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통권 제 76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6년 2월 11일, 직지지기 김민수

우리는 지금 7년째 선이골에서 삶을 맞이하고 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우리 가족은 우리가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가를 물어왔다. 선이골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마워서 믿어지지 않기도 했고, 우리가 이곳에서 사는 의미를 좀더 깊게 느끼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1993년, 둘째 주목이를 임신했을 때 약국이 세들어 있던 건물이 헐려 새로 짓게 되었다. 새로 지어진 건물에서 다시 약국 문을 열었는데, 개업 신고 서류 중에 엑스레이 건강 기록이 빠졌다고 고발을 당해 벌금 백만원에 일년 동안 약국을 할 수 없다는 처분을 받았다.

약국을 하면서 고향집에 가면 아버지께서는 "사기꾼 왔냐? 사기 쳐서 돈 많이 벌었냐? 진짜 약사는 밥을 굶어"라고 농담하시며 내가 양심적인 약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양심적인 약사의 주요한 일은 약의 부작용과 오남용에 대해 지역주민에게 가르치면서 약을 먹지 않고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병의 성격과 생활과의 관계를 밝혀 식생활의 개선 등을 통해 병을 예방하도록 하는 일이 라고 여겼다.

1997년, 우리 약국은 약사회로부터, 일년마다 신상 신고할 때 내는 회비 50만원을 내지 않아 고발을 당해, 벌금 백만원을 내야 했다. 너무 부당하게 여겨져 서초동 법원에도 섰었고, 보사부에 진정을 해서 그때마다 위기를 넘겼지만 십년의 나의 약사로서 경험은 이 시대 약사라는 직업이 뭔가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1997년, 첫아이 선목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 단체급식에 학부형 당번을 짜서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섯살, 네살, 세살의 연년생 아이들과 막내 원목이를 임신한 나는 약국을 하는 일도, 첫아이 선목이의 학교 생활을 도와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주목이, 일목이, 화목이, 세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 아침 저녁으로 데려다주고 찾아오는 것도 한 방법이었겠지만, 우리 약국은 사람들로 바글대긴 했어도 돈은 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관리 약사를 데려다 약국을 함께 운영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만, 지역주민과 하나 되어 일할 만한 약사를 구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강의하랴, 모임에 참석하랴, 당신 일만으로도 바빴던 남편이 그 모든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1997년 단군 이래 국가 최대 위기라는 IMF 금융대란 때 이웃들이 무너져갔다. 지역주민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약국에서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충격으로 쓰러지고 자살하고 가정이 파탄나는 그 엄청난 병에 다섯평도 안되는 약국이, 더구나 줄줄이 아이가 다섯 딸린 약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첫아이 선목이는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여 제멋대로였고, 주목이와 일목이, 화목이는 약국으로 나가는 내 발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칭얼댔다. 게다가 점점 배가 불러와 몸도 무거웠다. 바깥일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가족만을 돌보던 남편도 지칠 대로 지쳐갔다. 대도시 서울의 환경에서 아버지가 내게 바라셨던 양심적인 약사가 되려면 아이를 다섯씩이나(!) 낳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남편 역시 이 시대에 양심적인 지식인이 되려면 아이를 다섯씩이나 낳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생활이 빠듯하고 바쁘고 지친 서울의 삶. 거기에다 하루 스물네시간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온갖 소리들, 뿌연 하늘, 피해의식, 두려움…… 남편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떠나는 것. 그러나 어디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 아버지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다섯 아이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디란 말인가? 더구나 벌어놓은 돈도 넉넉지 못하고 다섯 아이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겹게 여겨지던 우리로서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 부부의 고향인 제주도에 가서 살아볼까도 생각했다. 고향 떠난지 30년이 넘은 남편, 18년이 된 나, 고향에 가족과 친지가 있었지만 우리의 자리는 이미 뿌리뽑혀 있었다. 제주 고향은 우리 마음속에만 남아 있지 현실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서울 거리에 나뒹구는 플라타너스 낙엽처럼 외로웠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막막한 심정에 정안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마음 하나로 하늘만 쳐다보았는데, 참으로 우연찮게 선이골 소식을 접했다. 창고 같은 커다란 집만 한채 있고, 전기도 없고, 인가도 없고, 밭은 숲이나 다름없다고 남편은 한번 다녀온 뒤 말해주었고, 나는 "당장 갑시다. 가서 살면서 어찌해봅시다"라고 했다.

1998년 4월 18일, 우리는 서울을 떠났다. 큰 도시 서울의 삶에서 나왔다. 이제 우리 가족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함께 있을 수 있었고 또 함께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시사철 아름다운 선이골에 와서 살게 된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착한 일 하나 한 적 없는데 이런 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엔 우리 사는 집이 꼭 난민수용소 같다고도 하지만, 너무 비싸게 팔아서 미안하다고, 이곳에 집 짓고 길 내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자기들이 쓰던 모든 살림도구와 심지어 먹던 쌀 한가마니까지 고스란히 남겨놓고 간 마음씨 착한 사람이 지은 집에 우리가 산다는 게 얼마나 마음 든든했는지 모른다.

해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었다. 왜 서울을 떠났느냐고. 이곳에서 무얼 하려고 하느냐고. 대한민국 가장 남쪽 제주섬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에게 강원도 북쪽 화천은 모든 점에서 낮설고 물설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데 다섯 아이를 데리고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온 우리를 화천 사람들도 처음엔 경계하고 의심하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화천과 우리는, 다섯 쌍둥이 같다는 아이들을 가운데 두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만나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아이들은 화천에서는 온몸에 이웃들의 관심과 배려를 받게 되었다. 지역주민의 5분의 4 정도가 타지 사람인 화천. 땅값이 싸서, 이북에 있는 고향과 가까워서,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곳에 눌러앉아 살게 된 사람들.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 없이 사는 실향민의 외로움과 고행, 그리움을 아는 사람들의 땅. 실향민들을 따뜻하게 받아안을 수 있는 강원도 '감자바우' 넉넉한 심성의 본토박이 사람들의 땅.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형제들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보았던 사람이었고, 화천의 대자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이골에서 다섯 아이를 기른다는 게 어떤 삶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선이골 같은 산골에서 전기 없이 사는 삶, 비료나 농약, 기계 없이 농사 짓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살아봐서'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륜구동차도 올라오기 부담스러워하고 전화도 없어 연락도 안되는 우리 가족만 사는 외딴 선이골이었지만, 이들은 우리 삶을 우리 자신보다 더 훤히 아는 것 같았다.

홍수로 길이 무너지면 멀리 원천리에서 와서 포크레인으로 무너진 길을 손봐주고, 때가 되면 논도 떠주고 모도 길러서 가져다가 심어주기도 한다. 더 먼 곳 계성리에 사는 환경미화원 형제들도 우리 가족들 옷이며, 신발, 이불 등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바리바리 갖다준다.

오일장에 가면 아예 친정 어머니처럼 미리 보리며 기장쌀, 청국장 등을 듬뿍 싸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향이 황해도인 분도 계신다. 구천 읍내엔 아이들이 한두시간 정도 텔레비전에 빨려들듯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칼국수 네그릇 시키면 일곱그릇에, 거기다 산에 올라가면서 먹으리고 김밥까지 얹어주는 단골 분식가게도 있다.

30여년 전 바로 이곳 선이골에서 팔남매를 데리고 몸을 도끼 삼아 7년을 살았던 분도, 춘천에 사시면서 일년에 한두번씩 들르신다. 이제는 성공해서 그런 대로 살 만한데도 이곳에서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그래서 우리만 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당신 가진 것 아무거나 놓고 가신다.

이곳 군청, 학교, 은행, 농협, 심지어 군부대와도 '말'이 통했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을 알아갔지만, 화천은 화천 전체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주민 2만3천명이 사는 작은 마을 화천은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고, 서로서로 사돈에 팔촌으로, 동네로, 삶으로 맺어져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들 모두는 이모고 삼촌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내게 이들은 내 생애 처음으로 실감하는 동포이고 겨레였다. 스무살 때 제주도를 떠난 이래 18년 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느꼈던 그 피곤함의 정체를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이다.

억새를 낫으로 베다가 억새에 눈이 찔렸는데도 그냥 "찔리오" 한마디 하고 억새를 용서해줄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의 너그러움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놀라웠고, 20여년 도시 삶의 피로와 허무와 냉소가 씻겨가는 것 같았다.

다섯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약국도, 강의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먹고 살 수도 없어서, 오로지 다섯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것만 바라고 서울을 떠났더랬는데, 이곳에 왔더랬는데, 내 어머니 자식 키우듯 나도 땅을 기면서 살아야지 모질게 마음 먹었더랬는데……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축복들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화천 형제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축복은 나와 남편을 변화시켜 갔고, 해마다 우리의 '떠남'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우리는 왜 떠났는가?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7년째 선이골 삶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떠났음'을 깨닫는다. 서울 삶에서 우리는 '하나됨의 만남'에 배고프고 목말라 했음을 깨닫는다.

선이골의 천연계는, 화천의 이웃형제들은 우리에게 '만남'을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비로소 '말이 통하여 조금씩 되살아나는 겨레말을 가지고, 큰소리 칠 필요 없이 낮은 소리로 다시 서울을 만난다. 내가 택하진 않았지만,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나라, 겨레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어머니. 살아온 삶이 너무나 달라서 고등교육 받은 자식들에게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른다"고 답답해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만난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바라셨던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되는 삶을 만난다.


저는 집사람을 통해서 이 분이 쓰신 이 글의 내용을 처음 접했습니다. 여자분 이름 가운데에 '용'자를 쓴 것을 보니 이분도 광산김씨성을 가진 분으로, 이분 아버님께서도 참 고리타분하신 한국어르신인 것 같습니다.

집사람으로부터 이분께서 최근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는 참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존경과 슬픔과 비통함이 함께 제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궁금해서 몇 가지를 더 찾아보았습니다.

이제 TV를 안 본지도 10년이 넘어가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일도, 내가 그곳에서 하고싶은 일이 있어서 다른 일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지 근 8년이 되어 가는지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삽니다만, 이렇게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소식들이 간혹 있습니다. 때론 좋은 소식, 때론 나쁜 소식, 대부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소식, 내가 내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데에는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소식들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 입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한국이, 한국인이 언제부터 저렇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었나 싶습니다. 아니, 언제부터 이토록 나와 다른 남에 대해서 따돌림을 하고 폭력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욕하는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또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나 그 바닥이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 모두 사람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 2006.2.11 김민수


:) :)) :( ;) :\ |) X-( B)
  • 1 농민 - 필자는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다가 7년 전, 남편과 다섯 아이와 함께 강원도 화천 선이골로 들어갔다. 전기도 들어가지 않는 외딴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 가족은 아이들을 제도권 학교에 보내지 않는 대신 '하늘평화학교'라고 이름붙인 '가정 학교'에서 자연과 어울려 함께 일하며 배우고 있다. 이 글은 5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출간될 <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에 실릴 글이다.

선이골에 온 까닭은 (last edited 2008-06-23 01:27:55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