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

이 글은 녹색평론 통권 제 85호에서 뽑아 실은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서 자유로운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 멀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싣는다. – 2005년 12월 20일, 직지지기 김민수

-- 이계삼1

지난 10월 28일 저녁, 나는 밀양시청 서쪽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날은, 온 나라의 농민들이 정부의 추곡수매 중단과 쌀협상안 국회비준에 대하여 추수한 나락을 모아 쌓아놓고 항의하기로 기약한 날이었고, 밀양시 농민회도 밀양시청 앞 마당에서 3천여석의 나락을 쌓아놓고 농성에 들어간 날이었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시청 청사의 커다란 출구에서 퇴근하는 공무원들의 대열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금요일 저녁의 흥분이 한껏 서려 있었다. 그들은 끼룩대면서 날아가는 철새들처럼, 삼삼오오 재잘대면서, 서둘러 시청 청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뒤이어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승용차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저녁식사를 위해 배달된 국밥 뚝배기들을 나르는 농민회 회원들 뒤로 시청 앞마당을 빙 둘러싼 나락섬들이 전투를 위한 진지처럼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중간에 ‘공무원 노조 밀양시지부'의 로고가 박힌 농성천막이 있고, 그 양옆으로 격문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문득, 나락섬을 진지삼아 농민들이 시청 청사에 포진한 공무원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모습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고, 피식 계면쩍게 웃어보았다. 내 옆에 서 있던 전교조 선생님 한분이, "저기에다가는 총을 쏴도 안 뚫릴긴데... "라며 싱긋이 웃는다. 혹시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삭발한 머리에 머리띠를 두른 농민회장과 몇명의 농민회원, 지원 나온 젊은 청년들이 뚝배기를 나르는 풍경 뒤로 공무원들은 그저 유유히 퇴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열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곧이어 시청 청사 주변에서 쿵쾅거리는 앰프 소리가 퍼져 올랐다. 근처 어느 여학교에서 가을축제 행사로 가요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여학생들의 괴성이, 사회자의 찢는 듯한 열광이 뒤엉켜 웅웅거리고 있었다.

국밥 한그릇을 같이 나누고, 전교조 밀양지회에서 마련한 투쟁지원금을 전하고, 함께 방문한 시민단체 분들이 천막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나는 먼저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자전거를 몰고 시내를 거쳐 집으로 오는 동안 시내 이곳저곳을 뜻없이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다. 인구 11만, 별다른 산업시설도 없이 열한개 읍면 지역 농민들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도시의 시내는 여느날처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히고 제법 흥청이고 있다. 10월의 바람이 차갑다. 올 5월 말, 강변 둔치에서 커다란 솥을 몇개나 걸어놓고, 소머리를 고아가며 막걸리에 소주에 불콰하게 취해 춤추고 노래부르며 떠들썩하게 치렀던 밀양시 농민회 창립대회가 떠올랐다. 면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시내로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들,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연단에 오른 '높은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야유를 하고, 뒤로 돌아앉고, 조롱하며, 웃고 떠들었다. 보수적인 도시 밀양에서 수십년간 쌓아두었던 울분을 어쩌면 수십년 이래 처음으로 그렇게 마음껏 터뜨렸건만, 불과 몇달 뒤, 이제는 사망선고를 받아들고, 시청 앞마당에 애처롭게 농민들은 나앉아 있다. 몇달 전, 그들이 하룻동안 누렸던 그 짧았던 해방의 기억 때문에 나는 슬펐다.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켠다. 저녁 뉴스가 오늘 낮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들을 비춰주고 있나. 나락을 집어던지고, 관공서 정문으로 돌진하는 농민들과 쭈글쭈글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머리끈을 묶고서 어설픈 종주먹질을 하며 구호를 외치는 장면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몸짓은 언제나 안쓰럽고 마음 아프다. 모두가 오늘 하루의 낮동안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으리라. 일기장을 쓴지 오래되어 기록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지만, 무언가 쓰고픈 충동에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백지 위에 나는 이렇게 끄적거려보았다.

"2005년 10월 28일, 쌀협상안과 추곡수매 중단에 항의하는 전국 농민 시위의 날. 지난 수십년간 자신의 어머니를 목졸라 온 대한민국은 오늘 드디어 '확인 사살'하다."

시청 앞마당에 쌓인 나락섬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퇴근하던 그 공무원들처럼 그렇게 모두가 오늘 하루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오늘 전국에서 벌어진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많은 곳에서, 집회를 하면서, 연설을 하다가, 연설하는 사람들과 듣고 있던 농민들이 울었다고 한다. 기가 막혔을 것이다. 예정된 수순처럼 다가온 날이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온 이 시간은 그저 서러움과 기막힘 그 자체였으리라.

나는 오늘 만났던 저 농민들의 자식을 가르치는 교육노동자다. 대한민국의 여느 학교가 다들 그러하지만, 지리멸렬한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것은, 어른들의 세상이 이미 틀렸다면 아이들에게서라도 무언가 다른 희망을 느끼고 싶다는 기대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고유한 그들만의 선함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자갈돌처럼 웃고 구르는 그들의 생기가 이 메마른 나날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흙의 신앙'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의 기억'을 정초할 바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도 '기억'도 없는 곳에서 가치로운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진공관처럼 공허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 물리적으로 살아있으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들의 집적. 나는 나의 가장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그렇게 느낀다. 이 표현은 결코 가혹하지 않다.

밥, 구원, 흙의 신앙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시대가 사람을 빛어낸다면, 우리는 이 신앙 없는 시대의 가련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깃들어 사는 이상,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시간대 위의 어느 한 점에 서 있게 된다.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물리적으로 영원히 살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지금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오직 '알 수 없을' 뿐이다. 이 견고한 진리.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며, 생과 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바깥을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를 살면서 '저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한 개체에게 죽음이란 말하자면, '있음'이 어느 순간 '없음'으로 화(化)하는 것일진대, '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이 기막힌 변화를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생에 집착하고 생을 사랑할수록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나 또한 저렇게 죽어갈 것이라는 공포가, 함께 자라난다. 결국 이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 - 신앙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종교(宗敎) - 으뜸가는 가르침 - 라는 이름으로 이 신앙의 체계를 일구어왔다. 이것은 생과 사의 신비에 맞닥뜨린, 인간 존재의 가장 치열한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다. '놀랍게도' 세상 모든 종교들은 하나같이 '저 세계'는 '이 세계'의 앞 뒤, 양 끝에 따로 잇닿아 있지 않다고 가르켯다. '저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생산과 노동, 이 모든 억조창생들과의 관계맺음이 결국 '저 세계의 전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선한 업(業)은, 구원은, 영원한 삶은 바로 이 현재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기가 바로 '빵'이자 '포도주'인, 육화된 진리라고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더불어 빵을 떼었고, 그곳이 곧 '하늘나라'임을 선포했다. 공자는 가장 그리운 모습을 '불빛 아래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는, 대동(大同)의 사회'로 표현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므로 사람은 곧 밥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밥 한 그릇에 세상의 이치가 다 담겨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빵'이, '밥'이 부족했던, 이른바 '낮은 생산력'의 징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숙명적인 진리임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진리에 고개 끄덕인다면, 이제 이런 질문들이 생겨난다. 밥을 위한 노동, 밥을 위한 희생, 밥의 나눔, 거기에 깃드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우정과 사랑, 이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이 밥을 위해 살지 않고 휴대폰과 컴퓨터와 자동차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어떤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발전된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흙의 신앙과 인간의 교육

그러므로 교육은 결정적인 영역이다. 어른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밝지 않다. 이미 이 세상이, 이 질문을 전혀 낯설게 느끼는 지경에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가능케 하는 '기억의 물적 토대'가 거의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날마다 느끼는 것이 그러하다.

태풍 '나비'가 지나간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숨을 죽이던 지난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고교 1년생인 우리 반 아이들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는다는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종례시간, 이미 가방을 둘러메고 담임의 "종례 끝"이라는 신호만을 기다리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실은 나도 오늘 아침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태풍이 다가온다고 하니 너네들 부모님 농사가 좀 걱정이 된다"며 운을 뗀다. 아이들은 '좀 길어지겠군' 하는 눈치로 슬금슬금 엉덩이들을 붙인다. 나는 일년 농사의 수확 직전에서 태풍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운운하면서 어쭙짢은 훈시를 했다. 피시방으로 쪼르르 달려가지 말고 바로 집에 가서 급한 일도 좀 돕고 어쩌고 하면서 그리고 나는 30명 우리반 아이들 중에서 부모님이 농사짓는 아이들을 하나씩 호명해 보았다. 그리고 무슨 농사를 하시는지를 물었다. 누구는 대추, 누구는 사과, 또 누구는 낙과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불현듯 침울해 하기도 하였다. 한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너네 아버지는 뭐 하시냐?" 내 물음에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교실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저거 아부지 짓는 농사도 모르네" 하면서 금세 얼레리꼴레리하는 분위기가 번졌다. 그 아이는 상기된 채로 약간 더듬으며 말했다. 비닐하우스를 하시는데, 해마다 작목이 바뀌어서 올해는 무얼 심으셨는지 아직 잘 모른다면서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새벽밥 말아 먹고, 봉고차 타고 학교 와서 학교수업, 야간자율학습, 학원까지 마치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가는데, 휴일날은 밀린 잠 벌충하고, 컴퓨터하느라 들판에 나가본 적이 없을 텐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농촌지역 고등학교라서 상당수 아이들이 농사짓는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녹색평론을 비교적 열심히 읽는 편인 내가 수업시간에 가끔 식량자급률 이십 몇퍼센트 운운하면서 GMO와 수입산 먹거리로 위협받는 우리 식탁을 이야기해도, 재작년 밀양의 어느 면지역에서 출생한 신생아가 3명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농촌의 죽음이 결국 큰 재앙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아니 좀더 솔깃하게 앞으로 유기농이 새롭게 각광받는 고소득 직종의 아이템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덤덤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농업과 농촌은 가능성 제로의 '게토'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뿌리내리는 삶의 가능성을 무엇보다 그들의 부모가 완전히 차단해놓고 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 세대의 퇴장과 함께 우리 농업이 사망에 이를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조직적인 교살 음모 속에서 수십년간 가위눌린 그들은 자기 아이들을 마치 위엄지역에서 대피시키듯 도회적 삶의 어느 한 구석자리에라도 편입시키기 위해 가열찬 교육열을 불사르고 있다. 죽음에 임박한 소나무가 제 몸에 주렁주렁 솔방울을 매어달듯이 그들의 몸부림은 절박하다. 이제 이 아이들도 학교를 졸업하면 막막한 도회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비정규직' 전사로 살아갈 것이다. 탈근대 운운하기 좋아하는 유식한 사람들이 잘 쓰는 말로는 '노마드'(유목민)가 되겠지만.

흙의 신앙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 아이들 또한 뿌리뽑힌 삶으로 떠돌수밖에 없으리라는 비감한 느낌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30여년 전,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경북 산골 마을의 이오덕 선생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때 다짐처럼 정말로 농부가 되었던 그 시절의 아이들은 지금 우리 농업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가 되어 지금도 마을의 '막내'로서 마을회관에 모인 60대, 70대 어르신들의 막걸리 시중을 들고 있다. 수천년 이래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자연적인 순환의 고리가 이제 막끊어지려는 즈음이다. 그 시절의 아이들의 감각과 정서는 이제 곧 화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반복되는 실패'일 지라도 '기억을 향한 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적 같은 그 시절이 남긴 '인간다움의 기억' 말이다.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픈 안 비에(보여)줬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재흠, 1969. 10. 4

청개구리가 나무에 앉아서 운다
내가 큰 돌로 나무를 때리니
뒷다리 두개를 발발 떨었다
얼마나 아파서 저럴까?
나는 죄될까봐 하늘 보고 절을 하였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백석현, 1969. 5. 3

내 어릴 적 못물골 골짝에 예닐곱살 먹은 일근이란 아이가 살았는데, 하루는 우리 동네로 놀러 나온 거야. 늘 산골에서 혼자 식구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심심해서 나왔겠지. 동네 애들하고 비석치기 하다가 싸움이 붙은 거야. 못물골 일근이하고 우리 동네 춘근이하고. 어린아이들 싸우는 것 보면 몸으로 엉겨붙어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잖아. 입으로는 온갖 욕을 다하잖아. 그래 춘근이가 먼저 욕을 하기 시작한 거야. "야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이렇게 춘근이가 한바탕 욕을 끌어붓자, 멍하니 듣고 있던 일근이가 맞서 대거리한다는 것이 이러는거야.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못물골 일근이는 그때까지 욕을 몰랐던 거지. 늘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소나무, 대나무, 밤나주, 노루, 산토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구자행 할머니 구술,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1년 4월호에서 발췌

오줌을 누려고 바지춤을 끌렀는데 변소 위 해바라기가 제 '꼬추'를 보려는 것 같아 재빨리 해바라기를 등지는 아이, 그 아이는 해바라기를 제 '꼬추'를 보려는 동무쯤으로 여겼나 보다. 무심결에 벌인 장난 때문에 발발 떠는 개구리를 보고 불현듯 두려움을 느껴서 하늘에 대고 절을 하는 아이가 있다. 상대 동무의 쌍욕에 기껏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하는 '욕'으로 응대하고 말았다는 산골아이의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이 세 편의 글을 음미하면서 '동심'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깊은 평화를 느낀다. 이것은 불과 한 세대 이전의 아이들이 남긴 기억이다.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해바라기는 제 동무였고, 하늘에 죄를 비는 본능이 있었고, 나무 이름으로 겨우 욕을 지어내는 어린 짐승 같은 천연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경과하면서 "사람은 밥이니,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아이들은 정말로 휴대폰이 되었고, 컴퓨터가 되었고, 자동차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휴대폰과 컴퓨터는 도구가 아니라, 제 오관(五官)을 대체하는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 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 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된 이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소란스럽고 무례하며, 폭력적인 이 모든 것들을 아이들은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 것일까. 만약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반성적인 지성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흙에서 땀흘리는 삶을 짓밟고서 구축한 이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가장 악마적인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아이들을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구체적인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국가수준의 교육과 정을 농(農)적인 요소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근대 교육 태동기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복무하는 교육의 폐해를 내다보았던 교육사상가들은 '노작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농적인 교육'의 가치와 방법론을 정립해놓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노작교육' 하면 실업계 학교를 떠올리고, '전원 학교' 하면 귀족학교밖에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일은 이제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학교의 조그만 귀퉁이라도 좋고, 배후의 농촌에 있는 실습지라도 좋다. 아이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진 산업사회에서 유기농업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쿠바처럼 초등·중등·고등교육의 모든 과정 속에 농업 관련 이론과 실습을 의무화해야 한다. 구 소련 시절 국가가 개간하여 개인에게 공여한 소규모 개인농장인 러시아의 '다차'의 성공적인 사례를 우리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소유의 공유지나 노동력이 노쇠하여 경작이 불가능한 땅을 매입하여 기업이나 주민조직, 학교에 분양함으로써 주 5일제의 실시로 늘어난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흙 속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또하나, 젊은 남성에게 부과되는 병역의무 수행의 한 영역으로 농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선 경우처럼 국가 소유의 공유지나 일할 사람이 없는 토지를 국가가 위탁받아 원하는 젊은이들을 일정한 교육을 받게 한 후에 직접 그 토지를 경작케 하는 것이다. 이미 조선시대 군역제도 속에도 정군으로 징집되어 떠난 장정의 노동력을 보충역 개념인 '보인'이 벌충해주었던 제도가 있었다. 총을 들기를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 땀흘리며 노동하는 삶을 배우고픈 젊은이들로 하여금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는 것은 국가가 민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다. 농촌에서 2년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땀흘린 그들은 '흙의 신앙'을 내면화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 농업을 되살릴 젊은 일꾼이 될 것이다.

'전정한 현실'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가끔 '미래'에 대해서 물어볼 때가 있다. 예정된 진도에서 벗어나 '삼천포'로 빠져서 다도해를 정신없이 헤매는 내 수업은 종종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에너지 문제, 전쟁, 기아, 인간복제 등등의 이 세계의 절실한 문제들을 화제로 삼기도 한다. 어설픈 '생태학'을 전파하는 내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과연 이 세계가 얼마나 지탱할 수 있겠니?"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만다. 나는 대학 진학, 즉 스무살로 딱 가두어진 아이들의 시야를 그들의 마흔살, 예순살까지 확장시켜보려는 것이다. 그때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뜻밖에도, 교과서나 주류 미디어가 선전하듯이 테크놀로지가 이 모든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그리고 이 약육강식의 힘의 질서가 완화되어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그들의 세상에 대한 직관적인 판단력이 놀랍기까지 하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대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대를 댄다. 30년을 대는 아이도 있고, 20년을 대는 아이도 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을 거라는 '근거없는 낙관'을 가진 아이들도 많다. 그러면 나는 곧장 묻는다. "니들이야 괜찮다 쳐도, 니들 다음 세대는 어떡할 거냐"고. 아이들은 "결혼 안할 거예요", "결혼은 하지만 자식은 안 낳을 거예요"라고 서슴없이 답한다. 분명 별 뜻없이 생각나는 대로 답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생각없는' 즉답 속에 그들 나름의 이 세계에 대한 절망이, 대안의 부재가 복재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이런 체험은 나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교사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흙의 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을 '흙'으로 되돌려놓지 않고서는, 그들의 불안정한 자의식도,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감도, 그들 자신의 비전 없음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좌파 논객이 단호하게 말한 것처럼, "이렇게 아이들을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그렇지만 이 절박한 현실 앞에서 '어른'들은 너무나 한가롭다. 이 모든 진단을 '취급도 하지 않을' 정책엘리트들이나 주류 언론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속해서 활동하는 교원노조는 그래도 '참교육'과 '교육희망'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건만, 지금은 '교원평가제'를 두고 교육당국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싸움의 의미를 나인들 어찌 모르겠냐만, 나는 '흙의 신앙'을 멀찍이 놔 두고 갑론을박하는 교육의 이 모든 논의들이다 '그게 그거' 같다. 나는 잘 모르겠다. '흙의 신앙'은 비현실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당장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일까. '흙의 죽음' '땅의 죽음' '밥의 죽음', 나에게는 이보다 더 절박한 현실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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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_갈래, 녹색평론


  1.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이 글은 원래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특별기획 '우리사회의 대안을 찾아서' 중 농업관련 시리즈에 발표된 것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 (1)

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 (last edited 2011-11-16 21:07:00 by MinsooKim)