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1999년 5-6월 통권 제 46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5년 6월 10일, 직지지기 김민수.
글쓴이: 윤선영1
Contents
들어가는 말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94년 8년 만에 돌아온 나는 한국사회에 대해서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 동안 내가 한국인이란 것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외국생활을 통해 비로소 한국의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고, 세월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 만큼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후 1999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규칙적으로 독일을 드나들며 독일과 한국의 이중적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일과 두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해야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한국의 모습은 텔레비전 광고였다. 아빠들은 직장에서 '뼈빠지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피로회복제를 복용해야 하고, 자녀들은 학교공부와 입시준비를 위해 유아기 때부터 각종 학습지를 해야 하며, 주부들은 빨래를 깨끗이 빨고 맛있는 음식을 끓여 남편과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데 행복감을 느껴야 하고, 젊은 여성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화장품과 유행패션을 소비해야 한다. 영유아, 초등, 중등, 고등학생의 소비문화가 점점 비대해져 기성 세대들은 도저히 무슨 물건을 선전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광고도 있다. 광고는 시대의 변화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신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넘어 시민의 구매력을 자극하고 중독 시키며 어느새 우리 마음, 생활, 언어, 사고방식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학교시절 분명히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 배웠는데,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남의 발을 밟거나 차례를 지키지 않고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온갖 공갈과 협박으로 성인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기를 업고, 높은 시내버스의 계단을 버스가 발차하는 순간에 곡예 하듯 타야 하고, 길거리는 온통 자동차 위주로 구성되어 유모차에 아기를 싣고 다니다 보면 갑자기 인도가 끊어지거나 곳곳이 패이고 울퉁불퉁하여 아기가 행여 유모차의 진동으로 뇌진탕이라도 걸릴까 조마조마 하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면 그들은 아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물컵도 수저도 따로 주지 않는다.
나는 새삼스럽게,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분노를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들(특히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꼽을 만큼 높다는 모순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만큼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 있는'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편협한 교육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부유층이든 저소득층이든 가정경제의 형편과 무관하게, 대부분의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최소한 2개 이상의 학원에 다니며 각종 예능, 수학, 외국어 등을 배우고 1개 이상의 학습지를 하고 있다. 마치 이렇게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이 부모 된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거대한 상업적 교육풍토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에 대항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행위로서 사회에서 버터내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린 자녀들이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는 사회, 어린이들에게 호의적인 사회를 만드는 어른들의 삶이 모범이 되고 자녀교육의 기본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슈타이너의 교육론에 입각한 발도르프학교의 영유아 교육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슈타이너와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20세기 중반까지는 '유전적인 결정체'와 '환경의 산물'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이 두 가지 견해가 인간의 자유, 책임의식, 존엄성을 부인하고 부분적인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 변화하며 나아가는 존재라는 새로운 인지학적 존재론을 주장하였다. 인간은 대지로부터 만들어진 육체적인 기초에 정신적 · 영혼적 실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이중적 존재이고 생을 통해 네 번의 육체적, 생명체적, 감성체적 자아의 탄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인간으로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7년 단위로 나누어 0-7세까지는 육체적 탄생과 더불어 행위를 통해서 사고하고 모방을 통해서 배우는 시기, 7-14세까지는 그림을 통해서 생각하고 느낌을 통해서 학습하는 시기라고 하였고, 14세에서 21세 사이의 청소년 시기에는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며 지성을 통해서 사고하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21세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 감성, 이성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가 탄생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아동은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바로 이 과정을 돕는 것인 교육이라는 것이다. 즉 아동을 교육구상에 맞추기보다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바탕으로 교육의 내용과 형식이 구성되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유아의 교육과정인 0-7세까지의 물리적 육체의 탄생 시기를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영유아에게 있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이다. 온몸으로 맛을 보고 느끼며, 자신과 행위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시기이므로 의지가 강한 시기이다. 예를 들어 영아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빼앗아버리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곧 행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유아로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과 타인 또는 세상과의 관계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하나씩 익히고 실험하고 확인하는 행위를 다양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지구의 중력에 대해 나약했던 영아는 점차 자주적 힘이 생겨 생후 1년이 지나면 혼자 서기를 시작하고 2년 정도 되면 언어구사능력이 생긴다. 유아의 존재는 온전한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언어습득은 자신의 몸(성대)에 새기듯이 이루어지며, 언어의 본질적인 형성원칙에 대한 본능적인 일체감을 형성하여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성인이 외국어를 배울 때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생산해내는 것과는 달리 유아는 상황 전체를 신체로 느끼면서 언어를 익히는 것이다.
4개월에서 12개월 사이에 영아가 낮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은 '나'와 '세상', '나'와 '너'(부모 및 양육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원초적 신뢰감이 형성된다. 이때 원초적 신뢰감이 잘 형성되지 않으면 분리불안과 정서적 장애를 초래하기 쉽다. 이것은 영아뿐 아니라 유아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은 보육시설이나 유치원에 영유아를 처음 보낼 때 충분한 적응시간을 두어 새로운 환경과 관계자와의 신뢰감이 형성되게 하지 않고 첫날부터 아이를 떼어놓는데, 이것은 지극히 성인 중심이 며 교육기관의 무책임한 대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사탕을 입에 넣어주거나 엄마가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등의 거짓말도 일삼아 아이와 성인간에 불신감을 키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보(교)육기관과 아이를 맡길 부모는 적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2-4세 사이 유아는 종종 부모의 말에 무조건 '싫어'라는 부정의 표현을 유난히 많이 쓸 때가 있다. 이것은 그 아이가 특별히 '성격이 모난 아이'여서가 아니다. 이는 주로 자신과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확인하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자기자신('나')의 본질로 체험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 시기를 슈타이너는 인간성장의 첫 '위기'라고 표현하였다. (참고로 인간은 그밖에도 아동의 위기(9-10세), 청소년의 위기(16-17세), 중년의 위기, 노년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생후 3-4년이 되면 그 동안 무조건적인 모방을 하거나 타인의 '옆에서' 놀이를 하다가 점차 타인과 '함께' 역할놀이와 같은 사회적 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특히 조형적인 놀이를 하는 시기로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자신이 체험하는 그 순간에 유효한 놀이규칙을 만들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밥을 먹으면서 수저가 굴삭기가 되어 모래를 퍼 나르는 작업을 상상하는 것은 그 어린이가 그 순간에 나름대로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슈타이너는 인간이 가진 진정한 자유라 하였다.
생후 4-5년이 되면 어린이들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또한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 가끔 어른을 당황하게 한다. 이때 어른은 성실하게 대답해주되 어린이의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어머니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녀온 자녀에게 "오늘 무슨 공부를 했니?" 하고 물을 때가 많다. 그때 어린이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알거나 "누구와 놀았어"라고 대답하면 "도대체 저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는가" 하며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낮에 불렀던 노래와 들은 동화를 혼자서 놀이를 하며 재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어린이의 관심이 금방 다른 데로 가는 것은 어른이 성인의 경험세계에서 끌어온 개념을 어린이들과의 대화에 적용시켰을 때 종종 일어난다. 어린이들에게는 공부, 놀이, 일, 시간, 거짓말, 진실이라는 개념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5세에서 7세 시기의 유아에게는 아주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많은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학교공부 준비에 조바심을 낸다. 유아의 그림은 보다 사실화되어가고, 사물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며, 단체생활이나 어른의 일에 참여하고자 한다. 이때 어른은 조금씩 과제를 주어 자신이 해낸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갖게 하되, 정확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는 것은 오히려 어린이의 흥미를 저하시키게 되므로 자제해야 한다.
읽기, 쓰기, 셈하기에 대한 관심에도 이러한 대응방법은 유효하다. 너무 일찍 기억력과 사고력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학교와 같은 공부'를 유도하면 생명체의 탄생을 '조산'시키게 되므로(슈타이너) 0-7세 사이에 발달되어야 할 행동력과 의지력이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태동을 느낀다고 하여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뱃속의 태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력이 태동한다 하여 기억력을 요구하는 세상으로 어린이를 빨리 밀어내는 것과 같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충분히 자라고 세상에 나와야 건강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영유아기에 의지력과 행위력이 충분히 발달하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 원천적인 힘을 부여하게 되므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광고 이야기를 덧붙이겠다. 모 학습지를 이용하여 어린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면 3세의 어린이도 한글을 깨칠 수 있다는 광고가 있는데, 거기에서 한 어린이가 신문을 읽다가 "엄마, 청와대가 어디예요?"라는 질문을 한다. 그 어린이가 진짜 한글을 깨쳤느냐는 것보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린이의 질문이다. 왜 "청와대가 뭐예요?"라고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린이가 청와대가 건물이며 어떤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이러한 광고를 보고 그 교재를 사용해 자녀에게 똑같이 '조기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이 두렵기만 하다.
이 시기에 또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유아의 '반항'이다. 그 동안 인정하고 따라왔던 부모나 단체생활의 규칙을 어겨보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슈타이너는 규칙으로 되어있는 것을 어른이 정말 진지하게 바라고 있는 것인지 어린이가 정확히 알고자 하는 행위라 했다. 즉, 어린이가 어른을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경우는 자신의 의지(행위)와 사고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어린이들은 도덕과 규범을 익히게 된다. 많은 부모나 교사들이 이럴 때 어린이와 은밀한 전쟁상황을 연출하며 체벌, 협박, 어린이와의 감정적 대립 등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란이의 사고와 행위의 일체성 형성을 돕기 위해 일관성 있는 반응을 보이고 그것을 똑같이 어른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를 나는 한국에서 종종 경험한다.
한 어린이가 어린이집 선생님을 좋아해서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대에 응할 수 없었는데, 아이의 간절한 소망 때문인지 "그래, 이따가 갈게" 하고 가볍게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고는 가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는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을 자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실망감은 온 엄마에게로 넘어가 울고불고 하였다. 다음날 그 아이가 왜 안 오셨느냐고 물었을 때 교사가 하는 말은 "내가 가봤더니 니가 벌써 잠들어서 그냥 왔다"라는 것이었다. 거짓말로 난처한 상황을 모면했지만, 그러한 자세로 어떻게 어린이들을 윤리적 인간으로 키워나갈 수 있을까?
발도르프 유치원 교육
발도르프 유치원에서의 교육은 슈타이너의 인지학적인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영유아기는 모방과 행위를 통해 배우며, '나'와 '타인'과의 신뢰감,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이다. 앞으로의 삶의 토대가 되는 정서적 안정감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영유아의 시간적 생활리듬과 정돈된 공간적 질서는 매우 중요한 교육적 환경이 된다. 시간적 리듬이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자극이 내적으로 몰입 되는 활동(교사가 제공하는 교육활동)과 영유아의 내적인 의지와 상상력이 외부로 발산되는 자유놀이가 교대로 이루어져 신체의 피부기능과 유사한 '영적인 피부'의 호흡작용을 균등하게 조절해주는 것인데, 이것이 하루의 일과가 된다.
하루 일과에서 뿐만 아니라 일주일, 한달, 계절, 일년의 단위에서도 규칙적인 반복에 의한 리듬은 영유아의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성인의 '볼일'에 맞추어 밤늦게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거나, 영유아 시설에 아무때나 데려가고 데려오는, 또는 적응하는 동안 보냈다 안 보냈다 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나라의 부모들에게 영유아기의 반복적 리듬의 중요성을 꼭 인식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리듬은 슈타이너가 인간의 유기체를 세가지 감각기관으로 나누어 분석한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첫번째는 '감각적 신경조직'으로 인간의 머리로부터 신체의 말단부분까지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종합적 유기체를 의미하며, 두번째는 '리듬적 조직체'로 숨쉬기나 혈액순환과 밀접한 판계가 있는 것이고, 세번째는 '신진대사 작용체'로서 주로 신체 중 손발과 관계가 있다. '감각적 신경조직'은 사고행위에 영향을 주게 되므로 청소년(14-21세) 또는 성인에 해당되는 것이며, '리듬적 조직체'는 느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7-14세의 아동발달과 관련이 있고, '신진대사 작용체'는 영유아(0-7세)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간단히 표현하면 감각은 곧 인간의 사고, 느낌, 의지와 관련하여 사물을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것을 다시 세분화하여 각각 4개씩의 '하위감각', '중간감각', '상위감각'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발도르프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영유아기의 '의지감각기능'에 해당하는 '하위감각'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겠다.
'하위감각'은 인간 고유의 물리적 육체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활감각 또는 생명력감각', '평행감각 또는 방향감각', '촉각', '자신의 동작감각'으로 나누어진다.
'생활감각 또는 생명력감각'은 간, 비장, 심장 등과 같은 각각의 육체기관이 감각기관으로 작용하여 피곤함, 배고픔, 배부름, 갈증, 기운참 등을 느끼게 한다. 또한 '시간감각'과 인과관계가 있어 적당한 시간에 영양분을 섭취하여 육체의 기관이 생명력감각의 기능을 도와야 한다. '평행감각 또는 방향감각'이 귀와 눈의 구조에서 작용한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슈타이너는 이에 덧붙여 수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흔히 특별한 뇌의 구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논리적 사고의 근원은 공간의 세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귀의 세가지 반고리관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적 재능은 이러한 방향감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촉각'은 사물을 만져봄으로써 나(영유아)의 신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느낄 수 있으며 열에 대한 감각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의 동작감각'은 움직임을 통해 신체의 존재를 경험하게 해준다. 모든 신체의 움직임은 각기 구별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동작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되, 특히 '시감각'과 함께 작용한다.
어린이의 의지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의지감각'을 키워주어야 하고, 인식감각이 건강하게 발달하도록 하려면 위에서 언급찬 건강한 '하위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육학적인 의미로 '의지감각'은 신체를 인식하게 하고 일상적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나 '하위감각'은 무의식에 머물며 생활의 느낌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곧 어린이에게 편안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슈타이너는 어린이가 춤을 추거나 뛰거나 움직일 때 인간의 동작감각이 발산되면서 동시에 이러한 느낌이 영적인 세계로 스며드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스러운 영혼의 느낌이라 하였다. '평형감각'은 내(유아)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든 오늘이나 내일이나 나의 신체는 그대로라는 내적인 평온함을 유지하게 하여 미래의 삶에 영적 평형을 잃지 않게 해준다.
'촉각'은 자연물을 만져보았을 때 놀라운 느낌의 효과를 준다. 그것은 양털, 비단, 동물의 털을 쓰다듬고, 나뭇가지나 장미꽃의 꽃잎을 만져볼 때 바로 신이 창조한 근원적 효과를 경험하기 때문이고, 무의식적으로 유아의 영적인 삶이 촉감의 느낌으로 풍만해지기 때문이다. 발도르프 유치원에 있는 놀잇감들이 플라스틱이나 놀이의 기능이 이미 결정된 화학품들이 아닌, 조개, 밤, 돌, 나뭇가지, 헝겊, 널빤지, 끈이나 줄 등의 자연물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컴퓨터, 텔레비전, 비디오, 각종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채워진 우리나라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환경을 볼 때 어린이에게 종교적 숭고함과 영혼의 평온함을 줄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한번쫌 재고해볼 일이다.
오늘날 기술의 '폭력'과 환경손상으로부터 어린이다운 삶을 보존하고 보호해야 된다는 것은, 베를린에 텔레비전에 의해 병이 든 어린이 병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입증해주고 있다. 따라서 '의지감각'을 길러준다는 것은 치료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 어린이의 미래를 위한 교육의 과제는 고도로 발달되어가는 문명생활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에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명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자신의 동작감각'은 바로 이러한 힘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린이가 노래를 동반한 윤무를 할 때나 줄넘기를 할 때, 우리는 노래의 의미와 관계없이 어린이가 리듬을 통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고 있으며, 영혼의 리듬과 전 육체가 하나가 되어 동시에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줄넘기를 하고 있는 어린이에게는 이때 네 가지 '의지감각'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느낌의 삶이 즐거운 방법으로 불러일으켜지고 있다. 그 어린이는 행복한 평온함, 흥미, 자유의 느낌, 내적 안정감을 강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가 어린이들에게는 가장 높은 수준의 '학교'가 되는 것이라고 슈타이너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지감각'이 잘 발달되면 학교에 갈 준비가 될 수 있으며, 학교에서도 또한 이러한 의지감각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일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도르프 유치원의 교육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영유아기 시기에 중요한 '의지감각'에 대해서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부모나 유아교육기관의 교사들이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배경을 도외시한 채, 주로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 표면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의미 없는 모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영유아기의 발달특성에 따라 몇 가지 예를 들어 좀더 구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발도르프 유아교육 중 내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동화 들려주기, 노래나 동화를 동반한 윤무, 인형극, 그리고 자유 놀이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어린이들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같은, 이야기의 스토리와 그림을 동시에 보여주는 매체를 통하여 동화를 접한다. 발도르프 유치원에서는 동화를 책이나 그림으로 직접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스토리에 맞게 정해진 그림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동화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참으로 신비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동화에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현실세계를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선과 악(영웅과 악인 또는 선함과 잔인함 등), 지상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 슬픔과 기쁨 등의 양극이 등장한다. 동화는 동화 자체로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므로 어른이 동화가 주는 교훈을 일러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동화는 어린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어린이들은 동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동화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동화가 주는 의미를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어린이들이 세상과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른은 이성적 논리적 사고로 동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동화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려면 어른이 먼저 동화의 원리를 이해하고 동화의 인물을 진정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동화는 살아서 어린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동화는 대체로 반복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기호에 맞는 운율, 시간과 공간의 초월, 현실과 비현실이 일치된 세계, 시작과 끝이 전형적인 유형(옛날 옛날 옛적에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주인공이 처한 고립성(이것은 어린이들이 혼자서 스스로 해보고 싶어하는 욕구와 일치한다)과 열악한 환경(동화의 세계에서 공감은 항상 가장 가난하고 바보스러운 인물에게로 향한다)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1주일간 계속 들려주어도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항상 새롭게 발휘된다.
노래나 동화를 동반한 윤무(Reigenspiel)는 어린이들이 신체, 언어, 동작, 느낌, 표현을 통합적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노래는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요소가 된다. 느린 노래에 신체의 움직임을 동반하면 음의 높낮이를 신체와 일체시킬 수 있게 된다. 어조를 신체로 표현하게 하여 균형 있는 발달을 촉진하고 치료의 역할도 할 수 있는 오이르튀미(Eurthymie)를 첨가할 수도 있다.
노래의 음은 펜타토닉(5음계)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어린이들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음이기 때문이며, 악기는 '라이어'라는 현악기를 주로 사용한다. 라이어의 음에 어린이들이 몰두하게 되면 조용히 듣고 집중하는 능력이 촉진되고, 생명의 리듬감이 건전하게 성장한다. 발도르프 유치원을 방문하여 윤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감각과 리듬, 언어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이 하나로 집중되고 있는 광경에 마치 하나의 종교적 의식을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유치원에서 커다란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어린이들이 소리를 높여 노래를 외우듯이 부르는 산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지난 겨울 나는 현직교사의 발도르프 교육을 위한 보수교육 현장을 방문해 인형극을 배우는 수업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인형은 단순한 얼굴과 상징적인 옷차림으로 간단히 만들어졌으며, 재료는 물론 천연섬유로서 양털과 같은 실로 짜여진 것이었다. 인형의 얼굴이 구체적인 표정으로 악인과 선인이라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전달하지 않고 단순한 모습을 띠고 있는 이유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에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슈타이너는 성인이 연극에서 악인 역할을 할 때에도 연기자 스스로 악인이 되어 연기하는 것보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천 조각들은 모두 파스텔톤의 은은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 이유는 빨강, 노랑 등의 원색이 어린이들을 흥분시키고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란다. 마침 '탁자인형극'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는데, 탁자는 동화의 내용에 맞게 천을 이용하여 만든 인형, 산, 나무, 강, 목동, 폭포 등으로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교사들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형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인형들의 움직임은 아주 느렸는데, 상징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란다. 인형극을 연출하는 모든 교사들의 태도는 너무도 진지하여 장면 하나하나가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진지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자유놀이는 어린이의 '영적인 피부'의 호흡작용 중 내적 세계에서 외적 세계로 의지가 발산되는 과정이다.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를 실험해보고, 자신의 의지를 행위로 옮기며, 어른의 교육적 영향에 따른 결과와는 전혀 다른 어린이 스스로의 교육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자유놀이 때 가급적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놀잇감은 생동감 있는 실제적인 물건들이, 어떤 원리와 기능을 요구하는 놀잇감보다 적당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유놀이란 어린이의 전체적인(통합적인)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교사가 제공하는 집단활동이 외부의 세계를 내부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라면, 자유놀이는 내부의 세계를 외부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어린이가 내적 세계에 설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발도르프 유아교육의 특성은 기억력을 강요하는 '조기학습'을 멀리하고, 예술적으로 자극하여 놀이를 하게 함으로써 어린이 고유의 본질을 자유롭게 이끌어내어 주고, 육체적 탄생 즉, 의지력과 행위력을 성숙 강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학교에 가서 더욱 집중을 잘 할 수 있고 학습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앞으로의 삶에서 요구되는 힘과 건강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 녹색평론 1999년 5-6월, 통권 46호 26~3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