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말글살이의 현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안타깝고 한심하고 달리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부조리가 이 모 저 모로 심각한 것이 우리네 말글살이이다. 우선 말의 군더더기가 너무 심하다. “처갓집, 양옥집, 국화꽃, 무궁화꽃, 전선줄, 철삿줄, 믹서기, 프린터기; 삼국 시대 때, 고려 시대 때, 늙은 고목나무, 아직 미정이라, 피해를 입어, ...” 이런 현상은 주로 익숙하게 쓰는 한자말과 그 밖의 외래어에 나타난다. ‘처가’가 이미 집인 줄 몰라서 ‘집’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믹서’가 이미 도구인 줄 몰라서 ‘기’를 덧붙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피해’가 이미 해를 입음인 줄 몰라서 또 입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직감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들어온 지 오랜 한자와 한자말일지라도 우리한테 토박이말과 똑같은 정도로 잘 인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얼마나 숭상해 왔고 서양 문물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들에게서 온 말은 왜 우리한테 잘 흡수되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의 언어 의식이 너무 개결하고 배타적인 탓일까? 아니면 그것들의 껍질이 너무 굳고 질긴 탓일까? 아뭏든 한자말을 포함한 모든 외래어의 일부 요소들이 토박이말과 흔히 겹쳐 쓰이는 현상은 우리네 말글살이를 그지없이 너절하게 만든다.

유식한 사람이 아니면 쓰지 않는 낱말 “자문(諮問)”은 요새 사전의 정의를 바꿔야 할 정도로 주객을 바꾸어 가고 있다. 묻고 배우는 것이 자문하는 것이니까 가르쳐 주는 사람한테 “자문을 한다”고 할 것을 “자문을 받는다”고들 하니 주객이 바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가 되어 배우는 것이 “사사(師事)하는” 것이니까, “스승이 나의 사사를 받는다”고 할 것을 “내가 스승의 사사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도 주객을 바꾼 잘못이다. 신문과 방송에서 이상하게 유행하는 낱말이 “반증(反證)”인데, 이것도 사전에서는 ‘어떤 것이 그르다는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건만 ‘어떤 것이 그렇다는 증거’ 곧 “반영, 증명”과 같은 말처럼 쓰이고 있다. 말품과 글품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런 수준이다. 여기 드는 낱말들은 열의 아홉 사람이 이처럼 잘못 쓰고 있다. 나라의 국어 교육이 부실하고 개인의 공부가 모자란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사례도 한자말에 대한 전반적인 소화 불량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주제에 한자말과 토박이말이 나란히 있으면 한자말을 고급으로 치고 먼저 집어 쓰는 우리 한국 사람들, 토박이말이 엄연히 있어도 버려 두고 서양말을 즐겨 쓰는 우리 한국 사람들. “집”보다 “댁”이 점잖고, “집사람”보다 “와이프”가 편하다. “펠리컨”은 알면서 “사다새”는 모른다. “전산학과”보다 “컴퓨터학과”가 더 유리하다니, “셈틀학과, 슬기틀학과” 따위는 상상도 못 하리라. “즈믄 해”를 삼킨 “천 년”이 지금은 “밀레니엄”에게 먹히는 중이다.

한글이 비록 비할 데 없이 우수하지만 수천 년 동안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혀 오던 끝에 인터넷으로 통신망을 지배하기에 이른 로마자의 실세를 과연 막아 낼 수 있을지 염려스럽기만 하다. 한글의 가치는 소수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로마자의 매력은 대중을 감성적으로 당기는 것이니, 당장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자명하다. 그래서 장사하는 데는 한글보다 로마자가 훨씬 낫다. 상품의 이름이며 광고물, 회사의 표지에 이름까지 온통 영어와 로마자로 꾸미지 않으면 사업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인도 거물이 되면 로마자 이름이 아호처럼 붙는다. 서울 시청의 상징 문양에 있는 ㄹ 자 모양은 본래 에스(S) 자로 도안되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것들은 아무래도 바로잡을 길이 없어 보이는 언어 사대주의 현상이다.

칫과에서는 본디의 이빨이 못 생겼거나 크게 상했어도 완전히 못 쓰게 되지 않은 한은 굳이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아무리 잘 만들어 박아도 본디의 이빨보다 더 좋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어도 생명체처럼 안팎의 여러 요인에 따라 변화하는 구조물인 만큼 체내에서 흡수되지 않는 이물질은 결코 이롭지 않은 것이다. 외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고유 요소를 유지하고 스스로 불려 가지 못하는 언어는 살아 남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다. 오늘날 환경의 오염을 막거나 줄이고 생태계를 유지하려 하는 목적이 결국 인류 자신의 생존에 있는 것과 같이 특정한 언어 사회와 그 언중의 정신 세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언어 환경의 보호와 순화가 절실한 것이다.

말은 흔히 의사 소통의 도구라고 말하나, 그것은 피상적인 판단이다. 무릇 도구는 편리한 대로 쓰다가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나,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분명히 도구 이상의 것이다. 말은 생각하기를 돕는다. 우리는 모든 사물과 그 움직임이나 상태에, 생각에, 느낌에 이름을 붙여서 받아들이고 확인한다. 이름이 붙은 것보다 붙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의 안팎에 엄청나게 많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붙어야 비로소 확실해 지고 다루기 쉬운 것이 된다. 아날로그 상태의 관념과 상념 등을 디지틀 상태로 바꾸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말은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틀이라 할 수 있고, 개별 언어는 그 개별 언중을 특화하는 틀이라 할 수 있다. 생물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언어의 다양성과 그 언어로 비로소 만들어 지고 쌓아 지고 물려 지는 문화의 다양성은 더욱 중요하다. 무역을 위한 공용어가 아무리 유익해도 인류의 다양한 개별 언어들을 정복하고 삼켜도 좋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공용어야말로 의사 소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계모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생모를 대신할 수 없듯이 공용어가 개별 언어의 오묘한 구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인류가 과연 영특하다면 미약한 생물들의 멸종 위기를 알아보고 보호 운동을 벌이기 전에 경제력이 없어서 소멸해 가는 언어들의 위기를 알아차리고 대책을 찾아야 할 것인데, 도리어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면서 언어와 문화의 약육강식을 물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한국말은 오래도록 그런 위기 속에서 겨우 겨우 연명해 왔다. 중국말과 중국 문화에 눌리기를 수천 년 하는 동안 고유한 어휘가 얼마나 죽어 갔는지 모른다. 훈민정음을 만든 직후에 지은 <용비어천가>에는 “梨浦 애 ... 大灘 한여흘”과 같이 우리 나라의 많은 땅이름들이 한자와 함께 한글로 적혀 있다. 당시에는 이들을 “이포, 대탄”으로 읽고 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언제부터인지 한자에 대해서 새김으로도 읽는 관습을 완전히 버리고 모든 한자를 한자음 곧 중국식으로만 읽도록 획일화하면서 “한밭[大田], 삼개[麻浦], 숯고개[炭峴]” 같은 땅이름들을 무수히 잃어 버렸다.

우리 책상에 놓인 큼직한 국어 사전의 편찬자들은 이 흐름을 잘도 이어받았다. 한자말에 대해서는 표준말 여부, 옛말 여부, 품위 등을 전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실었으나, 고유한 어휘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방언의 차이, 사회 계층의 차이, 품위의 차이 등을 가려 내어 쓸 말 못 쓸 말을 구별하고 못 쓸 말에는 손톱표를 찍어 표시하며 가뜩이나 궁핍한 고유 어휘의 체계를 더욱 빈약하게 해 왔다. 한자를 버릴 수 없다는 주장의 빌미가 된 이른 바 ‘7할 이상의 한자말’은 이처럼 부당한 편애를 받고 사전에 오른 것이다. 유력한 국어학자였던 이들은 같은 의미에 대해서 단 두 개의 표준말도 인정할 줄 몰랐고, 이것이 또한 모국어를 스스로 깎아 버리는 일인 줄도 몰랐다. 복수 표준어란 관념은 최근에 와서야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500 년 전만 해도 훨씬 다채롭고 자유로왔던 낱말 만들기가 거의 다 죽어 버린 것은 어휘 얼마를 잃은 것보다 더 큰 피해였다. “죽.살.이”가 “생사”에 삼켜 진 것보다 “높.푸르-다, 검.푸르-다, 짙.푸르-다”처럼 “깊.푸르-다, 넓.푸르-다, 맑.푸르-다; 희.푸르-다, 붉.푸르-다; 엷.푸르-다, ...”라고 말할 자유까지 함께 잃은 것이 더 해로왔다. “오.가-고, 오르.내리-고, 넘.나.들-고” 하는 우리들이 왜 “의식주”를 “옷.밥.집”으로 바꾸지 못하고 “입.살.이, 먹.살.이, 집.살.이”로 갈라 부르지 못하는가? 우리 조상들은 “찍.먹-고”(<딕먹고)라고 한 것을 우리는 “찍어 먹고”로 밖에 말하지 못한다. “식량, 음식” 등을 “먹.거리”로 바꾸는 데 대한 저항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은 이런 부자유를 부자유로 알지 못하는 무식이나 편견이나 한자말의 권위에 대한 노예 근성 때문이다. 국어학자도 아닌 어느 노인이 찾아 내어 힘겹게 퍼뜨린 이 낱말의 근거 곧 같은 유형의 낱말은 “먹.성, 먹.보, 묵.밭, 멀.국” 등과 같이 얼마든지 있다. 국어학자들이 꾸며 놓는 이른 바 조어법은 사전에 이미 실린 낱말 가운데 몇 줌을 임의로 고르고 짐짓 분석해 본 것들이기 때문에 일반 언중이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큼 참된 조어법이, 정말로 ‘말 만드는 법’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낱말의 뿌리나 줄거리 토막만 가지고도 새 말을 잘 만들었던 옛말의 법을 찾아 내고 되살리지 못하는 한 한국말의 내면적인 생산성을 소생시킬 수 없고 그래서는 해일 같은 외국말의 위협을 견뎌 낼 수 없다. 이미 있는 낱말만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하자니까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등과 같이 책의 제목이며 단체의 이름들이 자꾸 길어 지기만 하는데, 이런 것은 간결성을 추구하는 언어 변화의 노력 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현상인 만큼 오래 가거나 두루 적용할 것이 못 된다. 요새 영화의 제목들은 아예 번역할 생각도 없이 발음만 한글로 옮겨 적는 것이 예사인데, 이것은 우리들이 외국 멋에 빠져서 함께 앓고 있는 유행성 언어 장애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일본말에서 들여 온 근대적인 술어들과 주로 영어 문화권에서 들어온 외래어 및 외국어들은 양적으로 엄청나지만 그나마 아직 한자말 만큼 구조적인 영향을 깊게 끼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드세어 지는 영어의 위세는 어휘의 차원을 넘은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영어로 강의하면 수당을 더 준다. 어느 기업체 사무실에서는 사원들이 앞으로 영어만 쓰게 할 것이라 한다. 영어를 배우는 갖가지 도구와 비법에 대한 상업 광고가 각종 대중 매체마다 넘치고 있다. 영어의 공용화 운동이 집안에서 자생하는 일은 전에 없던 일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 하거나, 젖먹이를 겨우 면한 아이들에게까지 상업용 언어를 가르치자 하는 것은 수천 년 동안 받은 중국말의 해독과는 비길 수도 없이 더 깊고 전면적인 침해를, 모국어로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능력을 익히며 정신 세계의 틀을 짜지 못한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단 몇 세대 안에 한국말에 받아들이자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 또한 바로 한국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집단 자해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말의 이런 총체적인 위기에 문지기, 청지기, 산지기처럼 “말지기”가 되어야 할 국어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을 가다듬고 지키고 하는 일 같은 것은 애당초 학자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등급 낮은 응용과 실용에 또는 심지어 외도에 속하는 것이다. 오로지 끊임 없는 이론의 추구만이 순수한 학문의 임무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듯한 이론이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론이 만발한 서양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올 새 없이 들여다가 실은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말에 적용하고 실험하기가 바쁘다. 한국말의 실체를 파악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미국 언어학의 대가와 그 아류들의 이론이 얼마나 화려하고 신속하게 변신하는지 그 뒤만 밟자 해도 착실한 학자의 일생이 모자라는데. 그래서 적당한 지점에서 추종을 멈추고 마무리하는 것이 슬기로운 선택이다. 무슨 언어학, 무슨 이론들이 쏟아져 들어와도 한국말 자체에 대한 지식은 더불어 깊어 지고 세밀해 지지 않는 것이 문제고, 이것을 문제로 알지 못하는 것이 더 깊은 병이다.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례들을 이렇게 설명해 보고 저렇게 해석해 보고, 선배들이 세운 체계를 조금 바꿔 보거나 크게 비틀어 볼 뿐이고, 사실의 발견이 별로 없다. 누구나 아는 정도를 족하게 여기고 그 이상으로 자세히 알아 보려 하지를 않는다. 그 원인은 서양 언어학이 치밀한 기술 언어학의 노고를 치른 위에 이론의 꽃을 피우는 것인데, 우리들은 그런 필수 과목을 고생으로만 여기고 피한 채 남이 공들인 꽃과 열매만 탐하는 데 있다. 씨를 만들 줄 몰라서 해마다 페추니아 모종을 수입해 와야 한다는 우리 나라 원예계와 다름이 없다. 히아투스 회피 현상은 일반 언어학의 법칙이나 실사구시 회피 현상은 우리 국어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론이 앞서서 사실을 연역하면 어디서든 왜곡하기 쉽다. 사실에서 이론이 귀납되도록 공을 들이면 가장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동학의 <동경 대전>에 “修者 如虛而有實 聞者 如實而有虛也”(닦는 이는 속이 빈 듯 해도 차고, 듣는 이는 속이 찬 듯 해도 비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국어학이 탁상 이론에 머무는 것은 외국 취향의 이론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어학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한 체계를 이룩한 음운학 분야에서 현대 한국말의 홑홀소리는 열 개라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어 있다. /ㅏ, ㅐ, ㅓ, ㅔ, ㅗ, ㅜ, ㅡ, ㅣ/ 여덟 개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없지만, /ㅚ, ㅟ/ 두 개나 또는 그 가운데 하나 /ㅚ/는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반론이 소수 의견으로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권위자들이 이 둘을 홑홀소리로 인정하기 때문인지 이 둘이 포함된 열 개로 표준 발음법이 제정되었다. /ㅚ/는 [ ]로, /ㅟ/는 [y]로 곧 홑홀소리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나, 겹홀소리로, 말하자면 /ㅚ/는 [we]로, /ㅟ/는 [wi]나 [ i]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한다는 것이 표준 발음법의 규정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홑홀소리 [ ]와 [y]는 7 대 이상의 서울 토박이인 내가 대학교에 가서 음성학 시간에야 입을 삐죽여 가며 어렵게 배운 희한한 소리들이다. 이 소리들은 내 주변의 어떤 어른들, 어떤 친척한테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해마다 40 명 이상씩 전국적인 방언 배경을 가지고 들어오는 국문과 학생들을 20 년 가까이 가르치면서 이런 소리를 제대로 내는 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소리는 전국 어디서도 적어도 젊은 세대한테는 들어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50 명 가량의 서울 토박이 노인들을 찾아 조사하며 녹음도 해 보았지만, 이런 소리를 확실하게 발음하는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의 서울말 조사는 이전에 아무 국어학자도 내놓고 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들을 표준 발음이라고 학생들에게 정확히 가르칠 수 있는 국어 교사는 각급 학교에 또 열의 하나 아니면 백의 하나나 있을 것인가? 아마 천의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국어의 표준음이 될 수 있었던가? 그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홑홀소리 열 개로 체계를 짤 경우에 비교적 안정감이 있는 틀거지가 갖추어 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ㅟ/와 /ㅚ/를 빼면 뒤 홀소리 네 개는 입술 안 둥근 소리와 입술 둥근 소리로 두 쌍을 이루지만, 앞 홀소리 두 개는 입술 안 둥근 소리만 남아 허전해 진다. /ㅚ/ 하나만 빼도 빈 자리가 많이 생겨 균형미를 잃게 된다. 이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다다익선으로 근거가 박약한 두 소리를 집어 넣어 이른 바 현대 한국말의 홀소리 체계라고 내세우는 일에 국어 음운학자들 다수가 동의한 것이다. 틀 맞추기라는 명분 아래 이론 체계를 볼 품 있게 하고 보니 그에 따른 언어 규범은 실체와 멀어 져 공허하게 되고 말았는데도. 이처럼 허망한 것이 표준 발음법이라는 국가 규범의 권위를 입었다고 교육, 출판, 언론 매체를 통해서 우리네 말글살이를 압제하고 있다.

게다가 개화기부터 지금까지 한글과 한자의 힘겨루기가 끝나지 않은 가운데 말본과 문법의 씨름이 학계를 양분해 왔다. 외적이 나라를 점령한 때에는 온 국어학계가 합심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언어 혁명을 단숨에 성공시켰고 기념비적인 <큰 사전>도 이루어 냈건만, 외적이 물러간 뒤로는 파가 갈리어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문제에서 거의 감정적으로까지 대물림을 하며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것은 국어학이 견실해 지는 것을 방해하는 국어학계의 사회적인 요인이다. 따로 모여 세력을 이루고 번번이 맞서느니 글자 논쟁과 용어 전쟁으로 대내적인 소모전에 백 년도 모자란다. 해마다 수시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유를 들어 정부에 진정하며 한자를 쓰고 가르쳐야 한다 하면 다른 쪽에서도 가만히 있다가는 진다는 식으로 역시 해묵은 주장을 맞세워 진정도 하고 반박 성명도 낸다. 한 쪽에서 한자말을 비롯한 외래어의 폐해를 덜어 보려고 갖은 애를 써서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내면, 다른 쪽에서는 조롱이나 하며 재를 뿌린다. “비행기”를 “날틀”이라 하면 어떠냐 하는 것은 실은 조롱하는 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이 쪽에서는 “삼각형”을 “세모꼴”로 가르치던 교과서가 지금은 “삼각형”으로 되돌아 갔다 하며 한자말의 승리를 자랑한다. 어법에 맞게 만든 새 말은 비록 생경해서 당장은 환영 받지 못해도 언젠가는 결국 살아나게 되어 있으므로 한 때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한글만 쓰기로 말본으로 한글 맞춤법을 주도해 오던 단체는 1988년을 고비로 해서 한자 섞어 쓰기로 문법으로 힘을 키워 마침내 국가 권력을 힘입은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한글 맞춤법이 민간 단체에서 만든 것이라 권위가 없으니 본격적인 국가 규범으로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 민간 단체는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그 민간 단체가 만든 한글 맞춤법을 가지고 한결 저열한 방향으로 바꾸면서도 이름은 바꾸지 않은 채 문교부 장관의 권위를 입혀 낸 뒤의 일이다. 띄어쓰기를 강화하는 것이 우리들의 언어 생활과 언어 의식을 향상시킬 줄로 잘 알 만 한 국어학자들 일파가 주장해서 고작 띄어 쓰면 어떻고 붙여 쓴들 어떠리 하면서 사람의 성과 이름을 한글 맞춤법에서는 붙여 쓰라 한 것을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띄어 쓰게 하기도 하고 두 음절 짜리 한자말 여섯 개 말고는 아무 한자말에도 사이시옷을 쓸 수 없다는 식으로 막무가내의 규범을 세웠으나 그것이 국가 규범이기에 민간에서 자생한 더 나은 모체를 소리 없이 밟아 없었던 듯이 할 수 있었다. 나쁜 돈 때문에 좋은 돈이 없어 진다는 그레샴 법칙, 그것이 어찌 우리네 국어학계를 위해 등장한 것이었으랴? 학술 또는 문화 분야에서 국가 지상주의가 이보다 더 큰 폐단을 낸 경우가 있을까? 이 세력은 국립 기관으로 발전해서 이후의 언어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일취월장하나 1990년에 설립된 뒤로 주요 인사가 위의 한 쪽 세력 가운데서도 더 좁은 특정 대학의 특정 학과 출신을 벗어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국록을 먹는 기관의 마땅한 처사인가? 이 점에서 이 기관은 이들이 멸시한 여느 민간 단체와 다름이 없다. 특정한 학벌이 주도하는 한 그 언어 정책과 언어 규범은 결코 원만한 것이 될 수 없고 온 국민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이제까지 국가의 이름으로 명문화한 모든 언어 규범을 버리고 자율화하자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이런 형편이니, 언제 무슨 계기로 우리 국어학계가 하나가 돼서 한국말 멸종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갈 충실한 말지기가 될 것인가? 이 대로는 가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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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말글살이의 현실 (last edited 2009-04-03 07:26:05 by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