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월은 http://cafe3.ktdom.com/vietvet/technote/read.cgi?board=Free&nnew=2&y_number=9405에 최진사라는 필명을 가지신 분이 올린 내용을 옮겨온 것 입니다. 원글은 "2005년 1월 25일 11:42"제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글은 아니지만, 박정희와 관련한 글월을 모으면서 다방면의 사료를 수집한다는 측면에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아마도 이 글은 직지에 올리는 글 중에 유일하게 지고지선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을 직지에 올리는 이유는 딱 하나, 정말 아름다운 글, 정신대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님이 쓰신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 그리고 여성 인권 박물관을 소개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울러 박정희의 친일관련 글월은 박정희 혈서를 보십시오. - 2010년 5월 8일, CEDT 직지지기 김민수.

월남참전과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시대의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 베트남 방문 참전용사 격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축적과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다.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해 주월 장병들을 격려하는 박 대통령.-동아일보 자료사진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18년을 이해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코끼리를 그리는 작업이다.” ‘2004 청소년 역사강좌’의 제9강으로 ‘박정희 시대의 국제관계와 외교정책’을 주제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강연을 한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는 뒷발만, 어떤 이는 꼬리만, 또 어떤 이는 코만 그리고서 “이것이 진짜 코끼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박정희 시대는 그 공과를 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홍 교수는 “박정희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안보가 필수 전제조건이라고 봤다”면서 “이를 위해 박정희의 외교정책은 대미 동맹관계를 활용해 ‘안보우산’을 확보하려는 실용적 경제외교에 집중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5•16 전후 국내외 상황

엄청난 생산력과 기술력을 가진 선진 산업국가 일본의 공산화를 막음으로써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한 일종의 전초기지였다. 6•25전쟁 후 산업시설이 초토화된 한국은 국가예산의 6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그러나 1957년부터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원조를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원조 규모를 축소(1957년 3억8300만달러→1959년 2억2200만달러)하기 시작했다. 1961년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25%,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 수준이었다.

이 상황에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에서 “경제 재건을 통해 절대빈곤에서 탈출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군사정부 2년 7개월 동안 외교관계 수립국가는 23개국에서 76개국으로 늘었다.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에 차관교섭 사절을 파견해 외자 도입을 위한 경제외교를 강화했다.

베트남전 참전의 의미

미국의 원조가 줄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투자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할 경우 주한미군을 빼낼 가능성이 높아 안보 불안도 가중됐다.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 경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고려했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미국 방문 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미국이 요청하면 파병할 용의가 있다”며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했다.

어떤 지도자라도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것은 최후의 선택이다. 박정희는 파병으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파병으로 한국군 50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1만6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참전 군인이 국내로 송금한 액수를 포함해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총 10억3600만달러(1965∼72년)에 이르렀다. 파병 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회복됐고 주한미군은 현상 유지됨으로써 세계 각국이 한국에 투자하기 위한 안정적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닉슨 독트린과 핵무기 개발 시도

미국 닉슨 대통령은 1969년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천명했다.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했다. 1968년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는(1•21사태) 등 북한의 군사적 도발도 급증했다. 미국의 안보공약이 신뢰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방위산업을 신장시키고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려 했다. 핵무기 개발 시도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불안하게 하면 독자적으로 핵 개발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한 다목적 카드였다.

이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노골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북한 군사력이 당초 추정보다 훨씬 강화됐음을 위성사진 자료 분석을 통해 확인한 후 철군정책을 거둬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1979년 5월 카터-박정희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동맹관계가 재확인됨으로써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 선행조건인 미국의 안보공약이 유지됐다.


엮인 글

참고 자료

월남전과 박정희 (last edited 2010-05-10 20:55:59 by 78-23-6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