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색평론 1999년 5-6월 통권 제 46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5년 8월 11일, 직지지기 김민수.

글쓴이: 하워드 리먼1

옮긴이: 김형수

본문

내 증조할아버지는 몬타나주 그레이트 폴스 외곽에서 중간 크기의 낙농장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농장을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다시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농장이 언젠가는 나와 내 형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서너살 무렵에 어머니는 꼭 새벽에 나를 깨워서 외양간으로 데리고 가곤 하셨는데, 그것은 우유를 짜는 동안 얘기할 누군가가 필요해서였던 것 같다. 다섯살 때부터 나는 실질적으로 농장의 잡일을 했다. 대개 나는 한살 위 형인 딕과 같이 일하곤 했는데, 형은 나보다 훨씬 몸집이 컸다. 형은 나를 때리고 있지 않을 때면, 내게 뭔가 일을 시켰다. 송아지들에게 버터밀크를 먹이는 게 내 일이었는데, 그 무렵에는 젖꼭지가 달린 바케쓰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 손을 사용했다. 주말마다 송아지 우리의 거름을 치워야 했는데 겨울에는 거름이 얼어서 일하기가 특히 나빴다. 나는 아직도 일곱살 무렵 무척 추운 겨울날 오후에 일하던 게 생각난다. 내가 조금 훌쩍거리자 아버지는 "이빨을 꽉 무는 게 나을 거다. 울면 일이 더 늦어지기나 하지. 끝날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라고 하셨다. 그 말은 내가 가슴깊이 새긴 교훈이 되었다.

여덟 아홉살 무렵에 나는 우유를 짜거나 송아지에게 낙인을 찍는 일을 시작했다. 열살이 되어서는 송아지를 거세하는 법을 배웠다. 추수 때가 되면 나는 밀을 베느라 한참 어두워진 뒤까지 일했다. 짚을 모아서 쌓기도 했고 트랙터와 말떼를 모는 것도 배웠다. 나는 일년 내내 독립기념일과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 매일 일했다. 쉬는 날에는 가축들한테 먹이만 주면 되었는데, 그것은 불과 몇시간만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날을 애국심과 기독교적인 감정으로 기다렸다.

딕 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에 호지킨스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치명적인 병이었다. 우리는 그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의 삶은 내내 그것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형은 모든 일을 자기 내키는 대로 했고, 그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 숲을 좋아했는데, 틈만 나면 언제나 사냥이나 낚시를 가곤 했다. 나는 집에 남아서 전보다 더 많아진 내 일을 했다.

농장 일에 대한 나의 자신감은 커졌지만, 나의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은 엉망이었다. 나는 축구는 뛰어나게 잘 했지만, 다른 건 모두 잘하지 못했다. 겨우 졸업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농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540에이커의 농장을 떠맡게 될 것에 대해 불안을 느껴, 내가 실제로 농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영적 측면을 심각하게 살펴보도록 하셨다. 그러자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12년간을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그럭저럭 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미국 농장 아이들이 하듯이 결정을 내렸다. 나는 대학엘 갔다.

몬타나 주립대학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공부에 주의를 기울였고 숙제도 했다. 나는 농과대학의 공부를 선택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는 신명나는 새로운 농업연구의 시기였다. 우리는 낡고 비효율적인 농사법 -우리 나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가 해왔던 유기적인 방법 -을 버리도록 교육받았다. 유기농업을 강의하는 과목은 한 과목도 없었다. 그 대신에 새로운 대담한 화학농업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살충제와 제초제, 호르몬과 항생물질들을 사용하는 가장 최신의 방법들을 배웠다. 모두 화학자이면서 학자였던 교수들은 손에 흙 하나 묻힐 필요도 없이 일을 썩 잘 해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 나는 그러한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더욱 늙어가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지고 계셨다. 농장 일을 위해서는 내가 필요했다. 농장의 장부들을 조사해보고 나서 나는 전에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가난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간신히 수지타산을 맞추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 내가 농장을 맡게 되면 전통적인 낙농으로 간신히 먹고 사는 그런 농장운영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농장을 흑자재정2으로 운영, 확장하고, 대학에서 배운 모든 새로운 화학농법을 적용할 참이었다.

아버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농장을 내게 맡기셨다. 하지만 농장을 넘겨주면서 내게 짧게 한마디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윤작은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옛날 식으로 농장 일을 하면서 지켰던 첫번째 원칙이었다. 예를 들어, 알팔파를 심었던 밭에는 다음 해엔 밀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옥수수를 심는다. 농부들은 콩이나 클로버, 알팔파 같은 작물들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것은 이들 작물이 공기에서 질소를 빨아들여 흙속으로 보내어 자연적으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원칙은 적어도 몇년에 한번씩은 땅을 쉬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흙속의 수분이 회복되고, 잡초제거가 쉬워지며, 그리고 각종 미생물이나 지렁이가 흙을 다시 소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세번째 원칙은 농부들 사이의 오래된 격언이 잘 표현해준다. "풀밭에서 가축을 먹일 때는 풀밭의 반만 이용하고 나머지 반은 아껴두라." 다시 말해서, 소들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대충 반 정도의 풀을 남김으로써 풀들은 매년 다시 재생 할 것이고, 그 뿌리가 흙을 붙들어 침식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유기적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기농업은 자연의 시간 테두리 내에서 일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작물은 익은 다음에 추수하고, 밭들은 각각의 작물이 가장 좋은 상태일 때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작은 구역들로 나누어놓는다.

'녹색혁명'의 원칙에 세뇌된 우리들은 마치 전기가 석유램프를 몰아냈듯이 이런 괴상한 낡은 농사법을 버리고자 했다. 나는 새로운 화학농업이 보여주는 거의 수학적인 정확성속에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나는 깊이 3피트, 폭 1인치 정도 되는 튜브를 땅에 꽂고 토양 샘플을 채취하곤 했다. 이 샘플을 실험실로 가져가면, 그 토양이 세가지 기본 영양소 -질소, 인, 칼륨-중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며, 얼마나 깊이 어느 정도의 양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혼합비료를 밭에 살포하였고, 그러면 비료는 마치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방출되는 의약품처럼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화학비료의 효과는 기막힌 것이었다. 처음 몇년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비료의 가장 좋은 배합비율을 터득하고 난 다음에는 특히 더 그러했다. 봄에는 에이커당 100파운드의 '33-0-0'을 뿌리고 가을에는 같은 양의 '16-20-0'을 뿌리면 생산량이 갑절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땅을 쉬게 함으로써 땅을 놀릴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잡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학제초제인 2-4 D라는 것을 사용했다. 그저 밭에 뿌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하루에 500-600에이커에 뿌릴 수 있었다. 조금 사용해도 효과가 있었지만, 많이 뿌릴수록 효과가 더 좋았다. 이윽고 나는 그보다 더 새롭고 강력한 약품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2-4-5 T라는 뛰어난 제초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라고 불리던 바로 그 약품이었다.

생산량이 늘자 나는 여분의 생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밀을 제외하고는 내가 생산하는 작물은 시장에서 그다지 후한 값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내다 팔기보다는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기르던 50두의 소들에게는 넘치는 양이었다. 해결방법은 소를 더 사는 것이었다.

1970년 무렵 농장에서 풀을 뜯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많은 소들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소들을 축사에 가두어놓고 사육하기 시작했다. 지붕도 없는 축사에, 매 축사에 100-200마리를 가두어놓고는 한쪽엔 여물통을 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목축업자들이 목표로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소를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크고 살지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소들의 식사습관을 바꾸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소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풀과 조섬유를 먹였지만, 나는 소들이 풀을 뜯게 하는 대신에 조섬유, 곡물, 농축 단백질을 먹였다. 점점 곡물을 늘려서 사료의 90퍼센트를 곡물로 채웠다. 이렇게 해서 소들의 고기가 극단적으로 지방질이 풍부한 것이 되고, 식료품 가게에서 볼 수 있는 고기 의 하얀 부분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불행하게도, 이런 식사는 자연적으로 곡물이 아니라 풀을 먹게 되어있는 암소의 소화기관을 상하게 했다. 그 결과로 많은 소들이 탈장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내부에 있어야 할 기관들이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때마다 수의사를 부르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600파운드나 되는 암소의 무게를 내 몸으로 버티며 25파운드에 달하는 그 탈장된 부분을 소의 내장속으로 다시 집어넣고 상처를 꿰매는 데 여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경매를 통해 소들을 계속 사들였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20여곳으로부터 한번에 100마리씩 들여오기도 했다. 서로 다른 곳으로부터 온 소들을 한곳에 두다보니 질병이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어 버렸다. 축사에 가두어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소들의 건강문제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그것은 경제와 자연 사이의 끊임없는 전투였다. 만일 처음 증상을 보이는 며칠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그 소가 병으로 죽어버릴 확률은 50퍼센트나 되었다. 천체 소들 가운데 5퍼센트가 죽어도 이익을 남길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축사에 갇혀 지내는 소들에게는 예방접종도 소용없었다. 축사와 같은 닫힌 공간에서는 이미 병을 앓고 성공적으로 치료가 된 소들이 나으면서 병균을 다른 소들에게 옮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른 목축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소의 사료에 항생제를 넣는 방법을 배웠다. 단지 병에 걸린 소들에게만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그보다는 모든 소들에게 다 같이 항생제를 넣은 사료를 먹이는 것이 보다 쉽고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여기서 또 한번, 다른 대부분의 목축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연에게 당했다. 항생제에 면역이 금방 생긴 박테리아들 때문에 이내 항생제는 그 효과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거의 한달에 한번씩 항생제를 바꿨는데, 그 효과는 계속 줄어들었다.

때때로 소에게 접종시킨 약품이 나중에 사람에게 해로운 것으로 판명되어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의심스러운 약품을 만든 제약회사가 그 재고를 다 처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약품에 대한 금지조치를 내림으로써 늘 농기업들에 협조적인 것으로 보였다. 금지된 약품이라 해도 일단 농부의 손에 들어온 뒤에는 다 쓸 때까지 사용되었다.

소의 질병 이외에 파리떼가 축사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소마다 매일 배설하는 25파운드의 배설물들로 인해 파리떼가 몰려들어 심지거는 소가 숨쉬는 데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파리떼를 쫓기 위해 소들이 먼지를 너무 많이 일으켜서 이른바 먼지폐렴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학농의 큰 약속은 모든 종류의 문제들은 단지 과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파리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결은 살충제였다. 매일 아침 나는 살충제를 온 축사에 뿌렸다. 당연히 살충제는 나무와 풀 그리고 작물들뿐만 아니라 사료나 소들이 마시는 물에도 뿌려졌다. 더 나아가 나는 파리의 유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들의 등에다 살충제를 뿌려서 약물이 피부 밑으로 흡수되어 파리 알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당연히 나는 이 치명적인 화학물질이 흡수된 소의 조직이 누군가의 저녁상에 오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피부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소들을 더 빨리 성장시키기 위해서 단순히 곡물을 먹이는 방법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목축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일부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근육을 기르기 위해 건강을 해치면서 사용하기도 하는 스테로이드와 비슷한 성장호르몬을 사용했다. 60년대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내가 가장 빈번히 사용한 호르몬은 DES였다. 나는 이 호르몬을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사용했지만, 임신한 암소의 유산을 위해서도 사용했다. (태아의 무게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것은 햄버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 내가 그 호르몬을 사용하던 기간 동안에, 그 호르몬이 인간에게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물질인지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70년대 말에 정부는 DES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 호르몬은 너무나 싸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축산업자들은 DES의 판매가 금지되기 이전에 그 피후에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많은 양을 확보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금지된 후 2년 정도 지나 내가 가지고 있었던 DES가 다 떨어지고 나서 나는 새롭고 개선된 성장호르몬을 계속 사용했다. 그 무렵 나는 화학약품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았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 농무부가 얼마나 소비자들을 희생시키고 생산자들을 보호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 한가지 화학물질이 금지되면 그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는 농부나 축산업자들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즉, 가지고 있는 그 제품을 버리고 손해를 보든지 아니면 범법행위의 위험을 무릅쓰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범법으로 인해 적발될 위험은 과연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금지된 물질을 소의 사육에 사용했을 때 적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소 25만마리의 시체들 중 하나를 검사할 것이라고 예상하면 된다. 검사를 하더라도 모든 금지된 물질에 대해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작은 일부에 한해서 검사한다. 또 검사 결과 금지된 물질을 찾아내고 그 소가 어느 목장의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목장주에게 주어지는 것은 기껏해야 강한 경고가 담긴 한통의 엄중한 편지일 뿐이다. 나는 한번도 쇠고기의 안전을 위한 규제를 어긴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축산업자를 본 적이 없다. 그 모든 절차는 간단히 말해서 단순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나의 범법행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루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좀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작물 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리고, 소 한마리의 무게가 1,100파운드가 되는 데 30개월이 걸리던 것을 15개월로 단축시키고, 이웃 농장을 사거나 빌려서 내 농장을 4O배나 키웠지만 내가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화학물질 그 자체가 비쌌고, 매년 보다 많은 화학비료와 항생제를 사용해야만 그 전 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들이 병들거나 죽어나갔다.

나는 매일 18시간씩 일했지만, 점점 재정상태가 불안해졌다. 나는 화학물질의 구덩이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어 그 구덩이를 계속 파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아내는 이따금 내게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해요?" 하고 묻곤 했다. 그녀는 나무들이 죽어가기 시작하고, 제초제에도 불구하고 잡초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식물들을 죽일 만큼 내가 옷에 잔뜩 제초제를 묻힌 채 들어오는 것을 아내는 반기지 않았다.

나는 매주 한번씩 15명의 축산업자들과 함께 그레이트 폴스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우리는 녹색혁명이라는 신학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화학이라는 마술이 치유해줄 것이었다. 우리는 그 화학물질들이 매번 새로운 문제들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증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 신학에 매달려 있었다.

15년 전에 모두 축산을 하던 그 15명 중에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지 한명뿐이다.

우리는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이기고자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땅을 파괴하고, 그와 더불어 우리 자신을 파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긴 세월 동안 내가 아내의 눈이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본 것은 딱 한번이었다. 그것은 1979년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나는 그날 내 척추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응급수술 때문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대의 첫 남편은 28살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다시 과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내가 꼭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의 친구이자 의사인 알렉스는 만일 종양이 척수 내부에 있다면 내가 다시 걸을 수 있는 확률은 백만분의 일도 안된다고 하였다. 눈보라 때문에 알렉스가 도착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각인 다음날 아침까지 수술은 미루어져 있었다.

나는 내 발을 계속 움직이며, 생각에 잠겨 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1만에이커의 땅과 7천두의 소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30대의 트럭과 20대의 트랙터, 7대의 콤바인도 중요하지 않았다. 연간 5백만달러의 농기업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 가족과 땅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줄곧 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 두 손이 감촉하곤 하던 시원하고 어둡고 찰지고 따뜻한 흙이 주는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떠올랐다. 나는 자라면서 항상 흙을 손에 묻히며 지냈고, 그 느낌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흙을 애써 씻어내지도 않았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에 흙이 얼마나 풍요로웠던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흙은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흙을 집어보면 내 손에서 부스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흙은 마치 모래처럼 가늘었다. 흙속에는 더이상 벌레도 없었다. 내가 잔뜩 뿌려댄 제초제와 살충제, 그리고 화학비료 때문에 흙은 이제 마치 석면같이 보였다. 농장 안이나 주위에 있는 나무들도 죽어가고 있었다. 새들도 사라졌다. 농장은 더이상 살아 숨쉬는 존재가 아니었다. 농장은 갈수록 위태위태한 화학방정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수술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나의 나머지 생을 내가 태어날 때 그랬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땅을 되살려놓는 데 바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틀 무렵에 나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나는 집중치료실에서 깨어났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발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몸을 아래로 움직여서 발이 침대끝의 금속봉에 닿도록 했다. 금속에 닿는 느낌이 왔다.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평생동안 경험해본 어떤 느낌보다도 행복한 느낌이었다.

내 상태를 체크하러 온 알렉스는 내 척추의 바깥 부분의 뼈를 잘라낸 후 척수 내부뿐만 아니라 그 아래까지 종양이 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유일한 선택은 신경을 하나 잘라내서 마치 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리듯 그 신경에 종양이 따라붙어 나오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알렉스는 신경 하나를 선택했고, 잘라냈으며, 나는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마비에서 벗어났다.

나는 땅에 대한 내 약속을 지켰다. 나는 화학물질에 환멸을 느낀 동료 농부들을 모아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거리인 잡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적으로 건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우리는 실제로 많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일로 해서 나는 정치의 세계로 끌려들었고, 곧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그리고 깨끗한 식품을 내걸고 하원의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만일 은행이 한창 선거운동 도중에 내 농장에 대한 저당권을 돌연히 행사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유기농업과 어울리는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휴터라이트 일가에게 내 땅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결국 나는 '전국농민조합'의 로비스트로서 워싱턴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무엇보다도 1990년의 '유기농업 표준 법령'을 통과시키기 위해 일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 해에 법안에 서명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났어도 표준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법률은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다.

종양제거 수술 이후, 나는 가축, 농사일 그리고 환경의 관계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0년 어느 여름날 워싱턴에서 나는 책상 위에 발을 얹고서 포토맥 강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모든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과 법제화를 통해 변화를 이룬다는 것에 대해 갈수록 냉소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싸워 얻으려는 대부분의 관료적인 보조금이 사람의 식품이 아니라 사료작물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세계전역에 걸쳐 우림(雨林)이 사라져가는 것을 알려주는 우울한 통계들을 보아왔고, 그 우림의 상실은 많은 경우 목축을 위한 벌목으로 빚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나는 지구상에 가축이 5대 1의 비율로 사람의 수를 능가하고 있다는 것도 읽었다. 나는 미국에서 쓰여지는 물의 50퍼센트가 가축의 사육에 바쳐져 있으며, 우리의 지하수가 놀랄만큼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16년마다 1인치의 비율로 표토가 상실되고, 그 표토 상실의 많은 부분이 목축과 공장식 축산농이 이용하는(내가 한때 했듯이) 화학적 집약농법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나는 소나 돼지, 닭들의 분뇨로 오염된 강을 보았고, 그러한 동물들을 먹이기 위한 작물의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사용된 제초제 때문에 하늘에서 새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아왔다. 나는 수 천마리의 소들이 축사에 갇힌 다음, 부자연스러운 환경 때문에 어떻게 고통받는지를 보아왔다. 나는 매일 밤 수십억의 사람들이 굶주린 배를 부등켜 안고 잠자리에 드는 한편에서,지나치게 배부른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는 1파운드의 쇠고기를 만들기 위해 16파운드의 곡물을 소들에게 분주히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친구들이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것도 보았고, 암 발생률이 극적으로 높아지는 것도 보았다. 나 자신의 건강이 좋은 예였다. 내 몸무게는 350파운드였고, 콜레스테를 수치는 300을 넘었고, 혈압이 엄청나게 높았으며, 코에서는 출혈이 있었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순환적인 관계에 있음이 내게 분명해졌다. 우리의 문명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 실수는 우리의 땅과 숲과 강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개개인을 죽이고 있었다. 우리는 동물들을 먹고 있지만, 여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다. 만일 이 동물들이 우리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다면, 지금보다 더 가혹한 복수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일찍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고기를 안 먹은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서 내 건강문제는 모조리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체적으로 나아지기도 했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에 손상을 끼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한가지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기분이 나아졌다.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와야 할 문화적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저항할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화학농업이 유기농업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의 심장부에서 짐승들의 역한 배설물 냄새가 아니라 감미로운 곡식 냄새를 맡고 싶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몬타나로 돌아가 보았다. 내가 살던 그레이트 폴스의 가장 큰 슈퍼마켓에서 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선반에 두유와 쌀 우유가 놓여 있었다. 콩으로 만든 핫도그, 채소 버거, 두부도 있었다. 미국에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게 이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레이트 폴스에서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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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한때 미국의 몬타나에서 대규모 축산을 경영하다가 지금은 채식주의 실천가, 운동가로 변신한 하워드 리먼(Howard F Lyman)이 작가 글렌 머저(Glen Merzer)의 협력을 얻어 집필한 책 Mad Cowboy(Scribner, 1998)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발체문은 원래 Self Magazine 1998년 4월호에 발표되었다. (1)

  2. 원래는 적자재정이었는데, 의미상 흑자재정이 맞는 것 같아 고쳐썼다 (2)

성난 카우보이 - 축산업자에서 채식주의자로 (2016-06-18 18:28:40에 MinsooKim가(이) 마지막으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