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제89호(2006년 7-8월호)에 올려져 있는 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에 대하여>를 직지지기 김민수가 직접 입력해서 올린 것 입니다. 이 글은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습니다. – 2010년 5월 8일 CEDT, 직지지기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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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일그러진 근대화의 표상 –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에 대하여
황대권1
황무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농촌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농촌이 좋아서 귀농을 했고 또 새로운 문명의 희망은 농촌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농촌과 관련된 일을 하며 주로 시간을 보낸다. 중간에 공백 기간은 있었지만 농촌으로 내려온지 7년이 지났어도 아직 정을 못 붙이고 있다.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아직 정착하지 못한 것도 이유이지만 농촌 자체가 너무도 도시화되어 있어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일 때문에 지난 몇년 동안 안 다닌 데 없이 돌아다니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위안보다는 분노를 느낄 때가 더 많았다. 어느 날엔가는 “대한민국에 농촌은 없다”라고 스스로 단정짓기도 했다. 모든 자본과 기술 및 인력이 도시로 몰려들고 농촌은 단지 도시를 부양하기 위한 배후지일 뿐, 그야말로 사람 하나 없는 삭막한 황야나 다름없다.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버려진 농토에 잡초들이 무성하고 여기저기 빈집들이 흉가처럼 서 있다. 낮이건 밤이건 마을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 하나 구경하기 힘들다. 아르바이트 삼아 농촌총조사에 참여했던 한 후배는 도저히 마음이 아파서 일을 계속하기 힘들다고 호소를 한다. 대부분의 집이 비어 있는데다 혹가다 인기척이 있어 들여다보면 병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홀로 누워있기 일쑤라는 것이다. 읍내에 나가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 땅의 대부분의 읍은 조선시대 때부터 행정기관이 들어서서 번성하던 곳인데도 거리풍경이 마치 서울 변두리나 된 듯 보인다. 지방 특유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라곤 박제가 된 향교와 향토문화관 정도이다. 중심거리는 도시를 흉내낸 조잡한 간판들이 어지럽게 붙어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어김없이 모텔들이 집단으로 서 있다. 그나마 시골 읍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텔과 노래방, 단란주점 등의 반짝이는 네온사인 때문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서울에서는 이미 사라진 ‘다방’들이 여기저기 간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식 향수나 느껴볼까 하고 들어섰다가는 틀림없이 낭태를 보고 만다. 다방 주인이 주문받을 생각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곳은 아예 앉을 테이블도 없다. ‘티켓 다방’이라는 곳이다. 듣자하니 시골 청장년들이 티켓 다방 때문에 심성은 심성대로 멍들고 돈으로 여자를 사느라 빚더미에서 헤어나질 못한다고도 한다. 이 괴상한 티켓 다방이야말로 아마도 대한민국 소도읍 특유의 소비문화가 아닐까 싶다.
한번은 공구를 사러 철물점에 들렀는데 주인이 차 한잔 먹고 가라며 붙드는 것이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한 지 몇분 안되어 웬 키가 크고 야하게 생긴 아가씨가 방실방실 웃으며 커피병을 들고 나타난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주인이랑 스스럼없이 농담을 나누는 것을 보아 단골인 듯싶다. 커피를 다 마실 즈음 두명의 손님이 왔다. 다방 아가씨가 커피병을 들고 나가자 손님 하나가 뒤에다 대고 농을 친다. “야, 이 아가씨 키가 겁나게 크구먼. 한번 더듬으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는걸.” 설탕 덩어리의 커피맛도 그렇지만, 도대체 이것이 시골 철물점에서 있을 법한 풍경인지 황당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문화로 보인다.
하긴 문화시설이라곤 눈 씻고 보아도 없는 시골에 갈 데라고는 다방과 노래방밖에 어디 있겠는가 싶다. 여가문화뿐 아니라 일판문화에서도 농민들은 일찌감치 날삯 노동자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자기 농사만 가지고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농민들이 인근의 큰 농장이나 공사판으로 일당을 챙기러 몰려다닌다. 수확기에 맞추어 일년에 한두번이나 돈을 만져보는 농민들에게 일당벌이는 소중한 수입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두레조직의 으뜸어른이나 되었을 동네 이장이나 반장은 당일 필요한 인부들을 불러 모으는 동원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원된 인부들을 보더라도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아주머니와 노인들뿐이다.
촌락공동체 해체의 역사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우리 농촌이 이 경으로 되었을까?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조선 상고사 연구》에서 고려 후기에 있었던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일대사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역사를 왕정의 계승과 단절, 또는 생산양식의 변천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민족의 자주성 옹호를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단재 선생에 의하면 동북아에서 눈부시게 피어난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은 고조선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묘청의 난 이후 정계와 학계를 장악한 김부식 일파에 의해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묘청의 난은 자주 대 사대의 싸움으로서 이 사건 이후 결정적으로 사대파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현실적인 문제제기 정도로 지나치고 말았던 고려조의 북벌론은 당시 우리 선조들이 북벌을 감행할 만한 실질적인 의지와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이씨 조선은 북벌 도중 압록강에서 회군을 한 이성계에 의해 창건되지 않았던가. 한국 근대사의 기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동학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묘청의 난’과 ‘동학난’이 모두 실패했고,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는 사대의 길을 걸어왔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알짜 문화와 자주성은 촌락공동체 차원에서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인류역사를 촌락의 역사로 파악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오늘날 자본주의 최선진 국가인 미국조차 20세기 초반, 포드가 자동 컨페이어 벨트 시스템을 개발한 시점에서도 촌락공동체가 지배적인 사회였다는 것이다. 인류역사 오만년의 대부분의 시간은 촌락의 역사였으며 이것이 무너지지 시작한 것은 겨우 일백년도 채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문명의 위기에서 인류가 살아남은 길은 촌락공동체의 보전과 재건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장구한 세월동안 촌락공동체 안에서 지금의 ‘인간’으로 성장‧발전해 왔으며, 또한 그 안에서 한 민족의 정신과 문화,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던 촌락공동체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
한국의 촌락공동체는 2단계를 거쳐 완전히 해체된다. 그 첫 단계는 물론 일제 식민지시대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실로 치밀하고도 조직적으로 한국의 얼과 민족문화를 말살하였다. 물자와 토지의 수탈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이름과 마을이름까지 법칙에도 안 맞는 일본식 한자말로 다 바꾸어 버렸다. 마을의 전통놀이와 제사, 두레조직을 금지시키고, 근대화의 이름 아래 천황의 신하로 키워내는 식민지 학교를 방방곡곡에 세웠다. 쓸 만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대처로 돈 벌러 나가저나 징용 또는 학병으로 끌려나갔다. 일부 의분에 찬 젊은이들은 독립의 원을 품고 기약도 없이 고향땅을 떠났다. 우리가 지금도 한국농업의 문제라고 일컫는 것들, 예컨대 영세 소작농, 단작, 농업자본에 의한 토착농민 장악, 농가부채 만연, 관치농정, 이농(離農), 전통파괴 등은 사실 이 시기에 일본에 의해 고착된 것이다. 해방 후 반세기는 이러한 일본 통치의 유산을 더욱 극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촌락공동체 해체의 제2단계는 일본 제국주의의 충실한 계승자 박정희에 의해 완성된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의해 우리의 농촌이 피폐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방 직후 한국은 인구의 70%가 농촌에 거주하는 농업국가였다. 비록 피폐했을지언정 우리 민족의 정수가 농업공동체 속에 어느 정도나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농업으로서는 ‘강성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박정희는 농업의 진정한 의미를 캐물을 새도 없이 무자비한 산업화의 길로 나선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길러낸 가장 출중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 일본이 추구했던 압축적 근대화와 군대식 통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신이 20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일본을 선택했다면 해방 후 반도의 남쪽에서 박정희가 패권을 장악한 것은 거의 필연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도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일본의 복구와 고도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언컨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대단히 예외적인 것으로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인접한 일본 모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물론 이 중심에서는 박정희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세계경제의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압축적 고도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새마을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 복제판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도시나 농촌 할것없이 전국민을 하나의 단일대오로 묶어 수출전선에 몰아세운다. 수출에 ‘올인’하는 박정희의 이 전략은 서구 자본주의 역사의 초기에 있었던 ‘원시적 자본축적’에 해당된다. 당시 자본주의 선발 국가들은 늘어나는 인구의 압력과 과잉생산을 식민지 개척을 통해 해소하고 식민지와의 약탈적 상거래를 통해 축적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고도성장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획득이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단기간’에 비교적 ‘쉽게’ 자본을 축적하는 길은 외자도입을 통한 가공무역이 가장 그럴듯하게 보였을 것이다. ‘식민지 개척’은 ‘해외시장 개척’과, ‘식민’은 ‘해외 인력파견’과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 60-70년대의 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장의 호황과 미‧일의 협력으로 이 전략은 ‘대박’을 터트린다. 박정희가 영웅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모든 영웅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면에는 피땀어린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이 알알이 박혀 있다.
한편 그는 독재정권의 지지기반인 농촌이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소외당할 기미를 보이자 농촌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새마을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이 땅의 농촌공동체를 근원적으로 해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박정희의 정신적 고향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지만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일제가 30년대에 행했던 ‘농촌진흥운동’과 너무도 닮았다. 당시에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위해 조선땅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바로 이 시기에 일제가 군수산업을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후방이 안정되고 군량생산이 차질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합방 후 20년 동안 진행된 수탈적인 ‘식민지 지주 소작제’의 폐해로 인해 농촌의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일제는 ‘자력갱생’을 구호로 내걸고 총독부의 지휘 아래 농업진흥운동을 펼쳤다. 글자 그대도 보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잘살아 보자는 얘기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농민통제와 생산독려가 목적이었다. 이쨌거나 일제에 의한 농촌진흥운동은 공업화와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다.
박정희에게 있어 70년대는 전쟁과 같은 상황이었다. 60년대부터 시작한 수출주도 산업화가 순풍에 돛을 단 듯 진행되고 있었지만 농촌은 상대적으로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다 삼선개헌(1969년) 이후 반대자들의 정치적 저항은 거세어지고 농촌에서의 지지율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무렵 그는 강성대국을 이루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그려놓고 그야말로 ‘이 한몸 다 바쳐’ 실행에 옮길 것을 결심한 것 같다. 첫째로 수출산업 고도화에 의한 지속적인 자본추적, 둘째로 믿을 수 없는 도시 중산층 대신 전통적 지지기반인 농촌을 확실히 휘어잡기 위한 프로젝트 가동, 셋째로 ‘농공병진=국론통일=고속성장’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서서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그 윤곽을 드러낸다. 물론 10월 유신의 결단은 베트남의 공산화와 북한에서의 유일사상체제 확립이라는 정치지형과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박정희식 근대화의 완결판으로 보아야 한다.
새마을운동은 30년대 일제에 의한 농촌진흥운동처럼 급속한 공업화에 대한 농촌의 상대적 빈곤, 전쟁상황(북한과의 대결과는 별도로 박정희에게 있어 수출주도 공업화는 국력을 총동원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후방의 통체와 안정이라는 공통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농촌진흥운동은 생산된 부가 일방적으로 국외로 빠져나가는 식민지 수탈체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 없이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중단되고 말지만, 새마을운동은 농가소득 향상과 농촌환경의 전면적인 정비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일구어낸다. 이것은 지도자의 결연한 의지와 열성적인 공무원,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농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우어낸 성과임에 틀림없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사후 경제환경의 변화와 지도자들의 무관심 등으로 70년대의 활력은 잃어버렸으나, 후대의 정부가 내어놓은 대부분의 농촌개발정책은 새마을운동의 이런저런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을 농촌근대화의 성공적인 모델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근대화를 추구하는 제3세계의 일부 국가들에게 농촌개발의 모델로서 수출까지 하는 실정이다. 걱정스럽다. 걱정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이런 식의 하향식 개발모델은 절대 전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후진국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21세기이다. 자기 집에 앉아서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에 강력한 독재가 수반되는 하향식 개발모델을 수출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독재적 개발을 통해 농민통제와 식량증산을 꾀하고자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강력히 원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새마을운동이 비록 성공적이었다 하더나도 그 기간 동안 농촌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농가부채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농촌의 농촌다움은 점점 사라지고 그 위에 싸구려 도시문화가 덧씌워지면서 농촌 인심마저 삭막해져 갔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빚어낸 환상이었을 뿐, 진정한 농촌발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공동체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 박정희의 또다른 구테타였다. 구테타란 주모자가 정상적인 절차와 속도를 밟지 않고 일거에 무력으로 판세를 장악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를 달성한 나라들도 농촌이 해체되는 경험을 한 것은 같지만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농촌문화의 정수가 나름대로 변화된 상황에 적응할 수가 있었다. 우리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압축성장을 진두지휘한 박정희에 의해 농촌해체가 이루어짐으로써 적응이나 보존 같은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잠깐 사이에 상황이 종료돼 버렸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직접 농민들을 선동하여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리게 한 것이다. 이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이떻게 우리의 촌락공동체를 철저히 해체시켰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자립경제의 해체
사실 농촌의 해체는 1961년 군사구테타 직후 박정희가 야심적으로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급속한 공업화의 바람이 농촌에도 불어닥친 것이다. 당시의 우리 농촌은 젊은 노동력이 대거 도시로 빠져 나감으로써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은 그 무렵 식량원조를 무상에서 유상에서 바꾸어 버렸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기계화-화학농법’과 ‘다수확 품종’을 도입한다. 이는 농촌에 전통적인 농업 대신 빚을 져서 영농자재를 구입한 뒤 늘어난 수확물을 팔아 빚도 갚고 소득도 증대시킨다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영농방식이다. 차관을 들여와 가공무역을 통해 돈을 버는 방식을 농업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농촌살림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먼저 소득증대를 목표로 해놓고는 저곡가정책을 썼으니 이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농업생산성의 증가에 비해 외부투입비용(종자, 농약, 비료, 기계, 인건비 등)이 너무 컸다. 특히 외지로 나간 자식들을 위한 과도한 교육비 부담은 대부분의 농가를 빚더미에 앉게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에 농촌의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평균을 넘어섰다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평균 노동일수와 부채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수치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당시 도시로의 탈농인구는 연평균 30만명을 웃돌았다. 결국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전통적 농촌을 해체하여 산업자본 체제에 수직계열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전통농촌이 해체되어 시장경제로 편입되는 것은 근대화를 경험한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마치 군사작전을 수행하듯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단기간에 농촌공동체를 완전히 공중분해해 버렸다는 데 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겨울 어느 날, 전국의 농촌마을에 시멘트 335부대씩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시멘트, 분가루처럼 보드라운 이 회색가루가 오랜 세월 자연 속에 파묻혀 살던 대한민국 농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농민들이 공으로 생긴 이 시멘트 가루에 흠뻑 매료되었다. 사용하기에 너무 간편하고 그 기능 또한 놀라왔다. 그로부터 십몇년 동안 전국의 농촌에는 시멘트 가루가 가실 날이 없었다. 초가지붕을 뜯어내어 시멘트 함석지붕을 얹고, 정취어린 돌담을 헐어내고 시멘트 블록담을 쌓고, 흙바람 벽을 부수고 시멘트 벽돌을 채워 넣고, 구불구불한 황톳길은 반듯하게 정비되어 ‘세멘공구리’로 덮어 버리고... 이렇게 해놓은 지금은 농총관광 사업을 한다고 다시 돌담을 쌓네, 황톳길을 만드네, 황토집을 짓네 하고 난리법석이다. 예전 방식을 되찮는 건 조은 일이지만 사람 없는 마을에 도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이 일이 드라마 세트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런 그렇고, 집과 마을을 온통 시멘트로 처발라놨으니 다른 구조물들도 그에 상응하는 재료로 바꾸어야 했다. 나무문이나 사립문은 철대문으로, 창틀은 알루미늄으로, 지붕과 칸막이는 칼라강판으로, 하수도는 플라스틱 관으로 모두 바꿨다. 집이 신식으로 바뀌었으니 집 안의 가구도 그에 맞추어 바꾸어야 했다. 오래된 가구들은 모두 부수어 아궁이로 들어가거나 골동품점으로 가고, 대신 싸구려 합판 또는 플라스틱 가구가 방안을 차지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시멘트 가루가 공짜로 나올 때는 얼씨구나 했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서 나는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누구나 손쉽게 집안을 고치고 치장하였건만 지금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정부가 실험실에서 만든 다수확 품종을 농민들에게 소개한 뒤(그것도 강제적으로) 농약과 비료, 농기계, 관개시설 등이 세트로 따라 들어간 것과 사정이 똑같다.
이렇게 농가경제가 상품관계로 전환되니 사람을 쓰는 것도 모두 일당으로 계산되기 시작했다. 농가인력이 풍부했던 시절에는 동네에 남아있던 두레나 품앗이를 이용하여 바쁜 농사철을 이겨냈지만 젊은 노동력이 다 빠져나간 뒤로는 사람을 사야 했다. 사람을 사고 기계를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농사일은 생존과 조화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경영으로 전환되었다. 이 역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박정희식 농촌 근대화의 특징은 지독한 ‘경제지상주의’에 있다. 돈이 되는 것은 집요하게 추구하고 돈이 안되는 것은 가차없이 버렸다.
그 결과 농업은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사업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이 대규모 시설농업이다. 대규모 시설농업은 박정희 사후의 일이라고 항변하겠지만, 이것 역시 박정희가 농촌에 적용한 경제지상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단언컨대 대한민국만큼 비닐하우스(비닐 멀칭을 포함하여)가 많은 곳은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경제 위주로 농촌문제를 접근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농촌의 교육이나 의료, 문화 부문이 소흘해져 젊은이들이 시골에서 기초적인 교육만 마치고 나면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면 다른 부분들도 자연히 활성화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산업화를 추구하는 한 그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만약 헛된 기대가 아니라면, 산업화로 인해 소외된 농민을 정권 차원에서 붙잡아 두기 위한 ‘고도의 공작’이라고 단정지울 수밖에 없다.
공동체 의식의 해체
‘헛된 기대’에서 출발했건 아니면 ‘계산된 정치공작’이었건, 어쨌든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을 정부 쪽으로 확실히 붙들어놓는 데 성공한다. 적어도 1998년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농촌은 영원한 여당편으로 보였다. 도시에는 빌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농촌은 갈수록 썰렁해져도 농민들은 한사코 정부 여당을 찍었다. 여기에는 두가지 비밀이 숨어있다. 첫째로 국가동원체제 아래서 기획된 새마을운동은 중앙정부에서 시골마을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마을 사업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실질적인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을공동체에서 전통적으로 어른 역할을 하던 구세대가 물러나고 친정부적인 신세대가 새로운 주도세력이 되었음을 뜻한다.
정부는 운동을 효과적으로 촉진하기 위해 마을과 마을, 개인과 개인을 경쟁관계 속에 몰아놓고 지시대로 잘 따르는 사람(마을)에게는 푸짐한 지원과 명예를 주고 그렇지 않은 쪽은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방법을 썼다. 예를 들어 당시에 정부가 권장하는 다수확 벼인 통일벼를 심지 않는 농가는 관리들에 의해 유형무형의 괴롭힘을 당했는데, 심지어는 전통 벼 종자를 심은 논에 관리들이 들어가 발로 짓밟았다는 증언도 있다. 이것은 박정희가 재벌을 키우는 과정에서 썼던 ‘선택과 배제’의 방법과 똑같다. 말 잘 듣는 기업은 팍팍 밀어주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세무조사나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지금은 재벌들이 다 그 무렵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큰 것이다. 물론 재벌 당사자들은 박정희의 성격을 역이용한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경쟁’과 ‘선택적 지원 및 배제’의 방법은 농촌공동체의 상부상조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시켜 버렸으며, 새마을운동 조직을 통한 일방적인 사업진행은 농촌마을을 마치 정부 행정기관의 최하위 단위처럼 만들어 버렸다.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와의 오랜 갈등 끝에 정권을 잡고 나서도 새마을운동 조직을 폐지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이미 운동의 존립 여부와는 상관없이 체제내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민들을 사로잡은 두번째 비밀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이용한 일종의 최면술에 있다. 나는 새마을운동이 하나의 최면술이었다고 생각한다. 최면술에 걸린 사람은 최면술사가 하라는 대로 다 하지만 막상 최면에서 깨어나면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신개혁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새마을운동에서 벌였던 여러가지 환경개선 사업이나 경제활동 등은 정신개혁운동을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지만, 이를 두고 박정희가 “5천년 동안 잠자고 있던 농민들의 영혼을 일깨웠다”고 찬양한다. 박정희는 농촌의 낙후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기보다 농민들의 나태와 정신적 해이에서 찾았다. 아니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정신력으로서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그가 일제치하에서 배운 군인정신 또는 가미카제 정신에 힘있는 바 크다. 정신력만 살아있다면 작은 섬나라가 광할한 중국대륙도 지배할 수 있고 드넓은 태평양도 내 집 마당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으로 내세운 것은 “근면, 자조, 협동”이다. 스스로 잘살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며, 서로 협력하면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단어들 역시 박정희의 작품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이 일제시대의 농총진흥운동과 닮았듯이 표어 역시 그대로 빼박았다.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면서 내건 표어는 “근검, 자립, 협동”이었다. 한자어 두개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
표어가 같다고 해서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일제나 박정희나 이러한 표어를 내걸고 운동을 하게 된 진정성과 그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를 묻고 싣은 것이다. 일제 역시 당시 농촌의 피폐를 자신들이 저지른 식민지 초과수탈이 아니라 농민들의 나태에 원인이 있다며 그러한 정신개혁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후 전개된 상황도 새마을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와 같은 ‘중견인물’을 두었고 잘 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장과 함께 지원금을 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집중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농총이 활성화되는 듯이 보이지만, 외부적 원인에 의해 정치상황이 바뀌면 그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는 동시에 농민들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은 시작된 지 10년 만에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중단되었고, 새마을운동 역시 10년 만에 발의자인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명무실한 관변운동으로 변질되고 만다.
문제의 초점은 “과연 이러한 운동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 속에 근면, 자조, 협동의 가치관이 내면화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농민들이 나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과외의 소득이 없는 한 근면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가 말하는 나태는 어쩌면 농한기 때의 농민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장경제에 의한 초과수탈이 아니라면 농민이 농한기에 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면 자조와 협동은 또 어떤가. 원래의 농촌공동체는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소 우주였으며 그 안에서 협동과 배려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그런데 그런 덕목들이 발휘될 수 있는 물적 토대들을 모조리 파괴한 뒤 삭막한 시장경제 속에 농민들을 내던져 놓고 근면, 자조, 협동하라고 윽박지르니 이게 과연 되겠는가 말이다. 말로는 협동을 외치면서 농민들의 의존심만 키워놓았다. 내무부는 기초단계, 자조단계, 자립단계로 등급을 나누어 성과에 따라 자립마을이 몇년 사이에 몇개로 늘어났다느니 하고 통계수치를 내놓았지만(그것도 마을 기반시설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이라곤 없는 빚더미 마을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농산물 수입이 전면 개방된 오늘날에는 직불제다 뭐다 해서 농촌에 대한 보조금 지급2이 더욱 확대되어 생활은 그러저럭 유지될지는 몰라도 생산의욕은 더욱 떨어진 상태이다. 아니 생산의욕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건 내 손에 돈만 들어오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 문제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들어선 시장경제체제 아래에서 “근면, 자조, 협동”은 농민들의 심성을 장사꾼의 그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박정희의 최면술에서 깨어난 농민들이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이다.
의식의 해체와 더불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역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공무원과 교사들의 이중적인 의식이다. 이들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거의 새마을운동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공무원들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설득했고, 교사들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새마을운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얘기할 때 이 분들의 기여와 노고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들은 간섭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70년대에는 그 비율이 높지 않았겠지만 이들의 이농율은 농민의 그것보다 몇배가 높다. 오늘날 시골지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공무원과 교사들은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농촌이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공간의 해체
언젠가 한 일간신문에 “도로가 농촌파괴의 주범”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 제목을 멋대로 바꾸어 버렸다. 아마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도로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는 마당에 너무 과격한 제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한민국 농촌해체의 1등 공신은 도로이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공무원과 교사의 대부분이 인근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도 다 도로의 발달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시골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숙원사업을 대라고 하면 먼저 도로건설을 요구한다. 농민들이 보기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도시에 있으니 그것들을 조달하려면 도로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생긴 뒤에는 도로를 통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가 서울이 아닌 군산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가 만경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그곳에 제일 먼저 포장도로를 건샐했던 것이다. 도로는 말하자면 도시에서 농촌에 꽂아놓은 ‘빨대’와 같다. 그 길을 통해 땀흘려 가꾼 농산물이 헐값에 팔려나가고, 젊은이들이 도시의 불빛을 향해 고향을 등졌던 것이다. 도로가 없다고 해서 탈농 인구를 막을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농촌이 해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 차원에서 보더라도 도로는 공촌공동체 해체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야트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마을길이 일직선으로 고쳐지면서 마을공동체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먼저 미학적 차원에서 이것은 도무지 비교가 안된다. 시멘트로 말끔하게 구획 정리된 마을길은 농촌마을을 마치 도시 변두리의 재개발지구처럼 만들어 놓았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아련한 고향의 이미지는 영원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심리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옛 마을길의 구부러진 공간은 사람들의 감정을 한 박자 늦춰주는 역할을 하였다. 건너편 김서방에게 화가 나서 한 마디 하러 가다가도 구부러진 공간에서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그 구비마다 주민들의 회로애락이 서려 있음으로 해서 마을 전체의 정서적 네트워크가 마을길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톳길 가장자리에 돋아난 풀과 돌멩이는 그곳이 비록 사람들만 모여 사는 마을일지라도 자연생태계의 일부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다시 말해 구부러진 황토 마을길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공생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길을 넓히고 직선포장도로를 놓음으로써 자연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더 멀어져 갔다. 안전 차원에서 직선길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제 더이상 시골 골목길은 아이들마저도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자동차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드나들기 때문이다. 마을길로 자동차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바람에 마을 어귀에 있던 조그만 구멍가게나주막집, 식당 등도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기능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 그곳에서 마을사람을은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아 마을의 이런저런 정보들을 주고받았으나 이제는 빈번한 차량통행으로 인해 그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농업생태계의 해체
새마을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도입된 ‘녹색혁명’은 농업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해체해 버렸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나라의 논밭에는 인분이 주요 거름으로 쓰였다. 그러나 다수확을 위한 화학농법이 소개됨으로써 인분은 더이상 논밭으로 가질 않고 정화조를 거쳐 하천으로 흘러들거나 다른 지역에 투기된다. 생태계의 순환 싸이클이 끊어진 것이다. 해마다 봄철이 되어 농협창고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비료포대와 농약상자를 보면 절로 탄식이 나온다. 저 많은 것들을 대지의 가슴팍에 다 쏟아부어야 한다니...
인류학자 전경수 교수는 《환경친화의 인류학》이란 책에서 전통농업의 순환체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재배된 곡식으로부터 사람들은 식량을 얻고, 사람들이 못 먹는 식물의 부분들은 가축에게 분배되며, 가축이 먹지 못하는 부분들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연료로 이용되고, 사람의 몸에서 발생된 분뇨는 가축의 먹이로 전환되고, 사람의 분뇨를 식량으로 먹은 돼지의 분뇨는 일정 기간 동안 발효된 후에 식물이 ‘먹을’ 거름으로 전환된다. 사람이 직접적으로 먹지 못하는 식물 부분들과 사람의 분뇨를 식량으로 먹은 돼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비롯한 양질의 영양소를 공급한다.” 농업생태계의 해체는 환경오염과 함께 생물종 다양성의 현저한 감소를 불러와, 오늘날 자동차 배기가스와 함께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전통문화의 해체
밀어붙이기식 농촌근대화운동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 가운데 하나는 정통문화의 파괴이다. 부국강병의 제국주의 문화에 푹 빠져 있던 박정희에게 ‘전통’이란 근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빨리 근대화를 앞당겨 북한을 멀리 제쳐놓고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지금이야 농촌관광 어쩌구 하면서 건통문화를 되살리느라고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통문화는 돈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피폐한 농촌의 상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가 구테타를 일으킨 지 3년 후에 시인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면서 “제3 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펼치면서 이 땅에 박혀 있던 “거대한 뿌리”들을 무수히 뽑아버렸다.
혹독했던 식민지 시절을 거쳐 겨우 살아남아 있던 동제와 마을굿, 서낭당, 사당, 장승, 세시풍습 등이 한순간에 없어졌다. 동구 밖 산등성이를 닮은 초가지붕도 모두 웃긋불긋한 함석지붕으로 바꿔버렸다. 요즘 시골 건재상에 가서 지붕재료를 찾으면 주황과 파랑 두가지 색밖에 없다. 다른 색깔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는다. 농민들이 그 색만 찾는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멀리서도 눈에 확 띄어 좋단다. 자연과의 조화를 깨뜨려서라도 퉈어보고 싶은 과시욕이 어느덧 골수에 박혀버린 것이다. 이 과시욕이야말로 새마을운동 이후 우리나라 공촌경관을 근본적으로 망쳐놓은 주범이다. 문화전통과 자연으로부터 생성된 미학을 내던지고 무조건 남의 눈에 잘 띄는 것이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자화자찬을 일삼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에서도 자기네 홈페이지에 “실적 위주의 사업 관행은 장기적 배려 없이 환경을 파괴해 버리거나 근대화란 이름 아래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무단히 폄하하고 폐기해 버리는 문제를 낳기도 하였습니다.”라고 자성의 글을 올려놓았겠는가.
- 전통이란 그것이 아무리 허술하고 누추하게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만년에 걸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문화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마치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데 변화된 사회환경에 잘 맞지 않는다고 하여 함부로 내버렸다가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면 돌아갈 데가 없지 않는가! 외부의 충격에 의해 변화가 불가피하더라도 전통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어떻게 변용시켜야 할지 충분한 연구와 고민을 해야 한다.
농업에 대한 무지와 산업화의 욕망
이제 정리 좀 해보자. 나는 농촌공동체 해체의 원인을 모조리 새마을운동에 뒤집어씌울의도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급속한 산업화에 있다. 새마을운동은 그 산업화를 측면에서 도와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시도된 운동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농촌이 진짜로 잘살게 되어 성공이라는 말이 아니라,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기에 성공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새마을운동은 급속한 산업화를 차질 없이 달성하기 위한 보조수단이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이 정도일 것이다.
진정으로 농촌과 농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달리 접근해야 했다.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벌인 이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일제의 진짜 목적은 전쟁의 수행과 농민통제에 있었지 한국농촌의 부흥에 있었던 게 아닌 것처럼 박정희의 진짜 의도도 ‘산업화’라고 하는 ‘경제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있었지 농민이 잘살고 못살고는 부차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 다만 일제와 박정희의 달랐던 점은 박정희는 ‘순진하게도’ 그런 방식으로 하면 진짜로 농촌이 잘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 착각은 식민지 권력을 ‘원주민’이 잡으면 국부가 고스란히 자국민에게 분배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산업화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하위체계의 하나로서 이루어지며, 그 성패는 어떻게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익을 상위체제로 유출시키느냐에 달려있다. 그만큼 갖다바쳐야 하위체계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농업이 아 하위체계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농업은 퍼주기만 할 뿐 위에서 새로 들어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산업화 과정에서 해체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농촌부흥을 산업화의 논리로 접근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박정희의 열정을 생각하면, 농민을 기만하기 위해 그 일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몰락하는 농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진행중인 산업화에도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농업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일제의 그것이었으며, 일본이 전후에도 짱짱하게 잘 나가는 한, 자신의 시도가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박정희의 농업문제에 대한 무지와 산업화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새마을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농촌파괴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진정으로 농민을 사랑했다는 사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무지한 아버지가 자식을 만들기 위해 매를 들었다가 아이가 자폐증에 걸려버린 것과 비슷하다. 공동체 사회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보는 새마을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가장 심각하고도 비극적인 재앙이었다. 애초부터 새마을운동은 농민주체의 자주적 운동이 아니라 ‘낙후된’ 농촌현실을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위로부터 강요된 운동이었다. 그 결과 반만년 동안 누누히 지켜왔던 우리의 전통문화와 촌락공동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문화의 해체는 마음의 해체이며 두고두고 돌아가야 할 우리 얼의 해체이다.
이를 두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그의 책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단군 이래 미증유의 대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단재의 말투를 흉내내고 있지만 단재의 민족사관에 빗대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사를 마을의 관점[이제론里制論]에서 파악하고 있는 그로서는 한순간에 마을을 해체해 버린 박정희의 만용이야말로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의 단절’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새마을운동의 잘못된 성과를 부풀려 마치 새로운 외화획득의 수단인 양 외국에 수출하려는 대한민국의 관리들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을 조용히 접기를 간곡히 권유한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망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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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 글
참고 자료
글을 읽으며 생각난 책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