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유래에 대하여

- 고 영근(高永根)

1

오늘날 우리 글자의 이름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한글’이란 말은 무슨 뜻이며 누구에 의해 지어져서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을까? 이러한 물음을 둘러싸고 우리의 학계에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까지 근거 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이 윤재(李允宰)는 한글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베풀었다.

‘한글’의 이름을 지은 사람을 주 시경이라고 추정하고 이어 그는 ‘한글’의 ‘한’은 우리의 고대민족의 이름인 환족(桓族)이나 환국(桓國)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내려와서는 ‘삼한(三韓)’의 ‘한(韓)’, 근대의 ‘한국(韓國)’의 ‘한’에 그 기원을 대고 그 의미는 ‘크다<大>, ’하나<一>‘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이에 대해 최 현배는 ‘한글’의 ‘한’은 ‘하나<一>, 크다<大>, 바르다<正>’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말은 주 시경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추측하고 있다. 또 이 말이 쓰인 기록은 신문관에서 발행한 「아이들보이」에도 언급하고 있다.2 최 남선은 한글의 유래를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다.3

한글은 융희 말년, 곧 1910년 조선광문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 뜻은 앞의 이 윤재의 해석과 같이 ‘크다<大>’와 ‘한(韓)’의 두 가지를 들고 이어 이 말이 쓰인 최초의 기록은 계축년(癸丑年; 1913)에 나온 아동잡지 아이들보이의 「한글」난(欄)이라고 하여 최 현배보다 사용 연대를 구체적으로 명시(明示)하였다.

한글이 조선광문회에서 만들어졌다는 최 남선의 소견에 대하여 박승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

박 승빈은 최 남선이 짓고 주 시경이 찬동하여 ‘한글’이란 이름이 확정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김 민수는 ‘한글’의 ‘한’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한(韓)’에서 따낸 것이며, 그 의미는 앞의 이 윤재, 최 남선과 같이 ‘크다<大>’와 ‘한(韓)’의 두 가지를 부여하였다.5 그는 또 한글의 사용 연대와 쓰인 사례를 최 남선보다 더 분명히 하였으니 “「아이들보이」지(誌)(1913. 9. 창간)「한글 풀이」란에 처음 보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6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한글’의 ‘한’은 ‘’크다<大>’와 ‘한(韓)’의 의미이며 지어진 것은 1910년이고 공식적 사용 기록은 1913년 9월까지 높일 수 있으며, 지은 사람은 주 시경과 최 남선일 것이라는 정도이다. 사용 연대만 확실할 뿐 의미나 지어진 연대 및 지은 사람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한글’이 우리 글자의 이름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이 마당에 이 말의 유래를 자세히 캐어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최근 발견된 몇 가지 자료들과 이전의 소견들을 종합함으로써 ‘한글’이라는 이름에 얽혀 있는 문제들을 좀더 분명히 밝혀 보고자 한다.

2

다 아는 바와 같이 갑오경장 이후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국어(國語)’와 ‘국문(國文)’으로 불러 왔다. 이 당시 국어 문법을 가장 집념있게 연구한 사람은 주 시경인데 그의 대부분의 저술은 ‘국어(國語)’와 ‘국문(國文)’으로 되어 있다.

주 시경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저술에서도 이런 말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국어·국문이란 말은 주시경이 직접·간접으로 관여한 단체나 기관 등에서도 그대로 목격된다.

보중친목회보 http://zbook.moazine.com/service/kmpa/59569/1/middle/001.jpg
출처: http://zbook.moazine.com/

국권 상실 이전까지는 대부분 위와 같이 ‘국어(國語)·국문(國文)’이란 말을 썼다. 그러나 주 시경이, 1910년 6월10일에 발행된 「보중친목회보(普中親睦會報)」일호(一號)에 기고한 글에는 국어와 국문 대신 ‘한나라말’과 ‘한나라글’로 되어 있다. 이 글은 ‘국어문법(國語文法)’의 ‘서(序)’와 ‘국문(國文)의 소리’를 한글로 바꾸어 쓴 것으로 짐작되는데7 이는 ‘한국어(韓國語)’와 ‘한국문(韓國文)’에 대응되는 의미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상의 저술들과 단체 등에 나타나는 ‘국어’나 ‘국문’이란 말도 국권 상실 이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국’대신 ‘조선’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1911년부터 1916년 사이에 나타난 우리말이나 글에 대한 저술이나 이와 관계가 있는 단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순수한 우리말로 된 저술들도 눈에 띈다.

한편 우리는 주시경의 이름으로 발부된 한 수료증서에서 ‘한말’이란 말을 발견한다.

다음 증서의 수료자 오 봉빈(吳鳳彬)은 화가인데 최근에 나타난 「한글모죽보기」에 의하면8 1910년 10월부터 1911년 6월 27일 사이에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 강습소 제 2회 졸업생인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다음 증서에 발부 일자가 “세종임금 나이신 네온 예순 아홉해 넷째달 첫날”이라고 되어 있다. ‘네온 예순 아홉해’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469년이란 뜻이니 1911년으로 환산되고 ‘넷째날 첫날’은 4월 1일이다. 곧 1911년 4월 1일이다.9

이렇게 판독이 된다면 「한글모죽보기」의 강습기간과 어긋나게 되니 국어연구학회의 수료증서라고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국어연구학회 졸업증서 서식과 체제가 비슷하고10 강습 장소가 보성중학교이며 강사가 주 시경인 점이 모두 「한글보죽보기」의 기록과 일치되니11 일단은 국어연구학회 제2회 졸업증서로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12

위의 증서와 「한글모죽보기」의 강습 기간이 일치하지 않은 것은 국권 상실의 사정과 얽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글모죽보기」는 국어연구학회 제2회 강습기간을 1910. 10∼ 1911. 6.27로 잡고 있으나<전술(前術)> 이는 이 책의 편자인 이 규영의 의도적 기술일 가능성이 많다. 이 책은 하기 강습소, 국어연구학회 강습소, 조선어 강습원을 유기적으로 관련시키고 국어연구학회와 조선언문회가 같은 단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의 증서가 1911년 4월 1일자로 발부되어 있고 증서의 내용이 두 달 동안으로 나와 있으니 1911년 2~3월이 실질적 강습 기간이 된다.13

위의 증서가 국어연구학회 제2회 졸업증서라는 사실이 옳다면 강습소의 이름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증서 끝에서 두 번째에 기록되어 있는 ‘보셩즁학교안말익힘곳’은 보성학교(普成學校)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국어연구학회 강습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국권 상실 전 1910년 6월 30일자로 발부된 제1회 강습소 졸업증서에 나와 있는 국어강습소를 우리말로 바꾼 것이 ‘말익힘곳’이고 보성중학교는 그 소재를 특별히 밝히기 위하여 붙인 것이다. 우리는 국권 상실 후에 나온 주 시경 등의 저술에서 ‘소리갈, 말듬, 말모이, 말의 소리’와 같은 이름이 있음을 보았는데 이곳의 ‘말익힘곳’의 ‘말’도 같은 사정에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고자 한다.

그런데, 증서 첫머리 ‘나남’의 왼쪽에 ‘한말익힘곳침’이란 네모진 도장이 찍혀 있다. 이곳의 ‘한말’이란 주 시경이 1910년에 기고한 바 있었던 ‘한나라말’의 ‘나라’를 떼어내고 만든 이름으로 짐작되는데 단순한 ‘말’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그러면서 국권 상실 이전의 ‘국어’가 표시했던 것과 동일한 의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남이 손에 떨어지니 ‘국어’나 ‘국문’이란 말은 쓸 수 없고 임시 방편으로 생각해 낸 것이 ‘말익힘곳’이요 그것을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한말익힘곳’이 아닌가 한다. 앞의 ‘한나라말’과 관련시켜 볼 때 ‘한말’은 주 시경이 창안해 낸 말임에 틀림없다.

1911년 4월 1일자 증서에 나타난 ‘말익힘곳’내지 ‘한말익힘곳’은 같은 해 다른 이름으로 바뀐다.

위의 기록에 기대면 1908년 8월 31일에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배달말글몯음’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이를 ‘조선어문회’의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어연구학회 산하에 있었던 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앞의 오 봉빈의 졸업증서에 나타나는 ‘말익힘곳’ 이나 ‘한말익힌곳’은 바로 이 강습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들은 「한글모죽보기」에는 적혀져 있지 않다. 이는 이 규영이 본서를 편찬할 때 자료의 불비 등으로 빠뜨린 데에 연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서 ‘국어’가 ‘한나라말’로, 이것이 다시 ‘말’내지 ‘한말’를 거쳐 보다 포괄적인 ‘배달말글’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말’이라고 하면 우리말만 가르치고 우리 글자는 빠지는 데 대해 ‘배달말글’이라고 하면 이의 한자 이름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말과 우리 글자를 다 지시할 수 있다.

‘배달말글’이란 말이 실용된 것은 현전되고 있는 최 현배의 1913년 3월 2일자의 졸업증서와 「한글모죽보기」의 중등과 제2회 졸업증서 서식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 명균(申明均)이 공개한 졸업사진15 에서도 ‘배달말글몯음 둘재보람’이 풀어쓰기 형태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달말글’이란 말은 1911년 9월 17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913년 3월 2일의 졸업증서에 보편적으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배달말글’이란 말도 1913년 3월 23일에는 ‘한글’로 바뀌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한글모죽보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6

이는 ‘배달말글몯음’으로 불러지던 조선어문회의 창립 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곳은 ‘배달말글’을 ‘한글’로 바꾼 점이다. 이는 앞의 ‘한말’과 마찬가지로 1910년의 주 시경의 글 ‘한나라말’에 나타나는 ‘한나라글’의 ‘나라’를 빼고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광문회의 설립이 1910년 10월인 이상17 그때 ‘한글’이 논의되었더라도 이미 같은 해 주 시경 이 쓴 ‘한나라글’이나 ‘한나라말’이 중심이었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증(文證)되는 자료가 없는 이상 그것을 그대로 믿기가 어려우며 현재로는 1913년 3월 23일을 ‘한글’이란 말의 최고(最古) 사용년대(使用年代)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3년 9월 이전으로 소급하지 않았는데 「한글모죽보기」의 발견으로 이보다 6개월 앞당겨지게 되었다.

‘국어’나 ‘국문’을 ‘한말’이나 ‘배달말글’로 바꾼 것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배달말글’을 ‘한글’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앞에서 ‘한말’을 ‘배달말글’로 바꾼 연유를 캐어 본 일이 있거니와 이곳에서도 비슷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배달’은 고조선의 이름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낼 수 있는 잇점(利點)이 있지만 음절이 너무 길다는 것이 흠이 된다. 이리하여 ‘한’으로 바꾸면 음절이 짧아지고 그것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해석과 같이 멀리는 ‘삼한(三韓)’의 ‘한(韓)’과 관련되고 가까이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한(韓)’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1911년 4월 1일에 썼던 ‘한말’의 ‘한’을 다시 취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조처를 추한데는 ‘한’이 옛날 ‘하다<대다(大多)>’을 관형신형 ‘한’으로 일치된다는 사실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붙여진 뜻이지 원래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배달말글’의 ‘말글’을 ‘글(한글)’로 바꾼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앞의 경우와 같이 음절의 수를 생각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앞에서 우리는 ‘한말’의 ‘말’로써는 ‘언문’을 포괄하지 못하므로 ‘배달’에 ‘말글’을 붙였다고 해석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말’이 떨어져 나가고 ‘글’만 남게 되었다. ‘글’은 문자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적혀진 문장이나 기록 등의 문자언어도 가리킬 수 있다. ‘조선언문(朝鮮言文)’의 ‘언문(言文)’을 지칭하는 데는 ‘한글’이 ‘한말’보다 포괄적이고 또 ‘배달말글’보다 음절이 짧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데 ‘한글’은 ‘한말’이나 ‘배달말글’과 비교할 볼 때 일차적으로는 ‘한(韓)’. 곧 우리 나라의 글자 내지는 문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한글’이란 말을 문자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어를 지칭할 때도 쓰는 것은 18 이런 역사적 형성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의 작명부(作名父)는 누구일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 시경이라는 의견이 우세하고 최 남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누구라고 단정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한글’이 1910년의 주 시경의 글에 나타나는 ‘한 나라글’에서 유래한다고 해석한 이상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주 시경임이 틀림없다. 박 승빈은 최 남선을 작명부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이는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더 많다. 주 시경이 이미 ‘ 한나라글’이란 말을 쓴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그리고 주 시경의 손으로 만들어진 각종 증서에 ‘한말, 배달말글, 한글’이 실용되고 있다는 것은 ‘한글’의 작명부가 주 시경이라는 점을 무엇보다 크게 뒷받침한다.

주 시경은 하기국어강습소와 조선어강습원의 규칙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언문회의 규칙도 손수 만들었는데 언문회 규칙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곳의 ‘하남’이 무슨 뜻을 표시하는지 단정할 수 없으나 ‘한앎’, 곧 ‘많이 앎’의 등의 해석20 이 옳다고 한다면 ‘한말, 한글’의 ‘한’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언문회의 규칙이 마련된 것이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꾼 1913년 3월23일이니 서로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1913년 3월 21일에 얼굴을 드러낸 ‘한글’은 그후 어떻게 실용화되었까? 앞서 말한 아이들보이지(1913. 9)의 ‘한글풀이’란에 처음 보이고 그 다음에는 ‘한글배곧’에서 나타난다. ‘한글배곧’은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을 바꾼 것인데 학회의 이름 바꾸기에 이은 강습원의 개명인 것이다. 그리고 중등과 제4회 수업증서(1915. 3), 고등과 제3회 수업증서, 근만증, 우등증(1915. 3)에 ‘한글배곧’으로 나와 있다. 이들 증서는 모두 주시경이 살아있을 때 작성해 둔 것인데 1915년부터 나온 증서에 ‘한글’이 쓰이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21

1915년에 씌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김 두봉의 「조선말본」(1916)의 머리말에 ‘한글모임자 한샘‘22 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한글‘이란 말이 주 시경 후학자들에게 사용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김 두봉 이후 ’한글‘이란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주시경의 충실한 후학이었던 이 규영(李奎榮)이다. 그의「한글적새」와「한글모죽보기」의 두 원고본은 1916∼1919년 사이에 엮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두 책의 이름이 ’한글‘로 시작되어 있다는 것은 주 시경의 후계들이 이 말의 보급에 앞장 서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한글’이 우리 문자의 이름으로 보편화된 것은 1927년 동인지「한글」이 간행되고 ‘가갸날’이라고 부르던 훈민정음 반포일을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른 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23

3

이상 우리는 오늘날 우리 글자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는 ‘한글’의 유래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종전 학자들의 견해를 발판으로 하고 새로운 자료를 더하여 살펴보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한글’은 주 시경이 1910년에 쓴 글 “한나라말”에 나타나는 ‘한나라글’에서 ‘나라’를 빼고 만들어진 것이다.
  2. ‘한’의 의미는 멀리는 ‘삼한(三韓)’의 ‘한(韓)’과 관련되고 가까이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한(韓)’을 연상시킬 수 있다. ‘하나<一>, 크다<大>, 바르다<正>’과 같은 뜻은 결과적으로 덧붙여지거나 후세 학자들이 부연한 것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나라 글, 곧 한국 문자를 가리킨다.

  3. ‘한글’의 ‘글’은 ‘문자’ 뿐만 아니라 언어도 지칭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한말’, 다음에는 ‘배달말글’로 하였으나 언어만 가리킨다든지 음절이 길다는 이유 때문에 포용성 있는 ‘글’이 채택되어 ‘한글’이란 말이 우리 문자, 나아가서는 우리의 언어·문자 전반을 포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 ‘한글’의 작명부는 ‘한나라글, 한나라말, 한말, 배달말글’ 등의 말을 본다든지, 최근 나타난 자료에 보이는 ‘한글모, 한글배곧, 하남’ 등의 말을 두루 참조할 때 주 시경임이 틀림없다.
  5. 현전하는 기록을 대상으로 할 때 ‘한글’의 최고사용년대(最高使用年代)는 1913년 3월 23일이다. 이는 종전의 기록보다 6개월 앞선다. 이 말이 실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13년 9월이며 1914년 조선어강습원이 ‘한글배곧’으로 바뀌고 1915년 이 이름에 의한 졸업증서 등이 발부되자 많이 알려졌고 보편화된 것은 1927년 이후라고 생각된다.
    • -〈조 문제선생 환갑기념론총(趙文濟先生還甲紀念論叢), 1982〉

글월 기록

  1. 2009년 3월 14일:
    1. 언제 어디서 내려받았는지 모르는 한글 문서(ftp://ftp.jikji.org/pub/JikjiProject/HangeuluiYuraee.hwp)로 일 시작.

    2. 漢字 –> 한자(漢字)의 꼴로 바꾸고, 너무나도 쉬운 것은 (漢字)를 지우고 한자만 남겼음.

    3. 漢字 중에 한글로 나타내는 것이 뜻을 전달하기에 편한 경우, 한글<한자>로 나타냈음.

    4. ‘성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성이름’으로 하나스럽게 나타냈음.
  2. 2009.04.19:
    1. '성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시 '성 이름'으로 바꾸었음.

http://images.jikji.org/wikiimages/JikjiEnd.png


갈래


  1. 이윤재, “한글강의”, 「신생(新生)」 제2권 제9호 통권 제11호 14면 (1)

  2. 최 현배,「한글갈), 정음사, 1942(초판), 1961, 52면. (2)

  3. 최 남선,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동명사(東明社), 1946, 179∼180면, 삼성문화문고(1972), 249∼247면. (3)

  4. 박 승빈, 「한글맞춤법통일안」 비판(批判), 1936, 1973(통문관(通文館) 복사간행), 4면 (4)

  5. 김 민수, 「국어정책론(國語政策論)」,고대출판부(高大出版部), 1973, 138면. (5)

  6. 김 민수, 「주 시경연구(周時經硏究)」, 탑출판사(塔出版社), 1977, 156면. (6)

  7. 같은 책 해설 “한나라말”참조. (7)

  8. 이 규영(편), 「한글모죽보기), 1917∼ 1919, 68면 참조. (8)

  9. 김 민수, “이 규영(李奎榮)의 문법연구(文法硏究)”, 한국학보(韓國學報) 19, 1980, 62면에는 이 연대를 1914년으로 잡았고 필자도 이를 인용한 일이 있으나 (졸고(拙稿), “개화기(開花期)의 국어연구단체(國語硏究團體)와 국문보급활동(國文普及活動)”, 한국학보(韓國學報) 30, 1983, 97면 각주 51) ‘세종임금 나이신’은 훈민정음 반포 (1446)라고 하기 보다 제정(1443)이라고 보는 것이 증서에 나타나는 과정의 술어 등을 고려할 때 온당해 보인다. 오봉빈의 수료증서는 김 민수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 열람의 계기를 마련해 주신 김선생님께 사의를 표한다. (9)

  10. 국어연구학회 제 1회 졸업증서 서식은 앞의 졸고(拙稿) 125면 사진 10참조. (10)

  11. 국어연구학회 제 1회 강습소의 장소는 처음에는 사동(寺洞) 천도교(天道敎)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였으나 뒤에 보성학교(普成學校)로 옮겼다. 자세한 것은 이 규영 앞의 책 5, 67∼68, 87장과 앞의 졸고(拙稿) 97면 참조. (11)

  12. 이 규영 앞의 책에는 국어연구학회 제2회 졸업증서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12)

  13.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실질적 강습 기간은 「한글모죽보기」에 적힌 대로이지만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기간을 2개월로 단축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13)

  14. 이 규영(편) 앞의 책 6장 참조 (14)

  15. 신 명균, “조선어(朝鮮語)의 학적체계(學的體系)와 주 시경선생(周時經先生)의 위치(位置)”, 「신생(新生)」 제2권 제9호 11면 참조. (15)

  16. 이 규영 앞의 책 17면. (16)

  17. 서울대학교(大學校) 동아문화연구소(東亞文化硏究所), 국어국문학사전(國語國文學事典),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 1973 ‘광문회’ 항목 참조. (17)

  18. 대표적으로 「한글맞춤법통일」의 ‘한글’의 의미가 그것이다. 자세한 것은 박 승빈의 앞의 글 3면 참조. (18)

  19. 이 규영(편) 앞의 책 21∼25장 및 앞의 졸고 111∼2면 참조. (19)

  20. ‘하남’의 해석은 앞의 졸고(拙稿) 113면 각주 102 참조 (20)

  21. 이 기문 교수는 앞의 책에서 「신생(新生)」제이권(第二卷) 제구호(第九號)에 실린 고등과 졸업증서(1915. 3. 31)을 옮겨놓고 (7면 참조) 해설(1면 참조)에서 이곳에 ‘한글이란 이름이 처음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21)

  22. 한샘은 최 남선인데 최 남선이 조선언문회의 회장이 되었다는 기록은 「한글모죽기」에 나오지 않는다. 주 시경 하세로 말미암아 생긴 공백을 최 남선이 임시로 맡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22)

  23.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최 현배 앞의 책 52∼3면 참조. (23)

한글의 유래에 대하여 (last edited 2009-04-19 14:09:22 by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