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직지 자유 문서이다. 가능한 입력본 글법을 따라서 올리려고 애쓰며, 중국글자는 FootNote로 달았다. 외솔 선생의 글들이 아직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지만, 요즘 한국에서 돌아가는 영어전용을 바라보면서 답답한 마음으로 입력을 시작한다. 직지지기 김민수 2005년 11월 23일 11:20PM EST

책 표지

Contents

  1. 책 표지
    1. 첫째 가름, 한글만 쓰기의 주장의 까닭
      1. <一> 교육의 진정한 효과를 겨누기 위하여
        1. 우리 나라에서의 한자 교육의 폐해
        2. 일본에서의 한자 교육의 폐해
        3. 한글만 쓰기의 교육상 이익
          1. 한글만 쓰기(사용)는 한자를 가르치고 배우기에 정력·시간·경제·생명의 낭비·소모를 막는다.
          2. 교육의 참된 본질적 효과를 거두게 된다.
          3. 기억하는 교육에서 생각하는 교육에로
      2. <二> 기계와의 효과
      3. <三> 겨레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위하여
      4. <四> 글자 발달의 원리에 순응하기 위하여
        1. 글자 발달의 다섯 단계
        2. 한글은 세계 글자 가운에 가장 발단한 훌륭한 글자이다
        3. 한글만 쓰기는 전 인류 5천년 경험을 살려쓰는 것이 된다.
      5. <五> 시대 정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
        1. 현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이다
        2.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6. <六> 겨레의 독립 자존의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7. <七>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다
        1. 근대화를 해야 한다
        2. 겨레의 주체성을 확립하여야 한다
        3. 한글은 겨레 힘의 샘터이다
    2. 두째 가름, 한글만 쓰기에 대한 의혹
      1. 첫째 조각, 글자론적 의혹
        1. 한자말의 뜻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1. (ㄱ) 말은 현시적으로 사용된다.
          2. (ㄴ) 말은 평판적으로 사용된다.
          3. (ㄷ) 말은 그 소리가 바로 가르키려는 대상(몬이나 일)과 연결됨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4. (ㄹ) 낱말 성립의 사실적 심리적 과정과 낱말을 배우는 심리적 과정과는 서로 일치하지 아니한 것이다.
          5. (ㅁ) 한자를 알고 그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말뜻잡기에 불리한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6. (ㅂ) 한자로 적힌 말이 다 우리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한자를 안쓰면 "딴뜻말"(한소리 딴듯말)의 구별을 할 수 없어, 결국 그 말의 뜻을 잡지 못한다고
        3. 한자를 안쓰면 사람의 성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되겠다 한다
        4. 한자는 뜻글자로서 시각적으로 단번에 그 뜻을 잡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한다
        5. 한자 1,500~3,000자쯤은 배우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한다
        6. 한자를 안 쓰면 글읽기가 더디다고 한다
        7. 한자말이 말만드는 힘이 푸지다. 배우기는 힘드나 이용율(효율성)이 매우 높다
        8. 한자는 한 자로서 제뜻을 가지고 있어, 그 운용이 자유자재하다고 찬양한다
        9. 한자는 남의 글자가 아니요, 우리 글자이라고 한다
      2. 두째 조각, 국어론적 의혹
        1. 우리말의 9할은 한자말이란 맹랑한 의혹
        2. 한글의 노릇(기능)은 저열하다, 고 한다
        3. 한글 맞춤법은 한자 지식 없이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큰 걱정을 한다
        4. 우리말은 과연 말만드는 힘(조어력)이 부족한 것일까?
      3. 세째 조각, 교육스런 의혹
          1. (1) 어떤이(ㅅ선)는 한자 안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한다.
          2. (2) 오늘날 학생은 한자말의 이해가 부족한 때문에, 책읽기를 제대로 못한다고 한다.
          3. (3) 어려운 한자는 기피하고, 쉬운 한글 공부한 하였기 때문에, 국민 지성의 저하를 가져와, 높은 이상, 넓은 견식, 정밀한 이론, 멋진 정취를 찾는 말글의 능력을 잃어버리어, 공부 태도와 인격 기르기와 품위 향상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4. (4) 한글 교육은 대학 교육을 질적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가로되: 한자말 지식이 부족한 때문에 이해력이 박약하고, 개념의 파악이 부정확하고, 말만드는 힘이 없고, 학술 표현이 부족하여서, 학생들의 강의를 듣고 답안을 쓰고, 논문을 작성하는 일들이 모두 좋지 못하여, 대학 교육의 질을 급속히 떨어뜨리고 있다. 고.
      4. 네째 조각, 학문론스런 의혹
          1. (1) 한자를 폐지하면, 학문이 전연 파멸한다고.
          2. (2) 어떤 반대론자는 다시 말한다: 한자·한문을 배우지 않으니, 동양 철학을 배울 수 없게 된다. 학문도 철학도 못 하게 되면,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고.
      5. 다섯째 조각, 문화론스런 의혹
      6. 여섯째 조각, 전용(올쓰기)에 대한 의혹
          1. (1) 한글은 우리글이라 해서 전용하자는 것인가? 의 의혹
          2. (2) 한자 주장자도 애국자이다. 고 한다.
          3. (3) 한자와 한글과를 섞어씀이 가장 이상적이다.
          4. (4) 일본을 보라고 한다.
          5. (5) 한자를 적대시하며, 한자말을 모조리 말살하려한다.
      7. 일곱째 조각, 기계화에 관한 의혹
      8. 여덜째 조각, 시기에 관한 의혹
      9. 아홉째 조각, 정부의 한글 전용 단행에 대한 의혹
          1. (1) 정치 군력으로써, 국민의 글자 생활을 바꿈은 옳지 못하다는 의혹.
        1. 첫째, 세계 각국의 글자·말씨 정책
          1. (一) 벨시아의 국어 정책
          2. (二) 아라비아말의 발전
          3. (三) 알바니아의 말글 반항 운동
          4. (四) 뿔가리아의 말글 정책
          5. (五) 알메니아의 겨렛말·겨렛글
          6. (六) 뒬끼예의 말글의 개혁
          7. (1) 뒬끼예와 케말 파샤
          8. (2) 케말 파샤의 글자 혁명
          9. ○ 뒬끼예의 묵은 글자
          10. ○ 케말 파샤의 글자 혁명
          11. (3) 케말 파샤의 말씨 정화 정책
          12. (4) 케말 파샤의 말씨 개혁
          13. (七) 러시아의 말씨 정책
          14. (八) 독일의 말씨 정책
          15. ◇ 역사의 개관 - 성장과 통일
          16. ◇ 독일의 국어 정책
          17. (九) 란드의 국어 정책
          18. (十) 뻴기예의 국어 정책
          19. (一一) 인도의 언어 정책
          20. ○ 인도의 통용어
          21. ○ 인도 24주 연방의 국어 문제
          22. (一二) 중국의 말글 정책
          23. (1) 중국의 말글의 과거와 현재
          24. (ㄱ) 중국의 글자
          25. (ㄴ) 진(秦) 시황의 글자 통제
          26. (ㄷ) 표준 문장어의 고정
          27. (ㄹ) 현대 중국의 방언
          28. (2) 국민 정부의 말씨 정책
          29. (ㄱ) 중국글자 입말삼기(口語化)
          30. (ㄴ) 중국의 로오마자
          31. (3) 중공의 글자 정책
          32. (一三) 일본의 말씨 정책
          33. (1) 일본의 말씨 정책의 세 가지 문제
          34. (2) 역사적 발전의 개관
          35. (3) 일본의 국자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까닭
          36. (4) 일본의 말씨 정책에 대한 비평
        2. 두째, 맺음말
    3. 세째 가름, 한글만 쓰기의 실천

첫째 가름, 한글만 쓰기의 주장의 까닭

나는, 한글만 쓰기에 대한 세인의 희혹을 풀어밝히기에 앞서어, 먼저 한글만 쓰기 주장의 까닦 또한 필요성을 간단히 말해 두어야 하겠다. 나는 가위 평생으로 한글만 쓰기를 외쳐 왔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한글 창제의 거룩한 뜻, 한글이 띠고난 사명, 한글의 과학성, 한글과 겨레의식, 한자의 해독, 한글의 세계 글자에서의 지위, …… 들을 다루었다(논하였다). 그러므로, 가는풀이는 나의 여러 지음1으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주 간단히 그 요지만을 들어 베풀기로 하겠다.

<一> 교육의 진정한 효과를 겨누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한자 교육의 폐해

한글만 쓰기는 교육의 본질적 효과를 거두고자 함이다. 교육의 참된 목적은 사람의 감정을 순화하고, 지식과 도덕을 닦아, 써 참된 사람을 만듦에 있고, 글자나 말씨는 그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교육의 수단인 글자는 지식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잘 하면 고만이다. 수단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시중하는 구실이 있을 뿐이다. 만약, 교육이 그 수단을 장만하기에 정력과 시간을 허비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는 여력이 없다면, 이는 본말을 전도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사실로, 이조 오백 년간의 서당 교육은 한문 학습에 온힘을 다 쏟고 말았기 때문에, 교육의 실질적 효과는 거의 공(빈탕)에 가까왔었다. 그 결과로, 인재는 고갈하고, 국사는 침체하여, 드디어 나라가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 나라의 교육은 국한문 혼용이기 때문에, 한자의 해독이 그다지 심하지는 않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수천 자의 한자도 그 해독의 큼은 실로 상상 이상이다.

일본에서의 한자 교육의 폐해

나는 이를 중시하기 위하여, 일본의 국어학자 호시나가 일본 문부성 주최로, 1919년 봄에 도오꾜오에서 열린 "때의 전람회"에 출품한 일본 국어 교육과 독일의 국어 교육과의 비교통계를 들어 보이겠다.

그러면 당시 일본에서는 이 어려운 한자를 소학교에서 얼마나 쓰고 있었는가 하면, 당시에 한자 연구가인 고또오2의 조사한 바에 기대건대, 독본 한자수가 1,360자, 독본밖의 것을 합산하여 2,600자이었다 한다. 이 2,600자의 한자를 배우기 때문에, 일본의 국어 교육이 저만큼 서양의 국어 교육보다 떨어졌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라 하겠다. 일본이 독일에 비기어, 시간은 거의 그 1/2이나 더 많이 쓰고서 그 효과는 그 1/6밖에 거두지 못한 손실의 원인이 뜻글자 한자 2,600자를 가르치기에 있었다. 이 손실은 다만 교육상 손실로만 볼 것이 아니다. 자세히 생각하면, 그것은 시간의 소실, 노력의 손실, 또 경제의 손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람의 생명 재산의 손실인 동시에, 국가 발전의 원동력의 손실인 것이다. 아아, 지긋지긋하다, 한자 2,600자의 값의 호되게 비쌈이여!

한글만 쓰기의 교육상 이익

한글만 쓰기(사용)는 한자를 가르치고 배우기에 정력·시간·경제·생명의 낭비·소모를 막는다.

한글은 옛날부터 하루 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글이란 말이 있음과 같이, 오늘날 어린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도 가기 전에, 벌써 쉬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아마도 집집마다의 어머니들이 잘 아는 바이다. 오늘의 맞춤법을 어렵다는 사람이 간혹 없잖아 있기도 하지마는, 이는 다 자기의 낡은 버릇에만 갇혀 있어, 새것을 알고자 조금의 힘도 쓰지 않는 사람일 따름이다.

교육의 참된 본질적 효과를 거두게 된다.

어려운 한자를 배우기에 세월을 허송하지 않게 되므로, 한글만 쓰기는, 완전히 겁풀 교육의 폐해를 버리고 알속 교육을 베풀어, 교육의 본질적 목적인 바탕스런 지식·기술의 내용을 얻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억하는 교육에서 생각하는 교육에로

인생 70 일생에서, 가장 자력 발달이 왕성한 시기는 여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동안이라 한다. 이때에 한자같은 어렵기 짝이 없는 기억 거리만을 공급하여, 아이들의 기억을 강요하는 것은, 교육상 심히 그릇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며, 그 시절의 아이가 물론 기억도 잘하는 터이므로, 그 기억 교재도 잘 배워서 잘 기억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진 것을 기억하기만 하고, 그 머리를 "사물을 생각하기"에 길들이지 않고 보면, 그 아이가 장래 어른이 되어서도 앞에 닥친 사물의 발생·성장·발전, 들에 관한 자발적 관찰과 진리 탐구와 처리하기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여, 인생의 앞길을 타개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드디어 인생 경쟁장속의 낙오자가 되고 말게 된다. 어떤이는 개탄한다: 오늘날 소학생의 지식이 가장 맡은 것은 아마도 한국·일본의 소학 졸업생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이나 일본의 초등 학교에서는 주로 기억 교재를 주입하여 이를 암기시키기에 교육 작용이 있는 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 대학생의 학문하는 능력이 가장 낮은 나라는 아마도 한국과 일본일 것이다고. 나는 항상 말하였다: 한국의 학생들의 공부는 소학에서 대학에 이르는 동안 피라믿 식임에 대하여, 서양 학생의 그것은 바로 그 반대로, 피라믿을 꺼구로 세운 것과 같다. 우리 나라의 학생들은 소학 시절에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키는 공부를 지독히 다해 놓았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는 사물에 관한 자발적 흥미와 진리 탐구의 여력이 없어져서, 다만 선생의 강의 노오트나 고대로 기억하여 기우 시험에 낙제나 안하면 된 걸로 생각한다고.

교육의 올바른 방법은 가장 지력 발달이 왕성한 소학 시절에 모든 학과에서 자발적인 흥미와 사고를 이치 단련하여서, 그 아이가 나이가 많아 가고, 학교가 높아 갈수록, 더욱더 생각하는 능력을 배양발휘하여, 진리를 천명하고 학문을 대성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소학 시절에 이천 자의 한자 기억을 강요함으로써, 그 "생각하기 능력"의 발달을 막는 것은 "사람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소만드는 순육3"이라 하겠다. 옛사람도 그릇된 교육을 "사람의 자식을 도적하는=해치는 것"4이라 하였다.

나는 여기서 교육적 효과로써, 한글만 쓰기의 첫째 근거를 삼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에서의 가장 근본스럽고 귀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식이 참된 사람이 되며, 사람의 고귀한 정신을 방양하여 착한 인생,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며, 또 모든 기계를 개발하고, 기술을 발달시켜, 사람살이를 더욱 편리하며, 각종 산업을 일으켜 풍성한 생활을 일삼게 하는 일들이 다 교육의 터전우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며, 교육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며, 학문과 도덕과 예술과 종교와 경제의 이상(가치)을 창조하게 한다. 곧 교육은 문화의 창조와 문명의 전승으로써, 가치 실현의 역사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요, 말과 글은, 이렇듯 고귀하고 중대한 교육의 기초 수단인즉, 교육적 효과의 여하가 그 글자의 선택 기준이 됨은 당연한 사리임이 틀림없다. 내가 교육의 참된 효과로써 한글 올쓰기5 주장의 "첫째 원리"로 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二> 기계와의 효과

글자 사용을 기계삼기(기계화하기)에는, 그 글자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서양에서도, 그들이 사용하는 26 낱의 로오마자로써 기계삼기를 자유로 하고 있다. 글자의 수를 불우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계삼기가 전연 불가능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도 200자의 한자를 일문에 섞어서 모노타입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렇지마는, 많은 수의 글자로써 기계에 올리는 설비는, 간단함·경제성·편리성이 없을 뿐 아니라, 돈과 노력은 많이 들면서 그 효용의 분수는 매우 적기 때문에, 기계삼기의 본목적에 들어맞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보통의 타자기, 텔레타입, 라이노타입 같은 것은 30자 이내의 자수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한자 1,300자 같은 것은 도저히 기계삼기에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의 한글은 24자로서, 로오마자보다도 더 편리하다. 그러므로, 기계삼기의 효과를 거두려면, 한자 섞어쓰는 일은 그만두고, 한글만으로써 국민의 글자 생활의 전면을 덮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한글만 쓰기"의 큰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1. 한자는 기계삼기에 부적당하다.
  2. 한글 타자기, 한글 텔레타입, 한글 라이노타입, 한글 콤퓨터를 개발, 제조, 사용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정치·경제·문화·사회 생활을 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다.
  3. 한글 기계삼기의 공효는 실로 크다. 아직 우리 생활이 이러한 기계를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그 공효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 선진 사회에서의 실제 생활을 몸소 가서 체험하고 보면, 이런 기계의 사용 여부가 곧 그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임을 깨칠 수 있을 것이다.

<三> 겨레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위하여

우리 겨레 문화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한당6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고, 또 근년에는 일본 문화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고래로 우리에게 독특한 문화의 창조됨이 없지 않았건마는, 바깥 문화의 세력 때문에, 제 스스로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이제 겨레 중흥을 기약하는 오늘에 있어서, 한글만 쓰기로 함으로써 겨레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기할 수 있다.

  1. 한글은 배달 겨레의 독창력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겨레 문화의 최송의 공탑이다. 동시에 이것은 모든 새 문화 창조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글은 우리 겨레의 창조력의 결과이자, 또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2.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가, 조상들의 창조력을 계승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충분히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독특의 겨레 문화를 창조·선양할 수 있다. 우리 문화 전통은 빛나고, 우리의 재능은 세계적으로 빼어난다. 한글만 쓰기는능히 빛난 전통을 잇고 타고난 자질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으니, 세계에 독특한 "배달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어, "빛은 동방으로부터"란 옛사람의 기대를 실현시킬 수 있겠다.
  3. 배달말의 순당한 발달을 기대할 수 있다.

배달 겨레의 나라 생활, 사회 생활은 온전히 제말 곧 배달말로 하여 왔었다. 나라이름, 따이름, 벼슬이름, 사람이름, 가정 생활의 친족의 이름, 사회 생활에서의 온갖 사물의 이름, 들들이 다 배달말로 되어 오던 것이, 신라 중엽에서부터 당나라의 한문화의 영향을 입어, 나라이름, 벼슬이름, 따이름, 들들이 차차 한자말로 뒤쳐지게 되어, 바깥 문화에 대한 추종 심리는 내것에 대한 천시냉대로 되어, 신라인의 고안인 "이두"글자가 제 구실을 감당함에 이르지 못하고, 이조의 세종 대왕이 훌륭한 글자 한글을 지어내었건마는, 한글 역시 온전히 제 구실을하게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긴 세월은 아니지마는, 일본의 침략은 우리 문화, 우리말에 몹쓸 속박과 강압을 주어, 거의 우리 말글의 사멸을 불러일으킬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사정에서, 배달말은 쭈그러들고, 여려 지어, 사회적으로 유력한 말씨는 모두 한자말로 되고, 순수한 배달말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쯤 되었다. 해방 후 겨레의 독립자유의 사상이 크게 떨쳐 왔지마는, 한자를 수위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새말에는 여전히 한자말이 횡행할 뿐이요, 배달말은 행정·학문, 들들의 들파에는 쓰히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자는 진서이요, 한자말은 상등말이란 관념이 여전히 지도층 사람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참 가탄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한글만 쓰기를 적극 추진·실천함으로, 낡은 권위를 허물벗듯이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존심과 독창 정신으로써, 모든 생활 영역에 배달말을 등장시켜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세계의 식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한글과 최근 일본의 언어학자까지 배달말의 말본의 우수성을 인정고조하는 배달말을 함께 높이고 다듬고 키우고 불움으로써 그 고유의 성능을 완전히 발휘시켜서, 그 순리스럽고 당연스런 발달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四> 글자 발달의 원리에 순응하기 위하여

세계 글자 발달 계단으로 보아, 한글은 그 최고 계단에 딸린 것으로, 가장 좋은 글자임에 틀림없다.

글자 발달의 다섯 단계

사람의 글자의 지음은, 그 의사 표시를 시간 공간의 제한을 넘어, 길이 또 널리 전하고자 함에 그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1) 매듭글자7, (2) 그림글자, (3) 뜻글자 또는 낱말글자, (4) 소리글자로 발달되어 왔다. 소리 글자에도 두 계단이 있으니: 첫째는 낱내글자(일본의 "가나"같은 것)이니, 이는 아직 닿소리와 홀소리의 분화가 이뤄지지 않고, 다만 닿소리와 홀소리를 합하여 이룬 낱내(음절)을 한 글자로 나타낸 것이요; 두째는 낱소리 글자 또는 소리뭇 글자8이니, 이는 닿소리와 홀소리가 분화되어, 닿소리의 하나하나를, 또 홀소리의 하나하나를 하나의 글자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즉, 낱소리글자9는 인류가 지어낸 가장 발달한 글자로서, 최상의 글자인데, 오늘 세계에 널리 쓰히고 있는 로오마자와 우리의 한글이 이의 대표스런 글자이다. 그런데, 로오마자는 멀리 오천년 전의 이집뜨의 본뜨기글자10에서 출발하여 수천년 동안 여러 겨레의 손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낱소리글자로 발달한 것임에 대하여, 우리 한글은 배달 겨레의 빼어난 슬기로 말미암아 세종 대왕 한 분이 당대에 연구·완성·반포한 것으로서, 그 조직과 할용이 과학성을 완전히 구현하여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20세기 과학시대에서도 그 이상의 고안을 볼 수 없는 인류 최선의 독창적 과학적 글자로서, "한 소리 한 글자", 또 "한 글자 한 소리"의, 다른 글자의 추종을 허락하쟎는 영광의 글자이다. 이는 절로 우리 한국사람의 자화자찬의 망언이 아니요, 세계 지식인의 공인하는 바이다.

한글은 세계 글자 가운에 가장 발단한 훌륭한 글자이다

인류 역사 있는 지 오천년에, 각 겨레의 우수 분자들이 지어낸 글자수가 2백여가 있지마는, 이러한 글자로서의 과학적 조건을 구비한 글자는 오직 한글 하나뿐이라 함이 조금의 에누리도 억는 사실이라면, 오늘의 배달 겨레가 제가 물려받아 지니고 있는 한글의 참값에 대하여, 깊은 깨침과 높은 자랑을 품고서, 한글을 높여쓰자는 "한글만 쓰기" 운동에 적극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만 쓰기는 전 인류 5천년 경험을 살려쓰는 것이 된다.

한글만 쓰기는 다만 우리 조상의 문화 유산을 살리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전 인류의 오천 년 경험을 가장 합리적으로 살려쓰는 것이 되나니: 이에 대하여 또 무슨 다른 소견이 있을수 없다.

<五> 시대 정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

사람은 공간적 존재인 동시에 또 시대의 아들이다. 따라, 사람은 그 시대 정신의 요청에 순응하여야 그 개인적 또 국가적 살음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대 정신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현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이다

한 나라가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하려면, 그 사회 구성 분자인 국민대중의 지식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80~90%의 글소경을 가진 나라는 도저히 민주주의스런 나라가 될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명목상의 민주 나라일 뿐이요, 그 실질에서는 민주주의가 행할 수 없다. 국민 대다수가 글자를 몰라서 작대기 선거를 하고는 민주정치는 이름뿐이요 실지가 아니라. 대중의 지식 수준을 높히자면 무엇보다도 배우기 쉽고 쓰기도 쉬운 글자로써 교육을 받고 생활을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은 참으로 모든 과학스런 원리를 갖추어 있을 뿐 아니라, 또 가장 쉬운 글이다. 영어의 A자가 9가지로 소리나고, E자가 11가지로 발음되는 것하고 비교한다면, "한 자 한 소리", "한 소리 한 자"로 된 한글은 참으로 쉬운 글, 좋은 글이다. 이렇듯 쉽고 훌륭한 글자를 가졌으니, 우리는 마땅히 시대의 요구인 대중의 지식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백 퍼어센뜨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한글만 쓰기는 민주주의 시대정신의 절대적 요구이다.

그뿐 아니라, 한글은 그 탄생에서부터 대중 교화의 사명을 띠고 난 글자이니, 이도 또한 전 세계 글자가운데 오직 하나인 특징이다. 인류의 글자는, 그 초기에 있어, 그 사회의 소수의 치자계급이, 그 속에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어 다스리는 방책을 담아 놓고, 제집 자손들의 교육에 이용하는 연모이었다. 그래서, 글자는 소수인의 전유물로서, 일반 민중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던 것이었다. 이것이 대중의 갈라가짐이 된 것은 장구한 세월에, 일반 대중의 항쟁·분투의 결과로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의 한글은, 아예 일반 민중의 지적 개발과 생활의 편익을 위하여 창제된 것이니, 이는 확실히 인류 문화사상 특기할 만한 큰 사건이라 하겠다. 세종 대왕은 훈민 정음 첫머리에 한글 창제의 본의가 이러한 것임을 밝게 보이었음을, 오늘의 우리가 볼 수 있다. 참 갸륵하다. 세종 대왕은, 500년 뒤의 과학 시대를 미리보고서, 이 겨레에게 한글이란 생활의 무기를 지어 주셨다! 우리는 이 고마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배은망덕은 사람으로서의 최대의 허물이니라.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 8호가 작년(1968) 말에 달을 열 바퀴 돌고 예정대로 태평양으로 돌아왔고, 금년 7월에는 아폴로 11호가 달세계에 상륙하여, 세 우주인이 3분간 달나라를 산보하면서 여러 시험물을 주워서 돌아올 예정이라 하며; 소련은 금년 정초에 비너스 6호를 발사하였는데, 5월에는 금성에 도달하리라 한다. 오늘의 과학은 모든 신비를 헤치고 또 우주를 정복하려 하고 있다. 산 사람의 염통을 옮겨심으며, 생명 창조의 신비에까지 접근하려 한다. 이러한 과학 시대에 살면서 태곳적 생각 그대로 지니고서 그대로 살려는 것은 너무도 무감각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이 과학의 시대에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는 글자 -- 글자의 사용방법들을 옛 모양 그대로 하겠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마땅히 쉬운 한글만을 씀으로써 과학의 발달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의 대학 세종 대왕은 우리 후손들에게 과학 시대에 살아 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과학의 글자 한글을 지어서 길러준 것 이다.

<六> 겨레의 독립 자존의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현대는 겨레의 독립 자존의 시대이다.

검둥이 종이 해방된 것은 옛날 이야기이요, 또 세 개의 독립 국가밖에 없다는 것은 1945년까지의 일이요, 20세기 후반기 오늘날은 검은 대륙이 완전히 해방되어, 거기에 42개의 독립 나라가 생기었다.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졌다던 검은 대륙의 사람들이 이렇듯 완전한 해방을 얻었으니, 다른 곳의 약소 겨레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다 떨치고 일어서지 않을 리가 있나? 근세의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어, 자유 없는 종의 신세에 허덕이던 세계 도처의 약소한 겨레가 각각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래서, 국제 연합(N.U.)의 회원국은 125를 세게 되었다. 국제 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까지 친다면, 아마도 140나라가 될 것 같다.

우리 배달 겨레도 금번 세계 대전의 끝남과 함께 해방되고 독립되었다. 인제 우리가 크게 깨닫고 깊이 반성하여, 겨레의 독립자존의 정신을 진작하고, 주체성을 확립하여, 나라를 영구부동의 반석 우에 굳건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만 쓰기는 이 독립자존의 정신을 고취하는 가장 근본스럽고 또 가장 좋은 방도이다. 이를 교육에 실시하여 어린 마음과 젊은 가슴에 제겨레의 문화를 존중하는 정신, 나아가서는 독창력을 발휘하여 제 문화를 개선진보시키려는 의욕을 기르는 것은 최대 최긴요의 사업이다. 또 한글만 쓰기를 국민 생활의 각분야에 실시함으로써 국민에게 자존심, 독립심을 기르며, 이러한 무형 문화에 대한 자존 자중의 마음은 물질 생활에도 미치어, 제 강산을 사랑하고, 제 나라의 소산물을 사랑하며, 제겨레의 제품을 존중하게 되나니, 이리하여야만 가히 겨레 자존의 시대에 처할 만한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내 글을, 내 정신 문화를, 내 물질 문화를 사랑하는 데에만 겨레의 의의와 겨레의 생존권이 있으며, 겨레의 자랑, 겨레의 영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옛말에, "사람은 반드시 제스스로를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저를 업신여긴다"()고 하였다. 나는 부르짖고자 한다: ---

우리는 남에게 존경을 얻고자 하거든 반드시 먼저 제 스스로를 존경하여야 한다. 고.

이는 개인 생활에서나 겨레 생활에서나 나라 생활에서 변ㅎ지 않는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식자가운데는, 제나라 과학스런 글자 한글을 천시하고 한자명함을 가지고 미국에 갔다가, 외국 지식인들로부터 제글 멸시하는 태도에 대하여 울린 경종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종래 "자기 멸시"의 제스스로의 태도에 대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백을 하는 이를 여럿 보았다. 남게에 멸시당함이 물론 수치이다. 그러나, 제가 제스스로에게 멸시당함은 그보다 더한 수치임을 깨쳐야 한다. 한글만 쓰기는 종래 한글은언문으로 천시하고 한자는 진서로 존상하던 사대자비의 정신을 개혁광정하기에 가장 근본수단이 되는 것임을 깨쳐야 한다.

우리는 세계 인류를 사랑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제 겨레, 제 동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인류 문화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제 겨레 문화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은 배달 겨레의 장구한 역사 생활에서 창조된 최선의 문화, 최대의 보배인 동시에, 또 최량의 생활의 무기, 문화의 무기로서, 배달 겨레의 영구한 장래에 밝은 광명을 던져 주는 것임을 깊이 깨쳐야 한다.

<七>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는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나라에 살음을 누리고 있다. 정신적 및 육체적 힘을 다하여 이 고귀한 사명을 이뤄내는 것만이 겨레된 사람의 최고의 포부이다. 이 훌륭한 포부를 실현하려면, 우리의 할일은 다음과 같다.

근대화를 해야 한다

서양 사회의 근대화는, 죽은말인 라띤말의 절대적인 오랜 낡은 권위를 타파하고, 유럽의 각 겨레가 제각기 날마다 입으로 사용하는 제 겨레 말씨를 높혀쓰고, 널리 써서 학문·종교·정치·문학, 들에게 라띤말을 쓰지 않고, 제 말씨를 어엿이 쓰기 비롯한 데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세계 문화사를 읽는 이는 누구가 한가지로 다 아는 바이다.

동양인도 근대화를 하려면 또한 죽은말인 한자·한문의 낡은 권위를 벗어버리고, 현재 제 겨레의 입으로 날마다 쓰고 있는 말과 제 말을 적기에 가장 편리한 글자를 숭상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은 중국인에게나 일본인에게나 월남인에게나 내지 한국인에게나 무릇 오랜 세월에 한자 문화의 세력 아래에 있어 온 겨레에게는 다 마찬가지로 두루 들어맞는 진리이다. 제 겨레의 쉬운 말, 쉬운 글로써 학문과 종교와 정치와 여술과 모든 사회 생화을 평이하게 쉽게 원활하게 하는 것이 서양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다.

겨레의 주체성을 확립하여야 한다

한글은 근 오백 년 동안이나 북방 외족들에게 몹시 시달린 끝에 고려가 없어지고, 새로 세운 한양 조선에 이르러, 겨레의식의 통일과 함께 지어진 글자이다. 그러므로, 겨레의식을 높이들어, 겨레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먼저 겨레의 자립생활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겨레의 창조적 슬기로 말미암아 순수히 독장적으로 지저진 한글을 전용함(올씀)이 그 최선의 방도이다.

한글은 겨레 힘의 샘터이다

개인의 힘은 정신의 힘과 신체의 힘으로 가를 수 있는데, 육체의 힘은 정신의 힘의 명령 아래에서만 그 정당한 발동을 할 수 있다. 정신 곧 얼은 말과 글로 나타나나니; 말과 글은 곧 얼의 감각화한 것이다. 말은 얼을 나타내고, 글은 말을 나타낸다. 그러한즉, 얼·말·글은 셋이면서 하나이다. 배달 겨레의 얼이 가는 곳에 말과 글이 가고, 말과 글이 가는 곳에 또한 얼이 간다.

한글은 배달 겨레의 창조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겨레를 위하여, 겨레의 소용이 되고자 지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겨레얼이 들어 있으며, 겨레의 힘이 들어 있다. 말과 글은 겨레 문화를 애짓는(하는) 근본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한글은 모든 문화 활동의 근본이니, 겨레의 힘은 다 여기서 솟아나는 샘터인 것이다.

나라는 힘(Macht)이다. 힘을 기르지 않고는 나라의 발전, 백성의 행복을누릴 수 없다. 힘을 기르지 않고는 남북 통일이며 겨레 중흥은 다만 한 입으로 하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글이 본래 배달 겨레의 얼스런(정신적) 힘에서 생겨난 것인 동시에, 또 그것은 겨레얼의 힘을 기르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한글만 쓰기를 실시하는 것은 곧 겨레의 힘의 샘터를 마련하는 것이다. 지식의 발달도, 기술의 향상도, 예술의 진흥도, 산업의 발전도, 군사력의 강성함도 다 한글이란 샘터 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은 진실로 나라 힘의 샘터이다.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영구불식의 샘터이다.

한글만 쓰기는 겨레의 주체성을 확립시키며, 겨레 문화의 창조의욕을 북돋으며 겨레 문화의 독특한 따갈피()를 이룩하여 그 찬란한 번영을 겨누며, 시대의 정신을 구현하게 하여,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 과학과 기술의 진흥, 조국 근대화를 영구부동의 궤도우에 놓는 것이 되어,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이룩할 수 있게 한다. 한글은 겨레의 생명이요 자랑이며, 나라의 힘이요 소망이다. 한글만 쓰기로써 이 땅에 희망과 번영을 가져오자.

두째 가름, 한글만 쓰기에 대한 의혹

나는 앞에서 한글 쳉제의 본의, 한글이 띠고난 사명, 한글의 과하적 우수성, 들을 들어베풀어, 한글만으로써 우리 국민의 글씨 생활의 논낯을 덮을 수 있음을 말하고 또 현대의 합리적 생활, 겨레 문화의 자주적 발전, 시대 정신의 구현, 겨레 중흥의 사명의 성취를 위하여, 한글만 쓰기는 반드시 시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많은 말을 허비하였다. 이러한 점으로만 본다면, 아무도 아무런 의혹과 반대를 제기할 리가 없을 터이다. 그럼에도 매히쟎고, 그에 대한 의혹과 반대가 있음은 다만 한자 문제 때문이다.

우리 나라가 한자를빌어쓴 지가 이천여 년에, 모든 기록은 다 이로써 하였고, 한글이 생긴 뒤에도, 또 국한문을 섞어쓰기에서도 한자를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 한글만 쓰기에 대하여 많은 의혹을 품게 되는 것도 또한 자연의 형세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은 알고보면 다 전통과 버릇에 물든 주관적 의심과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칠 수 있다.

나는 풀고자 하는 그 의혹의 문제를 . 글자론, . 국어론, . 학문·교육론, . 전용론, . 개화론의 5 가지로 갈라서 말하겠다.

첫째 조각, 글자론적 의혹

이는 한자가 글자로서 한글보다 우수한 글자란 설자리에서 나오는 반대 또는 의혹이다.

한자말의 뜻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한자를 쓰지 않으면 한자말의 뜻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말에는 한자말이 매우 많다. 이 한자말은 반드시 한자를 거쳐서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느로 한자사용을 전폐하는 한글 전용은 국어를 알지 못하게 만든다. 함이다.

(ㄱ) 말은 현시적으로 사용된다.

이 생각은 한자말의 어원인 한자를 모르면 그 말뜻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 가정이 밑바탕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말은 그 말밑 곧 어원을 모르고도 넉넉히 그 말뜻을 깨칠 수 있다. 말은 돈과 같이, 현시적으로 또 평판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 함이 언어학 초보의 원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밥", "물", "나무" 같은 말을 누구나 조금도 의심없이 쓰고 있지마는, 그 말밑을 아는 사람은 아마 한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말밑은 모르고도 얼마든지 "사랑"이란 말을 자유로 쓴다. 500 년 전에는 "사랑하다"가 "생각하다"의 뜻으로 쓰였지마는, 오늘에는 그런 뜻은 조금도 없고, 오직 현시의 뜻 그대로만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말밑이 무엇인지, 또는 그 내력의 변천이 무엇인지도 아랑곳할 것 없이, 자유로 또 만족스리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쓰는 지전이 십원이면 십원으로 쓰면 그만이지, 그 십원이 옛날에는 몇 원으로 쓰였는지, 또 그것은 어떤 종이, 어떠한 색채로써 누구가 찍어내었는지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말은 돈과 마찬가지로 현시의 뜻을 쫓아쓰면 그만이요, 그 말밑 및 그 변천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다. 그 밑과 내력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에 관한 학자들의 전문적 천학 해명의 노력일 따름이다. 말씨 생활은 결코 만인이 다 언어학자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대론에 대한 통쾌한 밝은 답변이 있다. 해방후 중국서 돌아온 피천득 교수는 증언하였다. "내가 중국에 살아 보니, 중국인 대다수는 한자 한 자도 모르고 까막눈이면서도, 한자로 된 중국말을 곧잘 주고 받고 하더라"고. 하필 중국인 뿐이랴? 이제 갖온 서양인이 한국말을 배운다고 하자. "electricity=전기, school=학교"라고 배우면 그만이지, 그 밖에 한자 "", ""를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음은, 저 "house=집, father=아버지" 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ㄴ) 말은 평판적으로 사용된다.

말은 그 말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밑은 이제 완전히잊어버려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러한 완전히 말밑이 사려져 버린 낱말도 우리가 조금도 장애 없이 사용하고 있음은 평범한 허다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말밑을 알 수 있는 낱말들도 그 뒤쪽에 말밑을 더덕더덕 붙여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평판처럼 사용한다. 가령, 우리가 "사랑"의 말밑이 ""이란 한자에 있었고, 이 옛뜻은 "상각한다"로 쓰혔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의 말씨 생활에서 이러한 말밑스런 천착은조금도 필요가 없고, 다만 현재 표면적으로 나타난 뜻으로 씀으로써 만족하도 있다. 한자말에 "훤당()"이란 것이 있다. 이는 ""이라는 풀(, 시름 잊는 풀?)을 심어 있는 집이라 하는 말밑을 가지고 있지마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생각은 아니하고, 다만 현재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뜻 곧 통용 가치만으로 쓰고서 만족한다. "춘부장"()이란 말도 그 말밑은 어찌 되었던 간에, 남의 아버지를 높혀 말하는 것으로 쓴다. "저 사람은 집에 들면 판관이야!"의 "판관"은 평판적으로 "제 안해에 순종 잘하는 사람"으로만 씀으로 만족하고, "판관"이 "판관 사령"(使)의 줄어든 말임과, "판관"이 무엇이며, 더구나 "판관 사령"이 무엇임과, 또 그 "판관 사령"이 "안해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하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나 따위의 말밑스런 천착은 아니한다. 다만 그 평판적인 뜻이 통함으로써 만족한다. 더구나, 우리가 영어 같은 외국말을 배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누가 school의 말밑, country의 말밑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말(school, country)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불평을 하는가? 다만 school이 "학교"를, contry가 "나라"를 뜻하다는 것을 앎으로 만족하다. Radio란 말은 그 소리가 무엇을가리키는 것인가를 알면 고만이요, 그 말밑은 조금도 천착하려 들지도 않는다.

(ㄷ) 말은 그 소리가 바로 가르키려는 대상(몬이나 일)과 연결됨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한국의 어린 아이가 말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아도 알 일이다. "자동차"란 말소리가 바로 저 뿡뿡하며 달아가는 실물(자동차) 그것과 연결되는데에 말배움이 성립되는 것이요, 결코 ""라는 한자하고 연결되어서 비로서 말뜻을 깨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의 말씨 생활도 마찬가지다. 가령 전화로 들려오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아는 것은 결코 그 전화의 말이 한자하고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리요. 다만 그 전선을 타고 들려 오는말소리가 옛날의 청각 영상과 바로 연결됨에서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기괴하게도 그 의혹을 푸는 열쇠가 되는 보기는 한자말의 한자를 적기도 하고 보기도 할 줄 알면서도 그실 그 한자 자체는 잘 알지 못하는 일이다. 가령 "모자"의 한자는 ""인 줄 알면서도, 그 글자는 무슨 뜻의 글자인지는 모른다. 나는 어릴 적에 ""자를 "사모모"로 배웠다. 설령 ""는 "사모모"자로 안다손 치더라도, "사모"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며, 또 "사모"가 무엇을 뜻한다고 안다 하더라도, "모자"가 결코 "사모의 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 ""는 "모자모"자로 아는 것이 편하고 똑똑하다. "학교"의 ""의 ""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똑똑히 아는 이가 없으며, 대개 다 ""는 "학교교"자라고 한다. 이로써 보더라도 한자를 안 연후에 한자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을 먼저 배우고, 교육에 따라 그에 맞는 한자를 배우는 것임이 확실히다. 그러한즉, 한자말의 뜻깨침에는 그 한자를 꼭 알아야 한다는 이유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말은 돈과 같아, 현시세대로, 또 평판 그대로 사용하는 것임을 깊이 깨쳐야 한다. "전기"의 뜻을 똑똑히 가르치기 위하여는 한자 ""를 가르칠 것이 아니요, 오직 전기 그것의 현상과 힘을 실제적으로 관찰·실험하는 체험을 통하여 깨치게 함에 있다. 여기에 말씨의 원리와 함께 과학 교육의 원리가 병존한 것이다. 해방후 우리 교육자 가운데는 과학시간에 한자 가르치기에 열중한 선생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지식의 근본이 실제의 일몬()에 있다. 한학 서적 "대학()"에도 "격물치지(, 물건에 접하여 지식을 얻는다)"라 하였다. 한자 숭배자들은 오히려 한학의 근본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근보이 실제의 일몬에 있음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한자 그것에 지식의 근원이 있다고 그릇 인식하기 때문에, 과학시간에 실물보다도 한자를 가르치기에 열중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다 한자의 과도한 권위에 정신이 아히어, 하늘에서 타고난 밝은 마음의 거울이 흐려져 있는 한자 중독자의 망동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 중에는, "한자를 안 가르치면 무식해서 못 쓴다"고 함을 본다. 곧 유식 무식의 차별의 대종이, 일몬의 지식의 유무에 있지 않고, 다만 한자 지식의 있고 없음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자 중독자에 있어서는, 한자는 온갖 지식의 총체인 것이다. 한자를 떠나서는 한자말의 말뜻을 바로 깨치지 못한다는, 한글만 쓰기의 반대론자의 이론은, 지식의 본질을 모르는, 낡은 버릇에 사로잡힌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나의 입론이 다만 오로지 한글만 쓰기를 억지로 세우기 위한 말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고서, 나의 풀이에 승복을 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와 반대 입장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저 내지 반대하는 이 이기문() 님의 말을 끄어대어서, 나의 이론이 결코 편협한 전용론자의 고집이 아님을 증거댐으로써, 그 미혹을 풀기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

"학교"란 말은 "학교"로 적으면 그만이다. 거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글자는 말은 적는 부호이라 함은 현대 언어학의 가장 기초적 이론의 하나로서, 언어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 신기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사리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언어학이 비교적 새로운 학문인 탓으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말씨와 글자에 관한 의논은 개탄할이만큼 현대 언어학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자의 계속 사용을 주장한 글들을 읽고 느낀 것은, 그 대부분이 실은 한글 전용론자의 입론을 더욱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그들의 내용은 켸켸묵은 답답한 것을이었다. 고.

참 통쾌한 말이다. 그런 켸켸묵은 이론으로써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짱박이에의 한 침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기문 님은 반대론을펴고 있으니, 그 반대의 까닭은 다른데에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그 기회에 풀어밝히기로 하고, 여기서는 잠깐 잡아두리고 한다.)

"한글 전용을 하기 위하여, 한자 2,000자는 꼭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나는 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의 심리에서는, 한자로 된 말이 어찌 한자를 떠나서 해득할 수 있겠는가? 한글 전용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자 지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라고 자칭한다. 한자가 근본이요, 한자말은 여기서 생긴 것이란 성립의 본말이 분명한 인식이 그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씨 성립의 역사적 혹은 방법적 사실과, 밀씨 해득의 심리적 과정하고는 결코 한가지가 아님을 잘 깨치지 못한 탓이다. 아이가 쌀밥을 잘 먹고 또 알 알지마는, 쌀의 소종래, 벼의 생장 과정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 소종래 들을 몰라도 쌀을 사다가 밥은 넉넉히 지어 먹는다. 우리가 낱말 낱말의 말밑을 몰라도 곧잘 그 말뜻을 이해하고, 그 말을 제 뜻에 맞도록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임을 우리는 밝혀둔다. 그렇거들, 한자말의 한자를 모르면, 말의 밑을 모르면, 또는 말의 성립의 과정을 모르고는 그 말뜻을 바로 깨치지 못하다는 의혹의 발언은 한글 전용의 언어학적 진리를 알지 못한 헛걱정에 불과한 것이다.

(ㄹ) 낱말 성립의 사실적 심리적 과정과 낱말을 배우는 심리적 과정과는 서로 일치하지 아니한 것이다.

보기하면, 완장(, 남의 삼촌의 존칭)과 함씨(, 남의 조카의 존칭)란 말이, 그 말밑은 중국 진:()에 아제비 완적()과 조카 완함()이 있어, 함께 이름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네의 이름을 빌어 남의 숙질을 높혀 일컫겠다는 심리에서 지어 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낱말이 한번 성립되어, 여러 사람들이 써버릇하고 나면, 이 말은 새로 배우는 젊은이들은 그런 연유는 생각할 나위 없이, 그저 단순히 남의 아제비는 "완장", 남의 조카는 "함씨"라 한다고 배워, 그것뿐으로 만족하고 쓰는 이가 대다수일 것이요, 그중에서 특히 말밑에 관심을 가진 이는 그 말밑을 찾아 밝히기도 한다. 모든 낱말은 그 성립의 유래가 있어서 된 것임이 틀림없겠다. 그러나, 말을 쓰는 사람은 그 말밑스런 유래보다도, 먼저 현재의 뜻을 먼저 파악 사용한다. 마치 외국 여행에서, 그 나라의 화폐를 한 가지 가지게 되면, 먼저 그것이 값어치가 얼마인가를 알아서, 제 필요물을 사자면, 그 돈이 얼마나 드는가를 배우고자 함과 같다. 제나라 말에서도 가령 "제자"는 선생에게 배우는 사람임을 파악하여 사용하면 그만이요, 그의 한자가 ""임을 알아야 할 까닭은 없으며, 또 ""란 한자를 알았다 하더라도, 어째서 ""가 선생에게 배우는 사람을 가르키게 되었나는 다시 궁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보기로 "나무"란 말의 현시 평판스런 뜻이 무엇임을 배우면 그만이다. 그 말의 성립의 유래같은 것은 전연 별문제가 된다. 따라, 그것은 전연 몰라도 말씨 생활에 아무런 지장지 없다. 말밑의 역사적 성립은 나무의 싹나 자람과 같은데, 현재의 평판스런 말뜻은 그 나무의 열매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ㅁ) 한자를 알고 그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말뜻잡기에 불리한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보기로, ""은 큰 사람이니, 나이 많거나 몸집이 큰 사람 곧 "어른"을 가리키는 것은 자연스런 뜻이라 할 수 있겠지마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은 괴이하며;

""는 큰 아버지이니, "근아버지"()를 뜻할 것 같은데, 웬걸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은 좀 뜻밖의 일이다. (딴은 우리말의 "할아버지"도 "한아버지"(큰아버지)에서 온 것임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알 만하다.)

"", ""이 "남의 아버지"를, "", "", ""이 "남의 어머니"를 뜻함은 글자를 암만 들여다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이 큰 마누라를 뜻하지 않고, "남의 어머니"를 뜻함은 글자만 보아서는 깨칠 수 없으며;

""이 "작은 집"이나 "작은 방"을 가리키지 않고, "첩"(妾)을 뜻함은 알기 어려우며;

""과 ""가 어째서 처의 아버지와 처의 어머니를 뜻하게 되었는지 알기 어려우며;

""은 나보다 먼저 난 사람인즉, 마땅히 "언니", "형"을 뜻해야 할 터인데, "가르키는 사람"을 가리킴은 글자에서는 터득하기 어려우며;

""가 "세 재사"가 아니라, "하늘·땅·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글자로 해득하기 어려우며;

"제자"의 ""는 "아우와 아들"도, 또는 "아우의 아들"도 아니요,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니, 알 수 없는 말이며;

"부자"()는 아비와 아들이요, "자녀"()는 아들과 딸임은 알기 쉽다. 그러나, "자제"()는 아들과 아우도 아니요, "아들의 아우"도 아니요, 다만 "남의 아들"을 높혀 가리키는 말이 되니, 괴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 한자말은 한자를 알아야 그 뜻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이런 점에도 정확한 이치가 없다 하겠다.

(ㅂ) 한자로 적힌 말이 다 우리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위에서 한자말을 배우는 데에 반드시 한자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베풀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자로 표현되는 한자말을 다 한자없이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원래 그 말이란 것은 그 밑이 그 본국에 있거나 외국에서 왔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말의 어떤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있다. 하물며, 외국에서 온 한자말을 다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 한문을 숭상하여, 공부라면 한문 배운 것으로 알고 온 지도 오래였다. 그 결과로, 우리 나라에서 지은 글월도 순한문으로 되었다. 그래서, 한자로 적힌 말은 다 당연히 알아야 할 우리 배달말로 친다. 그래서, 우리의 "큰사전"에 적힌 수많은 한자말이 그 정당한 의미에서는 배달말이 될 수 없는 것이 많으며, 그 밖의 허다한 한자말이 다 우리말 아닌, 따라 극히 알기 힘든 것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한학자들은 이 따위 한자말을 깨치자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우리말 아닌 한자말 곧 우리 사회에 널리 쓰히어 "들온말"로서 우리말의 감목(자격)을 얻는 것이 못 되는 것인즉, 그 따위는 다 우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실은 그 따위 말들도 그 구성 한자를 안다고 절로 알아 지는 것은 아니요, 또 그런 것들도 필요에 따라서는 한자 아니고도 넉넉히 배울 수도 있는 것임을 우리는 깨쳐야 한다.)

우리가 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만 쓰기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한자 아니라도 한자말을 다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로 한자말에는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원래 사람이 말을 안다는 것은 첫째 제스스로의 생활과 가까운 것, 다음엔 제가 받은 교육 범위에 딸린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부터 우리가 한자 한문을 숭상해 써 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이 옛적에 쓰던 낱말을 포함해서, 한자로 된 말은 다 우리말인 양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한문은낱말과 낱말과의 연결에 아무런 말본스런 형식적 법칙이 없고, 그냥 그대로 맞붙이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마는, 그것들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더욱 어려워지기도 한다. 보기로, ""는 "산과 들"로 해석되지마는, ""은 "들과 산"이 아니다. "", "" 같은 것은 우리 말본과는 전연 다르건마는, 억지로 익혀서 우리말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한자 자전에 올려 있는 낱말은 다 우리말로 간주되고 있다. 이라하여, 한자숭상사들은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말 수가 많이 늘었다고 자랑한다. 한자가 아니면 전연 알 수 없는 말은 그것이 아직 우리말의 호적에 오를 정도로 익지 않은 것이니, 특별한 필요가 있는것이 아니면 우리말로 치지 않아야 한다. 일본말도 한자로 적으면 곧 우리말인 양 뻔뻔스럽게 사용하는 일이 많다. 가령 "", "", "" 같은 말들을 상인들이 광고에다 자꾸 되풀이 되풀이하여, 민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참 개탄할 만한, 한자 중독자의 광증이라 하겠다. "복지"란 말이 너무도 많이 대중 중개 -- 라디오, 텔레비젼 같은 데에 뻔뻔스럽게 상업 광고에 쓰히기 때문에, 유심인사들의 분개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말씨로써 상업 광고가 청중에게 강제적으로 그 듣기 내기 사용을 강요하고 있음은 문화 행정의 견지에서도 크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세우는 바이다.

한자를 안쓰면 "딴뜻말"(한소리 딴듯말)의 구별을 할 수 없어, 결국 그 말의 뜻을 잡지 못한다고

소리는 같고 뜻은 다른 낱말 곧 딴뜻말이 많은 것은 한자말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이는 중국의 말과 글의 결점이다. 중국말은 언어학에서 이른 홑날내말(MonosyllabicLanguage)이요, 떨어지는 말(IsolatingLanguage)이다. 낱말이 하나의 낱내(Syllable 소리마디)로 되고, 또 그 낱말이 오혀서 월()을 이룰 적에는, 그 낱말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또 토시()조차 발달되지 못하고(보다는 뒷뉘()에는 꽤 발달하기도 하였지마는), 다만 생각씨()들이 서로 앞뒤로 있는 차례에 따라, 그 말본이 성립되어, 월의 뜻을 나타낸다.

에서 낱말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는 없고, 다만 앞뒤의 자리잡음이 다름으로 해서, 그 뜻은 아주 반대로 나타난다. (이러한 말본은 빈탕꼴(Zero Form)이라 한다.)

이러한 아무런 말꼴의 변화도 없는 홑낱내 낱말을 나타낸 글자(중국말에서는 낱자가 곧 낱말이다. 그래서 한자를 Word Letter(낱말글자)라고 언어학에서 말한다.)의 수가 5만이나 되는데, 중국말소리의 낱내의 수는 배달말보다 매우 적다.(그 말씨에는 배달말에서와 같은 여러 가지의 받침이 없고, 다만 ㄴ, ㅁ, ㅇ 따위 몇이 있을 뿐이다.) 2,000도 못되는 낱내소리로써 5만이나 되는 한자을 음붙이자니,자연히 한소리 글자(한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전문가의 말에 기대면, 중국에서는 "스"하는 소리에 40여 가지의 뜻을 구별한다 하니, 참 괴이한 말씨라 하겠다. 이런 구별은 저 "사성"() 따위의 구분으로써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이러한 중국말에서는 외마디 소리 하나하나가 다 낱말을 이룬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청각적 식별은 홑날내말이 매리 불리함을 면ㅎ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배달말과 같은 여러낱내말(PolysyllabicLanguage)은 청각상 인식에 시간적 여야가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보아 매우 유리한 말씨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중국사람은 소리엔 무구별인 것을 구별있는 글자꼴을 써서, 동일한 청각적 영상을 구별된 시각적 영상으로써 그 불리를 겨우 모면한다.

배달나라는 역사적 사정에 따라 중국의 한자말을 많이 빌어쓰게 되었기 때문에, 청각적 지각과 심리적 이해에 불리를 입게 되니, 이는말씨의 본질로 보아서 매우 억울한 사정이다. 여러낱내말이 홑낱내말의 약점을 인하여 고통과 불리는 받는 것은 근복적으로 부당한 부담이요, 불합리한 글자생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무로, 우리는 될수있는대로 한소리딴뜻말인 한자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어떤이(ㅅ선 = ㅅ, ㅅ)는 ""와 ""를 다 "방화"로 적어보라, 불끄는 것도 불붙이는것도 한가지가 되지 않나? 고 하여, 한자의 우수성, 내지 불가폐지를 자랑스럽게 뽐내고 있는 모양이나, 이는 정말 당챦은 헛 기세이다. 이 따위 딴뜻말은 될수있는대로 딴소리말로, 또 순우리말로 고쳐바꿔 쓰는 일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는 "불놓기", "불내기", "불붙이기", 들로, ""는 "불조심", "불안내기", "불막기", 들로 해서 그 혼동의 난점을 면하고, 또 우리말 스스로의 발달을 꾀함이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딴뜻말의 고통은 배달말 고유의 병이 아니요, 중국말 고유의 병을, 한자로 인하여, 우리가 얻어 앓는 셈이니, 이런 병고의 치료방법은 생각하면 뻔하다. 이 어리석게도 "얻어앓는" 병 때문에 한자는 쓰쟎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사고방식부터 근복적으로 고쳐야 한다.

이제, 널리 세계의 말씨들을 살펴보건대: 그 소리의 짜임은 어찌 되었든지간에, 모든 낱말이 한 가지 뜻만을 가지고 쓰히는 일은 없다. 이는 영어 사전을 들쳐보면, 열, 스물, 설흔 가지의 뜻으로 쓰히는 낱말이 많다. 소리는 한 가지인데 뜻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가는 것은 곧 한소리딴뜻말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뜻이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면, 그 낱말이 쓰히는 문맥의 환경에 따라, 어김없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 사체는 어느 나라말에서나 한가지다. 그러므로, 언어학에서는, 낱말의 뜻은 그것의 월가운데 쓰힌 자리에 따라 비로소 정확히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와 "", "" 따위가 한글로만 쓰면 같아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의 말씨생활에서는, 한소리딴뜻말이 충돌이 자주 생기는 경우에는, 그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쓴다. 곧 그 쓰는 경우를 달리하여, ㄱ 경우에는 첫째의 뜻으로, ㄴ 경우에는 두째의 뜻으로 쓰기도 하며, 또 ㄱ 경우에는 낱말 본꼴대로, ㄴ 경우에는 말꼴에 약간의 변화를 더하기도 함과 같다. 그러므로, 한자말의 딴뜻말들은, 우리말로 고치기, 경우를 달리하기, 말꼴을 바꾸기, 들의 방법으로 때를 따라 자연히 정리될 것이라 한다.

한자를 안쓰면 사람의 성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되겠다 한다

그 많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한자를 쓰는 경우에도 그 혼동을 다 피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돌아간 설의식 님의 항상하는 말에 기대면, 일제 시대에 서울 안에 ""이 60명이 있었다 하였으며; 오늘에 전화 번호부를 보면, ""이 49이니, 전화번호에 오르지 않은 ""은 무릇 몇백, 몇천이 있는고? 전화번호부에 오른 이들 가운데 20인 정도의 같은 성명은 가위 부지기수로 많다. 이렇게 보면 성명의 같은 것쯤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들 한 성명 사람들은 그 주소·나이·직업, 들로 다 분별되어, 아무 지장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그러나 의혹은 더 들어간다.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 성에는 구별 안 되는 것이 많아, 그 성의 사람들은 매우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음만은 사실이다.

이 성의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한자 성을 버리고, 배달 고유의 성으로 되돌아가자. 그렇쟎으면, 순수 배달식으로 성을 새로 짓자. 신라 세째 뉘 유리 이사금 9년에, 6마을에, 6성(·····)을 내리었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 그것은 다 중국인의 성인즉, 이는 결국 신라에 한문화의 침입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다 성을 끔직히 존중하지마는, 그실은 그것이 배달 고유의 것이 아니요, 다만 한당 겨레()을 본떠서, 한당인() 노릇을 가장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 문제에 관하여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자 한다.

첫째, 주장하고 싶은것은, 배달인의 성을 완전히 배달스럽게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의 무도한 강압 밑에서 대부분의 성은 한번 일본식 두자성으로 변경했다가 8.15 해방으로 다시 제 본래의 성으로 되돌리게 되었다. 나는 이때에 진정한 제 고유의 성으로 되올아갔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배달인이 중국식 성을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면, 덜된 어리석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새 성은 어데서 얻을 수 있을가?

각 성의 시조의 본 성명을 알 수 있다면, 그 본성을되가질 것이요, (가령, 6마을중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가 최씨의 시조라니, "소벌"로써 최()에 갈음할 수도 있겠음), 그렇지 못하면, 각성의 본(, )인 따이름( )으로써 한자의 외자 성에 갈음하면 된다. 온 세계인의 성의 유래를 캐어 본다면, 그 대부분이 그 조상들의 살던 곳·직업, 들로써 붙인 것이니, 일본인의 성 ·····, 들은 가장 잘 그 유래를 보이고 있다. 배달인의 각성의 본은 곧 그 조상의 살덧 곳인즉, 그 본향으로써 그 중국식 한자에 갈음하면 된다. 보기로, 으로, 로, 또는 으로 함과 같이 하면 된다. 하필 본향만으로 할 것은 아니요, 각인의 창의에 따라, 좋다고 생각하는 성을 지으면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의 성은 "이"가 아니면 "김", 아니면 "박"이나"최"로 되어, 성명의 근본의인 구별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각성의 분파를 따라 새 성을 마련한다면, ""는 적어도 30가지의 성으로 갈릴 것이다. 그리고 외자 성을 두자 혹은 석자의 성으로 갈면, 성 본래의 구실인 부별이 잘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성의 고침이 반드시 한번 와야 할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또 믿는 바이다.

왜놈의 강제에 따라, 왜식 성으로 고치기는 하였지마는, 제스스로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순수한 배달스런 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할 이유가 없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지마는, 이제 곧 이렇게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지 때문에, 나는 또 다른 벼름()을 말하고자 한다.

두째, 성(일반으로 홀이름씨)에는 반드시 소리내기의 긴표를 사용하여, 없는 것은 짧게, 있는 것은 길게 부른다면, 다소의 구별됨을 얻는다. 보기;

그러나, 신(·), 강(·), 이:(·), 변:(·), 주(·) 따위는 구별되지 않으니, 이 긴 소리표로써 구별짓는 법은 극히 제한된 것이다. 성과 이름은 본래 그 개인에 속한 것은즉, 혹 ""를 "리"로 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이때는 맛춤법의 원리에 따라, 부리기도 반드리 "리"("이"로 하지 말고)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째, 이 방법으로 구별 안 되더라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김() 성은 하나뿐이지마는, 실제는 둘이다. 곧 경주김과 김해김은 그 조상이 서로 다르니, 그 성의 글자(내지 부르는 소리)가 서루 우연히 같다 하더라도 그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동성불혼의 관습에도 매히쟎고,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는 서로 혼인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결로 ""으로 행세해서도 별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김성의 인구가 굉장히 많음에도 매히쟎고, 그리고 성의 같고 다름을 알기 위하여, 그 본을 물어 본다. 첫낯 인사에 "나는 김해김이오", "나는 경주김이오" 하면 다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강"씨도, "유"씨도 그 동족 여부를 따지기 위하여는 그 성우에 본을 붙이면, 절로 될 것이다. 사실로 오늘의 사회 생활에서도 남과 서로 인사하면서도, 다만 "강"씨로만 알고 지내는 사이가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성명의 한소리됨을 꺼려서 한글만 쓰기를 꺼리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또 성이 한소리됨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여럿 있으니, 자유로 선택함이 마땅하다. 나는 ""를 "감메"한 한 지가 40여년 전이며, 또 "박"을 "밝"으로 한 이도 있다. "박"은 옛부터 조속 독특의 성이라 하거니와, "밝"으로 하면, 정말로 순수한 배달 고유의 성이 된다고 하겠다.

이름도 한국스런 이름으로 하고자 하는 기운이 근래에 많이 동하고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써 부르기 좋고 뜻도 좋은 꽃다운 이름을 지어서, 아들딸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가? 한자 아름에서는 그 획수에 길흉화복이 있다 하고, 그 글자를 금·목·수·화·토의 오행으로 풀어서 길융화복을 갖다붙이는 것은 한자 미신이다. 요컨대, 석자 성명은, 그 글자의 어떠함, 그 발음의 어떠함을 막론하고, 또 설령 로오마자로 적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국인의 표적이다. 배달 겨레가 한당 겨레의 성명을 본따야 할 이유가 무엇일가? "평산 봄시내", "월성 푸른메", "김해 쇠방우" ...... 이런 식으로 해 보면 좋지 않을까? 성은 중국식으로 홑내로 하고 이름은 일본식으로 "Ο자"로 함으로써 문화인 행세를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을 깨쳐야 한다.

한자는 뜻글자로서 시각적으로 단번에 그 뜻을 잡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한다

이는 뜻글자가 소리글자보다 낫다는 이론이다. 소리글은 소리만 나타내고, 그 뜻은 여러 소리를 합하여야만 겨우 말을 거쳐서 뜻을 잡게 되니, 간접적 해득이요, 뜻글은 그 자꼴만 대하면 직각적으로 그 뜻이 파악되니, 이는 직접적이다. 직접적 이해를 주는 한자가 소리글보다 낫다는 이론이다. 과연 그러할가?

한자의 구성 원리는 ···의 넷인데, 상형·지사·회의의 약간자(······)은 직접적 뜻잡기가 되기도 하지마는, 글자 제작한 지 4천 년이나 지난 오늘에는 자꼴이 여러가지로 변하였기 때문에, 그 원형 그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 허다하며, 직접적 이해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물형을 그대로 그린 상형(본뜨기)이라 하지마는, 이것이 직접적 이해를 준다고는 못할 것이다. ·같은 자와 (음악)과 (() 같은 것은 배달인에게는 절대로 직접적 이해를 줄 수 없다. --- 이렇건마는, 한자에 익은 사람들이 한자의 직접적 이해를 자랑하는 것은 그 자꼴의 모양보다도 그 자꼴을 눈이 빠지도록 알뜰히, 또 자주 보고 익히고 쓰고한 때문이다. 우리 한글로 적은 낱말들도 그만큼 보고 익히고 쓰고 할 것 같으면, 대번에 뜻잡을 수 있게 된다. 이는 틀림없는 이치이요 실험이다. 한자가 국한 혼용의 글월가운데서 일견에 그 인식이 되는 것은 그것이 근복적으로 우리글이 아니기 때문임이 그 중대한 이야가 될 것이니, 우리글 가운데, 영자나 몽고자를 섞어 놓았다 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하필 한자의 장점이라 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뜻글자와 소리글자에 대하여 정당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뜻글자는 눈앞에 보이는 물건을 꼴로 본떠 그림으로 나타내어, 그 물건을 가르키는 기호로 슴는 데, 곧 본뜨기()에서 비롯한 것이니,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만물 더구나 꼴없는 일, 생각 같은 것을 나타낼 수가 없어서, 소위 (·(··)로 번져났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소위 이란 방법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아무리 뜻글자라 하지마는, 사람의 말소리를 전연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소리를 차용하는 것이 훨씬 글자로서의 구실을 하는 데에 유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자의 총수 5만자가운데, 에 딸린 자수가 그 3분의 1이나 된다 한다. 이는 글자는말을 적는 부호이란 언어학적 기초 이론이 여기에도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말은 겉으론 소리로 되고 속으론 뜻으로 되었기 때문에, 뜻글자인 한자의 자도 한쪽은 소리를, 다른 한쪽은 뜻을 나타낸다. 가령 ""자의 는 뜻을, 은 소리를 나타낸다. 한자의 대부분인 형성 자는 중국사람으로서 그 소리를 읽으면 곧 말이 되어, 그 한쪽의 뜻까지 나타낸다. ""자 ""은 "강"을, ""는 물을 가리키어 한자를 숭상사용하는 우리 사람들의 말로 되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나타내는 소리 쪽은 다 중국말은 되지마는, 배달말로까지 적용되는 것은 극소수임이 당연하다. 그 소수도 끈질긴 강요와 오랜 습관과 숭상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종래 한자숭상의 한국에서는 한자의 소리(음)가 다 배달말이냥 다루니, 여기에 불합리와 억지와 알기어려움이 턱없이 많이 생기게 된 것이다. 비록 형성자에서도 우리가 대번 알 수 있도록 된 것이 아니요, 더구나 그 밖의 회의·상형·지사·전주·가차에 있어서는 그 음은 우리에게 우연스런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자는 음이나 뜻이나 다 기억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소리글자는 말의 소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이기 때문에 단순히 소리만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말의 뜻까지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뜻글자 한자는 뜻에서 소리로 번져나고, 소리글자는 소리에서 뜻으로 번져난다. 두 가지 글자의 차이는 그 떠나는 점의 다름에 있고, 그 구실의 전체에서는 말의 적어나타냄에 합치한다. 꼴본뜨기에 비롯한 한자가 또 홑낱내말인 중국말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홑낱내 음의 글자(곧 한 글자인 한자)로 되었다. 한자는 그것이 본뜨기에서 비롯한 것과 홑낱내 음이 글자로 된 것과의 이유에서 한자는 한눈에 직각적으로 그 뜻을 잡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작적 효과는 한자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소리글자인 한글에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일정한 맞춤이 일정한소리를 나타내는 동시에, 또 일정한 뜻을 나타냄이 변함이 없이 항구여일할것같으면, 그것이 시작적 효과를 나타냄에는 한자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큰 차이를 내게 하는 원인의 하나는, 시가적 영상의 반독 도수의 다소에 달려 있다. 가령, 제가 기른 자식의 얼굴은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식별이 되지마는, 한두 번 만나본 사람의 얼굴은 그 환경의 달라짐에 따라, 그 식별이 어려움과 가찬가지의 이치이다. 우리 각 개인이 돌이켜 생각해 보자. 우리 늙은이가 어릴적 5~6세로부터 서당에서 한자 배우기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얼마나 많이 반복기억하였나를. 더구나 학교 공부에서 모든 학과목의 교과서에 나타난 한자를 얼마나 정설들이 읽고 썼나를. 그리하여,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하며 ㄴ그 책의 글자들이 역력히 맘눈에 환하였다. 이랬기 때문에 한자는 특히 큰 시각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자의 시가적 효과에 대한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그 것이 국한문 혼용체에 있어서는 그 자꼴이 특이하여 구별이 잘 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백 마리 닭 서리에 한두 마리 끼어 있는 오리가 유난히 잘 구별되며 인식됨과 같다. 이는 오리가 잘 생긴 때문도 아니요, 특장이 있는 때문도 아니요, 다만 그것이 형체상으로 뭇닭과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영어의 낱말이 일정한 맞춤으로 일정한 뜻을 나타내어, 이로써 어릴적부터 배우고 익히고 쓰고 해온 영어국민이 한 족의 책, 한 쪽의 신문지를 일견에 대각적으로 읽어 그 내용의 대강 무엇임을 짐작할 수 있음을 본다면, 우리의 한글만 쓰기에서도 한가지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확신한다. 또 이에 대하여, 순한문책의 한 쪽을 보고서 대번에 그 시각적 효과를 얼마나 거둘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한자의 시각적 효과란 것도 그리 고조할 수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수일전(1969.9.30) 시내 신문 보도에 기대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독서가로 알려진 필립빈의 "테레사 칼드린" 아씨(16살)는 분마다 8만 낱말의 속도로, 내용을 100% 이해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매분 300낱말을 읽을 수 있고, 이해력도 60%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 읽은 글이 무엇인지는 적히지 않았으나, 아마 영어인 줄로 생각된다. 만약 이 기적스런 성적이 일본에서 일본 아이가 한자와 가나를 섞어쓰는 일본글을 읽었다 하였다면, 한자의 시각적 효과를 자랑하는, 우리의 한글만 쓰기의 반대론자들이 좋은 본보기로서 떠들썩할 만한 것이 되겠음이 틀림없엤다마는, 일은 필립빈 또는 미국 시까고의 노오드웨스떤 대학에서 시행되었다 하니, 한자 주장론자를 위하여 섭섭한 일이라 할 수 있고, 또 이것은 정리되어서 많이 반복 사용되는 소리글자도 시각적 효과가 불리함이 없음을 넉넉히 증명하여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자 1,500~3,000자쯤은 배우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한다

한자 쓰기를열심히 세우는 어떤이(ㅈ선)ㄴㄴ, 국한혼용에서는, 한자 3,000자면 자족하다. 국민 학교 1학년에서 500자의 기본만 알면, 그로 조성된 한자 2,500은 쉽게 알게 되고, 그래서 3,000자만 알면, 우리 국어는 십만이나 백만이라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한자 하나 하나의 구성에 대한 설문학적 풀이를 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겨누고 있다. 또 어떤이(ㄱ선)는 2,000자의 한자를 배우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가? 하루에 2자씩을 배운다 쳐도(이 정도는 다른 공부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을 것이다) 3년이면 족하다. 한자는 한 자 한 자 독특하여 전부 따로 배워야 하니, 큰 노력이 든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을 비틀은 말이다. 상형이나 지사에 기원한 글자들은 그럴는지 모르지만, 회의나 형성에 딸린 한자들(이 부류의 한자들이 대다수이다)는 기본 글자들의 어우름이므로, 배우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을 배운 사람에게는 ""자는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 100자나 200자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마는, 그 다음은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고 한다.

이상을 총괄하면, 한자를 계속 사용하자는 이는 다 한자 이삼천 자 배우기는 쉬운 일이라 함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가? ""자를 알고 나면, ""은 절로 알게 된다 한다. 그러면 ""과 ""과의 구별은 어떠한가? 그런식으로 뜻잡는다면, ""자는 나무옹이가 될 것이요, ""자는 나무재주 잘하는 원숭이가 될 것이요, ""자는 도막나무가 될 것이요, ""자는 목공이 될 것이요, ""자는 나무가 나는 흙이 될 것이요, ""자는 남의 나무가 아닌 내 나무란 말인가? ""자는 난장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와 ""자의 대비로써 한자 배우기의 쉬움을 세우는 것은 너무도 쉽살스런(안이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루 2 자씩 배운다면, 아무 부담없이 3년이면 3천자는 넉근히 다 배운다 한다. 계산이 맞았는지 모르지마는, 이 같은 말세움은 도무지 학습심리는 조금도 고려에 넣지 않은 평판적 사고라 하겠다. 만약 그렇게친다면, 나이를 따라 자수를 늘여 간다면, 대학까지 공부를 계속한 사람이면 5만자는 넉근히 배울 수 있지 않겠나? 장하도다, 그 기억력의 훌륭함이여!

또 어떤이(ㅂ선)은 열살 전후의 아이들은 기억력이 가장 왕성하니, 한자 2,000자쯤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라 하였다. 이도 또한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주장한다: 어린이 6~12살 때는 그 지력의 발달과 활동이 가장 왕성한 황금 시절로서, 사람 일생에 얻는 지식의 반을 이 시젤에 얻는다고 한다. 그러면, 이 시기에 가장 유용한 지식과 지혜를 길러야 한다. 곧 제 몸의 둘레의 사물에 대한 기초적인 경험과 지식을 기르며; 남이 처먹이는 지식을 기계적으로 기억하는 피동적 정신보다도, 제 스스로 탐구하는 정신, 생각하여 판단하는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러한 정신발달의 황금시절을 소용없는, 빈탕의 어려운 한자를 기계적으로 주입함으로써 피동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한자 숭배자들의 교육 이론은 교육의 목적, 인생의 참목적, 진리 탐구의 바른길을 몰각하고 오로지 한자 습득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니, 그 가치관의 근본적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혁신 없이는 그 본말전도의 편견을 바로잡기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또 어떤이(ㅈ선)는 설문학적 설명으로써 기본 한자를 가르쳐 간다면 매학년 500자씩 6학년에 3,000자는 쉽게가르칠 수 있다 하지마는, 이런 말은 다만 자기 도취에 불과한 것일 뿐이요, 실제적 진리성을 띠지 못한 것인즉, 더 거론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 도오꾜오 시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이들에게 시험한즉, 그들이 소학 6년 동안에 한자 1,500여 자를 배웠는데, 평균 겨우 479자 밖에 기억하고 있쟎았다 한다11. 이 시험의 대상자로, (1) 도오꾜오 시에서, (2)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이, (3) 졸업한 바로 뒤의 검사, (4) 그 기억 자수는 가르친 자주의 1/3에도 미만, 들의 조건을 생각하면, 한자 배우기가 앞에서 우리 한자 주장자의 수학적 계산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똑똑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말한바 있는 일본의 국어학자 호시나 님의 조사에서와 같이, 일본이 한자 200자를 가르치기 때문에 국어 교육이 막대한 불리(그 성적이 독일의 그것의 1/6에 불과함)을 입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생각하면, 한자 교육이 국민의 지적 향상에,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손실을 가져옴을 깨칠 수 있다. 혹은 3년이면 한자 2,000자를 무난히 가르칠 수 있다 하며; 혹은 한 해 500자씩 가르치면, 6년에 3,000자는 일없이 배운다 함과 같은 것은 탁상공론밖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한자 교육을 일반 국민에게 강요해야하다는 논은, 필경 국민의 정력과 경제와 시간과 생명을 소용없는 한자 수천자에 희생하자는 말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자를 안 쓰면 글읽기가 더디다고 한다

한자를 썩어쓴 글은 한눈에 드 뜻과 읽기를 얼른 잡을 수 있지마는, 한글만 쓰기로 된 글은 읽기가 더뎌서 못쓰겠다 한다.

이는 한자 사용에 익은 사람들이 진정의 토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가 아니요, 다만 주관적 습관에 터잡은 사실이다. 한자 섞어쓴 글에 익은 사람은 한자가 없어지고 한글로만 된다면 글읽기가 더디어서 불편을 느낄 것은 당연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만 쓰기의 글을 배우고 익히고 읽기에 버릇한 사람은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도 않고, 빨리 읽어 간다. 누구나 제집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글을 빨리 읽는가를 주의해 본다면, 제스스로의 경우와는 딴판으로 다름을 깨칠 것이다. 재주가 있는 학생은 국민학교 사오 학년생이면, 반달도 못 되어서 오백 쪽 이상의 책을 거뜬히 읽어 치운다. 우리글의 실제는, 아직 표준말·맞춤법·월점치기·띄어쓰기, 들이 전반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못한 점이 더러 있기 때문에, 다소의 불편이 있겠음은 사실이겠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아주 곤란을 당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이 완비되고, 한글만 쓰기가 사회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날에는, 한글 읽기는 더욱 빨라질 것이 틀림없다. 외국가서 성장하여 영어에 능통숙달한 사람은 영문이 국문보다도 빠르다고 할 것이니, 어느것이 빠르냐 하는 문제는 대부분 그 읽기의 버릇하기에 달린 것이다. 만약 꼭같은 내용을 순한문으로 적으면, 한글만으로 적은 것보다는 그 길이가 훨씬 짧으니 능통한 사람이면 순한문을 읽는 것이 한글 읽기보다는 빠르다 할 것이다. 그런데 내용으로 보아서, 순한문을 한글로 뒤치면, 분량이 다소 느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국한문 섞어 쓴 글을 순한글로 적는 경우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본다면 한글만 쓰기의 글은 읽기 더디다는 불평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요, 다만 그 사람의 오랜 버릇과 그에 따른 심리적 경향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마땅하여.

반대론자는 또 "읽기와 이해하기는 서로 같지 아니하다. 한글로 적힌 한자말을 읽기만 하기는 쉽지마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중 바랑경 읽듯 소리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해가 동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글읽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글이 읽기 쉽다는 것은 바른 뜻에서의 글읽기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의미한 자랑이다."라고 한다.

만약 그 소리만 읽고, 그 소리에 담긴 뜻을 모른다면, 이는 올바른 글읽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니, 그 빠름은 아무런 뜻(무게)이 없늘 것이다. 똑 바로 말한다면, 뜻은 모르고 글자만 읽는 순한글만의 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국한문 섞어쓴 글에서도 있겠고, 또 순한문의 글에서도 있을 것이니, 이것이 특히 한글만 쓰기의 문제라 할 것은 없겠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반대론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으리다. 한자말을 한글로만 적어놓은 글은, 비록 읽기 쉽다 하더라도, 그 뜻잡기는 어려운 것인즉, 빨리 읽는다는 것이 아무런 뜻이 없지 않으냐? 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앞에서 한글로 적은 한자말도 넉넉히 그 뜻을 잡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물론 "인화물질지입엄금"과 같은, 우리말도 아닌 한자말을 무작정 엿가락처럼 써놓은 것은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근래에 한글 쓰기를 장려한다고, 우리말 아닌 한자말을 한글로 적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현상은 공무원들에게 더욱 많다. "우와 여히 상위무함", "포서운동", "견사취급소", "우범자 연행", "소주밀식"과 같은 것을은 정말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러한 것은 다 한글 전용의 초기의 그릇된 현상이니, 그 잘못은 한글로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한자 사용의 힘에 기대어서 우리말도 아닌 왜말 따위를 마구 쓰고 있는 종래의 국한문 혼용에, 그 원인이 있고, 그 죄가 있는 것이다. 종래 한자로 적어서 통하던 문자를 그 음만을 한글로 적어 놓기 때문에, 한자 지식에 부족한 젊은 사람들이 한글만의 글은 읽어도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말한 이가 많았다는 모 신문의 여론 조사의 결과가 괴이하면서도 설정인 것이다. 이는 다 우리말을 다스리는 노력이 부족한 때문이요, 한글만 쓰기의 죄가 아님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만큼 말해도, 반대론자는 여전히 읽기와 뜻알기는 너로 같지 않다, 한자말을 한글로 적어 놓은 것으로, 그 참뜻을 알지 못한다고 세울는지 모른다. 왜냐 하면, 그는 말이란 것은 그 말밑을 알아야, 또는 그 말의 내력을 알아야만 능히 온전히 그 말드ㄷㅅ을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반증을 몇 들어보이겠다. "자제" 대신에 "", "제자" 대신에 "", "내자" 대신에 ""를 적어 놓는다고 그 뜻이 밝아지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뜻을 모르게 된다. "제자"의 ""는 "아우의 아들"도 아니요, "아우와 아들"도 아니요, 그 참뜻인즉 "스승에 배운 사람"을 가리킨다. 이 두 한자의 차례를 바꾸어 ""라고 써 놓으면 그 뜻이 "아들의 아우"도 아니요 "아들과 아우"도 아니요, 다만 "아들", 그중에도 나의 아들은 아니고, "남의 아들"을 높여부르는 말이다. ""는 "안에 있는 아들"이 아니라, 자기의 안해를 가리킨다. 어찌 그뿐이랴. 이밖에도 한자를 써 놓으면 그 뜻이 도리어 모호하고 아득해지는 경우 "", "", "", "", "", "", ......따위가 얼마든지 있다. 이에 대하여 그래도 한자를 써 놓으면 알아보기 쉽쟎으냐? 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렇다, 알아보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기호로써 그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회적 약속이 성립되어, 이를 교육하고, 이를 써 버릇하기 때문이니, 그 공죄가 한자와 한글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글을 빨리 읽는 것은 매우 유리하고 필요한 일이다. 나는 여기에 "빨리읽기의 세계적 진록 가인이"를 하나 소개하겠다.

보통의 글읽는 이들은, 1분에 250 낱말을 읽을 수 있고, 그 읽는 내용 70%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1분에 8만 낱말을 읽는다는 믿지 못할 기록을 가진이가 있으니, 그는 곧 필립빈의 16세의 마리아 테레사 갈르딘 아씨다.

이 놀라운 세계적 기록의 가진이 마리아 아씨도 선천적으로 그러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미(she)는 작년(1968)에 시카고의 서북 종합대학교에서 단기 빨리읽는 과정을 거쳤는데, 연습을 거듭함에 따라, 자신도 꿈에도 예기하지 못했다고 할이만큼 놀라운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처음에는, 1분에 250 낱말 정도로, 정상인과 같았던 것이, 속독 훈련후 점차적으로 늘어 가아, 1분에 750 낱말, 1,000 낱말, 5,000 낱말로 뛰고, 드디어, 1분간에 1만 낱말 이상을 100% 이해하는 율로 읽게 되었다.

속독, 곧 빨리읽기는, 생리학 원리와 형태 이론에 기초를 두고, 눈의 가시거리에 관계를 가진다. 빨리읽기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문장에 있어서, 열쇠가 되는 주요한 낱말을 얼른 쉽게 찾아내는 것이다. 이에는 정신의 집중과 눈의 단련이 따르게 되는데, 도서관 업무를 좋아한다는 마리아 아씨는 예외적인 가시거리와 15/20의 시력을 가지고 있다.

마리아 아씨의 빨리읽는 시력을 보면, 나다니엘 호손의 지음인 "주홍 글씨"를 25분에, 헨리 제임스의 "The turn of the screw"를 20분에, J.D. 새린저의 "호밀밭의 파숫군"을 40분에 읽어낸다고 한다. (1969.2.18 신문 보도)

우리는 이 세계적 빨리읽는 기록의 가진이 마리아 아씨에 관한 기사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그가 읽은 글이 한자는 한자도 섞이지 않은 영어 책이란 점이니, 소릿글자도 빨리읽는 데에 조금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빨리읽는 데에 반드시 한자를 소용하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다.

두재ㅈ 점은, 그렇듯 놀란만한 기록의 가진이 마리아 아씨도, 선천적으로 그러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도 본시 보통인과 다름없던 1분에 250 낱말의 힘이, 연습을 거듭함을 따라 저렇든 8ㅁㄴㅏ 낱말이란 기적스런 성적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한자가 들어가야만 빨리읽을 수 있다고 세우는, 전용 반대론자의 말도 그실은 한자 읽기에 버릇이 들고 연습이 된 자신의 경험의 고택밖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우리는 확증적으로 단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 나는 대구 계명 대학 교수 남 기심 님의 말을 소개함이 도움됨을 느낀다. 수일전 그는 나에게 말했다.

미국서 공부할 적에, 어떤 학우 한이가 글을 빨리읽는다기에, 나는 그에게 시해애 보았다.

자기는 여러번 읽었으나, 그난 한번도 읽은 일이 없는 책 "싵딸다" (서가모니전, 쪽수 300)를 도서관에서 빌어다가 그에게 읽히니, 보는 앞에서 단 10 분만에 다 읽었다 하기로, 남 님이 다시 그 책을 가지고 띄엄띄엄 한 대문을 보이고서, 그 다음의 내용이 무엇임을 물은즉, 가는 낱낱이 바로 대더란 이야기였다.

남 님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계명 대학의 대학원 수료자 아무 님의 논문이, 우리 나라 국민 학교 학생들의 글읽는 힘과 일본 소학교 아이들의 글읽는 힘에 관한 조사 비교 연구였는데, 하급에서는 우리 아이와 일본 아이 사이에 동등한 결과이더니, 5, 6학년에 가서는 일본 아이가 좀 우세하다. 이에 대한 연구자의 주석은, 우리 아이들은 상급학교 입학시험 때문에, 자구의 주석에만 골몰하고, 읽기는 등한히 한 까닭에, 그 글읽는 힘이 늘어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한다. --- 우리는 여기서도 한자가 특히 독서력을 빠르게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자말이 말만드는 힘이 푸지다. 배우기는 힘드나 이용율(효율성)이 매우 높다

한자는 말만드는 힘이 매우 많다. 문교부 상용 한자 1,300자로 겹씨()를 아무 어려움 없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엄청난 잇점이다. 이러한 막대한 잇점을 조사연구도 하지 않고, 한자 쓰기를 폐지함은 큰 잘못이다고, 어떤이(ㄱ선)은 여태까지의 한자쓰기 주장자들이 드는 이유의 대부분이 실은 한글 전용론자의 세움을 더욱 유리하게 만드는 켸켸묵은 답답한 내용이라고 갈파하고서, 자기의 반대론의 근거로든 것의 중점이 위와 같은 것이다. 이는 ㄴ선, ㅎ선의 주장도 이 점을 강조한다. ㅎ선은 말한다. 배우는 기간은 짧고, 이용하는 기간은 길다. 짧은 기간의 곤란과 노력으로써 긴 동안의 편안과 이익을 누리게 되니, 한자는 어려워도 배워 알아야 한다고.

이러한 반대론에는 일리가 있음을 허락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네의 잇점이란 것이 확실한 것만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자의 낱자의 몇자만 알면, 그것들로써 결합된 겹씨 수십 낱말을 능히 다 깨칠 수 있다는 입론는, ""자를 알고 나면, "", "", ""자는 절로 깨칠 수 있다는 입론과 가찬가지의 논리에 불과하며, 그것은 쉽살스런(한) 추론일 따름이요, 실제적 사실이 아님을 천하에 밝혀두는 바이다. 보기로, ""자와 ""자를 알고 나면 ""와 ""의 뜻을 곧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는 "아우와 아들"도 아니요, "아우의 아들"도 아니다. ""는 "아들과 아우"도 아니요, "아들의 아우"도 아니다. "", ""의 말뜻은 서로 딴판으로 다르다. 몇 보기를 더 들면,

""가 "세 가지 재주"도, "재주있는 서이"도 아니요, "하늘·땅·사람"을 가리킨다.

""가 "두 털"이 아니며;

""이 "털이 둘 나는 해"가 아니며;

""은 "세 사람이 서로"가 아니요, ""·""·""도 아니며;

""가 "서로 죽임"이 아니며;

""가 "웃으면서 죽이는 것"도 아니며;

""가 "죽이고 왔다는 것"도 아님

과 같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한자음으로 된 우리말을 알고, 또 그에 맞는 한자까지 알아서, 그 말을 한자로 바로 나타내기에 익어 있으면서도, 그실은 그 한자를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그의 어울린 겹씨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보기로

"하다"의 ""는 "법모", ""는 "밥풀호"임을 알지마는, "법밥풀"이 어째서 "모호하다"의 뜻이 되는가는 깨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70살이 넘도록 한자를 읽어 온 나스스로의 숨김없는 자백이다.

"하다"가 우리말로서는 "죄없이 벌을 받아 억울하다"의 뜻인데, 그 두 한자가 어째서 이 뜻을 이루는가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우리는 한자를 숭상한 나머지, 그 글자만 알면, 그들의 어우름으로 된 겹씨의 뜻은 당연히 절로 아는 줄로 여긴다. 이는 종래 말씨 교육의 폐단이다. 그 겹시를 이룬 한자는 그 겹씨의 성립의 진정한 내용(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은 "밝을 철"과 "배울 학"을 안다고 그 참뜻을 아는 것이 아니며, "", ""도 마찬가지다. ""과 "", ""의 참된 뜻 곧 그 개념의 내용은 따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 ""들의 구성 글자는 다 그 개념의 내용이 아니요, 우연스런 기호일 따름이다. "Philosophy"를 설령 ""으로 뒤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한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예부터의 한자 숭상의 여폐는 말밑인 한자의 뜻과 그들의 어우름으로 된 겹씨의 말뜻과를 동일시하여 왔다. 이런 때문에 종래의 한자로 된 용어의 참된 뜻은 거의 불문에 붙였기 때문에, 한문 지식인들이 이해하는 한자 겹씨의 뜻은 참으로 모호하기 짝없음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도 한자말의 참뜻을 잡기에, 반드시 한자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런 이치는, 언어학적 견지에 서서, 사람의 말씨 배우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도, 넉넉히 해명할 수 있다. 간단히 사람이 말을 배움에는 그 대상물에 관한 지각 또는 경험과 그에 대한 말(곧 이름)을 서로 연결하는 데에 성립되는 것이요, 결코 그 밖에 또 제삼의 한자까지 가져와야 그 말뜻을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러므로, 한자를 배우기는 어려워도 한번 배워 놓으면 그 이용 가치는 크다는 것은 한자 숭상의 과대망상이라 하겠다. 또, 이러한 생각은 말씨 교육의 근본을 오해하는 원인이 되며, 한자 고집의 편견을 가져오는 원인도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말(낱말)은 그 가리키는 대상의 기호로서, 그 기호가 그 사회 일반의 언어 의식에서 그 대상과 열결됨에서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호는 우연스런 기호임이 원칙이다. 한자말도 결국은 이러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hilosophy"를 꼭 ""으로 옮겨지어야 할 필연성이 없으며, 저 "기차"란 물건을 꼭 ""로 이름지어야 할 이유가 없음은, 저 한 가지 물건(돌)을 혹은 "돌" 혹은 "스또온" 혹은 "슈따인" 혹은 "이시"라 하여, 거기에 아무런 필연성이 없음과 꼭 마찬가지이다. 다만 말밑스런 요소에 지나쟎는 한자를 너무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임을 깨쳐야 한다. 베이콘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과학 시대에 잘살기를 원하여 재래에 가지고 있는 우상(Idol)을 타파해야 한다. 우상을 그대로 고집하고서는 조국의 근대화, 겨레의 중흥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만약 한자를 전연 모르는 시대가 왔다면, 그때는 한자적 어원을 도저히 캘 수 없겠다고 단정함도 지나친 일이다. 보기로,

물, 정, 심, 구, 기, 도, 도주의, 류, 문, 부.....

, 선, 성, 현, 대, 소, 한국, 중국, 일본, 서양, 영국, 증, 보, 애......

에서, 그 ""이 무엇을 뜻하는것임을 수이 깨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이 "사람"을 뜻하는 것임을 알고 나면, 그것은 ""이 "사람"을 드ㄷㅅ함을 아는 것하고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은 다른 뜻("남"과 같은)으로 번지는 일이 극히 적음에 대하여, "인"은 여러가지 뜻으로 번지지 때문에, 거기에 차이가 생길 뿐이다. 다시 말해서, 뜻글자 아닌 순 한글말, 순 로오마자 말에서 말밑을 캐어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말밑스런 요소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밑이 밝은 것은 한자만이 가지고 있는 장처는 아니다. 한자 ""(효도 효)와 ""(길도)를 안다고 해서 ""의 뜻을 안다고 치는 것은 잘못이니, 말씨 교육, 도덕 교육에서 크게 새로운 주의를 소용하는 문제지다. --- "한자는 배우기는 힘드나, 한번 배워 놓으면, 그 응용이 크게 넓다"하는 생각은 한자 주장자들이 최후의 보루인데, 우리는 이도 또한 한자를 수호할 만한 능력이 없는 보루 - 신기루임을 설파한다.

또 한자 쓰기의 계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자는 낱낱의 자는 배우기가 힘들지마는, 그 홑자들이 어울려서 이뤄내는 겹씨(준자)는 아주 수십 배, 백 배의 다수에 달하므로, 그 홑자의 지식으로써, 그 겹씨를 깨치기는 극히 쉽기 때문에, 그 홑자 배우기의 수고를 갚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이다. 보기로,

, , , , , , , 에서 이미 배운 ""자의 활용력은 극히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한자 학습은 국어의 학력을 크게 유리하게 한다는 뜻이겠다.

나는 앞에서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허락하는 동시에, 한자말의 겹씨가 그 혼자의 뜻으로만 추축하는 것은 그 겹씨의 진정한 뜻을 잡기에 잘못을 가져옴을 붙여 말하였다. 내가 이 글의 맨 첫머리에서 일본의 국어 교육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뒤떨어져, 독일이 48,000낱말을 배우는 동안에, 일본은 겨우 9,000낱말밖에 배우지 못하며, 같은 100낱말을 배우는 데에 일본은 4시간 20분이 걸리는데, 독일은 단 38분이 걸린다. 곧 독일 어린이의 제 국어 배우는 힘이 일본 어린이의 그것의 7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한 일이 있다. 그 조사자인 일본의 국어학자는 이러한 현저한 차이는 일본이 국어 교육에서 한자 2,000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이 비교 조사는 확실히 한자 예찬자의 머리우에 따끔한 침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생각해 볼지어다, 낱자 몇만 배워 놓으면 그 활용력이 극히 넓어, 그 효과가 수십배, 백배나 크다는 한자 사용의 일본의 학동의 국어 학습의 성적이, 한자를 한 자도 안 쓰고 소리글만을 사용하는 서양보다 저렇듯 현저한 차로써 열등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를. 한자 학습은 확실히 교육의 효과를 현저히 감쇄하는 것임으 ㄹ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반대론자 ㅜ선은 그 일본 학자 오시나의 조사 결과표가 너무도 켸켸묵은 것임을 지적배척한다: --- "50년이나 옛날인 1919년에 발표된 호시나의 낡아빠진 "국어 교육의 효과"가 50년 후의 오늘날의 문화적 양상에 무슨 효과가 있고, 의의가 있고, 반증이라도 된다고 제시되었는?"고.

50년 전의 조사라 해서, 과연 오늘에는 아무런 타앙성이 없게 되어 버렸을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나는 세운다. 왜? 두째번 세계 대전 끝난 바로뒤(1946)에 일본 도오꾜오 시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이에게 시험한즉, 그을이 소학 6년 동안에 한자 1,500여자를 배웠는데, 그 기억하고 있는 한자는 겨우 479자뿐이었다고, 미해군 소좌 호올(Ltr. Commander Hall)이 당시 한국의 미군정 학무국에서 보고하였다. 또 그는 다음의 보고를 했다.

"일본에서 전쟁 기록을 만들어서, 네 현12의 도시에 있는 공장의 직공 1,458명에게 읽혀 본 결과, 그 83%는 어려운 부분을 읽지 못하고, 69%는 쉬운 부분조차 읽지 못하였다"고. --- 이는 곧 첫째번 세계 대전이 끝난 바로뒤인 1919년과 두번째 세계 대전이 끝난 바로뒤인 1946년과ㅢ 일본의 국어 교육이 조금도 변화됨이 없어, 한자 때문에 큰 물리를 입고 있음을 보임이라 하겠다. 그러면, 그 뒤의 일본의 국어 능력은 어떠한가?

일본의 도오꾜오 대학 출판부는 " "(일본인의 읽기·씨기의 능력)이란 4X6배판 916쪽의 큰책을 발행하였다. 이 "일본이의 읽기·씨기의 조사"는 일본의 "국립 교육 연구소"와 "국립 국어 연구소"와를 중심이로, 위원회 조직으로 하였는데, (1) 읽기·씨기 능력 조사 위원회에, 위원장엔 교육 연구소장( )으로 하고, a. 중앙 위원엔 언어학·국어학·교육학·심리학·사회학·통계학(2인), 신문잡지계의 8인, b. 지방 위원회엔 각지 대학 6 인으로 하고, (2) 중앙 기획 분석 전문원회에 a. 각 전문가 8인, b. 조수로 각전문가 21인으로 하고, (3) 각지방위원 85인, 이에 보조원, 사무원 직원, 간계자, 들을 합하면, 무려 150인이나 된다.

이렇듯 큼직한 조직과 계획으로써, 전국적으로 과학적인 언어사회학적 조사를 한 것인데, 일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과학적인 이 "읽기·씨기 능력 조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된 해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조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본에서는 의무 교육이 잘 보급되어, 취학률도 극히높고, 국민교육을 위하여 치른 노력도 극히 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전연히 글자의 읽기·씨기가 안되는 이는 극히 적다. 그럼에도 매히쟎고, "정상스런 사회 생활을 일삼음에 아무래도 필요한 문자·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은 결코 높다고 할 수가 없다. 상식적인 어구·문장을 읽을 수 있는 이 곧 literacy는 6.2%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 경력으로 말한다면, 고등 전문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 글힘(literacy, 보통의 글을 읽고 씨느 ㄴ능력)을 얻도록 함에는 국민 전체를 될수있는대로 오랫동안 학교교육을 받게 하는 일이 최상의 방법임이 밖아졌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의 경제 형편으로는, 전 국민을 14~15년에 걸친 긴 세월의 학교생활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의 두 가지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다.

  1. 국어 교육의 기술을 고치든지,
  2. 글자말 그것을 고치든지.

국어 교육의 기술 고치기에서는, 글의 한자는 읽기만 하고, 씨지는 않기로 하면 좀 나을가 하지마는, 이는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한자의 받아씨기를 많이 시키는 것이 유효하겠으나, 이는 시간 형편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 글자말 그것을 고치기에는, 한자 쓰기를 폐지하고 새글자(가나 또는 로오마자)를 채용함이 상책이겠지마는, 그 새글자를 국자로 채용하지 않는 한껒(꺼정), 당용 한자를 훨씬 합리적으로 결정할 것 또는 한자의 용법을 합리화할 것이겠다. 그러나 이 방법이 국민의 글힘을 높히는 데에 효과 있는 방법이 되겠는가를 따로 계획을 세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은 일본인의 읽기·씨기의 능력이 일반적으로 부족하다. 그 글힘을 올리리면, 전 국민이 고등 전문학교 졸업까지 14~15년의 학교 생활을 하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하겠는데, 일본 국부는 이를 허락하지 못한다. 그러면, 새 글자(가나 또는 로오마자)로써 국자를 채용하지 않는 한껒 별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일본이 한자 폐지를 못하기 때문에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겪고 있음이 똑똑히 나타났다 하겠다.

다음에, 일본 문부성의 국어 담당 사무관 시오다()는 그 지음 "세계언어정책사개론"(1955)에서 다음과같이 베풀고 있다.

"교육 시간의 우에서 이 글힘에 관한 것을 외국과 비교하면, 소학교 입학후에 보통 국어의 읽기·씨기가 되게 되는 시간은

으로 되어 있다"고.

이만하면, 일본이 한자때문에 받는 손실이 50녀전이나 50년 후인 오늘이나 다름없이 한결로 막대하는 것이 밖아졌음을 ㅜ선 및 그밖의 분들도 다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자는 한 자로서 제뜻을 가지고 있어, 그 운용이 자유자재하다고 찬양한다

한자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 한자의 우수성을 고집하는 사람들임은 틀림없다. "간명하다, 간결하다, 함축성이 있다, 시적 표현에 적절하다, 조어력이 풍부하다, 시각적 효과가 크다, 기억하기에 유리하다‥‥‥" 따위는 다 한자 찬미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조항들이다. 요컨대, 이러한 장점들이란 것이 곧 다름아닌 한자가 낱말글자(word letter)됨에 있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본다.

나는 이 의흑을 풀기 전에, 먼저 인류 사회에서의 글자의 발달사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개 시대에서는, 사람은 맺음()으로써 의사를 나타내었다. (나도 어릴적에 옷고름을 맺어서 무슨 약속을 표하는 일을 흔히 했다) 다음에는 그림으로써 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유물은 세계 여기 저기에 남아 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맺음글자, 그림글자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마는, 실상은 그들은 아직 올바른 뜻에서의 글자라 하기는 어렵다.

다음에 물건의 꼴을 본뜬 그림으로써 사람의 생각을 나타내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본뜨기글자(상형글자)라 일컫는 것이다. 보기: "산"을 * 으로, "사람"을 * 으로, "내"를 * 으로, "해"를 * 로, 달은 *로 함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꼴있는 몬 밖에 또 꼴없는 일이 나 정신 같은 것이 있은즉, 븐뜨기만으로써는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다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자를 만들어낸 중국인들은, "표하기"(지사, )·"뜻모둠"(회의, )·소리나톰(형성, )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표하기"(지사)는 무형한 것을 무슨 보람으로써 나타내는 글자이니, "··" 같은 것이요; "뜻모둠"(회의)은 둘 이상의 글자를 모아 붙여서 한 새 글자를 만들어 제각기 글자의 뜻으로써 합성한 글자이니, ""· ""· "" 같은 것이요, "소리나톰"(형성)은 둘 이상의 글자를 모아붙여서 한 새 글자를 만들되, 그 한 조각은 그 또리() 곧 큰 뜻을 보이고, 다른 한 쪽은 그 소리(음)를 나타내는 글자이니, "", "", ""같은 것들이다.

위의 본뜨기(상형)·표하기(지사)·뜻모음(회의)·소리나눔(형성)의 네 가지는 한자 구성의 원리이니, 이만하면, 한자가 다 이뤄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글자 사용의 사람의 심리는 이만으로써는 만족스럽지 못함이 있어, 다시 그 구성된 자를 발전적으로 달리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으니, 그것은 "뜻돌리기"(전주,)와 "소리빌림"()이다.

뜻돌리기는 한 가지의 뜻을 가진 자에 그 본뜻과 관련있는 뜻을 돌리는 것이니, ""의 본뜻이 "길다"인데, 기를 굴려서 "오래다"로 돌려대고, 또 "어른"의 뜻을 돌려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리빌림은 같은 소리의 자를 빌어씀이니, 혹은 그것에 다른 한소리 자의 뜻을 뜻을 붙이고,혹은 끝내 단순한 소리로만 스ㅅ고 거기에 뜻을 도무지 붙이지 않는 것이다. 보기하면, ""는 본래 ""(보리)과 같은 뜻이었으나, 거기에다 "오다"의 뜻을 붙이는 것도 있고, ""jgw ""이라 적으며, 또 오늘날 서양 따이름을 같은 소리의 한자로 적음 보기; "Londone=HanjaDic:敦敦", "Wahington="과 갈은 것이다.

한자가 우적은 여섯가지 법(육서라 일컫는다)으로 되었다고는 하지마는, 이는 그 대강을 말함에 그치는 것이요, 길코 이 여섯 법으로 철두철미하게 현존의 한자를 두루 풀이할 수는 없다. 보기로, ·

한자는 남의 글자가 아니요, 우리 글자이라고 한다

두째 조각, 국어론적 의혹

우리의 국어와 한글이 한자 안쓰고는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고 내세우는 이가 있다.

우리말의 9할은 한자말이란 맹랑한 의혹

한글의 노릇(기능)은 저열하다, 고 한다

한글 맞춤법은 한자 지식 없이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큰 걱정을 한다

우리말은 과연 말만드는 힘(조어력)이 부족한 것일까?

세째 조각, 교육스런 의혹

(1) 어떤이(ㅅ선)는 한자 안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한다.

(2) 오늘날 학생은 한자말의 이해가 부족한 때문에, 책읽기를 제대로 못한다고 한다.

(3) 어려운 한자는 기피하고, 쉬운 한글 공부한 하였기 때문에, 국민 지성의 저하를 가져와, 높은 이상, 넓은 견식, 정밀한 이론, 멋진 정취를 찾는 말글의 능력을 잃어버리어, 공부 태도와 인격 기르기와 품위 향상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4) 한글 교육은 대학 교육을 질적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가로되: 한자말 지식이 부족한 때문에 이해력이 박약하고, 개념의 파악이 부정확하고, 말만드는 힘이 없고, 학술 표현이 부족하여서, 학생들의 강의를 듣고 답안을 쓰고, 논문을 작성하는 일들이 모두 좋지 못하여, 대학 교육의 질을 급속히 떨어뜨리고 있다. 고.

네째 조각, 학문론스런 의혹

(1) 한자를 폐지하면, 학문이 전연 파멸한다고.

(2) 어떤 반대론자는 다시 말한다: 한자·한문을 배우지 않으니, 동양 철학을 배울 수 없게 된다. 학문도 철학도 못 하게 되면,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고.

다섯째 조각, 문화론스런 의혹

여섯째 조각, 전용(올쓰기)에 대한 의혹

(1) 한글은 우리글이라 해서 전용하자는 것인가? 의 의혹

(2) 한자 주장자도 애국자이다. 고 한다.

(3) 한자와 한글과를 섞어씀이 가장 이상적이다.

(4) 일본을 보라고 한다.

(5) 한자를 적대시하며, 한자말을 모조리 말살하려한다.

일곱째 조각, 기계화에 관한 의혹

여덜째 조각, 시기에 관한 의혹

아홉째 조각, 정부의 한글 전용 단행에 대한 의혹

(1) 정치 군력으로써, 국민의 글자 생활을 바꿈은 옳지 못하다는 의혹.

첫째, 세계 각국의 글자·말씨 정책

(一) 벨시아의 국어 정책

(二) 아라비아말의 발전

(三) 알바니아의 말글 반항 운동

(四) 뿔가리아의 말글 정책

(五) 알메니아의 겨렛말·겨렛글

(六) 뒬끼예의 말글의 개혁

(1) 뒬끼예와 케말 파샤

(2) 케말 파샤의 글자 혁명

○ 뒬끼예의 묵은 글자

○ 케말 파샤의 글자 혁명

(3) 케말 파샤의 말씨 정화 정책

(4) 케말 파샤의 말씨 개혁

(七) 러시아의 말씨 정책

(八) 독일의 말씨 정책

◇ 역사의 개관 - 성장과 통일

◇ 독일의 국어 정책

(九) 란드의 국어 정책

인이

(十) 뻴기예의 국어 정책

(一一) 인도의 언어 정책

○ 인도의 통용어

○ 인도 24주 연방의 국어 문제

(一二) 중국의 말글 정책

(1) 중국의 말글의 과거와 현재

(ㄱ) 중국의 글자

(ㄴ) 진(秦) 시황의 글자 통제

(ㄷ) 표준 문장어의 고정

(ㄹ) 현대 중국의 방언

(2) 국민 정부의 말씨 정책

(ㄱ) 중국글자 입말삼기(口語化)

(ㄴ) 중국의 로오마자

(3) 중공의 글자 정책

(一三) 일본의 말씨 정책

(1) 일본의 말씨 정책의 세 가지 문제

(2) 역사적 발전의 개관

(3) 일본의 국자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까닭

(4) 일본의 말씨 정책에 대한 비평

두째, 맺음말

세째 가름, 한글만 쓰기의 실천

  1. (ㄱ)한글갈(한글의 세계 문자상 지위) 1941. (ㄴ) 글자의 혁명 1946. (ㄷ)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 (ㄹ) 한글의 투쟁 1954. (ㅁ) 고희 기념 논문집 1968 (1)

  2. [wiki:HanjaDic:後 後][wiki:HanjaDic:藤 藤][wiki:HanjaDic:朝 朝][wiki:HanjaDic:太 太][wiki:HanjaDic:郞 郞] (2)

  3. [wiki:HanjaDic:馴 馴][wiki:HanjaDic:育 育] (3)

  4. [wiki:HanjaDic:賊 賊][wiki:HanjaDic:人 人][wiki:HanjaDic:之 之][wiki:HanjaDic:子 子] (4)

  5. [wiki:HanjaDic:專 專][wiki:HanjaDic:用 用] (5)

  6. [wiki:HanjaDic:漢 漢][wiki:HanjaDic:唐 唐] (6)

  7. [wiki:HanjaDic:結 結][wiki:HanjaDic:繩 繩][wiki:HanjaDic:文 文][wiki:HanjaDic:字 字] (7)

  8. [wiki:HanjaDic:音 音][wiki:HanjaDic:韻 韻][wiki:HanjaDic:文 文][wiki:HanjaDic:字 字] (8)

  9. alphabetic letter (9)

  10. [wiki:HanjaDic:象 象][wiki:HanjaDic:形 形][wiki:HanjaDic:文 文][wiki:HanjaDic:字 字] (10)

  11. Ltr. Commander Hall의 보고 강연(나의 지음: ["한글의 투쟁"] 207쪽) (11)

  12. [wiki:HanjaDic:縣 縣] (12)

한글만 쓰기의 주장 (last edited 2011-11-17 00:22:29 by Minsoo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