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1. 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1. 머리말
    2. 말의 기본은 귀로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
      1. 청각성이 말에서 중요한 이유
      2. 말의 청각성과 글자의 관계
      3. 한자어의 청각성 문제
      4. 말의 청각성으로 풀어 보는 한글 전용론과 한자 병용론
    3. 한자 병용론의 근거와 그 검토
      1. 한자 자체의 우수성으로 한글의 취약점을 보완해 문자이상국을 실현한다
        1. 한자의 특성
          1. 뛰어난 조어력
          2. 뛰어난 시각성
          3. 뛰어난 의미 고정성
          4. 심오한 철학성
          5. 뛰어난 회화성
          6. 두뇌 계발성
        2. 한글의 특성
          1. 편리성
          2. 다양한 발음의 표기성
          3. 한글은 한겨레의 자존심
          4. 무한한 발전 가능성
      2.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말이므로 우리말의 정상적 사용을 위해 한자를 배워야 한다
        1.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말이다
        2. 한글전용정책으로 오늘날 국어생활이 반문맹 상태가 되었다
      3. 전통의 계승
      4. 문화적 경제적 국제교류, 특히 동양 여러 나라 사이의 교류에 한자는 필수적이다
      5. 관광객 유치
    4. 문화관광부의 행정상의 문제점
      1.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 근거와 검토
      2. 문화관광부의 졸속 행정
        1.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에 대한 여론조사
        2. 신문 기사 정리
          1. <한자병용 결정은 '전격 작전'>
          2. <일선 교육현장 혼란>
          3. <부처간 협의, 학계와 조율 등 미진… '깜짝쇼' 우려>
          4. <행자부, 부처협의·전문가의견 수렴 없는 졸속정책 비판 >
          5. <한자병기 "도로표지판 교체, 1조 이상 예산 필요"> - 도시미관, 운전자 시선도 방해
          6. <[독자의 소리] 도로표지판 한자병기 의견수렴 왜 안 거치나>
          7. <한글·한자 병용 찬반 논란 확산>
          8. <[한자병용 시행되면…] 문화부 '기본 틀 변화 없다'>
          9. <[사설] 불쑥 내놓은 한자병용안>
          10. <한자병용 부처마다 입장 달라 조정 필요>
          11. <[취재파일] 문화부의 비문화적 강변>
          12. <한-일 외무장관, 한자 회담 열었다?>
      3. 정리
    5. 지금 우리가 할 일
      1.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을 만들자
      2.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의 할 일
        1. 갈음말·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한 기초 연구
        2. 갈음말과 누리한글 만들기 기본 원칙 제정
        3.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제정
        4.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보급
    6. 사대주의와 민족주의
    7. 맺음말

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머리말

글자란 무엇인가. (점자 같은 특수한 문자를 제외한) 일반적인 의미의 글자를 <동아 새국어사전>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라고 뜻매김하고 있다. 그렇다. 글자란 말을 적는 일정한 부호이다. 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글자가 있다. 그럼 말이란 무엇인가.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소리, 또는 그 행위나 내용'이라고 뜻매김할 수 있는데, 좁은 뜻으론 '뜻과 소리의 짜임'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소리(음운론), 뜻(의미론), 짜임(말본)'이 말의 세 요소다. 따라서 글자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말의 세 요소(소리+뜻+짜임)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라는 '시각성'이 덧붙는다.

입말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약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게 위해 글자라는 것이 고안되었다. 글자를 사용하면 그 말을 그 자리에서 직접 듣지 않았더라도 글자를 통해 다른 곳에서도(공간적 제약 극복)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시간적 제약 극복) 그 글자를 통해 그 말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글자는 입말의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극복시켜 주는 것일 뿐, 그 입말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글자인 한자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도 미래의 우리말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정하고 그 다음 그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다.

물론 글자는 말을 전달하는 도구로서만 기능 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글자라는 것이 말을 보조·보완하는 도구로서 고안된 것이지만 일단 글자가 생긴 다음에는 글자 때문에 말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특히 강조할 말의 청각성(청각적 변별력 ; 말소리를 귀로 듣고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는 힘 또는 성질)이라는 것도 글자의 시각성에 따라 적잖게 영향을 받는다. 글자의 시각성 때문에 우리는 말의 청각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글자가 오히려 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현상이다. 글자는 본래 말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된 보조적·보완적 도구라는 대원칙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 원칙을 벗어나 말과 글자의 주종 관계가 뒤바뀌면, 글자가 자칫 말의 본질을 훼손하게 되어 말이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글자 정책에서 항상 유념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1999. 4

송 영상

말의 기본은 귀로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청각성이 말에서 중요한 이유

우선 말은 '귀로 들어서'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말은 듣기만 해서는 뜻을 알 수 없고 그 글자를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면, 엄청난 불편을 가져오기 때문에 말로서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 말이나 다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모르지만 서로 자기 나라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중국은 지금도 까막눈이(문맹자)가 적지 않지만, 옛날에는 극소수 상위층 외에는 거의 모두가 까막눈이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의사 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중국은 입말과 글말이 일치하지 않아, 글을 그대로 읽어 주면 그것을 바로 듣고 그 뜻을 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입말은 글과는 관계없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이므로 이 입말을 사용해 의사소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입말과 글말을 일치시키기 위해, 문체를 과거의 문언문에서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꿨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에서도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그것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아낼 수 있다. 입말과 글말은 거의 일치하는 수준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일상 생활용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문용어도 전문가 사이에서는 글을 보지 않고 그 말소리만 들어도 그 뜻을 아는 것이다. 들어서 아는 말과 들어서는 모르고 글자를 보아야 아는 말이 따로 있는 듯이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런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하는 나라가 아니다. 말이란 들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말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말도 들어서 그 뜻을 알아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자를 쓰자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리로 듣는 것만 가지고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도 남겨 두자는 것이 된다. 한자를 쓴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소리와 뜻의 분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말의 청각성과 글자의 관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말은 본질적으로 청각성(청각적 변별성)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귀로 듣고' 그 뜻을 알아낼 수 없는 말은 말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이 점을 쉽게 보아 넘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말은 청각성을 전제하고 있고 글자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결국 글자는 기본적으로 청각성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그런 면에서 소리글자는 뜻글자와 비교할 때 첫 단추를 제대로 낀(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글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글자는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이기 때문에 시각성을 아울러 가질 것이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글자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야 하므로 본질적으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글자는 본질적으로 청각성, 시각성, 의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관계는 묘한 면이 있다. 말이든 글자이든 그 궁극의 목적은 의미의 전달에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미성은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나머지 청각성이나 시각성도 이 의미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돼 있다. 즉 청각성과 의미성, 시각성과 의미성은 각각 본질적으로 결합하고 있어서 나눌 수가 없다. 그러면 청각성과 시각성은 어떨까. 여기서 소리글자와 뜻글자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즉 소리글자는 청각성과 시각성도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결합되어 있으나 뜻글자는 그런 관계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소리글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나라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말로 옮기고 또 글자로도 옮긴다고 할 때에, 말하는 이는 "아름답다"고 발음하고(청각성), <아름답다>고 쓰며(시각성), 그 말을 듣는 이는 "아름답다"라고 듣고 (그 글자를 보는 이는 <아름답다>고 보고) '아름답다'란 뜻이라고 알아듣는다(의미성). 다시 말해 말이 지닌 의미의 전달은 말의 경우엔 청각성과 붙어 있고, 글자의 경우에는 시각성과 결합돼 있다. '아름답다'는 소리(청각성)='아름답다'는 의미(의미성), '아름답다'는 글꼴(시각성)='아름답다'는 의미(의미성)의 도식이 성립함과 동시에 또한 '아름답다'는 말소리(청각성)='아름답다'는 글꼴(시각성)의 등식까지도 성립하는 것이다. 즉 청각성=시각성=의미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여 세 요소가 분리되질 않고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한자 같은 뜻글자의 경우는 다르다. 앞의 경우와 같이 '우리 나라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로 옮기고 또 글자로도 옮긴다고 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말하는 이는 "미"라고 발음하고(청각성), <美>라고 쓰며(시각성), 듣는 이는 "미"라고 듣고(청각성)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보는 이는 <美>라고 보고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의미성). 그런데 이것은 우리 나라처럼 한자를 수입해서 쓰는 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인 면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큰 시각성과 청각성의 괴리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중국에서는 '메이(美)'라고 생각하고 '메이'라고 발음하며 <美>라고 쓰며, 듣는 이도 '메이'라고 듣고, 보는 이도 <美>라고 보고 '메이'=<美>라고 알아듣는 것이다. 다만 뜻글자는 본질적으로 청각성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뜻글자는 소리를 고정시키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한자를 읽는 방법은 나라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청각적 변별력과 관련해 뜻글자는 근본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청각적 변별력을 가지는 말은 시각적 변별력의 도움이 필요 없으므로 굳이 시각성이 뛰어날 필요가 없으니 소리글자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청각적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낱말은 이미 말로서 갖춰야 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결여한 것이어서 말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글자란 원칙적으로 소리글자로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칙적으로 뜻글자는 소리글자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쓰게 된, 비정상적인 글자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계 문자의 역사 또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중국에서 뜻글자인 한자를 쓰게 된 것은 처음 문자생활을 시작할 당시 중국이 소리글자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게 된 데서 비롯한 비극이었다. 처음에 한자는 뜻글자이면서도 청각적 변별력을 갖춘 글자로서 당시의 중국말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생활이 널리 행해진 것이 아닌 데다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물론이고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글자를 적을 재료(종이)가 풍부하지 못하여, 될 수 있으면 글자 수를 줄여 글을 적다 보니 입말과 글말이 분리되게 되었다(문어체와 구어체의 괴리. 문어체와 구어체의 괴리는 20세기에 백화문을 정식 문체로서 규정하기 전까지 계속되게 된다.). 입말과 글말이 다르다는 것은 글자로 쓴 문장을 있는 그대로 입으로 읽었을 때는 청각적 변별력(말의 청각성)을 확보한다는 보장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느 때부터인가 한자문장은 중국의 입말과 괴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글자들 사이에 동음이의어가 양산될 수밖에 없어서(한자의 대부분은 형성자인데, 형성자는 음을 결정하는 부분과 뜻을 결정하는 부분이 결합된 것이므로, 형성자가 늘어날수록 음이 같은 글자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 청각성을 상실하는 한자가 늘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음이의어의 증가와 글말(한자문)과 입말(일상생활에서 소리로 나누는 말)의 괴리라는 복합요인으로 인해 문자의 청각성이 일상생활의 대화 속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자(청각성은 입말로 실제로 쓸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인데 입말과 글자가 별 상관없이 분리돼 서로 따로따로 쓰이다 보니 문서에 쓰인 글이나 어휘들은 청각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각성을 상실한 글자나 단어가 늘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것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입말에서는 모두 청각적 변별력을 갖춘 말들만 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화문이라고 불리는 구어체는 일상생활에서 실제 사용돼 오던 것이기 때문에 청각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일상대화로 쓰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한자가 우리 나라 같이 전혀 다른 입말을 쓰는 나라에 수입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청각성을 갖춘 중국 입말에 쓰이는 단어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한자로 써 놓은 문서에 쓰인 글말을 수입해 단어를 구성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중국에서 수입한 문서들은 바로 문언문으로 쓰여 있어서 이미 중국에서조차 청각성을 상실한 어휘들이었다. 그런데다가 중국말에는 사성(1성, 2성, 3성, 4성)[북경말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청각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지만, 우리 나라는 아무래도 중국 사람들같이 철저히 사성을 지킨다는 것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들어온 한자의 발음수가 481 개에 불과한데[내가 직접 옥편(8,000 자 수록)을 보고 세어 본 숫자이다. 아마 2,000 자 안팎의 상용한자를 기준으로만 하면 발음 수는 여기에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괵 긱 녈 눈 뉵 닐 둑 볼 솨 솰 쉬 올 줄 퍅 퓨 헤 홰 훌 훙' 같은 소리는 거의 쓰이지 않는 발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런 소리를 빼면 실제 쓰이는 한자음은 450-460 개 정도가 정확한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머리소리 법칙'(두음법칙)이 있기 때문에 첫음절에 오는 한자음은 더욱 제한적이다.] 이것은 오늘날 북경어의 발음 수에 비해도 3-4배 적은 수이다. 이처럼 동음이의어가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에서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청각성과는 거리가 먼 문언문으로 한자를 수입하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쓰는 한자는 중국보다도 더욱 청각성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에서 한자어가 청각성에 그토록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입말 자체가 중국과는 전혀 다른 우리 나라에서 수입물인 한자어는 그저 책 속에서 눈으로나 보고 그 뜻을 파악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청각성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자를 접하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일부 특권층에 불과한 소수였을 것이니 더욱 입말과는 멀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기미독립선언문처럼 '오등은 자에 아'와 같이 전혀 청각성을 고려치 않은 말들이 우리 나라에서 한자를 통해 문서에 쓰여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입말과 서로 통일될 것(언문일치)을 아예 포기한 채 쓰여 오던 한자는 20세기 들어와 입말로서도 제 구실을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바로 이 청각성의 덫에 걸리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하는 한글의 기본 소리 가운데에도 '갸겨그'같은 한자음에 없는 소리가 있다. 이처럼 우리 나라 한자어는 발음수가 턱없이 적다.

우리 나라의 한자가 청각성을 잃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우리 나라의 경우 최악의 상태라고 할 정도로 비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한자를 쓰는 한국·중국·일본만 비교해 본다고 해도 이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는 글자마다 고유의 성조(중국 표준어인 북경어[북방어 ; 관화음계]를 기준으로 하면 4가지 성조[1성, 2성, 3성, 4성]가 있고, 그 외에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방언 가운데는 그보다 더 많은 성조를 가진 경우도 적지 않다)라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같은 글자라도 발음 자체가 두 가지 이상의 음으로 발음되는 파음자(破音字)가 발달돼 있다. 예를 들어 파음자의 하나인 '大'자의 경우, 원래는 글자 한자만 읽을 때는 '따'[d ](성조는 4성)로 발음되지만, '大夫'(우리말과 달리 중국어로는 '의사'라는 뜻)에서는 '따이'[d i](성조는 4성)로 달리 발음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같은 한자가 두 가지 이상의 음으로 발음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중국의 파음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국어에는 파음자가 발달돼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자를 서로 다른 네 가지 성조와 다양한 파음자를 통해 청각성 훼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어의 경우도(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잘 알진 못하지만) 한자의 경우 같은 글자라도 음독은 물론 훈독으로도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좀더 다양한 발음으로 한자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한자를 훈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글자로는 한자를 섞어 쓰더라도 말에서는 일본 토박이말이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자가 가져오는 청각성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발음 체계가 우리 나라보다는 잘 발달돼 있다. 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글자 자체를 번체자에서 간체자로 바꾸고, 발음을 로마자를 변형한 한어병음 표기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중국의 글자를 완전히 표음문자로 바꾸기 위한 과도기로서 취한 정책이다. 중국이 앞으로 과연 처음의 의도대로 간체자까지 버리고 완전한 표음문자국가로 나아갈 것인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그대로 간체자를 쓰는 쪽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처럼 완전 표음문자국가가 되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이처럼 중국어의 청각성(나름대로는 높은 수준의 청각성)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일본은 우리보다 한자를 버리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자에 대한 청각성에서는 우리 나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보다 한자를 버리고 완전한 표음문자국(가나만 쓰는 나라)으로 가기가 더 쉽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일본이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표음문자인 가나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자어가 한국에서 가장 청각성에 큰 취약점을 드러낸다는 것과, 우리 나라는 가장 뛰어난 표음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다라는 두 가지 점을, 한자를 우리 나라에서 계속 쓸 것인가를 논할 때는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정확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러한 추론 과정이나 이론의 타당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우리 나라에서 지금 한자어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청각적 취약성 때문임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취약한 청각성 때문에 청각성을 잃은 한자어는 언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쫓아내 버리자는 것이 한글전용론자들의 태도이고, 이 취약한 청각성 때문에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해야 한자의 시각성에 의지해 제대로 언어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한자병용론(또는 한자혼용론; 한자병용론[한자 나란히 쓰기]과 한자혼용론[한자 섞어 쓰기]은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여기서는 둘 다 구별하지 않고 그때그때 병용론으로도 혼용론으로도 쓸 것이다. 모두 한자가 필요하다는 태도이므로)의 기본 태도인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영문자나 한글처럼 소리글자의 경우는 청각성(소리)과 시각성(글꼴) 그리고 의미성(뜻)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말은 본질적으로 청각성만 있고 시각성은 없으며, 시각성은 글자의 단계에 와서야 본질적 요소로 추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라는 것도 시각성보다는 청각성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글자의 청각성과 시각성을 논할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청각성과 시각성의 비율이 각각 9 : 1 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이 시각성이 없이 청각성만 가지고도 훌륭히 성립하는 것은 바로 소리라는 것에 인간이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는 말이 있듯이 아주 미세한 차이의 발음이라도 우리는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으로도 설정하고 그것에 의미를 다르게 부여해 말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아주 가까운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반대의 뜻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청각성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언어로서 존재할 수 있다('도레미파솔라시'라는 7 가지 기본음을 가지고 한도 끝도 없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도 이러한 청각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말보다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한글이 청각성에 비해 시각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시각성을 보완하기 위해 한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청각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하나님, 하늘님, 한울님, 부처님, 마음, 뜻, 멋, 슬기, 얼, 넋, 철(없다)' 같은 추상적인 개념은 물론, '서글프다, 애달프다, 미덥다, 상냥하다, 시원하다, 느끼하다, 간지럽다, 알딸딸하다' 같은 미묘한 감정이나 느낌도 소리로 거뜬히 표현해 낸다. 한자어는 한글만 보아서는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말의 청각성을 얕잡아 본 결과다. 480개의 발음밖에 없는 한자어를 굳이 고집함으로써 청각적 변별력을 잃는 단어(동음이의어)를 무더기로 만들어 놓고 그 청각적 변별력을 문제삼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뒤바뀐 느낌이다.

한자어의 청각성 문제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뜻글자인 한자를 쓰면 무엇이 문제인가가 바로 드러난다. 한자를 쓰면 청각성과 시각성의 괴리를 피할 수 없다. 한자는 시각성을 갖추고 있지만 청각성에서 큰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나(시각성은 확보) 그 글자의 음만 들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아내기가 어렵게 돼 있다(청각성이 취약). 한자병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바로 이 점에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말에는 들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말(청각성이 결여된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청각성이 결여돼서 문제가 되는 말은 거의 다 한자말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출발한다. 그것은 소리글자는 청각성을 본질로 하므로 원칙적으로 청각성에 문제를 일으킬 수 없지만 뜻글자는 청각성을 갖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우리 나라의 한자는 그 발음수가 480 개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한 가지 발음에 수많은 한자어가 배정될 수밖에 없어, 동음이의어가 무더기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한자를 사용하면 우리말이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무더기로 나올 수밖에 없고,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그런 청각적 변별력을 상실한 말은 사라지는 게 말의 속성상 마땅했다. 그런데 한자는 문서라는 특수한 울타리 속에서 시각성에만 기대어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이미 그것은 참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질 않았을 뿐이지 이미 말로서는 불구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이런 불구의 말이 문서의 울타리를 벗어나 입말의 세계로 나오게 되자 그 불구상태가 드러난 것뿐이다. 한자어가 오늘날 애물단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듣는 즉시 그 말뜻을 알아들어야 능률적이다. 하지만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머리 속에서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어느 것인가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이 이것이구나 하고 확정할 수 있는 한자어들은 그렇질 못하다. 사고의 단계가 한 단계 늘어남으로서 비능률은 필연적이다. 이 피해를 우리는 그저 버릇이 돼서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참으로 대단한 불편이요 비능률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껴안고 가자니 너무 무겁고. 애물단지 한자어의 비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한자의 청각성은 그 개선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자의 음을 480 개 이상으로 늘릴 수 있는 길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한자의 장단음을 제대로 구별해 발음하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것을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른바 영어나 프랑스말 같은 데서 유래한 외래어가 한자어보다 오히려 문제가 덜된다는 것은 이런 청각성 때문이다. 외래어의 남용은 또 다른 사대주의라는 말도 있듯이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온전히 청각성을 갖춘 말만으로 우리말을 채워 가야 한다는 명제에서 보면 외래어는 한자어보다는 낫다. 외래어는 소리글자에서 나온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청각성에 의존하는 말인데다가, 우리말과 청각성에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말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거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어처럼 청각성을 무시하고 시각성을 무기 삼아 우리말에 무작정 밀고 들어와 우리말을 혼란시키는 일을 적어도 외래어는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으로 우리말에서 한글로 써 놓고 그 뜻을 못 알아볼 정도로 청각적 변별력이 떨어지는 말은 우리말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청각성(청각적 변별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의 청각성으로 풀어 보는 한글 전용론과 한자 병용론

우리 나라는 한글전용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우리말을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공적인 우리말에서 모두 몰아내겠다는 것이다. 매우 무서운 정책이다. 말을 몰아내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으로 가장 궁지에 몰린 말은 한자말일 수밖에 없다. 청각성이 가장 모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자말은 한자이기 때문에 쫓겨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청각성이 없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기'라는 발음을 가진 한자말은 20 가지가 넘는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청각성의 유무는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의 지식 정도와 이해력 정도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자말의 경우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청각적 변별력도 높다. 이런 의미에서 한글전용을 전제로 하고 그 보완책으로서 한자를 배우는 것은 한자어의 청각성을 향상시키는 기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한자를 병용하거나 혼용하는 것까지 주장하는 것은 이미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청각성은 글자와 같은 것을 보지 않고 말소리만을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한자를 배워 한자어의 청각성을 보완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하는 꼴이니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다. 청각성을 잃으면 예외 없이 쫓겨나는 것이 순리다.) 대체로 '사기 치다 할 때의 사기[詐欺]', '사기가 높다 할 때 사기[士氣]', '사기 그릇할 때 사기[沙器]' '사마천이 쓴 역사책 사기[史記]' 정도가 청각성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청각성을 가진 서너 단어를 제외한 나머지 20 여 가지의 한자말 '사기'는 쫓겨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어떤 (한자)말이 청각성을 상실해 쫓겨나게 되면 그 빈자리를 청각성을 갖춘 새로운 말이 곧 바로 채워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의 속성(연속성과 지속성, 관습성)으로 인해 재깍재깍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나라가 이 단계에 들어와 있다. 예컨대, '社旗' '邪氣' '死期' '寺基' 같은 말들은 우리말에서 쫓겨나게 될 텐데 그 빈자리가 문제이다. 우리는 '社旗'라는 뜻으로 '사기'라 말할 때 문맥상에서 청각성을 확보할 수 있으면 조금 문제가 덜 되겠으나, 아주 청각성을 상실했을 때는 「회사의 깃발을 의미하는 '사기'」라는 식으로 일일이 설명을 해 가며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로 되돌아가 한자를 다시 쓰는 것이다. 한자말이 가진 청각성 상실의 취약점을 한자의 시각성으로 다시 보완해서 그 의사소통상의 혼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한자병용론 또는 혼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모든 단어나 말은 청각성을 가져야 한다는 대원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입말 속에서 늘 부담으로 남아 불편을 일으킨다. 이처럼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끼치는 의사소통상의 불편을 한자를 쓰는 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한자말의 숙명적인 불행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방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째 방법은 청각성을 상실한 한자말을 청각성을 가진 말로 빨리빨리 바꿔 가는 것이다. 예컨대, '社旗'는 '회사 깃발'로, '邪氣'는 '나쁜 기운'으로, '死期'는 '죽을 때'로, '寺基'는 '절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청각성을 가진 새로운 말로 바꾸는 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쫓겨나는 한자말을 대신하는 새말[갈음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갈음말은 청각성을 확보해야 하고, 쫓겨나는 말이 가졌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 낼 수 있어야 하며, 우리 국민들의 공감과 합의를 얻어내야 한다. 특히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 낸다는 것과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한자를 다시 써서 그 불편의 구덩이로라도 다시 돌아가자는 한자병용론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 후손에게 과연 어떤 언어 문화를 물려줄 것인가. 한자라는 굴레는 우리의 역사적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청각성을 상실한 한자말을 계속 끌고 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어렵더라도 온힘을 쏟아서 한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완전히 청각성을 갖춘 말들로만 구성된 날개같이 자유로운 언어 문화를 물려줄 것인지.

나는 한자의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자로 인한 우리말의 비극은 이제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한글이라는 우리말에는 더없이 알맞은 우리 글이 있기 때문이다. 한자의 극복은 가능하다. 한글전용이 이뤄 낸 지금까지의 성과로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나타났다. 한글전용은 우리 언어 문화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머지않아 그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한자의 시각성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의 생각과 철학을 남김없이 담아 낼 수 있는 한겨레의 말, 시각성과 청각성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는 참다운 말다운 말, 이 자랑스런 겨레말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모든 힘을 한데 모아 아름다운 우리말을 캐내고 갈고 닦아, 말다운 말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소중한 유산이 어디 있을까.

흔히 영어가 국제어가 된 원인은 역사적으로 긴긴 세월 동안 용광로처럼 그리스어, 라틴어 등 수많은 다른 언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풍부한 어휘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말도 한자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좀더 풍부한 언어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시키곤 한다. 그렇다. 말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휘가 늘어나고 표현이 다양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나라의 어휘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넘어서는 안될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자국어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나라 언어의 어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어휘가 자국어와 청각성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되면(외국에서 들어온 말과 자국어가 청각적 변별력이 없이 혼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자국어를 뿌리째 뒤흔들어 혼란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자국어의 주체성까지 위협받게 되어 자국어의 정체성을 잃을 염려까지 있다.

내 생각에 영어가 국제어가 된 이유는 영국이나 미국 등 영어를 쓰는 나라의 국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영어가 세계를 주름잡게 된 것 또한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일어난 아주 특이한 일일뿐이다. 이른바 '세계의 지구촌화'에 따라 일어난 일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 혁명'이 이를 부채질했다. 그런데 영어의 표기 체계는 문자로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완전한 표음문자로서의 기능을 많은 부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쓰는 나라들의 문맹률이 우리보다 높은 이유는 영어의 이러한 표음문자로서의 취약성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소리와 글자간의 1대1 대응 관계가 많이 훼손돼 버렸다. 예컨대 'a, c, i ' 같은 글자는 단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로 발음되기 때문에 완전한 표음성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어가 표음문자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실한 것은 그리스어나 라틴어 등 다른 나라 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좀더 이상적인 문자 국가로 독일을 들고 싶다. 독일에서는 원래 고유의 문자가 있었지만 불편하다고 보고 로마자를 수용해 쓰고 있다. 독일어만의 특수한 발음을 위해 몇 개의 글자는 로마자를 변형해 새롭게 만드는 등(ö같은 글자) 완벽한 표음문자로서 기능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독일어에서는 발음과 문자 사이에 거의 예외가 없이 1대1 대응이 지켜지고 있다. 이것은 독일이 비교적 최근에 문자 개혁을 단행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지만(영어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해 오면서 변해 왔기 때문에 독일과 같이 완전하고 순수한 표음문자로 지켜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문자로서는 이상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어에도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뿌리를 박고 있는 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지만, 영어에서와 달리 문자에서 가장 중요한 완벽한 표음성을 해치지 않도록 수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독일인다운 합리적 사고가 빚어낸 결과란 생각이 든다.

완벽한 표음성을 가진 문자를 가지는 것이 문자이상국이 갖출 제일의 조건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우리가 한자어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자어도 우리말에서 수용되어야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말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한글전용론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자 병용론의 근거와 그 검토

한자병용론자들은 한자의 우수성으로 한글의 취약성을 보완하자는 전제하에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국어 생활의 정상화가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고, 나머지들은 부수적인 주장에 해당한다. 그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한자 자체의 우수성으로 한글의 취약점을 보완해 문자이상국을 실현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의문자이므로 이 둘을 다 병행하면 우리 나라는 가장 이상적인 문자사용국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이상적인 문자는 있을 수 없지만 이상적인 문자사용국은 있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주장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론부터 말해 그렇지가 않다. 우리 나라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문자이상국이 아니고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이상한 문자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의 기본 요소인 청각성을 포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의 말이 자기 말의 청각성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른 나라 말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우리말의 청각성을 희생하면서 한자어를 수용하려 한다. 하지만 한자가 한글을 보완한다는 것은 한글의 청각성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과 우리말이 가진 청각성을 넘어서는 범위까지 한자어를 수용함으로써 극심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이것은 문자이상국이 아니다. 말의 청각성을 잃는 나라가 문자이상국이 될 수는 도저히 없다. 뜻글자와 소리글자의 장점만을 곶감 빼먹듯 쏙 빼다가 우리의 문자생활을 꾸려 갈 수 있다는 달콤한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뜻글자의 장점이 오는 곳에 그 단점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잡았던 토끼마저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 한 나라의 글자는 하나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뜻글자이든 소리글자이든 어쨌든 하나만 써서 불편이 없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실 뜻글자인데도 거의 모든 나라의 공통 글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각 나라의 청각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간단하고 쉽게 숫자를 표기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물론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수용한 것은 그 문자가 배우기 쉬우면서도 뛰어난 시각성과 실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34567890은 '하나, 둘, 셋…[또는 일, 이, 삼…]'이나 'one, two, three …'에 비해 너무나 간단하고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그 글자를 수용하는 나라의 청각성도 해치지 않았다. '1,2,3...'을 우리 나라는 '일, 이, 삼 ...'(또는 하나, 둘, 셋 ...) 영어권 국가에서 '원, 투우, 쓰리…'같이 자기 나라 청각성을 유지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편리한 글자가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아라비아 숫자(사실은 인도 숫자)는 10 개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의 한자처럼 그 나라의 청각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복잡하고 어려운 글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한자어는 아무리 간단하고 실용적인 글자라도 우리말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을 수 없어서 역시 수용이 곤란하다.

이미 우리의 문자 생활에서 영어 알파벳은 아라비아 숫자처럼 한글과 함께 쓰이고 있는 실정인데(TV, IMF 같이 낱자로서의 알파벳을 가리키는 것이지 television 같은 영어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알파벳도 우리 글자살이에 섞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것은 이러한 알파벳은 26 자 정도의 적은 수라서 비교적 간단히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편리하게 외래어를 표기할 수 있는 등 실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이, 비, 씨…'라고 쓰는 것보다 'a, b, c …'라고 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 그리고 영어 알파벳이 한글과 함께 쓰이는 현실을 보고, 영어 알파벳을 우리 글자요 나라글자로 수용해 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자를 우리 글자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한자병용론이나 혼용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얘기다.

한자를 병기하여 한글도 살고 한자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한자나 한글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말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한자의 우수성으로 드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자의 특성

뛰어난 조어력

먼저 한자는 기본적으로 단음절이면서도 함축적이며 심오한 의미를 지닌 특성으로 인해 뛰어난 조어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자 2,000자 정도만 깨우치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전문용어가 거의 한자어로 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조어력이 뛰어난 이유는 한자는 기본적으로 한 글자로서 자체 뜻을 가진 단음절어라는 것이다. 즉 함축적이고 의미가 심오한 뜻을 가지면서도 단음절이므로 간단 명료한 용어를 만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한 글자마다 고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표의문자의 특징이다. 그러나 말이 가진 의미성이라는 것은 사실 청각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자의 조어력이라는 것은 청각성에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시각성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기 때문에 동음이의어의 양산을 불가피하게 가져온다. 즉 한자의 조어력은 시각성에 터잡은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한 조어력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입말을 전제로 해야 하는 글자의 속성상 글자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리고 전문용어가 한자어로 된 이유는 대부분의 용어가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들여왔기 때문이다. 한자를 쓸 수밖에 없는 역사 속에서 자연히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일 뿐, 한자 자체의 조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용어도 한자어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문용어에 젖어 있는 학자나 지도층에서 관행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악순환일 뿐이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신봉국인 일본에게 35년 동안 지배를 받는 등 우리의 주체적인 언어 문화를 키워 갈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가 초래한 비극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파행적 모습 때문일 뿐이다.

한자어는 근본적으로 청각적 변별력에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글 전용화를 하게 되면 대부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기'의 경우에도 '士氣' '詐欺' '沙器' 같은 의미의 것만 남고 다른 말들은 사라질 것이다. 사기(社旗)는 회사의 깃발, 사기(死期)는 죽을 때로 바뀔 것이다. 이처럼 청각성을 상실한 대부분의 한자말들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진정한 조어력은 청각성에 의존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한자보다 수십 배의 발음 수를 자랑하는 한글이 그만큼 조어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마땅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람은 비상한 청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주 조금만 다른 발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어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만이 넘는 어휘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로 이러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결합해 각각의 정확한 뜻과 연결시켜 대화를 거뜬히 해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 능력을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풋'이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이면 '풋고추, 풋사과, 풋나물, 풋마늘, 풋대추, 풋콩'은 물론 더 나아가 '풋사랑, 풋바둑, 풋굿, 풋담배, 풋젓, 풋바심, 풋솜씨, 풋윷, 풋잠'이라는 말까지 훌륭히 만들어 낸다. '풋'을 하나 더 겹쳐 '풋풋하다'하면 정말 풋풋한 냄새, 풋풋한 빛깔을 가진 말이 생겨나지 않는가. 동사 어미 '-아'·'-어' 아래에 쓰이어 그 동작이 마침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는 '내다'도 '해 내다, 견디어 내다, 받아 내다, 이겨내다, 알아내다, 찾아내다, 그려내다'와 같이 정말 「끝내 주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 '가맣다, 거멓다, 까맣다, 꺼멓다, 검다, 시커멓다'에서 '까마스름하다, 까마말쑥하다, 까마무트름하다, 까마반드르하다, 까마족족하다, 까무끄름하다, 까무대대하다, 까무댕댕하다, 까무스름하다, 까무잡잡하다, 까무족족하다, 까무칙칙하다, 까무퇴퇴하다'로, 더 나아가 '까마득하다, 까마귀, 까막까치, 까막눈, 까막눈이[문맹자], 까막나라, 까막과부'까지 아주 미묘한 차이까지 낱낱이 실어 낸다. 어찌 우리말의 조어력을 우습게 볼 것인가.

그리고 한자의 조어력 또는 한자의 함축성과 관련해 한자말을 우리말로 옮기면 한자말이 가진 다양하고 풍부한 또는 세밀한 의미가 많이 유실된다고 주장한다. 뜻글자는 시각성이 소리글자에 비해 뛰어나 시각성으로 인한 의미 부여가 좀더 손쉬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한자말이 토박이말보다 근본적으로 의미가 더 풍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마냥, 그냥' 같은 말이 깊은 맛이 없는가.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한 단어의 뜻은 여러 문장 속에서 다양한 쓰임을 통해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획득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말이 어떤 뜻을 갖느냐는 뜻글자와 소리글자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 가운데 '쌀, 벼, 밥, 나락, 모'(이런 말은 쌀의 원산지인 인디아의 옛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같은 것은 영어보다 더 발달돼 있는데, 이것은 글자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쌀을 주로 먹고 살지만 영어를 쓰는 나라는 밀을 주로 먹는 것이다. 우리 순수한 토박이말도 한자 못지 않게 의미의 함축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멋, 마음, 넋, 얼, 님, 그리움, 사랑, 아픔, 두려움, 흐뭇하다' 같은 말이 함축성이 없는가. 가장 미세하고 표현하기 힘든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고 하는데, 감정의 묘사에서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말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한자말을 토박이말로 옳기는 것보다, 토박이말을 한자말로 옮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나라의 말을 자기 나라의 말로 바꾸는 것은 본래가 어려운 것이지 우리말이라고 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 산스크리트말로 쓰여진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한역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의 유실이 있었는가를 알고 있다. 산스크리트말 자체가 그리스말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어휘력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들이 소리글자로 적혀 있다고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뜻글자를 가진 중국어가 어휘력에서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어는 인도말로 된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말 어휘가 2배-5배나 증가하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이에 비해 우리 나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한자말 아닌 우리말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석보상절 같은 정신을 가진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중국이 만들어 놓은 말들을 그대로 들여와 쓰기 바빴다. 아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그렇지만 한자로 인도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이 가진 세밀한 의미를 도저히 다 담아 낼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경전을 중시하지 않는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한역 경전의 한계도 한몫 했다. 경전의 번역은 경전의 죽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로 다른 언어를 온전히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경전의 번역 자체를 금지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 나라의 말은 자기 나라 말로 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게 돼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도 우리말로 할 때 가장 그 세밀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다. 한자어가 우리 생각을 잘 담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 토박이말을 전문 용어나 고급 용어로 활용하려고 제대로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다. 언제 우리가 불교 용어를 우리말로 만들려고 제대로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말로 소화하려고 자기 말의 2배-5배나 되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 중국과 같은 노력을 해 보았나. 티베트는 아예 산스크리트말과 거의 흡사한 글자와 문법까지 새로 만들어 내면서 불교를 받아 들였다. 불교로 인해 티베트는 말의 어휘는 물론 글자까지 얻게 된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불교 번역 경전 가운데 가장 원본(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에 충실하고 의미의 유실이 적은 것으로 티베트 경전을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티베트 경전은 원본이 유실된 불교 경전의 복원하는데 첫손으로 꼽히는 제일의 자료이다. 오늘날 티베트가 그토록 두터운 불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가. 과거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불교 원전의 우리말 옮김을 진지하게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역 경전이 훌륭하고 충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이것은 문화 의식의 문제이다. 자기 말로 소화해 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우리 글과 우리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이것이 문화 민족의 모습인가. 나는 우리가 지금이라도 뚜렷한 의지만 있다면, 티베트나 중국이 역사로 보여주었듯이, 불교 경전의 우리말 옮김을 통해 우리말 어휘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힘을 빌어 한글을 널리 퍼뜨리려 했던 세종 큰임금의 정신은 다 어디 갔는가. 석보상절을 통해 우리말과 불교가 다 함께 풍요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려 했던 선인들의 꿈은 다 어디에 던져 버렸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말의 가능성을 불교에서 꽃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중국을 통해 일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던 과거가 아니다. 팔리말과 산스크리트말로 된 불교 원전까지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도 한자에 안주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법학계도 과거엔 일본 책으로 서양의 법학을 받아들였지만 이젠 미국, 독일 같은 곳에 직접 법학을 배워 오고 있다. 일본말(특히 한자말)을 통해 서양 법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질과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영어나 독일어를 통해 법학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법학계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어찌 법학만 그렇겠는가. 하지만 용어의 왜곡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젠 말까지 바꿀 때가 되었다. 진정한 서양 문화의 수용은 말을 우리 것으로 바꿀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얘기가 옆으로 샜지만, 요컨대 어느 나라의 말이 어는 정도의 어휘를 가지는가는 뜻글자를 쓰는가 소리글자를 쓰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에서는 지나치게 단어의 음절수는 짧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과거 종이가 부족하여 되도록 음절수를 줄여 적으려 했던 중국의 영향 때문인데, 바람직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우리 나라 사람의 성명도 대개 세 자(성 하나, 이름 둘)로 돼 있는데 서양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너무 짧다. 우리 나라도 한자로 이름을 적기 전에는 네 다섯 자 되는 이름이 많았던 것 같고, 한자로 이름을 적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길어졌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이 앞으로 그들만큼 긴 이름도 많이 나올 것이다(지금 사람 이름은 성을 포함해 여섯 자를 넘지 못하게 법[대법원 규칙]으로 묶여 있다고 들었다. 이름은 본래 여섯 자 넘게 길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행정상 이름이 너무 길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라 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나는 적어도 그 한도가 열 자 정도까진 넓혀져야 한다고 믿는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우리말로 보아 여섯 자를 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바바라 스트라이젠드'란 이름을 보라. 그렇다고 그들이 불편을 느끼는가. 이름을 길게 지어도 실제 편하게 사용할 때는 그때그때 줄여서 사용하면 된다. 우리말과 우리 이름은 줄여 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단정하지 말자. 사용할 때 불편하다고 이름 자체를 여섯 자로 묶어 놓는 것은 또 다른 독단이요 문화에 대한 제약이다. 여섯 자 안에서 이름을 지어야 한다면 성을 빼고 나면 다섯 자밖에 안 남는다. 벌써 나는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적어도 열 자는 되어야 마음껏 우리말 이름의 날개를 펼 수 있지 않을까.) 즉 음절수가 간단하다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지만 그러나 음절수보다는 청각적 변별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자를 안 쓰면 음절수가 늘어나 안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말이 지나치게 음절수가 적은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글자 살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청각적 변별력이 없는 우리말을 만들고 만 것이다. 청각적 변별력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미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는데, 이 백화문은 기본적으로 한 단어가 두 음절 이상이다. 한자의 단어가 한음절 단위로 돼 있다는 것은 과거의 문언문에나 가능한 것이다.

뛰어난 시각성

한자어는 시각성이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한자가 시각적 변별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글자의 시각성이란 '글자를 보고 그 뜻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글자의 시각성을 이렇게 볼 때, '글자가 뜻과 일대일 대응이 될수록, 글자끼리 서로 모양이 다를수록, 글자가 간결할수록' 시각성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자는 '뜻과 글자의 일대일 대응성'과 '글자 모양이 서로 다른 점'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글자의 단순성'에선 한참 모자란다. 글자의 간결성에선 오히려 한글이 더 뛰어나다.

그리고 한자의 시각성은 청각성에 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얻어낸 것에 불과하다. 글자는 기본적으로 90%의 청각성, 10%의 시각성을 이상적으로 볼 때, 어떤 글자가 아무리 시각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적인 글자의 효능에서 보면 그 비중이 10%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글자는 100%의 시각성과 80%의 청각성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글자는 50%의 시각성과 90%의 청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글자의 전체적인 가치는 뒤의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해야 한다(완벽한 기능을 하는 글자를 100점으로 볼 때, 앞의 글자는 82점, 뒤의 글자는 86점이 되므로). 그리고 한글이 한자나 로마자에 비해 시각적 변별력에 취약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비중이란 대수롭지 않은 것이며, 앞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한글의 시각성은 생각한 것만큼 취약한 것이 아니다. 한글의 ㄱㄴㄷ, ㅏㅑㅓ 같은 하나하나는 시각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는 특성으로 인해 글자 하나하나는 입체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앉' '몫' '넋' '밟' '밝' '닭'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겹받침을 가진 글자는 대부분 그 자체로 뜻글자가 가지는 (의미 고정적) 시각성까지 갖추고 있다.

뛰어난 의미 고정성

한자는 뜻글자라서 시간적 경과나 공간적 제약을 덜 받고 그 뜻이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수천 년 전에도 '女'는 '계집'을 뜻했고 오늘날도 '계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女'를 한국·중국·일본에게 각각 달리 발음하고 있지만 '계집'이라는 뜻은 다 똑같다는 점이다.

그렇다. 한자는 한 글자마다 그 뜻이 고정되는 힘이 강하다. 그런데 이것은 장점만 가진 것이 아니다. 위의 예에서 '녀(女)'가 '계집'이라는 의미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에 대해 주의할 점이 있다. 이것은 흔히 간과하는 점인데, '女'라는 글자의 형체를 가진 글자는 '계집'을 뜻하는 것으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시각성과 의미성의 결합)와 아울러, '녀'라는 소리가 '계집'이라는 뜻으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청각성과 의미성의 결합)도 갖고 있다. 즉 '녀'라는 발음이 '계집'이라는 뜻과 고정되는 관계를 가진다는 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히려 글자의 가장 큰 기능은 청각성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어떤 글자의 의미 고정성이라는 것도 청각성과 연결된 고정성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각성과 연결되지 않고 의미가 고정되는 우리의 한자 같은 것은 비정상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녀'라고 할 때 이것이 계집이라는 뜻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사고의 경직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말이란 그 뜻이 하나로 고정될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연성 있게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해 의미를 변화해 갈 것 또한 요구된다. 오늘날 우리는 빠른 생각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고정관념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한자 같은 뜻글자는 그 글자를 처음 만들 때, 그 글자를 만드는 사람의 사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사상은 그 당시에 그곳에서 그 글자를 만든 사람이 타당하다고 본 것일 뿐, 언제 어디서나 진리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고 달라져야 한다. 글자를 배우면서 그 글자를 만든 사람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글자는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한자는 말의 이와 같은 말의 유연성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다. 새로운 개념이 있을 때마다 한자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 그토록 많은 한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5만 자가 넘는 한자가 있어 왔다. 그것은 이러한 한자의 경직성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고 한자의 고정성으로 인해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큼 큰 장점이 아니라는 것은 실제 부딪쳐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인이 수천 년 전의 문서를 직접 볼 일이 그 무엇인가. 지금 현재 우리말을 어떻게 써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지 글자의 내용이 고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은 그때그때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의 의미고정성만 있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때 그때의 사명을 다하고 효용이 다하여 사라질 만한 시기가 되면 사라지는 것이 말의 속성이요, 사명이다. 그렇다면 글자의 고정성과 유연성은 청각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입말 속에서 조정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찌 말만이 그럴 것인가.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심오한 철학성

한자는 그 글자 자체가 매우 심오한 철학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상형문자와 형성문자가 대부분인 한자는 그 글자가 생길 때 매우 철학적인 관념에 의해 상형화되고 형성화되었기 때문에 그 글자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철학과 역사성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자 속에는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신비한 어떤 것이 들어 있는 듯 말하기도 한다. 붓글씨도 한자로 쓰면 신비한 기가 글자에서 나오고, 부적도 한자로 써야 효험이 있다는 식이다. 한자의 원리를 알면 우주의 법칙, 인생의 진리도 터득할 수 있고, 자연히 인간의 도리도 알게 된다고 말하다. 한자가 마치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역술인들은 한자를 좋아하나 보다.

한자는 분명 당시 중국인의 사상과 철학에 의해 생긴 글자이다. 그러나 그 한자에 담긴 철학성이라는 것을 너무 과대하게 보면 안 된다. 한자를 하나 하나 파고 들어가 보라. 그러면 그 글자가 얼마나 초보적인 원리에 기초해 만들어 졌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체의 생김새를 흉내낸 상형문자에서 출발했다(지사문자 같은 것도 조금 있긴 하지만. 그리고 한자에서 형성문자가 가장 비중이 큰데, 형성자는 이미 있는 글자들을 결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2차적인 글자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형성문자의 대부분도 상형문자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 인(人) 자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기대면서 살라는 뜻에서 두 획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엉뚱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서 있는 옆모습'을 흉내낸 것뿐이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이렇게 토 달기를 좋아한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두 다리로 서는 것과 도구를 손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人'자를 '서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강조해 글자를 만들었다고. 그렇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너무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한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개념의 유희에 너무 젖어 있기 때문에, 그 달콤한 맛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에 말이나 글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에 담긴 그런 식의 원리는 모든 말에 공통된 것이지 한자나 중국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 '사람'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왜 '사람'이라 이름 붙여졌을까. 따지고 들면 한자를 분석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한 말들을 할 수 있다.

신비하기로 따지고 들면 세상에 신비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음은 묘하고 신비한 것이야'라고 하지만 몸도 그에 못지 않게 묘하고 신비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은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 이상도 도구 이하도 아니다. 말을 보조하기 위해 생긴 글도 또한 마찬가지다. 도구로서 가장 잘 기능하기 위해서 자기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찾아내 소리(말의 경우)나 모양(글자의 경우)에 담아 낸 것뿐이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우니까 '뻐꾸기'란 말이 생겼고, 사람은 사람처럼 생겼으니까 '人'자가 생긴 것처럼. 뜻글자를 만든 사람은 무슨 특별한 철학이 더 있어서 글자나 말을 철학적 함축성을 가지도록 말이나 글을 만들고, 소리글자를 쓰는 사람은 그런 철학이 모자라 그런 말과 글자를 만들지 못한 게 아니다. 본질에 차이가 없다. 한자를 분석해 그 속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똑 같이, '뻐꾸기'란 말을 통해서도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 왜 '뻐꾸기'를 뻐꾸기라고 했을까. '까마귀'란 말처럼 겉모양을 흉내낸 말로도 할 수 있었을 틴데. 또 왜 하필이면 '뻐꾹 뻐꾹' '운다'고 들었을까. '쑥꾹 쑥꾹' 운다고 들을 수도 있고, '뻐꾹 뻐꾹' '웃는다'고 들을 수도 있는데.

이처럼 파고 들어가면 모든 말이 다 그 정도의 정보는 있다. 한자만 특별히 더 이상한 원리가 있는 게 아니다. 말이나 글자란 것이 생각을 담아 내는 도구요 기호로서 고안된 것이므로 그에 필요한 요소만 갖추면 족하다. 그래서 특징적인 몇 가지 점만 뽑아서 소리로 또는 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뿐이다. '금강산'이란 말속에 '실재 금강산'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실재 금강산을 가리키는 데 필요한 요소[소리(말)와 모양(글자)]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금강산'이란 말속에 '실재 금강산'이 몽땅 다 들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이다. 금강산을 보려면 금강산에 가야지 '금강산'이라는 말을 붙들고 이리보고 저리 파헤치며 금강산을 찾으려 해서야 될 일인가. 요컨대 말이나 글은 생각을 담아 내는 수단(연결고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자는 신이나 무슨 신비한 힘이 만든 글자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한자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 있다느니, 우주의 원리가 들어 있다느니 하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런 환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허위 의식과 미신에 빠져 있는가. 한자의 본질을 똑바로 보라. 껍데기를 벗기고 찬찬히 그 알맹이를 들여다 보라. 그리고 한자의 울타리에서 빠져 나와라. 굳이 신과 같은 존재나 신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어서 어떤 것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그 신이나 신비한 힘의 작품은 한자 같은 글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자를 만든 과정을 보면 신이나 신비한 어떤 힘이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유치한 방법을 썼다. 신 정도라면 적어도 한글 정도는 되는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한글의 'ㄱㄴㄷㄹ…, ㅏㅑㅓㅕ…' 어느 것 하나 신비하게 생기지 않은 게 없다. 이들이 어울려 끝없는 글자를 빚어내는 것은 더욱 신비롭다. '캬하'하고 무릎을 안 칠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신비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말)소리다. 소리는 내가 보기에도 신비가 가득하다. 소리는 내 능력을 넘어선 그 어디에선가 온 것 같다. 누가 '하나님'하고 부르면 하나님이 달려오시고, '옴 마니 빧 메 훔'하면 관세음 보살이 돌아보신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 정도다. 소리는 신비 그 자체다. 신비한 것을 좋아하는 이여, 정작 신비한 소리는 던져두고 어린애가 만든 것 같은 한자에 정신을 팔고 있는가.

얘기가 샛길로 빠졌지만, 어쨌든 한자가 중국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그것이 신비한 무엇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 글자에 담긴 철학과 사상을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이 가진 위험성에 주목해야 한다. 옛날 사람의 철학이 글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사상(유교적 가치관이 대표적)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알맞은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男'자를 '밭에 나가 힘써 일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남자는 밖에서 직장 생활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게 된다. 그리고 '女'는 그 글자 자체가 '두 손을 교차하여 무릎에 두고 꿇어앉은 여자 모습'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면(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김용옥 님은 아메리카 인디언 여인이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앉아서 애기를 낳는 것에 견주어 여인이 '애기를 낳는 모습'을 흉내낸 글자라고 주장한다] 녀(女)자를 설명하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실제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한자를 교육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한자의 본래 생길 때의 정확한 철학을 제대로 알고 교육할 수도 없다. 어설픈 한자 실력을 가지고 그 글자에 담긴 뜻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여자는 남자에 비해 종속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심어 줄 수 있다. 그리고 '女'자가 들어간 글자들 가운데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배어 있는 것이 특히 많다. 요즘 서양에서는 남녀를 구별하는 용어 자체를 문제 삼아, 성적 편견이 없는 새로운 말을 만들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다.

오늘날 인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역사를 새로 개척해 나가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새로운 사고와 윤리가 요구되는 사회다. 사상과 윤리는 변해 왔고 또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과거의 고정된 생각에 묶여 있는 글자에 붙들려 있어야 되겠는가. 한글은 소리글자이므로 오히려 이러한 고정된 뜻이나 생각·편견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열린 글이다. 새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사고를 담아 낼 수 있기 위해선 오히려 한글처럼 열려 있는 글이 바람직하다.

한자를 배우면 예절바르게 된다는 말도 한다. 그 예절이라는 게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대부분 유교적인 종법질서와 위계질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한자를 공부시켰더니 말썽도 안 피우는 점잖은 아이가 됐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점잖은 아이라…. 아이가 점잖아야 좋은가? 아이는 말썽도 피우고 개구쟁이처럼도 커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말썽도 안 피우고 고분고분한 아이는 어른들이 다루기에 편할 뿐이다. '방학 동안에 아이를 서당에 보내 한자를 배우게 했더니 우리 아이가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며 다음에도 또 기회가 되면 아이를 서당에 보내야겠다고 말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난 그 집 아이가 불쌍하다. 참교육은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출발이다. 부모나 선생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다루기 편한 아이가 좋겠지만 그것은 참된 교육이 될 수 없다.

우리 나라처럼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심하게 대립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열린 마음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어른들의 고정관념에 새로운 세대를 묶어 두려는 것은 옳지 않다. 권위적인 위계질서를 유지하는데 맞춰졌던 교육의 목표는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도전 정신을 키워 주는 창의력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참다운 인성 교육도 선진국에서 보듯이 법을 제대로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민주 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데 맞춰져야 한다.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와 같은 위계질서를 기초로 했던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가치관만이 참다운 인성 교육일 수 없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람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선진 민주 이념의 정립이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 나라가 얼마나 도덕성이 뒤떨어져 있는가. 준법 의식과 시민 의식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가. 선진국은 대부분 유교를 배운 나라가 아니고 한자를 아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보다 도덕성이 뒤떨어진 나라라 볼 수 있는가. 성리학의 이념으로 가득했던 조선시대의 도덕성과 인간성 존중의 수준이 현재의 서구 민주 사회에 비해 높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엄연한 신분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요즘 아이들은 부모나 조부모의 함자도 한자로 제대로 적지 못한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것이 한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저 밑바닥엔 이름은 한자로 된 것이 진짜고 한글로 쓴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 이름(이름이 아니라 함자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자어는 귀한 것이고 우리 토박이말은 천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터잡은 것인 듯해 받아들이고 싶질 않다.)도 모른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름은 본질적으로 부르라고 만든 것이다. 이름의 알맹이는 그 소리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한자로 표기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그것은 홍길동이라는 소리가 그 알맹이고 그것을 한글로 쓰느냐 한자를 쓰느냐는 핵심이 아닌 것이다. 굳이 홍길동이라는 이름에서 그 중요도를 수치로 나타내 본다면 소리가 90%, 글자 표기(한자)가 10% 정도다. 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못 적는 아이들도 한글로는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요즘 아이들은 아예 부모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식으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 만약 부모의 이름이나 조부모의 이름을 아이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한자로 가르치려 하면 쉽게 그것을 배울 수가 없으므로), 한글로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쳐 주면 된다. 그것을 무리하게 한자로 조부모까지 써 보라고 하고 그것을 강요하려 하니 될 수가 없다. 끝내 조부모 이름을 한글로도 재대로 써내지 못하고 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 한자로 써야 한다는 10%에 불과한 것에 매달리다가, 중요한 90%를 잃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가르쳐 아이들이 기억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한글로 할아버지는 홍ㅇㅇ이고 할머니는 이ㅇㅇ이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외우라고 하면 친구 이름 외우듯이 쉽게 외울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데 1분이나 제대로 걸릴 것인가. 이렇게 가르쳐 놓게 되면 누군가 그 조부모의 이름을 물어 보면 '할아버지는 홍ㅇㅇ(ㅇ자ㅇ자라고 하거나 간에)이시고, 할머니는 이ㅇㅇ이십니다'라고 똑똑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됐지 무얼 더 바랄 것인가.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것(따라서 한글로도 쓸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한자로 이름을 쓰게 만들려다가 아예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겠다.

뛰어난 회화성

한자는 글자가 아름답고 회화성을 가지고 있어 서예 등에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서예에서 한글이 더 아름다운지 한자가 더 아름다운지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타이완(?)에선가 여러 나라 서예가들이 모여 세계에서 서예에 가장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 글자는 한글이라고 결정했었다고 들었다. 한글은 한자에 비해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글을 잘 지은 건물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한자가 아름답다는 주장 그 밑에는 대개가 밑도 끝도 없는 허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서예를 좀 한다는 사람도 한글로 글씨를 써 보라고 하면 매우 어려워한다. 한글은 잘 쓰기가 어려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한자로 쓰면 대강 그리더라도 한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또는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잘 쓰고 못 쓴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한글로 쓰며 그 잘 쓰고 못 쓴 것이 누구에게나 환히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 만큼 한글은 글쓰는 사람이 허풍을 떨고 싶어도 떨 수 없게 만드는 투명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여러 사회 저명인사들이 신년 휘호니 뭐니 하면서 너도나도 붓을 드는 것을 티비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거의 예외 없이 한자로 글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허위 의식이 알게 모르게 한자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쓰면 금방 들통날 붓글씨 실력을 애써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한자는 그럴듯한 느낌은 주지만 알고 보면 알맹이는 없는, 말 그대로 그럴듯한 것일 뿐이다. 한글서예로 잘 썼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두뇌 계발성

한자를 배우면 두뇌 계발에 좋다는 주장이다. 어떤 한자 교재 광고를 보니 한자를 배우면 논리력, 수리력, 사고력, 창의력을 높여 준다고 적혀 있었다. 한자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어휘력 25.2%, 이해력 22.9%, 사고력 27.5%, 언어능력 10.6%, 인격과 예절성 13.8%가 향상되었다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한자와 한글은 그 관장하는 뇌 부위가 달라 한자를 배우면 좌우 뇌의 균형적 계발에 좋다는 얘기도 있다.

나는 그러한 통계나 주장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한지 알지 못한다. 머리란 많이 쓸수록 좋아지는 것이니까 한자를 배우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란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지게 하려고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엔 동조할 수 없다. 한자를 알아야만 상상력과 창작력, 수리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인도 사람들은 한자를 모르고도 불교라는 엄청난 종교를 생각해 내지 않았는가(수리력 또한 인도가 훨씬 뛰어났다. '0'이란 개념도 인도에서 처음 생겼다 한다). 한자를 모르는 서양 사람들이 로케트를 쏘아 화성에 가고, 컴퓨터·로보트를 발명해 냈다. 상상력이나 두뇌의 계발은 한자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러 방법에 비해 특히 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한자를 배우느라고 들어가는 부담과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뇌의 발달에 가장 영향이 큰 것은 다양한 음을 기억하고 발음하는 것이란 점이다. 태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청각적 자극이다. 음악은 두뇌 계발에 가장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자음이 발달된 나라 사람(예컨대 서양인)과 모음이 발달된 나라의 사람(예컨대 우리 한국인)은 뇌의 모양은 물론 얼굴의 생김새까지 다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양한 발음을 가지고 있는 민족일수록 음감이 뛰어나고 그만큼 머리가 좋다고 한다. 우리 나라 사람이 특히 음악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것은 바로 우리말이 가진 다양한 색깔의 소리에도 그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소리는 사람의 두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한자어는 480 개의 음밖에 없지만 우리 한글은 그보다 수십 배나 되는 다양한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실제 우리 토박이말은 한자어의 480 개 발음보다 십여 배 이상 다양한 발음을 사용해 구성돼 있다. 우리 토박이말을 많이 쓰면 두뇌의 발달에 더 좋은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다.

한자말은 소리를 들은 다음 그 글자꼴을 머리에 떠올려 본 다음 그 뜻을 정확히 찾아내는 구조로 돼 있어 생각의 깊이를 더해 준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한자어처럼 두뇌에서 글자를 떠올리는 과정을 더 거치는 것은 언어생활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한 원인이 될 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을 매끄럽게 줄줄 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이러한 원인도 하나 있을 것이다. 꼭 머리가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음악이나 미술, 수학 등 정통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머리가 좋아지기 위해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 번지수가 바뀐 느낌이다.

그러면 이번엔 한글에 대해 알아보자. 한글은 무슨 장점이 있을까.

한글의 특성

편리성

우선 쉽고 편리한 글자다. 배우기 쉽고, 쓰기도 쉽다. 컴퓨터 등 전산화에도 매우 적합하다. 전산화에서 한글은 영문자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자는 배우기도 불편하고 쓰기도 불편할 뿐 아니라 전산화에도 매우 불편하다. 전산 소프트웨어의 개발로 한자의 전산화가 다소 나아지고 있으나 지나치게 많은 메모리를 잡아먹고, 또한 근본적으로 자판으로 쉽게 구현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한자의 전산화가 조금 진전된 것은 한자의 시각성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청각성에 의지한 결과다. 예를 들어 '烏飛梨落'이라는 한자를 전산화하기 위해선 '오비이락'이라는 소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 한자 자체의 시각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자어의 이러한 문제점은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산화에서 뒤 처진 가장 큰 이유가 한자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겠는가.

그렇더라도 한자도 편리한 글자라는 주장이 있다. 한자는 배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 배워 놓기만 하면 활용하는 단계에서는 오히려 편리하다는 주장이다. 풍부한 조어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어력에서 한글이 한자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되새겨 본다면 근거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산화처럼 실제 응용 부분에서도 한글이 우수한 것을 보면 한글은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 응용에도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홀소리와 닿소리의 결합에 의해 무한히 많은 글자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구조적인 과학성 때문이다.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두 개 의 조합만으로(컴퓨터는 2진수를 사용) 그 엄청난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는 것과, 음악에서 7 가지의 기본음을 조합해 한도 끝도 없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보듯이 이런 조합의 과학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유연하고 열려 있는 글자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발음의 표기성

한글은 수많은 발음을 적어 낼 수 있다. 즉 청각성에 탁월한 글자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 말 가운데 적어 내지 못하는 발음이 한글에는 원칙적으로 없다(긴소리 표기 등 몇 가지가 있긴 하다). 지금 최소한 11,172자를 구현할 수 있다. 한 글자만 똑 떼서 발음했을 때 발음이 서로 겹치는 것('안, 앉, 않' 같은 것)은 하나로 계산하더라도 최소한 3,024 음을 표현해 낼 수 있다(그러나 뒤에 '-아'같은 홀소리가 붙으면 '안아[아나], 앉아[안자]', 않아[안하]'처럼 서로 달리 소리나기 때문에 이들의 본디 소릿값이 똑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안, 앉, 않'이 소리는 '[안]' 하나로 나지만 그 글자의 시각적 차이로 인해 '앉'은 '앉다'라는 뜻이고, '않'은 '아니하다'의 뜻임을 알 수 있다. 90%의 청각성과 10%의 시각성이라는 글자의 이상적 비율이 한글에서 절묘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는 두 개만 결합시켜도 계산상으로 1,944,576 개(=3,024×3,024)의 청각적 변별력을 가진 두 음절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엄청나지 않은가. 이 가운데 실제 1%만 골라 사용해도 소리가 뚜렷이 구별되는 10만 단어 이상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한글을 좀더 갈고 다듬어 간다면 더 많은 글자를 구현할 수 있다. 한글은 지금도 끝없이 발전할 수 있는 글자인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자는 어떤가. 한자는 480 개의 음밖에 없다. 상용한자를 2,000자로 할 때 평균 한 음에 5 개 한자가 배당되는 것인데, 어떤 음은 10 개 이상의 한자가 한 음에 배당된다(만약 법률이나 의학, 불교 같은 전문분야에서 쓰이는 한자까지 포함해 약 5,000자 정도와 대비시킨다면 그 비율은 그만큼 더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니 청각적 변별력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한자병용론자들이 한자의 시각성으로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자고 그렇게 한자의 병용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그래도 4성(1성, 2성, 3성, 4성)이라는 성조가 있고 파음자가 많아 청각적 변별력의 문제가 우리보다는 덜 심각한 편이다. 중국어의 409 개의 기본성음이 각각 4성을 가진다고 볼 때 중국어는 1,636 개의 음을 가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개 중국에서는 4,000-5,000자 정도의 한자를 교양인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면 한 음마다 대개 3 개 정도의 한자가 배당되는 셈이다. 일본에서도 기본적인 음이 301 개에 불과하지만 한자어를 음독은 물론 훈독도 함으로써 우리보다 다양한 한자 발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 나라 한자어의 청각적 변별력 문제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수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가지고 또한 다양한 발음을 가진 토박이말을 조상들께서 물려 주셨음에도 한자의 틀에 묶여 480 개의 음을 중심으로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만약 한자병용론자들 주장처럼 한자말이 70% 이상이라면 우리말의 70% 이상이 이 480 개 발음에 묶여 있는 꼴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거기다 머리소리법칙으로 첫 음절에 올 수 없는 한자음은 더욱 제한된다. 사람의 이름이나 회사의 이름도 한자로 지으면 480 개 음밖에 쓸 수 없어 다양한 이름을 지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름에는 금기시하는 음과 글자가 많아 그 폐해가 더 심각하다. 한자의 틀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자유로운 우리말 이름의 날개를 펴자. 얼마나 답답했으면 한글을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냈겠는가. 한자가 밀고 들어와도 우리 고유의 다양한 소리를 지켜 오시어 우리에게 물려주신 조상들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한글은 한겨레의 자존심

한겨레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것이 한글이다. 한글은 누가 뭐라 해도 마땅히 우리 겨레 최고의 유산이요 보배다. 더 나아가 온 인류의 보배다. 한자를 쓸 때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만은 한 풀 접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어디서든 한글을 만나면 우리는 어깨가 펴지고 당당한 겨레가 된다. 이러한 생각이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요 민족 의식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 자존심이요 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글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실제 한글은 우리 겨레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글이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한글은 바로 우리 겨레의 문화적 자부심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그림이나 도자기도 우리 것이 중국 것이나 일본 것보다 비싸다. 막사발이라도 우리 것이 값어치가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란 의미는 아무리 다른 주장을 하고 세뇌를 시키더라도 우리 후손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후손을 한자의 멍에를 씌워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을 계속 심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한자를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문화적 자부심으로 가득한 당당한 후손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눈앞의 편리에 안주할 것인가 백년대계를 생각할 것인가. 한글을 단지 하나의 글자로서 도구로서 다른 글자와 동일한 차원에서 가볍게 말하는 것은 한겨레라면 삼가야 한다. 한글은 선조들의 우리말에 대한 피맺힌 한이 살아 숨쉬는 글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의 기쁨과 슬픔, 한과 자부심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이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

한글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글자이다. 한글은 열린 글자이다. 한글의 단점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든다. 한글은 시각적 변별력이 한자나 로마자에 비해 떨어진다, 한글로도 몇몇 외국의 발음은 제대로 적어 낼 수 없다(예컨대 영어의 [f] [v] [ð] [θ] 따위), 한글은 표음문자치고는 의외로 획수가 많은 편이다 등등.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한글을 더 갈고 닦아 가야 하는 까닭이다. 한글이라고 완벽한 글자일 수는 없다. 하지만 여태껏 한글은 한번도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한 한 많은 역사를 겪어 왔다. 오히려 처음의 훈민정음보다 그 글자가 줄어들었다. 퇴보한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이제 우리는 한글 하나로 우리말을 완전히 소화해 내리라는 말글 정책의 방향을 확고히 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풀어 나가야 한다. 지금 조금 불편하다고 다시 남의 나라 글을 다시 갖다 쓰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선 안 된다. 한글 하나로 못박아 놓고 그에 따른 문제는 한글을 개량해 나가면서 풀어 가면 된다. 한글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글자이다. 영문자가 수많은 세월 동안 갈고 닦여 이 만큼 훌륭한 글자가 되었듯이(영문자에서 'c' 한 글자를 추가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다) 우리 한글도 갈고 닦아야 한다. 한글의 발전 문제는 뒤에 다시 자세히 논하게 된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말이므로 우리말의 정상적 사용을 위해 한자를 배워야 한다

한자병용론과 한자혼용론의 가장 핵심은 이것이다. 한자를 우리 글로서 우리말 속에 받아들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말이다

우리말에서 한자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이라는 말은 아마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표제어를 중심으로 한 통계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오늘날 국어사전은 일본사전을 모태로 해서 만들어졌던 초기의 국어사전들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휘가 많으면 무조건 더 좋은 사전이라는 생각에서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해 온 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우리 현실 생활에서는 쓰이지 않는 말까지 모두 실어 놓았다. 따라서 그런 류의 국어사전에서 올림말[표제어] 숫자를 단순 비교해 한자어가 실제 우리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내 생각에 일상생활에서 한자말이 쓰이는 비중은 20-30% 안팎인 것 같고, 신문이나 방송 뉴스 같은 곳은 50% 안팎이며, 법률 서적 같은 전문 서적에서는 70% 안팎(물론 전문 서적에서 쓰이는 이른바 전문용어는 90% 이상이 한자말일 것이지만)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나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라 그 정확도는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한자어의 비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자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 신문이나 전문 서적의 경우에도 거의 모두가 한글을 쓰고 있고 한자의 비중은 아주 낮다는 점이다. 신문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문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자를 많이 쓰는 신문의 경우에도 한자의 비율은 5%를 넘지 않는 것 같다. 한자를 아예 쓰지 않는 신문도 적지 않다. 한자를 쓰는 신문의 내용도 알고 보면 한글로 그대로 옮긴다고 어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사의 사주나 편집자들의 취향이 한자병용론자들의 주장에 가깝다는 이유밖에 없다. 한글을 전용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은 사실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그것은 한글전용을 시행해 온 지금까지의 시행 결과가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를 확대 해석해 앞으로 무슨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말에서 현실적으로 한자말이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말의 기본 좌표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한자말을 쓰는 것이 옳거나 불가피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그렇게 교육을 해 왔고 그렇게 배워 온 결과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불행했던 근대화의 역사가 큰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일제 35 년은 우리말을 한자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지식인들을 모두 한자중독자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한자중독자들이 한자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니 우리말이 한자어투성이가 안 될 수가 없다. 일본인에게서 근대학문을 배운 많은 친일파들이 광복 이후 우리 나라의 상층부를 이뤄 오면서 온통 일본식 한자말로 가득한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황소개구리 때문에 우리 고유의 어족과 토종개구리 등이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한자를 보면 황소개구리가 생각난다. 한자는 우리 나라에 들어와 오랜 기간 쓰여 왔지만 우리말(특히 입말)을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않았었다. 문서와 일부 특권층이라는 울에 한자는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들어와 민족의 얼인 한글을 탄압하고 우리말 자체를 말살하려고 하면서 상황은 바뀌고 말았다. 마치 조그만 연못에 갇혀 있던 황소개구리를 전국의 강과 저수지에 방류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일제 시대에 우리 나라의 지명이 한자로(그것도 일본식의 억지 한자말) 고정되고, 각종 근대학문의 용어도 한자로 고정되고 말았다. 이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지식인은 한자중독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 우리 나라 말은 이렇게 한자어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 황소개구리가 계속 번식하여 지금도 엄청난 한자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언론이고 학문이고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자어는 한자중독자들에 의해 아무 거리낌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급기야 한글전용론까지 파기하려고 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가꿔 가려는 사람들은 반문명인 취급을 받고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청각성을 상실한 한자말은 몰아내야 하고 앞으로 다 쫓겨날 것이다. 쫓겨나는 한자어의 빈자리를 청각성을 갖춘 우리말로 메우는 일을 우리가 게을리 해 왔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빈자리를 메우러 들어가는 말도 한자어로 되고 있어 한자어의 비율이 줄어들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새로운 말들을 만들 때에도 한자어에 젖어 있는 학자나 언론인이 한자어를 빌어 무분별하게 만들어 내고 있는 것도 문제를 더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말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좌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함부로 말들을 만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말을 만들 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토박이말을 되살리거나 토박이말을 밑감으로 해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우리말이 갖춰야 할 두 가지 요건, 즉 청각성의 확보와 민족적 자긍심 충족에 토박이말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가 그 동안 만들어 내고 써 왔던 토박이말이 박 용수 님의 <겨레말 갈래 큰 사전>에는 10만 단어, 남 영신 님의 <국어용례사전>에도 8만 단어가 당당히 올림말로 올라 있다. <우리말 큰사전>을 비롯한 사전에 올라 있는 토박이말만 다 모아도 15만 개가 넘을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가 과연 얼마나 계승해 쓰고 있는가. 아니 이런 사전이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이러고도 민족문화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단 것인가.

앞으로 한글 전용을 계속하게 되면 이른바 들어서는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고 글자(한자)를 보아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눈말)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 자리를 새로운 귀말(귀로 들어서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말)이 채워 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순리이다. 우리는 한자말이 사라지는 것을 가슴아파 할 것이 아니고 한자말의 빈자리를 채울 우리말을 새로이 만드는 기쁨에 밤을 새야 할 때이다. '서울, 어린이, 어버이, 둔치, 도우미, 다솜'처럼 처음 이 말이 쓰일 때는 어색하고 불편하지만('어린이'라는 말을 보라. 이 말이 처음 쓰여졌을 때 얼마나 어색했겠는가. 하지만 지금 누가 이 말을 어색하다고 생각하는가) 자꾸 쓰다 보면 오래지 않아 어느새 아름다운 우리말로 우리 곁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의 속성이다. 지금 당장 우리 토박이말만 잘 활용해도 우리말에서 한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20%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제대로 방향을 잡고 노력만 한다면 한자말의 굴레에서 한 세대 안에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한자말은 빠른 시일 안에 버릴 수 있고 또 버려야만 한다. 한자말을 버리지 않고는 입말과 글말이 하나 되어 아무 불편이 없이 살 수 있는 우리말의 꿈은 영영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진정한 우리 겨레의 민족문화의 자존심은 세울 수도 없다. 한자는 이제 과거로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한자의 할 일은 이제 끝났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만이 참다운 우리 민족문화의 계승이라는 출발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한자말이 얼마나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 들어와 있는가를 몇 가지 말을 예로 들어 잠시 살펴보자. 영국(英國)이란 말은 영격란국(英格蘭國; 중국 발음으로 '잉거란꾸어')의 준말이고 미국은 미리견국(美利堅國 ; 중국 '남방계' 발음으로 '메이리컨꾸어'로 아메리카의 첫 '아'는 약하게 발음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잘 알아듣질 못해서 빠졌다)의 준말이다. 중국사람들이 한자라는 굴레 때문에 억지로 소리를 흉내내 만든 말을 우리는 한자문화권이라는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말들을 수입해 쓰고 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중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자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로부터 한글만 써 왔다면 우리는 그들을 잉글랜드, 아메리카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이란 말이 음절수가 적기 때문에 잉글랜드나 아메리카 보다 더 훌륭한 낱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라 미국이라고 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처럼 소리를 흉내낸 한자말만 이런 웃기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한자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한자성어가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우리 고유의 속담인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를 한자로 억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을 모르면 선인들의 사상을 계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한자의 옷을 입었지만 사실은 우리 고유의 말에서 유래된 한자말이 적지 않다. 한자 옷을 입혀야 직성이 풀리고 멋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이렇게 불편한 한자 옷을 입고 거짓에 찬 모습을 하고 있는 한자말들을, 모두 우리에게 알맞은 한글 옷으로 갈아 입혀 말의 제 모습을 찾아 주어야 한다. 겨레의 참된 자유를 위해 한자의 허울을 벗고 한글의 날개를 달자.

한글전용정책으로 오늘날 국어생활이 반문맹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우리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말이나 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자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서 생긴 일은 아니다. 귀(龜)자나 감(鑑)자를 한자로 배웠다고 귀감(龜鑑)이란 말을 제대로 쓸 수 있고, 그런 한자를 모른다고 귀감이란 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고들다' '뚫다' 같은 말을 쓰면 될 것을 '천착(穿鑿)하다'라고 굳이 쓸 필요는 더구나 없다. 이런 이유로 한자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말글살이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한자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말(특히 토박이말)을 자유롭고 다양하게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동안 우리말 교육을 잘못해 왔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나라 국어 교육은 문언문 중심의 교육이었다. 이제는 국어 교육도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말하기·듣기·글쓰기 같은 실용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 정확한 발음과 다양한 표현을 습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다시 한자 교육 같은 글자 익히는 식의 교육을 해선 안 된다. 한자를 익히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다가, 정작 필요한 말하기나 듣기, 글쓰기 같은 실제 생활에 필요한 기술은 배우질 못했다. 다시 글자를 익히느라고 시간을 낭비해선 절대 안 된다. 한자병용론자들은 한자를 가르치면 우리말을 잘 구사할 수 있을 듯이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른바 국어국문과 교수들 가운데는 한자로 논어 같은 책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그 분들이 맞춤법에 맞는 제대로 된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분들의 논문이나 쓰신 글을 보면 실망할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말은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말도 매끄럽게 하질 못하고 느리거나 떠듬떠듬 대기 일쑤다. 한자를 알면 우리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이른바 한자를 잘 안다고 하시는 분들이 써 놓은 글을 보거나, 그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말 교육, 특히 문자 교육의 핵심은 우리 한글의 완전한 표음문자성을 지켜 가는 데 맞춰 져야 한다. 지금 'ㅐ'와 'ㅔ'를 제대로 구별해서 발음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ㅘ' 'ㅙ' 같은 발음도 제대로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것은 한글의 완전한 표음문자성을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말의 청각성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글의 표음문자로서의 기능이 완벽해야 한다. 글자로는 이렇게 쓰는데 발음은 저렇게 하는 말이 생긴다면 그것은 한글을 죽이고 우리말을 죽이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소유격 조사인 '의'가 '에'로도 발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등 한글 발음에 예외가 늘어나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한자의 모양이 아니라 한글의 각 닿소리와 홀소리의 본디 소릿값이다. 우리말의 청각성 확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더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전통의 계승

과거의 많은 문서가 한자로 돼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 국민 모두가 한자를 알아야 전통을 계승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자로 된 서적은 사실 우리 나라에 입말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있는 글이 없어서, 부득이 한자라는 외국의 문자를 빌어 쓴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자로 쓰여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본래부터 한자어로서 우리가 입말로 쓰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순수한 토박이말로 서로 얘기했던 것들이 한자라는 글자를 빌어 쓰다 보니,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한자말인 것처럼 뒤바뀐 것이다. 한국에서 만든 단어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특히 일제 시대에 우리 땅이름이 억지로 한자어로 바뀐 것에서 보듯이 많은 한자가 본래 우리말 자리를 빼앗고 도리어 주인 노릇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의 계승의 핵심은 한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원래 우리말이다. 이 점을 주객을 전도시켜 생각하면 안 된다. 주인은 한자말이 아니라 한자말로 바뀌기 전의 우리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금이야 옥이야 떠받드는 성씨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허울에 찬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리 나라 한자 성씨는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쓰고 있지만 중국 사람하곤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성씨마다 도시조니 뭐니 하며 중국 사람이 우리 나라로 넘어와 성을 연 것처럼 족보에 적어 놨지만, 그것이 국에 줄대기 위한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성씨라는 것도 중국 한자의 웃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한자와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자로 안 쓰면 진짜 자기 성이 아니라고 믿고 한자로 써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이처럼 허망한 것들뿐이다. 성씨가 오늘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자로 써야 한다며 굳이 한자에 매달리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한자에 대해 한자병용론자들이 주장하는 수준의 한자 실력(상용한자 2,000자 정도를 이해하는 실력) 이상을 이미 갖추고 있지만, 한자로 된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문서를 직접 읽어보며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상용한자 2,000자 정도를 안다고 해서 옛 문헌을 원본 그대로 읽고 그것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한 국어 전문연구기관에서 상용한자 2,000자를 익히면 옛 한문 서적을 95% 이상 해독해 낼 수 있다고 했다는데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한자의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한자는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많은 글자이다. 한자가 매우 함축성이 있다는 것은 장점임과 동시에 단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함축성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많게 되어 정확한 해석을 곤란하게 한다. 그리고 한자어는 명사와 동사의 구별이 없이 한 글자가 동사로도 명사로도 다 쓰일 수 있다. 그것 때문에 더욱 해석이 여럿으로 될 수 있다. 격조사가 발달돼 있질 않은 한문에서는 한 글자가 문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순서에 따라 주어가 되기도 하고 술어가 되기도 하여 그 해석상의 곤란을 더해 주고 있다. 이름 있는 한 중국어 교수는 중국어에는 근대 이전에는 아예 문법이란 개념조차 사실상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의 관습적으로 그러한 뜻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 문법적으로 정확히 정해진 어순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문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문장 속에서 그 글자가 명사인지 동사인지, 주격인지 목적격인지 정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만큼 한자로 된 글은 관습성이 강하다. 그리고 오늘날 콩글리시가 있는 것처럼(핸드폰, 아이쇼핑 같은 것) 우리 나라의 한자 문장은 어순 같은 것이 중국에서와는 다르게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우리말과 중국어의 어순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 나라의 한자로 된 글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낸다는 것이 전문가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손으로 들고 다니는 전화기라는 뜻에서 hand와 phone을 적당히 결합시켜 핸드폰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 영어에는 그런 말이 없다. eye-shopping이란 말도 영어에 없는 말이다. 이 같은 영어에도 없는 영어 아닌 영어가 버젓이 쓰이고 있는데, 이런 영어의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 작품이다. 그것을 우리 나라에선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여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스운 현상(외국어로 쓰는 것도 아니고 외래어로 쓰는 것이니 정확한 영어일 필요는 없고, 우리가 쓰기 편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하고 쉽게 볼 수도 있지만)이 한자어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를 제멋대로 쓰는 문제는 오히려 한자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의 한자말이 바른말이고 한국식이나 일본식 한자어는 원칙적으로 틀린 말이니 쓰지 말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일석이조(一石二鳥)는 일본식이니 틀리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옳다는 식이다. 한자가 마치 우리 글인 양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한자가 근본적으로는 중국 글자일 수밖에 없고 중국이 종주국이란 것을 그들은 스스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어에서 보면 어순이 뒤바뀌어 말도 안 되는 문장인데도 제대로 된 문장인 양 써 놓은 글도 많다. 이처럼 영어나 한자가 우리 나라에서 제멋대로 쓰이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들이 우리 글도 우리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말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적당히 얼버무리며 쓸 수밖에 없고, 대충 써도 듣는 이가 그 잘못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그렇게 적당히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무식한 말을 쓰면서도 자기들이 무식한 말을 쓰는지 모르는 격이다. 한자어도 마찬가지다. 요즘 새로 만들어진 한자어 가운데 그 한자의 쓰임을 제대로 알고 만든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든 한자어를 아무 생각 없이 들여왔거나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든 말이 대부분이다. 전문용어 가운데 일본이 만든 일본식 한자 용어가 거의 전부라는 것은 상식이다. 한자 몇 자를 아는 얄팍한 지식으로 한자 독단에 빠져 말을 마음대로 만들고 있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다.

(나는 그룹 '핑클'을 좋아한다. 특히 효리가 좋다. 얼굴도 예쁘지만 노래의 맛을 낼 줄 아는 흔치 않은 가수다. 그러니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핑클'의 노래 가운데 '루비'라는 노래가 있다. 참 좋은 노래다. 그런데 그 노래 제목이 「루비(淚悲) : 슬픈 눈물」이라 돼 있다. 노랫말 가운데 '빨간 루비처럼 그녀는' 이라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 '루비'는 보석으로 '淚悲'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淚悲'가 '슬픈 눈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요즘 '순정'이란 신나는 노래로 막 뜨고 있는 그룹 '코요태'도 '高耀太(?)'인가 뭔가라는 식으로 억지 한자를 쓰는 걸 봤다. 이젠 애들까지 허위 의식으로 물들었나? 사실은 그 어린 가수들 뒤에서 일본 물과 한자 중독증에 빠진 어른들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해야 국제화가 되는 모양이다. 노래는 참 좋은데 노랠 다 버려 놓고 있다. 그래도 이들은 애교라도 있다.)

한자의 시각성에 사로잡혀 말의 본질인 청각성은 고려치 않고 함부로 죽은 말을 쏟아 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 문화를 한 단계 높여 주는 일인가. 한자독단과 한자 만능에서 벗어나라. 한자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되는 부정확한 글자라는 점을 악용하면 안 된다. 한자어를 만드는 일이 쉽다는 것(조어력이 뛰어나다는 말과 같은 말), 그래서 한자를 몇 자만 알면 무슨 말이든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한자 독단과 한자 만능은 사실 이러한 한자의 부정확성에 뿌리 박고 있다. 맘대로 조합해도 말이 된다고(사실은 그것은 착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말은 안 되지만 겉보기엔 말인 것처럼 그럴듯해 보이는 것뿐이다) 함부로 말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부정확한 말이 얼마나 우리말을 어지럽힌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맘대로 만들어도 말이 된다는 한자의 편리성이 진정한 편리성이 아니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청각성에 대한 고려도 없고 부정확하기까지 한 한자말들이 우리말을 어지럽히고 그 수준을 떨어뜨려 왔음을 이젠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처럼 한자말이 함부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한자를 제대로 알도록 가르치자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 말라.

한자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겐 부정확한 말일 수밖에 없다. 부정확성이 한자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자를 제대로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한자를 과연 몇 %의 국민이 제대로 배울 수 있겠는가. 한자 2,000 자를 누구나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말라. 한자를 쓰면 적어도 20% 정도는 글자살이를 제대로 못하는 사실상 장애인이 될 것이다. 왜 이런 장애인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가. 이미 있는 장애인들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한번 안 주는 사람들이 이젠 멀쩡한 사람까지 장애인을 만들려 한다. 민주 사회는 더불어 함께 가는 사회가 아닌가. 한 명이라도 뒤 처지는 사람 없이 어깨동무하고 가야 한다는 민주 시민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젠 낡은 권위주의의 허울을 벗고 함께 손잡고 가는 열린 마당으로 나와야 할 때다.

설사 백 보 양보해 누구나 다 한자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또 그 한자 문서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속도가 늦어 효율성이 없다. 전혀 경쟁력이 없는 방법인 것이다.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그 책을 정확하게 해석해 놓고, 우리는 그 해석해 놓은 책을 아무 막힘 없이 줄줄 읽어보면 된다. 이것이 훨씬 더 능률적이고 또한 정확하게 선인들의 생각과 만나는 길이며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이다. 얕은 한자 실력으로 섣불리 제 맘대로 해석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상용한자 2,000자 정도를 깨우친 사람이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데 더 유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현실성이 없다. 전통 문화의 계승을 위해 한자가 필요한 사람은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이다. 온 국민이 한자전문가가 될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도 이런 식의 전통 계승은 불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중국에서 청나라 시대의 어떤 문서에 담긴 내용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할 때, 정부에서는 그 근대 이전의 문서를 원본 그대로 보급해서 교육시킬 수는 없다. 현재의 국민들에게 이 문서의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그 문서의 문체를 오늘날의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꿔야 한다. 과거 시대의 문서는 거의 다 문언문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해석하기가 곤란하고, 중국에서조차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한자 자체를 간체자로 바꾸어야 한다. 이와 같이 중국 본토에서조차 전통의 승계를 위해서는 두 단계 이상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간체자라는 것이 없어진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영국에서 과거의 문서인 셰익스피어 작품을 원본 그대로 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과거의 문서를 일반 국민들이 원본 그대로 읽고 그 뜻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소리글자를 쓰는 나라와 상황이 다르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중국이라고 예외는 결코 아니다. 중국 불교신자가 반야심경을 배우고 싶다고 과거 현장 스님이 번역한 것을 원본 그대로 읽고 해석해 가며 배우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또 그 원본을 간체자로 바꿔 주기만 하면 오늘날 중국 불교신자 누구나 반야심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쓰는 백화문으로 문체 자체를 바꿔 줘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계 전문가가 현장 스님의 번역본을 참고하고 또 산스크리트어로 된 원본도 참고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번역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피한 방법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몰라 한자세대와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 한자를 몰라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지 나는 잘 이해가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라디오를 듣는데 잘 못 알아들어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라디오는 글자라는 게 아예 하나도 필요 없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요즘 SBS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여기는 정말 순진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인데, 젊은이들도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못 알아들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프로그램에서는 자막을 보내고 있지만 자막에는 한자가 하나도 없다. 모두 한글 자막이다. 한글로 충분하고 한자를 몰라서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도대체 무슨 젊은이와 한자세대간에 대화 단절이 문제된단 말인가.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노인들이 한자말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지 모른다. 그 노인들은 이른바 교양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글쎄…, 이른바 한자를 배운 교양 있는 식자층들이 그 시골 노인보다 우리 젊은이에게 얼마나 더 좋은 전통을 가르쳐 줄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른바 한자를 배워 교양을 쌓은 사람은 한자를 쓰지 않으면 젊은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언어불구자가 돼 버리는 것일까. 참으로 한자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한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한자 실력의 진정한 척도는 한자를 순수한 우리말로 얼마나 쉽게 풀어 낼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어떤 한자말이라도 그것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한자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모든 외국어의 실력이 이와 같듯이.

그리고 만약 누군가 한글이 아니라 한자를 써야만 전통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한자를 빌리지 않고는 그것의 계승이 불가능한 전통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지켜 가야 할 또는 지켜 갈 수 있는 전통이 아니라고.

아울러 전통의 계승과 관련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한겨레의 민족적 자긍심을 키워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우리 겨레를 중국 문화에 종속시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외국인에게 명함을 내밀었을 때 그곳에 한자로 이름이 적혀 있다면 그 외국인이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선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렇지 않고 한국인임을 알아챈다고 해도 대뜸 한국은 중국의 문화적 속국이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 외국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상이 그런 것이다. 그 문화적 속국이라는 인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는데 우리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명함의 이름이 한글로 써 있다면 그 외국인은 한국인임을 금방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중국의 문화적 속국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 국민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한글에 대해 남다른 관심도 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한글의 우수성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인에게 알릴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한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도 쓰는 것이니 외국인들의 주의를 끌 이유가 별로 없다.

얼마 전에 400 년 전(1580 년경)에 쓰여진 편지가 발견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순한글로만 쓰여진 이 편지는 아내가 죽은 남편을 그리며 쓴 애절한 사랑의 편지였다. KBS <역사 스페셜>이란 프로그램에서 깊이 있게 다룬 바 있는데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30 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뱃속에 둘째 아이를 가진 채, 사랑하는 지아비를 떠나 보내야 하는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는 글이었다. 남편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 주기를 바라며 머리카락을 모아 짚신을 삼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건만 남편은 그 신발을 신어 보지도 못하고 떠나갔다. '원이 아버지에게'라고 시작하는 이 편지는 저승에 간 남편에게 '이 글을 보고 … 저의 꿈속에 몰래 오시어 그 모습을 보여주세요.'라고 끝을 맺고 있다. 차마 말을 맺을 수 없어 종이의 여백까지 빙빙 돌려 채워 가며 쓰여진 이 편지는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조선시대의 숱한 문서가 있고 문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지식을 넘어 감동을 주는 글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편지는 400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지금 우리를 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편지가 한글로만 쓰여져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한자어는 거의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 당시에 최고위층의 사람들도 사실 오늘날 같이 한자말투성이의 말을 실제 입말에서는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 이 편지를 쓴 여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이름 없는 여인들과 백성에 의해 우리 한글은 지켜져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더욱 소중한 것이다. 생각건대 만약 400년 정도 전부터 많은 문서를 우리 한글로 적을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말은 지금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깨끗한 말이 되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입말마저 이렇게 한자말투성이로 더럽혀진 것은 그리 오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자로 우리말이 얼룩진 것도 알고 보면 오랜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한자말에 집착하는 것일까.

또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중국적인 유교 이념이 우리 고유의 지도 이념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상태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녀 사이가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이어서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에 남녀간에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 남녀가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살고 장남이 장성한 후에야 비로소 남자의 본가로 돌아가 살았다는 사실도 밝혀 주고 있다. 사실 성리학적인 유교 이념이 우리 역사에서 크게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조선 말기의 200-300 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 고유의 사상과 풍습을 훼손하면서까지 중국적인 이념에 빠져 버린 것은 결코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역사에 있어 매우 부끄러운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의 참다운 전통은 조선말의 유교 이념이 전부인 양 과대하게 매달리는 것은 참다운 우리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전통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보탬이 되고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때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남존여비의 잘못된 중국 사상(유교의 본래 사상은 남녀평등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일일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유교가 실제로 우리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을 남존여비적인 굴레에 가둬 두고 있는 엄연한 현실과 역사가, 유교의 실체가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이 우리 고유의 남녀평등적 문화 전통을 파괴한 점은 분명한 우리의 문화적 수치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진정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전통은 우리 고유의 남녀 평등의 전통이지 유교적 전통이 아닌 것이다.

불교만 해도 그렇다. 한자를 통해 우리가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중화주의에 오염된 불교이지 참다운 사캬무니 붇다(붓다)의 가르침을 따른 불교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을 통해 참다운 불교를 배우려 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걸림돌이 바로 한자이다. 우리 나라의 불교 경전이 거의 중국에서 한역한 경전인 까닭에 우리 불교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시조견오온개공...'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 읽으며 주문 외듯 경전을 외고 있다. 한역 경전이 마치 원전인 양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 원전은 따로 있다. 우리 한글이 없을 때야 어쩔 수 없이 한자를 빌어서 불교를 배웠지만 이젠 우리 글이 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한자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빌어 쓴 한자가 이젠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아직도 불교계에서는 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은 배우려 하지 않고 한자를 가르치고 한자를 배워 불교를 학습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얼마나 우스운 얘긴가. 우리가 앞으로 가꿔 가야 할 불교는 불교 원전(산스크리트 경전, 팔리 경전)이 바탕이 되어야 할 텐데 지금도 한자를 통해 불교를 배워야겠다고 한역 경전만 붙들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가꿔 가야 할 불교문화는 이런 것이 아니다. 한자 용어에 묶여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과연 우리가 중국 불교에서 벗어난 진정한 우리 불교를 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한문에 발목이 잡힌 불교는 한글의 날개를 단 기독교(카톨릭 포함)에게 밀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우리 나라에서 종교로서의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지 불교가 아니다. 도덕성에서도 불교 스님들이 목사님이나 신부님보다 우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자를 배우면 도덕성이 올라간다고 한다면 당연히 한자를 좋아하는 스님들이 도덕성이 나을 텐데. 내 생각에 한자를 배운 사람이 도덕성이 높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글은 사회 곳곳에서 한자보다 뛰어난 무기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기적을 한글의 승리로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후손이 어떤 후손이길 바라고 있을까. 중국이라고만 하면 한풀 죽어 들어가는 기죽은 후손이길 바랄까. 우리가 계속해서 한자를 쓴다면 대부분의 후손들이 중국 문화에 대해 처음부터 한풀 죽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은 그 나라와 그 겨레의 얼인데 그 말이 중국말의 세례를 받은 바에야 어찌 거기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글말뿐 아니라 입말까지도 한자어에 점령돼 버린 오늘날의 우리말은 사대주의가 치성했던 조선 후기보다도 더 사대적인 상황인지도 모른다. 우리 후손에게는 이런 사대적인 상황을 물려줘선 안 된다. 우리의 당당한 말글살이 문화를 전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다. 우리 겨레의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진정한 우리 겨레의 전통을 어떻게 정립하고 후세에 물려줄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렇게 한자를 중국 글이라고 말하면 대뜸 한자는 중국 글이 아니라 우리 글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자 가운데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도 적지 않다는 점을 들면서 한자의 기원 자체가 우리 겨레에 의해 출발된 것이라고 하거나(흔히 제주도 똥돼지처럼 집안에서 돼지와 같이 생활하는 것을 흉내낸 '家'자나, '字'자보다 먼저 글을 뜻하던 '契'자 같은 글자를 예를 든다), 우리가 수천 년간 써 온 것이니 이제 남의 글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같은 주장이다. 왜 한단고기(환단고기)란 책은 읽어 본 적 없는가. 거기에는 분명히 중국의 창힐이 배달 겨레의 자부선인에게서 한자를 배워 갔다고 적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한자가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라는 주장에 찬성이니 반대니 단정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한자는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일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말을 적기 위해 한자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단고기 내용처럼 우리 조상이, 중국 사람을 위해, 중국말을 위해 (일종의 선물로) 한자를 만들어 주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말을 적으려고' 한자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 우리말 체계와 한자는 전혀 맞지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증거 필요치 않는 명백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보라.

문법(어순)도 다를 뿐 아니라, 소리도 전혀 다르다[나 <---> 워, 아 ; 사람 <---> 런, 인] 상식적으로 '나는 사람이다'란 말을 '我是人'으로 적고 [아시인]으로 읽도록 글자를 만들 수는 없다. 그나마 말이 되게 하려면 "한자는 우리가 중국 사람에게 '중국말을 적으라고' 만들어서 하사한 것이다"라는 정도는 돼야 한다.) 오히려 나는 이런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자가 우리 글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말글살이에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것이라도 우리에게 불필요하면 버려야 한다. 나는 한자가 우리 말글살이에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설사 한자가 우리 글이라 하더라도 나는 이젠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화적 경제적 국제교류, 특히 동양 여러 나라 사이의 교류에 한자는 필수적이다

중국, 일본, 홍콩, 타이완 같은 나라와 학술이나 경제 교류를 활발히 해야 하는데 이때 한자는 필수라는 주장이다. 이른바 한자문화권 국가간에 교류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이 예상되는 마당에 우리도 한자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렇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나라들과 많은 교류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자를 아는 것과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대화를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한자병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만큼의 한자 실력을 갖춘다고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자병용론자로서 비교적 한자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대화를 하고 교류를 하려면 한자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나 일본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자 2,000자 정도를 알면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교류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글자를 모르더라도(까막눈이라도) 말은 할 수 있다. 참으로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교류하고 싶다면 한자를 배우려 하지 말고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 중국인과 교류할 때 한자를 100 자 아는 것보다 중국말 한 마디를 할 줄 아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한자를 알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는데 도움이 되는가. 내가 중국어를 배워 봐서 중국어에 관해서만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자를 2,000자 정도 깨치고 있다면 중국어를 배우는데 도움이 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자를 전혀 모르고 처음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것과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어에서는 똑같은 한자를 가지고도 우리와는 발음은 물론 그 뜻도 다를 뿐 아니라(유사한 면이 없진 않지만),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자에 대한 고정된 생각 때문에 전혀 딴 방향으로 해석할 가능성까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東西'를 우리는 '동서'로 읽고 '동쪽 서쪽'의 뜻으로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뚱시'라고 읽고 '물건'이라는 뜻으로 쓴다. 따라서 중국어를 배울 때 그 한자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경우는 원칙적으로 하나도 없고, 한 자 한 자 하나도 빠짐없이 그 발음을 확인하고 또 그 뜻도 확인하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귀와 입이 열리도록 하는 것이다. 한 중국어 교수는 중국어를 배울 때 글자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말고 자꾸 그 소리를 듣고 입으로 따라 해 보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말을 배우는 것은 귀와 입이 열리게 하는 것이지 눈으로 글자를 외워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이 그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하고도 영어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쏟아 내고 만 현실이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뜻글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러한 언어의 기본 속성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다가 중국은 1949년부터 글자의 개혁을 단행하여, 그 동안 써 오던 한자(우리 나라가 지금 사용하는 한자)를 번거로운 글자라는 의미로 번체자(繁體字)라 부르고, 이 글자를 사실상 폐지하고 이 글자들을 간소하게 만든 간체자(簡體字: 이것을 '간화자'라고 중국에서 부른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내가 중국어를 배운 상식으로는 간체자(簡體字) 또는 간자체(簡字體)가 중국에서의 정확한 명칭이다)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2,500 자 정도가 제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자병용론자들이 주장하는 상용한자 2,000 자도 상당 부분 간체자로 변해서 다시 간체자를 배워야만 중국어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북경대 학생이 '圖書館'이란 글자를 못 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일본식 한자라고 해서 우리와는 조금 다른 약자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식 한자가 슬그머니 우리 나라에 들어와 쓰이고 있다[굴착기(掘鑿機)가 굴삭기(掘削機)로 바뀐 까닭을 아는가. 일본에선 '鑿'이란 한자를 '削'이란 약자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고 일본에서 한자로 '掘削機'라 써 놓은 걸 우리식 발음으로 '굴삭기'라 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자를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그때그때 이렇게도 저렇게도 발음하는 등(일본에서는 한자를 음독도 하고 훈독도 하므로) 아주 복잡하다는 것도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자가 중국식, 일본식, 한국식이 따로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이 주축이 돼서 중국 측에 동양 삼국의 한자를 하나의 형태로 통일하자는 제의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한자의 통일에 대해 한중일 삼국의 논의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한자의 통일을 주장하였고, 이에 중국에서는 난처해했다. 중국은 그 동안 간체자로 바꾸어 교육을 시킴으로써 적잖은 성과를 거두어 이제 겨우 간체자가 뿌리를 내리게 된 마당에 다시 옛 한자로 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자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여 종국적으로는 표음문자인 로마자로 글자를 완전히 바꾸기로 하고, 그 중간 단계로 간체자를 쓰고 한어병음 표기를 해 온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지금 매우 큰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중국이 계속 간체자와 한어병음표기의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더 나아가 완전히 표음문자화하여 한어병음에 쓰는 로마자만 쓸 것인가, 아니면 한국과 일본의 성화에 못 이겨 옛날의 번체자로 되돌아갈 것인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생각에 아마도 중국은 현상태를 유지시킬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표음문자로 통일시키는 길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중국이 모든 말에서 청각성을 완벽히 회복하여 한자의 시각성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가 오는 날이 그날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한자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의 태도에 따라 한자의 운명은 좌우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자가 중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가 아무리 한자가 우리 글의 하나라고 강변을 하더라도 한자의 운명은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인의 선택에 의해 그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우리가 계속 한자를 쓰고, 중국도 계속해서 간체자를 쓰게 된다면 우리도 결국은 중국을 따라 간체자를 들여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 한자의 역사이고 운명이었다.

한자가 중국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그 한자를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중국에 종속되는 것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국제 교류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정체성 확립이다. 자기 문화에 대한 정체성이 없이 세계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그리고 앞으로 다시 한번 중국의 중화주의가 부활할 것을 은근히 기대하며, 중국이 세계 강국이 되면 다시 그 밑에 들어가 2등국이 되기를 자처하려는 사대주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그렇게 한자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인터넷을 통해 중국 신문과 일본 신문에 많이 접속해 봐서 아는데, 2,000 자 정도의 한자를 숙지하고 있다고 해서 중국 신문이나 일본 신문을 그대로 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중국 신문은 간체자로 돼 있어 무슨 자인지 조차 알아보기 힘들뿐만 아니라, 그 번체자로 된 것이라도 문장 자체가 중국의 구어체(백화문)라서 중국어를 알지 못하고는 그 뜻을 알아낼 수 없게 돼 있다. 일본 신문도 마찬가지다. 일본 신문은 우리와 한자 자체가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으므로 한자 자체를 알아보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만 읽는다고 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번역 시스템의 발달로 일본 신문도 손쉽게 우리 한글로 번역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검색엔진 가운데 하나인 '정보탐정(www.infocop.com)'같은 곳에서는 무료로 일본어 자동 번역 서비스를 해주고 있어서 한자를 하나도 몰라도 일본어 문서나 일본어 신문을 읽는 데 불편이 없다. 내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일본 신문을 한자와 가나로 쓰여진 그 원본 자체로 읽으려고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내가 한자 실력이 그 누구보다 뒤져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자 실력하고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 한자나 가나가 하나도 쓰여 있지 않은, 한글로만 쓰여진 번역문(간혹 영어가 섞여 있지만, 그야말로 우리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영어다.)을 보면 충분히 95% 이상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할 수 있다(좀더 정확하고 매끄러운 번역을 원한다면 더 성능이 좋은 번역 소프트웨어를 돈주고 사서 이용하면 된다). 번역에 소요되는 시간도 단 몇 초면 충분하다.

한글로 된 번역문을 읽는 것이 일본 신문 원본 그대로를 읽는 것보다 속도도 수십 배 빠르지만, 그 내용 파악의 정확성에서도 몇 배 앞선다. 그런데 이런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모르고 일본 문서나 신문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일본과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한자를 배우려고 뛰어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앞으로 언어의 자동 번역 시스템은 더욱 발전해서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가 한글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고 수년 내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중국어도 일본어처럼 곧 한글만 알면 그 번역문을 통해 손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글로 글을 써 놓아도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중국에서는 중국어로 손쉽게 번역해서 큰 불편이 그 뜻을 알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얘기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기에. 우리가 한글만 쓰고 한자를 안 쓴다고 해서 동양 문화권의 여러 나라와 교류가 안 되고 외톨이가 될 것이라는 말은 정보화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이미 일본어나 영어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말만 할 줄 알면 일본인이나 미국인과 대화하는 데 큰 지장이 되지 않고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기술까지 개발돼 있다. 즉, 한국인이 전화를 통해 한국말로 말하면 몇 초 안 걸려 음성 자동번역 시스템에 의해 일본말로 바뀌어 일본인에게는 일본어 음성으로 전달되게 된다. 이처럼 2,000년대에는 그 나라의 말이 청각적 변별력만 갖추면 국제간의 교류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말소리만 듣고도 컴퓨터가 이를 인식해 모든 말을 문서화시키는 프로그램도 개발될 것이다. 키보드 없이도 입력이 가능한 컴퓨터, 말로 부리고 말로 입력하는 컴퓨터 말이다. 따라서 앞으로 청각적 변별력이 더욱 중요한 세상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청각적 변별력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한자어(한자어는 동음이의어가 많기 때문)는 이러한 2,000년대 정보화 시대의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청각적 변별력이 없거나 부족하면 컴퓨터가 그 말의 뜻을 제대로 구별해 내지 못해(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음성을 통한 언어 자동번역 시스템 등의 구축에 큰 걸림돌이 된다. 내가 그토록 청각적 변별력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21세기의 흐름까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말은 영어보다도 더 21세기 정보화 환경에 적합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말의 소리는 영어보다도 한음 한음의 소리가 서로서로 분명히 구별돼 있어 소리의 변별력이 뛰어나므로, 음성자동인식 시스템이나 음성자동변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그만큼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말은 자음과 모음이 늘 결합하여 소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모음은 성대를 울리는 유성음이라서 무성음보다 청각적 변별력이 높다. 우리말은 늘 자음과 모음이 교대로 결합해 소리를 구성하게 돼 있어 원칙적으로 유성음만으로 돼 있지만, 영어는 자음만으로도 독립된 음절을 이룰 수 있어 무성음이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영어의 Christ kraist 의 발음 그대로를 우리 한글로 옮기면 '크라이스트'라고 표기할 수 있지만, 사실 영어에서 [k] [s] [t] 모두 무성음으로, 본래 우리말 발음에 있는 유성음 [크] [스] [트]와는 다른 소리이다. 영어의 [k] [s] [t] 같은 무성음은 성대를 울리지 않으므로 말의 속도감을 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성대를 울리지 않으므로 소리가 작고 약해 청각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만약 한글이 유성음과 무성음을 좀더 확실하게 구별해 적을 수 있도록 하려면, 다시 말해 좀더 정확한 영어 발음을 표기하도록 하려면, 지금처럼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홀소리 'ㅡ'로 표기하지 말고, 예컨대 무성음은 ' '같은 모음자를 하나 더 추가해 표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한글이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외국 발음을 표기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므로 앞으로 필요하다면 한글의 개량 등 많은 연구를 해보아야 한다. 영어도 산스크리트말과 같은 다른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알파벳을 변형해 '?' 같은 다양한 변형 기호를 쓰고 있다. 한글을 개량해 일반적으로 우리말로서의 외래어 표기에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특수한 전문 분야에서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별론 하고, 한글도 앞으로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다가 영어는 모든 음을 동일한 길이와 강도로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명사나 동사 같이 중요한 단어와 발음은 강하고 길게 발음하고, 그 사이의 전치사, 부사 같은 단어의 발음은 아주 짧고 약하게 발음하는 성향이 있어, 소리 사이의 편차가 크다. 그에 비해 우리말은 원칙적으로 모든 말소리가 거의 동일한 길이와 강도(우리말에도 음절간에 소리의 길고 짧음과 세고 여림이 있지만 영어와 비교할 때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뜻이다.)를 유지하고 있다. 이점도 음절 하나 하나의 청각적 변별력이 우리말이 고르게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얘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흘렀지만 결론적으로 동양 문화권 국가간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막연한 기대에 터잡은 것이지, 올바로 미래를 내다본 것이 아니다.

관광객 유치

1998년 한해 동안 우리 나라에 온 관광객 가운데 70% 이상이 이른바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왔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동남아 관광객들을 위해 안내 표지판이나 관광 안내문에 한자를 병행하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을 주어 IMF 금융지원상태의 경제 위기 극복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란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관광객이란 표지판에 한자를 쓴다고 오고 한자를 안 쓴다고 안 오는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실제 관광 표지판에는 이미 영어가 병기가 돼 있으므로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 나라가 더 불편할 이유는 전혀 없다. 중국인들은 한어병음에 익숙해 있어 로마자 표기를 전혀 어색해 할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나라 도로 표지판을 다 바꾸는데 1조원 이상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경제 위기에서 그 많은 돈을 쓰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오히려 경제만 어렵게 만들게 될 것이다. 이번 한자병용 추진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도로 표지판 제작 및 설치업자일 것인데, 이번 정부의 조치가 이들의 로비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까지 있다. 그만큼 상식 이하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나라만 유달리 외국인을 더욱 배려해 한자까지 병기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 관광객들이 우리 나라에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에 한자가 없어 불편하니 한자를 넣어 달라고 했다는데, 참 기가 막히는 일이다.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기에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을까. 아직도 중국인이나 일본인 눈에는 한국은 자신들의 문화 속국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더 한심한 일은 그런 치욕적인 말을 듣고 오히려 그 말이 옳다며 동조하는 한국인이 많다는 것이다. 중화 사대주의도 이 정도면 너무한 것 아닐까.

세계 어느 나라도 자기 글자와 로마자 표기도 모자라 한자를 표기하는 등 3 개 문자 이상을 도로 표지판에 표기하는 예는 없다고 들었다. 그런 논리라면 프랑스말, 도이취말, 스페인말도 표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자를 병기한다고 할 때 중국인은 중국식으로 발음할 것이고 일본인은 일본식으로 발음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처럼 지명 자체가 순수한 우리말일 경우에는 중국인을 위해선 '漢城[한청]'이라고 해야 하고 일본인을 위해선 '京城'이라고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사실 이것은 우리가 정할 문제도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중국이 '漢城[한청]'을 고집하고 있어 우리를 적잖이 불쾌하게 하긴 하지만 말이다. 서울시도 중국이 특히 워싱톤(華盛頓[후와셩둔]), 런던(倫敦[룬둔]), 파리(巴黎[바리]), 로마(羅馬[루어마]) 등 서양 지명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발음에 충실한 한자를 만들어 내는 성의를 보이면서도 유독 서울은 漢城으로 표기, 자존심이 상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훌륭한 우리말인 서울에 대한 한자 표기를 만들어 사용하라고 권하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아 「한자작명」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중화주의는 바로 이런 말 한마디에도 깊이 배어 있다. 한자는 중화주의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우리 서울을 로마자 표기인 SEOUL를 보고 발음하는 편이 서울이라는 우리 지명을 올바로 세계에 알리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문화에 미치는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이다. 관광객 유치라는 돈벌이를 위해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관계된 말글 정책을 무시하는 발상 자체가 문화 의식이 전혀 없다는 증거다. 그리고 한자를 병행하여 지명을 표기하게 되면 지명을 한자로 고정시켜 앞으로 일제시대에 굳어진 많은 한자식 지명을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되돌리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란 점이다. 항상 우리문화의 정체성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 토박이말의 비중을 꾸준히 높여 가야 한다는 문화 의식을 굳게 가진다고 할 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문화불감증에 젖어 있지 말자.

문화관광부의 행정상의 문제점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 근거와 검토

문화관광부가 공문서와 도로 표지판에 한자를 병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아래의 글은 한 일간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추려 실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글자도 보태거나 빼지 않았다.

먼저 우리말 뜻의 혼란문제다. 예컨대, 한글로만 '이이는 성품이 온건하다'라고 쓰면, 이 글에서 '이이'가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인지 이 사람을 뜻하는 대명사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또 도로표지판의 영동도 한자를 쓰면 강원도 영동(嶺東)과 충북 영동(永東)이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연구단체쪽은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글이란 낱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문맥 안에서 그 구분은 명확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이이'는 그 앞 문장을 살펴보면 학자 이이를 뜻하는지, 이 사람을 뜻하는지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또 표지판의 경우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면서 나오는 '영동'이라는 지명을 충청도 영동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다음은 한자문화권과 교류 및 관광증대이다. 문화관광부는 또 이번 조처 추진이유의 하나로 "한자권 관광객들의 편의"를 꼽고 있다. 문화부는 "지난해 우리 나라에 입국한 관광객 425만 명 중 한자문화권이 주축이 된 동남아권 국민들이 전체의 71.3%에 이른다"며 "따라서 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도로표지판 한자 병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관광수입 증대를 나라 전체의 문자정책보다 우선시하는 문화부의 정책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또 “문화부가 강조하는 ‘한자문화권'은 허구”라고 말한다. 한자의 종주국격인 중국이 몇십 년 동안 한자를 간편하게 만든 간자체를 사용하고 있어, 우리가 아는 정자체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원광호 한국바른말연구원장은 “결국 한자를 씀으로써 의미가 통하는 주된 대상은 일본인 정도일 뿐”이라며 “한글사용 단체들은 일본이 일본 저작물의 한국 유통 등을 위해 국한문 혼용정책을 은밀히 지지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계승의 문제다. 문화부는“한글전용은 국민의 한자능력 저하를 초래”했으며, 이 때문에 “전통이 단절되고 한자세대와 한글세대 간 의사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글학회 등은“문화부의 논리대로라면 칠천만 겨레 모두 한문 유산과 만나야 한다는 논리”라며 “한문으로 된 고전은 전문 한학자를 길러 쉬운 배달말로 번역하고, 보통 사람들은 이것으로 공부하는 게 전통 유산을 더 잘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예컨대 <동문선>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을 한글로 번역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다.

한문교육 강화의 문제다. 문화부는 한자 병기'와 함께 교육용 한자를 2천자로 현재보다 200자 가량 늘릴 계획이다. 문화부는 국어연구원이 지난 2년간 고전 등에 나타난 한자의 빈도'를 연구한 결과, 약 2천자를 익히면 우리 고전의 95%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들 중 현재 교육용 한자 1800자에는 없는 것들이 많아 교육용 한자 늘리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글단체들도 중·고등학교에서의 한문교육 강화 필요성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이 논리가 초등학교 한자교육론 등으로 확산될 폐단이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정보화 추진 문제다. 문화부는 한자병기가 정보화 추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한자가 정보화에 문제가 된다는 것은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 때 이야기이며, 현재는 각종 컴퓨터 워드프로세서가 1만 자 이상의 한자를 지원해 한자를 문서화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컴퓨터로 한글을 한자로 바꾸려면 한자 한자 여러 단계의 조작을 거쳐야 한다”며 “이는 앞으로도 문서의 빠른 처리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문화관광부의 주장과 그 반박 내용에 덧붙여 특별히 더 적고 싶은 것은 없다. 위의 글에서 문화관광부를 반박하는 내용들이 나의 주장과 다르지 않거니와, 나는 이미 앞에서 문화관광부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었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의 졸속 행정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에 대한 여론조사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이 발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문화관광부의 기대와 달리 여론은 반대하는 사람이 찬성하는 사람보다 2 배 정도 많았다.

PC통신 하이텔이 2월 10일부터 2월 11일 오전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68.3%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총응답자 4백20 명 중 2백87명. 한자 병용에 "찬성한다"는 사람은 67명으로 16.0%. 그밖에 "충분한 의견 수렴을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14.5%,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견은 1.2%였다.

SBS의 저녁 <8시 뉴스>와 KBS <길종섭의 쟁점 토론>에서도 생방송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반대 여론이 65-70%, 찬성여론이 30-35% 정도였다. 한겨레신문의 여론조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문 기사 정리

우선 신문기사 가운데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도 일간 신문들에 기사로 나온 내용을 골라 실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글자도 보태거나 빼지 않았다.

<한자병용 결정은 '전격 작전'>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 결정은 사전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자병용 방침이 결정된 9일 국무회의 참석전 대부분 국무위원들조차 이 같은 논의가 있을 줄 몰랐다는 후문이다. 문화관광부는 국무회의 전날인 8일 오후 한자병용' 방안을 보고하겠다며 국무회의 의사일정에 이를 넣어 달라고 총리실에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이날은 문화부장관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가 논란 끝에 한자병용'에 관한 결론을 내지 못한 날이었다. 문화부는 총리실 통보 이후 한자병용 방침을 보고자료'로 작성해 다음날 국무회의 석상에서 신낙균 장관이 공문서 한자병용 계획을 전격적으로 보고했다. 이 같은 문화부의 전격작전' 때문인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김기재 행자부장관과 최재욱 환경부장관만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을 뿐 다른 국무위원들은 토론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전격작전'은 사전에 한자병용 방침이 알려질 경우 반대여론이 빗발쳐 시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도 "방침이 새어나갈 경우 정책결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따라서 당연히 부처간 협의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문화부의 발표 이후 행자부가 공문서의 한자병용에 난색을 표명한 것도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사전에 청와대와 총리실 등에는 병용방침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한자병용 방침이 청와대 등과 사전에 조율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문화부가 느닷없이 한자병용 방침을 발표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는 고전과 전통을 이해하는 데 최소한의 한자이해가 필요하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과 김종필 총리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문화부에 한자병용 검토지시를 내린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문화부는 `한자병용' 방안을 내부적으로 결정해 놓고 이를 발표할 시점을 엿보다 전격적으로 이를 공식화한 것이다.

<일선 교육현장 혼란>

신낙균(申樂均) 문화관광부장관이 9일 국무회의에서 '한자병용 방침'을 전격 보고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는 왜 충분한 논의 없이 전격 발표했느냐는 절차상의 문제다. 신 장관은 지난 주말 실무자들에게 '내주 초 국무회의 상정' 을 준비토록 지시했고 일요일인 7일 실무자 전원이 출근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8일 국어정책심의위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석득 연세대명예교수는 정부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고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안은 8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 보고됐고 정부안으로 발표됐다. 이같이 전격 처리된 배경에 대해 문화부 관계자는 "새 정부출범이후 김 대통령이 여러 차례 한자 습득의 필요성을 강조해 그 동안 실무작업을 벌여 왔다"며 당초 이 달 말 경 국무회의에 보고할 계획이었으나 다소 앞당긴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심중이 곧바로 정책으로 연결되는 권위주의적인 정책 결정과정의 전형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문화부 산하의 국어정책심의위원회의 논의라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두 번째는 이번의 정부 방침이 한글전용 원칙과는 무관한 조치라고 하나 이 같은 정부방침이 가져올 교육현장과 어문정책의 혼란 및 파장에 대해 신중히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문제다. '한글전용이냐 한글병용이냐 한글혼용이냐'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어 왔고 어떤 측면에서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제정 이후 그 동안의 정부방침은 한글전용쪽으로 시행돼 왔던 것이 분명하다. 한글 한자 사용문제를 놓고 숱한 논란이 있었고 한자교육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한글을 전용한다는 원칙 하에서 정부정책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한자병용 방침에 대해 학계에서 거센 논란이 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선교육현장에서 한자교육정책이 또다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고 일부 행정 부서에서도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번 조치가 졸속행정임을 증명한다. 한자병용 계획을 발표한 다음 신 장관은 실무자들에게 "미래를 내다보고 한 일이니 당분간 힘들겠지만 크게 염려하지 말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관련학자들이나 관계부처 실무자들은 "미래를 내다봐야 할 문제를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해서 될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3월중 시행’이라는 당초 방침을 유보하고 교육정책에 미칠 영향, 행정의 혼란, 한자병용의 한계 등에 대한 폭넓은 여론수렴의 기회를 가진 뒤 신중히 처리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부처간 협의, 학계와 조율 등 미진… '깜짝쇼' 우려>

우리 나라에는 국어문자정책 발표만 있었지 실천이 없었다. 정부는 48년 광복이후 한글 전용­한자 혼용(단독표기)­한글 전용­한자 병기(괄호 안 표기) 순으로 네 차례 국어문자정책을 바꿨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떤 정책을 시행하든 정부의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어학계를 중심으로 「고독한」 운동이 펼쳐지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형국이었다. 공문서 한자 병기 추진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것도 이런 「경험」때문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글정책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의 준비 부족은 우려를 자아낸다. 9일 문화부의 방침 발표 이전 부처간 사전 협의나 한글정책 수립기구와의 사전조율, 실질적 연구 모두 미진했다. 발표 하루 전인 8일 열린 국어심의회에서는 한자 병용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문화부장관의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는 사실상 국어정책을 결정해 온 기구. 8일 국어심의회에 참석했던 한 학자는 『정식회의도 아니었고, 의견이 엇갈려 한자 병용 문제는 차후 논의하기로 했다』며 문화부의 성급한 발표를 비판했다. 국립국어연구원 관계자는 『한글 전용이든 한자 병기든 장단점이 있다』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교육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한자 병용을 실시하려면 교육적 효과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한 여론수렴, 여론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와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학자인 이종덕(李種德·46·서울과학고 국어교사)씨는 『우리가 쓰는 한자는 간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 관광객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며 『차라리 일본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에는 일어병기, 중국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에는 간자체 병기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김기식(金起式)정책실장은 『한자 병용은 장점도 있지만 정보화 시대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병기대상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6년 국어교과서에 한자를 혼용했던 65∼69년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국어사전을 찾기 전에 자전을 찾아야 했다. 과거의 사례를 볼 때 국어학계의 소모적인 논쟁도 문제다. 비생산적인 대립과 갈등보다는 서로의 주장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와 주의주장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체적 연구에 바탕을 둔 논쟁이 필요하다.

<행자부, 부처협의·전문가의견 수렴 없는 졸속정책 비판 >

정부문서를 총괄하고 있는 행정자치부는 공문서의 한자 병용 방안에 비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반대이유는 크게 세 가지. 공문서 한글전용이 30년 가까이 시행되면서 이미 정착단계에 들어섰다는 점, 한자병기는 전자결제 등 행정정보화 추세에 역행한다는 점, 한자 병용 등 새로운 문자정책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백년대계임에도 불구, 문광부가 여론수렴이나 전문가의견은 물론 정부문서의 주무부처(행자부)와도 한마디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수립됐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한 당국자는 『70년 1월1일부터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30년간 공문서를 한글로만 작성, 이미 한글전용이 정착된 상황에서 갑자기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할 경우 정부의 신뢰성과 일관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 당국자는 『81년부터 정부방침에 따라 행정부처는 물론 법원도 「행정용어 순화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정보화 시대를 맞아 행정업무가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 한자병용을 할 경우 행정능률화와 정보화에 역행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행자부는 『현재로선 공문서 한자병용을 위한 사무관리규정 개정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한자병기 "도로표지판 교체, 1조 이상 예산 필요"> - 도시미관, 운전자 시선도 방해

건설교통부는 『도로표지판의 크기를 키워 한자를 병기하려면 1조원이상이 필요해 예산이 낭비될 뿐 아니라 실효성도 의문시된다』며 한마디로 난색을 표명했다. 아울러 『관광지처럼 특수한 경우 한자 등을 병기할 수 있게 하는「도로표지규칙」이 있는데도 굳이 모든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려는 문화관광부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건교부는 우선 획이 많은 한자를 병기하려면 표지판을 키워야 하고 이 경우 전국 10만 234 개의 표지판을 교체해야 한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여기에 표지판을 지탱하는 지주 등의 교체비용까지 포함하면 총 1조원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추산이다. 또 각 시도에서 이미 4,8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97∼2001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표지판 교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이와 함께 한자를 병기해도 발음이 국가마다 다른 점도 문제다. 예를 들어 大田을 중국인은 따이엔, 일본인은 다이텐, 한국인은 대전으로 발음한다. 서울과 같은 순수 우리말은 한자표기가 안되고 일본은 약자, 중국은 간자를 쓰기 때문에 여러 개의 한자를 병기해야 할 경우도 있다. 도시미관을 해치고 운전자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문제도 반대이유로 꼽힌다.

<[독자의 소리] 도로표지판 한자병기 의견수렴 왜 안 거치나>

우리는 참으로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전국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들이 대통령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고 있다. 신정 연휴만 해도 그렇다. 연휴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 말 한 마디에 시행의 준비나 조사도 없이 보름 여만에 처리하는 아부근성이 문제이다. 12월 중순에 처리를 지시한 대통령이나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처리하는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제작된 달력은 오류로 시작되었고 달력에 맞추어 계획을 세운 국민은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공문서와 도로표지 등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것이다. 그 장단점은 잘 모르겠으나 한 사람의 생각이 여과 없이 시행되는 것은 진짜 큰 문제이다. 이제 각급 학교에서도 한문을 가르칠 것이다. 입시제도도 바뀔 것이다. 제발 이제는 토의하고 조사하고 그리고 시행했으면 한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착한, 너무나 착한 백성이다. 국민연금으로 바가지를 씌워도, 경수로 건설비용을 전기료에 부과해도 한숨만 쉬고 만다.

<한글·한자 병용 찬반 논란 확산>

정부의 한자 (漢字) 병용 추진방안이 발표되자 그 동안 한글전용을 주창해 온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또 문화관광부의 결정이 졸속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화부가 국어연구원과 사전 작업을 하고서도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의 한글분과위 회의를 간담회 형식으로 치른 것이 계산된 요식행위라는 것이다. 부처간 협의를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국무회의에 올린 것도 졸속이라는 비판을 사고 있지만 사전에 청와대와 교감을 거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낳고 있다.

◇ 한자병용 추진과정 = 문화관광부는 국무회의 상정을 앞두고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부는 새 정부 들어 한자병용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국립국어연구원 등 소속기관을 통해 추진 가능성을 검토해 왔다. 이에 따라 국어연구원은 한자가 국어생활과 교육에 미치는 영향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국어정책과가 이를 바탕으로 지난 2일 자체 방안을 마련했다. 국어정책과는 8일 장관 자문기관인 한글분과위원회 (위원장 김석득) 와 한자분과위원회 (위원장 김학주) 의 의견을 수렴해 국무회의 보고서를 마련했다.

◇ 국어심의회 회의록 = 한글분과위와 한자분과위는 동일안건을 놓고 합동회의가 아니라 같은 시간대에 독자적으로 회의를 연 것으로 회의록에는 기록돼 있다. 위원 10명중 9명이 참석한 한글분과위는 연장자인 김석득 연세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선출한 뒤 회의에 들어갔으나 애초부터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간담회 성격을 띤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한자병용 추진방안에 대해 국어심의회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문화부가 졸속으로 정책추진을 발표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회의록에는 또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가 "동일안건인데 왜 합동분과위를 열지 않느냐" 고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간 한자분과위는 '당연히' 한자병용을 찬성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확대되는 논란 = 한글학회(회장 허웅)를 비롯, 전국한글전용실천추진위원회.한국바른말연구원 (원장 원광호).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 문제안) 의 4 개 단체 회원 40여 명은 10일 오전 서울 정부 세종로청사와 문화관광부, 한글학회 건물 앞에서 집회를 갖고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한자를 병용하게 되면 우리 글과 말이 죽게 될 것" 이라며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한자병용 방안은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지 않은 날치기 정책으로 즉각 철회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한글학회 유은상 사무국장은 "정보화시대에 사회 곳곳에서 한글전용 정책이 정착되고 있는 시기에 외국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자병용을 시행한다는 정부의 방침은 시대착오적" 이라며 "철회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강력한 반대투쟁을 벌여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한문 혼용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 정기호) 측은 "한자교육을 강화하자는 등의 특별한 조치는 아닌 것 같다" 고 해석하면서도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 한자를 필요로 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은 느낌" 이라는 입장이다. 정 회장은 "한자는 예로부터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인데 마치 영어나 일본어 같은 외국어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대 국문학과 이병근 교수는 "대다수 교수들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한글전용과는 별개 문제" 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공문서의 한자병용 방안에 대해 "한글전용이 효과적인지 한자병용이 효과적인지는 국어연구원 같은 곳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검증한 다음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너무 졸속으로 처리한 감이 든다" 고 비판했다.

<[한자병용 시행되면…] 문화부 '기본 틀 변화 없다'>

9일 정부가 '한자병기'를 결정하자 한글학회 등 한글 관련 연구기관들이 일제히 반발, 또다시 어문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관광부의 한자병기 방안은 앞서 국무회의에서도 찬반양론이 맞섰으나 문화관광의 진흥이라는 국정 목표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부는 문화관광 육성을 위해 제안한 한자병기안이 예상외로 큰 논란을 빚자 "이번 조치는 한글 전용의 원칙 아래 필요할 때만 한자를 병용하자는 것으로 현행 문자 정책의 기본 틀을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며 진화에 애쓰고 있다.

◇ 국무회의 =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신낙균 (申樂均)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글·한자의 병용방안을 안건으로 전격 제안하자 회의 분위기가 금새 달아올랐다. 최재욱 (崔在旭) 환경부장관이 바로 "한자 병용방안은 큰 진전" 이라고 평가했다. 崔장관은 "정부 보고서에서 이미 한자 혼용 (混用) 이 이뤄지는 이상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어 "한자교육을 전혀 실시하지 않는 것은 문제" 라며 "입시에 한자문제를 하나라도 넣어야 한다" 고 한술 더 떴다. 그러자 정부 공문서를 총괄하는 김기재 (金杞載) 행자부 장관이 "당장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하기보다 이를 2단계로 미뤘으면 좋겠다"며 반론을 폈다. 金장관은 "기본원칙에는 찬성하나 그간 한자표현을 우리말로 풀어쓰려는 노력이 진전을 보여 왔고 한자교육에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 고 지적했다. 이런 논쟁에 김대중 대통령이 가세했다. 金대통령은 "중국에선 정자체(正字體)가 너무 복잡해 간자체(簡字體)를 쓰고 있으나 젊은이들이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돼 지금은 후회한다"며 한자 병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단계적 실천론을 중재안으로 제시했다. 金대통령은 "한자를 갑자기 혼용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어 시간을 두고 전문가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야 한다"며 신중한 자세를 주문했다.

◇ 관련단체 = 그 동안 한글전용 운동을 추진해 온 한글학회 (이사장 허웅) 는 이번 조치에 대해 "일반 대중들 사이에 한글이 한자에 비해 우세한데도 새삼 한자 병용을 추진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처사" 라고 비판했다. 반면 한자 혼용과 초등학생들의 한자 교육을 주장해 온 한국어문회 (이사장 이응백) 는 "한자는 조어력·함축성·축약성이 뛰어난 표의 (表意) 문자이므로 한글과 한자의 조화는 이상적인 문자 운용" 이라며 찬성했다.

◇ 일선 교육현장 = 수색초등학교 전한준 (全漢俊.60) 교장은 "전통문화의 올바른 이해 차원에서 정부의 조치에 대환영" 이라고 말했다. 행정자치부는 “한자를 병용할 경우 한글전용을 전제로 진행중인 문서정보화 프로그램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으며 건설교통부는 한자를 병기할 경우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반면 현실적인 효과는 검증되지 않은 상태라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는 이번에 발표된 정부 방침이 현재의 어문교육 수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오락가락한 어문교육방향이 다시 한번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한편 문화관광부 박문석(朴文錫)문화정책국장은 “이미 대통령 지시가 내려진 만큼 논란이 있어도 한자병용 방침은 당초 계획대로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부는 설 연휴가 끝난 다음 이르면 내주 말에 공문서는 한글만 쓰도록 한 ‘사무관리규정’(대통령령)에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붙이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대통령령 개정에 관한 의견을 행정자치부에 보낼 방침이다.

<[사설] 불쑥 내놓은 한자병용안>

문화관광부가 9일 발표한 한자병용 (竝用) 방안을 놓고 벌써부터 논전 (論戰) 이 뜨겁다. 한자병용이 바로 국한혼용 (混用) 이 아닌데도 마치 정해진 코스인 양 한글전용 대 (對) 국한혼용의 해묵은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사전에 문화관광부가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국무회의에서 불쑥 내놓아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정책결정 과정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문화관광부장관의 자문기관으로 어문정책을 결정해 온 국어심의회조차 사전에 어떤 결론을 내린 바 없다고 하니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이번 발표는 이미 정착단계에 온 한글전용 원칙을 크게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48년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은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쓰되 필요할 경우 한자를 병용하도록 규정했다가 70년 단서조항을 삭제했다. 또 지난 91년 만들어진 '사무관리규정' 은 모든 공문서를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 맞춤법에 따라 가로로 쓰도록 정했다. 따라서 한글전용은 우리 언어생활의 기본원칙이다. 물론 이 같은 기본원칙이 실생활에서 철저히 지켜지진 않았다. 과거에 비해 크게 줄긴 했지만 상당수의 신문·잡지·단행본 등은 아직도 최소한의 한자를 혼용 또는 병용하고 있다. 우리도 이번 발표에 포함된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도로표지판·간판 등에 한자를 병용하는 문제에 대해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지난해 우리 나라를 찾은 관광객 4백50만 명 가운데는 70%가 일본·대만·중국 등 아시아인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는 불만 가운데 하나가 호텔 문만 나서면 까막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서방국가 관광객들을 위해 영어를 병기 (倂記) 하듯 아시아 관광객들을 위해 한자를 병기해 편의를 도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또한 고전·역사·사회과학 등 학문연구에서 한자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다. 컴퓨터 사용이 일상화된 정보화사회에서도 한자의 중요성은 줄지 않고 있다. 최근 중국·일본 등 이웃 한자문화권 국가들과의 정치·경제·문화교류가 확대되면서 한자의 중요성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한글전용과는 별개로 한자교육의 강화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한자병용을 공문서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주무장관인 행정자치부 장관의 말대로 그 동안 공문서의 우리말 풀어쓰기가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공문서의 한자병용은 자연스럽게 '다른 영역'에까지 확대됨으로써 언어생활에 큰 혼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동안 정착돼 온 한글전용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정부의 조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 방식상 무리, 준비 소홀 등으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킨 면이 없지 않다. 폭넓은 의견수렴을 생략한 채 국민 앞에 불쑥 내미는 형식의 정책발표는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

<한자병용 부처마다 입장 달라 조정 필요>

9일 문화관광부의 전격적인 한자 병용 방침은 관련 정부부처간에도 입장이 달라 혼선을 빚고 있다. 어문정책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한자 병용에 관한 행정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공문서 관리를 총괄하는 행정자치부는 공문서의 한자 병용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또 건설교통부는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포함시키는 방안에 대해 문화관광부 등과 협의에 나섰다. 반면 교육부는 당장 한문교육체계나 교과서 양식의 기본 틀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문화관광부 = 10일 박문석 문화정책국장은 "한자 병용의 필요성은 대다수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 이라며 "이미 지난 50년간 찬반 양론과 중도론 등 가능한 모든 여론이 수렴된 상태이므로 남은 것은 정책적 결정 뿐" 이라고 말했다. 朴국장은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 정신에 따라 "필요시 한자를 병용하겠다는 것이지 한자의 무리한 사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달라" 고 말했다.

◇ 행정자치부 = 행정자치부 한 당국자는 "지난 70년 공문서를 한글로만 작성토록 한 국무총리 훈령이 30년 가까이 시행돼 온 상황에서 갑자기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하는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사안" 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공문서 한자 병용을 위해서는 현행 사무관리규정을 개정해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규정개정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정보화 시대를 맞아 행정업무가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한자 병용의 경우 행정능률화에도 역행할 우려가 있다" 고 보고 있다. 행자부는 특히 지난 81년 이후 정부방침에 따라 행정부처는 물론 법원도 공문서에 표기되는 어려운 한자 용어들을 보다 쉬운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벌여 온 점에 비춰 한자병행 방안은 이에 역행한다는 입장이다.

◇ 건설교통부 =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에 대해 교통안전공단과 건설기술연구원 등 전문기관의 의견을 수렴중이다. 정임천 건교부 수송정책실장은 "차량의 고속화·도로의 다차선화 등 교통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 표지판에 자국어 등 3개 국어를 표기한 나라는 세계에 한 곳도 없다" 면서 "다만 한글로 표기해 혼란이 빚어지는 장소나 관광지 등에 대해서는 한자 병기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고 말했다. 건교부는 지난 97년 도로표지규칙을 개정하면서 아시아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일부 관광지에 대해 표지판 밑에 보조표지판을 설치, 한자를 병기할 수 있도록 규정해 두고 있다.

◇ 교육부 = 중고교에서 한문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데다 각종 정부문서에서도 한문을 쓸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려 있어 당장 한문교육체제·교과서·공문서 양식의 기본 틀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고교 국어·국사·사회과목 등의 교과서에서는 이미 국한문을 병용하고 있으며 7차 교육과정 (중 2001년, 고 2002년)에서도 한문이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도입돼 학생들은 기초과정인 '한문' 과 심화과정인 '한문고전' 을 선택해 배울 수 있게 돼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다만 지난 72년 제정된 교육용 한자 1천8백자의 일부가 현실 생활과 차이가 있다는 문화관광부의 지적에 따라 문화관광부 국어연구소의 보고서 검토와 실태조사를 거쳐 조정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문화관광부가 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 관광객의 증대로 관광지 도로표지 등에 한자표기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밝힌 데 대해 전문가들은 억지논리'라고 반박하고 있다. 10일 교통문제연구시민모임 김수협 사무총장은 “교통표지판의 생명은 판독성'이라며“한자는 아무리 크게 써도 인식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구나 한국, 중국, 일본 등 각국의 한자표기법과 발음이 모두 달라 외국인들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운전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교통표지판에 쓰이고 있는 영어 알파벳은 한글의 60% 크기인데 한자의 경우 획수가 많아 한글의 1.5배 크기 이상으로 써야 판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자를 병용할 경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교통표지판이 된다는 것이다. 예산낭비도 우려하고 있다. 건설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 97년 도로교통표지판 5개년 정비계획'을 마련해 48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며 “한자병행표기가 결정되면 이 사업의 전면 재검토와 함께 엄청난 추가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교통전문가는 “현재의 표지판 규격도 거리 미관을 해치고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한다고 지적 받고 있다”며 “표지판을 더 크게 만들 경우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교통부 도로관리과 박영목(52) 계장은 “동남아시아 등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를 비롯해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의 공식언어 중심으로 교통표지판을 만드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이에 역행하고 있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취재파일] 문화부의 비문화적 강변>

공문서와 길 표지판에 한자를 병용하겠다고 불쑥 발표한 뒤 거세게 일어난 비판 여론에 문화관광부 정책당국자가 보인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다. 불쑥'한 것도, 한글전용 원칙을 수정'한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문화부는 불쑥'이 아니라는 근거로 문화정책국 국어정책과에서 내부토론과 여론수렴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다만 공개적이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원칙 수정이 아니란 근거로 내민 논리는 더욱 놀랍다. 지난 48년 10월에 제정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얼마동안'이 한글전용으로 가기 위한 한시적 과도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그 뒤 반세기를 넘어선 오늘, 법개정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강변이다. 총리훈령으로 이미 70년 1월부터 한글만을 사용하기로 한 사실에는 편리하게 눈감고 있다. 모든 정책에는 그 입안의 주체가 있다. 문화부는 누가 처음에 정책수정을 거론했느냐는 물음에도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당국자는 “정책이 발표된 모양새나 정책이 수정된 속도'를 보면 누가 그 주체인가를 감'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수수께끼식 답변으로 `엄청난 윗선'임을 시사했다. 어문정책의 큰 틀을 흔드는 내용을 발표해 놓고도 정책 전환이 아니라 우기고, 최초 발의자조차 얼버무리는 문화부가 정책전환의 철학과 당위를 설득력 있게 내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여론수렴의 과정조차 생략할 만큼 무모할 수 있었다. 참으로 충격이랄 만큼 무책임하고 비문화적이다.

<한-일 외무장관, 한자 회담 열었다?>

지난 2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과 고무라 마사히코 일본 외상의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글-한자 병용' 문제가 화제에 올랐었다. 오전에 공식 회담을 마친 두 장관은 한남동 외무장관 공관에서 1시간 여 동안 점심을 함께 하며 못 다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고무라 외상은 "현재 한국에서 한자 사용이 화제가 되고 있다면서요"라고 화제를 꺼냈고, 홍 장관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면서 "현재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한자 병용 방침이) 수용될 것"이 라고 말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일본측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사용하는 글자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면서 "공식 약자를 정할 거면 일본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농담을 건네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얘기가 진행되면서 진지한 '한-일 한자회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지난 94년 김영삼 전대통령과 호소카와 전총리가 한-중-일 3국 한자 통일을 위한 협의회 개최에 합의했던 일을 되새기며, 3국간 회의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됐다는 것. 홍 장관은 취임후 외교부 문서에 한자를 사용하도록 지시해 왔다.

정리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부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런 것 같다. 지금 한자병용방침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며칠만 지나면 또 잠잠해 질 테니 계속 밀어붙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 연휴만 지나면 아무 저항 없이 한자병용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 문화관광부의 한자병기방침 발표는 우선 절차상으로 명백히 잘못됐다. 문화관광부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또는 문화관광부장관의 개인적 취향에 의해 이와 같이 후세에 길이 남을 중요한 언어정책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문화관광부가 이처럼 상식 이하의 졸속행정을 전격작전처럼 추진한 배경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께서는 평소에도 개인적으로 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해 왔다. 들리는 얘기로 이미 지난해에 김 대통령과 김 총리는 문화관광부에 한자 병용 방안을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를 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나서니 문화관광부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절차나 형식은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절차와 법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요 법치국가인 우리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날치기 졸속행정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문화관광부의 깜짝쇼는 공청회와 여론 수렴 및 관계 전문가와의 협의 등 모든 면에서 상식 이하의 날치기 졸속 행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관광부는 절차상에 큰 문제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의 불같은 저항이 있자 문화관광부는 그 정도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대통령께서 재가를 하셨으니 이젠 밀어붙이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국민적 저항이 있다 하더라도 마구 밀어붙이면 된단 말인가. 국민의 정부가 기본적으로 이런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단 말인가.

대통령이나 총리 또는 장관도 한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도 분명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어문 정책 같이 중대한 일(이 일은 문화정책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말 중대한 문제이다. 국민투표에 부의 해야 할 정도의 문제라는 주장까지 있지 않은가)을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이렇게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 절차야 어찌되었든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으니 무조건 추진한다는 생각도 문제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공정한 절차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그 이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번 한자병용방침은 철회됨이 마땅하다. 민주주의는 그 누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법과 절차가 지켜져야만 올바르게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절차를 무시하고 법을 무시한다면 누가 법을 지킬 것인가. 다시 한번 정부는 반성하고 이번 부당한 한자병용 조치를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정한 문화란 우리 미래의 우리 후손에게 어떠한 말의 문화를 넘겨 줄 것이냐에 맞춰져야 한다. 지금 한자에 중독돼 있어 왜 한자가 문제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자를 왜 멍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원래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더 위험하다. 누구나 모든 면에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라의 어문정책 같이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취향에 의해 좌지우지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한글만 쓰기나 한자 나란히 쓰기나 다 나름대로 타당한 구석이 있는 주장이니 그 가운데 아무 것이든 제 입맛에 맛는 것을 하나 골라 밀어붙이면 된다는 독단에 빠져선 안 된다. 도대체 우리말과 한자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맘대로 독단에 빠져 절차까지 무시하며 밀어붙이는 것인가. 이번 한자병용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각부 장관들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의 소신 없는 태도에 실망했다. 김기재 행정자치부 장관 말고는 소신껏 자기의 얘기를 하지 못했다 한다. 이처럼 우리 정부가 잘못된 일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게 된 데는 우리의 책임도 크다. 우리는 왜 한글만 써야 하는가를 기성세대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다. 한자에 중독돼 그 달콤함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나길 기대한 것이 잘못이다. 한자의 유혹은 이와 같이 달콤한 것이다. 다시 한번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을 만들자

오늘날 우리말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말 교육이 옛날 글자를 익히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았던 서당 교육 식의 주입식 교육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말 교육은 실용성에 그 촛점이 맞춰 져야 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글짓기) 같은 교육을 많이 해서 좀더 다양한 어휘를, 좀더 다양한 발음으로, 좀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국민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우리말 교육은 한글 전용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한자를 가르치느라고 다시 글자 교육의 덫에 걸려서는 우리는 다시 주저앉고 말 것이다. 한자는 늘 실용적 우리말 교육의 발목을 잡아 왔다.

그리고 한자말은 입말과 글말을 분리시켜, 언제든지 청각성 상실의 멍에를 씌우려 도사리고 있다. 그 나라의 말이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청각성의 확보는 말의 기본이다. 우리말의 청각성을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한글전용을 반드시 계속 해야 한다. 한글만 쓰게 되면 청각성을 상실한 말들은 자연히 정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갈이를 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자말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이 때 우리는 쫓겨난 한자말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한자말을 갈음할 수 있는 갈음말[대체어]를 찾아내고 다듬어서, 온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널리 퍼뜨려야 한다. 모든 우리말 전문가들은 올바른 우리말의 세계로 국민들을 이끄는 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우리말의 올바른 길을 열어 보이고, 그 새 길을 아름답게 다듬고, 국민들을 그 길로 이끌어서,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에 모든 국민들이 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를 세우는 일, 이것이 우리말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한자어를 갈음할 갈음말을 만들어 낼 전문가 모임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갈음말을 연구하고 만들어 낼 모임의 이름을 여기서는 우선 부르기 좋게 '갈음말 모임'이라 하기로 한다. 갈음말 모임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 국립 국어연구원 같은 기관이 이 갈음말 모임의 구실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재 국어연구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진 못한다. 그래서 과연 국어연구원이 갈음말 모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쨌든 갈음말을 만들고 보급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음말 모임에 한 데 모여야 한다. 한글학회 같은 곳은 당연히 갈음말 모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학자, 인류학자, 컴퓨터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한자를 알아야 한자말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한자 실력을 갖춘 전문가도 필요하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할 일은 이것이다. 한자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되도록 한자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우리말 전문가들의 역량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 지원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민간에서 자율적으로라도 이런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갈음말 모임과 같은 취지로 이미 설립된 모임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어느 한 모임이라도 이미 내가 생각하는 갈음말 모임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곳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자격이 있는 모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모임을 지원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갈음말 모임은 갈음말을 제시하고 보급하는데 모든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정섭 님이 쓰신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이 한자를 갈음할 갈음말책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 같다. 내가 이런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더 좋은 책이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우리가 갈음말 모임의 구실을 하는 모임도 아직 없고, 또 앞으로 그런 모임을 만들 힘도 없다면 그때는 갈음말을 이미 제시한 책 가운데 가장 좋은 책을 선정해 보급하는 일에라도 나서야 한다. 그러나 책의 보급으로 그쳐서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갈음말 모임이 해야 할 일을 한번 적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글을 세계 문자로서 손색이 없는 글자로 다듬어 가는 일도 중요하다. 한글과 관련해서 우리는 한글의 완전한 표음문자성을 유지해 나가는 데 늘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이미 한글은 적지 않은 부분에서 표음성에 손상을 입고 있다.

우선 우리말 속에서 살펴보자. 소유격 조사 '의'는 '의'로도 발음하고 '에'로도 발음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다. 또 오늘날 된소리가 발달하면서 한글 표기는 된소리가 아닌데 실제 발음은 된소리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장단음의 표기도 한글이 제대로 구별해 표기하지 못한다(앞으로 한글이 장단음을 계속 표기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말에서 장단음의 구별은 사실상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장단음을 구별해 표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고, 장단음이 오히려 발음상의 혼란과 청각성의 혼란만 일으키므로 사라지는 것이 낫다면 그대로 두면 된다. 나로서는 어느 것이 옳을 지 알 수 없다.). 'ㅐ'와 'ㅔ', 'ㅖ'와 'ㅔ', 'ㅢ'와 'ㅣ', '저'와 '져', '희'와 '히' 같이 엄연히 발음이 다른 것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많아졌다. 표준 발음법에서 예외를 너무 많이 허용함으로써 한글의 표음문자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요컨대,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소릿값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표기 따로 소리 따로 나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한글이 완전한 표음문자의 기능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한글과 우리말 발음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 발음 교육이 너무 편의성에 치우쳐 예외를 많이 두고 있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가야 한다는 말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많아지고 거친 말이 많아져서 우리말이 거칠어진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한글이 소리글자로서 살아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소리글자는 소리를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 생명이다. 한글이 생명을 잃어 소리 따로 글자 따로가 되면 우리 말글살이도 입말과 글말이 둘로 분리되고 만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말글살이는 원칙적으로 쉬워야 하지만 마냥 쉽기만 하면 좋은 게 아니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쉬운 글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지켜 가야 하는 것이다. 글자가 말을 표기하기 위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말 또한 글자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받아야 한다. 말은 변하기 쉽다. 그러나 글자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변해야 한다.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말이 변해야 한다. 당장 발음에 조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본래 한글이 가지고 있는 소릿값을 그대로 발음하도록 발음 교육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글자의 소릿값대로 발음하는 것이 다소 어렵더라도 될 수 있으면 정확한 발음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도 한음 한음을 정확하게 내며 부르는 사람이, 음을 우리 뭉실하게 부르는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게 된다고 한다. 말소리도 풀어진 자세로 편한 대로 한다고 좋은 게 아니고, 정확하게 하나 하나의 소릿값을 신경 써 가며 말하는 것이 두뇌 계발에도 뛰어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바깥말[외국어]의 한글 표기도 문제다. 우리 나라에는 없는 발음이 바깥말에는 있기 때문이다.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좀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선 한글의 개량이 필요하다. 바깥말을 들온말[외래어]로서(들온말은 우리말의 자격이 있는 우리말의 하나) 표기할 때에도 한글을 개량해 가며 표기할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별개다. 그러나, 각종 전문 분야(예컨대, 불교 경전 번역에서 만뜨라나 다라니)에서처럼 정확한 한글 옮김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그리고 앞으로 한글을 세계의 다른 민족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도 한글의 개량은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한글이 우리말, 더 나아가 바깥말의 소리까지 두루 적어 낼 수 있게 하려면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을 위해 '누리한글 모임' (모임의 이름이야 달라도 상관없다)같은 모임도 필요하다.

아래에서는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간단히 적어 보기로 한다.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의 할 일

갈음말·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한 기초 연구

갈음말을 만들기 위해선 우리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말의 뿌리, 역사, 형성 과정, 구성 원리, 소리와 뜻의 상관관계, 각 소리마다의 대표 이미지, 소리 사이의 어울림, 맞춤법, 발음법 등 우리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한글은 소리글만이 아니고 뜻글자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다. 'ㅁ'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어떤 뜻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ㅅ'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또 어떤 뜻을 공통적으로 가진다는 식이다. 그리고 우리말의 소리 하나 하나가 서로 결합하는 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도 한다. 소리간에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 하는 관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갈음말은 우리말을 제대로 알 때에만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갈음말이 구체적으로 이미 있던 토박이말이 될지, 아니면 여러 말을 조합한 말이 될지, 아니면 아예 처음 만들어지는 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형태가 되건 우리말에 대한 깊은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토박이말의 연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토박이말의 구성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갈음말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나는 소리간의 어울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말은 본질적으로 소리다. 따라서 갈음말은 소리 자체가 아름답고, 또 서로 어울려야 한다. 음성학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갈음말은 소리의 우수성이 특히 뛰어났으면 한다. 그리고 소리들은 기본적으로 가짓수가 많을수록 좋다. 나는 우리말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발음을 가진 말이 되길 바라고 있다. 소리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의 정서를 풍부하게 만들고, 마침내 다양한 문화를 꽃필 수 있게 만드는 토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실제로 다양한 소리로 말을 하면 두뇌의 발달에 아주 좋다. 나는 우리 선조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말소리를 물려주신 것이 참으로 고맙다.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 다양한 소리를 가진 아름답고 다양한 말을 만들고 가꿔서 뒷사람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지금 현재 한글로는 11,172 자를 적을 수 있다. 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사용 빈도수와 대표 이미지를 조사하고, 대표 이미지가 없는 글자는 대표 이미지를 부여하는 작업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리고 소리가 겹치는 것을 빼면 3,024 개의 소리가 되는 데, 이에 대한 사용 빈도수와 청각적 이미지 조사도 아울러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11,172 자 또는 3,024 개의 소리 사이의 어울리는 규칙을 연구해 그것들을 밑감으로 해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각 소리나 글자마다 대표 이미지를 가지도록 하고 그것을 참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어떤 글자나 말소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이미지에 열려 있어야 말로서의 유연성이 생겨 많은 어휘를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떤 글자나 소리가 대표 이미지에 너무 묶이는 것은 곤란하다. 대표 이미지는 그 글자나 소리가 홀로 하나로만 쓰일 때, 또는 독립된 대표 이미지의 말 둘 정도가 같은 비중으로 대등하게 결합할 때 큰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은 음절과 함축된 의미를 가져야 하는 이른바 전문용어를 만들 때 유용한 방법이다. 그런데 여러 소리가 어울릴 때는 대표 이미지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감을 중시하고 풍부한 느낌을 전달할 필요가 있는 일상용어는 대표 이미지가 가지는 경직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말이란 자율적으로 흘러가면서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 나라처럼 이제 새로운 우리말 문화를 열어 나가야 할 처지에선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말은 본질적으로 가꿔 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어나 외국 발음도 연구를 하여 그 특징을 알아내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그 또한 연구해야 한다. 오늘날 영어가 우리말에 외래어로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말의 발음도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영어의 [f] [v] 같은 발음을 외래어를 쓸 때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첫 소리로 'ㄹ'이 오는 말도 많아져서 'ㄹ'이 첫소리로 오는 것을 그렇게 꺼리지 않는 말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두음법칙이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내 생각에 'ㄹ'이 첫소리로 오는 것은 서양말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며 'ㄹ'은 외국어에서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소리다. 우리말도 차차 다양한 발음을 자유자재로 쓰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볼 때, 영어와 같은 외국어의 발음에 자극을 받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영어 발음을 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말소리의 새로운 가능성에 많이 눈을 뜨고 있다.

다음으로 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해서도 역시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한글의 창제 원리, 구성 및 결합원리, 역사, 각 자모의 사용 빈도수, 각 자모와 의미의 연관성, 외국 문자와의 비교, 한글 로마자 표기 문제 등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한글의 취약점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긴소리(장모음) 표기 문제, 시각성이 떨어지는 문제, 외국발음 가운데 표기하지 못하는 발음의 표기 문제(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 등),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 문제, '아이' '에이' 같은 이중모음을 한 글자로 쓰는 문제, 여러 음절인 말의 축약 표기 문제, 번다한 획수(특히 'ㅎ', 'ㄹ')를 줄여야 하는지 하는 문제,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병용 문제, 필기체 등 자체의 개발 문제, 닿소리와 홀소리의 이름('기역 니은')을 바꿀 것인지 문제(북한은 이미 바꿨다), 자판의 배열 문제, 컴퓨터 코드의 표준화 문제, 한글 문서인식 소프트웨어(OCR)개발 문제 등 앞으로 한글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글 자체에 대한 전문가들의 연구가 꼭 뒷받침되어야 한다.

영문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글자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글자의 새로운 가능성에도 점차 눈을 뜨고 있다. 우리말의 띄어쓰기도 영어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 한다. 한글 풀어쓰기도 영문자에서 시사 받은 점이 많이 있다. 글자의 시각성이라는 면에서도 영문자는 우리를 눈뜨게 했다. 또 영어에서는 기본 알파벳 이외에도 많은 부호(&, $, @, ₩ 따위)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고 있다. 특히 말이나 단어를 줄여 쓰는 방법이 발달되어 있다. 우리말에도 특히 많이 반복되는 부분(예컨대, '-ㅂ니다, -한다, -다, -ㄹ 수 있다, 그리고, 그러나, 또는, 앞의 책' 같은 말)은 한 글자나 한 부호로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우리말은 높임말이 발달돼 있어 말의 음절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글자로 표기할 때는 짧게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높임말이 글을 쓰는 데는 매우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높임말로 쓰면 맘대로 자기의 주장을 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높임말도 예삿말도 아닌 중성의 문장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즉, 표기는 중성으로 하고, 그 글을 읽을 때는 형편에 때라 예삿말로도 높임말로도 쓰일 수 있는 글을 말한다. 영어나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높임말과 예삿말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말하거나 글쓸 때 편리한 면이 분명히 있다. 우리도 말을 중성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글로 쓰는 문체는 중성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불편한 곳에서 발명을 시작된다. 우리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고 늘어져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 글을 쓸 때에도 무엇이든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것을 잡고 늘어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말과 우리 글을 돌아보지 않았다. 관심만큼 우리말도 우리 글도 자랄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 글에 늘 마음을 두자.

이와 같이 갈음말과 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한 기초 연구를 위해서 모임 안에 각 과제마다 전문 분과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상설 기구가 되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기구가 있어서 거기서 전문가들이 말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갈음말 모임이 계속 기능을 해 가야 한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갈음말과 누리한글 만들기 기본 원칙 제정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기초 연구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실제 갈음말과 누리한글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먼저 기본 원칙을 세워야 한다. 관계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내가 무어라 할 것은 없지만 한두 가지만 적어 본다.

갈음말이 갖춰야 할 요건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소리도 좋고, 뜻도 좋고, 음절수도 좋아야 하겠다. 토박이말 최우선 원칙도 몰론 필요하다. 많은 원칙이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우리말은 아름답고 다양하게 가꿔 가되 청각성을 잃지 않는 말들이어야 한다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누리한글도 한글의 완벽한 표음문자성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제정

실제로 갈음말을 만들어 책, CD 등에 담아 집대성하는 것이다. 누리한글도 마찬가지다.

누리한글이 제정과 관련해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외국어의 발음을 죄다 적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음이나 모음을 만들어 내는 방법과 기존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거나 변형시키는 방법, 옛날에 쓰다가 지금은 없어진 글자(ㅿ 같은 것)를 활용하는 방법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컴퓨터의 한글자판(두벌식의 경우)에는 많은 부분이 빈자리로 남아 있어 앞으로 큰 문제가 없다. 예를 들면 '˚' 같은 부호를 한글의 각 자음이나 모음과 결합시키면(, 처럼;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모양의 글자는 아니다. 컴퓨터로 내가 생각하는 모양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렇게 한 것뿐이다. 나는 '˚'과 'ㄱ'이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모양을 생각하고 있다.) 얼마든지(5배까지도) 자음 수와 모음 수를 늘릴 수 있다. 이 때 '˚'는 한글 두벌식 자판의 경우 <Shift+ㅁ>에는 왼쪽 위에 위치한'˚'를 <Shift+ㄴ>에는 오른쪽 위에 위치한 '˚'를 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Shift+ㅁ>을 하고 곧이어<ㄱ>자판을 누르면 이 찍히고, <Shift+ㄴ>을 하고 곧이어 <ㄱ>자판을 누르면 모양의 자음이 찍히는 것으로 할 수 있다. '˚'의 위치를 위아래 왼쪽오른쪽으로 각각 조정해 배열해 보면 모든 한글 자음과 모든 한글 모음의 수는 4배 이상의 숫자로 늘릴 수 있으면서도 컴퓨터자판상 무리 없이 수용이 가능하다. 물론 컴퓨터가 아니라 실제 손으로 글을 쓴다면 더욱 간단히 이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컴퓨터자판은 모아쓰기의 원칙상 어떤 것은 초성에 붙고 어떤 것은 종성[받침]에 붙는 등 일정한 원칙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컴퓨터 자판에서는 'ㅥ'은 글자의 초성에는 올 수 있으나 종성(받침)에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앞글의 종성과 뒷 글의 초성 사이에 혼란이 올 수 있다. 하지만 손으로 쓸 경우는 그런 제약이 없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글자의 개발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의 예이다. 이외에도 얼마든지 한글은 변형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용이하다.('오우' '아이' '에이' '어우' '아오' 같은 것도 하나의 모음으로 수용할 수 있다.) 한글 개량을 시도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담은 책들도 이미 나와 있기도 하다. 이런 여러 전문가의 지혜를 모아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음과 모음을 결합시켜서 1만 자가 넘는 글자를 만들어 내는 한글의 과학성은 그 개량에서도 기하급수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하나의 개념이 새롭게 생기면 한자 한자 새로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한자와는 다르다. 한글은 전혀 새로운(창제 당시에 예상하지 못했던) 발음이 생겨도 자음이나 모음의 숫자를 한 두 가지만 개량시키거나 추가시키면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발음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한글에는 기본적인 음들이 기호화 돼 있기 때문에(ㄱ ㄲ ㅋ, ㄴ ㄷ ㄸ ㅌ, ㄹ, ㅁ, ㅂ ㅃ ㅍ, ㅅ ㅆ, ㅈ ㅉ ㅊ, ㅇ, ㅎ 처럼) 전혀 다른 소리가 생겨도 그와 가장 가까운 자모를 찾아내, 이것을 조금 변형시켜 표기할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이란 것이다. 그리고 한글은 단 한 번도 이런 발전의 기회를 제대로 가져 보질 못한 채 미개척의 글자로만 남아 있다. 오히려 창제 당시보다 글자의 자모수가 줄어들어 퇴보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한글을 세계화시키는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중국어의 경우도 한글을 쓰면 한어병음보다 훨씬 좋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아쓰기를 하는 우리 한글이 풀어쓰는 로마자보다 중국 한자의 특성에 맞는 것이다. 다만 우리 한글을 어느 정도 변형시켜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특히 혀말림소리(권설음 ; zh, ch, sh, r)를 표기하는 것과 이중모음을 한 모음으로 표기하는 것, 성조를 표기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크게 어렵지 않은 것인데 한국과 중국이 연구를 하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중국이 한글을 쓴다면 그것은 중화주의에 대한 크나큰 손상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은 세계 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보급

말이란 사회 각 분야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모든 분야에 걸쳐 갈음말이 쓰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갈음말을 보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나는 갈음말 함께 쓰기(또는 '갈음말 나란히 쓰기')를 제시하고 싶다. 한자병용이 아니라 갈음말 병용이랄까.

예컨대 교육 분야에서 모든 교과서의 외래어와 한자어에는 갈음말을 함께 쓰는 것이다. 한문, 영어, 컴퓨터, 과학, 음악, 미술 모든 교과서의 전문용어에 갈음말을 나란히 써넣는 것이다.

만약 갈음말 모임이 국가 기관이 아니라서 이런 정책을 뒷받침해 줄 수 없을 때는, 민간 차원에서 하나의 모범적인 교과서를 출판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갈음말을 병기한 교과서를 내 놓으면 이것을 교과서로 채택하는 학교도 생길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갈음말이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법학, 불교, 기독교, 미술, 음악, 정치학, 경제학, 영문학, 일문학, 중문학, 철학, 의학, 컴퓨터 등 모든 전문 분야의 책에도 갈음말을 병기한 교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또한 국어사전, 전문용어 사전에도 갈음말을 병기하도록 만든다. 갈음말을 자동으로 검색하여 병기하거나 갈음해 주는 소프트웨어도 개발하여 보급한다.

이러한 갈음말 함께 쓰기는 국가기관에서 앞장서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민간단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각종 교과서와 전문 서적에 갈음말을 함께 쓰도록 모범 교과서나 모범 교재를 만들어 출판해야 한다.

사대주의와 민족주의

문화관광국에서 한자병용방침을 발표하자 홍콩, 일본 등 다른 한자 사용국에서 일제히 환영을 표하고 나섰다. 홍콩의 한 신문은 한글로는 담아 낼 수 없는 유교적인 동양문화가 있다며 우리 나라의 한자병용 방침을 환영한다 했다. 우리 나라 외무장관과 일본 외무장관의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한다. 거기서 양측은 지난 94년 김 영삼 전대통령과 호소카와 전총리가 한중일 3 국 한자 통일을 위한 협의회 개최에 합의했던 일을 되새기며, 3국간 회의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일본측은 "공식 약자를 정할 거면 일본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농담도 건넸다 한다. 한자병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중일의 이러한 미묘한 기류 속에 우리는 서로의 문화적 우월감과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대해선 밑도 끝도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은 거의 우리 나라가 한자를 쓰지 않는 한글만 쓰는 나라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실제 한국에 와 보니 간판이고 도로 표지판이고 한자를 없고 한글만 있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에 종속된 나라임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을 그들이, 실제 한국에 와 보니 그들의 자존심인 한자를 쓰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문화적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서슴없이 한국에서 한자를 쓰지 않는 점에 불평을 터트렸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분명히 우리보다 한 수 아래일 텐데 말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미국에 가서도 미국이 한자를 안 쓴다고 불평을 했겠는가. 우리를 얕잡아 보려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의식은 그들에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우월감도 아닌, 막연한 우월감이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은 무조건 동양에 관한 한 1등이어야 한다. 중국은 우선 제쳐놓아야 한다.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은 당연히 1등인 것 같이. 우리는 잘 해야 2등이다. 그리고 중국에 이어 2등이면 족하다. 앞으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우리는 한자를 잘 배워 놓았다가 때가 되면 남들보다 빨리 그 밑에 들어가 2등 자리를 꿰차야 한다. 한자를 안 배우면 중국에 이어 2등 하기가 어렵다. 뭐 이런 생각이다. 일본에 대해서도 패배 의식이 강하긴 마찬가지다. 일본이 한자를 쓰는 나라이니 우리도 써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일본이 하는 일은 다 옳다.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식이다. 특히 기성세대 가운데 이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나의 생각이 전혀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 사람 치고 사대주의에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한자를 병용하자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중국 문화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중국 역사나 중국 고사를 인용하길 좋아한다. 이에 비해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라는 말만 들어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한자 히스테리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글병용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중화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그런 것이 많기 때문에 어찌 보면 둘 다 중화주의의 피해자이다. 중화주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푹 빠져서 그것이 편하다고 하는 쪽이나 그것을 지나치게 의식해 어떻게든지 벗어나려는 것이나 다 사실은 뿌리가 하나인 것이다. 어떤 뿌리인가. 그것이 바로 중국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이다. 한자병용론자들이나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 중국문화·중화주의에 대한 열등감에서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의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 본질은 같다. 사대주의가 우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제 이러한 열등감은 미국 같은 서양 선진국에 대해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신 사대주의라는 것도 이러한 문화 열등감에 뿌리박고 있다. 열등감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그런데 사실 열등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세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커다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그 결과 큰 인물이 되었다. 열등감이 없이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다고 한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민족적 열등감은 바로 민족적 우월감으로 표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다. 한글 자체가 우리 겨레의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물임을 잊어선 안 된다. 겨레의 글자생활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한이 뭉쳐서 한글이라는 보물이 나온 것이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은 이러한 민족의 한을 한글이라는 훌륭한 창작물로 승화시켰다. 이 정신을 배워야 한다. 사대주의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당당해져야 한다. 중국 하면 일단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 중국이 초일류 강국이 되면 그 밑에 들어가 안주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선 문화를 중국에 전파하여 중국을 일깨우는 겨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독교, 불교 모두 이젠 우리가 중국에게 가르쳐 줄 때이다. 옛날에는 우리가 중국에게 배웠지만 이젠 우리가 가르칠 때다.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라. 주인 의식을 가지라. 한자를 배우려 하지 말고 한글을 가르치려 하라. 중국 문화가 화려했다고는 하나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 이념에 중국 사상이 얼마나 기여했다고 생각하는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중국이 문화가 우수해서 동양 세계를 주름잡아 왔다고 단정하진 말자. 내 생각에 중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할 만한 문화는 우리보다 나을 게 없다.

한자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돌아 보라. 말로만 나는 중화사대주의자가 절대 아니다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가 얼마나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을 해 왔는지 돌아 보라. 우리 토박이말은 얼마나 되는지, 우리 토박이말을 새로운 용어로 만들어 활용해 본 적은 있는지.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 <겨레말 갈래 큰사전>, <국어용례사전>, <한겨레 말모이> 같은 사전은 가지고 있는지. 그런 사전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지. 강 희안, 공 병우, 권 재일, 김 경석, 김 계곤, 김 두루한, 김 민환, 김 불꾼, 김 석득, 김 성배, 김 슬옹, 김 승곤, 김 정섭, 김 정수 김 종택, 김 차균, 남 기심, 류 제한, 류 중달, 리 의도, 문 제안, 문 효근, 박 병순, 박 종국, 박 지홍, 박 팽년, 밝 한샘, 배 우리, 백 용덕, 서 재극, 서 정수, 성 경린, 성 삼문, 손 보기, 송 현, 숨결새벌, 신 명균, 신 숙주, 신 태민, 안 송산, 여 영택, 오 동춘, 원 광호, 윤 물맑, 이 강로, 이 개, 이 규방, 이 대로, 이 돈주, 이 봉원, 이 선로, 이 승규, 이 현복, 임 경재, 임 종철, 정 동환, 정 인지, 정 재도, 조 재수, 주 시경, 최 기호, 최 두선, 최 항, 최 현배, 허 웅 같은 <예순 다섯 분의 한글 문화 인물>은 물론이고, 박 용수, 남 영신, 장 승욱, 이 오덕, 김 정섭 같은 분들의 이름은 얼마나 들어봤는지.

북한에서 토박이말을 살려 만든 말들에는 관심이 없고 북한이 한자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데만 관심을 가지진 않았는지. 한자 실력엔 자신이 있는데 정작 우리말 실력(말하기·듣기·글쓰기, 맞춤법, 토박이말 실력)은 형편없는 게 아닌지. 민족문화의 계승을 주장하고 유교 이념의 전승에는 앞장서면서 우리 소리(국악), 우리 역사(우리 겨레의 기원이나, 고조선 같은 고대사), 우리 민속 같은 것엔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우리 소리 한 대목 할 줄 아는 것이나 있는지. 나는 한자병용론자들이 우리말을 말하고 우리 전통을 얘기하고 할 자격조차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우리말이 한자말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마치 한자를 알면 우리말을 다 알고 잘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실력도 좋고, 우리 문화의 계승에도 적극적이다. 한자 실력도 물론 뒤질 게 없다. 우리말이 오늘날 좋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이분들의 몫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말을 발전시키고 가꿔 온 사람들은 이분들이다. 그들의 노력은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겨레는 뛰어난 겨레다. 그러나 중국 영향 때문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일본 사람들이 그리고 서양사람들이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를 인정하는 데 그토록 인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과거의 유산이 돼 버린 유교적 사상이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국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중국에서조차 버림받은 한자(번체자)가 우리 나라에선 한 획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고 추앙 받고 있다(한자는 중국의 간체자가 보여 주듯이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글자다. 간체자를 보라. 이것저것 뚝뚝 떼어 내도 훌륭히 제구실하는 글자가 되질 않는가). 우리 겨레는 바탕이 뛰어난 민족이었기에 이만큼 버텨 온 것이다. 과거에 중국 문화의 절대적 영향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불행이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중화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레 짐작으로 안 된다고 하며 출발점에서부터 우리를 주저앉히려 한다. 한글만 쓰기를 해선 우리말을 꾸려 갈 수가 없다고 단정짓고 있다. 한글이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려고만 한다. 어째서 안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또 노력을 기울여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그럴 것 같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중국 문화를 벗어난다고?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안 될 일이라고 고개를 젓는다. 이모저모 따져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른 게 아니다. 중화주의, 한자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의식일 뿐이다. 중국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한자를 버리고는 우리는 말글살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그 생각에 갇혀 다른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결론이 정당하다는 이유만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한자의 허울과 한자의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라. 말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유연성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표음문자를 쓰는 미국 사람이 한자를 모른다고 문화를 꽃피우지 못하는가? 지금 그 누가 한자를 모른다고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낀단 말인가. 한자를 모르는 우리 초등학생 조카도 언어생활에 아무 불편이 없다. 그 아이가 뭘 몰라서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하지 말라. 말이란 그런 것이다. 말이란 그렇게 신비한 것이다.

지난 50년간 우리 나라에 펼쳐진 언어생활, 글자생활의 변화는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상 90% 이상의 저서가 이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 그 중심에 한글전용 정책이 있는 것이다. 한글혼용론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과연 '어린이' '도우미' 같은 말이나 '서울'같은 땅이름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아니 한글 자체가 태어날 수조차 있었겠는가. 서울을 그 전처럼 경성이라고 하고 京城이라고 적으며 서울대학교를 경성제국대학교라고 불러야 전통을 계승하고 문화를 지켜 가는 것인가. 서울이라는 우리 토박이말을 되살려 이 시대에 우리 문화로 가꿔 가는 것이 진정한 전통의 승계요 문화를 지켜 가는 길이 아닌가. 경성이란 말을 고집하고 그 경성(京城)이 경성(硬性)과 뜻이 헷갈리므로 한자를 병용하자거나 혼용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울이란 말을 우리 나라 수도의 이름으로 정하고 국민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데 엄청난 세월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가. 일단 서울이란 말로 수도의 이름을 해야겠다는 방향만 제대로 정하고 나면 그 시행과 정착은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서울로 하겠다고 결정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금 누가 서울이라고 지명을 고쳤다고 경성이라는 옛 이름과 혼란을 일으킨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역사성이 훼손되어 전통 단절이 일어난다고 하겠는가. 최근에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꿨다(초등학교도 한자말이니 잘된 이름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예를 드는 것이다. 한자중독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무슨 혼란이 그리 심한가. 벌써 초등학교는 자연스러운 말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란 바로 이러한 무한한 유연성이 있는 것이다. 왜 말의 이런 가능성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시하는가. 세상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이치다. 변하지 않으려 해도 변할 수밖에 없다. 말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래야 말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지녀 갈 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은 너무도 다른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고 그 말을 담는 그릇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글은 우리가 한글보다 더 좋은 글자를 발명해 내지 않는 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글자는 하나가 원칙이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하나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만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두 개 이상 가지는 것은 그 나라의 언어나 인종 등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한글과 한자 두 가지를 가지는 것은 이상적인 것 아니라 이상한 일일뿐이다. 한자의 장점만 보고 그 장점만 쏙 빼다가 우리 글로 만들 수 있다는 엉뚱한 환상에 빠지지 말라. 한자는 장점만 따로 빼올 수가 없고 한자가 가는 데는 한자의 단점도 반드시 따라온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그리고 북한도 한글전용이 실패임을 자인하고 한자를 우리 나라 초등학교 4학년에 해당하는 시기부터 교육시키고 있다고 얘길 한다. 그러면서 마치 북한에서는 국어 교과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돼 있다는 식으로 북한의 한문 교과서를 국어 교과서인 양 제시하곤 한다. 북한에서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남한이 계속 한자를 사용하므로 통일을 대비해 배우는 것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일 뿐 아니라, 사실상 외교적으로 중국 이외의 국가와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중국의 눈치를 안 살필 수 없었던 외교적인 고육지책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이 전통의 계승이나 일상 언어생활에서 한문을 알지 않고는 불편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 한자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숨기고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속이려 한다. 그러나 국민들을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말라. 한자만 가지고 특권층이나 향유하며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부려 왔던 한자 시대가 아니다. 우리 국민은 이제 한글의 혜택을 입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는 국민이 이미 아닌 것이다. 한자 교육을 계속 시켜 왔다면 지금과 같은 국민 수준이 되었겠는가.

나 또한 평범한 시민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생각이 없다. 우리말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참다운 우리말을 가꿔 나가는데 밤을 새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갈 생각은 안하고 중국 사람들이 할 일까지 나서서 하려 하고 있다. 우리말 토박이말을 살려내는 데는 관심도 없으면서 한자에는 죽자 사자 매달리고 있다. 써 놓은 글들을 보라. 한자는 어디서 유래됐고 한자의 구성 원리는 어떻고 .... 그러고도 오히려 중국 사람보다 뛰어난 일을 한 것처럼 자랑을 한다. 한자 중독도 이 정도면 아마 중국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러고도 한자 중독자가 아니라고? 정신차려야 한다. 참다운 한자 실력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한자성어를 들먹여야 직성이 풀리고 한글로 써도 될 것을 굳이 한자로 써야 지식인이라고 느껴지는가. 허울을 벗어라. 어설픈 한자 실력을 가지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글을 한시니 열반송이니 오도문이니 내놓지 말라.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이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중국어를 전공하는 중어중문과 교수들도 국가시험을 출제할 때 자기가 직접 중국어 문장을 작문하질 못한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중국인이 써 놓은 문장을 베껴다가 놓고 그것을 해석하게 한다. 중국어 작문도 중국인이 써 놓은 문장을 자기가 먼저 해석한 다음 그 해석문을 문제로 내, 거꾸로 다시 중국어로 작문케 하는 것이다. 그만큼 남의 나라 말은 제대로 알기 어렵고, 틀리지 않고 써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자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의 특권 의식과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명한 세상을 원하는가. 열린 세상을 원하는가.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원하는가. 그러면 한자를 버려라. 한자를 교육만 일찍 시키고 교육만 열심히 시키면 누구든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글이라고 제발 우기지 말자. 국민의 95 % 이상 깨우칠 수 없는 글자라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려라. 세상이 바뀌었다. 오늘날은 우리 고유의 토박이말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고, 그런 글을 쓸 줄 알아야 지식인이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까. 거의 없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우리 토박이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조차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우리의 우리말 교육이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글짓기를 중심으로 많은 토박이말들을 이용해 말글살이를 하도록 가르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법 교육이나 입시 위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교육만을 계속해 온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를 쓰던 과거에는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데 정력을 쏟다 보니 실제로 말하고 글쓰는 교육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자로 쓰여진 글이란 것들이 현실의 입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우리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힌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한자를 하나도 모르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말을 더 술술 잘한다. SBS<좋은 세상 만들기>를 보라.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도저히 우리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말들을 아무 막힘 없이 술술 하신다. 오히려 한자께나 배웠다는 노인들이 억지로 문자 좀 쓰려 떠듬대는 바람에 보는 이까지 불편하게 하곤 한다. 이젠 우리말을 제대로 듣고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우리말 교육의 정열을 모아야 할 때이다. 한자 같은 글자를 익히는 데 정열을 쏟고 있을 때가 아니다. 글자를 익히는 것은 한글 하나로 간단히 끝내고 이제는 한글을 이용해 어떻게 우리말을 제대로 부려쓸 것인지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자 한 글자를 배울 시간에 우리 토박이말 하나를 배우는 것이 진정한 우리말 교육이 아니겠는가.

한글은 앞으로 우리 겨레의 말글살이를 이끌어 가기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연모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말글 정책은 한글만 쓰기로 단단히 굳히고 이 점에 대해선 다신 거론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한글만 쓰기를 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그때그때 우리의 역량을 모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쫓겨나는 한자어의 공백을 재빨리 메우기 위해 우리 토박이말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말들을 캐내고 다듬고 가꿔 나가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한글 자체의 개선과 발전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한글 자체의 발전 문제만 해도 할 일이 많다. 한가하게 한자병용 논란을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통일을 대비해서도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분명한 사실은 한겨레가 세계 문화에 기여하고 세계 문화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면 한글은 그 맨 앞자리에 자리할 것이란 점이다.

맺음말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책 당국은 한자병용 방침이 지금 국민의 반대에 부딪쳐 있지만, 요 시기만 넘기면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국민들은 늘 그때만 떠들썩하지 일단 그 시간만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존재니까 하면서 말이다. 한자병용에 대한 반발도 배타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문화관광부는 문화 독단에 빠져 있다. 문화 독단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근거가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굳이 그럴듯한 근거를 찾는다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께서 좋아하시는 일이라는 점일 것이다. 놀라운 근거다. 참 현실적인 근거다. 아직도 위만 보고 일을 하는 모양이다. 국민은 여전히 눈에 보이질 않는다.

한글만 쓰기는 결코 우매한 사람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말을 가장 사랑하고, 우리말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만큼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들은 내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말을 좀더 풍성하고, 좀더 아름답게 가꿔 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의 노력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선 안 된다. 우리 겨레가 새털 같은 한글 날개를 달고 21세기를 향해 날아오르려 하는데 자꾸 바지 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 말라.

한글병용 방침을 마땅히 철회해야 한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고 공휴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글병용에 대한 반발을 얼버무리는 도구로 한글날을 이용하지 말라. 속보이는 일 아닌가. 국민을 더 이상 무시하면 국민의 힘이 어떤 것인지 곧 보게 될 것이다.

이제 21세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한글로 새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 역사는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글로 열어 가는 우리말의 역사는 우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누리마로'란 말을 아는가.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21세기 우리 한겨레가 한글을 온 누리에 퍼뜨려 우뚝한 누리마로가 돼야 하지 않은가. 꿈꾸는 이여, 한글의 날개를 펴라. 누리마로의 힘찬 날개를.

마지막으로 김 정섭 님이 쓰신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의 머리말로 이 글의 맺음을 갈음하고자 한다.

「사람다운 삶과 겨레다운 삶, 그리고 주인 되는 삶을 누리면서 앞선 나라 사람들과 어깨를 겯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려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겨레 얼이요 겨레 줏대요 겨레 문화다.

겨레 얼을 살지게 하는 기틀은 겨레 문화고 겨레 문화가 자라는 텃밭은 겨레말이다. 일찍이 먼저깬이[선각자]들이 '한글만 쓰기'와 '쉬운 말 쓰기'를 펼쳐 온 까닭이 여기에 있고, 이제 다시 '우리말 쓰기'를 내세운 것도 이런 뜻에서다.

어떤 이는 겨레말을 쓰고 싶어도 없어서 못 쓰고, 한문자와 한자말을 버리면 말글살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겨레말은 어렵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오천 년을 한결같이 겨레말로 살아온 우리다. 겨레말이 없을 턱도 없고,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다면 어려울 까닭도 없다. 오랫동안 한자말에 억눌리고 일본말에 짓밟히고 서양말에 밀려 우리 말살이에서 멀어진 옰이다.

그 옛날 겨레말 한 가지로 옹근 삶을 누리던 모둠살이에 중국글자가 들어오면서 우리 겨레는 문자를 쓰는 양반과 겨레말을 쓰는 상놈으로 위아랫물지고 겨레 얼이 흐려져서 겨레 삶은 중국 문화 종살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뒤 왜놈들과 손잡은 든사람들[지식층]이 일본말글을 앞세워 힘과 돈을 독차지하니 마침내 줏대마저 꺾이게 되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한자말과 일본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롭게 몰아친 서양 바람에 휘둘리어 오늘날 나날말[생활 용어]은 겨레말 얼굴에 한자말 몸뚱이, 일본말 팔다리, 그리고 서양말 옷을 입은 몰골로 바뀌기에 이르렀다. 중국닮기, 일본본받기, 서양흉내내기에 매달려 온 옰이다.

나라말은 나라 앞날을 여는 연모요, 겨레 삶을 가꾸는 바탕이다. 따라서, 나라말 자리에서 쫓겨난 겨레말을 찾고 갈고 닦아서 제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 나라말 텃밭을 차지하고 있는 남의 말을 솎아 내어 겨레말이 자라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남북한 말글살이가 달라졌다고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말다듬기에 나서야 하고 그 열쇠는 겨레말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세종 큰임금께서 한글을 펴신 오백쉰한 돌을 맞이하여 말글살이 속에 켜켜이 스며 있는 종살이 얼룩을 씻어 내고, 나날살이[일상 생활]에서 흔히 잘못 쓰는 말글을 바로잡아 겨레 얼을 맑히고 잃어버린 우리말을 되찾아 겨레 줏대를 세워서 겨레 문화를 꽃피우는 일에 작은 디딤돌을 놓는 마음으로 이 사전을 펴낸다.

1997년 10월 9일

우리말 바로 쓰기 모임

김 정섭」

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last edited 2009-04-04 03:19:11 by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