 놓고도 옷 없다고 징징대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옷이 많은 사람은 필시 가방도 많다. 신발도 많다. 장신구도 많다. 하여간 옷 많은 사람은 뭐든지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옷과 가방과 신발과 장신구를 가진 사람 중에 자기가 많이 가졌다고 하는 사람 거의 없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몸에 걸칠 것들을 두고도 저자거리에 나서면 끊임없이 눈을 두리번거린다. 어디 또 뭐 살 것 없나 하면서. 어떤 집엘 갔는데, 문이 물경 여섯짝이나 달린 커다란 장롱 가득 옷을 쟁여 두고 살면서 집안 곳곳에 행거를 설치하여 옷을 치렁치렁 걸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무슨 세탁소처럼 방으로 들어가는 문틀에 또 옷걸이를 설치하여 옷을 걸어놓고 또 그것도 모자라 베란다 밖 빨랫줄에도 옷이 주렁주렁 내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집이 아니라 가히 옷전시장 같았다.

또 어떤 집을 가보면 책이 그렇다. 온 집안 사방을 마치 쥐가 구물거리듯이, 그 집은 책이 스멀스멀거렸다. 또 어떤 집은 그릇이 그렇고, 어떤 집은 전자제품이 그렇다. 그런데, 지금 남의 집 흉을 볼 때가 아니다. 내 코가 석자다. 뭐가 저리도 많은지, 저것들 사쟁이느라고 지난해도 그렇게 쎄가 빠지게 돈을 벌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내 인생이 그렇게 물건들 사들이는 데 허비되다니. 그것은 분명 내가 그 물건들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그 물건들이 내 인생을 소비한 것이다. 아, 생명 아닌, 일개 물건들이 생명 달린 사람의 시간을 소비하다니. 내 생명이 저 물건들에 담보잡히다니. 양면후라이팬파 무릎덮개, 옷과 신발과 그릇과‥‥그리고 집이 아닌 아파트라는 '건물'이.

물건들만 내 생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일테면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다. 생계를 위해 움직이는 것 이외의 장거리 여행은 확실히 반생명적이다. 생명유지에는 필수인 공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만 한다는 한계 이외에도 나는 그 여행중에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렸고 너무 많은 것을 들어버렸다. 너무 많은 볼 것들이 한꺼번에 내 시각을 자극하면 나는 어지럽다. 너무 많은 들을 것들이 내 청각을 자극하면 나는 들은 것 모두를 오히려 잊어버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본 것, 들은 것들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알아야만 한다고 믿어도 좋을 때는 지난 것 같다. 그 반대로, 이젠 좀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먹고 사는 일, 최소한의 생명행위, 생존을 도모하는 일 이외의 그 어떤 일도 함부로 도모해서는 안된다.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한 노동 이외의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행위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을 경계할 것. 그것만이 내 생명을 내가 온전히 지키고 가꿔나가는 길인 것만 같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공격적이다. 세상은 언제나 돈의 길을 따라간다. 인간을 위해 돈이 있으면 돈은 참으로 인간에게 선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돈을 위해 인간이 있게 된 지 오래다.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이 세상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돈을 따라가는 세상은 그래서 사뭇 폭력적이다. '돈 되는 일'이면 사람들은 못할 것이 없다.

전주서 서울을 가다보면 서울은 오늘 다르고 어제 다르게 빨리 시작된다. 서울서 전주 오다보면 서울은 오늘 다르고 어제 다르게 먼 데서 끝난다.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은 그냥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끝났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서울은 야금야금 경기도로 기어나왔다. 결론은 돈을 쫓아서 그렇게 되었다. 집을 지어서 팔아먹고 집을 지어서 팔아먹고‥‥그 집을 팔아서 돈을 챙기고 그 집을 또 팔아서 돈을 챙기고‥‥그렇게 돈 버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어떤 인간이 되어가는지도 잊은 채로 열심히 서울을 경기도로, 충청도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제 서울은 어느새 천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거기서부터는 정말 '돈 되는 재미'로 만들어진 '이상한 도시'들이 고속도로 양켠에 즐비하게 서 있다. 나는 그 도시들에서 돈이라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의 야수성을 느낀다. 그래서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짐승들은 배고플 때만 먹잇감을 찾는다고 했다. 저건 절대로 배고파서 지은 집들이 아니다, 누군가와 나누려고 지은 집들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때가 되면 부수어뜨리려고 지은 집들이다, 생명을 도모코저 지은 집들이 아니다, 저 도시는 절대로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으로 세워진 도시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다, 저건 순전히 돈놀이의 결과일 뿐이다, 라는 느낌에 나는 서울을 오가는 내내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

폭설에 무너져내린 축사, 그 축사지붕에 눌려 상처입은 소를 보고 겨울 찬바람 속에서 눈물바람 하는 아낙의 시린 볼을 바라보는 일은 처연하다. 그것은 삶 앞에서 한없이 정직한 울음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에 등장하는, 먹고 사는 일에 온몸을 투신하다시피 해야 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 환하게, 혹은 수줍은 미소를 피워올리는 사람들. 생존 이외의 어떤 부도 추구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아침 나팔꽃보다 더 싱그러운 미소를 피워내는 아이들, 소녀들, 아낙들, 노인들은 참으로 벅찬 감동이다. 삶 앞에서, 먹고 사는 일 앞에서 한없이 정직한 사람들의 미소이므로.

도처에는 정직하지 않은 풍경들이 널려있다. 갈수록 그 강도는 더해간다. 정직하지 않은 모습들, 살아가는 방식들, 제도들. 정직하지 않아야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남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관들, 가르침들, 언술들, 저술들‥‥

그것들을 뚫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과 같다. 당신의 삶 앞에서 절대로 정직하지 마세요, 술수를 쓰세요, 술수는 술수가 아니라 기술입니다, 발전입니다, 능력입니다‥‥광고들은 유혹하고 매체들은 속삭인다. 생명은 고립되었다. 진정, 삶 앞에서 하염없이 정직하나로만 일관하고자 했던 생명들은.

이 시대에는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 생존 이외의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부를 절대로 타인과 나누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을, 정말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도용하였다. 정말로 삶이 힘든 사람들은 결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처연하게, 혹은 한없이 순결하게.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 정직하지 않은 삶을 살라고 유혹하는 것들로부터. 본질적이지 않고 장식적인 삶을 부추기는 것들로부터. 나는 더이상 양면후라이팬과 무릎덮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고 "먹고 살기 어렵다"는 언술에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다만 생존해 나가야 한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도 내년에도, 한없는 나의 노동으로 내 생명을 이어나가야 한다. 생명에 한없이 천착하기, 그리하여 한없이 정직해지기. 삶은 정직하지 않으면, 술수로는 결코 이어나갈 수 없는, 명명백백하게 엄중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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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_갈래, 녹색평론


  1. 작가.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유랑가족>,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수수밭으로 오세요>,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마흔에 길을 나서다>,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등이 있다 (1)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 (last edited 2011-11-16 20:19:01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