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2003년 7-8월 통권 제71호에 실린 글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박사과장에 다니고 있는 배수찬 님이 쓰신 것 입니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습니다.
"사람을 살려서는 뭘 하자는 건가?" - 이오덕 선생을 만나고
- 배수찬 - 서울대 국어교육과 박사과정 재학중
지난 6월 6일 이오덕 선생님을 뵈러 충주의 선생님 댁에 선배 한 분과 함께 내려갔다 왔습니다. 저는 서울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박사과정에서 국문학과 국어교육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나이는 서른이니까, 이오덕 선생보다 꼬박 마흔 아홉 살이 적군요. 제가 석사과장에 다니던 시절에 IMF가 찾아왔고, 그때쯤 우연히 선생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IMF로 맥을 못추고 있던 제 마음에 이오덕 선생님은 여러가지로 놀라운 느낌을 주셨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오셨다는 평생의 이력, 그리고 그동안 쉬지 않고 아이들의 글쓰기를 지도하여 그 글을 책으로 묶어 내셨다는 것, 그리고 국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제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로 민감하신 말에 대한 의식, 10년을 국어만 연구한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리건대 이 땅에 사는 어느 누구보다 우리말과 글의 역사를 잘 꿰뚫고 계신 선생님의 지식과 체험. 이 모든 것들은 저를 놀라게 했고, 저는 책을 읽어나갈수록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연세를 생각해보니 칠순이 훨씬 지나셨기 때문에, 혹시 돌아가신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으나, 출판사를 통해 연락해 보았더니 건강이 좋지 않으실 뿐 시골에서 아드님과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이다 싶어 한번쯤 찾아가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일에 치여 하루하루 미루다가 겨우 지난 5월 말에 다시 선생님과 통화가 되어 뵙고 싶다는 뜻을 간곡하게 말씀드렸지요. 선생님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으셔서 지금은 아드님이 미는 바퀴의자를 타고 움직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찾아가서 오히려 선생님을 괴롭히는 것이나 아닐까 적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나마 스승으로 모시던 분을 찾아뵙고 싶다는 간곡한 마음이 선생님께 전해졌는지, 선생님께서는 얼굴도 모르는 저를 기꺼이 맞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날짜가 잡혔고,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6월 6일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흘쯤 전에 다시 한번 확인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6월 6일에 선생님의 옛 제자들도 찾아오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선생님께서 번잡하지 않으실까 염려를 하셨지만, 저는 그저 선생님을 한번 뵙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손자뻘인 제게 "그럼 오세요, 오세요" 하고 반갑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선생님께 고맙던지!
앞에서 제가 선생님을 짧게 소개했을 때, 우리말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서울대학 국문과 이기문 교수님이 <국어사개설>같은 책을 쓰셨으니 자료나 책에 대한 지식은 그 분이 더 많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말의 뿌리에 대해서, 우리말은 시골의 글을 배우지 못한 농부들의 입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체험으로 알고 계신 분은 제가 알기로 이오덕 선생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신념으로 평생을 가르치셨고요.
선생님은 거의 온 삶을 시골 아이들 가르치는 데 바쳐오신 분이라, 그 '아동문학'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책을 내셨죠. 그리고 글쓰기 교욕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국문학과 국어교육을 전공했던 저에게 늘 안타까웠던 것은 이른바 학계에서 선생님의 뜻과 마음씨, 그리고 그분이 쌓아올리신 지식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의식도 없이 글을 함부러 써내는 교수가 도리어 이오덕 샌생님이 대학을 나오시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그 분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면서, 저는 가슴 깊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모시는 스승이지만 어찌 보면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을 직접 뵙고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너무나 가슴이 설레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생님의 책 몇 권을 챙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같이 갈 선배님께도 한 권 읽어 보라고 드릴 책을 사러, 새로 생긴 교보문고 강남점에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새로 쓰신 글이 있길래 얼른 집어들어 샀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선생님의 최근 쇠약해진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많이 들어있었고, 그 누가 앞에서도 당당하시던 선생님께서 병 때문에 약해지신 것 같아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읽고는 서른 사내답지 않게 밤새 울었습니다. 같이 간 선배님도 이 시를 읽고 책 뒤에다 붙여 놓으셨더군요.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고양이 한 마리도 주워 오지 못했다.아이들을 살린다는 핑계
아이들을 어떻게 살렸나?사람을 살려서는 뭘 하자는 건가?
모든 것을 죽이고 스스로 죽고 말 사람을.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있나?
병아리 한 마리, 매미 한 마리 살리지 못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쓰라고 하신 선생님 당신의 가르침에 그대로 들어맞는 시였지만, 어쩌면 선생님께서 스스로 한평생을 잘못된 삶으로 부정해 버리시는 것 같이 느껴져서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던 저로서는 많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혹시 나이가 많이 드셔서 성품이 약해지신 것이 아닌가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선생님을 더욱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어린 손자처럼 선생님 앞에 앉아서, 선생님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죠. 선생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정말로 해방되기 전 우리말의 생생한 모습에 대해서, 그 농만들의 말이 우리말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런 책을 쓰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도 있고, 선생님의 당당한 모습에 살아갈 희망을 찾은 사람도 있다고. 그게 바로 저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부푼 마음으로 선배님과 함께 이오덕 선생님 댁을 찾아 서울에서 차를 빌어 운전해 갔습니다. 조금씩 비가 내렸고 사흘 연달아 쉬는 첫날이라 도로에는 차가 아주 많아서 예정했던 시간보다 한참을 늦었습니다. 아드님께서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건만 끝내 찾지 못하고 아드님을 근처까지 나오시게 하였죠.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계신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있는 사이에 끼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야의시어서, 정말 말씀이나 제대로 하실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동안 이곳저곳 병원을 다니시면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감자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책에서 보고 알았는데, 이제는 감자도 드실 수 없고,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 하더군요.
선생님께 제가 썼던 석사 학위논문을 드리고 사인도 받았습니다. 이야기가 이것 저것 나오고 제자분들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선배와 함께 선생님의 서재까지 들어가 이야기를 좀 더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이 놀이 같아야 하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건강하고 바른 마음씨를 갖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칼바람, 사람들의 돈 욕심, 도시문명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유나바머1만큼이나 과격하셨습니다. 다만 유나바머는 도시문명의 문제점을 공부해서 알게 된 것이라면, 선생님께서는 살아오시면서 스스로 깨치셨다는 것이 다를 뿐이겠죠. 돈 세상이 되어 미쳐버린 오늘날, 농촌에서도 다들 담배와 고추 같은 '도박 농사'나 지어 빚이 수천만원씩 되어 있지요. 도시에서는 먹고살기 위해서 필요없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굴욕을 느끼게 합니다. 그 대가로 돈을 벌어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선생님께선 그 늙으신 나이에도 차근차근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직업구조가 서비스 중심으로 되어 점점 상대방을 등쳐먹는 상태에 가까워져, 사람을 만날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는 오늘날의 상태는 누가 뭐래도 눈감을 수 없는 현실이죠. 뜻있는 이들이 시골로 내려가고 있기도 하고요. 미국의 소로가 그렇고, 니어링 부부가 그렇고, 우리나라에는 윤구병 선생님이 그렇고, 정일우 신부님, 장회익 선생님이 그러시죠. 그밖에도 많은 분들이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분들의 책을 읽었고, 정일우 신부님이 사시는 곳에도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도 농사짛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걱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선생님의 마음에 동감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면 땅은 있나? 그러면 자본주의는 둘째 치고라도 국방은 누가 하나? 컴퓨터는 누가 만드나? 그리고 도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서 농사를 버린 것은 아니지 않을가? 도시 밖의 삶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농사가 너무 힘들어서 농촌을 버린 사람도 있지 않는가? 혹시 생태주의나 귀농운동의 방향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이나 공상은 아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죠. 제가 아직 도시의 한 구석에서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때 마침 제 옆의 선배님이 선생님께 여쭙더군요. 마침 그 선배는 안동의 도산면 골짜기에서 태어난 분이라 어릴 적에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실제로 화전을 일구던 농사꾼이셨고요. 그래서 선배님이 선생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만오천평에서 농사를 지어 저희를 먹여살리시면서, 결국 너무나 힘들어 농사를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하러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울산으로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과 생각이 모두 옳지만, 농사일이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생각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제가 너무나 여쭙고 싶었던 것이었죠. 선생님은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느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대답이 더욱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이야기할 때에 늘 저는 이곳에서 막혔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그냥 꿈만을 이야기하시고, 힘든 농사지만 즐겁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저는 아마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오천평요? 너무 넓네요. 그렇게 넓은 땅을 경작해서 자식들 교육까지 시키려고 하니 힘들지요.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 먹고살 만큼의 농사는 누구나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교육을 시킬 돈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교육을 시켜 무엇합니까?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까?" 사실 교육에 드는 돈은 책 사 읽히는 돈이지요. 학원 보내는 돈이고. 그렇게 학원을 보내고 책을 사 읽혀 자라난 이 세대들은 지금 일자리가 없고, 겨우 얻은 일자리마져 굴욕감과 피로 속에서 다니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일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일인가 하는 확신이 없다는 점이죠.
우리 모두가 당장 지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도시에 퍼질러 앉아서 "먹고살려면 별 수 없지 않은가?" 하는 핑계가 선생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구요. 굳이 돈 필요하면 시골에서 돈벌 일 있다고. 품을 팔면 3만원은 벌 수 있다고 말이죠. 선생님은 생태운동가도 아니고 무슨 귀농운동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당장 농사지을 마음이 있고, 농사지으러 내려오는 사람이 옳다는 것뿐이죠. 유나바머처럼 세련되게 산업사회를 분석해서 기계를 때려부수려 한 것도 아니고, 무슨 귀농운동을 하며 도시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평생 교육자이셨건만, 그리고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하셨건만, 그리고 우리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건만, 저희 앞에서 국어나 교육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농촌을 걱정하셨고 일을 소중히 여기셨지요. 실제로 외아드님께서도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살계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음식을 잡숫지 못하여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도 저희에게 그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동안,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운전을 하며 돌아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답니다. 제가 처음에 소개했던 선생님의 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선생님이 힘이 약해지신 게 아닌가 하여 선생님을, 마치 제 할아버지께 그러는 것처럼 위로해 드리고 싶었는데, 선생님을 직접 뵈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약해지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아파하고 계시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몸에서 어떤 통증을 느끼고 계신 것보다 무엇을 잡숫지 못해 약해지셨던 것입니다. 정신이 약해지셨을 리가 없지요. 도리어 선생님의 모습을 뵙고 난 뒤 더욱 강해지라는 말씀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른바 학계에서 선생님을 인정해주지 않아, 학계에 오래 몸담은 제가 속상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학계에서 알려지는 것을 처음부터 바라고 계시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을 비난하던 이른바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들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이런 말씀이 떠올랐네요. "네가 나에게 한 욕을 나는 받지 않았으니, 모두 너에게 돌아갔다"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학계에서 무시당한다고 해서 제가 열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저는 선생님이 글을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찾아가 직접 뵈니 선생님은 글쓰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었고, 일하는 사람이면서도 정말 특별하게 말씀을 잘 하시고 글을 친절하고 엄밀하게 쓰는 재능을 갖추신 분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오로지 글쟁이의 삶만 살았던 저에게는 무척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작년에도 책을 내시고 거의 150쪽이 되는 논문을 새로이 쓰셨더군요. 그것도 한 젊은 평론가의 말놀음 같은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그분이 아까운 기력을 그런 곳에 쓰씨게 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그분에게 아직도 젊은이와 같은 힘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한편으로 행복하기도 합니다. 제 삶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아, 그래도 내가 아주 형편없는 나라 사람은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선생님을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맑은 품성으로 사람의 본디 모습, 일하는 모습, 일하면서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 Unabomber: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폭탄 테러범 '유나바머'를 기억할 것이다. 한때 버클리 대학 수학교수이기도 하였던 유나바머 존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 53)는 1978년 노스웨스턴대학의 한 공학박사를 상대로 폭탄테러를 시작한 이후 15번이나 계속된 폭탄테러로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입혔다. 그는 체포되기 전 유나바머 선언문(The Unabomber's Manifesto)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선언문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의 박탈하는 뉴 테크놀러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언하에 "현대 기술 산업사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박탈하며 자연을 파괴한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혁명뿐이다.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러지를 제거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이외에도 선언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선언문의 참고문헌 16번에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할 때는 다음 요약문으로 대체하라"라고 친절하게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이 테러범이 창작자의 권익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문화 발전을 위해서 이렇게 '친절한' 배려를 한 것일까? 카진스키는 이 선언문을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공개된다면 폭탄테러를 중지할 것이라고 정부와 타협하였고, 그 결과로 두 신문에 원문 그대로 공개하였다. 그는 폭탄테러를 무기로 자신의 주장을 뉴스위크지에 게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그의 주장을 펴기 위해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에 의해 자신의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저작권법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에게 있어 폭탄 테러 이상의 위력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사례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테러를 선택한 범죄자마저도 저작권법에 의해 자신의 표현이 제약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 http://ip.jinbo.net/digital/political.htm 에서 뽑음. 직지안/김민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